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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너루, 동재기나루, 노들나루, 동작구 銅雀區

草霧 2013. 11. 28. 18:19

 

 

 

 

흑석너루, 동재기나루, 노들나루

 

 

동작구 銅雀區

 

 

 

  

 

Dongjak-gu (Tongque)

 

 

 

서울특별시의 남부에 있는 구

원래는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하북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후에 시흥군 동면·신동면·북면으로 분할되었다. 1936년 경성부에 편입되어 영등포출장소 관할하에 있다가 1963년 영등포구에 속하게 되었다. 1973년 관악구에 편입되었으며, 1980년 관악구에서 분리·신설되었다.

 

 

 

시의 남부에 위치한 구. 구청 소재지는 노량진동이다.

조선시대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上北面)과 하북면(下北面)

시흥군 동면과 신동면(新東面) 및 북면(北面)

1936년 경성부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경성부에 편입

1943년 구제(區制) 실시에 따라 영등포구

1963년 영등포구 신동출장소가 관할

1973년 관악구 편입

1980년 관악구에서 분리 신설

 

 

 

 

동작구는 198041일 관악구에서 분리되어 서울특별시의 17번째 구로 탄생되었다. 그 명칭은 동재기나루(銅雀津)에서 유래했으며 유구한 한강과 역사를 함께 했다. 한반도의 중부지역을 흐르는 한강은 겨레의 젖줄이며 아득한 옛날부터 역사와 문화의 원천이었다. 특히 땅이 비옥하고 자연 경관이 수려한 한강하류 지역은 선사시대부터 우리 민족의 터전이 되었다. 물산이 풍부한 국토의 중심지로, 중국과의 교통요충지로 민족사의 중심무대가 되어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백제의 발상지였던 한강하류지역을 고구려 장수왕이 점령(475)하여 노량진을 경계로 광명시에 이르는 서편에 잉벌노현, 과천 안양시에 이르는 동편에 율목군을 설치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통일 후에 잉벌노현은 곡양현, 율목군은 율진군으로 개칭되었는데, ‘곡양은 곡물이 많이 생산되는 농업지대이고 율진은 밤나무지대와 노량진 일대에 도진촌이 조성된 것을 의미한다. 고려때에는 곡양현을 금주, 율진군을 과주로 개편한 뒤 현종9(1018) 중앙집권화의 일환으로 금주는 안남도호부에, 과주는 광주목에 예속시켰으나 중앙관이 파견되지 않고 지방세력이 다스리는 자치현으로 유지되었다.

 

조선왕조가 한양에 정도하면서 노들강 (한강)을 사이에 둔 동작지역은 삼남지역과 수도를 연결하는 한성의 관문이 되었다. 동재기나루, 노들나루가 개척되고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빈번해지면서 진을 중심으로 한 사회 경제적 발전은 물론, 군사적 요충지가 되어 숙종 29(1703) 금위영 소속의 별장이 배치되기에 이른다.

고려 말기의 혼란과 부패를 일소하기 위해 신흥사대부를 중심으로 새로운 국가가 건국된다.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표방하고 도읍지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하게 되었으며, 새로운 국가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행정개혁도 뒤따르게 되었다. 특히 한양을 도읍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한강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 한반도의 핵심지대로 자리잡고 발전하게 된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태종 2(1413)년에 지방행정구역을 개혁하여 경기도는 고려시대에 좌우도로 나누었던 행정구역을 다시 합해서 경기좌우도라고 하였다. 태종 13(1413) 신유(辛酉)에 대대적인 읍호개정(邑號改正)이 실시되어 '일주'를 산이나 천으로 고쳤다. 이에 따라 금주(衿州)는 금천(衿川)으로, 과주(果州)는 과천(果川)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현재의 동작구 전지역은 과천현 상북면과 하북면에 속하고 있다. 특히 이 두면은 과천현 전체 인구의 33%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지역에 비해 변화했었음을 알게 한다. 이것은 한강의 동작진을 통해 사당동을 거쳐 남태령으로 통하던 삼남대로 변에 이들 마을이 위치하고 있었다는 점과도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조선 말기까지만 해도 현재의 대방동길보다는 동작동을 거쳐 사당동으로 가는 길이 중심로였음을 알 수 있다.

    

 

 

 

 

정조 19(1795)에는 행정명칭의 변화가 있었는데, 금천이 시흥(始興)으로 변경된 것이다. 이후부터 금천이라는 명칭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으며, 현재까지 시흥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또한 시흥군에 속한 과거 상도리(上桃里)의 표기가 다시 상도리(上道里)로 개칭되어 있다. 또한 과천현 상북면에 속해 있던 동작리(銅雀里)가 현내면(縣內面)으로 통합되었다. 현재의 장승배기를 기점으로 하여 시흥군과 과천현이 경계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는 같은 동작구에 속해 있으나 이러한 행정 구역의 분할은 정조 이전부터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현재의 동작구 대부분은 과천현 하북면에 속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특히 이 지역에서 옹기를 굽고 판매가 이루어졌던 것 같다.

 

1966년 발간된 한국지명총람에 보면 노량진동에 '동이점 마을'이나 '점말' 또는 '독막'이라는 지명이 기록되어 있다. 옹기를 굽는 마을이나 옹기를 파는 마을로 표시된 이들은 1960년대 당시에는 없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정조이전부터 존재했던 마을로 생각된다.

 

고종 32(1895)에는 전문 6조의 칙령 98호로 지방행정제도나 명칭을 개혁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외세의 침탈과 국정의 위기로 인해 혼란해진 민정을 수습하기 위한 조치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이때에 동작구가 속해 있던 지역인 과천현은 과천군으로 바뀌게 되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합병이 된 이후, 일제는 191312월말에 공포하고 다음해인 1914년부터 시행된 총독부령 11호인 <도의 위치 · 관하구역 및 부군 명칭 · 위치 · 관할구역>에 따라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행정구역 명칭으로 시행되어 왔던 도와 부군의 명칭이나 관할구역이 대폭적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하부행정단위였던 면((()까지도 개편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반도에서 한민족이 전통적으로 고수하며 살아왔던 이래로 가장 큰 변혁을 맞이하였으며, 이러한 근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우리 민족의 뿌리를 뒤 흔들어 놓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다. 이때에 이루어진 작업은 현재까지도 큰 변화가 없이 그 골격을 유지하게 된다.

 

이로써 과천군에 속해 있던 동작구 지역은 시흥군 북면으로 통폐합하여 자연부락 단위로 설정되어 있던 마을들을 행정단위로 정착시켰다. 1920년대에 들어와서는 영등포에 있던 북면사무소가 영등포의 읍 승격과 함께 노량진으로 이전하였다.

 

1936년에 들어와서 사당동을 제외한 동작구 전지역이 경기도에서 경성부로 편입되는 개편이 이루어졌다. 1936214일 공포하고 41일부터 시행된 부령 8호인 <부군의 명칭 · 위치 · 관할구역개편에 의거>하여 이들 지역도 서울이라는 행정구역의 일원이 되어 이들 지역을 영등포 출장소가 관할하게 된 것이다. 이때 사당리라는 시흥군 신동면에 그대로 소속되어 있었다. 1943년에는 부령 1163호에 의해 출장소제도가 폐지되고 구제로 바뀌어 사당동을 제외한 동작구 전지역이 영등포구에 편입되었으며, 동의 명칭도 일본식으로 정()으로 명명되었다.

 

 

동작구의 15개동 이름들도 조선 역사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다.

백로가 노딜던 나루터라는 뜻으로 조선시대에는 도성을 지키기 위한 진이 설치된데서 유래한 노량진, 용산에서 수원으로 통하는 도진의 하나였던 동작진을 조선시대 동재기나루라 부른데서 유래한 동작동, 큰 사당이 있었다는 사당동 등이 그렇다.

 

동쪽으로는 서초구, 서쪽으로는 영등포구와 금천구, 남쪽으로는 관악구와 접해있고 북쪽으로는 한강이 흐른다. 분구될 때 국립현충원이 있는 동작동(銅雀洞)에서 이름을 따왔다. 동작동의 이름의 유래는 2가지다. 옛날 이 지역에는 검붉은 구릿빛의 돌인 '동재기'가 많았는데 이것을 한자로 표현한 것이 동작(銅雀)이란 설이 있으며 구릿빛()을 띠는 참새()와 관련이 있다는 설도 있다.

 

북쪽은 한강과 샛강을 경계로 용산구와 여의도와 접해 있으며, 동작대로를 경계로 서초구와 접해 있다. 북쪽은 국사봉 능선과 도림천을 경계로 관악구와 접해 있으며, 서쪽은 시흥대로를 경계로 영등포구와 접해 있다. 노량진수산시장에서는 수산물이 공급 전문시장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1899년에 개통된 뒤 이듬해에 한강철교가 준공되어 강북과의 교통이 처음 열린 철도의 시발지이며, 지하철 2·4·7호선의 개통으로 사당역·이수역·상도역 등이 각각 건설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간선도로는 한강대교에서 노량진을 거쳐 수원에 이르는 1호 국도와 올림픽대로·남부순환로가 있다.

