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세상 쳐다보기

중랑천, 중랑구 中浪區

草霧 2013. 12. 11. 12:47

 

 

 

 

 

중랑천

 

 

중랑구 中浪區

    

 

 

 

Jungnang-gu (Zhonglang)

 

 

 

서울특별시의 북동부에 있는 구.

원래는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에 속했으며, 1963년 서울시 동대문구에 편입되었고 1988년 동대문구에서 분리·신설되었다.

 

동쪽은 경기도 구리시, 북쪽은 노원구·구리시, 남쪽은 광진구, 서쪽은 중랑천 건너 성북구·동대문구와 접해 있다. 동대문구에서 분구될 때, 분구의 기준이 되었던 중랑천(中浪川)에서 이름을 따왔다.

 

 

 

 

 

 

 

 

시의 동북부에 위치한 구. 구청 소재지는 신내동이다.

조선시대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九里面

1963년 구리면 상봉·중화·묵동·신내·망우리 등과 성동구 면목동이 동대문구에 편입

1988년 중랑구 신설

 

 

 

 

 

 

 

현재의 중랑구는 망우산을 중심으로 삼각점이 되는 봉화산과 용마산 지역에 구석기, 청동기 시대의 각종 유물들이 출토되어 중랑지역의 역사는 기원전 3만년 후기 구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특히 상봉동 봉수대에서 면목동에 이르는 지역에는 1960년대 까지만해도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었는데 이는 중랑일대가 후기 청동기시대, 초기 철기 시대의 성읍국가 지역이었음을 보여줍니다.삼국시대에는 백제의 한강유역 확보의 교두보 역할을 하였으며, 통일신라 시대를 거쳐 고려초 983년 전국에 12목을 설치하면서 양주목이 되었습니다.

 

1663( 조선 현종 4)에 허목에 의해 쓰여진 한성목장지도 중 진헌마정색도를 보면 불암산을 배경으로 남으로는 한강을, 북으로는 아차산을, 서로는 중랑천·청계천 일부·신촌을 경계로 하고 있으며, 동으로는 그 경계가 명확치 않으나 지금의 광진구와 중랑구를 포함하고 있어 중랑 일대가 한성 목장 지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1895526일 칙령 제101호로 전국을 23336군으로 개편한 이듬해 8623부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13도로 나누면서 한성부에서 분리하여 양주를 양주군으로 경기도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19131229일 조선 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해 중랑지역은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현재의 상봉·중화· ·망우·신내동)과 고양군 뚝도면 (현재의 면목동,중곡동)의 일부였고, 1949815일에 서울특별시 구역 확장으로 고양군 뚝도면 면목리가 서울시로 편입되었고, 196311일 다시 양주군 구리면의 상봉·중화··망우·신내리가 편입되어 현재의 상봉·중화·· 망우·신내동이 되었습니다.

 

이때 망우리에 망우출장소가 설치되었다가,196811일에 폐지됨에 따라 동대문구에 편입되어 행정동간 조정으로 면목 동이 면목1,2동으로 분동 되었습니다.19737월에는 관악.도봉의 2개구가 증설됨과 동시에 구간 조정으로 면목동의 일부가 성동구로 편입되면서 면목1동을 면목3,4동으로 분동 하였습니다.1975101일에는 면목 2동을 면목 2·5동으로, 197791일에는 면목1동 일부를 면목 6동으로 망우동은 망우1·2동으로 분동·신설하였습니다.

 

198071일에는 묵동을 묵1·2동으로, 망우 2동을 망우 2·3동으로 분동·신설하였고 그후 198811일 인구 과대구를 분구 중랑·노원·서초·양천·송파의 5개구가 증설되었는데, 중랑구는 동대문구로부 터 분리·신설 되었으며, 17개동을 분할하고 동명칭은 면목1·2·3·4·5·6·7, 상봉1· 2, 중화1·2, 망우1·2·3, 신내동으로 하였습니다.그후 198961일 인구 과다동인 중화1동을 중화1·3동으로 199271일 면목6동을 면목6·8동으로 199631일 신내동을 신내1·2동으로 분동·신설하여 20개 행정동이 되었습니다.

 

200811일에는 행정의 비효율성을 개선하고 주민들의 문화,복지공간을 확충하여 고객 중심의 복지서비스를 강화하기 위하여 면목1동과 면목6동을 면목본동으로, 면목3동과 면목8동을 면목3·8동으로, 중화2동과 중화3동을 중화2동으로, 망우1동과 망우2동을 망우본동으로 통폐합하여 현재의 16개 행정동이 되었습니다.

 

 

중랑의 어원은 중량(中良)이다.

지금의 중랑구에 중량포가 있었음이 태종 17(1417) 왕조 실록에 처음 등장한다. 그 다음은 1442년 편찬된 춘정집(변계량 문집)에 나온다. 그 후 중량()포란 글은 왕조실록에만 22번 나온다.

