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세상 쳐다보기

수도 서울의 심장부, 중구 中區

草霧 2013. 12. 11. 12:30

 

 

 

수도 서울의 심장부

 

중구 中區

    

 

 

  

Jung-gu (Chung-gu)

 

 

 

서울특별시의 중앙부에 있는 구.

19344월 경성부 중앙사무소가 발족되었으며, 그해 6월 중구직할구역소로 개편되었다. 19434월 구제(區制)를 실시함에 따라 중구가 되었다.

 

 

 

 

 

 

 

 

 

 

 

 

 

시의 중앙에 위치한 구. 구청 소재지는 예관동이다.

조선시대 한성부의 남부 광통방(廣通坊회현방(會賢坊명례방(明禮坊태평방(太平坊훈도방(薰陶坊낙선방(樂善坊성명방(誠明坊)

서부의 양생방(養生坊) 일부, 반석방(盤石坊)의 일부지역

1943년 구제(區制) 실시로 중구가 되었다.

 

 

 

 

1943610일 총독부령(總督府令) 163호에 의한 경성부(京城府) 구제도(區制度)의 실시에 따라 이전의 한성부(漢城府) 남부(南部) 광통방(廣通坊회현방(會賢坊명례방(明禮坊대평방(大平坊薰陶坊(훈도방성명방(誠明坊낙선방(樂善坊명철방(明哲坊)의 전역과 서부(西部) 양생방(養生坊반송방(盤松坊반석방(盤石坊황화방(皇華坊)의 각 일부 지역을 합하여 중구(中區)라 하였다.

 

 

 

 

백제국의 기초 위례성

위례성의 위치

고구려의 한강유역 확보와 남평양(南平壤)

삼국통일과 한양군(漢陽郡)

한양군 설치

 

고려전기의 양주(楊洲)

고려초 왕실의 직할지로써 양주지방

지방제도 정비와 양주목(楊洲牧)

지방제도의 개편과 양주목(楊洲牧)

민정적(民政的) 성격이 강화된 양주(楊州)

문종(文宗)의 남경(南京)설치

숙종(肅宗)의 남경 건도(建都)

고려말(高麗末)의 한양천도론(漢陽遷都論)

한양천도(漢陽遷都)

한양정도(定都)

천도론의 배경

위례성의 위치

한양정도의 실현

한성부 설치와 남부

한성부 설치

한성부 직제와 관장업무.

한성부 행정구역 설정과 남부

도성건조와 崇禮門(숭례문) 건립

도성건조

숭례문(남대문) 건립

수도방위체제와 軍營(군영)

수도방위체제

한성부 도성 수비구역

한양정도(定都)

중구지역과 軍營(군영)

 

외교정책과 太平館(태평관)東平館(동평관)

명의 사신을 위한 태평관

왜나라 사신을 위한 동평관

 

賑恤制度(진휼제도)惠民署(혜민서)

烽燧制度(봉수제도)와 남산봉수대

鑄字所(주자소)校書館(교서관)

圖畵署(도화서)

掌樂院(장악원)

宣惠廳(선혜청)

均役廳(균역청)

    

중구지역의 왕실의 저택과 祠宇(사우)

木覓神祠(목멱신사, 국사당(國師堂))

貞陵(정릉)興天寺(흥천사)

儲慶宮(저경궁)

木仁顯王后(인현왕후) 생가

豊恩府院君(풍은부원군) 趙萬永의 노인정

 

개화기의 중구

수도 한성에 외국인의 거주

노인정회담과 갑오년 개혁

대한제국의 선포와 소공동의 圓丘壇(원구단)

 

일제강점시기의 중구

朝鮮銀行(조선은행) 설립

朝鮮殖産銀行(조선식산은행)의 설립

東洋拓殖會社(동양척식회사)의 설립

한반도 금융기관 남대문로 집중화

京城府(경성부)청사의 건축

 

중구지역에서의 독립운동

사이토(齋藤)총독 저격사건

동양척식() 투탄사건

 

815광복 직후의 서울과 중구

미군정 실시

서울의 특별시 승격과 중구

625사변과 중구의 피해

중구의 구역확장

행정구역 개편 및 확장

 

1952년 도시계획의 변경

1 중앙토지구획 정리사업

2 중앙토지구획 정리사업

세운상가(世運商街) 건설

도심 재개발사업의 태동

소공동 화교지구 이전 철거

 

 

 

명칭은 서울의 가운데에 있다는 데서 얻은 것이다.

