근현대사 역사탐방 29탄
1979년 12·12 쿠데타와 5·17 쿠데타 이후 헌법 개정을 통해 탄생한 대한민국의 다섯 번째 공화국이다. 10·26 사건으로 새로 등장한 이른바 신군부 세력은 1979년 12월 12일 병력을 동원하여 군권을 차지했고(12·12 쿠데타),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정권을 장악했다.(5·17 쿠데타) 신군부는 이에 항거한 광주 민주화 운동을 비롯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7년 단임의 대통령을 간접 선거로 선출하는 헌법을 공포했다. 제5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전두환이 선출됐다. 정의 사회 구현, 복지 사회 건설 등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제1야당으로 떠오르자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욱 거세어졌으나 4.13 호헌조치, 즉 현재의 5공헌법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함을 정부차원에서 밝힘으로서 국민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고 이는 6월 항쟁으로 이어진다. 더이상 호헌을 지킬수 없다고 판단된 제5공화국 정권은 당시 민정당 대표였던 노태우를 앞세워 6.29 선언을 발표하게 하고, 이를 전두환이 수용하는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사실상 국민의 요구에 굴복했다.
4월 13일 5공 정부는 ‘5공 헌법에 의한 대권이양’을 골자로 하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 이를 계기로 야권·재야가 재결합하고 학계·종교계 등에서도 이에 반대하는 시국선언·농성이 잇달았다. 5월 27일 각계를 망라한 각종 단체가 총결집된 ‘민주화추진 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어 ‘군사통치 종식’과 ‘민주정부 수립’을 슬로건으로 대정권투쟁에 돌입했다. 국민운동본부는 ‘6·10 민주화 장정대회’를 개최, 6월항쟁의 대막이 올랐다. 이를 불법집회로 규정한 5공 정부는 무한정한 공권력을 투입하여 원천봉쇄를 시도했으나 서울·부산·광주·인천 등 전국 18개 도시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고 시민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민주정의당의 대통령 후보 노태우에 의해 발표된 6·29 민주화선언에 의해 제5공화국 헌법이 개정되고, 새 헌법에 따라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노태우가 제13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88년 2월 취임하면서 제5공화국은 종료됐다.
1982년 북한과 ‘잠정협정’
‘민족화합 민주통일방안’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
1983년 김영삼은 23일간 단식투쟁
1984년 9월 수해 북측의 식량지원와 적십자회담 본회담
1985년에는 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의 교환방문
1985년 9월 이산가족이 서울과 평양 방문
1985년 남북정상회담 제의
통일민주당을 창당 - 김영삼
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와 2.12 총선 돌풍
5월 27일 ‘민주화추진 국민운동본부’가 결성
‘6·10 민주화 장정대회’
제5공화국 헌법이 개정
제13대 대통령 선출 와 민주정의당
1988년 2월 취임
1988년 광주청문회에서 성명서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이 대통령 선출방법을 둘러싼 개헌논쟁을 종식시키고 기존 헌법을 고수하겠다고 발표한 특별담화 내용으로 당시 전두환대통령은 "평화적인 정부이양과 서울 올림픽이라는 국가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국력을 낭비하는 소모적인 개헌논의를 지양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제5공화국 헌법으로 1988년 2월 정부를 이양한다는 것과 그에 따른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 및 대통령선거를 연내에 실시하고 개헌논의를 서울 올림픽 대회 뒤로 미루겠다고 밝혔다. 체제유지 의도를 내포한 이 조치에 예상되는 반발과 국내외적 반응을 고려해 정부는 지방자치제의 단계적 실현을 시사했다.
김성기은 "개헌논의를 빙자해 실정법을 위반하는 행위는 엄단하겠다"고 밝히고, 대검찰청은 "모든 시위·농성 등의 집단행동이나 성명서 발표뿐만 아니라 옥내집회도 사회적 불안을 야기할 우려가 있으면 단속하고, 나아가 '문제인물과 단체 등의 동향을 철저히 파악해 사전대처'하라"고 지시했다.
이 조치가 발표되자 개헌을 요구하던 각계각층의 국민은 이에 반발해 호헌반대 서명운동 및 삭발·단식 등 다양한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최초에는 종교계를 중심으로 호헌반대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이 조치에 대한 반대의 물결은 당시 야당이던 통일민주당과 재야세력이 결합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의 결성(1987. 5. 27)으로 나타났다. 결국 이 조치는 6·29선언을 통해 철회되었다.
