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서울의 심장부
중구 中區
(2)
Jung-gu (Chung-gu)
문화·관광
남산공원·장충단공원과 유물·유적으로 숭례문(국보 제1호)·덕수궁(사적 제124호)·대한문·광희문, 고건축물로 명동성당(사적 제258호), 옛 러시아 공관(사적 제253호), 한국은행 본관(사적 제280호) 등이 있다.
신당동에 있는 떡볶이 골목은 떡볶이를 파는 가게들이 밀집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국보 제1호 남대문을 비롯해 덕수궁(경운궁)의 여러 전각과 중명전·석조전(石造殿) 등의 근대건축물이 있으며, 약현성당·명동성당·정동교회·서울성공회성당 등의 각종 종교기관이 있다. 그 밖에 환구단(원구단)의 황궁우와 석고, 장충단비, 남산골 한옥마을의 전통가옥, 경희궁 숭정전 건물과 서울역사·구러시아공사관·한국은행본관 등이 남아 있다. 그리고 남산공원·장충단공원·서울타워(N타워)·동대문운동장이 있으며, 도심 곳곳에 대형 호텔이 있고 동대문쇼핑타운과 황학동 풍물시장 등이 집중해 있어 외국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역사경관으로서 관광명소의 유지
북악~종묘~나만을 잇는 상징 축
덕수궁 (대한문), 남대문(숭례문), 남산팔각정 등의 문화재
명동성당, 조선호텔, 한국은행 등의 보존가치 건물
명동, 충무로, 서울역 등의 장소적 명성유지
국보·사적(12)
덕수궁
숭례문
광희문
서울성곽
구 러시아공사관
환구단
명동성당
정동교회
약현성당
한국은행 본관
중명전
서울 역사
유형ㆍ등록문화재(16)
장충단비
수표교
성공회 서울성당
성제묘
경희궁 숭정전
옛 제일은행 본점
미국공사관
남대문로 한국전력 사옥
정동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태평로 구 국회의사당
서울시청 청사
구 대법원 청사
구 미국문화원
경운궁 양이재
구 신아일보사 별관
신당동 박정희대통령 가옥
기념물·민속자료(11)
제기동 해풍부원군 윤택영 재실
삼각동 도편수 이승업 가옥
부마도위 박영효 가옥
삼청동 오위장 김춘영 가옥
관성묘
와룡묘
구세군 중앙회관
광통관
배재학당 동관
목멱산 봉수대 터
손기정 월계관 기념수
문화유적/동상 107
세브란스빌딩(광혜원)
남대문로
남산순환도로
남산
남산주변
남산골 한옥마을
남산주변마을-필동
동국대학교
장충단공원
시공단과 국립극장
광희문(시구문)
광희동 주변
충무로 입구
중앙우체국(경성우체국)
명동거리
명동 주변거리
명동과 퇴계로 주변
(구)제일은행 본점 주변
한국은행 본점
한국상업은행 본점주변
명동성당 주변
명동성당(종현성당)
조선호텔
서울역
봉래동거리
덕수궁과 대한문
정동교회
성공회 서울대성당
이화학당, 배재학당
대법원(옛 경성재판소)
(구)러시아공사관
중림동성당(약현성당)
영락교회
을지로입구 주변
동양척식주식회사 자리
옛 국회의사당
조흥은행 본점
청계천 주변
덕수상고 자리와 청계천주변
동대문운동장과 훈련원
신당3동 재개발
중구청
중구보건소
백병원
일신초등학교 자리(극동빌딩)
남대문시장
인쇄소 골목과 변천과정
동부학당 자리
명동
남대문시장
동대문패션타운
청계광장
덕수궁
한옥마을
남산공원
서울광장(서울시청)
동대문역사문화공원
한양도성
광통교 다리밟기행사
충무공 이순신 탄생 기념축제
통일기원 남산봉화식
장충단추모제
남산골전통축제
명동 ·남대문 ·북창 관광특구 축제
동대문관광특구축제
덕수궁수문장교대식
남대문로/ 퇴계로 ‘디자인서울거리’
충무로 애완견거리
장충동 족발거리
신당동 떡볶이거리
오장동 냉면골목
건어물전문 중부시장
서울 중앙시장
황학동 가구거리
종합포장 방산시장
http://tour.junggu.seoul.kr/tour/index.jsp
http://www.junggu.seoul.kr/web/w05/w05080100.php
http://www.junggu.seoul.kr/web/w05/w05070101.php 관내시설
http://www.junggu.seoul.kr/web/w05/w05050100.php
http://tour.junggu.seoul.kr/tour/h01_rilcs/h110_rlics.jsp?secondCate=AD 문화유산탐방
중구 내 박물관 8 http://tour.junggu.seoul.kr/tour/h01_rilcs/h130_museum_view.jsp
전통문화체험 http://tour.junggu.seoul.kr/tour/h01_rilcs/h14_edu_01.jsp
문화공간 http://tour.junggu.seoul.kr/tour/h02_culture/h23_seeing_01.jsp
베스트추천여행 http://tour.junggu.seoul.kr/tour/h02_culture/h21_top_01.jsp
http://tour.junggu.seoul.kr/tour/h01_rilcs/h124_dong_01.jsp
http://www.junggu.seoul.kr/web/w05/w05060400.php
남대문·명동 쇼핑코스
1. 남대문시장
2. 숭례문
3. 화폐금융박물관
4. 중앙우체국
5. 명동거리
6. 명동성당
덕수궁·정동·근대문화유적
1.덕수궁
2.시립미술관
3. 정동제일교회
4. 정동극장
5. 중명전
6. (구) 러시아 공사관
청계천·동대문패션타운
1. 청계광장
2. 광통교
3. 삼일교
4. 새벽다리
5. 오간수교
6. 동대문패션타운
7.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서울성곽-남산산책로1
1. 장충단공원
2. 서울성곽
3. 국립극장
4. 석호정
5. 대한극장
서울성곽-남산산책로2
1. 장충단공원
2. 서울성곽
3. 국립극장
4. 남산N서울타워
5. 명동
서울성곽-남산산책로3
1. 동대문역사문화공원
2. 성곽길(광희문)
3. 장충단공원
4. 성곽길(신당동)
5. 국립극장
남산한옥마을·남산공원
1.남산골한옥마을
2.타임캡슐광장 (남산공원길)
3. 와룡묘
4. 안중근의사 기념관
5. 남산봉수대지
6. 서울N 타워
행정동 15개동 기준, 법정동 기준은 74개.
소공(小公)·회현(會賢)·명(明)·필(筆)·장충(奬忠)·광희(光熙)·을지로(乙支路)·신당(新堂)1·신당2·신당3·신당4·신당5·신당6·황학(黃鶴)·중림(中林)
예관(藝館)·장교(長橋)·무교(武橋)·다(茶)·태평로1가(太平路一街)·태평로2가·을지로1가(乙支路一街)·을지로2가·을지로3가·을지로4가·을지로5가·을지로6가·을지로7가·남대문로1가(南大門路一街)·남대문로2가·남대문로3가·남대문로4가·남대문로5가·삼각(三角)·수하(水下)·수표(水標)·북창(北倉)·소공(小公)·서소문(西小門)·정(貞)·순화(巡和)·의주로1가(義州路一街)·의주로2가·충정로1가(忠正路一街)·봉래동1가(蓬萊洞一街)·봉래동2가·회현동1가(會賢洞一街)·회현동2가·회현동3가·남창(南倉)·저동1가(苧洞一街)·저동2가·충무로1가(忠武路一街)·충무로2가·충무로3가·충무로4가·충무로5가·명동1가(明洞一街)·명동2가·남산동1가(南山洞一街)·남산동2가·남산동3가·인현동1가(仁峴洞一街)·인현동2가·필동1가(筆洞一街)·필동2가·필동3가·주자(鑄字)·남학(南學)·예장(藝場)·장충동1가(奬忠洞一街)·장충동2가·묵정(墨井)·쌍림(雙林)·광희동1가(光熙洞一街)·광희동2가·방산(芳山)·주교(舟橋)·오장(五壯)·입정(笠井)·산림(山林)·초(草)·무학(舞鶴)·흥인(興仁)·신당(新堂)·황학(黃鶴)·중림(中林)·만리동1가(萬里洞一街)·만리동2가
1. 명동 明洞
명동은 장교, 무교, 다, 태평로1가, 을지로1.2가,회현동 1.2가 일부 및 회현동 3가, 남대문로1.2가 일부, 삼각, 수하, 수표동,명동1가, 2가,충무로1가,2가,저동1가,남산동1가,2가,3가 , 예장동 일부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는 동장 관할 구역명칭이다. 조선 초 한성부의 행정구역설정당시 남부 명례방의「明」자를 딴 것으로 원래 「명례방」또는 「명례방골」이라고 하다가 줄여서명동이라고 하였다.