남쪽의 남산(262m)·응봉(175m)을 비롯하여 동쪽·서쪽·남쪽은 대체로 100m 내외의 저산성 산지로 둘러싸여 있으며, 북쪽은 복개된 청계천이 종로구와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명칭은 서울의 가운데에 있다는 데서 얻은 것이다. 대한민국의 많은 광역시에서 중구라는 자치단체명을 사용하기 때문에 대민 표어 등에는 서울 중구란 표기를 흔히 볼 수 있다. 남쪽은 남산 주봉 능선을 따라 용산구와 접하고, 북쪽은 청계천을 따라 종로구와 접하며, 서쪽은 서대문구, 동쪽은 성동구와 접해 있다. 따라서 남산의 산각 사이를 작은 개천이 흐르고 그 사이를 동현(銅峴송현(松峴인현(仁峴야현(冶峴종현(鐘峴) 등의 고개가 잇고 있다. 복개되었던 청계천이 복원되어 새로운 경관을 보이며 자연생태가 살아나고 있다.

 

남산의 북쪽 사면은 일조가 좋지 못하나 지하수가 풍부해 생활용수를 얻기 쉽기 때문에 조선시대부터 평민이나 중인·하급관리와 세력을 잃은 양반의 후손들이 모여 남촌(南村)을 이루어 왔다. 그렇지만 청학동과 회현동 일대는 경관이 수려하여 권문세력들의 세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훈련원(訓鍊院남별영(南別營남소영(南小營) 등이 있어 많은 장교들이 거주하였다.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 군대와 일본군대가 각축을 벌이면서 그 세력에 힘입어 중국 화교촌과 일본인 상가가 형성되었으며, 급기야 충무로 일대를 중심으로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중심의 새로운 남촌이 형성되었다. 이때 형성된 명동 일대의 상권은 현재까지 서울의 도심지역에서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벼슬에서 물러난 양반이나 하급관리·중인·평민 등 주로 가난한 서민들이 거주했으며, 청일전쟁 이후 소공동에는 화교촌이, 남대문·명동·충무로 일대에는 일본인 상가들이 들어섰다. 이때부터 일본인들은 각종 현대식 건물과 상가를 짓고 퇴계로 등의 길을 정비하는 등 중심 시가지로의 토대를 마련했다. 소공동·을지로 등지에는 대규모 백화점, 시장, 호텔 등의 상업·유흥 기능과 금융·언론·관청·기업체본사 등의 중심업무기능이 밀집해 있다. 을지로변에는 인쇄·출판·가구·목재업이, 청계로변에는 기계·공구·의류업 등이 발달했으며, 남대문·동대문·평화 시장 등의 도매시장은 전국적인 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중구는 수도 서울의 심장부로서 그 지역적 특성은, 경제, 문화, 언론 및 유통의 중추 기능이 집중되어 있고, 이로 인하여 주·야간 활동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이며, 기존의 재래식 가옥과 현대식 고층빌딩이 혼재하고, 도시의 기반 시설이 점차 노후 되어 지속적인 정비가 요구되고, 신당동 및 중림동 일대의 주택재개발사업이 완료되어 아파트지구가 형성되었다.

 

청계천로 모습또한 수도서울의 심장부로서 퇴계로, 을지로, 청계천로, 남대문로, 왕십리길 등의 간선도로가 관통하고 지하철 1-6호선이 통과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남대문, 중부, 평화시장 등 대형 재래시장과 롯데, 신세계 등 대형백화점 및 명동, 충무로의 현대식 쇼핑가, 두산타워, 밀리오레 등 신·구 유통 시장이 복합적으로 형성되어 서울의 중심적인 상업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남창동

남창동은 광해군 2(1610)에 설치된 宣惠廳의 창고가 지금의 숭례문과 남대문시장사이 고지에 있었으므로 南倉洞·北倉洞의 명칭이 생겨 났다. 이곳에는 선혜청 이외에도 雙檜亭·紅葉亭 名士들의 정자가 있었고 또 仁祖때 영의정 尙震의 집인 상정승댁이 이곳에 있어 尙洞 또는 상정승골이라 하였다. 倉洞川의 원류가 이 마을로 흘러 현재 시청 앞으로 거슬러 올라와 무교를 지나 소광교 아래로 청계천 본류로 흘러 들어갔다.