 

중량은, 당시 대재학 변계량이 친형인 춘당 변중량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세조 실록에는 변중량이 충신이었다는 뜻으로 충량포(忠良浦)라고 한 것이 9번 있었다. 그외 중량()포라고 된 것이 영조실록에 한번 있었다. 1724년 경종(장희빈의 아들)의 임시 릉으로 이 곳이 지정되자 글자를 바꾼 것이다. 그 후 해동지도(1750), 증보문헌비고 한성부(1770), 대동여지도(1861), 승정원 일기, 일성록, 등에서 모두 중량()포로 기록되었다. 다시 1732년 남계집(남계 박세채, 1631-1695)은 남계가 수기한 것을 그대로 옮기니, 중량()포였다. 일본 강점기를 지나면서 중랑()포란 기록이 많아졌다. 일본인이 량을 발음하기 어렵기 때문에 랑()으로 바꾸었다고,'한국의 산하'(홍익재, 1990, 119), '한강'(대원사, 1997, 42)에 기록되어 있다. 예외로 중국 서적 광여도(1555)에는 랑()을 썼으니, 혼용도 하였으나, 민간에서는 2000년 까지도 중량(中梁)이나, 중랑(中浪)보다 중량(中良)이 더 많이 사용되었다. 1998년 중랑구(中浪區)가 신설되면서 연사인식이 잘 안되어 중량이란 말은 급격히 감소하였다. 2004년 양주교 북쪽에 보이는 교량에 중량()교라 적혀 있던 동판이 중랑()교로 바뀌면서 중량이란 말이 이 지역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이 지역 망우리에 있던 변중량 가의 산소들이 개발에 밀려 타지로 이동하면서 그 흔적은 더욱 희미해졌다. 드물게 나이든 이[누가?]가 경영하는 음식점 등은 2012년 현재에도 여전히 중량이라고 사용되고 있다. 1990년대까지 이지방에 살았던 사람들은 중랑이란 말은 모르고 모두 중량이라고 한다.

 

그런데 서울특별시 홈페이지의 (3장 한강 북쪽의 물줄기..1절 서울 동북의 운하 중랑천) 부분에서 한 필자[누가?]는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正祖實錄26 정조 121016(甲辰) 한성부에서 서울 각 부의 방()과 계()의 행정명칭을 정하였다. 이 때 동부(東部) 흥인문 밖의 중랑포계(中浪浦契)를 인창방(仁昌坊)에 소속시킨다는 기록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기록은 중량포(中梁浦)와 중랑포(中浪浦)의 용어가 혼용되었음을 보여 주는 명백한 자료이다. 따라서 중랑(中浪)’이라는 용어는 일제가 창작해 낸 것이 아니고 우리 역사속에서 사용되던 용어임을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이 지역을 흐르고 있는 하천 이름의 연원이 중량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중량포에서 그 어원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지금 현재 하천의 이름인 중랑천은 전혀 문제가 없는 이름이며, 중랑구의 자치행정구역 명칭도 일제가 만들어낸 용어가 아님을 밝혀둔다. 다만 종래 주로 한천으로 불리던 것이 어떠한 연유에서 근대 이후 중랑천으로 바뀌었는가는 다시 재고해야할 문제이지만 용어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용마, 망우, 봉화산 등 자연녹지가 많은 전형적인 주거지역

동쪽은 불암산에서 뻗어 내린 구릉산(검암산), 망우산, 용마봉의 산줄기가 발달해 있고, 북쪽은 봉화산 일대의 구릉지가 있다. 서쪽으로 묵동천, 면목천이 계곡 사이를 흘러 중랑천에 합류되고, 다시 한강으로 유입된다. 그리고 면목천과 중랑천이 만나는 지역은 상습 침수 지역이었으며, 대부분 복개되어 있다.

 

동쪽은 아차산 줄기와 망우리고개를 경계로 구리시와 접해 있으며, 남쪽은 광진구, 서쪽은 동대문구와 성북구, 북쪽은 노원구와 접해 있다. 대체로 중랑천과 검암산·망우산·용마봉 서쪽 기슭의 중랑천 일대의 충적평야 지대에 주택지가 발달해 있다. 그리고 농경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반면 노동력이 풍부해 잡화·일용품·의류업이 활발하다. 이 지역은 1970년대 초 토지구획정리사업 시행으로 농경지가 주택지로 변모해 대부분 주거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면목로

새주소사업이전 면목동길은 군자동 361-1의 앞길에서 면목우체국을 경유 상봉동 115-1(상봉삼거리, 상봉역)에 이르는 폭 10~25m, 길이 5,900m의 도로였다. 1984년 가로명 제정시 면목동을 관통해 지나므로 동명을 인용하여 면목동길이라 하였다. 이 길의 명칭이 인용된 면목동은 전관평을 중심으로 한 목마장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구문계, 고문계, 문계 등의 옛 지명으로 불리던 들판이 성문과 관련된 것으로 보아 면목이란 목장문이 있던 곳, 혹은 말목장의 소재지 등으로 해석된다. 이 길은 주택지가 밀집되어 있는 면목동, 중곡동, 군자동 일대를 관통하므로 남북을 연결시키는 기능을 갖고 있다. 2007도로명주소법이 제정 ·시행됨에 따라 2008년 새주소 정비사업을 거쳐 2010422도로명주소법 시행령21조 제1항의 규정에 의거 광진구 군자동 66에서 중랑구 상봉동 삼거리구간이 면목로로 결정되어 고시되었다. (서울특별시 고시 제2010-149)

 