 

 

동작구는 일찍이 서울특별시의 관문인노들나루

를 중심으로 우리나라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으며, 교육의 요람으로 자리잡고 있다. 또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산화한 호국영령을 모신 국립서울현충원과 사육신묘, 마을의 수호신인 장승이 서있던 장승배기, 양녕대군이 올라가서 국사를 걱정했다는 국사봉, 정조대왕이 현륭원 참배 길에 잠시 쉬어가던 용양봉저정,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역인 노량진역 등 수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국립서울현충원

사육신공원

노량진 학원가

노량진수산시장

 

 

 

조선시대 젊은 충신들을 기린 곳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인도교와 노량진역 중간, 높은 언덕을 오르면 사육신역사공원이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 여섯 명의 젊은 충신들은 수양대군, 즉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단종을 복위키로 결의한다.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이 열리는 날, 거사를 준비했으나 사전에 발각돼 순절하고 만다.

 

1978년 서울시는 이들 사육신(死六臣)을 기리는 공원을 만들어 일반에 공개했다.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유응부(兪應孚)의 묘소와 유성원(柳誠源하위지((河緯地)의 위패, 공묘를 모셨다. 위패를 모신 의절사와 사육신묘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8호로 지정됐다. 당초 성삼문·박팽년·유응부·이개의 묘만 있었으나 시가 이 곳을 성역화하면서 하위지·유성원과 1981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한 김문기(金文起)의 가묘(假墓)를 만들어 총 7개의 묘가 조성됐다.

 

 

 

서 견 (徐甄)

유일한 (柳一韓)

서 견(徐甄)

 (盧 閑)

양녕대군(讓寧大君태조 3(1394) 세조 8(1462))

김문기(金文起정종 1(1399) 세조 2(1456) )

하위지(河緯地태종 12(1412) 세조 2(1456) )

이개( 태종 17(1417) 세조 2(1456) )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태종 18(1418) 세조 2(1456) )

김경환(金景煥)

심훈(沈 熏1901~1936 )

김명환(金命煥1913~1989)

 

 

노들강변 민요

옛날 노들나루터에서 불리운 민요로 우리 구와 함께 길이 남을 동작구의 민요이다. 이 노래는 신민요로 등장하였으나 해를 거듭할 수록 우리 민요화한 노래로 작사자는 만담가로 유명하였던 신불출이고, 문호월(文浩月)의 작곡이다. 현재 이곡은 무용곡으로 널리 쓰이고 있으며, 경쾌하면서도 애조가 담뿍 들어 있어 이 세상 한을 물에다 띄워 보내려는 심정을 읊고 있다. 우리 겨레의 얼과 그 옛날 노들강(오늘의 한강)의 정경이 담긴 이 노래는 6.25전쟁 후에도 남녀노소간에 즐겨 부르던 민요이다. 이 노래만으로도 노들강변의 가지를 늘어뜨린 수양버들과 한강의 푸른 물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박태보 (朴泰輔) 설화

박태보가 노강서원(鷺江書院)에 모셔진 일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박태보는 어려서부터 슬기롭고 또 얼굴이 남중일색(男中一色)이었다. 어느날 참판 이종엽(李宗燁) 집에 심부름하는 여인하나가 그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하여 박태보의 유모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유모가 그 사정을 딱하게 여겼으나 박태보의 심지가 곧으므로 차마 입을 열어 볼 수가 없어 그의 모친에게 이야기를 해보았다. 그의 모친 역시 그 여인의 짝사랑을 동정하여 남편 서계공(西溪公)에게 아들을 좀 달래보라고 청하였다. 그리하여 그 부친이 박태보를 불러 여인에게 한을 남기면 앞으로의 길에 장애가 될 것이라 훈계하였으므로 박태보도 부친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 여인은 박태보의 양친을 뵙고 스스로 머리를 쪽지어 출가한 부녀처럼 하고 다녔다. 세월은 흘러 박태보는 그 뛰어난 재주로 벼슬길에 올랐고 여인은 그의 기억에서 차츰 멀어졌다. 숙종 15(1689) 중전에 대한 장희빈의 끈질긴 모함이 성공하여 왕이 중전을 폐비하려 하자, 직언(直言)을 잘하던 박태보는 이 소식을 듣고 붓을 들어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진도로 귀양을 가게된다. 그러나 귀양지로 가는 길에 국문시 입은 장독(杖毒)과 화상(火傷)이 심해 친구집이 있는 노량진에 머물렀다. 이때 어느 여인이 와서 박태보를 한번 뵈옵기를 청하였다. 방문객은 바로 전일에 박태보를 사모하여 혼례식도 올리지 않고 출가한 부녀자처럼 쪽을 지고 다니던 그 여인이었다. 박태보는 멀어져가는 정신을 간신히 수습하여 겨우 손을 들어 여인의 손을 한번 꽉 잡은 다음 그만 목숨이 다했다. 여인은 그 앞에서 울고 또 울다가 일어나 나갔다. 그 후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노강서원이 완성되던 날, 그 여인은 소복을 입고 서원 뒤 서까래에 목을 매어달아 싸늘하게 죽었다고 한다.

공원 내 의절사에서는 매년 109, 애국충절과 선비정신을 기리며 추모제향을 올린다. 전날인 8일에는 사육신의 혼을 부르고 영혼을 달래는 살풀이춤과 사물놀이, 굿, 판소리, 단종 복위 모의과정을 그린 무용극 등 문화행사도 열린다. 2010년 말 지하 1, 지상 2층 규모의 사육신역사관도 개관했다. 사육신 후손이 기증한 유품과 사육신 관련 고()서적 등이 전시됐다.

 

 

 

조선시대 효()와 전통이 곳곳에

조선 태종의 장남, 세종의 맏형인 양녕대군(1394~1462)은 산에 올라 경복궁을 바라보며 나라와 동생의 일을 걱정했다고 한다. 동작구 상도4동에 위치한 해발 184m의 낮은 산, 국사봉(國思峰)의 이름이 탄생한 배경이다. 왕세자로 책봉된 양녕대군은 자유분방한 성품으로 궁중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일부러 태종의 눈 밖에 난 행동을 거듭, 폐위됐다. 대신 그의 동생 충녕대군, 훗날 세종이 책봉됐고 그는 전국을 유랑하며 일생을 마쳤다. 세종 즉위 후에도 우애가 깊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시()와 서()에 능했고, 평양기생 정향과 이별할 때 비단 치마폭에 써준 팔난시(八難詩)는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국사봉 정상에서는 서울의 동서남북이 한눈에 들어온다. 또 북쪽으로는 양녕대군 이제 묘역도 볼 수 있다. 사당·제사당·제기고 등 3개 건물과 사당 후면으로 묘소가 있다. 조선 초기 문신 노한(1376~1443)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3년간 시묘(侍墓)를 했던 자리에 정자를 지었다. 지금의 흑석동이다. 그의 호는 효사당(孝思堂). 당시 이조판서 강석덕은 이 정자를 효사정이라 이름 붙였다. 태종과 동서간인 노한은 경기관찰사·한성부윤·대사헌을 거쳐 우의정까지 역임했다. 효사정은 당시에도 효도의 상장으로 유명했다. 기순·정인지·신죽주·김수온·서거정 등은 이 정자의 정취와 효사의 뜻을 시로 읊어 기렸다. 특히 한강을 끼고 있는 정자 중 경관이 가장 뛰어났다고 전해온다. 지금의 효사정 역시 서울시가 뽑은 우수경관 조망 명소 중 하나로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조선 정조는 부친 사도세자의 묘에 참배하러 가던 길에 수풀이 우거진 곳에 잠시 쉬어가게 된다. 그 곳이 음산하여 왕명으로 장승을 세웠단다. 이 후 마을 사람들이 장승 앞에서 동제(洞祭)를 지내며 안전을 기원했다. 왕명으로 세워진 유일한 대방장승이 있는 곳, 노량진2동의 장승배기 지명의 유래다. 그 옛날 사람들은 장승 앞에서 마을 공동 문제를 의논하며 마을의 안녕을 빌었다. 이 같은 공동체 풍습을 계승하기 위해 매년 1024일 장승제를 연다.

