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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태양과 냇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고장. 양천구 陽川區

草霧 2013. 12. 5. 16:02

 

 

 

 

밝은 태양과 냇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고장

    

 

양천구 陽川區

  

 

Yangcheon-gu (Yangchuan)

 

 

서울특별시의 서남부에 있는 구.

서쪽은 경기도 부천시와 동쪽 영등포구와 마포구, 북쪽 강서구, 남쪽 구로구이다. 양천의 이름은 고려 시대부터 쓰여진 이 지역의 지명에서 유래했다.

 

고려 말에 이 지역은 '밝은 태양과 냇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고장'이라 하여 양천(陽川)이라 불렸다. 분구 당시에는 신정동에서 따온 신정구와 경합을 벌여 이김으로써 정식 구명이 되었다. 구청 소재지는 신정동이다.

 

원래는 경기도 김포군 양동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63년에 서울시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영등포구 관할하에 있다가 1968년 양서출장소에 속하게 되었다. 1977년 신설된 강서구에 속했으며, 1988년 강서구에서 분리·신설되었다.

    

 

 

시의 서남부에 위치한 구.

조선시대 경기도 양천현

1914년 경기도 김포군 양동면(陽東面)

1963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편입

1968년 양동출장소가 폐지

1977년 영등포구에서 분구된 강서구 관할

1988년 강서구에서 양천구로 분리 신설

 

 

 

 

 

 

 

 

우리 양천의 뿌리는 고구려의 제차파의현으로 부터 불려지기 시작하여 통일신라 경덕왕 16(757)때는 공암현이라 변경되어 율진군(부천군의 옛이름)에 속하였고, 그후 고려 성종 14년에 영토를 5도로 나누어 양광도에 귀속하다가, 현종 9(1018)에 공암현을 수주군(부천군의 옛이름)에 속하였다가, 이와같이 행정구역이 변경되는 과정에서 양원, 양평, 파릉, 제양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나 고려 충선왕 2(1310)에 비로소 양천이라는 지명으로 명명되어 작음 암굴의 땅 이름에서 보다 넓은 뜻을 가진 땅이름으로 되었다. 이후 조선 태종 14(1416)에 다시 양천현으로 복귀하고, 고종 32년 을미개혁때 양천현에서 양천군으로 되었으며, "현내, 남산(목동), 장군(신월동, 신정동), 삼정, 가배곡 또는 가곡"5개면이 양천군에 편입되었다.

    

 

 

 

 

양천의 어원을 살펴보면 고구려와 백제때는 제차파의현이라 했다.

"제차"라는 말은 지금의 김포군 "양천"의 고명인데 뜻은 미상이나 혹시 ""()의 음차일지도 모른다는 설이있다. "파의"는 공암에 해당하는 바위의 음차이다. 바위는 "파의", "파혜"로 음차된 예가 많다. 그래서 양천은 제차파의현-공암현-양천현이 되었으므로 잿바위 혹은 갯바위뜻이다. 우리구가 "양천"이라 지명을 얻게 된 것은 주변에 높은 산이 없어 햇볕이 잘 들고 냇가의 물이 맑아 "밝은 태양과 냇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고장"이라는 애칭으로 양천(陽川)이란 지명이 유래되었다

    

우리 양천구의 뿌리는 고구려의 제차파의현으로부터 불려지기 시작하여 통일신라 경덕왕 16(757)때는 공암현이라 변경되어 율진군(부천군의 옛이름)에 속하였고, 그후 고려 성종 14년에 영토를 5도로 나누어 양광도에 귀속하였다가 현종 9(1018)에 공암현을 수주군(부천군의 옛이름)에 속하였다가 이와같이 행정구역이 변경되는 과정에서 양원, 양평, 파릉, 제양 등으로 개칭되었고 고려 충선왕 2(1310)에 비로소 양천이라는 지명으로 명명되어 작은 암굴의 땅 이름에서 보다 넓은 뜻을 가진 땅이름으로 되었다.

 

이후 조선 태종 14(1414)에 김포군과 양천현을 합하여 금양현이라 하였다가 태종 16(1416)에 다시 양천현으로 복귀하고 고종 32년 을미개혁때 양천현에서 양천군으로 되었으며 '현내, 남산(목동), 장군소(신월동, 신정동), 삼정, 가배곡 또는 가곡', 5개면이 양천군에 편입되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한강 북쪽의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국가와 행정을 위한 여러가지 제도를 한양을 중심으로 바꾸어야 했다. 제일차로 시행할 일은 행정구역의 조정이었는데 1394(태조 3)623일에 경기도를 좌우도로 나누고, 양광도를 충청도로, 강릉교주도를 강원도로 고치고, 서해도를 풍해도로 고쳤다. 양천은 장단, 파평, 현주, 사천, 포주, 풍양, 서원, 행주, 심악, 한양, 부원, 과주 , 철원, 영평, 승령, 삭녕, 적성, 임강, 마전, 송림, 연주, 고봉, 교하, 금주, 양천, 남양, 안산, 인주, 토산, 안협과 함께 경기좌도에 소속되었다. 양천에는 종5품의 현령이 파견되어 고장을 다스렸다. 3대 임금 태종때 행정구역을 다시 조정하였는데 면적이 좁고 그 세력이 약했던 양천현은 이시기에 여러차례 통폐합을 반복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공직자의 실상에 대한 풍자를 담은 속담

우리 나라는 조선시대 이후 문관이 주가 되는 나라였고, 따라서 정계에 진출한다는 것은 큰 영광으로 알아왔습니다. 한 가문에 정계에 진출한 사람이 있으면 가문의 자랑이고 그것은 후손에게 두고두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정계에 진출하였다고 해서 모두 위인은 아닙니다.

 

정계에 진출하여 선정을 베푸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그것을 자신의 치부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 공직자들의 비리가 신문지상에 무수히 오르내리고 있는 요즘 정계에 오른 사람들의 옳은 면과 그른 면을 구분하는 것은 국민들에게 부여된 큰 과제입니다. 누구를 뽑는가에 의하여 나라의 운명이 또는 지역의 운명이 결정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국민들은 지위나 직책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말고 그 사람이 과연 진정으로 그 지위나 직책에 걸맞게 행동을 했는가에 의하여 평가해야 합니다. 이런 국민들의 과제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주는 속담이 양천구 지역에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속담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양천 원님이 부임할 때 울고, 나갈때 운다 양천현은 길이가 30리이며 폭이 15리가 되는 아주 작은 고을인 데다가 한강이 가까운 야지(野地)이기 때문에 수해가 가끔 있어서 해마다 흉년을 면하기 어려웠다. 이 고을에서 생산되는 곡식이라야 잡곡뿐이라서 누가 보든지 한심스럽게 생각되었다. 현감이 이런 고을에 처음으로 부임하여 보니 낙심이 되어 울고 싶었다. 그러나 부임하여 지내고 보니 백미(白米)의 관수미(官需米, 현감이 식량으로 매년 정해놓은 쌀)108석이고 사객지공미(使客支供米, 손님 접대용으로 정해놓은 쌀)30석이며 그밖에 은결(隱結)에서 남이 모르게 생기는 것과 또 살림에 해당하는 모든 물건이 들어오니 작은 고을로는 그만하면 상당한 수입이 되었다. 이런 고을을 버리고 다른 임지로 떠나게 되니 아까운 생각에서 또한 울 정도였다 하여 나온 말이다.”