망우로

새주소사업이전부터 망우로는 청량리로터리(동대문구 청량리동 266)를 기점으로 하고, 청량리·휘경·상봉·망우동을 중앙선과 나란히 동북으로 뻗어 망우리고개를 넘어 시계(망우동 산 52-4)에 이르는 폭 35m, 길이 6,800m의 도로였다. 따라서 망우로는 당시 제기로, 이문로, 중랑천길, 2, 1, 면목동길, 용마산길, 한천로와 교차하는 동부지역의 주요 간선도로였다. 망우로의 명칭은 19721126일에 서울특별시가 한양천도 578주년 기념일을 맞아 시내 이름 없는 59개 가로에 대한 이름을 부여할 때 망우로로 제정하여 지금까지 불리어 오고 있었다. 그후 2007도로명주소법이 제정?시행됨에 따라 2008년 새주소 정비사업을 거쳐 2009710도로명주소법 시행령21조 제1항의 규정에 의거 동대문구 시조사에서 중랑구 망우동 구간이 망우로로 결정되어 고시되었다.

(행정안전부 고시 제2009-30)

 

겸재로

새주소사업이전 겸재길은 면목동 193-13에서 망우3531-41까지며 면목 제2동과 면목본동을 동서로 횡단하여 용마산길 교차점까지 이르는 폭 25m 길이 2,000m의 지선도로였다. 겸재길은 면목동길과 교차하며 1984117일 가로명 제정 때에 처음 제정된 신설도로였다. 겸재길의 명칭은 국내의 명승고적을 두루 찾아다니면서 한국적 산수화풍을 세운 조선의 화가 정선(鄭敾)의 호를 인용한 것이다. 정선은 조선 숙종 2(1676)~영조 35(1759)대의 화가로서 우리나라의 산수를 잘 그려 동국산수화종(東國山水畵宗)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서울에 살면서 나라안 곳곳의 명산고적을 두루 찾아 그 곳의 경치를 사생하여 한국 산수화의 독자적인 특징을 잘 살린 조선후기의 뛰어난 화가였다. 그의 자는 원백, 호는 겸재 혹은 난곡(蘭谷), 본관은 광주(光州)로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으며 벼슬은 현감을 지냈고 84세까지 평생을 우리나라 산수의 참모습을 그대로 그리는 독자적인 수법을 써서 진경화를 많이 그렸다. 2007도로명주소법이 제정?시행됨에 따라 2008년 새주소 정비사업을 거쳐 2010520도로명주소법 시행령21조 제1항의 규정에 의거 동대문구 휘경동49-295에서 중랑구 면목동 531-5구간이 겸재로로 결정되어 고시되었다. (서울특별시 고시 제2010-187)

 

동일로

새주소사업이전 동일로는 망우로와 교차하는 중랑구 상봉동 117-3를 기점으로하고, 중랑구 중화묵동노원구 공릉하계중계상계동을 남북으로 종단하여 시계인 상계동 1200-6 35m, 길이 10,200m의 도로이다. 당시 동일로는 동이로와 연결되며 화랑로, 월계로, 방학로와 교차하며 동이로와 함께 동부지역의 간선도로였다. 동일로는 19721126일 그 명칭이 제정되었다. 즉 이날 서울특별시가 한양천도 578주년 기념일을 맞아 59개 가로에 대한 이름을 제정공포할 때 동일로로 명명되어 지금까지 불리어왔다. 새주소사업이전 동이로는 망우로와 교차하는 중랑구 상봉동 구 한독약품 앞(상봉동 118-19)을 기점으로 하여 영동대교 남단에 이르는 폭 30m, 길이 8,100m의 동부지역의 간선도로였다. 당시 동이로는 중랑구 상봉동과 면목동, 광진구 중곡동, 군자교 남단을 지나 군자송정화양성수동을 연결하고 망우로, 봉우재길, 중랑천길, 겸재길, 사가정길, 천호대로, 광나룻길, 구의로 ,뚝섬길과 교차하여 동일로와 연결됐다. 동이로는 19721126일에 제정되었다. , 이날 서울특별시가 한양천도 578주년 기념일을 맞아 시내 59개 가로에 대한 가로명을 제정할 때 동이로로 명명되어 지금까지 불리어 왔다. 2007도로명주소법이 제정?시행됨에 따라 2008년 새주소 정비사업을 거쳐 2009710도로명주소법 시행령21조 제1항의 규정에 의거 동일로와 동이로가 동일로로 일원화되고 성동구 성수동2가에서 경기 양주시 마전동 구간(28,595m)동일로로 결정되어 고시되었다. (행정안전부 고시 제2009-30)

 

경춘북로

2007도로명주소법이 제정·시행됨에 따라 2008년 새주소 정비사업을 거쳐 2009710도로명주소법 시행령21조 제1항의 규정에 의거 중랑구 신내동(신내I.C)에서 남양주시 화도읍 묵현리 구간(18,032m)경춘북로로 결정되어 고시되었다.(행정안전부 고시 제2009-30)

 