1987년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대한민국에서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다. 6월 민주항쟁, 6.10 민주항쟁, 6월 민주화운동, 6월 민중항쟁 등으로 불린다. 대통령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는 간접선거를 골자로 한 기존 헌법에 대한 대통령 전두환의 호헌 조치와, 경찰의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되어 6월 10일 이후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하였고, 이에 6월 29일 노태우의 수습안 발표로 대통령직선제로의 개헌이 이루어졌다. 2007년 6월 10일 정부 차원의 첫 기념식이 열렸다.
1980년대 들어 정부의 자율·민영화 정책, 대기업 집중적인 지원, 노동운동 탄압 등은 대기업의 자본 축적을 강화시켰다. 한편 경제개방의 일환으로 추구되었던 개방농정은 농촌경제를 악화시켰다. 그결과 자본가와 근로자·농민 간의 사회적 갈등은 심화되었고, 나아가 1985~87년 3저(저유가·저금리·저달러)호황 아래에서 이룩한 고도성장의 결실도 서민층에게 제대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러한 경제적인 배경은 정치적 상황과 결부되어 6월 10일 민주화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6·25전쟁 이후 반복되면서 증폭되어왔던 독재와 민주 세력 간의 주기적 충돌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양자의 대립을 더욱 첨예화시켰다. 이러한 대립은 1985년 후반 이후 개헌정국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났다. 제5공화국 정부는 내각책임제를 통한 권력의 유지를 모색한 반면, 민주세력은 민주헌법쟁취와 직선제개헌을 중심으로 이에 맞섰다. 그러나 권력의 유지가 불가능해진 제5공화국 정부가 4·13호헌조치로 되돌아가자 이에 분노한 민중들이 직접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것이 6월민주화운동의 중요한 배경이 된 정치적 상황이었다.
6월민주화운동은 지속적으로 강화되어왔던 민주세력과 시민의 역량에 의해 권위주의적 제5공화국 정부의 권력유지 시도가 저지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직선제의 수용 이외에 민주개혁의 전망을 확실하게 얻어내지 못한 한계 또한 간과할 수 없다.
1987년 1월 14일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2월 7일, "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
3월 3일, "박종철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
4월 2일, 건국대학교 사태 등 시국관련 구속학생의 징계철회 요구하며 철야 농성
4월 13일, "개헌논의 유보"를 내용으로 특별담화 발표(4·13 호헌 조치).
4월 14일, 각계 인사의 비판 시국 성명 발표.
4월 24일, 가칭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 발생 (용팔이 사건)
5월 17일, - 황보영국은 부산상고(현 개성고) 앞에서 분신 사망
5월 18일,명동성당에서 광주항쟁7주년 미사에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은폐 폭로
5월 23일, "박종철 고문살인은폐조작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 결성 및 6월 10일에 규탄대회
5월 26일, 전두환 대통령, 노신영 국무총리를 경질하고 이한기로 교체.
5월 27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결성, 장로회 향린교회에서 발기인 대회, "4·13 조치 철회 및 직선제개헌 공동쟁취 선언" 발표.
6월 9일, 연세대학교 이한열, 시위 중 최루탄에 사망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주최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서울주교좌대성당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 개최와 오후 6시 흰 손수건와 서행 경적소리 국민 요청, 명동성당 농성,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의 감사성찬례때 피아노를 연주할 전례 봉사자가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관계자가 경찰의 감시를 피해 교회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배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6월 26일 - 전국에서 국민평화대행진 시위 전개와 넥타이 부대들의 시위 참여
6월 29일 - 노태우이 8개항의 시국수습 내용을 포함한 6·29 선언을 발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와 재야 단체는 즉각적인 개헌작업착수와 양심수 전원석방 및 수배해제를 촉구하는 성명 발표
제6공화국 새 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투표, 1987년 10월,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
당시 김대중 통일민주당 고문과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 1987년 10월 분열로 단일화 실패
민주세력의 통합이 불발와 패배, 제13대 대통령선거,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가 당선
6월 항쟁은 군사적 독재 정치가 종식을 고하는 계기, 자주·민주·통일이라는 현대사의 좌표가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각계각층의 민주적인 시민운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7·8·9월의 노동자 대투쟁은 향후 노동자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1926년, 조선 마지막 임금 순종의 장례 때 6.10 만세운동이 일어난 날이기도 하다.