 

쌍회정에는 흥미있는 이야기 한 토막이 전해져 온다. 남산의 성내편(城內便) 일대에는 風致가 매우 아름다워 역대의 名臣들 중에도 시문에 능한 자들에게는 별천지라 하리만큼 많은 저택이 있었다. 남창동 202번지의 터전에 자리하고 있던 雙檜亭도 그 중의 하나였다. 선조때 名相인 오성 李恒福과 그의 후손으로 헌종·철종·고종 3대에 걸쳐 정승의 자리에 있던 李裕元이 살던 곳이었다.

 

이유원이 지은 春明逸史에 의하면 鰲城 이항복이 이곳에 저택을 짓고 그 마당에 손수 두 전나무를 심었다. 수대를 거치는 동안 家産이 기울어져 이 집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 버렸는데 산 사람이 이곳에 정자를 짓고 쌍회정이라 하였다. 뒤에 자기 조상이 살던 땅에 세운 이 정자를 다시 구매하였다. 이때는 두 그루의 전나무 중 한그루가 벌목되었기 때문에 다시 한 그루를 구해 심었다는 것이다.

 

일설에는 이 쌍회정이 한말 흥선대원군이 명명한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 이유원이 이 집을 사서 아담하게 꾸민 다음, 대원군을 비롯한 朝廷百官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이 연회석상에서 이유원이 대원군에게 정자의 이름과 함께 휘호를 부탁하였다. 대원군은 쾌히 응락하고 앞으로 바라보니 두 그루의 전나무가 우뚝 서 있어 쌍회정이라 명명하고 현판에 '雙檜亭' 3자를 썼다. 그러나 실은 대원군이 평소에 이유원을 미워했기 때문에 이때를 타서 잠깐 희롱하는 뜻으로 나라의 미회는 一檜인데도 나라를 그르쳤는데 이유원은 二檜나 된다는 뜻으로 雙檜라고 했다고 한다. 이유원이 뒤에 이 사실을 타인에게 전해 듣고 두 그루의 전나무를 베어 버리고 액자도 떼어 없애 버렸다고 한다.

 

보은단골

태평로 1180번지 현 롯데호텔 동남쪽에 宣祖譯官 洪純諺(1518~1608)이 살았으며 이 마을을 보은단골(報恩緞洞고운담골·곤담골(美洞)등 여러 이름으로 불렀는데 이에 대한 아름다운 설화가 전해진다. 역관 홍순언이 사신을 따라 북경으로 가던 도중 通州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객고를 풀기 위해 홍등가를 거닐던 그는 어느 遊廓 앞에 멈추어 섰다. 유곽마다 解語花債가 명시되어 있었는데 유독 한 집에만 '은 천냥을 갖지 않았으면 들어오지 마십시오' 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호기심이 동해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옆집 노파에게 물어보았다. 노파는 하룻밤 함께 자는데 필요한 금액으로 중국의 내노라하는 난봉들도 은 천냥이면 거금이어서 감히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홍순언은 속으로 '얼마나 예쁜 계집이길래 이렇게 비싼 값을 받으려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면서 그 집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이윽고 술상을 차려 들어오는 여자는 화려한 색옷에 분단장을 한 여인이 아니라 하얀 소복을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품격이 몸을 팔 여인이 아닌 良家의 규수 같아서 더욱 이상하게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연이 있는 것 같아 '어인까닭으로 소복을 입었소?' 하고 물어 보았다. 여인은 '소첩은 본시 浙江 사람이온데 가세가 기울어져 벼슬을 구하려 상경한 부모님을 따라 왔으나 갑자기 몹쓸 병에 걸려 두분이 함께 돌아가시었습니다. 친척이라고는 누구 한 사람 없는 북경에 혈혈단신이 된 소첩의 처지로서는 부모님의 장례는 물론 시신을 고향에 모시어 返葬할 도리가 없어서 생각하다 못해 몸을 팔아 장례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면서 흐느껴 울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홍순언은 그 여인이 측은하고 가여운 생각이 들어 '그 장례 비용은 얼마면 되오' 하고 물었다. 삼백냥이 될 성 싶다는 여인의 말에 선뜻 돈을 건네 주면서 '이 돈으로 빚도 갚고 부모님의 시신을 고향으로 모셔 장례를 치르고 어렵더라도 굳세게 살아가길 바라오' 하고 당부하였다. 그날 밤 여인이 돈 값으로 동침을 요구하였으나 그는 끝내 거절하였다. 이에 감격한 여인은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하고 물었으나 홍순언은 하는 수 없이 조선에서 온 역관이라며 이름을 일러주고 밖으로 나왔다. 여인은 몸을 더럽히지 않고 많은 돈을 얻어 부모님의 장례를 고향에 모실 수 있었으며 그 은혜를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살았다. 세월이 흘러 여인은 나라 禮部侍郞 石星의 후실이 되었다. 석상은 후실로부터 지난 날의 이야기를 듣고서 홍순언의 의로움에 감격하여 조선 사신이 올 때마다 홍순언이 왔는지 묻곤하였다.