조선초기 한성부 남부 명례방 ·훈도방 지역에 속했으며 일제 때 「정회」를 설치할 때 명치정1정목, 2정목정회가 설치되었고 광복 후 1946년 10월 명동1가,2가동회로 바뀌어 명동1 · 2가와 충무로 1 · 2가 일부지역의 행정을 담당했다. 1947년 말에 조사된 현재 명동사무소관내의 각 동을 살펴보면 저동1가는 저동1가동회, 남산동1가, 2가, 3가 지역은 남산동회가 설치되어 행정을 담당했다.
그 후 1955년 4월18일(서울특별시 조례 제66호)「동 설치조례」에 의한 행정동제 실시로 명동1가는 명동사무소의 관할구역이 되었고 주민감소로 인해 1970년 5월18일(서울특별시조례제613호)「동장 정원 및 명칭과 관할구역변경조례」에 의하여 명동1가, 명동2가, 충무로1가, 충무로2가와 함께 남산동사무소의 관할구역이 되었다. 1975년 10월 1일 (서울특별시조례 제 981호)「동장정원 및 명칭과 관할구역 변경」으로 동의 통폐합이 실시되면서 명동사무소의 관할 아래 있던 명동1가를 비롯하여 명동2가, 충무로1가, 충무로2가와 함께 남산동사무소의 관할구역이던 남산동1가, 2가, 3가와 초동 관할의 저동1가가 명동사무소의 관할구역으로 통합되었다.
이어서 1985년 9월1일(서울특별시조례 제2015호)「동 명칭 및 구역 획정조례」에 의하여 예장동 일부 지역도 명동주민센터 관할구역으로 통합되었고, 1998년 9월 14일 정부조직개편으로 인하여 장교, 무교, 다, 태평로1가, 을지로1.2가, 남대문로1.2가 일부, 삼각, 수하, 수표동을 통합 오늘에 이르고 있다.현재 명동주민센터는 남산동 2가 9-6에 위치하고 있다.
명동 거리
명동은 지금은 서울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가 되었지만, 일제 때에는 지금의 충무로인 본정(本町)보다 낙후된 지역이었다. 명동이란 이름은 조선시대에 한성 부의 행정구역5부(部)49방(坊)의 하나인 명례방(明禮坊)에서 명(明)자를 따서 지었으며, 일제시대에는 명치정 (明治町)으로 불리다가 해방 후 1946년에 명동(明洞 밝은 마을, 밝은 고을)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조선 시대 명동은 주택지였으나 일제시대 때 충무로일대가 상업지역으로 발전하면서 인접지역인 이곳도 그 영향을 받아 상가로 변하게 된 것이다. 당시 명동은 다방, 카페, 주점 등으로 형성되어 충무로에 예속된 유흥 오락가였으나 정자실백화점(현 미도파 백화점)이 생기고 명동입구에서 명동성당까지 10m도로가 확장되면서 독자적인 상가를 형성하였다. 그 후 1956년 말 충무로는 쇼핑의 기능이 약화되었고, 대신 명동이 새로 운 쇼핑 중심지역으로 변화했다.
광복 후 6·25를 거쳐 1960년대 말 경제적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남대문로2가와 을지로2가의 금융업무활동이 활발해져 금융가로 발달하였다. 1956년 이후 당시의 많은 명동지역의 주점들이 서린동, 청진동지역으로 이주해갔으며, 도시가 재개발되면서 명동에 고층빌딩이 들어서고 대형백화점, 고급양장점, 양화점, 의상실, 각종사무실 등 고급 쇼핑센터 및 전문점들이 밀집되어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들의 쇼핑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또한 이곳은 유행의 최첨단 의 지역이기도 해서 평일에도 젊은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1960년대 까지는 문인들의 집합처가 되었으며, 1970년대에는 통기타와 청바지 문화를 이룩한 낭만의 거리였다.
최근에는 강남지역에 현대식 대형 백화점들이 많이 들어서고 있어 강남지역 시민들의 발길이 점차 멀어지고 있음이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이에 따라 명동상가에서는 명동이 "세계제일의 쇼핑관광지"라는 이미지 부여 및 명동상가의 상품을 널리 홍보하고, 내·외국인 등 보다 많은 고객유치를 위하여 상인과 시민이 같이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명동축제"행사가 1982년부터 봄·가을 년2회에 걸쳐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
명동예술극장
해치홀
명동성당 꼬스트홀
명동(삼일로) 창고극장
명동난타전용관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역사 박물관
초전섬유 퀼트박물관
명동성당
나석주열사상
제중원터
부민관폭파의거터
수표교
무교터
윤선도선생 집터
3.1운동 기념터
조선광문회터
이재명의사 의거터
고운담골
나석주의사 의거기념터
한성부 서부 관아터
혜민서터
군기시터
장악원터
남산동1,2,3가, 다, 명동1가,2가, 무교, 수하, 수표동, 삼각, 을지로1,2가, 예장동, 장교, 저동1가, 충무로1,2가, 태평로1가, 남대문로1,2가 일부,회현1.2가일부, 회현3가
명동(明洞)
명동의 동명은 조선초 한성부(漢城府)의 행정구역 설정 당시 남부 명례방(南部 明禮坊)의 “明”자를 딴 것으로 원래 명례방 또는 명례방골 이라고 하다가 줄여서 명동이라고 하였다.
충무로1·2가동(忠武路)
(충무로4, 5가동과동일) 충무로의 동명은 1946년 우리말로 동명을 개정한다는 원칙에 따라 일제 본정통(本町通)으로 불렸던 것을 조선 선조(宣祖)때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왜적을 물리치고 우리 국가와 민족을 구한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장군의 시호를 따온데서 비롯된다.
저동1가동(苧 洞)
저동의 동명은 모시를 취급하는 상점인 저포전(苧布廛)이 있었기 때문에 동명이 유래되었다. 저동1가의 동서로는 명동길과 마른내길이, 남북으로는 청계고가로가 지나고 있어 교통이 발달한 지역이다. 일제때 이 지역은 일본인이 특히 많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으로 한국인과의 상권다툼이 종종 일어나던 곳이었다고도 한다.
남산동1가·2가·3가동(南山洞)
남산동의 동명은 남산(南山)의 북쪽 기슭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남산골이라고 불리던 동명에서 유래된 것으로 현재까지 통칭되고 있는 서울의 동명들 중에서도 가장 오랜 기간을 통하여 불리워지고 있는것 중의 하나이다.
태평로(太平路)
인근 서소문동에 있던 중국사신을 접대하던 태평관(太平館)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동명이다. 북쪽으로는 종로구 세종로동과 구(區) 경계로 마주보고있으며, 남쪽으로는 을지로1가와 소공동과 접하고. 동쪽으로는 무교동과, 서쪽으로는 정동과 접해있다.
장교동(長橋洞)
장교동은 종로구 관철동 47번지와 장교동 9번지 사이에 놓였던 청계천(淸溪川)위의 다리인 장교(長橋)의 이름을 따서 동명으로 한 것이다.
무교동(武橋洞)
무교동은 시청 뒤쪽에 무교(武橋)로 통하던 모교(毛橋)라는 토산과일을 팔던 모전(毛廛)다리에서 유래한다. 무교(武橋)라는 명칭은 옛날 이 부근에 무기의 제조 관리를 맡아보던 군기사라는 관청이 있어 모전다리 부근에 있던 모교동(毛橋洞)과 구별하기 위해서 무교동(武橋洞) 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다동(茶 洞)
다동은 이 지역에서 차를 마시는 공식 예절과(茶道) 다례를 주관하던 사옹원(司饔院 : 궁중에 음식을 조달하던 관청)에 속한 다방(茶房)이 있었기 때문에 다방골이라 불렀던데서 동명이 유래되었고 다방골을 한자로 고친 것이 다동(茶洞)이다.
