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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 · 임시수도 · 부산항, 부산광역시 釜山廣域市 1

草霧 2013. 12. 23. 16:00

 

 

 

동래 · 임시수도 · 부산항

 

 

부산광역시 釜山廣域市

 

 

 

  

Busan Metropolitan City

(1)

 

 

 

 

대한민국 동남단에 있는 광역시

동쪽은 동해와 남쪽은 다대만·부산만·수영만을 끼고 남해 바다에 면하고, 서쪽은 김해시 장유동과 창원시 진해구, 북쪽은 양산시 물금읍과 김해시 대동면, 동쪽은 울산광역시 서생면·온양읍에 접한다. 대한민국 남동단의 관문으로 서울특별시에서 남동쪽으로 약 450km, 대한해협을 끼고 일본 시모노세키[下關]와 약 250km 떨어져 있다. 위치는 동경 128°45'129°18', 북위 34°52'~35°23'이다. 면적은 765.94이고, 인구는 3564,577(2008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5개 구, 1개 군, 2개 읍, 3개 면, 210개 동, 130개 리가 있다. 시청은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5동에 있다.

    

 

대한민국 제2의 도시이자, 1의 무역항

1876년 개항(開港) 되었으며, 한국 최대의 항구로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과의 교역창구 역할을 했고,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전쟁물자가 들어오는 항구로 역할하였고 이때 많은 피난민이 거주하면서 임시수도로서 국가보위의 기능을 충실히 이행했다. 1960년대 이후 수출주도형 경제개발이 추진되면서 동양 굴지의 대표적인 무역항구로 급격히 부상했다. 항만을 기반으로 성장한 한국의 대표적인 상공업도시이며, 남동임해공업지대의 중심도시이기도 하다. 경인공업지대와 더불어 2대 공업지대의 하나인 남동임해공업지대의 중심도시가 되어 서울권에 버금가는 부산권을 형성하였다. 직접적인 영향권은 경상남도 일원으로 볼 수 있으나, 교통망의 발달로 간접적인 영향이 전국적인 범위에 미치고 있어 서울특별시·대구광역시·울산광역시·창원시·진주시·사천시·통영시 등의 도시가 산업·문화 면에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포항시·경주시·제주도·진해시·여수시 등도 영향이 미치는 도시들이다.

 

최대 항구도시

한국 제1의 무역항으로, 천연적인 조건 및 국내 경제의 급속한 발전에 힘입어 국제적으로도 태평양 연안의 유수한 항구 중 하나가 되었다.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깝다. 부산항을 중심으로 해상무역과 물류 산업이 발달하였다. 남포동과 서면은 번화가이고, 해운대는 부산을 대표하는 관광지이다. 수영강변에는 첨단 복합단지인 센텀시티가 있다. 2002년 아시안 게임, 2002FIFA 월드컵, 2005APEC 정상 회담 등 대규모 국제 행사를 개최하였고, 부산국제영화제, 부산세계불꽃축제, G-Star 등의 행사를 여는 국제적인 도시이다. 한국거래소, 기술보증기금 등의 공공기관 본사가 있으며, 혁신도시 사업에 따라 한국자산관리공사, 한국주택금융공사, 한국해양과학기술원, 한국예탁결제원 등이 문현금융단지 등으로 이전될 예정이다.

 

제주도와 거제도를 운항하는 국내 여객선이 있으며 국제선은 일본 시모노세키와는 정기선이 페리가 취항하고, 그리고 후쿠오카, 이즈하라, 히타카츠, 오사카는 정기 여객선이 운항된다. 국제 항공노선은 도쿄[東京오사카[大阪상하이·베이징 등지와 항공로로 연결된다. 시를 상징하는 꽃은 동백꽃이고, 나무는 동백나무, 새는 갈매기이다.

 

지난 30년간에 걸친 급속한 인구증가로 교통난·주택난 등의 도시문제가 심각한 편이다. 또한 수출입 물동량의 계속적인 증가로 항만시설의 확충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최근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상 신도시 건설계획을 비롯한 종합적인 장기 개발계획이 추진되고 있으므로 명실상부한 국제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될 전망이다.

 

위치

 

 

한반도 남동쪽 끝에 위치하여 지리적으로 한국의 주요 도시 가운데 일본에 가장 가깝다. 대한해협의 쓰시마 섬을 사이에 두고 있는 일본과의 직선거리는 쓰시마 섬까지는 49.5km이고 일본 본토인 후쿠오카까지는 약 180km이다. 참고로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직선거리는 대략 314km이다. 행정 구역상으로는 서쪽으로 경상남도 김해시· 창원시, 북쪽으로는 양산시, 동쪽으로는 울산광역시와 접하고 있다. 자연 환경상으로는 서쪽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긴 강인 낙동강과 비옥한 삼각주인 김해평야가, 북쪽으로는 부산의 진산(鎭山)인 금정산이, 동쪽으로는 동해, 남쪽으로는 남해가 있다. 총 면적은 765.94이다.

 

 

부산(釜山) 역사

 

대한민국 제 2의 도시로, 삼한 시대 변한의 거칠산국의 작은 지역으로부터 시작하여, 조선 시대는 부산진으로 발전하였고, 조선 통신사의 출항지가 되었다. 불평등 조약이었던 조일강화조약으로 인한 삼포 개항 이후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다. 1963부산직할시로 승격이 되었으며, 1995부산광역시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

 

과거에 부산의 중심지였던 동래지방을 중심으로 해안과 강변에서는 신석기시대의 유적이, 내륙의 구릉지대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유물·유적이 많이 발견되고 있어 일찍부터 인간의 거주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한시대에는 독로국(瀆盧國)이 이곳에 있었던 것으로 비정된다. 대동지지에 의하면 본래 거칠산국(居漆山國) 또는 장산국(萇山國)이었는데 79(탈해왕 23)에 신라가 이곳을 공격하여 거칠산군(居漆山郡)을 설치했으며, 757(경덕왕 16)에 동래군(東萊郡)으로 고쳐 양주(良州양산) 관하에 두었다고 되어 있다. 이때 동평(東平)과 기장(機張)을 영현으로 관할했다. 고려시대에는 1018(현종 9)에 울주(蔚州울산)의 속현이 되었다가 후에 현이 되었다. 조선초 1397(태조 6)에 진을 설치하고 병마사가 판현사를 겸했다. 1423(세종 5)에 부산포를 개항하여 왜관을 설치했으며 첨절제사를 두었다가 후에 현으로 바꾸었다. 1510(중종 5)에 삼포왜란이 일어나 왜관을 폐쇄했다가 1547(명종 2)에 다시 왜관을 설치하면서 왜인들이 왕래하는 입구라 하여 동래를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복구되기도 했으며, 1749(영조 25)에 동래부에 독진이 설치되어 군사적으로 한층 강화되었다. 별호는 봉래(蓬萊봉산(蓬山내산(萊山)이었다. 조선시대에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慶尙左水軍節度使營)을 비롯하여 부산포·다대포·두모포·개운포·포이포·서평포 등 많은 수군 방어기지가 있었다.