 

명나라 <大明會典>에 조선 왕실의 계보가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가 이자춘인데 李仁任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어 이것을 바로 잡기 위하여 선조 17(1584)黃廷彧宗系誣奏請使가 되어 파견될 때 홍순언이 역관으로 수행하였다. 사신 일행이 북경에 입성, 숙소인 玉河館에 가기 위해 朝陽門을 들어서는데 장막을 치고 융숭하게 사신 일행을 맞았다. 전에 없던 환대를 받아 이상히 여겼는데 석성이 따로 앉아있는 자리로 홍순언을 불렀다. 그 자리에 여인도 앉아 있었다. 홍순언이 들어서자 '은인님 어서 오십시오' 하면서 여인은 큰 절을 올리고 석성에게 이 분이 말씀드린 홍역관 나으리라고 소개하였다. 당황하던 홍순언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바라보니 연전에 紅燈街에서 구해준 그 여인이었다.

 

석성은 우리나라 사신 일행과 달포 동안 함께 있으면서 <대명회전>에 기록된 잘못된 부분을 고쳤다. 석성이 후실이 된 그 여인은 그 동안 홍순언에게 줄 선물로 비단옷감을 손수 짜서 나전함 열개에 함마다 오색비단 열 필씩을 넣어 금은보화와 함께 선물로 주었다. 홍순언이 끝내 사양하자 그 여인은 금은보화는 그만 두더라도 비단만은 직접 짠 것이니 제발 사양하지 마시고 받아 달라고 간청하면서 중국에 사신으로 오면 반드시 자기 집에서 유숙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홍순언도 더 이상 사양할 수 없어 허락을 하였다. 석성의 일꾼들이 압록강까지 따라와 비단을 강가에 놓고 갔다. 그 비단에 '報恩緞(보은단)'이란 꽃무늬의 글씨가 수놓아져 있었으며 이 말이 전해져 홍순언의 집이 있던 마을을 보은단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홍문동 紅門洞

三角洞에 조선시대 紅門이 서 있어 이 마을을 紅門洞또는 弘門洞, 홍문선골 등으로 불렀다.이 마을에 서 있던 홍문은 보기 드믈게 中人을 위해 세운 것으로, 中宗金處善이라는 사람이 양부모에게 한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김치선은 지체있는 양반가문인 金宏弼의 집안 사람이었으나 거듭된 흉년과 질병으로 부모를 일찍 여의고 유모의 품안에서 자라나 열다섯살 나던 해에 유모마저 돌림병으로 갑작스레 죽자 김치선은 茶洞에 있는 육의전 상인의 집 심부름꾼이 되었다. 부모와 친척마저 없던 그는 나이 스물이 되도록 혼인조차 못 올리고 있었으나 남달리 총명하면서도 부지런하였고 어딘지 모르게 귀티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주인 安氏도 과년한 딸이 있었지만 미천한 신분이어서 양반과는 혼사를 생각지도 못하고 같은 상인 가운데 뛰어난 사람을 골라 사위로 삼아 가업을 이어주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는 연산군이 왕 위에 오른지 얼마되지 않는 사이에 무오사화·갑자사화 두 번의 옥사를 치르어 정국이 매우 술렁대었고 모두가 몸 조심을 하던 때였다. 김처선이 윤씨 폐위에 앞장섰던 김광필의 먼 친척이 자신의 양반집안의 자제임을 알면서도 사대부 집안의 길을 따르지 않고 육의전 상인 안씨의 사위가 되었다. 그는 뛰어난 두뇌로 사업을 하여 육의전 상인 가운데서도 으뜸이 되었다.