    

 

지역 백성의 어려운 생계문제 해결 과정에서 나타난 속담

양천지역은 한강과 안양천 등 큰 하천에 위치해 있었지만 당시 하천에 대한 관리 능력의 결여로 논농사보다는 밭농사를 많이 짓는 지역이었고 논농사 역시도 천수답(天水沓)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따라서 양천지역의 백성들은 가난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가난한 생활은 수년마다 한번씩 되풀이되는 각종 재해와 탐관오리의 탐학에 의하여 더욱 심해졌으며, 그러한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양천지역의 백성들은 생존을 위하여 다양한 몸부림을 쳐왔습니다. 다행히 양천지역은 서울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지역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서울에서 필요로 하는 많은 물자를 제공함으로써 그러한 위기를 극복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나무장사입니다. 양천구의 백성들은 현재의 양화교 자리인 철곶포(鐵串浦)와 오목교를 지나 양화진에서 한강을 건너 여러 나룻터와 도성내에 나무를 팔아 생계를 잇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겨울에는 얼어붙은 한강을 통해 나무장사를 하였습니다. 이러는 과정에서 다양한 속담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그러한 속담은 지금까지 전해져 양천구 지역 백성들의 삶의 애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속담에서 뼈저린 아픔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서민들의 풀뿌리같은 인생이 담겨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양천 놈에 쇠궁둥이 돌리듯 한다. 양천은 토산물로 연료되는 나무가 많고 축우(畜牛)도 암소를 주로 사용하였다. 농사는 부실하고 나무가 많아 매일 서울로 나무를 가져가서 판 나무장사가 많았다. 나무를 팔고 돌아올 때 길가에서 암소와 숫소가 서로 만나면 숫소는 성질이 암소에게 기어오르기를 잘하고 암소는 이것을 피하느라고 궁둥이를 저리로 돌린다. 이것을 가리켜 친구 사이에 수작하는 말이 있으면 농담하기를 양천놈에 쇠궁둥이 돌려대듯 한다는 속담이 되었다.”

 

양천 사람은 바람 마시고 죽을 마신다. 기후에 따라 부는 바람이 아침에는 동풍이 불고 저녁때는 서풍이 부는 경우가 많아 일기가 고르지 않은 때가 많다. 그런 날 서울로 나무를 팔러 가는 나무장사나 행인이 매냥 일찍 출발하므로 집에서 떠날 때에는 동풍이 불어 바람 을 안고 가니 바람을 마시게 되고 저녁 때 집으로 올 대는 서풍이 불어 또 안고 내려오게 된다. 해마다 계속되는 흉작으로 조반석죽(朝 飯夕粥) 을 하게 되어 죽을 먹는다는 데서 나온 속담이나 실제로 옛 날의 실정이 그러하였다고 한다.”

    

 

오목교의 건설 과정에서 얽힌 전설

현재는 양천구와 영등포를 이어주는 다리가 수없이 많습니다. 양천구는 대규모 주택단지이기 때문에 이들이 경제활동을 벌이는 도심지로 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많은 다리가 만들어져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옛날에 양천구 지역은 농촌지역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다리가 필요 없었으며 김포와 강화도로 가는 길목에서 필요했던 다리가 바로 오목교입니다. 오목교가 언제 건설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인천항이 서울의 외항으로 발전하면서부터일 것이라는 짐작이 됩니다. 이런 연유로 현재의 오목교에 다리의 건설 필요성이 생겼을 것입니다.

 

한강으로 유입되는 안양천은 원래 이름이 오목내였다고 합니다. 이 부분에는 많은 개울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유독 오목교 근방에 이르면 이들 개울에서 나온 물길들이 한데 모이면서 하천바닥을 움푹하게 골을 만들었고 이처럼 골이 형성되어 움푹 들어간 곳을 '오목하게 만들어진 내'라는 뜻으로 오목내라 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오목내에 다리를 건설해야 하는 필요성이 생기기는 하였지만 이곳에는 물살이 세어서 다리를 건설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통행량이 많아져 다리는 건설해야 했고 주민들은 전전긍긍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다리를 건설하는 과정이 다음과 같은 전설로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옛날 이곳의 물살이 세어 도저히 건널 수가 없게 되자 동네사람들 이 다리를 놓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매양 다리를 놓을 때마다 떠내려가므로 동네 사람들은 달리 방도를 구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때 한 늙은 스님이 지나 가다가 떠내려가는 다리를 붙잡아 매는 모습을 보고 '쯧쯧! 오동나무로 다리를 놓으면 쉬울 것을/.' 이라고 하며 지나갔다. 이 말을 들은 인부 한사람이 급히 달려가 무슨 말인가하고 되묻자 '웃여울에서 오동나무를 떠내려보내 멈추는 곳이 다리를 놓을 곳인데 괜한 장소에서 애쓰며 다리를 놓는 것은 부질 없는 짓'이라며 오히려 힐책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속는 셈치고 노승의 말대로 할 것을 결정하였 다. 그러나 근방에는 오동나무가 하나도 없으므로 멀리 남쪽에 있는 칼산에서 오동나무를 베어 바로 안양천 물에 띄우자 과연 지금의 오목교 근방에서 멈추므로 이곳에다 다리를 건설하였다. 이때부터 다리가 떠내려가는 일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이 다리를 오동나무다리라 불렀다."

 

이렇게 건설된 오목교는 이후 양천구 지역의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이 팽창하면서 영등포지역이 공업단지와 상업단지로 변모하면서 양천구 지역의 주민들은 이 다리를 통하여 그곳을 왔다갔다 했으며, 장마가 져서 다리에 물이 넘쳐 건너가기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배를 띄워서라도 넘어야 하는 필요성이 있었다면 오목교가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역할을 했을 것인가는 자명한 이치 입니다. 세월이 흘러 양천구 지역이 주택단지로 변모하면서 오목교에는 계속 새로운 다리를 설치하였고, 옛날에 세웠던 나무다리와 장마때 지나던 배의 흔적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오목교 건설과정의 전설이 전해져 당시 사람들이 오목교를 건설해야만 했던 절박한 필요성과 무수한 어려움을 뚫고 오목교를 건설해 나가는 그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게 합니다.

    

 

곰달래 마을에 얽힌 아름다운 사랑의 전설

요즘 인스턴트같은 사랑이 대중가요 가사가 되어 젊은이들의 입에 오 르내리고 있습니다. 기성세대는 이러한 현상을 대단히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스턴트같은 사랑이라고 해서 모두 나쁘다고 몰아붙일 수는 없는 일입니다. 다만 좀더 조용하고 인내심 있는 사랑이 함께 있을 때 인스턴트같은 사랑도 가치를 지니게 되는 법입니다.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의 경험을 귀담아 들어야 하며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참고 인내하며 이끌어야 할 것입니다. 양천구에는 이런 조용하고 인내심 있는 아름다움 사랑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 젊은이들에게 이런 사랑이야기는 고리타분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이런 사랑이야기를 진정으로 귀담아 들을 수 있을 때 더욱 성숙해진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로 집약될 때 그것은 사회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하나로 가다가 되돌아볼 수 있게 하는 그 무엇이 있을 때 그 사회는 건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곰달래 사랑에 관한 전설은 양천구의 재산이기도 하고 양천구민들이 보존하고 발전시켜 양천구의 문화적 전통으로 만들어야 하는 좋은 역사적 소재입니다. 곰달래 마을은 현재의 신월7동 고속도로변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곰달래 사랑에 관한 전설이 양천구의 모든 사람에게 전해지고 교훈을 주면 좋겠습니다. "아직 한강유역이 백제땅이었을 때 이곳에 서로 사랑하는 음소(音召)와 음월(音月)이라는 남녀가 살고 있었다. 신라의 힘이 점차 세어져 끊임없이 백제를 위협하자 전국에 군대소집 명령이 내렸고 이곳에 살던 청년도 나라를 위해 전쟁터로 나가게 되었다. 청년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동산에 둥근달이 깃발처럼 떠오르면 백제가 이긴 것이니 자신을 기다리고 칠흑같은 밤이 되면 백제가 싸움에 진 것이니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나라는 말을 한 후 전쟁터로 떠났다.