 

 

 

본동 용궁당 (龍宮堂)

이 용궁당은 1697(숙종 23)에 박태보(朴泰輔)를 위하여 세운 노강서원(鷺江書院)이었으나 서원이 철폐되면서 여기에 있던 물건들을 용궁당(龍宮堂)에 옮겨 놓은 것이라 전한다. 신상(神像)은 특별한 표식은 없었고 큰 칼 등이 있었다. 제의(祭儀)는 봄, 가을 곧 음력 3월과 7월에 날을 받아서 두 번 지낸다. 1985년 이전까지만 해도 당제(堂祭)를 지냈다고 한다. 제의 절차는 먼저 제를 지내기 한달 전에 모이을 가져 제관을 선정한다. 제의 과정은 각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지신(地神)에게 제를 올리고 한강으로 나가 강변에서 제를 올린다. 그 다음 대동우물에 와서 제를 지내고 당에 가서 다시 제를 지낸다. 재물로는 주로 통돼지와 떡을 쓴다. 제주(祭主)는 제를 지내기 전 모임에서 정한다. 주로 가장 연장자가 맡게 된다. 제주는 상가집에 가지 말아야 하며, 몸을 깨끗이 해야 한다. 제의에는 노량진 본동 주민이 참여하며, 제의 목적은 강이 가까이 있기 때문에 물에 빠져 죽지 말라고 모신다고 한다.

 

 

본동 용궁당

당의 유래는 조선시대 왕명으로 마 장군할머니(마씨 할머니)가 신용산 새풀이(현 이촌동)에서 당을 이룩한 데서 비롯된다. 옛날에는 한강물이 맑아 나라에서 물을 당나귀로 져다 먹었다. 그래서 한강의 용신을 위해 쌀을 몇 가마씩 고기밥으로 주었다. 그러다가 임금이 명하기를 '당을 이룩하여 용왕님을 모시고 를 지내면 그 밥은 사라도 먹고 고기도 주어 좋지 않겠느냐'고 하여 마씨 할머니가 당을 이룩하게 되었다 한다. 정월 14일날 한강에서 방생하는 것도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제의형식은 옛날에는 고사형식으로 기도만 하였는데 후에 무당들이 와서 굿을 하였다고 한다. 굿은 열두거리를 하며 하루동안 하였다고 한다. 제물은 떡·삼색과일·어물 등을 쓰며 굿을 할 때는 소머리를 쓴다. 떡은 용왕님에게는 백편(백설기), 신장님에게는 팥떡을 쓴다. 용왕님은 영검하여 기도하면 원하는 대로 잘 된다고 한다.

 

 

노량진1동 서낭당

신목은 느티나무이다. 이 일대는 아름드리 소나무·느티나무·도토리나무가 빽빽이 우거져 있는 야산으로 '당산'이라 불러졌다. 제의는 음력 10월에 거행하는데 서낭당 느티나무에 당줄을 치고 음식을 푸짐하게 장만해서 자정에 지낸다. 액을 쫓고 온 동네가 잘되고 잘 살게 해달라고 기원하였다. 아이들도 이 날만은 자지 않고 촛불에 소지(燒紙)를 올렸다고 한다.

 

 

노량진1동 부군당

당집은 한 칸 짜리 기와지붕으로 안에는 비각이 있었다.1925(을축년)에 큰 장마가 져서 국제적십자사에서 마련한 비용으로 이촌동 주민들을 산동네 복흥촌으로 집단 이주시켰는데, 원래 미신을 많이 믿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곳에 당을 옮겨 짓고 믿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0년대부터는 제를 지내지 않았다. 비각 안에 신상(神像)은 없고 비각만이 남아 있다. 제의는 가 중단되기 전까지만 해도 봄·가을로 두 차례 지냈다. 그리고 제사 비용은 시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약간씩 추렴하여 지냈다.

 

 

노량진2동 대방(大方)장승

행정구역상으로는 노량진2동에 속하나 장승이 있는 지역이 노량진동과 상도동, 대방동이 접한 지역이라 흔히 상도동 장승배기, 또는 대방장승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팔도 장승을 총괄하는 장승의 우두머리를 대방이라 불렀는데, 바로 그 대방장승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그것이 연고가 되어 '대방리'라는 지명이 생겨나지 않았나 싶다. 현재 장승배기의 장승은 옛날에 장승이 있던 자리에다가 근래에 세운 나무장승으로 남장승은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여장승은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라는 명문이 쓰여져 있다. 과거에 이 장승도 마을의 수호신 내지 이정표로써의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흑석동 산신당

신수(神樹)가 없이 무형의 평지만 있는 형태의 동신당(洞神堂)으로, 주민들은 이곳을 산신당이라 부르며 이곳에서 동신제(洞神祭)를 지냈다. 이와 같은 평지 형태의 동신당은 원래 이 야산이 신성의 상징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어 그 산위에서 직접 동신제를 지내던 것으로 볼 수도 있고, 또 그런 산 위의 신수 밑에서 동신제를 지내던 것이 국군 묘지 담장공사를 하며 신수를 베어내서 신수가 없어진 채, 그 담장 옆 신수가 있던 옆에서 그대로 동신제를 지냈던 것으로 볼 수 있는 두 가지의 경우를 생각할 수 있는데, 전자보다는 후자의 경우일 것으로 생각된다. 전국적인 동신당의 형태를 보면 신수가 기본적으로 있고 산 위에 있는 산신당의 경우도 대체로 신수가 있기 때문이다.

 

 

흑석동 산신제(山神祭)

일제 때만 해도 한강 남쪽 강안(江岸)에서 과천 가도에는 백여 호()의 농가가 있었는데 강기슭의 가파른 언덕 위에 크고 작은 두 그루의 상수리나무, 곧 신수(神樹)가 있었다. 오른쪽의 큰 것은 남신수, 왼쪽의 작은 것은 여신수이다. 그것은 모두 산정에 있는 흑색의 큰 암반을 뚫고 나와 있어서 신수의 강력한 위력을 느끼게 해주고 있어 주민들은 이 암반을 '신암(神巖)'이라 불렀다. 흑석동 산신제는 드물게도 대낮에 행해지는데 매우 정숙하게 지낸다. 당시 동제는 유례식(儒禮式)인 헌작(獻爵고축(告祝소지(燒地) 순과 무속식(巫俗式)인 무무(巫舞무악(巫樂무가(巫歌)의 두 흐름을 볼 수 있으나 공통점은 신의 가호와 축복을 기원하는 데 목적을 둔 점이다. 특히, 유례형의 동제에서는 제의를 마친 뒤 음복연(飮福宴)이 있는데 동민은 한가족이 되어 신이 흠향한 음식이라 하여 일대 향연을 베풀며, 무속형 도당제(都堂祭)에서도 주연을 베풀면서 가무로 산신의 신덕(神德)을 기리는 축제가 이루어졌다. 마을마다 농악과 무악은 억압된 당시 동작구 주민들에게 유일한 즐거움이었으나 일제는 3·1운동과 6·10만세 운동 뒤 군중집회를 두려워한 나머지 단순 전승으로 면면히 이어온 이 동제마저 금지시켜 1936년경에는 서울의 대부분 마을이 중단된 상태에 이르렀다.

 

 

 

 

 

 

도심 속 생태 감성을 체험한다

해발 197m의 서달산은 주능선이 현충원 외곽 담장으로 둘러있어 산 북쪽 기슭 전체가 현충원이다. 서울 올레길이라 부르는 생태육교부터 상도 SH아파트까지 1.2의 생태 탐방로도 조성됐다.

 

 

 

 

올레길은 중앙대 후문서달산 자연관찰로서달산 생태육교달마사서달산 정산(동작대)현충원 상도 출입문현충원 사당출입문이수교동작역한강반포지구 코스다.

 

서달산 등산로 일대에는 측백나무·잣나무 등 10여종 7587그루의 나무가 있는 동작동 피톤치드 숲이 있다. 20085월 조성된 이 숲을 거닐면 나무가 발산하는 피톤치드로 심신 안정과 인체 면역력을 높일 수 있다. 동작구는 숲 체험과 생태 교육 프로그램으로 이용객들의 생태적 감수성을 끌어 올리고 건강 증진에 도움을 주고 있다. 서울시생태정보시스템 홈페이지(ecoinfo.seoul.go.kr)와 동작구 공원녹지과(02-820-9852)를 통해 신청할 수 있다.

 

총 면적이 420,550에 이르는 신대방2동의 보라매공원은 1985년까지 공군사관학교가 있던 자리다. 학교가 이전하고 공원을 조성하면서 공군의 상징 보라매를 이름에 넣었다. 1962년 생도들이 세운 성무대탑, 정상에 보라매가 정상에 앉아 있는 보라매탑이 있다.

 

잔디광장·연못·철쭉동산·그늘시렁·무궁화동산 등 자연을 즐길 수 있는 조경이 많다. 조깅 트랙·테니스장·X-game·인공 암벽 등반장·게이트볼·농구장·지압보도 등 체육 시설과 어린이 놀이터·피크닉장·바닥분수·에어파크 등 가족들과 즐길 수 있는 시설도 마련됐다.