삼각동(三角洞)
삼각동의 동명은 1914년 경성부의 전 지역에 대한 동명의 개편이 있을 때 이곳의 지형이 서쪽은 넓고 동쪽으로 가면서 좁아지는 삼각형으로 생겼기 때문에 삼각정(三角町) 이라 명명한데서 유래 되었다.
수하동(水下洞)
수하동은 원래 지금의 을지로2가와 수하동에 걸쳐 있었던 옛마을 이름인데 남산(南山)에서 발원한 창동천(倉洞川)이 흘러가는 물 아래쪽에 있어 물아랫골로 불리던 것을 한자로 고친 것이다.
수표동(水標洞)
수표동의 동명은 조선시대에 청계천의 수위를 재는 수표(水標)의 이름을 따서 유래된 동명이다. 청계천의 수위계(水位計)였던 수표는 조선시대 홍수의 조절기능을 담당했는데 물이 불어나는 상태를 수표석의 눈금을 보고 측정하여 장부에 기록한 후 호조(戶曹)를 통해 임금께 보고하는 한편 한성판윤(漢城判尹)에게도 알려 홍수에 대비하는 중요한 기구였다.
2. 소공동 小公洞
소공동은 北倉洞, 小公洞, 太平路2街, 義州路1街, 忠正路1街, 西小門洞, 貞洞 전 지역과 南大門路 2街, 南大門路 3,4街, 巡和洞, 蓬萊洞 1街 일부지역의 행정을 담당하는 관할구역 명칭이다. 조선태종의 둘째 딸인 慶貞公主의 궁이 있었으므로 속칭 작은 공주 골이라 하던 곳을 한자로 소공주동이라 하였고 이를 줄여서 소공동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북창동은 조선시대 관아인 선혜청의 북쪽창고가 있는데서 붙여졌으며, 서소문동은 서울성곽 8문의 하나인 서소문에서 유래되었고 덕수궁 북서쪽에 위치한 정동은 조선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정능이 현재 정동 4번지에 있는데서 「貞」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의주로변 이화여고와 중앙일보사가 자리한 곳에 위치한 순화동은 광복후에 순청동의 「巡」자와 화천정의 「和」자를 따서 순화동이라 하였다. 조선초기 한성부를 5부 52방의 행정구역으로 나눌때 남부의 회현방, 호현방과 서부의 황화방, 양생방, 반석방지역에 속했으며, 일제 때 경성부에「町會」를 설치할 때 남대문통2정 목정회의 관할구역으로 1946년 10월 남대문로2가동회로 바뀌었다. 1947년말에 조사된 현재 소공동사무소관할 각동의 행정을 살펴보면 북창동지역은 북창동회, 태평로2가지역은 태평로2가동회, 남대문로2가와 소공동지역은 남대문로 2가동회, 남대문로3가,4가 지역은 남대문로 3.4가동회, 서소문, 정동지역은 서소문 ·정동동회, 순화동지역은 순화동회. 의주로1가 지역은 의주로 1 · 2가동회, 충정로1가 지역은 충정로 1 · 2가동회가 설치 되었다. 숭례문 사진 이어서 남대문로 2가동회는 1948년 4월1일에는 소공동회로 바뀌어 남대문로 2가와 소공동을 관할 구역으로 하였으며 주민감소로 1950년 10훨4일에는 남대문로2가, 소공동회가 소공동84번지에 설치되어 남대문로 2가, 소공동, 삼각동을 관할구역으로 하였다. 1955년 4월 18일 (서울특별시 조례 제66호)「동설치조례」에 의한 행정동제가 실시되면서 소공동은 태평로 2가, 남대문로2가, 북창동일원과 함께 흥천동 사무소의 관할구역으로 바뀌었다.
1970년 5월18일(서울특별시 조례 제613호) 『동장정원및명칭과관할구역변경조례」에 의해 소공동이 설치되면서 소공동, 북창동,태평로2가, 남대문로2가를 관할구역으로 하였다. 1975년 10월1일(서울특별시 조례 제981호) 관할구역 변경으로 남대문로 3 ·4'가 동사무소가 폐지되면서 그 관할 구역은 소공동에 통합되었다. 1977년 9월1일(서을특별시 조례 제1181호)동장관할구역의 변경에 따라 서소문 동사무소가 폐동되면서 그 관할 구역은 소공동사무소에 통합되어 소공동, 북창동, 태평로2가, 남대문로 2가, 3가, 4가, 서소문동, 정동, 순화등, 외주로1 가, 충전로1가의 행정을 관할하였으며 1992년 1월3일(중구조례 제170호)「동경계 조정」때 봉래동 1가 지역 일부가 소공동 사무소 관할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소공동주민센터는 북창동 20-5에 위치하고 있다.
한화손보(구 제일화재) 세실극장
호암아트홀
정동극장
문화일보홀
화폐금융박물관
한국금융사박물관
농업박물관
조선일보 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덕수궁 미술관
덕수궁
정동교회
배재학당 동관
강희맹 집터
남별궁터
대한민국임시정부 서울연통부지
명례궁터
소덕문터
이충순자결터
전환국터
미국공사관
중명전
숭례문
환구단
강우규의사 항일의거자리
관립법어 학교터
남지터
독립신문사 터
서학당터
손탁호텔터
이황선생 집터
정미의병발원터
태평관터
한성부 남부 관아터
성공회성당
북창동,소공동,태평로2가,의주로1가,충정로1가,서소문동,정동, 남대문로2가,남대문로3,4가,순화동,봉래동1가
소공동(小公洞)
소공동의 동명 유래는 조선 태종의 둘째딸인 경정공주(慶貞公主)의 궁이 있었으므로 속칭 작은공주골이라 하던 것을 한자로 소공주동(小公主洞)이라 하였고 이를 줄여서 소공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북창동(北倉洞)
동명 유래는 조선시대 선혜청(宣惠廳)의 북쪽 창고가 있는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1914년 남창동에 대칭하여 남창동을 남미창정(南米倉町)이라 한데 대해 북창동을 북미창정(北米倉町)으로 하였다가 광복후 북창동이라 하였다.
태평로2가(太平路)
(태평로2가동과동일) 태평이란 이름은 조선시대 서소문동에 중국 사신이 머물렀던 태평관이 있어 붙여진 것이다.
남대문로2·3·4가(南大門路)
(남대문로5가동과동일) 조선태조7년(1398)에 건립된 남대문의 일명 숭례문의 명칭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소문동(西小門洞)
동명의 유래는 도성8문의 하나인 서소문이 있은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소문동은 조선시대 초기엔 西部 황화방(皇華坊)과 양생방(養生坊)의 일부에 속해 있었는데 1751년에 반포된「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 門分界總錄)에 의하면 漢城府 서부 황화방(皇華坊) 서 소문계·소정동계 양생방 태평관계·창동계였다.
정동(貞 洞)
정동의 동명 유래는 조선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의 계비(繼妃)인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정릉(貞陵)이 현재 정동 4번지 에 있은 데서 「貞」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순화동(巡和洞)
순화동의 동명은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우리 이름으로 변경할 때 순청동(巡廳洞)의 순「巡」자와 화천정(和泉町)의 화「和」자를 따서 순화동이라 하였다.이때까지만 해도 서대문구에 속했었으나 1975년 10월 대통령 령 제7816호에 따라 중구로 속하게 되었다.