 

몇날이나 게속되던 신라와 백제의 싸움이 끝나갈 무렵 동산에는 손톱 반만큼이나 작은 조각달이 떠오르기 시작하다가 이내 커다란 둥근달이 되었다. 여인은 기뻐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먹구름이 지나가면서 다시 캄캄한 밤으로 바뀌었고 이에 놀란 여인은 산위에 올라가 아래로 몸을 굴려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다. 구름이 지나가 다시 환하고 커다란 달이 나왔으며 얼마 후 밤새 먼길을 달려온 청 년이 왔으나 이미 여인의 목숨은 끊어진 상태였다.

 

산꼭대기 달이 떠오르는 곳에 자신의손으로 여인을 묻고 돌아서며 청년은 '이제 끝이다. 거친 세상 끝이구나' 라고 했는데 이것이 변해 고음월(古音月)이 되었다고 한다. ()는 이두음으로 사용할 때 거칠다. 끝났다는 뜻으로 쓰이는데 바로 음월이의 목숨이 끝났다는 표현으로 이것이 변해 고음월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낮지만 위엄이 있는 용왕산에 얽힌 전설

용왕산은 비록 그 높이가 100m도 안되지만 그 정상에 오르면 사방을 다 굽어볼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자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지금은 용왕산 정상에 목2동 주민들과 동사무소가 주관하여 용왕정이라는 정자를 만들어 놓았는데 그곳에 올라 바라보는 주변의 경치는 그야말로 서울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입니다. 이렇게 주변의 모든 경치를 조망할 수 있는 산에 오른 사람들은 그 위치에 걸맞는 전설이 하나쯤은 전해져 내려올 것 같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주변을 다 아우를 수 있으니 왕좌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수 있으며, 따라서 산 이름에 알맞는 왕과 관련된 전설이 있을 수 있다는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용왕산은 오르면 오를수록 사람들을 궁금하게 만드는 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 있을 것 같은 산, 그것이 용왕산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용왕산에는 그 이름에 걸맞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전설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 전설의 내용을 듣는 사람이면 용왕산의 격에 알맞는 전설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을 것입니다. 용왕산의 전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시대 어느 임금님이 꿈을 꾸었다. 꿈에 한양성 밖을 한참 나간 것이 지금의 목동 신시가지 벌인 천호지벌이었다. ‘! 갈대도 많구나. 이 갈대가 나무가 되고 나무가 사람이 되리라' 이런 마음을 먹고서 그 천호지벌을 거닐고 있는데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 갈대밭에서 한 장수가 썩 나타나더니 달려왔다. 손에 긴 칼, 장검 을 들고서.임금님을 해치려는 것이 아닌가? 비명을 질렀다. 시종하는 무사를 거느리지 아니하고 혼자 여기에 올 일이 아닌데 이런 봉변이 있는가?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 ! 꿈이었구나! 휴우!’

 

임금님이 잠시 낮잠을 잔 것이다. 나랏일을 보다가 잠시 쉰다는 것이 이런 고약한 꿈을 꾼 것이었다. 정신을 가다듬고서 그 뒤 한 참 또 나랏일을 보다가 쉬는데 소롯이 잠이 들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그 천호지벌 갈대밭을 거닐고 있었다. ‘아니 지난 번 내가 봉변을 당할 뻔한 곳이 아닌가? 내가 왜 또 여기까지 왔을까?' 하는 찰나!‘쉬익 쉬익 쉬익!’

 

지난번 그 무시무시하게 생긴 장수가 나타나서 긴 칼을 쳐들고서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왜 내개 차지한 이 자리에 나타나느냐는 것인지, 임금님을 죽이고 제가 그 왕좌에 앉겠다는 것인지, 하여튼 큰일 중에 큰일이었다. 비록 이런 큰일이 있어도 이번은 임금님이 호통을 쳤다. ‘네 이놈! 누구 앞이라고 칼을 들고서 달려드느냐?’ 말이 없는 그 장수는 임금님을 노리고 한발한발 다가오는 것이었다. ‘네 이놈!’ 다시 임금님은 호통을 쳤으나 그 장수는 다가와서 칼을 높이 쳐드는 것이 아닌가? '!' 꿈이었다.

 

또 꿈이었다. 식은땀이 후줄근하게 났다. 비록 임금님이 이 궁중에서 안전하게 있지만 꿈속까지 안전하지는 못한 것이다. 꿈속에서는 궁중 무사가 임금님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나의 주변에 변란을 꿈꾸는 자가 있는가? 나를 해치려는 자가 주변에 있다는 말인가?' 이리하여서 비밀리에 조사를 하였다. 그러나 그런 불길한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그 천호지벌이 수상하구나. 그곳은 한강 남쪽 서호 西湖) 경치가 수려한 곳. 내가 몇 번이나 서호 강변에 가서 건너다 본 곳. 그 강 건너가 외지다고 해서 취약한지라 양화나루에 감시를 하도록 한 곳이 아닌가? 그 양화나루 남쪽이 아무래도 수상하구나!’

 

이리하여서 군사를 보내서 조사를 하도록 비밀리에 명을 내렸다 역적이 일어난다면 그곳이리라 이 두 번이나 꾼 꿈은 조심을 하라고 경고를 하는 것이리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과연 그런 큰 문제가 거기에 있었을까? 궁금하구나. 그러기 얼마 전에 이천호지벌 엄지산 근처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박노인이라는 분이 이제 죽게 되어서 아들딸을 모아 놓고 유언을 하였다.

 

내가 이제 더 못 살 것 같구나!’ ‘무슨 말씀을요. 더 사셔야지요.’ ‘더 살아서 무엇하게. 이제 때가 되면 가야지 가더라도 나는 여기에서보다 더 큰일을 하련다.’ ‘? 돌아가셔서 일을 합니까?’ ‘더 자세한 것은 물을 것이 없다 두고 보면 알 것이다. 내가 죽거든 우선 남이 모르게 하여라 그리고 염을 하지 말아라 몸을 묶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관을 쓰기는 해도 관못(관에 박는 나무 못)은 쓰지 말아라. 그리고 또'

 

무엇입니까?’ ‘거꾸로 묻어라 머리가 밑으로 물구나무서듯 세워서 묻어라. 부디 뉘여서 묻지 말아라. 산 사람 소원을 들어주듯이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주어야 하는법. 부디 이 애비의 유언을 허술히 듣지 말고 지켜라.’ 이러고 운명을 하였다. 가족들은 장례 문제로 진지하게 상의를 하였다. 유언을 따르자니 너무 엄청나게 색다른 것이고, 남들같이 보통 관례대로 하자니 아버지 소원을 거스르는 것이고아마 아버지가 돌아가실 마당이니까 정신이 오락가락하셔서 그럴것이니 우리 관례대로 하자.’ 이리하여 유언은 무시가 되었다. 그래도 장례 방식이 논의가 된 것이 하도 희한한 것이라서 그 고을에서는 다 알려진 죽음. 그 장례사건이었다. ‘그 무덤을 파 보자. ! 이것이 무엇이냐? 관이 부서지고 시신은 없다. 저기 구멍을 보아라. 저 산기슭에 있는 연못 쪽으로 난 구멍을 시신이 땅굴을 파고 내려갔구나. 연못으로 가 보자. 저기 보아라. 용이 있다. 묶인 끈을 풀려고 몸부림을 치는구나. 흙탕물이 일고 있구나! 활을 쏘아라! 창으로 찔러라!’ 이리하여서 이 용은 미처 제구실도 못하고서 그만 죽고 말았던 것이다. 이 세상 엄지 노릇인 임금님이 될 그런 용인데, 용은 임금님을 비유하는데, 용이 못되고 만 것이다. 그렇게 용이 되려고 할 때에 임금님의 꿈에 나타난 것이다. ‘. 비록 용은 죽었으나 이 무덤이 있던 엄지산을 용왕산(龍王山), 왕령산(王靈山), 왕재산(王在山)으로 부를 일이로구나!’ 이리하여 오늘날까지 그 이름이 목동 공원 자리에 전해오는데 옛 조상들이 남겨준 이야기 하나하나가 다 뜻이 깊은 것이로구나"