용마산로

새주소사업이전 용마산길은 광진구 중곡동을 기점으로 하고 면목동과 망우동을 남북으로 뻗어 망우로 교차점에 이르는 폭 25m, 길이 3,720m의 지선도로였다. 당시 용마산길은 겸재길, 봉우재길, 망우로와 교차하며 1984117일 가로명 제정 때에 처음 제정된 신설도로였다. 용마산길의 명칭은 이 도로가 지나는 면목동의 용마산을 인용한 것이다. 표고 348m의 용마산은 경기도 구리시와 경계를 이루며 아차산의 최고봉이다. 용마산은 예로부터 서울의 외사산으로 불리어졌는데, 북쪽의 북한산, 서쪽이 덕양산, 남쪽의 관악산과 함께 외사산을 형성하였다. 이는 서울방어의 제2선으로, 1선인 내사산 즉 백악산, 낙타산, 목멱산(남산), 인왕산을 연결하는 방어선과 함께 서울방어의 역할을 다하였다. 새주소사업이전 능산길은 망우동 358-5(망우로)에서 신내동 산59(신내I.C)까지 연결되는 폭 25m, 길이 2,350m의 도로였으며, 1993723일 구릉산을 상징하여 능산길로 정하였다. 2007도로명주소법이 제정?시행됨에 따라 2008년 새주소 정비사업을 거쳐 2009710도로명주소법 시행령21조 제1항의 규정에 의거 용마산길과 능산길이 용마산로로 일원화되고 광진구 중곡동에서 중랑구 신내동(신내I.C) 구간(7,303m)용마산로로 결정되어 고시되었다.(행정안전부 고시 제2009-30)

 

중랑천로

새주소사업이전 중랑천길은 장안교 남단을 기점으로 하고 중랑천을 따라 면목제2동을 남북 및 동서로 지나 동일로와 교차하는 폭 20~25m, 길이 4,030m의 지선도로였다. 중랑천길은 1984117일 가로명 제정 때에 처음 제정된 신설도로로 중랑천 뚝밑을 지나는 도로이기 때문에 하천명을 인용한 것이다. 중랑천은 일명 중랑개, 한천이라고 하며 경기도 양주에서 시작하여 의정부시를 거쳐 상계면목중곡동을 지나 살곶이다리에서 청계천과 합류하여 한강에 들어선다. 2007도로명주소법이 제정?시행됨에 따라 2008년 새주소 정비사업을 거쳐 2010610도로명주소법 시행령21조 제1항의 규정에 의거 중랑구 면목동1031-41에서 중랑구 묵동233-1 구간이 중랑천로로 결정되어 고시되었다.(중랑구 고시 제2010-18)

 

봉우재로

새주소사업이전 봉우재길은 중랑구 면목제2동 중랑초등학교앞(면목동 191-89)을 기점으로 하고, 면목1, 2동과 상봉동의 경계와 망우동을 동서로 횡단하여 용마산길과 교차하는 망우동 사거리까지에 이르는 폭 20~25m, 길이 2,340m의 지선도로였다. 봉우재길은 1984117일 가로명 제정 때에 처음 제정된 신설도로로 그 명칭은 봉우재를 인용한 것이다. 봉우재는 묵동의 자연부락의 큰말 뒤에 있는 산으로 예전에 변방이나 국내에서 일어나는 변란을 알리는 신호로 이산에서 봉화를 올렸으므로 봉화산, 또는 봉우재라 하였다고 한다. 2007도로명주소법이 제정?시행됨에 따라 2008년 새주소 정비사업을 거쳐 2010610도로명주소법 시행령21조 제1항의 규정에 의거 중랑구 면목동192-70에서 중랑구 망우동465-14 구간이 봉우재로로 결정되어 고시되었다.(중랑구 고시 제2010-18)

 

사가정로

새주소사업이전 사가정길은 기점을 마장로, 천호대로와 교차하는 신답사거리로 하고 답십리전농장안면목동을 동북으로 뻗어 용마산길과 접하는 면목동 523-23까지 이르는 폭 20m, 길이 3,200m의 지선도로였다. 당시 사가정길은 전농한천장안 동이로, 면목동길과 교차하며 중랑천에서 장안교를 지난다. 사가정길은 원래 면목로로 불리어졌다. , 서울특별시가 1978629일 서울시내 이름 없는 16개 도로에 대한 가로명을 제정할 때(서울특별시 공고 제 277) 이 도로의 종점지역인 면목동의 동명을 따서 면목로라하여 불리워 지다가 1984117일 가로명 제정때에 사가정길로 개칭한 것이다. 사가정길의 명칭은 아차산 앞 벌판에 거주했던 조선초기의 학자이며 대신인 서거정의 호를 인용한 것이다. 서거정은 조선 세종2(1420)~성종19(1488)때의 학자로 자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정이다. 세종~성종까지 6대에 걸쳐 임금을 섬기며 6조의 판서를 두루 거쳐 한성판윤 2번 대사헌 2, 대제학 23, 시관 23번을 역임하며 45년간에 걸쳐 고위 관직을 역임하였다. 2007도로명주소법이 제정?시행됨에 따라 2008년 새주소 정비사업을 거쳐 2010422도로명주소법 시행령21조 제1항의 규정에 의거 동대문구 답십리동(신답역 사거리)에서 중랑구 면목동(용마산로)구간이 사가정로로 결정되어 고시되었다. (서울특별시 고시 제2010-149) .