2007년 한국일보의 설문조사에서 대학생 중 10명 중 6명은 6월 항쟁을 잘 모르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와 더불어, 6월 19일 오전 전두환은 군 투입 준비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미국의 반대로 유보됐다.
이기문 (1953년)
김은호 [金殷鎬]
이기택
통일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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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天主敎正義具現全國司祭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天主敎正義具現全國司祭團, Catholic Priests' Association for Justice, CPAJ)은 정의를 기초로 하여 인간의 존엄과 인권을 신장하고,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평화통일에 기여함을 표방하는, 한국의 로마 가톨릭교회 신부들의 기독교 사회운동단체이다. 1974년 천주교 원주교구장이었던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자, 이를 계기로 결성되었다. 이후 1970년~1980년대 대한민국의 군부 독재하에서 유신헌법반대운동, 긴급조치 무효화 운동, 민주헌정 회복요구, 광주 민주화 운동 등의 반 군사독재운동을 벌였고, 가난한 이들의 생존권 확보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 당시, 서울대학교 학생이던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을 폭로하여 6월항쟁의 계기를 마련했다. 이후에는 민족의 평화통일운동, 국가보안법 폐지운동, 생명평화 운동, 북조선 주민 돕기 운동, 반전평화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2007년 10월 29일, 김용철 변호사(전 삼성그룹 법무팀장)와 함께 삼성 그룹의 비자금 조성 의혹 사건 폭로, 2008년 미국소 수입 논란 당시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집회를 갖고 국민존엄을 선언하였다. 국가권력의 회개를 촉구하는 비상 시국회의 및 미사를 개최하고 `미국산 쇠고기 재협상'을 강력히 촉구했다.
민족의 평화통일과 국가보안법 폐지운동
생명 평화 운동
새만금 갯벌 살리기 운동
북녁동포 돕기운동
반전 평화 운동
불평등한 소파개정 운동과 반전평화 운동
천주교 평신도들 중 일부에서는 이들에 대한 반발도 존재하며, 사제단은 사제들 조직이지만,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 인준을 받지는 못했기 때문에 대한민국 천주교회의 공식 조직이 아니며 교회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는다. 1970 ~ 80년대 군부 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있으나, 현대 들어서는 정치적 편향성에 대해서 지적되기도 한다. 특히 이명박 정부 들어서 미국 소 수입 반대 집회나, 4대강 사업 반대 등의 활동을 벌이면서 보수성향의 언론과 단체들의 비판을 받기도 한다. 반면에 진보주의 성향의 언론, 단체들은 사제단의 이런 행동이 국민과 함께하는 모습이라며 지지하고 있다.
사제단의 친북 성향에 대한 주장도 꾸준하게 제기되고 있다. 문정현, 문규현 신부 방북과 1989년 평양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임수경을 판문점 귀환 동행, 2010년 5월 북한의 천안함 침몰사건 , 2008년 대한민국의 촛불 시위, 이회창 자유선진당 대표 역시 사제단의 친북성을 문제제기, 문정현 신부는 2002년 효순이·미선이 사건으로 미군기지 이전 반대 운동으로 비판이 있다. 사제단 구성 초기 타파의 대상이었던 군사 독재 정권이 종식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지속적인 정치적 활동을 계속하는지, 또한 그 방식이 과거 민주화 시대와 유사한 시위, 투쟁의 형식으로 나타나야 하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
2001년 11월 KAL기 폭파사건 의혹제기
컴퓨터 조작설 해프닝
2010년 4대강 사업 관련된 정진석 추기경에 대한 항명
2009년 사제 성관계 의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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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민통련) (1985년)
1985년 3월 29일 민주통일국민회의와 민중민주운동협의회가 통합하여 결성된 대한민국 시민 단체이다. “운동의 통일, 통일을 바라는 민중의 뜻을 받들어 두 단체가 시대적 사명감으로 자발적으로 통합했다”고 통합 선언문에서 밝히며 1980년대 중반 재야 민주세력 결집체로 등장했으며, 의장은 문익환이였다.