    

 

목동 신시가지 아파트 단지의 천호지벌에 대한 예언

목동 신시가지 아파트 지역으로 개발된 지역은 옛날에는 습지였습니다. 1917년에 만들어진 5만분의 1지도를 보면 확연하게 습지로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이러한 습지를 개간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던 관계로 계속 습지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큰 하천을 끼고 있는 모든 지역에 해당되는 경우입니다. 이 지역은 안양천이 홍수 때만 되면 끊임없이 범람하여 질펀한 습지로 만드는 관계로 사람들은 넓은 땅을 보고도 논으로 개간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서 백성들의 가난한 모습을 안타까워하는 위정자들은 이 넓은 땅을 보면서 '저것을 개간한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며, 시절이 바뀌어 그것을 개간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하자 '저곳에는 천호(千戶)가 들어설 것이다라는 예언을 하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기존의 생활에 물들어있던 사람들은 그의 이러한 예언을 듣고 웃어 넘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제가 이렇게 넓은 땅을 보고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조선을 식량공급기지로 만들고자 노력했던 일제는 조선에서 많은 개간 작업을 시행했습니다. 기존의 기술로는 개간하지 못하던 땅을 새로운 기술과 백성들의 참혹한 동원을 통하여 논으로 변모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일제는 양동식산회사(陽東殖山會社)를 설립하여 1921년에 착공하여 1924년에 양동제방을 준공함으로써 이곳을 습지에서 논으로 변모시켰 습니다. 1925년에 대홍수로 인하여 제방이 범람하여 유실된 것을 수축하고 1927년에 한강연안(안양천상류지점)으로 수원지(水源池, 현재의 목동양수장)를 계획 변경하여 양수, 배수를 겸용 설치하였고 l937년에 토지개량사업으로 구획정리를 하여 수리안전답이 되어 쌀의 생산량이 급속히 늘었으며 쌀의 질이 양호하여 상등품의 평가를 얻게 되었다 합니다. 일설에 의하면 목탄차를 동원하고 백성들이 등으로 흙을 날라 양동제방을 쌓음으로써 현재의 목동 신시가지 지역을 논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농경지로 인해 이 지역에는 많은 인구가 유입되어 기존의 마을은 더욱 커졌고 또한 새로운 마을이 들어섬으로써 천호지벌의 예언은 현실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천호지벌이 현재는 목동 신시가지 아파트단지로 변모하여 만호지벌이 되었으니 그 옛날 천호지벌을 예언한 예언자도 현재의 변화를 예언할 수는 없었으니 역사의 변화무쌍한 모습앞에 인간의 예측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은 미래를 완전하게 예측할 수는 없는 법이니 항상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항상 개척하고 전진하는 인간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교훈 역시 천호지벌의 예언을 통해 얻어낼 수 있다 하겠습니다.

    

 

우렁바위 전설

옛 사람들은 이동을 하지 않고 한 곳에 머물러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한번 태어나면 그곳에서 계속 머물러 살게 되며, 따라서 현대 인간의 잣대로 본다면 답답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동을 많이 하는 현대인간의 잣대에 의해서만 그렇게 평가될 뿐 당시의 사람들은 그것을 결코 답답하다고 느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생활 속에서 하루하루를 의미있게 살아나갔을 것입니다. 옛 사람들은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살게 되는 만큼 자신의 환경에 대해 현대인보다도 더 큰 의미부여를 하였을 것이며, 그런 의미부여를 통하여 다양한 신앙과 놀이, 이야기를 만들어 냈을 것입니다.

 

양천지역을 살펴보면 바위가 없는 야산이 대부분이라는 특징을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바위가 있다는 자체로 특별한 관심을 끌 수 있었을 것이며, 그러한 관심은 그 바위에 다양한 이야기를 첨가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신정제3동과 고척동 사이의 야산 정상에 있었던 우렁바위 전설은 이런 과정에서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우렁바위는 옛날에 이 바위가 울었다는 전설을 간직한 바위로서 길마(소등받이)처럼 생겼다 하여 길마바위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 바위는 이 지역 주민들에게 두고두고 재미있는 이야기 소재를 제공함으로써 지루한 하루하루를 달랠 수 있게 만들었을 것이며, 지역 주민에게 자신의 마을을 상징하는 존재로서 작용함으로써 소속감을 가지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취수공사로 인하여 7년 전에 산 정상에서 지금의 자리로 옛 모습 그대로 옮겨 놓은 상태로 있습니다.

 

    

 

 

 

 

양천구는 수도 서울의 남서부에 위치한다.

안양천과 한강 연안에는 두꺼운 충적층으로 된 넓은 범람원이 형성되어 김포평야의 일부를 이루었으며, 낮은 구릉지대 사이로 안양천의 지류가 흐르고 다시 한강으로 유입한다. 따라서 안양천을 경계로 동쪽에 영등포구와 접하며, 북쪽으로 공항로를 경계로 강서구와 접하고, 남쪽은 구로구, 서쪽은 낮은 구릉을 경계로 부천시와 접해 있다. 서울에 편입되기 전에는 전형적인 농촌지역으로서 산림지·농경지·취락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농산물의 생산량도 많았다.

    

 

 

 

동쪽으로 한강을 경계로 영등포구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경기도 부천시와 접하며, 남쪽으로는 구로구, 북쪽으로는 강서구와 마주하고 있다. 한강과 안양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양천구의 지세는 대부분이 과거 저습지 기원의 지형으로 대표되는 동부지역과, 20~60m의 저기복의 구릉지형이 나타나는 중앙부지역, 그리고 60~80m의 소규모 구릉지가 나타나는 북동부와 남서부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크게 한강 연안의 충적지형(자연제방, 배후습지, 범람원)과 침식 구릉지형으로 나눌 수 있다. 구의 중심부로부터 남서쪽으로는 해발고도 20~60m의 저평한 구릉지가 분포하고, 구의 북동부와 남서부에 70~80m 놓이의 침식구릉이 나타나며, 안양천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구의 동쪽에는 배후저습지를 중심으로 하는 충적층이 매우 낮은 고도로 분포한다.

 

배후저습지의 경우 현재는 안양천 부근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규모 아파트 건설과 안양천지류 복개공사, 그리고 매립으로 인하여 대부분이 사라져 그 흔적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따라서 양천구의 전체적인 지세는 저평한 구릉지와 한강과 안양천을 중심으로 따라 형성된 배후저습지 지형으로 요약되며 이러한 지세는 서고동저의 경향을 나타낸다.

    

자연의 특성과 풍토는 삶에 어떠한 영향으로 표현되었을까?? 우리고장의 위치는 한강하류 강변지대로서 강과 바다로 둘러싸인 경인만(京仁灣)에 위치해 있으면서 한강문화권에 속하는 곳으로 동쪽으로는 시흥군 백운산에서 발원한 안양천이 흘러 영등포구와 경계를 이루고, 서쪽으로는 지양산 줄기를 기준으로 예로부터 부천시와 격리되어 왔던 것이다. 남으로는 구로구 고척동과 생활권이 분리되었고, 북으로는 같은 양천 문화권에서 분구된 강서구와 접경을 이룬 곳이다.