3. 회현동 會賢洞
회현동은 회현동 1,2가 일부, 봉래동1가 일부 및 봉래동2가 전역, 남창동 전역, 순화동 일부, 남대문로 3,4가 일부, 남대문로5가 전역, 충무로1가 일부 지역 행정을 담당하는 동장관할구역 명칭이다. 회현동의 동명은 이 일대에 어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한데서 유래되었으며, 회현, 회동으로 약칭되기도 하였다. 남창동은 조선 선조대에 설치된 선혜청의 창고가 있던 남쪽이라해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조선초기 한성부를 5부 52방의 행정구역으로 나눌 때 회현동은 남부의 호현방, 명례방 지역, 남창동은 서부양생방 지역에 속했으며, 일제때 「정회」를 설치할 때 육정1정목동부정회, 서부정회가 설치되었고 광복 후 1946년 10월 회현동1가 동부동회, 서부동회로 바뀌어 회현동1가, 2가, 3가 지역 행정을 담당했다. 1947년 말에 조사된 현재 회현동사무소 관할구역내의 각동의 행정을 살펴보면 회현동 1가 지역은 회현동 1가 동부동회와 서부동회, 회현동2가와 3가 지역은 회현동2,3가 동회, 남창동지역은 남대문로 3, 4가 동회에서 행정을 담당했다.
이어서 1955년 4월 18일(서울특별시 조례 제66호)「동설치조례」에 의한 행정동제 실시에 따라 회현1가 제1동과 회현1가 제2동이 설치되었고, 1970년 5월18일(서울특별시 조례 제613호)「동장정원 및 명칭과 관할구역변경 조례」에 의해 회현동1가 지역을 관할하는 회현1가동 사무소가 설치되었다. 주민수효의 감소로 1975년 10월1일(서울특별시 조례 제981호)「동장정원 및 명칭과 관할구역 변경」에 따라 남산동사무소의 관할 일부 지역 회현동2가, 회현동3가가 편입되어 회현동사무소가 되었다.
1980년 7월1일(서울특별시조례 제1413호)에 의해 소공동사무소 관할구역의 일부가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1992년 1월3일(중구조례 170호)「동경계조정」으로 남대문로3 ·4가동 일부 지역이 회현동사무소관 구역에 편입되었다. 1998년 9월 14일 정부조직개편으로 구 남대문로5가동과 통.폐합되어 남대문로5가, 봉래동1.2가,순화동 일부 편입되어 현재 회현동주민센터는 회현동 1가 164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남대문 시장
남대문 시장은 조선조 태종 14년(1414) 정부 임대 시전으로 시작하여 선조41년(1608) 선혜청이 설치된 후 지방관리의 출입이 빈번해지면서 객사객주가 형성되어 자연적으로 저자 거리가 이루어졌고 그 후 영조16년 (1740)에는 이곳을 칠패장이라 호칭하였으며, 오늘날 점포기능을 갖는 시전이 늘어나면서 초기유통시장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910년 일본인이 중앙물산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독점 운영하던 것을 시장상인연합회를 결성 자율 관리해오다가 1964년 10월 13일 서울남대문시장 주식회사로 명칭, 정식개설허가를 득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시장의 특징은 4대 문 안 교통이 편리한 도심에 위치하여 전국각지의 소매상인과 일반시민이 매일 첫새벽부터 종일토록 북새통을 이루고,도·소매업 기능을 겸하고 있는 1만 여개의 점포에 다양한 각종상품을 고루 갖춘 세계최고 최대의 민속시장의 하나로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에게는 중요한 관광코스이기도 하며 1일 외국인 이용객만도 1000여명이 넘는다.
안중근의사 기념관
지구촌 민속 박물관
우리은행 은행사 박물관
남대문 시장
자유상가
서울역사
한국은행 본관
김유신장군 상
백범 김구선생 상
안중근의사 상
성제 이시영선생 상
선혜청터
이덕형선생 집터
3.1운동기념터
칠패시장터
회현동 1,2가 일부, 봉래동1가 일부 및 봉래동2가 전역, 남창동 전역, 순화동 일부, 남대문로 3,4가 일부, 남대문로5가 전역, 충무로1가 일부
회현동1가·2가·3가동
회현동이란 동명은 한자를 풀이해보면 쉽게 알수 있듯이 이 일대에 어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한데서 유래된 것이며 회현(會賢)·회동(會洞)으로 약칭되기도 하였다. 1946년 우리말 동명개정 원칙에 따라 욱정3정목(旭町3丁目)은 중구 회현동(會賢洞)으로 개칭되었다.
남창동(南倉洞)
남창동의 동명 유래는 조선 선조대(宣祖代)에 설치된 선혜청(宣惠廳)의 창고가 있던 남쪽이라고 해서 동명이 유래 되었다. 1946년 남쪽 쌀창고라는 뜻의 남미창정(南米倉町)은 1946년 동명의 일소로 남창동이 되었다.
봉래동1가·2가동
봉래동의 동명은 봉래교(蓬萊橋)의 다리 이름에서 연유한다. 옛날 봉래동1가에는 배오개(채소,곡류)·종루시전(그릇,시 전·연전)과 함께 서울의 3대시장의 하나인 칠패시장(어물류)이 있었다.
남대문로5가동
조선 태조7년(1398)에 건립된 남대문의 명칭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남대문은 도성 8문 가운데 가장 남쪽에 위치하여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며 또 중국·일본·등 외국사절이 출입하는 서울의 관문이었으므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때문에 도성문 중에서도 가장 웅대하게 건축했고 문의 이름을 숭례(崇禮)라 하여 동방예의지국을 나타낸 것인데 현재 국보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4. 필동 筆洞
필동은 면적 1.14㎢, 2,297세대 인구 4,697명인 필동은 筆洞1街 ·2街 ·3街, 南學洞, 鑄字洞, 藝場洞, 忠武路3街 등 법정동 7개동과 장충동2가와 충무로4가, 충무로5가 및 묵정동 일부의 행정을 담당하는 관할구역 명칭이다. 현재의 필동 일대는 조선초기 한성부 남부 성명방, 낙선방, 훈도방 지역에 속했으며, 일제때 「정회」를 설치할 때 대화정1정목회, 대화정 2·3정목회가 설치되었고 광복 후 1946년 10월 필동1가동회와 필동 2 ·3가동회로 바뀌어 필동 1.2.3가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였다. 동 이름은 조선시대 이 마을에 남부의 부사무소(部事務所)가 있어 부동(部洞)으로 부르다 와전되어 붓 골로 바뀌었고, 이 붓골을 한자로 표기해 필동이 되었다.
충무로 3가 영화인의 거리
43번지(대원빌딩)앞∼충무로3가 60-1 (극동빌딩)앞 도로 및 중부서 앞으로 통하는 소도로는 영화인의 거리, 낭만의 거리로 유명하다. 본래는 영화인들이 충무로2가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6 ·25 이후 1951년부터 충무로3가 지역으로 진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지역을 영화인의 거리로 부르게 된 것은 충무로 인접지 건물에 명화와 관련한 작가, 감독,배우, 촬영,조명,기술,영화인 협회 사무실 및 관련 인쇄소 등이 집중되어 있고 이에 따라 영화에 종사하는 많은 연예인들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붙여진 것이다. 현재 영화계에 종사하는 인원만도 1,700여명이 되고 하루 평균 200여명이 이지역을 중심으로활동하고 있다. 아쉬운것은 1970년 이후 TV가 보급되고, 더욱이 1980년 이후 칼라 TV 보급이 확대되면서 국내 영화계가 침체됨에 따라 영화계에서 활동하던 많은 종사자들의 발걸음이 갈수록 뜸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점들을 우려한 한국영화인협회에서는 영화계를 활성하 고, 이 지역을 상시 영화인의 거리로 상징하기 위하여 1985년 10월18일 지하철 3,4호선이 개통된 그 이듬 해부터 매해 개최되는 "대종상"시상식 장면들을 담은 사진들을 지하철 충무로역 벽보에 일정기간 전시하는 등 대시민 홍보에 노력하고 있다.
서울애니매이션 센터
동국대학교 박물관
대한극장
한국현대 문학관
삼각동 도편수 이승업 가옥
부마도위 박영효 가옥
제기동 해풍부원군 윤택영 재실
삼청동 오위장 김춘영 가옥
와룡묘
일석 이희승선생 추모비
동악선생 시단
만해 한용운 시비
조지훈 시비
반공청년운동 기념비
노인정터
남산사터
남학동, 예장동, 주자동, 충무로3가, 필동1가,2가,3가,충무로4.5가 일부 ,묵정동 일부
필 동(筆 洞)
필동의 명칭은 조선시대 한성부(漢城府) 5部 중의 하나인 남부의 부사무소(部事務所)가 이곳에 있었으므로 부동(部洞)이라 하였는데 이와 발음이 같은 음을 빌려와 붓골이라 하였다. 그후 部의 음과 筆의 훈이 서로 같기 때문에 붓골을 필동으로 표기하였다.