 

1876(고종 13)에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어 최초의 개항장이 부산포에 설치되었다. 1877년에 조계(租界)가 설치되고 일본·중국·영국의 영사관이 자리잡았으며, 1890년에는 동래감리서가 설치되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에 동래부 동래군, 1896년에 경상남도 동래부가 되었다. 1903년 군으로 강등되었다가 1906년 다시 부로 승격되었으며, 이 해의 월경지 정리로 양산군의 두입지(斗入地)인 좌면이 동래에 편입되었으며, 일본 영사관이 폐지되고 이사청(理事廳)이 설치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부산부의 부산면·사하면·사중면의 일부만이 부산부로, 나머지 지역은 동래군으로 조정되었다. 부산부의 북면·좌이면·사하면은 그대로, 용주면·동하면이 남면으로, 읍내면·서상면·동상면이 동래면으로, 서하면·동평면·남면이 서면으로, 사상면·좌이면이 사상면으로 통합되고, 기장군(機張郡)이 폐지되어 읍내면·동면·남면이 기장면으로, 동면·중북면이 일광면으로, 상북면·중북면이 장안면으로, 하북면·하서면이 정관면으로, 상서면·하서면이 철마면으로 통합되어 동래군에 병합되었다. 1925년 경상남도 도청을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겨 부산은 계속 성장했으며, 1931년에 동래면·구포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43년에 동래군의 동래읍·사하면·남면과 북면의 2개리가 부산부로 편입되어 면적이 확대되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1950818일부터 1953815일까지 임시수도였다. 전쟁중에 급격한 인구증가가 이루어져 1955년에 인구 100만 명을 넘어서자 1957년에 구제(區制)를 실시하여 6개구를 설치했다. 1960년에 이곳에서 불을 당긴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어 자유당 정권이 물러나게 되었다. 1963년에 정부 직할시로 승격하면서 동래군 구포읍·사상면·북면 등을 편입했으며, 이때 동래군은 울주군 서생면을 편입했다. 1973년에 동래군이 폐지되어 양산군에 편입되었으며, 1983년에 경상남도 도청이 창원시로 이전했다. 1975년 남구, 1978년에 북구가 부산진구에서, 1983년에 사하구가 서구에서, 1980년 해운대구, 1988년에 금정구가 동래구에서 분리·신설되었다. 1978년에 김해군 대저읍 일원과 명지면 일부, 가락면 일부가 북구에 편입되었고, 1989년에 김해군 가락면·녹산면과 의창군 천가면이 편입되어 강서구가 신설되었다. 199412월 부산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개칭되었으며, 과대자치구였던 동래구, 남구, 북구가 각각 동래구·연제구, 남구·수영구, 북구·사상구로 분구되었다. 또한 1995년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양산군의 장안읍·기장읍·철마면·일광면·정관면이 기장군으로 신설되어 통합되었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으로는 영도구 동삼동·영선동·조도, 서구 암남동·다대동, 북구 금곡동

청동기시대의 유적은 부산시내 전지역에 퍼져 있고 특히 동래지구

변진 독로국(弁辰瀆盧國)은 동래지방에 있었던 나라로 동래 복천동고분군과 연산동고분군

지리적 여건으로 신라의 세력에 일찍부터 흡수되었던 것 같다.

탈해이사금대(5779)에 거도(居道)가 계략으로 우시산국(울산)과 거칠산국(居漆山國 동래)을 빼앗았다

 

삼국시대

해운대 지역에 거칠산국(居柒山國)

서기 1세기 후반 탈해왕, 기장의 장산국과 거칠산국이 신라에 점령되었다.

부산포 일대에는 가야의 종발성(從拔城)이 세워져 신라와 가야의 각축장이 되었다.

서기 400년경 내물왕, 가야의 신라 침공했다 광개토왕의 고구려군에게 대패 후 신라의 영역에 편입

옛 거칠산국은 거칠산군(居柒山郡)

종발성은 "큰 시루"라는 뜻의 대증현(大甑縣)

8세기 경 경덕왕, 거칠산군은 동래군(東萊郡)으로 개칭하였다.

대증현은 동평현(東平縣)으로 개명되어 기장현(機張縣)과 함께 동래군의 관할현이 되었다.

757(경덕왕 16)에 동래군으로 개칭하고 동평현(東平縣)과 기장현(機張縣)을 영현으로 했다고 한다.

835(흥덕왕 10)에 범어사가 창건되었다.

    

고려시대

1018년 동래군이 동래현(東萊縣)으로 격하, 울주(蔚州)의 속현이 되며 동래군의 속현이던 동평현은 양주(梁州)의 속현이 되었다.

 

조선시대

1397(태조 6)동래에 진을 설치해 병마사가 판현사(判縣事)를 겸했다.

1396년동래현·동평현·기장현을 침범하였다.

1405년 울주의 속현이었던 동래현이 독립현, 양주의 속현이었던 동평현이 다시 동래의 속현이 되었다.

1409년 동평현이 다시 양주의 속현이 되었다.(1428년에 다시 동래의 속현).

1423(세종 5) 부산포를 개항해 왜관을 설치하였다.

1428년동평현이 동래현 소속으로 복귀하였다.

1510(중종 5) 삼포왜란으로 왜관을 폐쇄했다가 1512년 다시 개관하였다.

1547(명종 2)동래현이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592(선조 25)울산 개운포(開雲浦)에 있던 경상좌수사영(慶尙左水使營)을 수영(水營)으로 옮겼다.

1599년 기장군이 폐현되어 그 남쪽을 동래현에 이속시켰다.

1599년 다시 도호부로 승격하였다.

1605년 동래부사 윤훤(尹暄)이 송상현을 모시기 위해 송공사(宋公祠)를 세웠다

1607년두모포(豆毛浦)에 왜관이 다시 설치되었다.

1617년 기장군이 복원되었다.

1624(인조 2) 충렬사(忠烈祠)로 사액되면서 임진왜란 때 순국한 모든 충신·열사를 합사하게 되었다.

17세기-18세기에 부산 지역은 조선 통신사의 출항지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1655(효종 6)동래부에 독진(獨鎭)이 설치되었다.

1690(숙종 16) 부사가 방어사를 겸했다가 2년 뒤에 방어사가 폐지되었다.

1678년 왜관을 초량(草梁 : 지금의 용두산 일대)으로 옮겼다.

1763(영조 39) 통신사로 일본에 간 조엄(趙曮)이 대마도에서 고구마 종자를 가져와 동래부사 강필리(姜必履)가 그 재배에 성공함으로써 전국에 퍼졌다.

1876(고종 13) 병자수호조약 체결에 따라 부산포가 개항장이 되었다.

1877년 부산에 조계(租界)가 설치되었으며, 일본·청국·영국의 영사관이 설치되었다.

1883년 개항에 따른 항만관리·외교사무를 담당하기 위한 감리(監理)를 두어 동래부사가 이를 겸임했으며, 부산해관(釜山海關, 부산세관)을 설치하였다.

1890년 동래감리서(東萊監理署)를 설치하였다.

1895년 동래부(東萊府)로 승격시키고 기장군을 속하게 하였다.

1895년 지방관제 개정으로 동래부는 경상남도에 소속되었다.

1896년 경상남도 동래군으로 개편되었다.