1984년 결성된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와 민주통일국민회의(국민회의)는 상향식 형태로 민중 운동의 대표성에 있어 서로 경쟁적 관계라서 두 운동체를 서로 통합코자 하였다. 이에 민민협 내 민청련, 개신교 운동단체들은 당면 연대운동의 목표를 민중역량 강화에 두고 부문운동의 독자성을 보장하는 협의체를 주장한 반면, 국민회의 측은 반독재 투쟁에 효율적 전개를 위한 단일 지도체제의 연합체적 조직건설을 주장하였다. 당면한 통합의 필요성에 의해 국민회의 안을 기본으로 통합을 이루는 연합체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1985년 2월 26일 민민협 중앙위원회에서 범 민주세력 통합을 결의하였고, 2월 27일 국민회의 확대집행위원회에서도 통합을 결의하였다. 1985년 3월 29일 통합대회를 개최하였다. 함석헌, 김재준, 지학순을 고문 추대, 의장에 문익환, 부의장에 계훈제, 김승훈 선출하고, 통합선언문을 발표하였다
1985년 3월 민통련 창립부터 개헌투쟁이 본격화되는 9월 전후 시기
개헌투쟁이 본격화되고, 1987년 6월 항쟁으로 6·29 선언을 이끌어 냄
1985년 11월 20일 민주헌법쟁취위원회 결성
1986년 3월 17일 김대중, 김영삼, 이민우, 문익환 등과 함께 민주화를 위한 국민연락기구 결성
1986년 5월 3일 인천에서 개헌추진 결성대회 개최와 장기표의 민주통일 민중운동론
1986년 5월 20일 문익환 투옥와 서울대생 이동수의 분신 투신
1986년 5월 27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결성과 610 투쟁을 선언.
대선투쟁이 마무리되는 1988년 2월까지
1987년 7월 8일 문익환 출옥
1987년 10월 3일 연세대 민주정부수립을 위한 시국 대강연회 개최
1987년 10월 16일 국본주최 시국토론회 개최, 남북한 올림픽 단일팀
1987년 10월 10일 야권의 범국민 단일후보로 김대중 추천
1987년 12월 17일 노태우 후보 승리
민통련 해소
1989년 1월 21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결성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944&page=8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1987년)
1987년 5월 27일, 민통련과 당시 야당인 통일민주당이 주축이 되어 각 사회운동 세력과 종교계, 학생운동 조직 등이 광범위하게 연합하여 결성한 정치 사회 단체이다. 국민운동본부 또는 국본으로 줄여 부르기도 한다. 건국 이후 최대 규모의 반독재 연합전선을 구축함으로써 6월 항쟁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민주화 세력을 결집시켜 정치적 구심체의 역할을 했다.
1987년 6월 항쟁 직후인 6월 29일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자인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여 발표한 특별선언이다. 10·26 사건으로 유신체제 붕괴 후, 신군부 세력은 12·12 군사 반란과 5·17 쿠데타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후 제8차 헌법개정을 통해 제5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제5공화국의 헌법은 간접 선거를 통한 7년 단임제의 대통령이 국가 원수와 정부 수반의 지위를 갖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고, 이 외에도 국회해산권, 비상조치권, 헌법개정제안권 등의 권한을 대통령에게 주어 대통령에게 편향된 권력 구조를 보이게 되었다. 출범 초기부터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혈진압과 언론 강제 통폐합, 정당 활동 제한으로 국민의 민주적 권리를 억압하였다. 천부인권적인 권리를 주장하는 국민의 저항이 계속되었다.
1985년 해방 이후 최초의 동맹 파업인 구로동맹파업, 1987년 1월 박종철이 고문 사망했다. 한편, 6월 10일 전두환 정권은 대통령 선거의 후보로 노태우를 지명하고자 하였다. 시민들은 이 날을 기해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대대적인 시위를 계획하였다. 6월 9일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중태에 빠지자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되었고 6월 10일 전국적인 시위가 개최되었다. 6월 29일 노태우는 6·29 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한다고 발표하였다.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공식 사과도 포함시키려고 했지만 군부의 반발을 우려해 마지막에 철회했다. 6·29 선언문 초안은 박철언 작성했고, 노재봉, 이홍구, 김학준 등이 참여하여 최종 문건으로 완성되었다.