 

한강 상류의 댐과 안양천 제방이 축조되기전(1937)만 해도 대부분 침수지대 이었으며, 그 이외의 야산들은 서해안 특유의 지형을 이루고 잇습니다. 교통면에서는 예로부터 한강변에서 부천, 인천, 김포, 강화 등지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이며, 농산물이 풍부한 한강권과 해산물이 생산되는 서해로 이어지는 제일 가까운 통행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주변의 산들은 낮고 완만하며, 강의 흐름은 느리고, 침수가 될 때면 바다처럼 넓은 강물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넓고 한적한 환경에서 사람의 심성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평원으로 불어오는 강바람은 거세게 몰아쳐 춥게만 느껴온 겨울의 풍경, 토질은 점토질이 많고 돌이 흔치않아 문화 유적을 찾을 수 없는 지금은 모든 것이 변하여 지형적인 특성을 느낄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도시 형성 과정에서는 안양천 저지대와 한강, 야산 등으로 가로 막혀 개발이 늦었던 원인이 되었고, 도시 구조면에서는 농경지에서 대부분 주거지로 발전되어 타지역보다 비교적 건전한 생활환경으로 변하였다는 것이 좋은 점이라 하겠습니다.

    

 

양화교

우리가 늘 다니는 길, 지금은 안양천을 건너기 위하여 새로운 교량이 몇 곳에 건설되었으나 널리 알려진 교량으로는 양화교(楊花橋)와 오목교(梧木橋)가 있으며 김포, 강화, 부천, 인천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통행로 구실을 하였습니다. 조선조 한강의 3대 나루터에 속하였던 양화나루(양화대교주변)를 건너 경인지역으로 통행하기 위해서는 안양천을 건너지 않으면 안되었던 중요한 통로였습니다.

 

양천지역 주민들은 한강을 건너는 양화나루를 큰 나루라 하였고 안양천을 건너는 곳을 작은나루(小津) 또는 철곶포(鐵串浦)라 하였습니다.그 무렵의 작은나루 위치는 현재의 인공폭포 남쪽이었으며 한때는 관선(官船)을 두고 건너다가 나무다리를 설치하여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1935년 안양천 제방을 염창동쪽으로 축조하면서 지금의 양화교 자리에 콘크리트 교량을 건설함으로써 지역주민들은 "염창교"라는 이름으로 통용되었으나 행정적으로는 옛 양화나루로 이어지는 길이라 하여 "양화교"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목교

안양천을 건너는 또하나의 오목교는 한양에서 제물포(인천)까지 걸어 다닐 때 지름길로서 이용되었던 것으로 기후가 좋지 않았을 때는 통행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던 침수지대이지만 옛 지도에는 인천간로(仁川間路)라 표시될 만큼 발걸음이 잦았습니다.

 

영등포의 크나큰 상권 형성에도 원천이 되었던 길이기도 합니다. 오목교라는 이름의 유래는 안양천 원래의 이름으로는 "오목내"이며 그 뜻은 주변에 많은 지천들이 있으나 제일 깊히 오목하게 골이 파여진 하천을 오목내라 했던 것입니다. 오목내에 다리가 놓이자 오목교라 하였으며 한자로는 오동""자와 나무""자로 표현됨으로서 잘못이해하기 쉬우며 본래의 뜻은 순수한 우리말에서 양천 주민들에 의한 향토적인 교량 이름으로 지역적인 형태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용왕산

용왕산과 칼산은 목동신시가지 좌우 양편에 위치한 산으로서 평상시 우리들이 늘 접하며 생활하고 있지만 산에 대한 자세한 유래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편입니다. 현재 목동공원이 조성되어 있는 용왕산은 양천에서 는 유일하게 전설에 의해 이름이 붙여진 산으로 지금까지 몇 가지의 다양한 이름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옛 지도상에는 엄지산(嚴知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엄지의 뜻은 순수한 우리말인 첫머리로 비교되기에 지형적으로 천호지(千戶地)벌에서 초입(初入)에 위치한 산으로 뒤편에 있는 마을을 두고 지금도 엄지미마을이라고 불려지고 있습니다.

 

용왕산의 또 다른 이름으로는 어느 때인가 확실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죽어서 왕으로 환생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는 야사가 전해짐에 따라 그때부터 엄지산을 용왕산, 왕령산, 왕재산 등의 임금 "()"자가 포함된 산 이름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습니다. 전설의 시기를 추정해 본다면 600년 전의 지도에 엄지산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부터 유래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밖에 산의 형태가 한양을 등지고 돌아앉아 있다하여 역산으로 불리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칼산

안양천을 따라 남쪽으로 양천구와 구로구 경계에 위치한 칼산을 살펴보면 다른 야산들은 대부분 산등성이가 둥근 편이나 칼산은 안양천으로 인한 오랜 침식작용으로 동편에 벼랑처럼 깍이여 길게 급경사로 이루어져 산 정상이 칼날처럼 형성되었다 하여 칼산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칼산이란 이름은 자연 형태 그대로 우리말로 표현된 산 이름입니다. 용왕산과 칼산은 안양천을 따라 양천동편 좌우로 마주보고 있기에 양천을 수호(守護)하는 관문처럼, 한 쪽에는 용왕이 또 다른 쪽에는 칼로써 수문장(守門將)이 되어 양천을 지키는 형상이라 하겠습니다.

    

 

지양산

양천구의 서쪽인 부천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지양산은 화물터미널에서 북쪽으로 제일 높은 봉우리는 옛이름으로 대동산(大洞山)으로 남쪽은 연꽃과 같은 형상이라 하여 연의골이라 이름지어졌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양천의 중심지로서 연의동이라는 큰 고을이 있었다는 곳으로서 지금도 쉽게 유물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뜻에서 대동산(大洞山)으로 불려졌던 것으로 추정되며 골이 깊어 물이 항상 흐르기에 농경지로서 적합한 지역으로, 산 옆으로는 부천시 작동으로 넘어가는 까치울 고개는 지금도 성황당 돌무지가 아직도 남아있으며 옛경인간의 지름길로서 소금 운반에 이용되었던 통행로 구실을 하였다.

 

또한 부천지역에서는 지양산을 인천 계양산과 통하는 봉화를 올렸던 산이라 하여 봉배산으로도 불려지기도 했습니다.양천 쪽에서는 왜 지양산이라 하였는지 그 유래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이쪽에서 지형을 자세히 살펴보면 남향으로 양지(陽地)를 안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이름 지워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증산

지양산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증산(甑山)은 신월동의 주산으로 순수한 우리말로 "시루뫼"라 하며 옛 우리언어에는 성()"시루"라 했었다는 학설이 있습니다.가까운 부천시 작동에도 "시루봉" 또는 증산이라는 같은 뜻의 산이름이 있으며 양쪽 모두 정상 부분이 가파른 지형으로 방벽지대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증산은 또다른 지양산과 행정적으로 부천지역과 오랫동안 구분되어 왔던 경계선과 같으며 바람막이와 아늑한 의지로서 양천을 에워싼 울타리 구실이 되어 왔던 산이라 하겠습니다.

    

 

정랑고개

한성백제 초기에 한강변에서 육로를 이용하여 바다로 가고자 할 경우 큰 어려움이 없이 갈 수 있는 지름길은 어느 길이었을까? 그 당시 강화지역으로 쉽게 다닐 수 없을 무렵 해산물 확보를 위해 꼭 지나쳐야 했던 길, 특히 소금은 없어서는 안될 요긴한 식품이기에 이러한 통로가 우리 고장에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서 현재 학계에 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신정3동에 있는 정랑고개는 그 어느 곳보다 쉽게 바다로 갈 수 있는 길로서 부천의 까치고개를 지나 계양산 줄기인 장명이 고개를 넘으면 바닷물을 보게 됩니다.

 

양천에서 걸어서 오전 중으로 도착할 수 있는 거리, 그러한 중요성이 있기에 확보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또한 각 부족국가간의 각축전이 심했던 곳입니다. 현재 고개 주변에는 토성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한강이나 안양천이범람할 때는 머물러야 했던 곳으로 정랑고개는 경인지역의 첫 관문이 되었던 곳입니다. 최근에 확인된 것으로 바닷가에 해산물 채취 장소이외에도 고대의 토성이 발견됨으로써 역사성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인천 서구 공촌동은 옛이름으로 고대의 현이 있었다하여 고현리(古縣里)라 했으며 마을 북쪽에 토성이 있으며 양천의 정랑고개와 이어지는 제일 가까운 바다입니다.