남학동(南學洞)
남학동의 동명은 조선초 태조 때부터 조선 개국 이념인 유학을 교육 시키기 위해 계획되어 태종11년에 설치된 사부학당(四部學堂)의 하나인 남부학당(南部學堂) 즉 남학당(南學堂)이 있었기 때문에 남학동 으로 불리어지게 되었으며, 남학골이라고도 한다.
주자동(鑄字洞)
주자동의 동명은 조선시대에 활자를 만들던 관아인 주자소(鑄字所)가 구4∼7번지 일대에 자리잡고 있었기에 유래 되었다. 훈도방주자동지(薰陶坊鑄子洞志)에 의하면 주자동에는 효자·열녀가 많았던 곳으로도 전해져 내려오고있다.
예장동(藝場洞)
예장동이란 동명은 조선시대 5군영 군사들이 무예를 연습하는 훈련장이 있었고 그 훈련장을 예장(藝場)이라고 불렀던 사실에 근거하여 동명이 유래되었다. 무예장(武藝場)이 줄어 예장이 된 것이다. 항간에는 이곳을 왜장터·왜장이라고 불러왔기 때문에 기인한 것이라고 하나 실은 왜장(倭將)의 의미와는 관계없는 예장(藝場)에서 따온 것이다.
6. 장충동 裝忠洞
장충동은 장충동(奬忠洞) 1가, 2가, 묵정동(墨井洞) 일부 등 3개 법정동의 행정을 담당하는 관할구역 명칭이다. 장충동이라는 명칭은 이 부근에 있던 장충단의 이름을 따서 생겨난 것이다. 1900년에 설치된 장충단은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 열사를 기리는 제를 지내던 곳인데 1946년 10월 1일 일본식 동 이름을 유서 깊은 우리 식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이 지역 일대가 장충동으로 이름 지어졌다. 그리고 묵정동이라는 동명은 「먹절골」이라는 마을이름에서 비롯되는데 이 먹절골은 지금의 묵정동, 충무로 4, 5가, 필동 2, 3가에 걸쳐있던 지역이다. 오래 전 이 일대는 「먹절」 혹은 「묵사」로 부르던 절이 있어서 먹절골 혹은 먹적골, 묵동(墨洞), 묵사동 등으로 불렸다. 먹절골에는 또한 그 깊이가 매우 깊어 늘 시커멓게 보이므로 「감정우물」이라 불리는 우물이 있었는데 바로 먹절골의 「감정우물」이 있는 곳이라는 뜻에서 묵정동이라는 동명이 유래된 것이다.
현재의 장충동 일대는 조선 초기에는 한성부 5부 52방 중 남부 명철방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그러다가 일제시대 때 장충동 1가 지역은 동서헌정(東西軒町), 2가 지역은 서사헌정(西四軒町)이 설치되었고, 광복 후 1946년 10월 장충동 1가 동회와 장충동 2가 동회로 바뀌어 각각 장충동 1가, 2가 지역의 행정을, 묵정동은 1947년 말에 묵정동회가 설치되어 각각 그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였다.
1955년 4월18일(서울특별시조례 제66호)「동설치조례」에 의한 행정동제 실시로 각각 장충동 1가동, 장충동 2가동이 되었고, 묵정동은 충무로 5가와 함께 야현동의 관할에 편입되었다. 1980년 7월1일(서울특별시 조례 제 1413호)「동사무소설치조례」에 의해 충무로 4, 5가동의 관할구역 일부가 장충동으로 편입 조정될 때 묵정동 일부가 장충동 관할이 되었고, 1985년 9월 1일 장충동 관할에 묵정동이 편입되면서 장충동 관할구역은 장충동 1가, 장충동 2가, 묵정동이 포함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장충동주민센터는 장충동 1가 37-14호에 위치하고 있다.
국립중앙극장
여해문화공간
일성 이준열사 상
학생 반공의 탑
3ㆍ1독립운동 기념탑
한국 유림 독립운동파리장서비
외솔 최현배선생 기념비
유관순 상
김용환지사 상
유정 사명대사 상
조택원 춤비
춘강 박승희 기념비
이한응선생 기념비
남소문터
장충단비
수표교
장충동1가, 장충동2가, 묵정동
장충동1·2가동(奬忠洞)
장충동의 동명 유래는 1946년 10월 1일에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이 부근에 있던 장충단(奬忠壇)의 이름을 따서 생겨난 동명이다. 1900년에 설치된 장충단은 을미사변과 그외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 열사를 기리기 위해 제(祭)를 지내던 곳이다.
묵정동(墨井洞)
묵정동의 동명 유래는 지금의 묵정동·충무로4가·충무로5가·필동2가·필동3가에 걸쳐 있던 먹절골이라는 마을 이름에서 비롯된다. 먹절골에는 먹절 혹은 묵시(墨侍)로 부르던 절이 있었기 때문에 연유되었으며 먹적골·묵동(墨洞)·묵사동으로도 부른다. 뿐만 아니라 동네 한귀퉁이에 매우 깊은 우물이 있어 늘 시커멓게 보이므로 감정우물 혹은 조정동(鳥井洞)으로 불렀는데 바로 먹절골의 감정우물이라는 뜻에서 동명이 연유되었다.
7. 광희동 光熙洞
광희동은 충무로4.5가,인현동2가,예관동,오장동, 광희동1가,광희동2가,쌍림동,을지로6가, 을지로7가 행정을 당당하는 동장관할지역명칭으로 광희동의 동명은 都城八門 가운데 하나인 광희문에서 비롯된다. 조선초 한성부 행정구역이 5부52방으로 정해질때 남부 명철방지역에 속했으며, 일제때 「정회」를 설치할때 광희정1정목정회와 광희정 2정목정회가 설치되었다.
광복 후 1946년 10월 광희동1가동회와 광희동2가동회로 바뀌어 광희동1 가지역, 광희동2가지역의 행정을 담당했다. 1947년말에 조사된 현재 광희동사무소 관내의 각동에 대해서 살펴보면 쌍림동은 쌍림동부동회와 쌍림서부동회, 을지로6가와 을지로7가는 을지로 6·7가 동회가 각각 설치되어 행정을 담당했다. 1955년 4월 18일(서울특별시 조례 제66호)「동설치조례」에 의해 동제가 실시될때 광희동1가 동사무소, 광희동2가동사무소가 설치되었다.
그 후 주민수효의 감소로 1970년 5월15일(서울특별시 조례 제613호)행정 동이 변경되어 쌍림동, 광희동1가, 광희동2가를 관할구역으로 하는 광희 동이 설치되었다. 1975년 10월1일에는 을지로 5가동이 폐동되면서 그관할 구역의 일부인 을지로6가, 을지로7가도 광희동으로 편입되었고 1998년 9월 14일 정부조직개편으로 구 충무로4.5가동과 통.폐합되어 충무로4.5가일부, 인현동2가, 예관동, 오장동일부가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광희동주민센터는 서울시 중구 퇴계로 303-3(서울시 중구 광희동1가 252)에 위치하고 있다.
두산타워
통일시장
중부시장
동화시장
평화시장
광희문
훈련원터
동평관터
인현공원
쌍림 어린이 공원
광희동1가, 2가, 을지로6가, 7가, 오장동, 인현동2가, 예관동, 충무로4,5가, 쌍림동
광희동(光熙洞)
광희동의 동명은 도성8문중 사소문에 속하는 소의문(昭義門)·혜화문(惠化門)·창의문(彰義門) 가운데 하나인 광희문(光熙門) 혹은 수구문(水口門)이라 일컫는 도성문의 하나가 있는데서 비롯된다. 현재 동대문운동장 남동쪽 출구에서 신당동으로 가는 나즈막한 고개에 이르러 퇴계로쪽으로 길을 건너면 광희문이 세워져 있는것을 볼수있다.