 

상봉로

새주소사업전 면목동 50-46(용마산길)에서 상봉동 79(망우로)까지 연결되는 폭 25m, 길이 1,350m의 도로이며 1993723일 상봉동을 상징하여 상봉동길이라 하였다. 2007도로명주소법이 제정?시행됨에 따라 2008년 새주소 정비사업을 거쳐 2010610도로명주소법 시행령21조 제1항의 규정에 의거 중랑구 면목동 50-46(용마산로)에서 중랑구 망우동564-11(망우로) 구간이 상봉로로 결정되어 고시되었다.(중랑구 고시 제2010-18)

 

면목천길

새주소사업전 면목동 1509-11(2)에서 상봉동 83-1(상봉터미널)까지 연결되는 폭 25m, 길이 2,560m의 도로이며 1993723일 면목천길로 정하였다. 2007도로명주소법이 제정?시행됨에 따라 2008년 새주소 정비사업을 거쳐 2010610도로명주소법 시행령21조 제1항의 규정에 의거 중랑구 면목동 1509-9(동일로)에서 중랑구 면목동291-2(면목로) 구간이 면목천로로 결정되어 고시되었다.(중랑구 고시 제2010-18)

 

 

 

 

 

 

 

http://www.jungnang.seoul.kr/html/03_execute/kd08_0301.php

http://www.jungnang.seoul.kr/html/03_execute/kd08_0401.php

 

 

 

 

 

경기, 강원지역 관문으로써 서울 동북부의 교통 요충지역

구의 동부와 동남부는 용마봉(348m)·아차산(316m) 줄기로 둘러싸여 있으며, 북부에는 봉화산(160m)이 솟아 있다. 중랑천이 서쪽 경계를 따라 남류한다.

 

원래 중랑천 연안의 충적지는 농경지로, 동북부의 구릉지는 배밭으로 이용되던 농업지역이었으나, 1970년대초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주거지로 변모했다. 한독약품·삼성신약·크라운제과 등을 비롯한 각종 제조업체가 입지하고 있으며, 서울 근교의 남양주시·양주군 등지에서 생산된 우유를 가공하는 유제품가공공장이 있다. 또한 중앙선으로 운반된 석탄을 이용한 연탄제조공장과 묘비·석탑 등을 만드는 석재가공공장 등이 있다.

 

교통은 중앙선 철도가 지나고 망우로(忘憂路)를 이어 6번국도 강릉노선과 46번국도 경춘로가 중앙을 횡단하여 강원도로 이어지며, 광진구 화양동에서 상봉동을 거쳐 노원구로 이어지는 동이로(東二路동일로가 개통되어 서울 동부지역 개발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급기야 도심을 거치지 않고 경기북부와 경부고속도로·중부고속도로와 직결되어 도심소통에 크게 기여한다. 또 상봉동에는 상봉시외버스터미널이 있어 경기북부와 강원도 및 경상도로 여행하는 시민들의 편의를 도모하며, 지하철 7호선이 남북으로 관통하여 도심으로 향한 교통을 원활하게 한다.

 

 

 

 

 

 

망우리공원

망우리공원에서는 우리나라 어린이운동의 효시인 방정환 선생님, 민족대표 33인의 한분인 오세창, 한용운, 천연두 보급의 선구자로 의학자이자 국어학자인 지석영, 임시정부 내무부서기를 역임한 문명훤, 동아일보 주필과 한국민주당 창당을 주도했던 장덕수, 제헌국회의원이며 진보당 당수였던 조봉암 등의 묘소가 있으며, 이들 일곱분의 유명인사 연보비가 공원내 산책로 조성과 함께 지난 19972월에 설치되었다. 이어서 19982월에 시인 박인환, 문일평, 서병호, 서동일, 오재영, 서광조, 유상규, 교육가 오긍선 등 여덟 분의 변보비가 추가로 설치되어 역사의 교육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외에도 독립운동가 김정규, 화가 이중섭, 소설가 계용묵, 김말봉, 김이석, 최학송, 작곡가 채동선, 언론인 설의식, 정치인 이병홍, 가수 차중락, 친한 일본인 아사가와 다쿠미, 조선 순조의 첫째 딸인 명온공주 등이 안장되어 있음이 최근에 밝혀졌다.

 

금요음악회

독서경진대회

문화나눔 플래닛, 중랑

용마폭포공원

사가정공원

봉화산근린공원

나들이공원

면목역공원

중랑천

장미거리

구립잔디운동장

용마폭포공원축구장

망우산연보비

중랑캠핑숲

봉화산 숲속여행, 구청뒤공원(쉼터)국수나무 관찰대팥배나무 관찰대봉수대전망데크 도당소나무숲초본류 식재지

봉화산

용마산

망우산

망우리공원산책로

봉화산근린공원산책로

사가정공원 산책로

서동일

오재영

김정규

유상규

문명훤

문일평

오세창

한용운

서병호

서광조

박인환

방정환

이중섭

장덕수

조봉암

오긍선

지석영

계용묵

김말봉

김이석

채동선

차중락

최학송

설의식

이병홍

아사카와 다쿠미

김현근 & 명온공주

안창호

송진우

조종완

백대진

박찬익

임방울

강학린

 

 

 

 

 

 

 

유물·유적

신경진신도비와 아차산 봉수대지가 있으며, 봉화산에서 고구려보루를 알려져 있는 석축과 도당굿과 산신제를 지내기 위해 세운 산신각(山神閣)인 봉화산제도당이 있다. 망우묘지공원에는 한용운(韓龍雲방정환(方定煥조봉암(曺奉岩오세창(吳世昌) 등 애국독립지사와 순국선열들의 묘소가 있으며, 1907년 의병 봉기를 기념하는 13도창의군탑이 있다.