 

일제강점기

1903년 군으로 강등했다가 1906년 다시 부로 승격하였다.

1906년 양산군 구포면을 편입하면서 다시 동래부로 승격되었다.

1906년 일본영사관이 폐지되고 이사청(理事廳)[개설]되었다.

1908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었으며, 옛 부산역 일대의 매축 공사가 준공되었다.

1909년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下關) 사이에 연락선이 취항하였다.

1910년 동래부를 부산부(釜山府)로 개칭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시에 동래군이 되었다.

1914년에 동래부가 부산부로 개편되었다.

1914년 부산부를 부산부와 동래군으로 분할하였다. 기장군이 폐지되고 동래군에 흡수된다.

1915년에 부산진과 동래 온천장 사이에 전차가 개통되었으며, 이듬 해 시내 전차도 개통되었다.

1918년 좌이면을 구포면으로 개칭하였다.

19193·1운동 후 안희제(安熙濟)는 동지를 규합해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해, 국내외의 연락을 담당하고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였다.

1920년 의열단원 박재혁(朴載爀)은 부산경찰서를 폭파하고 옥중에서 단식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25년 경상남도 도청을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겼으며, 1934년 영도대교가 준공되었다.

192541일에 경상남도 도청을 부산으로 이전하였다.

1931년 동래면을 동래읍으로 승격하였다.

1931년 구포면을 구포읍으로 승격하였다.

1936년 서면·사하면 암남리를 부산부로 편입하였다.

1942년 동래읍, 사하면, 남면, 북면 부곡리·장전리를 부산부에 편입하였다.

1943년 구포면을 구포읍으로 승격하였다.

 

광복 이후

1949년 부산특별시 승격 기성준비위원회가 발족하였다.

1949년 부산특별시 승격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었다.

1949년 부산부를 부산시(釜山市)로 개칭하였다.

1949년 부산시 중앙직할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임시수도가 되어 대한민국 대한민국 정부가 이전하였다.

1950년 서울로 환도하였다. 당시 정부는 도청 청사로 이전하였다.

1950년 대한민국 국회가 부산시로 임시이전하였다.

1951년 유엔묘지가 대연동에 조성되었다.

1951년 대한민국 대한민국 정부와 국회가 부산시로 다시 이전하였다.

1951년 부산특별시 승격안이 국회 내무위원회에 상정되어 유보 가결되었다.

1953년 대연출장소와 해운대출장소를 설치하였다.

1953년 정부, 국회가 환도하다.

1955년 인구가 100만 명을 넘어 1957년에 구제가 실시되면서 6개 구청을 신설하였다.

1957년 구제(區制)가 실시되어 부산시에 구()가 신설되었다.

1960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연일 일어나 인근 각 지방으로 퍼져나갔다.

1962년 제80차 최고회의 상임위원회에서 부산직할시 설치안이 통과되었다.

특별시에 버금가는 정부직할의 직할시는 1981년에 대구가 승격되기 전까지 부산이 유일했다.

1963년 정부직할시로 승격하면서 동래군 구포읍·사상면·북면 및 기장면 송정리를 편입하였다.

1963년 구포읍·사상면·북면·기장면 송정리를 부산직할시에 승격, 울주군 서생면을 동래군에 편입하였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

1973년 남해고속도로가 개통

1973년 현재 기장 지역 등 남은 동래군 지역 모두가 양산군에 편입됨으로써 소멸되었다.

1975년 남구가 신설되고, 시 직할 사하출장소 · 북부출장소를 설치하였다.

1976년 김해국제공항을 개설하였다.

1978년 김해군 일부를 편입하고 북구(현재 북구, 사상구, 강서구 관할)를 신설하였다.

1980년 동래구의 일부를 관할로 해운대구를 설치하였다.

1981년 부산 도시철도 1호선을 착공하였다.

1983년 경상남도 도청이 창원시로 이전하였다.

1983년 경상남도 도청이 창원시로 옮겨갔다. 같은 해 낙동강 하구언공사가 시작되었다.

1983년 서구와 북구를 분할하여 사하구를 신설하였다.

1985년 부산 도시철도 1호선 1단계를 개통하였다.

1986년 개통

1987년 지하철 제2단계 구간이 개통되었다.

1988년 동래구를 분할하여 금정구를 설치하였다.

1989년 북구 일부를 분할하고 김해군과 의창군 일부를 분할하여 강서구를 설치하였다.

1991년 부산 도시철도 2호선을 착공하였다.

1995년 부산직할시를 부산광역시(釜山廣域市)로 개칭하였다.

1995년 양산군과 진해시 일부를 편입하고 수영구 · 사상구 · 연제구 · 기장군을 설치하였다.

1995년 폐지된 동래군 군역이 부산광역시 기장군으로 부활하였다.

1996년 첫 부산국제영화제(PIFF)를 개최하였다.

1997년 부산 도시철도 3호선을 착공하였다.

1999년 부산 도시철도 2호선을 개통하였다.

2002년 부산지방법원과 부산지방검찰청가 거제리로 이전하였다.

2002FIFA 월드컵을 개최하였다.

2002년 제 14회 아시안게임을 개최하였다.

2003년 부산 도시철도 4호선을 착공하였다.

2005APEC정상회담을 개최하였다.

2005년 부산 도시철도 3호선을 개통하였다.

2006년 부산-김해 간 경전철을 착공하였다.

2007년 부산시내버스 준공영제가 실시되었다.

 

동해, 남해와 인접하고 낙동강이 만나는 부산 지역에는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무리지어 살기 시작했다. 삼한시대에는 지금의 동래나 남구 등지에는 "거칠산국", 기장, 해운대 등지에는 "장산국", "내산국"이 있었고 서면이나 남포동 등지에는 "가락국" 등의 부족국가가 있었다. 그러다 삼국시대 신라는 서기 1세기 후반인 탈해 이사금 때에 기장의 장산국과 거칠산국을 점령하게 된다. 부산포 일대에는 가야의 종발성이 세워져 신라와 가야의 각축장이 되었다. 내물왕 대인 서기 400년경에 가야가 신라를 침공했다가 광개토왕의 고구려군에게 대패하여 패망하자 부산 전역이 신라의 영역에 편입되었다. 옛 거칠산국은 거칠산군이 되고 종발성은 "큰 시루"라는 뜻의 대증현(大甑縣)이 되었다.

 

영도구 동삼동(東三洞영선동(瀛仙洞), 부산진구 전포동(田浦洞), 동래구 칠산동(漆山洞) 등지에서 많은 조개무지가 발견되어, 3000년 전 신석기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삼한시대에는 김해를 중심으로 한 가락국(駕洛國)과 동래지방을 중심으로 한 거칠산국(居漆山國장산국 등의 부족국가에 포함되었다가, 동래 지역은 신라에 병합되고 지금의 서면 일대는 가락국의 영역이 되어 현재의 부산은 가락국과 신라의 경계지대를 이루었다.