 

그는 자신을 키워 준 유모에 대한 고마움으로 유모의 제사를 모셨으며 그가 죽은 뒤 아내 안씨 또한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남편의 젖어미의 제사를 지극한 정성으로 받들었다. 뒷날 反正으로 中宗이 왕위에 오른 뒤 이 이야기가 조정에 전해지자 길러준 어미에 대한 아름다운 마음을 金處善부부가 가졌다 하여 紅門을 세워 주었다. 그 뒤부터는 이 마을을 홍문선골 또는 홍문동이라 했다 한다.

 

버티고개

신당동 끝과 약수동이 이어진 부근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높은 큰 고개를 버티고개라고 한다. 옛날 이 고개는 길이 좁고 다니는 사람도 없어서 도둑이 많았으므로 모양이 험악하고 마음씨가 곱지 않은 사람을 보면 '밤중에 버티고개에 가서 앉을 놈' 이란 농담을 하였다. 옛날 순라꾼들이 돌면서 '번도!' 하면서 도둑을 쫓았는데 그 말이 변하여 번티(番峙), 버티, 버터 또는 한자로 扶於峙가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한성부의 진산인 삼각산의 인수봉이 어린애를 업고 나가는 형국이므로 그것을 막기 위해 서쪽의 무악과 떡고개를 두어서 어머니가 떡을 가지고 그 애를 달래서 머무르게 하고, 또 남쪽에는 伐兒嶺을 두어서 아이가 나가면 벌을 주겠다고 하여 그 아이를 못 나가도록 막았다는 것으로 그 벌아령이 변하여 버티고개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영미교 永美橋

황학동에서 종로구 숭인동 숭신국민학교와 東廟로 나가는 교차로에 조선시대 가설된 永度橋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청계천 복개공사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 영도교는 조선초에는 旺尋坪大橋라고도 하였으며 고중 이후에는 永美橋라 불렀는데 그것은 永尾洞에서 내려오는 개천 끝에 놓인 다리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내놓고 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로 귀양갈 때 이다리를 건넜으며 이 때 宋妃는 이곳까지 따라와 端宗과 생이별을 하고 숭인동의 淨業院 암자에 시녀 셋과 함께 草根木皮로 지내면서 매일 東望峰에 올라 동쪽 영월을 바라보며 夫君의 평안을 빌었다. 그 뒤부터는 이 다리를 永離別橋라 하였는데 이것이 永尾橋로 변음되었다고 한다.

 

약주 藥酒

萬理 2洞 前 양정고등학교 동쪽 운동장은 宣祖 宰相 藥峰 徐省의 집터로 徐藥峰터라 한다. 서성의 어머니 이씨가 이곳에 집을 수십간 짓는데 비록 눈은 멀어서 보지 못하였으나 감역하는 것이 매우 치밀해서 정상인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이씨가 보통사람들보다 뛰어나다는 소문을 일찍이 들은 적이 있는 목수는 일부러 대청 기둥을 거꾸로 세워 그녀의 능력을 시험코자 하였다. 구석구석을 손으로 만지며 점검하고 있던 이씨는 즉시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며 목수에게 바로 잡을 것을 요구하자 목수가 기둥을 바로 고쳐 세웠던 일도 있다.

 

아직 젊었을 때 어린 아들 서성만 데리고 청상과부가 된 이씨는 아들을 위해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왔으나 아는 사람도 없고 가지고 있던 돈도 다 떨어져 가서 막연하던차에 藥峴客主에 머무르게 되었다. 평소 음식솜씨가 뛰어났던 이씨는 묵고 있던 주막집 주인이 혼자서 애쓰는 것을 보러 가는 사람들에게 주었는데 모두가 맛이 뛰어나다는 찬사를 보내주어 그곳에서 주먹밥을 만들었으므로 이를 약밥이라 하였고, 눈이 먼 이씨가 막걸리를 만들면서 한없이 걸러내자 맑은 술이 되었는데 그 맛 또한 일품이었으므로 사람들은 淸酒藥酒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정승골 (尙洞)