 

 

우리나라 호국 영령들이 잠든 성역

국립서울현충원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순국한 호국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성역(聖域)이다. ‘국군묘지가 서울 장충단공원 내 장충사에 있었으나 한국전쟁 후 현재 동작동으로 자리 잡았다. 초창기 군인과 군무원만을 안장했으나 1965년 국립묘지로 승격, 수용 범위·규모가 커졌다.

 

현충원 묘역(墓域)은 국방부장관 소속으로 국립묘지관리소가 설치돼 국가원수·애국지사·국가유공자·군인·군무원·경찰관·일반묘역·외국인 등으로 구분돼 관리하고 있다. 특히 이곳은 목마른 코끼리가 물을 마시는 듯한 갈형상’(渴形象)이라 하여 풍수상 명당으로 꼽히고 있다. 4호선 동작역 2,4번 출구 9호선 동작(국립서울현충원)8번 출구 도보 2

 

 

수산물 경매에서 느끼는 새벽의 활기

노량진동의 수산물 전문 도매시장에서는 서울 거래 수산물의 43.9%가 취급되고 있다. 횟감용 활어 전문 시장으로도 알려져 있다. 새벽 경매 모습은 서울을 찾은 관광객들에게는 볼거리도 된다. 소매 점포에서는 시중보다 20~30%정도 저렴한 값으로 수산물을 구입할 수 있다.

구의 북쪽은 국립묘지 뒷산인 덕박굴산과 장승백이 고개가 연결되었으며, 한강변에는 침식애(浸蝕崖)가 발달했고, 여의도와의 사이에 샛강이 흐른다. 한강의 남쪽 나루 중 교통량이 가장 많았던 노량진(鷺梁津노들나루)의 영향으로 한강 이남지역에서 가장 먼저 시가지가 조성되었다. 과거 이 지역은 노량진을 중심으로 일찍부터 계선장(繫船場선구상(船具商주막과 같은 상업시설이 들어섰다. 또한 도자기를 만드는 흙의 질이 좋아 예로부터 오지그릇과 질그릇을 구워내던 독막과 기와공장이 입지했다. 도시화의 물결에 따라 동작동 국립묘지와 그 주변의 공원지대 및 노량진동의 사육신묘(死六臣墓)를 제외한 모든 지역이 일찍부터 시가지화되었고, 평지나 고지대를 막론하고 주거지역이 형성되었다.

 

 

1968년 용산구 이촌동과 중구 양동(남대문로 5가동 일대)의 재개발사업으로 철거민이 이주해 형성한 사당동 일대의 불량주택은 재개발되어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그밖에 국정교과서주식회사를 비롯한 인쇄공장이 있다. 노량진동에 위치한 노량진수산시장은 수도권지역의 생선공급을 위한 판매·저장·가공 시설을 갖추고 있다(1995). 또한 지하철 2호선과 4호선이 지나고 올림픽 대로, 동작대로, 사당로, 대방로, 현충로, 상도동길 등의 도로가 연계되어 있다.

 

 

 

1900년 한강철교

1917년 한강인도교

1981년 한강인도교(지금의 한강대교)와 상도 터널

1984년 동작대교의 건설

사육신 추모제향

장승배기 장승제

달마사

사자암

호국지장사 

 

 

 

 

 

 

서울 동작구에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 받친 호국영령을 모신 현충원과 사육신묘, 마을의 수호신인 장승이 서 있는 장승배기, 양녕대군이 올라가서 국사를 걱정했다는 국사봉 등 문화유산도 많다.

    

 

 

 

 

용양봉저정, 사육신묘, 지덕사부묘소, 창빈안씨(昌嬪安氏)의 묘소와 신도비, 백제요지 등이 있다. 특히 동작동에는 민족의 성역으로 16만 위의 순국영령이 고이 잠들어 있는 국립현충원이 있으며, 이승만·박정희 대통령 묘역도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화장사(華藏寺사자암(獅子庵) 등의 사찰이 있으며, 원불교 서울회관, 조정특수훈련장 등이 있다.

 

 

 

동작충효길

현충근린공원, 사육신공원, 노량진 수산시장, 보라매공원, 국사봉, 까치산 등 동작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명소와 자역을 연결하여 충과 효의 정신을 배우고 산과 강을 지나며 도심을 걷은 웰빙산책코스로 총7개 코스 (고구동산길 현충원길 한강나들길 노량진길 보라매길 동작마루길 까치산길), 26km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노량진동에 사육신묘(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

상도동에 지덕사부묘소(至德祠附墓所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1)

동작동 국립묘지 내 중종 후궁인 창빈 안씨(昌嬪安氏)의 묘소와 신도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4)

신대방동의 보라매공원

용양봉저정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

사육신묘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

양녕대군이제묘역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1

창빈안씨묘역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4

동래정씨임당공파묘역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1

수죽정공신도비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2

제곡정공신도비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3

효간공이정영묘역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4

조석견과완성군이귀정묘역 -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7

부안군이석수묘역 -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29

대방동 서울공업고등학교 본관 - 등록문화재 제13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

국보 제231호 청도기 용범

보물 제569호 안중근의사 유목

보물 제883호 놋쇠지구의

보물 제561호 금영 측우기

보물 제842호 대구선화당측우대

보물 제843호 관상감측우대

서울시지정 유형문화재 제6호 용양봉저정

8호 사육신묘

11호 양녕대군 이제묘역

54호 창빈안씨묘역

61호 동래정시 임당공파묘역

94호 효간공 이정영묘역

75호 호국지장사철불좌상

113호 호국지장사 괘불

113호 호국지장사 괘불

114호 호국지장사 아미타회상도

115호 호국지장사 극락구품도

116호 호국지장사 감로왕도

117호 호국지장사지장십왕도

118(대웅전)신중도

119(대웅전)현왕도

120(대웅전)팔상도

200호 사자암 지장시왕도

287호 사자암 신중도

288호 사자암영산회쾌불도

289호 사자암 현왕도

서울시지정 유형문화재 제3호 호국지장사후불탱화

4(능인보전) 신중도

5(능인보전) 칠성도

6(능인보전) 독성도

7(능인보전) 산신도

29호 부안군 이석수묘역

 

 

 

 

 

 

 

 

 

 

 

 

 

알려줘, 럭키야! 구석구석 신기한 동작여행 책 사진

알려줘, 럭키야! 구석구석 신기한 동작여행

어린이는 우리의 미래이고 꿈이자 희망입니다. 어린이들의 밝은 미래 속에 우리구의 힘찬 미래가
있고, 나아가 세계를 선도하는 우리나라의 희망찬 청사진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라나는 우리 어린이들에게 자기가 살고 있는 고장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을 심어주는
것이 반드시 밑바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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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의 고장 동작이야기 책 사진

동작이야기

서울의 중심을 흐르는 한강 남쪽에 위치한 우리 동작구는 구릉지대로 서초구, 영등포구, 관악구,
용산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작구의 명칭은 조선시대‘동재기나루(銅雀津)’에서 유래되었다.
우리 구는 일찍이 서울의 관문인‘노들나루(鷺雀津)’를 중심으로 우리나라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으며, 지금도 현충로, 노량진로, 동작대로, 올림픽대로 등의 주요 도로와 한강철교,
한강대교, 동작대교, 노량대교 등 서울의 동서남북을 잇는 주요 다리를 통한 교통요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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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구 관광가이드북

동작구 관광가이드북

동작구는 일찍이 서울의 관문인 ‘노들나루’를 중심으로 우리나라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으며, 중앙대학교, 숭실대학교, 총신대학교 등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3개의 대학과 함께 100여개의 학원가가 밀집해 있는 교육의 요람으로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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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구 그림지도 지도

동작구 그림지도 지도

충과 효의 고장이며 역사와 문화유적이 풍부한 참좋은 사람중심의 명품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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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구 학원가 지도

동작구 학원가 지도

충과 효의 고장이며 역사와 문화유적이 풍부한 참좋은 사람중심의 명품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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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구 화보

동작구 화보

세월의 흐름은 목적지가 없다고 하지만, 분명 동작구의 변천사를 들여다보면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의 목적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행복이다. 동작구는 1980년 개청된 이래, 구민의 행복한 삶을 목표로 지금까지 이어왔다. 이제 대한민국 행복지수 1위의 동작구를 향해 지금까지 노력해온 것처럼 앞으로 전진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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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동작여행(어린이 동작백과)

즐거운 동작여행(어린이 동작백과)

즐거운 동작여행은 동작의 역사, 자연환경, 전통을 간직한 문화유산, 어린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등을 분야별로 정리하여 어린이 여러분들이 우리 고장을 쉽게 이해하도록 제작되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 고장을 더욱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며 동작세상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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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이야기

동작이야기

동작이야기 개정판은 우리구의 역사, 동의 유래, 문화유산, 지역명소, 구정현황 등을 전 연령층이 손쉽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도록 풍부한 볼거리와 읽을거리를 수록하였으며 시대변화에 발맞추어 발전하는 동작구의 모습을 보여드리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동작이야기를 통해 역사와 전통, 행복과 희망이 가득한 동작구를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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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좋은 사람중심의 명품동작

참좋은 사람중심의 명품동작

참좋은 사람중심의 명품동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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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직원체험기 {동행(동작구 행복만들기)}

국내외 직원체험기 {동행(동작구 행복만들기)}

동작구 직원이 국내 및 국외의 다양한 현장을 체험하여 견문을 넓히고
변화하는 글로벌 행정의 마인드를 배양함으로써 지역발전과 주민편익을 도모하고자
국내외 연수를 실시하고, 미참여 직원 및 주민들은 직원체험기를 통하여 선진제도와
우수시설에 대한 학습 경험자료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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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동 6개 기준, 행정동 기준은 15

노량진(鷺梁津상도(上道(흑석(黑石동작(銅雀사당(舍堂대방(大方신대방(新大方)

   

 

 

 

 

 

노량진동(鷺梁津洞)

노량진이란 이름은백로가 노닐던 나루터라는 뜻으로, 조선시대에 지금의 용산에서 수원 방면으로 가려면 노들나루를 이용하였는데 이곳에 도성을 지키기 위하여 노량진이 설치되어 마을 이름을 노량진이라 부르게 되었다.