 

정랑고개의 유래는 유적과 역사적으로 본다면 대적할 "()"자와 고개 "()"자로 "적령"에서 유래된 어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의 정랑고개는 전하여 오는 어원으로 이름짓게 되었던 것이며, 정과 사랑의 줄임말로 표현되기에 그 어느곳의 고개 이름보다 다정한 느낌과 운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경인철도가 나기 전만해도 소금짐이 드나들던 고갯길, 지금은 양천의 대표적인 고개로서 학생들의 통학로가 되고 있습니다.

 

    

 

 

 

 

전체 면적 중 70% 이상이 주거 지역

1970년대 중반까지 서울 각지의 철거민이 이주해 와 영세민 집단거주지역을 형성하였다. 서울의 인구를 강남으로 분산시키려는 정부시책에 따라 대규모 주택단지로 개발되기 시작했으며, 강서구 화곡동 일대와 더불어 서울 서부의 최대 주택지역이 되었다. 목동에는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건립되었으며 신월동에는 영세민을 위한 연립주택단지가 조성되었다. 대규모 주택지역으로 교육·상업·문화 등의 제반시설이 들어섰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중반, 철거민이 대규모 집단 이주한 목동신정동신월동 지역

1979년부터 정부 계획하여 조성한 목동 대단위 주택 단지

 

    

 

목동 아파트 단지가 조성된 동부지역은 주거 환경이 비교적 양호하며, 안양천변의 고수부지에는 시민들을 위한 체육시설이 있다. 반면에 부천시와 인접한 서부지역은 저산성 구릉지와 소규모의 농경지가 혼재하고, 아파트 보다는 단독주택과 연립주택의 주거 형태가 많다. 목동 신시가지에는 1988년에 신시가지의 전력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열병합발전소를 설립했고, 1989년에 목동종합운동장을 건립했으며, 아파트 단지 내에 약 4의 메밀꽃 단지를 조성했다. 목동 대단위 주택 단지가 있는 동부 지역에는 파리공원, 서부지역에는 양천공원을 비롯하여 근처 안양천변 둔치에 목동 운동장이 갖추어져 있어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주거 환경이 좋은 편이다. 목동에 SBS, CBS 기독교방송, 스포츠조선, 롯데홈쇼핑, 방송통신위원회 등의 방송,언론 업체가 많이 소재하고 있다.

 

그밖에 용왕산에 신정제1우수배제펌프장, 신월동에 김포수원지, 신정동에 신정제2우수배제펌프장과 지하철차량기지가 있다. 구의 동서를 경인고속도로가 지나고, 신월로·오목로·신정로·남부순환도로가 있으나 병목현상으로 교통체증이 극심하다. 그러나 1992년에 지하철 2호선이 양천구청까지 지선으로 연결되었고, 199612월에 지하철 5호선이 완전 개통되어 심각한 교통체증 현상이 완화되고 있다.

 

주택지역으로 성장하게 된 요인 중의 하나는 교통의 편의이다. 경인고속도로와 남부순환로가 교차·통과하며, 이들 도로를 근간으로 오목로·신월로·신정로 등이 개설되어 있고, 지하철 2·5호선이 동서로 관통하여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안양천을 따라 개설된 안양천 길은 광명시로 이어져 서해안고속도로와 이어지며 등촌로와 강서로가 구를 관통하는 교통망을 형성하고 있다. 신월동에 경인고속도로로 진입할 수 있는 신월 나들목이 있고, 영등포·강남 등 부도심으로 갈 수 있는 오목로, 남부순환로가 있다. 목동·신정동 지역에는 서울 지하철 2호선과 서울 지하철 5호선이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그러나 신월동에는 도시 철도망이 없어 상대적으로 교통이 불편하다. 이에 서울특별시에서는 2017년까지 신월동에서 출발해 목동 대단위 주택 단지를 거쳐 당산역으로 가는 경전철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목동에 대한민국과 프랑스의 수교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건설한 파리공원과 서울특별시 서부 지역 최초의 종합경기장인 목동종합운동장이 있다. 또한, 대단위 주택 단지의 전력 수요를 충당하는 대한민국 최초의 열병합발전소가 있다. 대한민국의 지상파 방송국 중 하나인 SBS (서울방송)의 본사도 목동에 위치하여 있다. 용왕산에 신정제1우수배제펌프장이 있고, 신정동에 신정제2우수배제펌프장, 서울 지하철 2호선 신정차량사업소가 있으며, 신월동에 김포수원지가 있다.

    

 

 

 

 

등촌시장

목동시장

신곡시장

유채꽃으로 노랗게 물든 안양천

신정산 (85m) (신정3)

지양산 (해발 125m) (신월7)

갈산 (해발 76m) (신정7)

용왕산 (해발 78m) (2)

서서울호수공원 (신월3)

달마을근린공원 (2)

신트리공원 (신정1)

갈산공원 (신정7)

오솔길 공원 (신월7)

계남근린공원 (신정3)

양천공원 (신정6)

오목공원 (1)

파리공원 (5)

목마공원 (5)

목동운동장

영학정 궁도장

 

 

신월동 걷고싶은 거리,

장수공원을 시작으로 어울림길, 월천길, 방아다리길

 

 

 

 

목동걷고싶은거리,

사랑의 거리 젊음의 거리 시와 묵향의 거리 해와 별의 거리 고향의 거리 어울림의 거리 바람의 거리 겸재의 거리 - 예술과 방송의 거리 빛과 통신의 거리 축제의 거리 배움의 거리 평화의 거리 꽃향기와 새소리의 거리 청소년 문화의 거리

 

 

 

문화재로 성시헌익사공신록·열조통기 등 전적(典籍) 문화재가 있다.

 

 

보물: 금강반야바라밀경

유형문화재: 성시헌익사공신록, 열조통기

서울시지정 무형문화재 제8호 삼해주(이동복)

서울시지정 무형문화재 제16호 초고장(한순자)

서울시지정 무형문화재 제19호 체메우기(최성철)

서울시지정 무형문화재 제29호 등메장(최헌열)

    

 

 

 

 

양천명소

    

 

열녀문 양천구 신월2동 장수공원 내

열녀문 열녀문의 주인공인 부인 이씨는 원주 원씨 가문에 출가해서 남편을 하늘과 같이 섬기며 시부모를 정성껏 모시고 동기간의 화목이 돈독하였다. 어느날 남편이 중병으로 눕게되자 부인 이씨는 동분서주하며 널리 약을 구하고 밤을 새워 간호하였고 남편이 죽을 때는 손가락에 피를 내어 남편에게 먹이는 정성을 다했으나 천명은 어쩔 수 없어 남편은 결국 죽고 말았다. 사별한 남편에 대한 애통함 때문에 음식을 먹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버리는 등 1주일간을 단식하여 이십대 후반에 죽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보고받은 조정에서는 1729(영조5)에 전의이씨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하여 열녀문을 하사 하였다.

 

150년된 느티나무 양천구 목4760-28

150년된 느티나무 양천구 목4동에는 수령 150년된 느티나무 고목이 한그루 서 있다. 이 느티나무는 이곳이 대규모 주택단지로 변모하기 이전에도 마을이 존재했었다는 하나의 증표가 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 뜻있는 나말(4동의 옛이름)마을의 주민이 식재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6.25사변때는 폭격을 받아 고사상태였으나 새순이 움트는 등 각종 재해를 극복하고 잘자라고 있으며, 4동 사무소에서 동민과 함께 영원토록 아끼고 가꾸기 위해 관리하고 있다. 전해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누구든 건강을 빌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졌다고 하며 함부로 훼손하면 저주를 받고 큰 재앙이 뒤따라서 오래 전부터 잘 보호하여 현재까지 살아있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받들여 지고 있다.

