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음이 서럽지 않은 곳
두 바퀴로 떠나는 서울여행 (3) 낙원동과 탑골공원
[서울톡톡] 서울에는 이름만 들어도 한 번 가보고 싶게 만드는 흥미로운 동네가 여럿 있다. 종로구 와룡동은 조선시대 태조 5년(1396년)부터 사용됐으며 '용(왕)이 누워 휴식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종묘 옆 봉익동은 '봉황의 날개'라는 뜻으로 6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동네다. 그런 동네 가운데 자전거를 타고 꼭 들러 보고 싶었던 곳이 '낙원동'이다. 관광객들로 늘 북적이는 인사동 바로 옆의 한적하게 보이는 이 동네는 한자 이름도 천국, 파라다이스를 뜻하는 낙원(樂園)동이다. 아마 서울에서 가장 흥미로운 이름을 가진 동네가 아닐까 싶다.
낙원동에 들어서면 동네의 상징 탑골공원이 제일 먼저 맞이한다. 1890년대 개장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다. 원래 이름은 파고다공원의 오랜 역사를 가진 곳으로 어르신, 특히 할아버지들이 즐겨 찾는 아지트다. 조선시대 도성 내 3대 사찰로 불린 원각사, 조선 태조 때 조계종 본사였던 흥복사가 있었던 명당자리라서 그런지 겨울에도 한낮의 햇살이 참 따스해 추운 줄 모르고 공원을 산책하게 된다. 황혼기에 접어든 어르신들의 보금자리가 된 이유가 짐작이 간다.
콩나물국밥 3,000원, 동태찌개 3,000원, 이발요금 3,500원. 대한민국에 이런 가격이 가능할까 싶지만 이런 가게가 즐비한 곳이 바로 이곳 낙원동이다. 일명 '먹자골목'으로 통하는 곳으로 들어서면 저렴한 가격표에 한 번 놀라고, 그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할아버지들에 또 한 번 놀란다. 해장국을 2,000원에 파는 것으로 유명한 식당주인 아주머니는 "어르신들 상대로 장사하는데 비싸게 받을 순 없지 않느냐"며 오랜 단골손님들이 많이 있어서 이 가격에 운영할 수 있단다. 식당 간판이 강원도집, 전주집, 충청도집 등으로 지역명을 쓰면서 할아버지들의 향수를 달래고 있는 것도, 소주나 막걸리를 우리가 흔하게 보는 맥주컵 하나에 가득 담아 단돈 1,000원에 파는 잔술도 낙원동에서 볼 수 있는 명물이다.
수련집과 부산집은 할아버지들이 손꼽는 낙원동 제일의 밥집이다. 대표 메뉴는 가정집 백반과 동태백반. 가격은 3,000원으로 똑같다. 가게 이름만큼이나 소박하면서 정겨운 분위기를 지닌 두 식당의 음식은 '집밥'과 가장 가깝다는 점이 매력이다. 미로 같은 골목길에 숨어 있는 두 식당은 이제 젊은이들도 입소문을 듣고 찾아올 정도로 유명하다.
탑골공원 주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이발소다. 보는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이발 가격도 눈길을 잡아끈다. 이발소 특유의 사인볼이 빙빙 돌아가는 가게 앞에는 하나같이 '이발 3,500원, 염색 5,000원'이라고 쓴 가격표가 나붙어 있다. 이 착한 가격 때문에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어르신들이 지하철을 갈아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낙원동 일대 이발소를 찾는다. '낙원 이발소' 이발사 아저씨는 이발소마다 하루 평균 60~70명이 이발을 하고 염색을 하는 손님도 50~60명이란다.
이렇듯 낙원동은 어르신들 천국으로 불리는 값싼 동네지만 그건 낙원동 역사를 몰라서 하는 소리다. 1910년대 서울에서 기와집이 가장 많았던 곳은 탑골공원 일대였다고 한다. 즉, 낙원동은 서울 최상류층이 살던 동네였다. 악기 가게와 극장이 들어선 지금의 낙원상가는 원래 이름이 '낙원상가아파트'로 1969년 건립 당시 건물 안에 상가, 재래시장, 영화관, 아파트가 같이 있는 초고급, 초화화 빌딩이었다. 도로 위로 건물을 지은 것도, 건물 아래 시장을 넣은 것도 당시엔 보기 드문 독특한 시도였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작가 박범신의 소설이자 영화로도 나왔던 <은교>에서 나온 말이다. 우리나라의 노인 빈곤율은 2011년 기준 45%로 OECD 국가 중 1위라는 부끄러운 기록을 세웠다. 낙원동을 여행하면서 느낀 점은, 동정 차원에서만 볼 게 아니라 제도적 차원의 모색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김종성 시민기자는 스스로를 '금속말을 타고 다니는 도시의 유목민'이라 자처하며, '여행자의 마음으로 일상을 살고 싶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글과 사진에서는 매일 보는 낯익은 풍경도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낯설게 느껴진다. 서울을 쾌나 알고 있는 사람들, 서울을 제대로 알고 싶은 사람들 모두에게 이 칼럼을 추천하는 바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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