상정승골은 현재 남창동·북창동·남대문로 3·태평로 2가에 걸쳐 있던 마을로 정승이 살던 집이 있어 尙洞 또는 상정승골이라 하였다. 정승이란 中宗明宗年間 老德大臣 尙震 甫의 아들이다. 그는 中宗 14(1519)文科及第하여 史管이 되어 校閱로 있으면서 고향에 내려 갔을 때 다음과 같은 일화를 남겼다. 상진은 아버지가 소 두마리로 밭에 쟁기질하는 것을 보고 '어느 쪽 소가 더 낫습니까?'하고 물었다. 이때 아버지는 아무 대답을 않더니 은밀히 짐승의 마음도 사람의 마음과 같은 것이라, 실인즉 나이 어린 놈이 낫다고 말하자 상진은 '아버님께서는 명예 같은 것을 탐내지 않으시는 隱君子 십니다' 라며 경솔히 물었던 것을 사과 드리고 그 후로는 삼가 그 가르침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여 남에게 거리끼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뒤 그는 1548(明宗 3)에 우의정이 되어 15년 동안 3정승을 두루 지냈다. 당시 홍계관 이라는 점 잘치는 사람이 있어 상진도 그를 신임했으며 그는 상진의 죽을 날까지 예언하였고 상진도 그것을 믿고 죽음을 앞두고 모든 일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언한 날짜가 지나도 상진이 죽지 않았음을 호남에 내려가 있던 홍계관이 수소문 끝에 알고 찾아가자 상진은 '어찌 이번만은 자네 점이 틀리지 않는가?' 하였다. 홍계관은 '대감의 命壽는 어긋남이 없는데 陰德으로 수명을 연장한 예가 있었으니 대감께도 반드시 그런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진이 기억을 더듬어 '그런 일은 없으나 내가 修撰 벼슬에 있을 때 퇴청해 집으로 돌아오다가 노상에 붉은 보자기가 있어 주워보니 순금 잔 한 벌이 싸여 있었네.

 

이튿날 내가 대궐 문 앞에 아무날 물건을 잃어버린 사람은 나를 찾아오라는 방을 써 붙인 적이 있었는데 그 다음날 임금의 음식을 차리는 대전 수라간 별감이 찾아와서 자식의 혼인이 있어 몰래 주방에 있는 금잔을 내어왔다가 잃었으니 이미 죽을 죄를 범하였다면서 고개를 숙이고 한탄하기에 이 금잔의 일은 극비에 부치겠다 하고 돌려주었던 일이 있었네' 하자 이에 홍계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감의 수명연장은 그때 일 때문입니다' 하였다.

 

어느날 임금께서 대궐 뒤 御苑에 납시어 모든 신하들이 받들어 모신 자리에서 술을 내리셨다. 은 평소에 술을 못 마셨는데 하사하신 술을 마시고 길가에 쓰러져 있었다. 임금께서 공이 술에 취하여 길가에 쓰러져 있음을 알고 下敎하시기를 '大臣이 길가에 쓰러져 있으니 미안스러워 어찌 지나겠는가? 장막으로 가리게 하여라' 하여 장막을 둘러 보살피게 한 다음 덩()이지나갔다. 이때 공의 나이 71세였다. 이 일을 계기로 관직을 내어 놓고 물러났다. 이 해에 공이 세상을 떠나자 임금께서는 '悼老德大臣'이란 제목의 弔詩르 지어 弔喪케 하였다. 이러한 공의 청렴과 관용은 黃喜정승 다음으로 쳤으며 한국 吏度의 상징으로 昇華되기도 한다. 이 어진 정승이 마을에 살았던 데서 상정승골 또는 尙洞이라 하였다.

 

 

 

한국은행 사진소공동, 북창동 등 중구 핵심지대는 회사, 무역상사, 은행본점 등의 중추 관리 기능이 밀집됨으로써 중심업무 지구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고, 핵심지역의 외곽도 보험 및 증권회사, 행정관리 기능과 전문 서비스 지구를 형성하고 있으며, 도서출판과 보도기능 같은 서비스 기능도 입지하고 있다. 이와 같이 중구의 중심 지대에는 중추 관리 기능이, 간선도로변에는 도심성 소매활동이 간선 도로 후면에는 서비스 활동이, 을지로와 청계천에는 기계, 기구, 부속품 등의 판매 지역이 서로 연계하여 분포되어 있다. 아울러 도심지역의 각 블록의 앞면에는 빌딩군을 이루고 있고 뒷면은 여전히 오래된 주택들이 남아있는 곳이 많으며 이들은 주로 음식점, 주점, 숙박업소로 이용되고 있어 역시 도시로서의 일면을 나타내고 있고 최근 도심재개발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제조업의 발달