 

상봉동에 5층석탑(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4석등(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46), 신내동에 봉수지석단(烽燧址石壇산신각(山神閣) 등이 있으며, 위락시설로 용마자연공원·용마폭포공원이 있다. 망우동에는 1933년부터 조성된 망우리공동묘지가 있으며, 이곳에 한용운·안창호·방정환 등의 무덤이 있다. 상봉 시외버스 터미널은 경기도 동북부와 강원도 일대를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이며, 중앙선이 구의 북부를 가로지른다. 시내 중심부와 춘천 방면을 연결하는 도로, 의정부·강남 방면의 도로 등이 나 있으며, 동부도시고속화도로가 건설되어 강남지역과의 교통이 더욱 원활해졌다.

 

중랑구의 문화재는 19934월 상봉동 소재 한독약품박물관이 이전하기 전에는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3<646호 청자상감상양국명합, 1088호 언해태산집요, 1111호 찬도방론맥결집성>과 서울특별시 지정문화재인 유형문화재 4<44호 상봉동 5층석탑, 45호 상봉동석제태실신석, 46호 상봉동 석등, 47호 상봉동 수덕사 사리탑>과 국가지정 문화재 제23(가야금 산조)기능보유자인 함금덕씨가 있었으나, 19941012일 사망하여 현재 남아있는 문화재로는 국가지정 문화재 2점과 서울특별시 지정문화재 5점이 있다.

 

 

 

 

 

 

보물 제1289호 천순원년 이윤손 유서(1998.12.18 지정)

사적 제 455호 아차산 일대 보루군(2004.10.27 지정)

서울특별시 지정 기념물 제15호 아차산 봉수대 터(1993.11.30 지정)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5호 충익공 신경진 묘역(1995.1.15 지정)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30호 옹기장 배요섭(2002.9.16 지정)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34호 봉화산도당굿(2005.1.10 지정)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20호 법장사아미타쾌불도 및 복장유물(2011.9.8. 지정)

석기 유출출토 (면목동)

여정루

성덕사

경동제일교회

숙선옹주(선빈)안씨묘

망우리 고개

양원리(養源里) 동래 정씨집성촌

망우동지(忘優洞志)

능말 경주임씨 집성촌

13도 창의군탑

 

능행로

동대문 동묘(신설동) 보재원(안암동) 종암동 입구 월곡동길화랑로 망우동(양원리) 옛 망우리 고개 (중앙선 망우리터널) 동구릉

 

말목장

아차산을 주봉으로 하여 그 서쪽 기슭에 조선시대 국립 목장격인 살곶이 목장이 있었다. 1788~1802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조선 사복시에서 만든 살곶이 목장 지도에 의하면 그 둘레는 약 20km에 이르는데, 여러 문헌기록에는 30~40리에 이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살곶이 목장의 구체적인 경계를 살펴보면 동쪽 경계는 아차산 줄기가 되고 서쪽 경계는 오늘날의 배봉산으로부터 한양대학교가 자리잡고 있는 구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된다. 북쪽 경계는 오늘날의 월릉교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중랑포 아래쪽에서 냇물과 벌판을 가로질러 면목리 위쪽에 아차산 줄기까지 이어지는 선이었다. 이 경계는 명종 이전에는 목책을 세운 토성이었다가 그 이후에는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1633(현종4)에 허목이 쓴 한성목장지도 중 [진헌마정색도(進獻馬正色圖)]에 살곶이 목장이 나와있다.

 

이 지도에서 살곶이 목장은 세종 때와 연산군 때 일시 폐지되었다가 다시 설치되었는데 목장에서는 왕이 사냥할때 필요한 말을 기르고 훈련시켰으며, 군사의 무예 검열과 왕의 사냥터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살곶이 목장은 헌종 12(1846)에 익종의 능인 수릉을 천장산에서 용마봉으로 옮겨옴에 따라 폐지되었다가 철종 6(1855) 수릉이 동구릉으로 옮김에 따라 다시 목장으로 복구되었으나, 1904년 순종황제의 비인 순명황후를 지금의 광진구 능동 어린이 대공원 내 유강원에 안장함으로써 폐지 되었다.

 

 

 

 

 

 

 

 

법정동 6개동 기준, 행정동 기준 16

면목(面牧상봉(上鳳중화(中和(망우(忘憂신내(新內)

망우본동 · 망우제3· 면목본동 · 면목제2· 면목제3·8· 면목제4· 면목제5· 면목제7· 묵제1· 묵제2· 상봉제1· 상봉제2· 신내1· 신내2· 중화제1· 중화제2

 

 

 

 

 

 

 

 

 

 

1 면목본동 面牧

면목본동은 면목동 지역의 정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목역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어 있으며 관내에는 면목 초등학교, 면동 초등학교가 있으며 재래시장으로 동원시장이 있다. 다른동과 비교해 가장 특성있는 사업을 벌이고 있는곳이 면목역공원인데 각종 문화사업의 메가로 발돋움하고 있다.