선언 내용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통한 1988년 2월 평화적 정권이양
대통령선거법 개정을 통한 공정한 경쟁 보장
김대중의 사면복권과 시국관련사범들의 석방
인간존엄성 존중 및 기본인권 신장
자유언론의 창달
지방자치 및 교육자치 실시
정당의 건전한 활동 보장
과감한 사회정화조치의 단행
6월 항쟁의 결과 시민들의 직선제 요구를 수용한 것이다. 제5공화국에 대한 국민들의 끊임없는 불신과 저항으로 궁지에 몰린 집권여당의 대표가 발표한 이 선언으로 인해 헌법 개정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제9차 개정헌법이 발의되었다. 1987년 10월 27일 국민 투표로 수립되어, 대통령 선거가 치뤄졌으며 노태우가 제13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제9차 개정헌법은 형식적으로는 헌법의 개정 절차를 따랐으나 실질적으로는 입헌민주주의를 지향하고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는 방법을 변경하는 등 헌법의 제정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변화가 있었다. 한편, 윤치영은 무정부상태로까지 치달을 뻔한 우리나라를 쾌도난마를 끊는 솜씨와 같이 온국민에게 안도의 숨을 몰아쉬게 만들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http://media.daum.net/foreign/others/view.html?cateid=1046&newsid=20080906152717104&p=newsis
http://ko.wikipedia.org/wiki/%EC%9E%90%EC%97%B0%EA%B6%8C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17a2003a
http://www.donga.com/docs/magazine/leesunja/lee-16.html
http://cafe.daum.net/semirae/jEq9/48?docid=1FIlk|jEq9|48|20120817085927&q=6%A1%A429%20%BC%B1%BE%F0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2/10/25/0200000000AKR20121025090600004.HTML?did=1179m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hense8&logNo=90115390559
http://blog.joinsmsn.com/media/folderlistslide.asp?uid=n127&folder=20&list_id=12843913
노태우(盧泰愚, 1932년 12월 4일 ~ , 대구광역시 출생)는 대한민국의 군인 출신의 정치인이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대장으로 예편하였으며, 전두환, 정호용의 육사동기로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12.12 정승화 체포작전 등에 가담했다. 국회의원과 정무장관, 내무부장관을 지냈으며 1988년부터 1993년까지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이었다.
1961년에는 학생군사교육단(ROTC의 전신)의 창설준비요원과 교관을 역임했고, 베트남 전쟁에는 1967년 지구대대의 대대장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1974년 장군으로 진급, 이후 신군부의 2인자로 공수특전여단장, 청와대 작전차장보, 보안사령부 사령관 등을 지냈으며, 1980년에는 국가보위입법위원회 비상대책위원과 상임위원을 지냈다. 예편 후 제5공화국에서 1981년 정무2장관, 대통령 특사, 1982년 체육부 장관, 41대 내무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1985년 민주정의당의 대표최고위원으로 전두환 당시 총재로부터 내정되어 당권 전부를 위임받고 1987년부터 민주정의당의 총재였고 1988년의 대통령 선거에 근소한 표차로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88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정치인 및 정치에 대한 풍자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였으며 중국, 동구권, 구 소련 등 공산권 국가들과의 외교 정책을 추진하였고, 1991년에는 야당과 시민단체의 자치제 부활을 수용하여 지방자치제도를 부활시키기도 했다. 또한 1991년 남북한 UN 동시 가입 결정이 내려지자 보수 세력의 반발에도 이를 강행하였다. 1993년 퇴임 후 1995년 비자금 사건 등으로 연루,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강제 진압과 12.12 내란 음모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구속되기도 하였다. 1997년에 특별 사면받고 복권되었다.
12대 대통령 선거 당시 보통사람임을 강조했는데 이는 후일 그가 비자금을 챙긴것이 서석재, 박계동 등에 의해 폭로되면서 희화화, 풍자화 되었다.
육군사관학교
베트남 전쟁
윤필용 필화사건
10.26 사태
12.12 사태
국가보위입법위원회
민정당 대표
대통령 후보 출마와 정권 중간평가와 경인운하 건설
"나, 이 사람! 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
'민주주의의 양념'
노태우 정부
1987년 12월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
5공 청산 여론 제기로 전두환은 백담사 은둔
6공 황태자 박철언 낙마
5공 청산론과 청와대 민간인 고용
1988년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위하여 1990년 3당 합당을 추진해 90년 3월 민주자유당을 창당
언론 자유화를 추진
재야인사들에 대한 복권과 해금을 단행
1988년 서울올림픽 평화대회추진위원장으로 함석헌 위촉하여 서울평화선언 채택
1991년 장준하 복권
작전 통제권 환수추진과 비핵화 선언으로 평시 작전 통제권을 김영삼의 문민정부 시절에 환수하였고, 1991년 11월 13일 비핵화를 공식 선언했다.