 

신라는 17대 내물왕 때 거칠산국을 병합하여 거칠산군(居漆山郡)을 설치하고, 532(법흥왕 19) 가락국을 병합하여 금관군(金官郡)을 설치, 757(경덕왕 16) 김해경(金海京)으로 개칭하였다. 또한 지금의 당감동(堂甘洞) 일대에는 대증현(大甑縣)을 설치하였다. 757년 거칠산군이 동래군(東萊郡)으로 개칭되고, 대증현은 동평현(東平縣)이 되어 기장현(機張縣)과 함께 동래군의 속현이 되었으며, 구포(龜浦) 일대는 김해경에 소속되었다. 신라 말·고려 초에는 견훤의 세력하에 들어갔는데, 그때 영도 일대가 목마장(牧馬場)이 되어 천하의 명마가 산출된다는 절영도라는 섬 이름이 생겼다.

 

15세기 전반까지 부산은 부산포로 불렸다. 1592년 울산 개운포에 있던 경상좌수영을 동래부 남촌면(현재 수영동)으로 옮겼다. 91일 이순신이 부산포 해전(부산 해전)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임진왜란 전후에는 부산진이 조선 통신사의 출항지로 활용되었다.

 

1877년 조일수호조약에 의해 조선이 강제 개항되었을 때, 인천, 원산과 함께 개항되었고, 왜관은 일본인 거류지가 되었다. 부산은 18771부산구거류지약조의 체결로 일본이 일본인들의 보호관리 및 통상사무의 관장을 위해 관리관을 파견하면서부터 일본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다. 1880, 일본은 영사관을 정식으로 설치하고 일본 거류지를 사실상의 일본 영토처럼 만들어 버렸다. 일본은 일본인 가구가 200여 호밖에 안 되던 때부터 장기적으로 도로망을 계획하고 가옥 구조를 규제했으며, 1880년대에 이미 일본은 철도 부설을 위한 측량까지 모두 마쳐서 식민 통치의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부산은 개항 후 1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안에 일본의 도시처럼 변했고 소수의 일본인들에 의해서 지배되는 도시로 되어갔다. 이후 부산항이 무역항으로 정비되면서 항구 도시로 발전하게 된다. 1905년 경부선이 개통하여 부산역이 문을 열었다.

 

근대도시로의 발전은 1876년 강화도조약에 의해 인천·원산과 함께 개항장이 되면서 비롯되었다. 당시 용두산 일대는 일본의 조차지(租借地)가 되어, 일본에 의해 본격적인 항만축조가 시작되었다. 1902년 이래 중앙동(中央洞초량(草梁부산진(釜山鎭) 일대의 해면 매립으로 연속된 시가지가 조성되었으며,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제1부두를 비롯한 항만시설 축조가 계속되었다.

 

1925년 경상남도 도청이 진주(晉州)에서 이전되어 경상남도의 행정·경제·문화 중심지 역할이 부가되어 발전이 가속화되었고, 6·25전쟁 때 임시수도로 있는 동안 거대도시로 성장하였다. 때를 맞추어 동래구가 동래구와 연제구로, 남구가 남구와 수영구로, 북구가 북구와 사상구로 각기 분구되었으며, 통합된 양산군 지역으로 기장군이 신설되었다.

 

부산이란 명칭은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행정적으로는 동래부사 관할, 군사상으로는 경상좌도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 관할에 속하여 부산첨사영(釜山僉使營)을 중심으로 바다를 지키는 요충으로 성장하였다.

 

1368(공민왕 17)에 강구사(講究使) 이하생(李夏生)이 쓰시마 도주[對馬島主]에게 보내는 백미 1,000섬을 부산포(釜山浦)에서 반출했다는 기록에 처음 나타나는데, 그것은 산 모양이 솥처럼 생긴 데서 유래한다. 1443(세종 25) 계해조약(癸亥條約)에 의해 부산포(釜山浦내이포(또는 齊浦염포(鹽浦)3포가 개항되어 왜관(倭館)이 설치되었다. 조선 초 이래 부산포·다대포·두모포(豆毛浦서평포(西平浦절영도 등 각 포구에 수진(水鎭)을 설치하여 좌도수군절도영(左道水軍節度營)에서 통제하였다.

 

 

지명 유래

동쪽은 동해, 서쪽은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와 김해시, 남쪽은 다대만·부산만·수영만을 끼고 남해, 북쪽은 울산광역시 온양면·서생면, 경상남도 양산시·김해시와 접하고 있다. 낙동강을 기준으로 동부 구릉성 산지지대와 서부 평야지대로 구분된다. 하천으로는 낙동강을 비롯해 양산시 원효산에서 발원하는 수영강, 금정산에서 발원해 수영강과 합류하는 온천천, 장산에서 발원하는 해운대천 등이 수영만으로 흘러든다. 또한 백양산에서 발원하는 동천, 고원견산에서 발원하는 보수천, 구봉산에서 발원하는 부산천 등이 부산만으로 흘러든다. 낙동강의 지류인 학장천·구포천·화명천 등이 있다.

    

옛지명

삼국시대 : 거칠산국(居漆山國), 화증현(火甑縣), 갑화양곡현(甲火良谷縣)

통일신라시대 : 동래군(東萊郡), 동평현(東平縣), 기장군(機張縣)

고려시대 : 동래군(東萊郡), 기장현(機張縣)

조선시대 : 동래군(東萊府), 기장현(機張縣)

대한제국 : 동래부(東萊府), 기장군(機長郡)

1945: 부산부(釜山府), 기장군(機長郡)

 

조선시대 이전까지 부산광역시 일대는 경상도 동래부 기장현의 대부분에 속하였고, 명지도 일대는 김해부, 대저도는 양산군, 가덕도 일대는 웅천현에 속하였다. 1895년 이곳 일대에는 동래부와 진주부가 설치되었다. 과거 군현 지명은 군으로 통일되어 동래군·양산군·기장군이 동래부에, 김해군과 웅천군은 진주부에 속하였다. 1896년 경상남도에 속하였으며 동래군만이 동래부로 개칭되었다. 당시 전국은 13개 도, 7개 부, 1개 목, 331개 군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동래부는 동래군으로 개칭되었으며 이에 속하였던 부산면이 부산부가 되었다. 부산면은 이전에 초량왜관에 있었던 일본인 전관거류지가 있던 곳으로 이 일대를 중심으로 도시가 확장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1936년 동래군 서면, 사하면 일대, 1942년 동래읍, 사하면, 남면과 북면 일부가 부산부로 편입되었다. 광복 이후 부산시가 되었고, 한국전쟁중인 1951년 중부·서부·영도·부산진·초량·동래 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57년 구제(區制)가 실시되었다. 1963년 직할시가 되었고, 1995년 직할시에서 광역시가 되면서 기장군이 부산광역시에 포함되었다.

 

'부산(釜山)' 지명은 증산(甑山) 지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증산은 지금 동구 좌천동에 소재한 산으로 조선시대 부산진성이 있던 곳이다. 이 지명에서 '()' 자와 '()' 자는 둘 다 시루라는 뜻이다. 이 산을 원래는 부산으로 불렀다는 견해도 있다. 이와 관련된 고지명으로 대증현(大甑縣)이 있으며 삼국사기지리지의 기록으로 보아 동평현의 이전 지명으로 보인다.