쌍림동(雙林洞)
쌍림동은 마을 입구에 문을 세우고 방수(防守)하여 도적을 경비하던 리문(里門)한쌍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되었다. 원래 쌍리문동(雙里門洞)이라 부르던것이 음이 변해서 쌍림동으로 되었는데 쌍이문골·쌍이뭇골·쌍문동(雙門洞)·쌍리(雙里)라고도하였다. 정동·쌍림동·오장동·충무로5가·광희동1가에 걸쳐있던 지역인데 쌍리문리→쌍문리→ 쌍리동→ 쌍림동이 된 것이다.
충무로4·5가동(忠武路)
충무로의 동명은 1946년 우리말로 개정한다는 원칙에따라 일제 본정통(本町通)으로 불렸던 것을 조선 선조(宣祖)때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왜적을 물리치고 우리 국가와 민족을 구한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장군의 시호를 따온데서 비롯된다.
인현동2가동(仁峴洞)
인현동의 동명은 인현동2가에 있는 인현이라는 고개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인현은 원래 인성(仁城)붓재의 줄인 말로 이고개 밑에 선조의 일곱째 아들인 인성군(仁城君) 공(珙)이 살았기 때문에 인성군의 부(府)가 있는 고개라 하여 인성붓재 또는 인성현(仁城峴), 이를 줄여서 인현이 되었다.
예관동(藝館洞)
예관동의 동명은 조선시대 이곳에 예관(藝館) 곧 교서관(校書館)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동명이 비롯된다. 현재 이곳에는 중구청이 자리하고 있어서 사통팔달한 교통로와 함께 중구의 행정이 이루어지고 있는 중심지역이기도 하다.
오장동(五壯洞)
오장동의 동명은 옛날 이곳에 다섯 장사가 살았던 데서 (오장삿골)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옮겨 오장동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오장사가 누구인지는 문헌상에도 없고 구전되어 오지도 않아 어느 시대인지 연대마저 추측할 수 없다.
을지로6가동(乙支路)
(을지로3.4.5가와동일)세종로·충무로 등과 함께 우리나라 역사적 의인 가운데 한분인 을지문덕(乙支文德)장군의 성(姓)에서 동명이 연유되는데, 1914년 지금의 을지로입구에 해당되는 부근이 구리개 혹은 동현(銅峴)이라 불렀으므로 이와 같은 뜻의 한자로 다시 옮긴 것이 황금정6정목(黃金町6丁目)이었고 1946년에 지금의 명칭으로 바뀌어졌다.
을지로7가동(乙支路)
(을지로3.4.5가동과 동일) 1914년 동현(銅峴)으로부터 일곱번째가 된다는 뜻으로 동현의 우리말 표현인 구리개를 다시 고친 것이 황금정7정목이었고 이를 1946년 우리말로 바꿀 때 을지문덕(乙支文德)장군의 성을 따서 을지로7가라 하였다.
8. 을지로 3가 / 4가 / 5가 乙支路
을지로동은 乙支路3街, 4街, 5街, 舟橋洞, 芳山洞, 笠井洞, 草洞, 山林洞, 仁帳洞1街,.苧洞2街 등10개 법정동의 행정을 담당하는 동장관할명칭으로 「을지로」는 1946년 10월1일 서울의 일제식동명을 우리말로 변경할때, 세종로, 충무로등과같이 우리나라 위인가운데 한분인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 장군의 성을 따서 붙여졌다. 1947년말에 조사된 현재 을지로 동사무소 관내의 각동에 대해서 살펴보면 주교동은 주교동회, 방산동은 방산동회, 입정동은 입정동회, 산림동은 산림동회, 초동은 초동회, 인현동1가는 인현동회, 저동2가동회가 설치되어행정을담당했다.
그 후 1955년 4월18일(서울특별시 조례 제 613호) 동장정원 및 명칭과 관할구역 변경조례에 의해 을지로3가동사무소가 신설되면서 그 관내에 을지로 3가, 산림동, 입정동이 관내에 속하고 을지로 4가 동사무소 관내에는 주교동, 방산동, 을지로4가, 오장동과 합쳐져 을지로 4,5가동사무소가 신설되었고, 이어서 1985년 9월1일 행정동의 통합 및 분동조치로 을지로3,4,5가동 사무소 관할구역에서 오장동과 충무로 3가가 제외되어 을지로 3,4,5가, 주교동, 방산동, 입정동, 산림동, 초동, 인현동1가, 저동2가의 10개동을 관할구역으로 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재 을지로동주민센터는 을지로 3가 65-13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방산종합시장
박웅진 시비
양성지 살던 곳
영희전터
성제묘
충무공 이순신 생가 터
고당기념관
영락교회 50주년 기념관
방산동, 산림동, 을지로3가, 4가, 5가, 입정동, 초동, 인현동1가, 주교동, 저동2가
을지로3·4·5가동
세종로·충무로 등과 같이 우리나라 역사적 의인 가운데 한 분인 을지문덕(乙支文德)장군의 姓에서 동명이 연유되는데, 1914년 지금의 을지로입구에 해당되는 부근이 구리개(을지로1가와 2가사이에 있던 나즈막한 고개의 흙이 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혹은 동현(銅峴)이라 불렀으므로 이와 같은 뜻의 한자로 다시 옮긴 것이 황금정6정목(黃金町6丁目)이었고 1946년에 지금의 명칭으로 바뀌어졌다.
주교동(舟橋洞)
주교동의 동명은 주교동 126번지 북쪽에 있던 배다리, 즉 주교(舟橋)로 불려지던 다리가 있으므로 해서 연유한 동명이며 주교는 이곳에 주교사(舟橋司)가 있었다는 데서 연유했다고도 한다. 주교동의 동명 연원이 되는 주교, 즉 배다리라는 지명이나 동리명은 국내 여러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명칭이기도 하다. 북쪽으로 종로와 구 경계를 이루고 있는 청계천이 복개되기 전에는 천변(川邊)에 위치한 나쁜 환경의 마을로 조선 시대 때는 중인 이하 신분의 계층이 주로 살았던 곳이었으나 청계천이 복계되면서 상업지역으로 발전하였다.
방산동(芳山洞)
방산동의 동명은 부근에 있는 가산(假山) 또는 조산(造山)이라 부르던 곳에 심어져 있던 무궁화꽃의 향기에서 연유되었다. 방산동은 동쪽으로 을지로6가와 연해 있고 서쪽으로는 주교동, 남쪽으로는 을지로5가와 접해 있으며 북쪽으로는 청계천로를 지나 동대문운동장과 연결되어 있다.
입정동(笠井洞)
갓방 즉 갓을 만드는 집에 우물이 있으므로 동리 이름을 갓방 우물골이라고 한 데서 연유하였다. 입정동은 동쪽으로 산림동, 서쪽으로 수표동이 연해있고 남쪽으로는 을지로3가와 접해있다.
산림동(山林洞)
산림동은 살리뭇골이라는 옛 자연부락명 명칭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산림동은 살리뭇골이라는 의미의 산림과는 관계없는 하천변의 평지에 형성된 마을이므로 이 동명이 어울리지 않는 면이 있다.
초 동(草 洞)
초동은 초전동(草廛洞)의 약칭으로 지금도 초전골로 전해져오며, 개초(蓋草), 마(麻), 갈(葛) 등을 가공하지 않고 재료 그대로 파는 초물전(草物廛)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생긴 동명이다. 동쪽으로는 인현동1가와 접하며, 서쪽으로는 저동2가와 남쪽으로는 충무로3가와 접해 있고 북쪽으로는 을지로 3가와 접한다. 또 초동의 남북으로는 돈화문로가 지나고 있고 동서로는 마른내길이 지나고 있다
인현동1가동(仁峴洞)
仁賢이란 우리말로 ‘인성붓재’라고 부르던 지금 인현동1가와 인현동 2가에 걸쳐 있던 고개이름에서 취한 동명이다. 인성붓재는 이 고개 밑에 조선 선조의 일곱째 아들인 인성군(人城君) 영(瑛)이 살았기 때문에 인성군의 집이 있는 고개라는 의미에서 인성붓재 혹은 인성부현(仁城府峴)이라 하였고 이를 인성현 혹은 인현으로 불렀다.