 

파리공원 양천구 목5906

파리공원 목동 906번지에 위치한 파리공원은 198736일에 착공, 동년 71일 준공하여 개원하였다. 파리공원은 1886년 한국과 프랑스가 통상 수호조약을 체결한 이래 100년 동안 두 나라가 동서문화의 교류는 물론 경제발전의 동반자 및 국제평화유지의 혈맹으로 다진 우호를 상기하고, 파리시 코로니 아파트 단지내에 서울 광장을 마련한 답례로 신시가지 부지 제 2근린공원을 파리공원으로 조성케 되었던 것이다. 공원과 바로 인접한 곳에는 목동시립도서관이 위치하여 휴식과 문화공원으로의 면모를 갖추었다.

 

 

 

정랑고개 양천구 신정3동 산 115-68

양천구 신정동 산 115-68에 있는 정랑고개는 양천구청에서 금옥여중, 고등학교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정확한 이름과 유래는 알 수가 없으나 사람들은 이 고개를 정릉, 정랑, 정녕 등으로 제각기 부르고 있다. 옛날 장안에서 인천까지 걸어가는 지름길로서 넘은 첫고개이며, 그 옆은 성넘어라 부르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정랑고개가 옛날 신기(신트리)마을 근처에 있다하여 신트리고개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우렁바위 양천구 신정3동 산103-1번지

우렁바위 양천구 신정동 산103-1번지에 있는 야산 봉우리에는 우렁바위라는 커다란 바위들이 있다. 이 바위들이 '우렁바위'라 불리우는 까닭은 바위가 '울었다'하여 불리워졌는데, 길마(안장)처럼 생겼다 하여 '길마바위'라 불리우기도 한다. 마치 둘러앉아 이야기하는 듯 모여있는 커다란 바위들이 '우렁바위'인데 강서, 양천지역의 어느 곳을 살펴봐도 이처럼 커다란 바위는 찾기 어렵다. 한글학회에서 출판된 한국지명총람에도 명시되어 있는 '우렁바위'는 신정주민의 자랑거리일 뿐만 아니라 주변은 신정배수지로서 체육시설등 시민 휴식공간으로 잘 정돈되어 있다.

    

용왕산의 용왕정 양천구 목2

용왕산의 용왕정 용왕산은 일명 엄지산이라고도 하며 지형적으로 '천호지벌'(인공폭포 건너편)의 초입되는 곳에 있다. 서울 정도 600(1394~1994)을 기념하여 건립한 용왕정은 팔각형 정자로 조선조 중기 건축형태로 건립하였으며, 정자에 올라가면 서울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이 뛰어난 곳이다.

    

 

 

구민헌장비 양천구 신정6동 양천공원

 

 

 

 

 

 

 

 

 

 

 

 

목동아이스링크장 양천구 목1918번지

목동아이스링크장 국제 빙상경기 유치 및 효과적인 훈련을 통한 우수 선수 육성과 빙상인구의 저변확대를 도모하기 위한 국제규격의 빙상 경기장의 확보를 위하여 목동 918번지에 지하1층 지상2층의 건축연면적 14,700의 경기장을 198821일 착공, 1989121일에 개장하였다.

 

 

 

 

 

 

      

법정동 3개 기준, 행정동 기준은 18

신정(新亭(신월(新月)

    

 

 

 

 

 

신정(新亭)

서부 한강변은 고려때부터 양천이라 불려졌으며 한때 양천의 중심지로 지금의 신정3동 서부 화물 터미널이 위치한 넓은들 주변인 연의골(延義洞)이였으나, 조선시대 도읍이 한양으로 정해지자 한강의 뱃길 따라 지금의 강서구 가양동이 양천의 중심지로 번성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양천현(陽川縣)이 대표적인 땅이름 이였으나 이조말 고종때 갑오개혁(1894)으로 현()에서 군()으로 개혁되어 부근의 행정구역이 "양천군장군소면" 신월리, 고음월리, 당곡리, 은행정리, 신기리, 천신리 등으로 변경되었으며, 1914년 양천이 김포군에 병합되면서 동서로 양분되어 양동과 양서로 갈라졌으며, 신정동은 김포군 양동면 신정리로 행정구역이 변동되었습니다.

 

신정리는 지금의 신트리(新機 : 신정3)마을의 ""자와 인근 은행정(銀杏亭 : 신정4)마을의 ""자를 따서 신정리라는 새로운 지명이 생겨난 것입니다. 신정의 기본마을로서 신트리의 지명 유래에 대해서 자세히 전해지는 것은 없으나 14세기의 지도에 신트리가 新機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는 신기가 집터대()자를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신틀이"는 처음 윤곽을 잡고 형성된 마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의 큰 마을로서는 은행정(銀杏亭)으로 지금의 신정4동 천주교회 주변으로서 은행나무 정자가 있었다하여 은행정으로 불려 졌으며 한글학회 지명총람에는 마을뒷산에 고려장터라 부르던 곳에 지석묘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지금은 그 위치를 알 수 없으나 은행정 마을도 사람이 살기에 좋은 곳으로 형성시기가 오래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해방전 신정리에는 5개의 단위 부락이 있었으며 "신트리, 은행정, 오금리, 단산, 충청촌"으로 지금의 방대한 구역을 띄엄 띄엄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중 가장 오래된 마을의 "신트리""은행정"의 두마을 이름을 따서 신정동(新亭洞)이라는 지명이 붙게 되었습니다.

 

은행정

옛날에 이지역에서 뿐만 아니라 양천현 전체에서도 가장 컸던 마을로써 신정산의 동북쪽에 위치해 있었고 마을에 은행나무 정자가 있었다. 지금의 위치는 신정4동 천주교회 근처이다.

 

신트리

신기마을이라고도 하며 처음 터를 잡은 곳이라는 속설도 있다. 신트리에서 서쪽으로 신정산을 넘어가는 길목에 정랑고개가 있으며 신트리의 남쪽에는 능꼴이라 한다.

 

댓골마을

남부순환도로와 신정로가 교차되는 지점에 있으며 지금은 서부화물터미널과 신정아파트 등 각종 주택이 들어서 있다. 양천구 지역에서 아직도 시골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오금

칼산의 서쪽에 형성되었던 마을로써 마을형국이 오목하여 마치 사람의 다리 오금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는 재개발사업이 한창이다.

 

충청촌

일제가 안양천에 양동제방을 쌓아 천호지벌을 논으로 개간하여 충청도 사람들을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하였다. 그 충청도 사람들이 만든 부락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단산

지금의 신정2동 신안아파트 근처이며 이 지역은 옛날에 습지의 한가운데로써 사람이 살 수 있는 지역이 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일제때 천호지벌을 논으로 개간한 이주주민을 이주시켜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

지금 신시가지 아파트 단지를 이루고 있는 목동지역은 고종31년 갑오개혁(1894)으로 양천현()에서 군()으로 개혁되어 행정구역이 양천군 남산면(南山 : 통합병원 남쪽의 산)에 속한 1030여호의 작은 부락인 "달거이, 엄지미, 남아리, 모새미, 마장안"등 작은 마을이 있었으나, 60여년전 안양천 제방공사로 많은 농경지가 조성되면서 외지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새말'이라는 마을이 형성되기도 하였습니다.