 

한편 조선 전기의 사료에는 '부산(釜山)'보다는 '부산(富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부산(富山)' 지명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402(태종 2)태종실록이다. 이후 경상도지리지를 비롯한 지리지와 지도에서도 기재되었다. '부산(釜山)' 지명은 1470(성종 1)성종실록에 처음 사용되나, 1474해동제국기에 삽입된 동래부산포지도에도 사용된다. 이 시기에는 두 표기가 함께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이후에는 '부산(釜山)' 지명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1402(태종 2) 128일 태종실록에 富山이라는 이름이 처음 보이며, 경상도지리지(1425) , 세종실록지리지(1454), 경상도속찬지리지(1469) 따위에 동래부산포라 하였고, 1471년 편찬된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도 동래지부산포라 하고, 같은 책 삼포왜관도에도 동래현 부산포라는 기록이 있다. 이때 부산포는 부자 를 썼다. 1470(성종 1) 1215일의 성종실록에 釜山이 처음 나타나는데, 14744월 남제가 그린 부산포지도에는 여전히 富山이라 쓰고 있어 이 시기는 두가지 표기가 같이 쓰였다. 그러나 이후 기록은 부산포(釜山浦)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부산의 지명변천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동국여지승람(1481)이 완성된 15세기 말엽부터, 釜山이라는 지명이 일반화 된 것으로 추정된다.

 

1481(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산천조에 보면, “釜山은 동평현(오늘날 당감동 지역이 중심지였음)에 있으며 산이 가마꼴과 같으므로 이같이 일렀는데, 그 밑이 곧 부산포이다. 항거왜호가 있는데 북쪽 현에서 거리가 21리다.”라고 하여 산 모양이 가마꼴과 같아 부산(釜山)이라고 하였다. 그 후 기록들은 이를 그대로 인용하여 釜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 동래부지(1740) 산천조에 부산은 동평현에 있으며 산이 가마꼴과 같으므로 이 같이 일렀는데 밑에 부산, 개운포 두 진이 있고, 옛날 항거왜호(恒居倭戶)가 있었다.”라고 하였고, 동래부읍지(1832)에도 같은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아 동국여지승람 편찬 이전에는 富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오다가 이후 어느 시기에 釜山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1643(인조 21)에 통신사 종사관으로 일본에 건너간 신유의 해사록에 실려 있는 등부산시”(登釜山詩)산 모양이 도톰하여 가마와 같고 성문이 바다에 임하여라고 한 구절이 나온다. 이때 부산진성은 오늘날 동구 좌천동 북쪽의 증산을 둘러싸고 있는 정공단 자리에 성문이 있어 성문 바로 아래가 바다와 접해 있었으므로 이 시문에 나오는 산은 좌천동의 증산(甑山)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중엽에 변박이 그린 왜관도를 보면 이 증산을 점초(点抄)하여 부산고기”(釜山古基)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외에도 동구 수정동에서 산을 넘어 부산진구 가야동으로 통하는 고개를 가모령이라고 한다. 이 가모(可牟은 가마를 즉 가마를 뜻하는 것으로 가모령·(, )은 한국의 방언을 한자로 차용한 것으로 가마재·가마고개釜峙즉 부산재(고개)를 뜻한다. 그리고 고로(古老)들은 증산을 시루산이라고 하는데 시루와 가마는 같은 취기(炊器)로 금속성의 가마가 나오기 전에는 동일한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하여 볼 때 "산이 가마꼴釜形과 같다"라고 한 가마꼴의 산은 오늘날 동구 좌천동 뒤에 있는 증산(甑山)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부산광역시의 자연지명

개좌산, 구덕산, 구봉산, 금련산, 금용산, 금정산, 배산, 백양산, 복병산, 봉대산, 봉래산, 봉오리산, 봉화산, 상학산, 수정산, 승학산, 시약산, 아미산, 엄광산, 오봉산, 와우산, 용두산, 운봉산, 윤산, 장군산, 장산, 천마산, 칠점산, 황령산

계명봉, 국수봉, 금정봉, 노적봉, 마안산, 매봉, 부흥봉, 연대봉, 옥녀봉, 웅주봉, 일산봉, 장산봉

까치고개, 대치고개, 만덕고개, 배고개, 복징어고개, 불태령, 성고개, 아리랑고개(영도구), 아리랑고개(동구), 장고개, 지함치, 천성치, 홍치고개

고동골, 사리골, 작은골, 제석골, 집게골

모지포말, 몰운대, 사자바위, 신선대, 의상대, 이기대, 자살바위, 태종대, 학소대

낙동강, 서낙동강, 수영강, 조만강

남천, 대리천, 대천천, 동천, 송정천(해운대구 송정동), 송정천(강서구), 송정천(해운대구), 신어천, 춘천

계목나루터, 군라도선, 대항선착장, 덕두도선, 동원나루, 맥도나루, 상납청도선, 생곡도선, 신노전나루, 신호도선장, 월포도선, 율리선착장, 이울나루, 장항선착장, 죽림나루터

둔치도, 명호도, 순아도, 을숙도, 일웅도, 중사도, 천성만, 적기, 가덕도, 거북섬, 고래섬, 대마등, 대죽도, 동백도, 두도, 병산열도, 오륙도, 입도, 조도, 쥐섬, 진우도, 흑석도

동두말, 점이대, 천수대말

새모기

 

 

부산에 동래가 있다

밀양의 동남쪽이 동래인데, 동래는 동남 바닷가에 있어 왜국에서 우리나라에 상륙하는 첫 지점이다. 임진년 이전부터 고을 남쪽 바닷가에 왜관(倭館, 왜인들을 머물게 하던 곳)을 설치하고 둘레 수십 리에 나무 울타리를 쳐서 경계를 정하였다. 그리고 군졸을 두어서 지키게 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그들과 교제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해마다 대마도 사람들이 도주(島主)의 문서를 받고, 왜인 수백 명을 인솔하여 관에 머무른다. 우리 조정에서는 경상도에서 바치는 세조(稅租) 가운데 약간을 떼어 절반은 관에 머무르는 왜인에게 주어서 도주에게 바치게 하고, 나머지 반은 조금씩 주어서 그들이 공동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그들은 하는 일은 없고 다만 오가는 서신과 물자를 교역하는 일을 담당할 뿐이다. 그들은 교역한 물자의 값을 바로 주지 못하고 분할하여 다음 해로 미뤄 갚기를 약속하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를 잡혔다고 말한다.

 

왜국의 전 지역에서는 장독(瘴毒)이 있는 샘이 많아 풍토병이 무서웠는데, 만약 인삼을 물 주발에 넣으면 탁한 장기(瘴氣)가 녹아 없어진다. 그래서 그들은 인삼을 가장 귀중하게 여기며, 먼 곳에 있는 왜인은 대마도에 와서 구해간다. 우리 조정에서 일정량 인삼을 하사하는데 사사로 매매하는 것은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익이 많으므로 밀매하는 자가 늘어나고 있지만, 근래에는 금령(禁令)이 점점 흐리멍덩해져서 범법하는 자가 많고 유명무실해지면서 우리나라 인삼 값도 나날이 치솟고 있다.