독막 (점말)

노량진245~46번지 일대, 지금의 동작구청 자리의 마을이름으로 일명 동이점이라고도 하였다. 옛날 옹기를 굽던 가마가 2군데 있어 떡시루.독 등을 제작하여 노들나루를 이용해서 시내로 반입되었고, 지금의 강남 일대 주민들과 과천사람들이 많이 이용하였다고 한다. 1950년대 말까지 있었으나 그 후 대림산업중장비 정비공장이 들어섰다가 지금의 동작구청이 지어졌다.

 

송학대

현재 삼거리시장 못미쳐 장승배기 좌우편, 노량진2311~315번지 일대의 마을 이름으로 수백년 묵은 소나무가 많았으며 이 소나무에 학이 서식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몇 그루의 소나무가 남아 있으며, 일제 때는 일본인 고관들이 이 지역의 경관에 반해 많이 살았으며 한국인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였다고 한다.

 

빨랫골

현재 노량진시장 일대로, 예전에는 관악산 줄기에서 흘러내려 오는 맑은 물을 이용해서 아낙네들이 빨래를 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꽃말

노량진150~54번지 일대로, 일제 때 일본인 후까이가 이 곳에 꽃밭을 만들어 서울시내 꽃도매상들에게 판매하였다고 한다. 특히, 이 꽃밭에서는 꽃가지를 잘라 파는 것이 아니라 뿌리채로 판다는 것이 특징이었다고 한다.

 

벽돌막

노량진1481번지 노량진초등학교 자리에 일제 때 일본인이 지은 붉은 벽돌공장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이 곳에서 만든 벽돌로 지금의 서울특별시청사와 조선총독부를 지었다고 한다.

 

솔모텡이

노량진2301.302번지 일대의 마을이름으로, 옛날 소나무가 울창하여 사람들의 출입이 곤란할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곳모퉁이에 위치했다 하여 붙여진 것이다.

 

아차고개

사육신묘 입구에 있던 고개로 조선 세조 때 영등포 이남에 살던 어떤 선비가 육신의 처형이 부당함을 간()하기 위하여 도성을 향해 말을 달려오다가 이 고개에 이르렀을 때 육신이 이미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차! 늦었구나하고 한탄하던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또 다른 유래는 조선 명종 때 이름난 복술가인 홍계관의 잘못된 죽음과 관련하여 왕이아차하고 매우 슬퍼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조선 명종 때 이름난 점술가인 홍계관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자기의 명을 점쳐보니, 모년 모월 모일에 횡사하는 점괘가 나왔다. 살아날 길을 찾아보니 딱 한 방법으로 용상(龍床) 아래 숨어 있으면 횡사를 면한다고 하는지라, 홍계관은 왕에게 아뢰어 승낙을 받고, 날짜에 맞춰 용상 아래 숨어있었다. 그때 때마침 쥐 한 마리가 마당을 질러가고 있어 이를 본 왕이 홍계관에게 지금 마당에 쥐가 지나가는데 몇 마리인지 점을 쳐 보아라.’하고 명하였다. 그가 곧 점을 쳐보고 말하기를 세 마리라 하였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노하여 형관을 시켜 홍계관의 목을 베라고 하였다. 형장에 당도하여 다시 점을 쳐보니 만일 한 식경만 기다리면 살 길이 있겠다.’하는 점괘가 나왔다. 홍계관이 형관에게 조금만 형집행을 늦추어 달라고 간청하므로 형관이 허락하여 잠시 기다리고 있었다. 홍계관을 형장으로 보낸 후 왕은 측근을 시켜 그 쥐를 잡아 배를 갈라 보니 뱃속에 새끼 두 마리가 있었다. 홍계관의 신묘한 점에 놀란 왕은 곧바로 신하를 형장으로 보내어 홍계관의 참형을 중지하라고 하였다. 이에 신하가 급히 달려가 보니 막 형을 집행하는 순간이었다. 크게 소리질러 중지하라고 하였으나 형관의 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할 수 없이 손을 흔들어 중지하라고 하였지만 형관은 사형집행을 빨리하라는 줄로 알고 홍계관을 참()하고 말았다. 신하가 되돌아와 왕에게 자초지종을 말하니 왕은 아차하고 매우 슬퍼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 형장이 있던 이 고개를 아차고개라 불렀다는 것이다.

 

장승배기

동작구 상도2동 영도시장 맞은편 삼거리의 노량진파출소와 우리은행 상도지점 앞을 장승배기라고 부른다.행정구역상 현재 장승이 서있는 위치는 노량진2동에 속한다. 이곳은 노량진동과 상도동.대방동이 접한 지역으로 조선시대에는 노량진 선창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서울 시민들 중에는 상도동의 위치는 잘 몰라도 장승배기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 명칭이 널리 알려졌다. 그것은 아마도 그 유명한 대방 장승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지금은 사라져가는 민속신앙 중의 하나이지만 예전에는 동네어귀나 사찰 입구에서 어김없이 찾아볼 수 있었던 것이 장승이다. 장승은 경계의 표시이기도 했지만 이()수를 적어 10리나 15리마다 세워둠으로써 이정표 역할을 했으며, 특히 악귀를 막는 수호신이기도 했다. 흔히 장승이 서 있는 곳을 장승배기라 하는데 우리나라 각지에 이런 이름이 남아있다. 장승배기에서는 마을의 공동문제나 기타여러 가지 일을 의논했다. 그러던 것이 마을이름으로 되어 전해온 것으로 이곳에 장승을 세우게 된 내력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조선 중기 사도세자가 부왕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비통하게 죽은 뒤 그의 아들 정조가 1776년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 사도세자를 한시도 잊지 못했다. 그래서 정조는 화산(지금의 수원)에 있는 아버지의 묘소, 곧 현륭원에 참배 다니는 것을 잊지 않았다.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추우나 더우나 찾아가 아버지 무덤 앞에 무릎 꿇고 그 애통한 한을 달래며 명복을 빌었다. 지금은 현대식 건물과 주택들이 들어서 있지만 당시 장승배기 일대는 낮에도 맹수가 나타날 것만 같은 울창한 나무숲이었다.현륭원으로 가는 정조의 어가는 이곳에서 한번쯤 쉬어가야 했으나 아름드리 나무숲이 우거진 이 지점에서 쉬기란 적적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비라도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면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인가가 없고 통행인마저 시오리 가야 한두 사람 만날까 말까 할 정도로 한적한 곳이었다. 이에 정조는이곳에 장승을 만들어 세워라. 하나는 장사 모양을 한 남상 장승을 세워 천하대장군이라 이름을 붙이고 또 하나는 여상을 한 지하여장군으로 하여라.”하고 명하였다. 어명으로 장승배기에는 곧 두 개의 높다란 장승이 세워지게 되었다. 이는 왕이 안심하고 행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그래서 이때부터 이곳은 장승배기라는 지명이 붙게 되었고 정조는 아버지의 묘소를 참배하러 가는 길 오는 길에 이 장승 앞에서 어가를 멈추고 쉬었다는 것이다.한편 장승을 소재로 한 판소리와 서도창에 보면 이곳 장승의 이름이 팔도장승의 최고 우두머리인 대방장승이었고 또 이와 관련된 내용이 나타나 있다. ‘가루지기전은 변강쇠가 엄동설한에 땔 것이 없어 나무를 하러 첩첩산중에 갔는데, 눈 속에 땔나무할 것이 없어 길가에 세워 놓은 장승을 패가지고 오는 것을 풍자적으로 엮은 것으로, 변강쇠한테 도끼로 찍혀 부서진 장승이 자기 신세를 한탄하는 것이 멋스럽다.이제 장승의 신앙적 의미는 미약해졌으나 한국을 상징하는 대표적 풍물로 부활되어 명맥을 잇고 있다.