"북방외교"를 추진으로 1990년 소련, 1992년에 중국과 수교, 베트남과는 수교
1989년 일본 히로히토 일왕 장례식에 공식 사절 파견
1989년 3월 지방자치법개정안 통과와 거부권 행사
1988년 7 ·7선언
1991년 남북한이 유엔회원국으로 동시 가입과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의 발표
1992년 9월 민자당 탈당
현재, 소뇌 위축증
일왕 조문단 파견 논란
지역감정 의혹
보안사 민간인 사찰사건
1990년 보안사 민간인 사찰 사건(윤석양 이병 양심선언 사건)은 노태우 정권 퇴진운동으로 보안사를 기무사로 변경되엇다.
광주사태 발언 논란
물태우
92년 대선자금
6·10 민중 항쟁의 뜻을 조건부 수용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고 이를 골자로 하는 6·29 선언을 받아들였다. 이는 권위주의적인 전두환 정권과는 차별화 전략을 시도한 것으로 보이며, 서울 올림픽을 성공리에 개최하여 진행하였고 이후 5공 청문회를 하는 등의 제5공화국의 비리를 근절·청산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1972년 이후 25년만에 민간인 직접 선거로 선출된 대통령이라는 데에는 의미가 있지만 노태우 역시 군인 출신 정치인이고 일각에서는 군인 출신 정치인임을 들어 전두환 정권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평가하기도 하며 5·18 민주화 운동의 진압의 입장에 서 있었다는 것과 제5공화국 출신으로서 5공비리 청산에 미진했다는 것에 한계가 있다.
또한 5공비리 청산에 미진했다는 시각이 있다. 대통령을 소설이나 풍자물에 등장시킬 수 있도록 허용하는 등의 기존의 권위주의적인 질서를 타파하려 노력하였다는 점과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 폐막, 구 공산권 국가들과의 외교노력 면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일각에서는 권위주의적인 질서를 타파하려는 등의 노력을 두고 '물태우'라며 비판하거나 비아냥대기도 한다.
3당 합당으로 현재의 한나라당 계열 정당(당시 민주자유당)에 들어온 김영삼 이전을 군부정권으로 파악하여 군부정권 최후의 통치자로 보기도 한다.
북방외교, 7.7 선언 등은 미국에의 절대 의존적인 외교에 어느 정도 자율성을 부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공공부문의 지나친 확대로 대한민국 경제의 잠재성장성을 훼손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7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대통령을 풍자의 소재로 써도 된다라고 허용, 이때부터 대통령과 정치인에 대한 자유로운 풍자 작품이 나타나기도 했다. 대통령 재직 중 당시 정권에 저항하고 소신있는 판결을 내리기로 유명했던 이회창을 법관직에 복직, 정치 입문을 권고하기도 했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언급금지령을 철회하였고, 강경론 보다는 대화와 타협을 주장했다. 그는 평소에 존경하는 인물로 김구를 지목하기도 했다.
1995년 (제4공화국) MBC 드라마
1995년 (코리아게이트) SBS 드라마
1998년 (삼김시대) SBS 드라마
2005년 (제5공화국) MBC 드라마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8/10/2011081000230.html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5/1961393_6157.html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5/1961300_6157.html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4221048161&code=910100
http://news.donga.com/Column/Kija/3/040102/19990628/74507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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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792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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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1988년)
노태우 정부 (1988년 ~ 1993년)
노태우 정부라는 말은 별로 쓰이지 않고, 일반적으로 제6공화국(약칭 6공)이라고 호칭되고 있다. 여기에서의 제6공화국은 전두환 정권을 제5공화국이라고 부르는 것에 비교되는, 노태우 대통령 집권기만을 말한다. 제6공화국(第六共和國)은 대한민국에서 1987년의 6월 항쟁의 결과로 1987년 10월 29일 대통령 직선제를 핵심으로 한 개정된 민주적인 헌법에 의해 성립되어 현재까지 헌법 개정없이 지속되고 있는 공화국이다.