 

이는 택리지의 기록이다. 지금은 부산에 속한 하나의 구인 동래구는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동래도호부였다. 이첨이 지은 동래읍성기동래고을은 동남지방에서 으뜸이다. 바다 자원이 넉넉하고 토산물이 풍부하여 나라의 수요에 기여함이 적지 않다. 또한 동쪽에는 해운포(海雲浦)가 있으니 옛날에 신선이 놀고 즐기던 곳이며, 북쪽에는 온천이 있으니 역대 임금들이 목욕하던 곳이다라고 묘사한 동래의 풍속이 여지도서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지금은 부산에 속한 하나의 구인 동래구는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동래도호부였다. 삼한시대에 건립된 동래읍성은 임진왜란 당시 최대의 격전지이기도 하다.

 

결혼과 상례를 집안의 재산 정도에 알맞게 치른다. 좋은 일과 나쁜 일, 경사스러운 일과 불행한 일 그리고 걱정거리나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서로 도와주는 의리가 있다. 이러한 동래를 두고 신숙주는 정원루기(靖遠樓記)에서 땅이 바다에 닿아 있으며, 대마도와 가장 가까워서 연기와 불빛까지 서로 보이는 거리이니, 실로 왜인이 오가는 요충지다라고 하였다.

    

나라 안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부산

바람 부드러우니 해파가 잔잔하다

동래는 옛날의 장산국(萇山國)이었고, 그 동래부 부산면이 개편된 것은 1914년이다. 부산이라는 이름이 기록상에 처음 나타나기는 조선 초였다. 본래 자는 지금의 가마 부()’가 아니고 넉넉할 부()’를 써서 부산이었다. 이렇게 이름이 바뀐 것은 대체로 15세기경으로 본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피난민들이 몰려와 부산 인구가 급속도로 늘어났으며, 1963년 부산직할시로 승격되었다

 

부산(富山)이 부산(釜山)으로

동래는 옛날의 장산국(萇山國)이었고, 그 동래부 부산면이 개편된 것은 1914년이다. 부산이라는 이름이 기록상에 처음 나타난 것은 조선 초였다. “동평현 남쪽 부산포(富山浦)에 있다라고 세종실록지리지에 실려 있고, 신숙주가 쓴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도 부산포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당시의 자는 지금의 가마 부()’가 아니고 넉넉할 부()’를 써서 부산(富山)이었다. 이렇게 이름이 바뀐 것은 대체로 15세기경으로 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부산은 동평현에 있으며, 산이 가마솥 모양과 같아서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 그 아래가 바로 부산포이니, 늘 살고 있는 왜호(倭戶)가 있으며 북쪽으로 현까지의 거리는 21리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흔히 부산을 두고 서민이 살기 좋은 고장이며, 사람들이 억세고 거칠다라고 말한다. 부산이 오늘날 나라 안에서 제2의 도시로 발전하게 된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876년 조선이 강화도조약으로 개항하고, 1925년 경상남도청이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피난민이 몰려와 부산 인구가 급속도로 늘어남에 따라, 1963년 부산직할시로 승격되었다.

 

1590년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였다. 조선의 선조 임금은 김성일과 황윤길 등 조선통신사 일행을 일본에 보내 상황을 살피게 하였다. 그들이 돌아오자 선조는 일본의 국내 상황과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것 같은지를 물었다. 서인인 황윤길은 틀림없이 전쟁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고, 동인인 김성일은 신은 그와 같은 정황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동시에 일본에 다녀온 두 사람의 이야기가 이처럼 서로 달랐다. 다시 선조가 도요토미의 관상은 어떠하던가하고 묻자, 황윤길은 그 눈빛이 밝게 빛나 담략과 지혜가 있는 듯 보였습니다라고 하였고, 김성일은 그 눈이 쥐와 같으니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어전을 나오자 이조판서 유성룡이 김성일에게 그대의 말이 황윤길과 많이 다른데 만일 전쟁이 일어나면 장차 어찌할 것인가?”라고 묻자, 김성일은 내 어찌 왜적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겠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현혹되므로 이를 풀어보려는 것이오라고 대답하였다. 실록의 사관은 선조수정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황윤길이 장황하게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아뢰어서 인심이 요동쳤으나 사리에 어그러진다. 김성일은 황윤길 등이 그쪽에 도착해서 겁을 집어먹고 체통을 잃은 것을 통분하게 여겼기 때문에 말끝마다 이처럼 서로 어긋났다. 그때에 조헌이 힘써 일본과 화의를 반대하면서 왜적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임금이 황윤길의 말은 실세한 서인이 인심을 어지럽히려 하는 것이라고 여겨 배척하였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감히 전쟁이 일어난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결국 1592413일 오전 8시에 왜군 선발대 18,700명이 대마도를 출발하여 5시 무렵 부산포에 들어왔다. 부산첨사 정발은 전함 3척을 거느리고 바다로 나아갔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어서 대적할 길이 없자 성안으로 들어와 주민들을 안심시키고 군사와 백성을 모아 싸울 준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새벽부터 밀려든 왜군의 거센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정발을 비롯한 무수한 백성들이 전사하고 말았다.

 

부산성이 함락되자 왜군은 두 갈래로 나뉘어 진격하였다. 한 무리는 다대포진으로, 한 무리는 동래성으로 나아갔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백성들과 군사들을 모아놓고 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래성에 도착한 왜구는 먼저 성에 접근하여 길을 빌려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송상현은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라고 하여 결전의 뜻을 전하였다.

 

일본은 그다음 날인 15일 아침에 성을 공격했고, 동래부사 송상현은 남문에 올라가 싸움을 독려하였다. 그러나 당해내지 못하고 성이 함락되면서 많은 백성들과 함께 전사하고 말았다. 다대포 역시 마찬가지로 왜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함락되면서 첨사 윤흥신도 죽고 말았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동래부사로 부임했던 이안눌은 치열했던 동래성전투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4월 열닷새 해 뜰 무렵에 집집마다 곡하는 소리가 일어나 천지가 어수선하고 처절한 바람이 숲을 진동하기에 놀라서 늙은 관리에게 물으니, 바로 이날이 임진년에 성이 함락된 날이라고 하였다. 백 명, 천 명 중에 한두 명이 목숨을 보존했을 따름이며 조손, 부모, 형제, 자매 사이에 생존한 자는 다 이날에 죽은 친족을 제사지내며 곡한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니 늙은 관리는 다시 말하기를, 곡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은 오히려 슬프기가 덜한 것이니 휘두르는 적의 칼날 아래 온 가족이 다 죽어서 곡해줄 사람조차 남기지 못한 집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고 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일본과의 국교가 한동안 단절되었다. 그 뒤 도요토미 정권의 뒤를 이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정권과 대마도주의 간청을 받아들여 광해군 원년인 1609년에 부산에서 기유약조가 맺어졌다. 이때부터 부산은 조선 후기까지 이 나라의 유일한 대외 항구가 되었다.