 

노량진 수산시장

노량진동에 소재한 수산물 전문도매시장으로 서울 및 수도권 수산물을 원활히 공급하고, 수산물의 적정한 가격을 형성, 생산자와 소비자를 동시에 보호하여 수산물 유통 개선의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이 시장은 농수산물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령에 의한 중앙도매시장으로서 1927년 경성부 수산물도매시장 대행기관으로 경성수산물주식회사가 발족되어 현재의 서울서부역 북쪽인 서대문구 의주로에 위치하게 되었다. 설립 당시에는 화물의 운반수단이 주로 철도에 의존하였고, 의주로 일대가 역에 가까워 좋은 입지조건이 되었다.광복 후 1947년에는 서울수산시장주식회사로 재발족하여 서울특별시 수산물도매시장 대행기관의 역할을 하였다.그러나 화물운반수단이 철도에서 자동차로 바뀌었고 일대가 도시화 되어감에 따라 이 곳의 시장을 폐쇄하고 19714월에 노량진동으로 이전하여 도소매시장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고 정부의 공기업 민영화 방침에 따라 20022월 어업인단체인 수협중앙회에서 인수 노량진수산주식회사에 임대하고 있다.

 

노량진시장은 총대지 66,635, 연건평 68,357로 경매장, 판매장, 활어보관장, 중도매인사무실, 관리사무실, 출하주휴게실, 간이냉장고, 주차장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냉동, 냉장, 제빙, 저장실도 있다.200412월 현재 지정도매법인 1개회사에 임직원 99, 중도매인 176, 매매참가인 5, 판매자리 845개소, 하역원 300명이 종사하고 있으며 2005년도 연간거래물량은 98,102톤이고 금액으로는 3,102억원에 달한다. 주 반입처는 동..남해안 전역과 원양 및 수입수산물이며, 계절적으로는 3~5월과 9~12월이 최고의 출하시기이고, 7.8월이 최저출하시기이다.서울에서 거래되는 전체 수산물 중에서 43.9%의 물량이 이곳에서 거래된다. 싱싱하고 다양한 수산물이 거래되어 일본을 비롯한 외국관광객이 자주 찾는 서울의 관광명소이기도 하다. 국민소득의 상승으로 횟감용 활어의 소비가 늘어 활어전문시장으로 알려져 있으며 새벽 경매모습은 서울시민에게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새벽에 경매에 부쳐진 수산물 중 50%는 경매 직후 백화점, 대형유통업체 등으로 팔려나가고, 소매점포에서는 시중보다20~30% 싸게 팔려나간다.

 

노량진역

1897322일에 우리나라 철도의 역사가 시작되는 경인선철도가 착공되었다. 일본인들이 철도부설 문제로 왕래가 잦던 끝에 우리 정부가 철도 부설권을 모어스에게 특허하였으나 일제의 집요한 매수공작에 의해 모어스는 일본에게 철도부설권을 양도했고, 일제가1899423일 공사를 재개함으로써 그 해 918일 철도가 개통 되었다. 지금 노량진역에는 시인 서정주가 지은 시와 1975717일 당시 국무총리인 김종필이 휘호한 철도시발지 비석이 세워져 있다.

 

 

상도동 (上道洞)

상도동의 동명은 이곳에 상여꾼이 집단으로 거주하여 상투굴이라고 칭하던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성도화리(成道化里)로 불리다가 상도리. 상도정이란 이름을 거쳐 1955<서울특별시동설치조례>에 의하여 상도동으로 개칭되었다.

 

살피재

상도1동 숭실대학교 아래 교차로에서 봉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옛날 이곳은 수목이 울창하여 도둑이 많이 출몰하였던 터라 이 재를 넘기 전에 사람들이 살펴서 가라고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성대굴

상도3동 성대시장 입구에서 국사봉 골짜기까지의 마을 이름으로, 옛날 이곳에 신씨(申氏) 성을 가진 부자가 살았는데 그가 죽어 묘자리를 구하여 땅을 파헤쳐 보니 복숭아꽃이 한아름 나왔다고 한다. 그때부터 성도화리(成桃花里)라고 부르다가 차츰 성도아리, 성도리, 성대리로 변천되었다고 한다.

 

능고개

상도4동 국사봉중학교에서 봉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이다. 이 지역에 얽힌 이야기를 보면, 지금의 지덕사가 처음에 중구 도동에 세워져 문중도 같이 살고 있었으나 워낙 살림이 빈궁하여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였다. 근근히 지내던 어느 추운겨울날, 한 노승이 이 집 앞을 지나다가 밤이 깊어 하룻밤 묵고 가기를 청하는지라 불러들여 불을 지피고 밥 대신 죽을 끓여 집주인은 먹지 않고 중에게만 주었다.이튿날 이 사실을 안 노승은 너무 고마워서 은혜에 보답하겠다며 그 주인을 데리고 능고개 자리에 와서장차 죽거든 이곳에 묘를 쓰라고 일러 주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에 그 주인이 죽자 중이 가르쳐준 고개에다 묘를 썼더니 그때부터 자손이 번창하고 가세가 일어났다고 하여 능고개라 한다.

 

만양고개

상도2동 대림아파트 옆에서 노량진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옛날이 고개가 워낙 길어 마냥 넘어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능 꿀

옛날 효령대군의 자제 서원군의 능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상도1413, 416번지 상도성결교회 부근 일대를 일컫는데 지금은 능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나무시장

지금의 미륵암과 숭실대학교 부근에 있던 땔감시장인데, 가난한 사람들이 나무를 해다가 새벽 일찍 이 곳에서 팔고 다시 나무를 하러 갔다 한다. 주로 장작, 솔가리 등이 매매되었으며 이 곳의 부자들과 일본인들이 사갔다고 한다.

 

한증막

상도1288번지에 한증목욕탕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은 한증막이 없으나 버스정류장은 아직도 한증막이라 부르고 있다.

 

꽃밭재

상도2동 동사무소 앞 동작교육청과 영도시장 사이를 말하는 것으로 옛날 이곳에는 여러 가지 꽃들을 많이 재배하여 팔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일명 화전촌(花田村)이라 하였다.

 

주막거리

상도3동 우체국이 있는 지역으로 옛날 수원. 안양쪽 사람들이 한양에 가려면 이 곳을 지나야 했고 이 지점에 도착하면 날이 저물어 하룻밤을 묵어갔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주막이 많이 생기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강적골

상도4210.220.223번지 일대와 양녕대군 묘소가 있는 일대로서, 양녕대군의 묘소가 생기고부터 그의 시호 강정공(剛靖公)의 영향으로 강정골로 불려지다가 강적곡(康迪谷)으로 변한 것이라 한다.

 

마치고개

지금의 상도227~29번지 일대로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 칼과 정을 만드는 대장간이 많이 들어서면서 밤낮 망치소리가 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빈수골 (빙수골)

성대시장 뒤쪽 사자암이 위치한 아래 지역을 가리킨다. 이 곳에는 항상 찬물이 나는 우물이 있었다고 하여 빙수골로 불려지던 이름이 빈수골로 바뀌었다고 한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숭실대학교 부설 한국기독교박물관은 원래 장로교 목사이며 고고학자인 고() 김양선(金良善) 교수가 미군정청으로부터 설립 허가를 받아 1948420일 서울 남산에 있는 옛 조선신궁(朝鮮神宮)터에 '기독교박물관''매산고고관'을 개관. 운영한 것인데, 19506.25전쟁 발발로 인하여 많은 자료가 분실되고 휴관 상태에 놓여 있다가 1953년 휴전과 동시에 다시 개관되었다.그 후 박물관 자리가 국회의사당 부지로 결정되어 1958228일 폐관하였다가, 19677월 소장 자료 3,600여점을 모교인 숭실대학교에 기증함으로써 19671010일 부설 한국기독교박물관으로 새로이 출범하게 되었다. 20037월에 현대적 전시시설을 갖추고 과학적인 수장공간을 구비한 새 박물관으로 이전하였다.한국기독교박물관에는 국보 제141호 청동 잔무늬거울[多細文鏡], 국보 제231호 석제 청동기거푸집[靑銅器鎔范], 보물 제569호 안중근의사유묵(安重根義士遺墨), 보물 제883호 청동제 지구의(地球儀) 등 선사시대로부터 역사시대까지의 각종 귀중한 문화재를 비롯하여 기독교 사료와 유물, 그리고 고대 중국과 일본 및 로마시대 유물을 포함한 7,000여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한국기독교박물관은 한국기독교와 한국민족문화의 보고(寶庫), 대학교육의 보조역할 수행과 함께 사회교육기관으로서 지역 주민과 각급 학교의 현장학습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본 동(本洞)

본 동(本洞)은 조선시대부터 오랫동안 불리어졌던 자연부락명칭으로 노량진(.梁津)의 원마을이라는 뜻이다. 1914년 일제가 경기도 과천군 하북면의 본동.상가차산리(上加次山里).하가차산리(下加次山里) 3개 마을을 통합하여 본동리라고 제정하면서 본동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가칠목 (架七木)

옛날 상가차산리 마을은 현재 국민은행 노량진지점(본동207-2) 근처의 마을이며, 하가차산리 마을은 본동 12, 24, 25,26, 30, 31통의 일대로 일명 가칠목이라 한다.가칠목은 본동에서 가장 오래된 한강 기슭의 마을로 옛날에는 한강물이 불어나면 길이 막힌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또 옛날 전염병자(호열자, 염병)와 기타 돌림병자들을 이곳 에다 격리시켰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서낭당이 고개

매봉재 서쪽에 있는 고개로, 과거에 마을 주민들이 마을의 평안과 번영을 비는 대동치성을 제사지내던 서낭당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원래 본동에는 이곳 외에도 2개의서낭당이 더 있었으니 하나는 민절서원 뒷편, 또 하나는 사육신묘 뒤쪽에 있었다.