저 동(苧 洞) 저동의 동명은 지금의 저동1가·2가·충무로2가·을지로2가·장교동에 걸쳐 있던 마을인 모시전골에서 비롯되었다. 모시전골은 조선 시대에 이 지역에 모시와 황모시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모시전 즉 저시전이 있었다 하여 생긴 동명인데 저전동(茅廛洞)으로 부르던 것이 저동으로 약칭되었다.
9. 신당동 新堂洞
신당동은 興仁洞, 舞鶴洞등 2개 법정동과 신당동중「금호동길」북쪽지역의 행정을 담당하는 동장관할구 역명칭으로 1949년 이후에 구획된 성동구 신당동중에서 흥인동회, 무학 제1동회, 무학제2동회 지역이다. 「청계천」남쪽,「다산로」동·서쪽에 위치한 흥인동의 동명은 동대문의 이름인 興仁之門에서 유래되었고, 신당동 네거리 남서쪽 왕십리길과 다산로를 끼고 있는 무학동의 동명은 도로교통안전협회 남쪽에 위치한 舞鶴峯,(표고92m)의 산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하며 이산은 학이 이곳 봉우리에 와서 춤을 추었기 때문에 무학봉이 되었다고 전해 내려온다. 1955년 4월18일(서울특별시 조례 제66호)「동설치조례」에의해 여러동 을 관할하는 행정동제를 실시하면서 동회의 명칭과 관할구역이 재조정 되었다.
1966년 7월6일(서울특별시 조례 제419호)「동 관할구역 조정」으로 흥인동과 무학동이 각각 분동되었고. 1970년 5월 18일에는 (서울특별시조례 제613호)「동장정원및 명칭과 관할구역 변경조례」에 의해 흥인동사무소와 무학제1,2동사무소를 신당제1동사무소로 변경하여 을지로7가 종 점을 기점으로 신당동 264-1번지, 274-2번지, 295-27번지에 이르는 도로 서쪽과 398-38번지를 경유하여 중구경계선의 동쪽지역과 흥인동, 무학동 전역을 관할하였다. 1975년 10월1일(대통령령 제7816호)대폭적인 구·동의 관할구역 재편성이 있을 때 중구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신당동 주민센터는 다산로 122-1 (신당동 300-6)에 위치하고 있다.
동평화시장
남평화시장
광희시장
청평화시장
신평화 패션타운
무학동,신당동,흥인동
신당동(新堂洞)
신당동은 신당(神堂)을 모신 동네라는 뜻을 갖고 있는 동명으로 신당 (神堂)이란 무당들이 받들어 모시는 신령을 모신 집을 말하며. 갑오개혁(甲午改革)때 神堂과 발음이 같은 新堂으로 바뀌었다.
흥인동(興仁洞)
흥인동의 동명은 동대문의 이름인 흥인지문(興仁之門) 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1966년 7월에 신당동에서 분동(分洞)되었다. 그러나 1950년에 발행된 서울 市勢一 覽에 보면 신당동의 행정동명으로 흥인동이 오래 전부터 쓰여진 호칭으로 나타난다.
무학동(舞鶴洞)
무학동은 도로교통안전협회 남쪽에 위치한 무학봉(舞鶴峰)의 산 이름에서 유래한 동명으로 학이 이곳 봉우리에 와서 춤을 추었기 때문에 무학봉이 되었다. 무학이라는 명칭이 호칭된 것은 무학봉 남쪽 기슭에 있던 동네를 무학골이라 한 데서 시작된다.
신당제1동∼6동까지
신당동은 신당(神堂)을 모신 동네라는 뜻을 갖고 있는 동명으로 신당 (神堂)이란 무당들이 받들어 모시는 신령을 모신 집을 말하며. 갑오개혁(甲午改革)때 神堂과 발음이 같은 新堂으로 바뀌었다.
황학동(黃鶴洞)
황학동이라는 동명이 생긴 유래는 정확하지 않으나 1936년에 만든 대경성정도(大京城精圖)에만 해도 이곳이 대부분 논밭이었는데 황학(黃鶴)이 날아 왔었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현재 신당제5동 관내에 옛날 자연부락의 하나인 백학동(白鶴洞)이 있기 때문에 황학동의 동명 유래를 가능하게 한다.
10. 중림동 中林洞
중림동행정동으로서의 중림동은 중림동, 만리동1가, 만리동2가, 의주로2가 등 4개의 법정동을 관할하는 동장관할구역 명칭이며, 이 4개의 법정동명은 1946.10.1.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 동명으로 바꿀 때 확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림동이라는 법정동명은 약전중동과 한림동의 글자를 각각 한 자씩 따온데서 비롯되었는데, 약전중동이란 명칭은 조선시대에 이곳이 장안에 약을 공급하는 "가운뎃말"이었던 데서 유래되었으며, 한림동이란 명칭은 조선시대 이정암 3형제가 모두 이곳에 살면서 한림 벼슬을 지냈으므로 그들이 거주하던 곳을 한림동이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옛마을 이름으로 가운뎃말, 한림골, 형제우물골을 들 수 있다. 1947년말에 조사된 현재 중림동사무소 관내의 각동에 대해서 살펴보면 의주 로2가는 의주로1,2가동회, 만리동1가는 만리동1가동회, 만리동2가는 만리동2 가 서부동회와 남부동회가 각각 설치되어 행정을 담당했다. 1955년 4월 18일(서울특별시 조례 제66호)「동설치조례」에 의해 행정동제를 실시할때 서대문구 중림동으로 설치되었다가 1975년 10월 1일(대통령령 제 7816호)전면적이고 대폭적인 구 동의 관할구역 재편성으로 중구로 편입되었 고 중림동과 의주로2가 일원을 관할구역으로 하였다. 1980년 7월1일(서울특별시 조례 제1413호)만리동이 폐동되면서 만리동1가와 만리동2가도중림동의관할구역으로포함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중림동주민센터는 양정길 31(만리동2가 194-58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약현성당
손기정 월계관 기념수
윤관장군 상
고산자 김정호 기념비
손기정 흉상
손기정 체육공원
서소문 공원
손기정 도서관
만리동1·2가, 의주로2가, 중림동
중림동(中林洞)
중림동의 동명은 이곳을 이루고 있는 서부(西部) 반석방(盤石坊) 약전중동(樂田中洞)과 한림동(翰林洞)의 글자를 각각 한 자씩 따온 데서 비롯된다.
의주로2가동(義州路)
의주로의 동명은 의주(義州)로 통하는 길 아래라는 뜻에서 1914년에 의주통2정목(義州通2丁目)이라 하던 것을 우리말로 고친 것인데, 서울∼의주간 시발지역으로서 북으로 가는 도성문인 서대문에서 두번째 블록이라는 뜻도 포함된다.
만리동1가·2가동(萬里洞)
만리동의 동명은 광복후 처음 만들어진 이름으로 만리현(萬里峴)의 이름을 따서 동명이 되었다. 또한 일설에는 세종때 한글 창제를 반대한 최만리가 살던 곳이라 하여 유래되었다 한다.
