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먹을거리 찾아 떠나는 여행
숲은 아직 눈 속에 잠겨 있었다. 가끔 길게 우는 새소리가 들렸고 더 가끔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나무를 스치며 소리를 내었는데 그것은 마치 먼 데서 들려오는 파도소리 같기도 했다. 바람은 차가웠으나 오래된 숲이 만들어내는 온기로 인해 춥지 않았고 나무가 뿜어내는 청결한 기운은 머리를 맑게 했다. 광릉수목원 전나무숲. 세종대왕이 사냥을 즐기던 광릉숲에 80년 전 오대산 월정사의 전나무 종자를 가져와 지금의 아름드리나무 가득한 깊은 숲을 이루었다. 한겨울에도 초록의 기운을 잃지 않은 이 숲 속을 걸으며 문득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호숫가의 숲이 떠올랐다. 책 ‘월든’에서 ‘나는 나의 호수의 돌 깔린 기슭이며 그 위를 스쳐가는 산들바람이다’라고 고백하며 청순하고 간소한 생활 속에서 자연과 인생을 직시했던 위대한 수필가의 삶이 왠지 이 숲과 닮았기 때문이었다.
바람과 햇볕이 숙성시키는 묵나물
수목원에서 나와 찾아간 곳은 남양주의 한 묵나물밥 집이다.
곤드레나물밥과 뽕잎나물밥을 주문한다. 마음 같아서야 장작불 위에 커다란 무쇠 솥 걸고 말린 나물이며 감자 따위 잔뜩 넣고 고슬고슬하게
지은,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해주시던 그런 나물밥이 간절했으나 요즘 어디에서 그런 밥을 맛볼 수 있겠는가. 그나마 이 집 주인장이 밭에서 직접
재배한 나물이라 하니 조금 위안이 되긴 한다. 잠시 뒤 나무 뚜껑 닫힌 작은 솥들이 등장한다. 뚜껑을 여니 갓 지은 구수한 밥 냄새에 구수한
나물 향이 코를 간질인다. 지난 계절의 말간 햇볕과 따스한 바람도 묻어나는 듯하다. 풋고추 썰어 넣어 자박하게 만든 양념간장을 얹어 밥과 나물이
잘 섞이도록 비비고는 크게 한 숟가락 떠서 입안에 넣었는데 눈이 스르륵 감긴다. 나물의 향과 질감이 고슬고슬한 쌀밥과 어우러져 단단한 조화를
이룬다. 곤드레나물밥은 우직하고 묵직한 깊은 맛을, 뽕잎나물밥은 좀 더 산뜻하고 풋풋한 맛을 내니 나물에 따라 전혀 다른 밥맛이다. 맛있다며
식당 주인에게 슬쩍 칭찬을 건넸더니 집에 돌아가는 길에 장에 들러 묵나물을 몇 가지 사가라 권한다. 그러고는 곤드레 나물이나 무청시래기로 맛있게
밥 짓는 법을 설명한다. 불린 쌀에 멸치와 다시마 육수로 밥물을 잡고 한소끔 데친 후 찬물에 씻어 물기 뺀 나물을 올린다. 얹기 전 나물에
간장과 들기름 등으로 조물조물 양념하는 것이 맛의 비결이란다.
묵나물은 보통 묵은 나물, 말린 나물을 가리키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제철에 수확한 나물에 바람과 햇볕, 시간을 더해 숙성시키고 더 깊은 맛을 품도록 한 것이다. 자연과 시간에 의해 숙성된 나물은 본래의
그것에 비해 더 풍부한 맛과 향을 지니게 된다. 그러니 묵나물이야말로 진정한 슬로 푸드의 범주에 넣어야 할 것 같다.