 

봉산유원지

본동에서 상도동으로 넘어가는 매봉재 아래 있던 봉산유원지는 일제 때 조성된 것으로 벚나무를 많이 심어 철도국 직원과 기타 각 기관 직원들이 많이 와서 놀았다고 한다. 이 유원지에서는 남사당패들이 와서 산대놀이(탈춤), 박첨지놀이(인형극), 줄타기 등도 공연하였다 한다.

 

 

흑석동 (黑石洞)

흑석동이라는 동명은 흑석 제1동사무소 남쪽 일대에서 나오는 돌의 빛이 검은색을 띠므로 검은돌(黑石)’ 마을이라 한데서 유래한다.

 

범바위

흑석2동 시민아파트가 있었던 아래쪽 한강변에 있었던 바위이다. 옛날 이곳에는 많은 낚시꾼들이 모여들어 고기잡이를 하였다한다. 어느 날 한 낚시꾼이 커다란 잉어 한 마리를 낚자 갑자기 눈보라와 모래가 휘날려 눈앞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히 여긴 나머지 뒤를 돌아다보니 커다란 호랑이가 나타나 어슬렁거리며 앞발을 내미는 것이었다. 낚시꾼이 질겁을 하고 도망을 치자 호랑이도 그 뒤를 쫓아왔다. 낚시꾼이 더 이상 도망을 가지 못하고 마침 그곳에 구멍이 뚫린 큰 바위 속으로 들어갔더니 호랑이가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두리번거리고만 있었다. 그러자 그는 그 바위 속에 갇혀서 나오지도 못하고 결국 죽었다 한다. 이 호랑이가 앞발 짓을 한 것은 잉어를 달라는 뜻이었는데 낚시꾼은 자기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줄 알고 결국 죽음을 당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명수대

서달산 꼭대기에 있었던 건축물로, 1920년 일본인 부호 목하영(木下榮)이란 사람이 이곳에 별장을 짓고 놀이터를 만든 다음, 맑은 한강물이 유유히 흐르는 경치 좋은 곳이라 하여 명수대란 이름을 붙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광복 후 이 건물은 철거되었다.

 

서달산

명수대가 있었던 달마사가 있는 뒷산으로 돌이 많은 서덜산이었다가 서달산으로 바뀌어 부르게 되었다.

 

할떡거리

동양중학교 왼쪽에 있는 산으로 옛날 이곳 주민들이 이 산을 오르려면 숨이 가빠 헐떡거렸다 하여 그 이름이 붙여졌다. 이 산마루에서는 동네 사람들이 연날리기를 많이 하였다고 한다.

 

재강굴산

붉은 산이란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중앙대학교 뒷산을 일컬었다.

 

비개마을

흑석226.28.33.38번지 일대로 한강변 기슭에 비스듬히 비껴있다고 해서 붙여진 것으로 현재 버스정류장 이름으로도 붙여져 있다.

 

검은돌시장

흑석29.43번지 일대에 있던 이 시장은 주로 채소류, 과일류 등 각종 농산물이 거래되었다. 광복 직후 이 시장은 길거리에서 안쪽으로 밀려 지금의 흑석3동 소재 흑석시장 자리에 정착하게 된 것으로, 당초 서초동, 양재동, 과천지방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였다 한다.

 

연못시장

흑석동 101.102.182번지에 있던 연못인데 일제 때 일본인목하영이 5,000평 정도의 연못을 파고 가운데에 나무를 심어 섬을 만들어 놓은 까닭에 동리 사람들의 휴식처와 낚시터로도 이용되었다고 한다. 광복 후에 이곳을 메우고 시장이 생기자 연못자리에 있는 시장이라 하여 연못시장이라고 불리어지게 되었다.

 

 

동작동 (銅雀洞)

동작동이란 이름은 조선시대에 이곳이 용산에서 수원으로 통하는 도진(渡津)의 하나였던 동작진(銅雀津)동재기나루터라 부른 데서 유래되었다.

 

동재기

흑석동에서 현재 국립 서울현충원으로 넘어오는 강변 일대에 구리빛 색깔을 띤 돌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던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나루터는 조선시대 과천.수원.평택을 거쳐 영.호남으로 내려가거나 서울로 들어오던 사람들이 배를 타고 건넜던 교통의 요지이다.

 

정금마을

현재 경문고등학교 옆에 있는 이 마을은 옛날 정()씨 성을 가진 감사(監司)가 살던 마을이라 하여 정감몰또는 정가우라고 부르기도 하였다고 하는데, 일설에는 조선후기 이곳에 포방터(사격장)가 있어 여기서 훈련을 마친 뒤 나루를 건너기 전에 인원과 장비를 점검하였다고 하여 점검마을이라 한 것이 정금마을로 와전되었다고 한다. 또 서울에서 나루를 건너 호남으로 여행하던 여행객들이 잠시 쉬어가는 주막이 위치한 산모퉁이 동네라 하여 정거머리동네라고도 불리어졌다고 하는데, 현재 동작동 56.59.61.64번지 일대이다.

 

배나무골

동작동 41.42.66.71번지 일대의 이 마을에는 광복 전까지 만 해도 아름드리 배나무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며, 또 마을 근처에 이수교라는 다리가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갯마을

동작동 80~106번지 일대의 마을로 포촌(浦村)’이라 불렀는데 이 일대가 갯벌인 데서 연유한 지명이다.

 

농배 (능배)

현 동작터널과 국립묘지 군악대가 있는 지역에 있던 마을로 약 15가구가 나루터에서 고기잡이와 잡역으로 생활을 꾸려나갔다고 한다.

 

국립서울현충원

동작구 동작동에 위치한 국립서울현충원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순국한 호국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민족의 성역이다.이 곳은 관악산 기슭의 공작봉(孔雀峰)을 주봉(主峰)으로 하여 정기어린 능선이 병풍치듯 3면을 감싸고 앞으로는 한강수가 굽이쳐 도는 풍수상 명당으로 손꼽히는 43만여평의 포근한 땅이다.국군창설 이래 전사자들을 서울 장충단공원 내에 있는 장충사에서 모셔왔는데, 6.25전쟁이 발발하여 전사자 수가 증가하자 군묘지 설치 문제가 논의되어 1955715일 현재 위치하고 있는 동작동에 군묘지 업무를 관장할 '국군묘지관리소'를 창설하였다. 1956413일 군묘지령이 제정되어 전국 곳곳에 이름없는 넋으로 산재하고 있는 국군장병들의 묘지를 안장하였다.초기 국군묘지에는 군인과 군무원만을 안장하였으나, 1965330'국립묘지'로 승격되어, 애국지사, 경찰관 및 향토예비군까지 대상을 확대하여 안장함으로써 겨레의 성역으로서 국립묘지의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199661일에는 '국립묘지관리소'의 관리기관 명칭이 '국립현충원'으로 개명되었고, 20061월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명칭이 변경 되었다.2006831일 현재 국립서울현충원에는 국가원수 2, 임정요인 18, 애국지사 211, 국가유공자 62, 장군 355, 장교. 사병 51,044, 경찰 813, 군무원 1,952위의 묘소와 103,809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사당동 (舍堂洞)

사당동은 큰 사당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으로, 1914년 당시 능마을. 동산마을.양짓말 등을 병합하여 사당리라고 부르다가 1963년 경기도에서 서울특별시로 편입되면서 사당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까치고개 [작현(鵲峴) , 가추개]

옛날 이곳에 수목이 우거지고 까치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사당동 281-291번지 일대이다. 현재 은행나무가 두어 그루 있다고 하여 은행나무골이라 불려지고 있다.