 

19131229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해 중랑지역은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현재의 상봉·중화··망우·신내동)과 고양군 뚝도면(현재의 면목·중곡동)의 일부였고, 1949815일에 서울특별시 구역 확장으로 고양군 뚝도면 면목리가 서울시로 편입되었고, 196311일 다시 양주군 구리면의 상봉·중화··망우·신내리가 편입되어 현재의 상봉·중화··망우·신내동이 되었습니다. 196811일에 동대문구에 편입되어 행정동간 조정으로 면목동을 면목1·2동으로 분동 하였으며, 19737월에는 관악·도봉의 2개 구가 증설됨과 동시에 구간조정으로 면목동의 일부가 성동구로 편입되면서 면목1동을 나누어 면목3·4동을 증설, 197791일에는 면목1동 일부를 면목6동으로 분동 하였습니다.

 

그후 198811일 대통령령 제12367('87.12.31 공포)로 인구 과대구를 분구 중랑·노원·서초·양천·송파의 5개 구가 증설되었는데, 중랑구는 동대문구로부터 분리·신설되었으며, 17개동을 분할하고 동 명칭은 면목1·2·3·4·5·6·7, 상봉1·2,중화1·2, 1·2, 망우1·2·3, 신내동으로 하였습니다. 동 통폐합 시행으로 2008.1.1 면목1.6동을 통합, 현재 면목본동으로 하였습니다.

 

설화1(중랑이야기)

조선시대에는 중랑천 근방에 국립여관인 송계원이 있었기 때문에 중랑천을 송계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송계교를 석교로 개축할 때 인근 마을의 장정은 모두 부역으로 동원되었는데 열여섯살 되는 딸 하나를 데리고 사는 홀아비 장님 중이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를 안 딸은 아버지 대신 부역을 하겠노라고 관아를 찾아가 여러날을 지내며 대신 부역시켜줄 것을 간청하자 부역허가가 떨어졌는데 반드시 남장 을 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관아에서 시키는대로 남장을 하고 참여했으나 문제는 생리현상이 었습니다. 전전긍긍하던 그녀는 대나무를 잘라서 옷속에 넣어 관을 통해 서서 배뇨를 할 수 있게하고 가능한한 수분섭취를 줄여서 배뇨 횟수를 줄이도록 노력하였습니다. 이런 눈물겨운 사연을 전해들은 관아에서는 마침내 중이의 부역을 해제함 으로써 부역을 대신하던 그녀의 딸도 눈먼 아버지 곁으로 돌아갈 수 있었 습니다. 남자인줄로만 알고 지내던 동료들이 그를 중낭자(仲郎子)라고 불렀으나 그가 사실은 남장여인이라는 것을 알고난 다음부터는 그녀를 중랑(仲狼)이라 불렀고 다시 중랑(中浪)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설화2(행주형지세)

면목동의 행주형(行舟形)지세는 면목배수펌프장 일대를 말합니다. 배가 움직이는 것을 행주라 하는데 풍수에서 행주의 위치는 보통 좋은 집터를 설명할 때 사용됩니다. 이곳이 행주형이 되는 것은 동이로를 중심으로 면목동 네거리에서 면목배수펌프장을 지나 동남쪽으로 긴 타원형으로 중곡 초등학교까지 이르는 지점입니다. 돛대에 해당되는 곳은 면목네거리이고 배의 후미 선실쪽이 중곡초등학교입니다. 배가 갖추어야 할 기본설비로는 키,돛대,닻입니다. 풍수지리에서는 이들 셋 모두를 갖추면 대길(大吉)한 땅으로 보는데 그중 하나만 갖추어도 배가 갈 수 있으므로 길지(吉地)로 쳐준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닻은 배의 후미 쪽에 있는데 이곳 지형은 돛대부근에 닻을 갖추었는데, 닻에 해당되는 곳이 면목배수펌프장입니다. 배의 사명은 강을 향해서 돌진하여 물위에 떠있는 자세를 취해야 하는데 만일 배의 앞쪽이 산을 향해 있다면 배가 지녀야 하는 본질을 벗어나므로 흉지(凶地)로 칩니다. 그러나 이곳은 중랑천을 향해 힘차게 뻗어 가고 있으므로 이 배의 앞날은 무궁한 발전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행주형은 물위로 배가 움직이고 있는 형태이므로 절대로 우물을 파면 안된다는 속설을 갖고 있습니다. 땅속에 있는 물줄기를 잡아올리는 것이 우물을 판다는 것인데 곧 밑바닥을 깬다는 뜻이고, 이렇게 되면 침수해서 단번에 흉지로 바뀌어 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인지 면목동의 행주형에 해당하는 곳에는 옛부터 우물이 없었습니다.

 

2 상봉 上鳳

19131229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해 중랑지역은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현재의 상봉·중화··망우·신내동)과 고양군 뚝도면(현재의 면목·중곡동)의 일부였고, 1949815일에 서울특별시 구역 확장으로 고양군 뚝도면 면목리가 서울시로 편입되었고, 196311일 다시 양주군 구리면의 상봉·중화··망우·신내리가 편입되어 현재의 상봉·중화··망우·신내동이 되었습니다. 196811일에 동대문구에 편입되어 행정동간 조정으로 면목동을 면목1·2동으로 분동 하였으며, 19737월에는 관악·도봉의 2개 구가 증설됨과 동시에 구간조정으로 면목동의 일부가 성동구로 편입되면서 면목1동을 나누어 면목3·4동을 증설, 197791일에는 면목1동 일부를 면목6동으로 분동 하였습니다.