 

농경지가 조성되기 전에는 갈대가 우거진 침수지대로 무성한 목초가 조성되어 있어 조선시대에는 말을 방목하는 목장으로 이용되어 지금도 마장안이라는 땅이름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현재는 목동을 쉬운 표기로 나무""자와 고을""을 사용하지만 원래의 뜻은 기를 "'자와 고을""자가 옳은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이 지역에 속하는 옛 마을의 이름들은 주변 지형에서 인용된 지명으로 지금은 신시가지 아파트 단지를 이루고 있는 주변지역은 예로부터 전해오는 예언이 있으며 그 뜻은 앞으로 수천호가 들어설 땅이라 하여 천호지 (千戶地)벌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대규모 토목공사를 하지 않으면 이용할 수 없는 황무지를 수천호의 집터로 예상했다는 것은 지금과 같은 국가적인 의지에서 이루어진 대도시 건설을 예언했다 해도 과히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땅이름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옛 선인들의 선견지명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목동은 필마가 힘차게 뛰놀던 초원과 옛 선인들의 예언이 깃든 지혜의 땅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곳에 살고 있다는 것은 크나큰 긍지로서 좋은 뜻을 우리에게 줄 것입니다.

 

나말

목동의 남쪽 가운데 있었고 용왕산의 서쪽에 있었던 마을로써 내목동이라 불리기도 했다. 현재의 위치는 목4동의 북쪽과 목3동의 남쪽으로써 150년된 느티나무가 남아 옛마을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모새미(모세미)

목동리의 끝 바깥쪽에 있었던 마을로써 외목동이라 불려지기도 했으며, 현재의 위치는 목제4동 황제연립 근처이다.

 

마장()

목동리의 남쪽에 있었던 마을로써 조선시대에 목장을 설치하여 말을 기르던 곳이며 이 마을 북쪽에 마장산이 있다. 이 산에는 서낭당과 약수터가 있었는데 목동 신시가지 개발 사업으로 인해서 이 산은 없어졌고 현재 목4동 가장 남쪽 고속도로변이다.

 

달거리 마을

월촌(月村)이라고도 하는데 용왕산 북동쪽에 형성된 마을로써 용왕산에 떠오르는 달을 제일 먼저 볼 수 있기 때문에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안양천변에서 안쪽으로 들어간 마을은 안달거리, 안양천변에서 바깥쪽에 있었던 마을은 바깥달거리이며 현재의 위치는 용왕산 북쪽이다.

 

새말

새말은 신촌(新村)이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새로 형성된 마을이다. 기존의 외목동 내목동이 오래전부터 형성된 마을인 반면에 새말은 일제시대에 형성된 마을이다. 이 마을은 용왕산의 남동쪽인 목2, 4동의 경계선에 위치하고 있으며 배후 습지였던 지역(천호지벌)을 농경지로 개간함으로써 형성된 동네이다.

 

엄지미

신촌에는 엄지미라는 마을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 목2동 우성아파트자리이다. 이 부락의 이름은 엄지산(현재의 용왕산)에서 유래되었고 이 마을 뒷산에 산제터가 있었다.

    

 

신월(新月)

현재 주택가를 이루고 있는 드넓은 신월지역은 고종31년 갑오경장(1894)으로 양천현()에서 군()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었으며, 1914년 신월지역이 김포군에 편입되면서 김포군 양동면 신당리 행정구역이 변동되었습니다.

 

신당리는 "신월과 당곡"의 마을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신당리에는 "당곡(堂谷), 고음월(古音月), 신대(新垈), 신월(新月), 개트리(開垈)"등 마을이 현재의 신월지역에 띄엄띄엄 자리를 잡은 100여호 안팎의 한적한 산골이었습니다. 신당리의 각 마을 이름의 유래를 살펴보면 "당곡"은 당제를 지내는 도당(都堂)이 있었다 하여 당골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고음월(곰달래)"은 달빛이 밝게 비치는 마을이라 하여 우리말 "고운달"에서 유래되었으며, "신대"는 새터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신월""개트리"는 땅모양에서 따온 것으로 옛부터 신월마을을 두고 증산(甑山 : 현 신월3동 지역) 동편에 있는 반월과 같다하여 동반월(東半月)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밝은 달빛이 비치는 마을로서 곰달래와 신월은 운치가 넘치는 지역으로 나지막한 야산지대, 확 트인 시야 및 멀리 떠오르는 달빛은 지대가 높은 이곳 마을에서는 유난히도 밝게 보였기에 고운달이 비치는 곳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달빛 아래 옛 한강변을 굽어보는 정경은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월은 기울어져 가는 달이 아니라 점점 크고 밝아오는 초승달에 비유될 수 있으며 역사에 기록된 좋은 예로서 삼국사기에 "백제 말기에 땅속에서 나온 거북이 등에 새겨진 글로서 신라는 초승달과 같다 하여 삼국통일을 점쳤던 일화"가 전해지고 있는 것과 같이 점점 커져가는 초승달은 좋은 뜻으로 풀이되며 번영과 희망을 줄 수 있는 정서적인 땅이름입니다. 신월동은 달빛이 머무는 아름다움과 꿈과 희망이 넘치는 "달맞이 마을"이라고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곰달래 부락

옛지도에는 고음월(古音月)이라 표기되어 있는데 이것은 "달빛이 맑고 곱게 비친다."라는 뜻의 고은달을 한자의 뜻과 소리로 표기한 것입니다. 이 지역은 현재의 신월 정수사업소 (김포수원지)에 위치하였으며 곰달래의 아랫동네는 아랫말, 윗동네는 웃말이라 지칭하였다.

 

신월리 부락

신월리는 지금의 양서중학교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그 반대편 신월1동사무소 북쪽에는 신월리에서 새로 만들어졌다는 의미에서 이름이 붙여진 신대리(新大里)가 있었다. 신월부락의 하나로써 개대리(開垈里)라 불리며 곰달래쪽의 사람들이 이주하여 부락이 새로 형성되었다

 

달거리 마을

신월리는 지금의 양서중학교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그 반대편 신월1동사무소 북쪽에는 신월리에서 새로 만들어졌다는 의미에서 이름이 붙여진 신대리(新大里)가 있었다. 신월부락의 하나로써 개대리(開垈里)라 불리며 곰달래쪽의 사람들이 이주하여 부락이 새로 형성되었다.

 

땅굴부락

당곡이라고도 하며 마을의 어귀에 당집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현재의 위치는 신월2동 연립주택 단지이다.

 

곰달래 마을의 전설

아직 한강 유역이 백제 땅이었을 때 이 곳에 서로 사랑하는 음소와 음월이라는 남녀가 살고 있었다. 신라의 힘이 점차 세어져 끊임없이 백제를 위협하자 전국에 군대소집 명령이 내렸고, 이곳에 살던 청년도 나라를 위해 전쟁터로 나가게 되었다. 청년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동산에 둥근달이 깃발처럼 떠오르면 백제가 이긴 것이니 자신을 기다리고 칠흑같은 밤이 되면 백제가 싸움에 진 것이니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나라는 말을 한 후 전쟁터로 떠났다.

 

몇 날이나 계속되던 신라와 백제의 싸움이 끝나갈 무렵 동산에는 손톱 반만큼이나 작은 조각달이 떠오르기 시작하다가 이내 커다란 둥근달이 되었다. 여인은 기뻐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먹구름이 지나가면서 다시 캄캄한 밤으로 바뀌었고 이에 놀란 여인은 산위에 올라가 아래로 몸을 굴려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다. 구름이 지나가 다시 환하고 커다란 날이 나왔으며 얼마 후 밤새 먼 길을 달려온 청년이 왔으나, 이미 여인의 목숨은 끊어진 상태였다.

 

산꼭대기 달이 떠오르는 곳에 자신의 손으로 여인을 묻고 돌아서며 청년은 이제 끝이다. 거친 세상 끝이구나라고 했는데 이것이 변해 고음월(古音月)이 되었다고 한다. ()는 이두음으로 사용할 때 거칠다 끝났다는 뜻으로 바로 음월의 목숨이 끝났다는 표현으로 이것이 변해 곰달래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