 

도당(都堂)

지금의 사당동 사거리 사당지하철역 일대로, 1970년대 초까지도 느티나무를 동신(洞神)으로 받들고 해마다 고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였으나, 도로가 생기면서 느티나무는 뽑히고 도당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화상(畵像)은 남현동의 관음사(觀音寺)로옮겨졌다.최근까지도 이 화상을 모시고 치제(致祭)하였으며, 경비는 각 가구마다 쌀 한말씩을 갹출하였다고 하는데 양이 조금 모자라면 쌀을 이고 오다가 넘어져 꼭 부상을 당하여 감히 양을 속일 수 없었다고 한다.

 

동산말

옛날 작은 동산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현재 사당동 1038번지 관악시장 일대이다.

 

양지마을

현재 사당3219번지 일대로 해가 잘 드는 양지바른 곳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지금도 이곳 주민들은 양지마을이라고 부른다.

 

가마니촌

6.25전쟁 이후 난민들이 가마니를 덮은 움집에서 어렵게 살던 사당2.3동 산동네 무허가 판자촌이다. 1980년 재개발사업을 시행하여 지금은 우성아파트와 삼익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원당고개

사당동 산44번지 일대에서 봉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동래정씨 문중과 전주이씨 문중이 사당 고을을 서로 자기 땅이라 하여 소송이 붙자 당시 이 고을 원님이 이 고개에 앉아서 각각 고개의 반씩을 소유토록 판결을 내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수랏간

한국전력남부지점(사당동 1041) 뒤에 있던 우물인데 옛날 임금님이 행차(정조능행)할 때 이 곳에서 수라(식사)를 들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능 내

현 사당동 239~241번지 정씨문중 묘역이 있어 붙여진 지명이다. 조선 후기 재상인 정창연, 정유길, 정광성 등의 묘비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61~63호로 지정되어 있다.

 

벌명당

사당동 동래 정씨 문중의 묘가 있는 지역으로, 옛날 나라에서 묘자리를 정하려고 지관(地官)을 시켜 지형을 살피게 하였는데 이 지역이 명당임을 알았다. 지관이 이 사실을 임금에게 고하려 할 때 당시 영의정 자리에 있던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이것을 알고 다른 곳을 찾도록 부탁하였다.이에 지관은 영의정에게 자기가 동재기나루를 다 건널 무렵에 그 곳을 파보라고 하였다. 지관이 동작진(銅雀津)을 다 건넜으리라고 생각되었을 때 땅을 파보니 커다란 벌들이 수없이 나와 지관에게 날아가 지관을 쏘려 하였다. 이를 피하기 위해 재빨리 독을 뒤집어쓰자 벌들이 독에다 침을 놓고 어찌나 침이 강하던지 독은 깨지고 벌들이 죽었다 한다. 그 뒤 영의정이 죽어 그 자리에 묘를 쓴 뒤 9대를 두고 내리 정승이 나왔다 한다.

 

삼일(3.1)공원

한국 최초의 여기자인 최은희씨가 “3.1운동 당시 여성참가자는, 직접 일병의 총칼에 대결했던 홍안의 소녀들이 이제는 귀가 멀고, 눈이 어둡고, 허리가 굽은 할머니가 되었으나 나머지 기백을 다시 모아 망각속에서 사그라져가는 그날의 분노와 저항을 되새기면서 쇠잔한 몸이지만 나머지 생애에서 무엇을 조국에 바칠 수 있을까하는 마음으로 1967415일 동아일보에독립공원을 설립해야 한다는 글을 투고하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하였다.정부는 1967515일 공원을 지정하고 1989년부터 1990년까지 공원을 조성,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방동 (大方洞)

지금부터 약 350년전 조선시대에는 높은절이와 번댕이(樊唐.)라는 두 마을로 이루어진 곳이었는데 일제 때 번대방리(番大方里)라 일컫다가 광복 후 대방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높은절이 [高寺里]

현재 노량진동과 대방동, 상도동과의 경계가 되는 대방동 1번지 높은 곳에 청련암(靑蓮庵)이란 절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고려 때 노씨정승에게 국왕이 하사한 사패지(賜牌地)라고 한다.

 

번댕이 [樊塘里]

옛부터 낙천군, 연령군의 묘를 모신 계동궁(桂洞宮) 연못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번당리라고도 한다.

 

서낭당 고개

옛날 서낭당이 있었던 고개로 성남중고등학교 후문에서 대방역 방향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용마(龍馬)우물

용마가 났다는 우물로 예로부터 물맛이 퍽 좋았다 한다. 또한 성남중고등학교 뒷산을 용마산이라 하는데 용마우물에서 용이 나와 그 곳으로 올라갔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신대방동 (新大方洞)

신대방이라는 이름은 대방동과 접한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1970<서울특별시조례> 613호에 의거 대림동에서 분동(分洞)되었다.

 

거북고개

옛날 대방초등학교 자리에 연령군신도비(延齡君神道碑)가 세워져있었는데 이 신도비의 받침돌인 귀부를 관악산에서 조각하여 운반할때 수백필의 소가 넘었던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삼육아파트가 있는 신대방 2동에서 신림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현재는 모자원고개라고 불려지고 있다.

 

모자원

신대방동 343번지 일대로 6.25전쟁 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전쟁 미망인과 자녀를 위하여 64가구의 주택을 마련하여 이곳에 살게 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일명 과부촌이라 불렀으며 현재는 모두 이전하고 남아 있지 않다.

 

쪽박골

신대방동 471~474번지에 우물이 있었는데 늘 쪽박으로 물을 떠먹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일명 세모골이라고도 불렀다.

 

비선거리

신대방동 584.586번지 일대에 옛날 이 곳에 비석이 많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우와피

소가 누워있는 지형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쇠내피라고도 했다. 옛날에는 현재의 도림천이 넓고 수심이 깊으며 물이 맑아 지금의 파출소 부근을 옥수(玉水)라 불렀다. 현재 문창초등학교 정문 앞 물속에 높이 10m나 되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이 바위에는 직경 60cm 정도의 크기로 글씨가 새겨져 있었으며, 당시 마을 사람들 사이에 이 바위가 땅속으로 완전히 묻히면 천지가 개벽한다.’라는 말이 전해왔다. 그 뒤 6.25전쟁을 전후하여 하천바닥이 높아져 점차 바위는 도림천 땅속으로 묻히기 시작했으며, 근래 전철역이 생기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쇠슬목고개

우와피 지형중 목 부분에 해당하는 지역을 말하는데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 이 고개에 있어서 신혼부부가 이 고개를 넘어가 면 귀신이 질투하여 이 마을에 천연두 및 각종 재앙이 발생하였다고 하며, 또 상여가 고개를 넘으려 하면 고개 언저리에서 발이 묶여 넘지 못했다고 한다.

 

장백의 웅덩이

현재 보라매공원 운동장 자리에 만여평 정도 되는 늪이 있어 메기.가물치.붕어 등이 서식하여 주민들은 사계절 내내 이 늪에서 고기잡이를 하였다 한다.

공군사관학교가 이 자리에 들어서면서 운동장이 되었다고 한다.

 

보라매공원

동작구 신대방동 395번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는 대규모의 공원으로 면적은 420,550에 달한다. 보라매공원은 녹지대가 167,161로 총 면적의40% 가량을 차지하고, 9,070면적의 2개의 연못,114,793의 수림대와48,800의 잔디광장, 그리고 87,726의 부지에 각종 시설물과 도로가 조성되어 있다.주요 시설로는 잔디광장, 연못, 녹지대 등의 조경시설과 맨발공원, X-Game, 수영장, 테니스장, 체육관 및 체육시설 등의 운동시설, 동물원, 보라매청소년회관, 동작구민회관 등의 교양시설, 남부노인종합복지관, 정신지체인복지관, 남부장애인복지관 등의 복지 및 교육시설과 함께 주차장, 매점, 팔각정, 벤치 등이 갖추어져 있다.원래 이곳은 1958년부터 19851210일까지 공군사관학교가 자리하고 있었던 곳으로, 이 학교가 이전하고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되면서 공군을 기념하기 위해 이름을 보라매공원이라 하였다.정문을 들어서면 정면에성무대탑이라는 공군을 상징하는 탑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데, 이 탑은 1962년 당시 사관생도들의 성금으로 세워졌다. , 후문쪽에 세워진 보라매탑은 공군을 상징하는 보라매가 정상에 앉아 그 위용을 과시하고 있고 탑 상단에는충효(忠孝)’, 그리고 그 아래에는호국비천(護國飛天)’이라 새겨져 있다.이 공원은 지역주민의 휴식공간으로서 뿐만 아니라, 청소년교양 및 정서함양을 위한 공간으로, 주민복지 및 교육시설로 이용되는 등 다양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또한 이 공원 주변에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 운영하는 보라매병원과 백화점 등 고층빌딩이 숲을 이루고 있으며, 1999년에는 기상청이 이곳으로 신축 이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