 

기유약조를 맺은 뒤부터 사신을 태운 사송선이 아닌 교역선이 부산항에 들어왔다. 배는 대마도주의 세견선(무역선) 20척을 포함하여 50여 척이 드나들었고, 숙종 4(1678)에 부산포, 초량(오늘날의 용두산 일대)에 왜관이 들어섰다. 왜관에는 관아 건물이 많았는데 연대청, 동관, 서관으로 크게 나뉘었고 또 객사도 있었다. 일본인들은 이곳에 모셔진 역대 조선 임금의 전패(殿牌, 임금을 상징하는 (殿)’ 자를 새겨서 객사에 세운 나무패. 관리들은 이 앞에서 절을 하고 예를 표시하였다)에 엄숙히 절을 해야 하였다.

 

동래온천과 금정산성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정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금정산(金井山)은 현의 북쪽 20리에 있으며 산마루에 3장 정도 높이의 바위가 있는데, 그 위에 샘이 있다. 둘레가 10여 자이며 깊이는 7치쯤 된다. 물이 항상 가득 차 있어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빛은 황금색이다.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한 마리의 금빛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 그리하여 산의 이름을 금정산이라 하고, 절을 지어 범어사(梵魚寺)라 불렀다.

 

유철상한 마리의 금빛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 하여 산의 이름을 금정산이라 하고, 절을 지어 범어사(梵魚寺)라 불렀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금정산은 현의 북쪽 20리에 있으며 산마루에 3장 정도 높이의 바위가 있는데, 그 위에 샘이 있다라고 하였다.

 

금정산 아래의 동래는 예로부터 온천으로 이름이 높았다. 우리나라의 온천 중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동래온천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붐비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신라 때 온정(溫井)은 현의 북쪽 5리 지점에 있는데, 온천물의 온도는 닭도 익힐 수 있는 정도이고, 병자가 목욕을 하면 병이 곧 낫는다. 왕이 여러 번 여기에 오고는 하여 돌을 쌓고 네 모퉁이에 구리 기둥을 세웠는데, 그 구멍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라고 적혀 있다.

 

동래온천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 「영취사조에도 나올 정도로 인기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신라 31대 신문왕 시절에 재상 충원공(忠元公)이 장산국, 즉 동래의 온정에서 목욕을 하고 경주로 돌아갔고, 그 외에도 신라의 왕들이 경주에서 울산, 양산을 거쳐 동래에서 목욕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고 조선 세종 20년에는 한양에 왔던 일본인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곳에서 목욕을 했다고 하는데, 동래온천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신라 때의 일이다. 동래고을에 한쪽 다리를 못 쓰는 절름발이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할머니가 집 근처의 논배미에 백학 한 마리가 날아와 절름거리면서 주변을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저 학도 나와 같이 절름거리는구나!” 하고 할머니가 같은 처지인 학을 가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음 날도 학은 그곳에 와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렇게 지내기를 3일째 되던 날 학이 이상하게도 다리를 절지않고 돌아다니다가 날아가는 게 아닌가. 그것을 지켜본 할머니가 이상한 일이네. 그렇게 절름거리던 학의 다리가 나았다니하고 중얼거리며 학이 서 있던 논으로 가보자, 그곳에서 따뜻한 샘물이 솟고 있었는데 그 샘 주변이 불그스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나도 이 물에 다리를 담가봐야겠다. 이 샘이 다리를 고쳐주는 샘인가 보구나!” 하고서 절름거리는 다리에 몇 번이고 그 약수를 찍어 발랐다. 그런데 효험이 있어 그 약수를 바른 지 며칠 만에 그렇게 아파서 절름거리던 다리가 원래대로 회복되었으며, 그것을 지켜본 마을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고 한다.

 

부산의 어제와 오늘

부산은 몰라도 자갈치 시장은 안다고 할 정도로 널리 알려진 자갈치시장은 1930년대 말에 두 차례에 걸친 바다와 자갈밭 매립으로 마련된 터전이다. 매립하기 전에 워낙 자갈밭이 많았던 곳이어서 자갈치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태종대와 해운대해수욕장으로 널리 알려진 부산항이 강화도조약으로 개방된 것은 1876년이다. 일본이 만들어낸 전형적인 식민지 항구 도시 부산이 개항되었을 때의 인구는 3,300여 명 남짓이었다고 한다. 현재 부산의 중심 지구인 남포동, 광복동, 중앙동, 대교동 일대가 당시에는 푸른 물이 넘실거리는 바다였다.

 

1875년의 부산을 지켜보았던 일본 거류민단의 마지막 단장이었던 오이케 가다스케(大池紡助)192611월에 쓴 부산 개항 50주년 회고록에서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1875년의 부산의 모습은 쓸쓸하기 짝이 없었다. 대창동, 남포동 일대는 그 뒤에 매축한 곳으로 그때는 모두 바다였다. 번화가로 알려진 광복동 같은 곳도 그때는 한복판에 도랑이 있고 풀만 무성하여 여우라도 나올 듯하였다.

 

또한 그 무렵 일본 거류민단을 위해 은행을 설치했던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도 그와 비슷한 기록을 남겼다. 1876년에 내가 첫발을 들여놓은 부산항은 흰 모래와 푸른 솔의 해안에 종일 파도가 밀려 왔다 갔다 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작은 어촌이었다. 육지에는 한국인들이 쇠뼈와 쇠가죽을 햇볕에 말리고 있었을 뿐이다. 배를 매어둘 만한 부두조차 없었다.

 

한편 영국왕립지리학회 회원으로 1894년과 1895년에 중국, 일본, 한국을 답사했던 이사벨라 버드(Isabella Bird)는 부산과 낙동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가사키 항에서 한국의 부산항까지는 증기선으로 15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 부산에서 11.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입구가 있는 낙동강은 수심 1.5미터의 물을 거슬러 밀양에서 80킬로미터를 증기선으로 항해할 수 있고, 수심 1.2미터의 물을 거슬러 정크선으로 사문까지 160킬로미터를 더 갈 수 있으며, 거기서는 짐을 가벼운 견인 포트에 옮겨 싣고 연안에서 274킬로미터 떨어진 상진까지 올라갈 수 있다. 이 이용 가능한 수로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서울-부산 간 철도가 곧 이루어지리라는 어렴풋한 전망과 더불어 부산은 상업의 중요한 중심이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부산을 포함하고 있는 경상도 지방은 8개의 지방(현재는 13) 가운데 인구가 가장 많다. 또 경상도 지방은 전라도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현재 한국에서 가장 번창하고 있는, 비옥한 지방임이 확실하다.

 

······ 나는 증기선 갑판의 먼 거리에서 한국인들을 처음 보았다. ······ 한국인들은 참신한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중국인과도 일본인과도 닮지 않은 반면에, 그 두 민족보다 훨씬 잘생겼다. 한국인의 체격은 일본인보다 훨씬 좋다. 평균 신장은 163.4센티미터지만, 부피가 큰 흰옷 때문에 키는 더욱 커 보인다. 또 벗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없는 높다란 관 모양의 모자 때문에도 키는 더 커 보인다.