신군부 출신의 노태우는 6월 항쟁으로 계속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여 6·29 선언이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이 마련되었다. 소비에트 연방(소련), 중국 등 공산주의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이른바 북방 정책을 추진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 또한 국제 연합에 남한과 북한이 함께 가입하였으며,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리고, 문화·체육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등 적극적인 대북 외교를 펼쳤다. 한편, 정부의 주도와는 달리 민간 차원에서도 적극적인 통일 노력이 전개되어 평화 통일을 위한 논의가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노태우는 군사정권 당시의 쿠테타를 주도한 세력이었고, 불법 비자금 등의 문제를 안고 있기도 하였다.
1987년 12월 16일의 제13대 대통령 선거
1988년 2월 25일에 취임
5공 청산과 친인척과 측근들 사법조치를 단행 – 전경환
1988년 11월 전두환 전 대통령은 공개사과와 백담사 운둔
1988년 4월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주정의당의 여소야대 현상
1988년 제5공화국 과 광주민주화운동 청문회
보안사 민간인 사찰 사건 (1990년) 국가안전기획부 도청과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청명계획 (1989년) 정치인 체포 계획
정원식 계란 투척 사건 (1991년)
3당 합당(1990년)
1990년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3당 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6공 황태자 박철언과 김영삼의 반발과, 구 민주계(김영삼 계열)의 저항에 굴복
초원복집 사건 (1992년)
1991년 대한민국 민주화 시위 와 분신정국
"북방외교"(또는 "북방정책", Nordpolitik)
한국의 대(對)공산권 외교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1988년 7월 7일 노태우 대통령은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 ·7선언)
1988년 서울 올림픽
1988년 8월에 헝가리 수교를 시작
1989년 일본 히로히토 일왕 장례식에 공식적 사절 파견
1990년 한-소 국교 정상화
헝가리와 수교시 6억2500만 USD의 상업 차관을 약속, 한-소 수교시에는 30억USD의 차관을 제공 합의
1992년 1월 노태우-부시 정상 회담
남북한은 나진-선봉 지구 개발 공동보조 합의
중국(8월), 몽골 및 베트남(12월)
북방외교의 성과는 1970년대 말 중국의 실용주의 노선 채택, 냉전체제의 종식과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대두,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그에 유발된 동유럽 국가들의 정치·경제개혁 및 개방 등의 국제정세의 변화에 한국의 경제성장과 국민적 논의의 대두라는 국내 정세변화가 맞물린 결과이다.
남북문제
1988년 7 ·7선언 민족자존과 번영을 위한 대통령특별선언을 발표와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제시
1990년 9월 남북고위급회담
서울과 평양에서 범민족통일음악회, 통일축구대회
1991년 4월 세계탁구선수권대회, 5월 제6회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 남북한 단일팀이 참가
1991년 9월 유엔총회에서 남북한이 유엔회원국으로 동시 가입
1991년 12월 제5차 고위급회담에서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12월 31일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
1992년 9월 8차 남북고위급 회담과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의 송환 요구와 "이동복 훈령 조작 사건"
http://ko.wikisource.org/wiki/%EA%B8%80%EB%A1%9C%EB%B2%8C_%EC%84%B8%EA%B3%84_%EB%8C%80%EB%B0%B1%EA%B3%BC%EC%82%AC%EC%A0%84/%EC%A0%95%EC%B9%98/%ED%95%9C%EA%B5%AD%EC%9D%98_%EC%A0%95%EC%B9%98/%ED%95%9C%EA%B5%AD%EC%9D%98_%EC%99%B8%EA%B5%90/%ED%95%9C%EA%B5%AD%EA%B3%BC_%EA%B3%B5%EC%82%B0%EA%B6%8C_%EC%A0%9C%EA%B5%AD%EA%B3%BC%EC%9D%98_%EA%B4%80%EA%B3%84#.EB.B6.81.EB.B0.A9.EC.99.B8.EA.B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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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1/1846985_609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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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o.wikipedia.org/wiki/%EB%B0%B1%EA%B3%A8%EB%8B%A8
1.
구, 서울역 광장 (문화역서울 2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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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국립 518민주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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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석 모란공원 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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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남영동 대공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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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경찰청 인권보호센터, 박종철 인권기념관 4층 영화<남영동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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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박종철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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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민주화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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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신촌 이한열 기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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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서울 올림픽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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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서울 올림픽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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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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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 > 지식의 피라미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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