관영수공업장의 설치

민영수공업의 발달

상품유통의 현장

시전(市廛)의 설치

칠패(七牌) 난전의 성황

창고의 집중적 건설

물가상승의 본거

중구의 상가

일제시대 중구 남대문통남미창정(남창동)북미창정(북창동)태평통장곡천정(소공동)본정(충무로)명치정(명동)황금정(을지로

조선호텔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공회당사우공회의소은행집회소비전옥여관일본항공수송회사 객화취급소경성부도서관기독교청년회, 조선은행경성우편국삼월백화점정자옥식산은행저축은행안전은행경성전기()천대전빌딩총독부도서관한성은은행

 

백화점

남대문시장

금융기관 남대문로 집중

동일은행해동은행한성은행상은지점, 제일은행 지점식산은행안전은행 지점상은은행 본점조선은행저축은행

 

각종 제조업의 중심지

종로가 조선인 숙박의 중심이었던 반면 중구는 일본인 숙박업의 중심이었다.조선호텔반도호텔,경성호텔, 광화문호텔, 임옥호텔, 본정호텔

 

서울 경제권의 다핵화 현상과 중구

한국금융업의 본거지

 

 

 

서울의 중심적인 상업도시

서대문·광화문·을지로2가 사이에는 서울특별시청이 있고, 서울의 중앙업무지구가 형성되어 있으며, 언론·은행·재벌회사 등의 본사가 모여 있어 우리나라 경제력이 집중되어 있는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중구는 수도 서울의 심장부로서 퇴계로, 을지로, 청계천로, 남대문로, 왕십리길 등의 간선도로가 관통하고 지하철 1-6호선이 통과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남대문시장, 중부시장, 평화시장 등 대형 재래시장과 롯데백화점, 신세계백화점 등 대형백화점 및 명동, 충무로의 현대식 쇼핑가, 두산타워, 밀리오레 등 신구 유통 시장이 복합적으로 형성되어 서울의 중심적인 상업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또한 명동·충무로 일대는 유흥 및 상업 중심지를 이루며, 특히 남대문시장을 비롯해 대형 백화점 등이 몰려 있어 서울의 중심상업지역을 이룬다. 청계로와 인접한 지역에는 대규모의 의류시장인 평화시장·동대문종합시장을 비롯한 서울의 대형시장이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중구는 상주인구보다 유동인구가 훨씬 많은 곳이다. 따라서 중구는 서울의 25개 구 가운데 가장 작은 면적과 인구로 형성된 도심지역이 된다. 그리고 을지로 일대에는 인쇄업이 서울에서 가장 발달해 있으며 특히 영세한 소규모의 시설로 이루어져 있다.

 

청계로·을지로·퇴계로가 동서방향의 교통간선을 이루며, 의주로(義州路태평로(太平路남대문로·삼일로·돈화문길·훈련원로·흥인문로와 장충단길 등이 남북방향의 교통간선을 이룬다. 서쪽에는 우리나라 철도의 시발지인 서울역이 있어 서울의 출입문 구실을 하고, 지하철 1·2·3·4·5호선이 동서남북으로 뻗어 있어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수도 서울의 중심지

서울의 4대문 내 중심 업무지구 (Central Business District)

도심지 주변의 전이지역 (주거지)

정보·유행·소비 (쇼핑, 여가 등), 첨단기술 제품 (전기, 전자, 통신)의 발상지

행정부서, 각종 금융 및 기업의 본사 등 중추관리 기능의 중심

전국 및 국제적 판매망을 형성하는 종합시장, 백화점, 쇼핑가 등이 위치한 쇼핑, 유통, 판매의 중심지

국립극장, 영화, 현대미술관 등이 위치한 문화활동의 중심

동대문운동장, 장충체육관 등 시민 스포츠 활동의 중심지

 

교통의 중심지

전국의 철도망을 연결하는 서울역

지하철 1~6호선의 경유 및 교차지점

시내버스 노선이 집중적으로 경유

 

강세황

권람

김상용

김상헌

김석주

김장생

김집

남궁억

박은

박지원

상진

성현

이경하

이덕형

이순신

이안눌

이지남

이행

정광필

정여창

정태화

한명회

홍순언

홍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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