 

그러한 부산이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가 되면서 국제적인 항구 도시로 발달한 것이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영남지역의 유일한 소금 산지였던 강서구 명지동의 명지 소금은 광복 이후 서해안의 염전에 밀려 사라지고, 염전 터는 광활한 파밭으로 변하였으며, 부산에서 낙동강은 강으로서의 생을 마감한다. 그렇다.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고 열 나라가 일어서고 쓰러져도 낙동강은 천 년이고 이천 년이고 그냥 그대로 낙동강일 뿐이다. 그런 낙동강이, 서걱거리는 갈대와 새들의 천국이었던 낙동강이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인간에 의해 훼손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낙동강 하구의 대표적인 삼각주로 알려진 을숙도는 70만 평 규모로 서울의 여의도와 비슷한 면적이다. 이곳에 낙동강 하굿둑이 준공된 것은 1987년이다. 부산시 사하구 하단동에서 강서구 명지동까지 을숙도를 가로질러 세워진 거대한 물막이 댐을 만들게 된 것은 식수와 농업용수로 쓸 강물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도시의 규모가 팽창하면서 물이 부족해진 부산시는 낙동강 물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만조 때만 되면 바닷물이 하구에서 40킬로 미터가량 떨어진 삼랑진까지 올라왔는데, 이 물이 부산시민들이 먹는 물금취수장을 거쳐 가기 때문에 수돗물에 바닷물이 들어가기 일쑤였다. 또한 김해평야 역시 만조 때마다 밀려드는 짠물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낙동강에 하굿둑을 만들었고, 그 뒤부터 짠물이 섞이지 않는 강물을 1년에 75천만 톤가량 확보하게 되었다.

 

이렇게 물 사정은 좋아졌지만 흐르던 물이 고이면서 강은 심각하게 오염되었고, 생태계에 이상이 생기면서 낙동강 하구 을숙도에 찾아오던 철새들과 각종 물고기 및 수서생물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부산시는 그 뒤 을숙도 하굿둑 15만 평에 쓰레기 매립장을 설치하여 1993년부터 4년간 부산시에서 나오는 각종 생활 쓰레기 579만 톤을 묻었다.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동양 최대의 철새 도래지로 명성이 자자했던 을숙도에는 206종에 10만 마리가 넘는 철새들이 찾아왔다는데, 지금은 고니와 청둥오리 등 몇 종류의 소수 개체만이 찾아올 뿐이다. 게다가 부산에서 나오는 분뇨가 낙동강에 마구 버려져 낙똥강이라고까지 불렸다. 시인 이동순은 낙동강을 이렇게 노래한다.

    

잠시도 쉬지 않고 퍼부어 대는 저 독하디 독한

강가의 쓰레기 매립

가축 분뇨 댐 공사에 광산 폐수

농약 생활하수 가두리양식 찌꺼기

······

탁한 강물을 마셔서

마음조차 흐려진 이곳 강 유역의 주민들은

······

밤마다 그들의 목을 휘감아오는

저 차고 무거운 쇠사슬이

사실은 죽은 강줄기의 망령임을

소스라쳐 깨어서도 눈치 채지 못한다.

 

이제는 을숙도 남쪽 끝에 위생처리관리소를 세워 이곳을 거쳐 동해 쪽의 바다에 버리게 되었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가수 조용필은 부산을 배경으로 한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불러 히트하였는데, 이 노래는 부산 하면 떠오를 만큼 유명한 노래가 되었다.

 

꽃 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울어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보는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그 오륙도가 여지도서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오륙도, 관아의 남쪽 30리 절영도 동쪽에 있다. 깎아지른 듯한 뾰족뾰족한 봉우리가 바다 가운데 줄지어 서 있는데, 동쪽에서 바라보면 여섯 개의 봉우리로 보이고, 서쪽에서 바라보면 다섯 개의 봉우리로 보이기 때문에 오륙도라고 하였다. 그 첫째 봉우리에 중국의 장수 만세덕의 비석이 있다고 한다.

 

오륙도보다 더 이름난 곳이 바로 여름철이면 하루에 수백만 명의 피서 인파가 몰리는 해운대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해운대의 모습을 보자.

 

해운대, 현의 동쪽 18리에 있다. 산의 절벽이 바닷속에 빠져 있어 그 형상이 누에의 머리와 같으며, 그 위에는 온통 동백나무와 두충나무 그리고 소나무, 전나무 등으로 덮여 있어 싱싱하고 푸름이 사철 한결같다. 이른 봄철이면 동백꽃잎이 땅에 쌓여 노는 사람들의 말굽에 채고 밟히는 것이 3~4치나 되며, 남쪽으로는 대마도가 아주 가깝게 바라보인다. 최치원이 일찍이 대()를 쌓고 놀았다고 하는데,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어떤 말에는 최치원이 자()를 해운이라고 하였다라고 한다. 이 해운대를 두고 노래한 사람이 정포다.

 

석양에 스님과 만나 이야기하고

춘교(春郊)에 말()을 놓아 가니 연기 사라지고

마을 골목이 멀리 보이고

바람 부드러우니 해파(海波)가 잔잔하다.

고목은 바위에 기대섰고

장송(長松)은 길을 끼고 마중하네.

 

이렇게 한가했던 부산이 개화의 바람을 타고 모든 세계의 열강들에게 개방되었는데, 그래도 부산의 모습이 현대적으로 탈바꿈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이사벨라 버드의 글을 보면 당시 부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한국인들이 사는 부산 구시가지는 비참한 장소였다. 하지만 그 후의 경험은 내게 그곳이 일반적인 한국의 소도시들보다 더 비참한 것도 덜 비참한 것도 아님을 보여주었다. 부산 구시가지의 좁은 거리는 초라한 오두막집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 오두막집들은 창문이 없는, 진흙으로 된 담 벽과 짚으로 된 지붕의 처마를 가졌다. 모든 벽에는 지상으로부터 60센티미터 되는 높이에 굴뚝의 역할을 하는 검은 연기 구멍이 나 있었다. 오두막집 바깥에는 고체와 액체의 쓰레기들이 불규칙한 도랑이 있었다.

 

도랑 옆에는 옴이 오르고 털이 빠진 개들과 눈이 짓무르고 때가 비늘처럼 벗겨지는 아이들이 있었다. ······ 아이들은 완전히 발가벗거나 반쯤 벌거벗은 채로 들끓는 악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꺼운 먼지와 진흙 속에 뒹굴거나, 햇빛 속에서 헐떡거리며 눈을 깜박거리고 있었다. 좁고 먼지 많은 구불구불한 거리를 따라 상품들이 바닥에 무더기로 놓여 있었으며, 더러운 흰 면 옷에 둘둘 말린 남자나 나이 많은 여자들은 서로를 경계하고 있었다. 물건을 흥정하는 소리가 드높고 물건 값을 깎느라 많은 시간이 낭비되는데, 팔릴 때는 원래 불린 값의 10분의 1도 미치지 못하였다.

 

로마자표기 바뀜과 논란

부산의 영문표기는 Pusan으로 쓰였으나 200077일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의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고시에 따라 Busan으로 바뀌었고, 이후 PB가 혼재돼 쓰이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에 2012년 부산시는 도시 브랜드 'Busan'의 홍보에 어려움이 많다는 이유를 들어 명칭 변경 협조를 구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Pusan 지명을 쓰는 단체들은 이미 각인돼 고유명사처럼 쓰이는 표기를 바꾸는 데 난색을 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