술 빚는 마을 지나 시골장 구경
나물밥으로 속을 따뜻하게 채우고는 다시 길을 나선다. 겨울이면 문전성시를 이루는 베어스타운 스키리조트를 지나 아주 잠깐 가평군 땅을 밟은 길은 다시 포천 운악산 자락으로 이어지고 이내 고운 서리 맞은 상록수림의 운치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47번 국도 드라이브의 백미로 손꼽히는 길이 시작된다. 희미한 안개 때문에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도로는 자로 그은 양 곧고 길게 뻗어 있다.
길은 포천 일동면의 수입교차로까지 계속된다. 포천 운악산 자락에 들어앉은 ‘산사원’이 건넨 첫 인사는 구수한 술 향기다. 코를 실룩이며
가만히 냄새를 맡는데, 신기하게도 누룩 냄새, 발효된 술 냄새, 여러 가지 곡식이며 열매 냄새들이 서로 섞이지 않고 살아있다.
산사원은
한국 전통주 제주업체인 국순당에서 운영하는 전통술 갤러리다. 이곳은 한국의 전통술과 관련한 자료를 전시하고 일반인들이 술을 직접 빚어 볼 수
있는 강좌도 운영하며 꽤 큰 규모의 와이너리도 갖췄다. 갤러리 안으로 들어서면 먼저 가양주(Home Brewing) 문화관에 들러 우리 전통술
문화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 사이를 지난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빚어진 전통 가양주와 전통술의 역사, 전통술의 원료에 관한 자료가 전시돼 있다.
문화관 아래층 계단으로 내려가면 술 장터가 나타난다. 배상면주가에서 만들어내는 다양한 전통술을 (마음껏) 시음해 볼 수 있다. 갤러리를 벗어나
산사정원으로 나간다. 어른 두세 명은 거뜬히 들어감 직한 거대한 술 항아리들이 도열해 섰다. 술 한잔하기에 참 좋을 것 같은 정자 취선각도,
누룩을 상징하는 건물인 우곡루도 있어 잠시 시간을 보내기 좋다. 산사원에 미리 예약하면 가양주 체험에 참여할 수 있다. 체험 프로그램은 재미난
가양주 이야기를 듣고 직접 술을 빚는 시간으로 마련된다. 빚은 술은 집에 가져가 숙성시켜 마실 수 있으니 내 손으로 빚은 술맛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포천에서 철원에 이르기까지 오토캠핑장의 안내 표지판이 유난히 많다. 일동면에서 이동면까지 이어지는 곳곳에 온천탕이 즐비하다.
운악산자연휴양림 인근에는 명덕탄산천이, 일동면에는 유황온천지구가 있다. 일동면 온천지구 초입의 제일온천은 지하 800m에서 끌어올린 유황
온천수를 사용한다. 가까운 곳에 이동갈비촌이 있어 더 유명하다. 장암리의 이동갈비촌 거리는 하루 종일 갈비 굽는 냄새와 연기로 가득하다. 갈빗집
간판마다 주인 할머니들의 얼굴과 함께 저마다 ‘원조’라고 써 붙였다. 길 가는 동네 사람을 붙잡고 진짜 원조집을 캐물어도 맛은 거기서 거기라는
대답이다. 다만 ‘김미자할머니집’에 사람이 좀 더 몰린다는 이야기를 한다. 감칠맛 나는 이동갈비와 막걸리 한 잔으로 배를 채우고는 지척의
백운계곡으로 간다.
물 댄 논은 스케이트장으로, 눈 쌓인 언덕은 천연 썰매장으로 변신했다. 쉬지 않고 얼음을 지치며 노는 아이들의 낭창한
웃음소리가 계곡을 따라 퍼져 나간다. 47번 국도 여행의 종착지는 철원군 와수리다. 민통선 지대가 코앞이나 5일장 열린 읍내는 이에 아랑곳없이
시끌벅적 유쾌하다. 끝자리 1, 6일마다 열리는 와수5일장에서 꽃무늬 잔뜩 들어간 분홍색 누비 조끼를 하나 샀다. 47번 국도 여행의
기념품으로,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선뜻 지갑이 열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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