11. 다산동
다산동은 산당동중에서 「금호동길」 남쪽과 「다산로」 서쪽지역의 행정을 담당하는 동장관할 구역명칭이다. 다산동은 1949년 이후에 구획된 성동구 신당동중에서 충현동회지역으로 1955년 4월 18일(서울특별시 조례 제 66호)「동제」 실시때 忠峴洞事務所의 관할구역은 신당동 339-12번지를 기점으로 393-2번지, 386번지 앞 도랑을 따라 신당동 379-1번지, 359-9번지, 35-96번지, 432-14번지에 이르는 도로를 경계로 중구경계선 동쪽지역이었다. 1970년 5월 18일 (서울특별시 조례 제 613호)「동장정원 및 명칭과 관할구역 변경조례」에 의해 충현동사무소는 신당제2동 사무소가 되었고 1975년 10월 1일 중구로 편입되었으며 그후 1992년 1월 3일(중구조례 제 170호) 「동경계조정」때 신당제 1동사무소 관할 일부지역이 신당제 2동사무소 관할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신당제2동주민센터는 신당2동 432-24(장충얄개길 30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12. 약수동
약수동은 신당동 중에서 「지하철 3호선」약수역 남동쪽 출구 즉 「동호로」남쪽이자 「다산로」동쪽지역인 응봉산(鷹峯山)기슭의 행정을 담당하는 동장관할 구역명칭이다. 1949년 이후에 구획된 성동구 신당동 중에서 藥水洞會 지역인데 1949년 6월말 현재 약수동회의 현황을 살펴보면 세대수는 1,763세대, 인구는 9,087명 (남자 4,982명, 여자 4,105명)이었다. 1955년 4일18일(서울특별시 조례 제 66호)「동제」 실시때 약수동사무소의 관할구역은 신당동 74-20번지앞 도로를 횡단하여 369-28번지, 346-211번지 앞도로를 따라 금호동을 경계로 신당동 374-20번지, 360-2 번지, 354번지를 연결하는 도로를 경계로 중구경계선 동쪽지역이었다. 1970년 5월 18일(서울특별시 조례 제 613호)「동장정원및 명칭과 관할 구역 변경조례」에 의해 약수동사무소는 신당제3동사무소가 되었고 1975 년 10월1일 중구로 편입되었고, 1993년 5월 3일 재개발 사업승인으로 1994년 4월부터 건물 1,830동을 철거하여 총면적 20.138m²에 총 5,150세대의 아파트가 신축되었으며 2000년 6월 10일부터 입주가 시작되었습니다. 현재 약수동주민센터는 중구 다산로 239(신당동366-15)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버티 고개
신당동 끝과 약수동이 이어진 부근 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곳에 있는 높고 큰 고개를 버티고개라고 한다. 옛날에는 길이 좁고 다니는 사람이 없어서 도둑이 많았으므로 모양이 험 악하고 마음씨가 곱지않은 사람을 보면 "밤중에 버티고개에 가서 앉을 놈'이란 농담을 하였다. 옛날 순라꾼 들이 야경을 돌면서 '번도!'하면서 도둑을 쫓았는데 그말이 변하여 번티 (番時)버티, 버터 또는 한자명으로 부어치(扶於峙)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한성부의 진산인 삼각산의 인수봉이 어린애를 업고 나가는 형국이므로 그것을 막기 위해 서쪽의 무악과 떡고개를 두어서 어머니가 떡을 가지고 그 애를 달래 서 머무르게 하고, 또 남쪽에는 벌아령(伐兒嶺)을 두어서 아이가 나가면 벌을 주겠다고 하여 그 아이를 못 나가도록 막았다는것인데, 그 벌아령이 변하여 버티고개라는 이름이 붙게 되 었다고도 한다. 버티고개의 약수는 유명하였는데 약수동이란 동명도 이 약수에서 유래 된것이다.
13. 청구동
청구동은 신당동 중에서 지하철 3호선 약수역 북동쪽 출구 즉 「동 호로」북쪽이자 「다산로」동쪽지역의 행정을 담당하는 동장관할구역이다. 청구동은 1949년 이후에 구획된 성동구 신당동중에서 靑丘洞會 관할지역이었으며 1955년 4월 18일(서울특별시 조례 제66호)「동제」실시때 청구동사무소의 관할구역은 신당동 308-2번지를 기점으로 374-20번지를경유하여 346-98번지에 이르는 도로 동북방의 지역과 신당동 308-2번지에서 금호동에 이 르는 도로 남쪽지역이었다. 1970년 5월 18일(서울특별시 조례 제 613호)「동장정원 및 명칭과 관할구역변경조례」에 의해 청구동사무소는 신당제4동사무소가 되었고,1975년 10 월 1일 중구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 청구동 주민센터는 신당동 333-17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14. 신당5동
신당제5동은 신당동 중에서 지하철 2호선 신당역 남쪽 즉 「다산로」동쪽이자 「왕십리길」남쪽일대의 행정을 담당하는 동장 관할구역 명칭이다. 신당제5동은 1945년 이후에 구획된 성동구 신당동 지역에서 문화동회(文化洞會) 일원과 유락동회(有樂洞會) 일부 지역으로 참고로 1949년 6월 말 현재 문화동회 현황을 살펴보면 세대수는 1,675세대, 인구는 8,736명(남자 4,476명, 여자 4,260명)이었다. 1955년 4월 18일 서울특별시 조례 제66호「동제」실시 때 문화동사무소의 관할구역은 신당동 302-4번지를 기점으로 297-1번지 앞 도로를 따라 289-3번지를 경유하여 252-22번지 앞 도로를 경계로 신당동 292-72번지 앞까지의 지역이었다. 1970년 5월18일(서울특별시 조례 제613호)「동장정원 및 명칭과 관할 구역변경조례」에 의해 문화동사무소는 신당제5동사무소로 되었고, 1975년 10월 1일 중구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1980년 7월 1일 서울특별시 조례 제 1413호「동사무소 설치조례」에 의해 신당제7동이 폐동되어 신당 제5동과 제6동에 편입될 때 면적이 0.11㎢, 인구 7,339명이 전입되어 동의 규모가 늘어났다. 현재 신당제5동주민센터는 신당동 150-7(신당역남길 59)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15. 동화동
동화동 은 신당동 지역중에서 「다산로」동쪽의 무학봉 기슭 일대의 행정을 담당하는 동장 관할구역, 동화동은 1949년 이후에 구획된 성동구 신당동 지역중 東和洞 일원과 有樂洞 일부지역이었고 1955년 4월18일(서울특별시 조례 제66호)「동제」 실시때 동화동사무소의 관할구역은 신당동 67-75번지를 기점으로 62-35 번지, 59-1번지앞 도로를 경계로 하왕십리동 경계까지와 신당동 67-75번지에서 52-15번지, 54번지를 경유하여 문화동 경계에 이르는 도로의 동북방지역 이었다. 1970년 5월 18일(서울특별시 조례 제613호)「동장정원 및 명칭과 관할 구역 변경조례」에 의해 동화동사무소가 신당제6동사무소로 변경되었으며, 1980년 7월 1일(서울특별시 조례 제1413호)「동사무소 설치조례」에 의해 신당제7동이 폐동되고 일부가 신당제6동으로 편입되었으며. 그후 1992년 1월 3일 (중구 조례 제 170호)「동경계 조정」때 신당제5동 관할 일부지역이 신당제6동 관할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대 동화동 주민센터는 신당동 850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16. 황학동
황학동이란 동명이 생긴유래는 정확하지 않으나 1936년에 만든 「대경성정도」에 의하면 당시 이곳이 대부분 논밭이었는데 黃鶴이 날아왔었다는 이야기가 있어 이에 비롯된 듯하며, 또한 현재 신당제5동 관내에 옛날 자연부락의 하나인 백학동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 대비하여 황학동 이란 동명이 생기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가능케한다. 조선초 한성부를 5부 52방으로 나눌때 한성부에 포함되지 않았는데 영조 27 년(1751년)에 반포된 「도성 3군문 분계총록」에 의하면 남부 두모방(성외)신당 리계였으며, 갑오개혁때는 한성부 남서 두모방(성외) 왕십리계 신당동으로, 이듬해 5월 26일에는 칙령 제98호로 한성부 남부 신당리동이 되었다.
1936년 4월 1일 (부령 제8호)황학동은 신당정으로 개칭되어 경기도에서 경성 부로 편입 되었으며, 1943년 6월 10일 (부령 제163호)성동구 신당정이 되었다. 광복 후 일제식동명변경에 따라 서울시 성동구 신당동으로 불리워지다가 그 후 서울특별시 조례 제419호에 의해 신당동에서 법정동으로 분리되어 황학동으로서의 명칭을 가지게 되었으나 1970년 5월 18일(서울특별시 조례 제 613호) 신당제8동으로 개칭되었다. 1975년 10월 1일 성동구에서 중구로 편입되었고 이때 상왕십리동 일부가 황 학동으로 편입되었고 1975년 l0월 10일 (서울시 조례 제 1286호)「동명칭 및 구역획정」이 있을때 신당제8동이 황학동으로 개칭되면서 신당동의 일부도 황학동에 편입되어 현재와 같은 구역의 확정이 이루어졌다. 현재 황학동주민센터는 난계로11길 52(황학동 1010)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서울중앙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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