 

그후 198811일 대통령령 제12367('87.12.31 공포)로 인구 과대구를 분구 중랑·노원·서초·양천·송파의 5개 구가 증설되었는데, 중랑구는 동대문구로부터 분리·신설되었으며, 17개동을 분할하고 동 명칭은 면목1·2·3·4·5·6·7, 상봉1·2,중화1·2, 1·2, 망우1·2·3, 신내동으로 하였습니다.

 

3 중화 中和

중화동의 동명은 옛부터 봉화산 아래 자연마을인 가운데 마을(中里)과 아랫마을(下里)의 글자를 따서 中下里로 칭하였는데 1963년에 서울특별시로 편입될 당시 동민들의 의견이 "" 대신 화목을 도모하는 ""를 넣어 중화동으로 개칭할 것을 서울특별시에 건의하였기 때문에 중화동으로 되었습니다.

 

이곳의 공식적인 지명은 일제침략 초까지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면 중리, 하리 일부지역 이였으나, 191441일 일제의 면··동 통폐합시 양주군 구리면 중하리로 칭하였으며, 해방 후에도 이 지명은 변함이 없었으나, 196311(법률 제1172) 서울특별시의 확장으로 동대문구에 편입하고 동명도 중화동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중화동은 봉화산 산기슭에 중랑천을 끼고 있으며, 동일로가 중심부를 남북으로 관통하고 중앙선과 망우로가 동서로 달리고 있습니다. 또한, 봉화산 능선을 끼고 상봉동과 인접하고 남쪽으로는 망우로를 경계로 상봉동과 나누어지며 북쪽으로는 묵동과 접하고 있습니다.

 

 

4 ()

19131229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해 중랑지역은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현재의 상봉·중화··망우·신내동)과 고양군 뚝도면(현재의 면목·중곡동)의 일부였고, 1949815일에 서울특별시 구역 확장으로 고양군 뚝도면 면목리가 서울시로 편입되었고, 196311일 다시 양주군 구리면의 상봉·중화··망우·신내리가 편입되어 현재의 상봉·중화··망우·신내동이 되었습니다. 196811일에 동대문구에 편입되어 행정동간 조정으로 면목동을 면목1·2동으로 분동 하였으며, 19737월에는 관악·도봉의 2개 구가 증설됨과 동시에 구간조정으로 면목동의 일부가 성동구로 편입되면서 면목1동을 나누어 면목3·4동을 증설, 197791일에는 면목1동 일부를 면목6동으로 분동 하였습니다.

 

그후 198811일 대통령령 제12367('87.12.31 공포)로 인구 과대구를 분구 중랑·노원·서초·양천·송파의 5개 구가 증설되었는데, 중랑구는 동대문구로부터 분리·신설되었으며, 17개동을 분할하고 동 명칭은 면목1·2·3·4·5·6·7, 상봉1·2,중화1·2, 1·2, 망우1·2·3, 신내동으로 하였습니다.

 

5 망우(忘憂)

19131229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해 중랑지역은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현재의 상봉·중화··망우·신내동)과 고양군 뚝도면(현재의 면목·중곡동)의 일부였고, 1949815일에 서울특별시 구역 확장으로 고양군 뚝도면 면목리가 서울시로 편입되었고, 196311일 다시 양주군 구리면의 상봉·중화··망우·신내리가 편입되어 현재의 상봉·중화··망우·신내동이 되었습니다. 196811일에 동대문구에 편입되어 행정동간 조정으로 면목동을 면목1·2동으로 분동 하였으며, 19737월에는 관악·도봉의 2개 구가 증설됨과 동시에 구간조정으로 면목동의 일부가 성동구로 편입되면서 면목1동을 나누어 면목3·4동을 증설, 197791일에는 면목1동 일부를 면목6동으로 분동 하였습니다.

 

그후 198811일 대통령령 제12367('87.12.31 공포)로 인구 과대구를 분구 중랑·노원·서초·양천·송파의 5개 구가 증설되었는데, 중랑구는 동대문구로부터 분리·신설되었으며, 17개동을 분할하고 동 명칭은 면목1·2·3·4·5·6·7, 상봉1·2,중화1·2, 1·2, 망우본동, 망우3, 신내동으로 하였습니다.

 

6 신내(新內)

19131229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해 중랑지역은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현재의 상봉·중화··망우·신내동)과 고양군 뚝도면(현재의 면목·중곡동)의 일부였고, 1949815일에 서울특별시 구역 확장으로 고양군 뚝도면 면목리가 서울시로 편입되었고, 196311일 다시 양주군 구리면의 상봉·중화··망우·신내리가 편입되어 현재의 상봉·중화··망우·신내동이 되었습니다. 196811일에 동대문구에 편입되어 행정동간 조정으로 면목동을 면목1·2동으로 분동 하였으며, 19737월에는 관악·도봉의 2개 구가 증설됨과 동시에 구간조정으로 면목동의 일부가 성동구로 편입되면서 면목1동을 나누어 면목3·4동을 증설, 197791일에는 면목1동 일부를 면목6동으로 분동 하였습니다.

 

그후 198811일 대통령령 제12367('87.12.31 공포)로 인구 과대구를 분구 중랑·노원·서초·양천·송파의 5개 구가 증설되었는데, 중랑구는 동대문구로부터 분리·신설되었으며, 17개동을 분할하고 동 명칭은 면목1·2·3·4·5·6·7, 상봉1·2,중화1·2, 1·2, 망우1·2·3, 신내동으로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