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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동교(東郊), 동대문구 東大門區

草霧 2013. 11. 28. 14:16

 

 

 

 

 

서울의 동교(東郊)

 

 

동대문구 東大門區

    

 

 

Dongdaemun-gu

 

 

 

서울특별시의 동부에 있는 구.

원래는 경성부와 경기도 고양군에 속했던 지역으로 1936년 경성부의 구역확장에 따라 동부출장소가 설치되었다.

 

'동대문'의 명칭은 조선 시대의 도읍지인 한양의 동문인 흥인지문의 별칭 '동대문'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하지만, 현재 흥인지문은 동대문구가 아닌 종로구에 속해 있다.

 

1943년 구제(區制)가 실시됨에 따라 동부출장소가 동대문구와 성동구로 나누어졌다.

 

1949년에 동대문구에서 성북구가, 1988년에는 중랑구가 분구했다. 구청 소재지는 신설동이다.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의 숭신방(崇信坊)과 인창방(仁昌坊) 및 남부의 두모방(豆毛坊) 지역

1914년 창신·숭인동 외의 지역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崇仁面)으로 편입

1936년 경성부의 확장으로 경성부에 편입

1943년 동대문구와 성동구를 구분

1949년 동대문구에서 성북구가 분구

1988년 중랑구가 분구

 

 

 

'서울의 동교(東郊)'로 불렸던 동대문구 지역

백제 건국초의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의 위치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혼재하여 아직 정설 또는 통설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이제까지 하북위례성의 위치를 모색 또는 고증한 여러 학자중의 반수이상이 삼각산 동록(東麓) 그 중에서도 특히 중랑천 일대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한 주장이 가장 강하다는 점으로 미루어 서울의 동교(東郊), 지금의 동대문구 지역은 옛날부터 천연의 수어지(守禦地)이며 동시에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비옥한 토지였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하여 고려시대에는 동대문지역의 동북일대가 남경(南京)의 후보지로 거론되기도 했다.

 

서울 도성(都城)이 축조되게 된 시초는 조선왕조가 건국되고 한양에 정도(定都)한지 겨우 1년 반도 안되는 태조 5(1396) 정월부터의 일이다. 이때 도성에는 모두 8개의 대·소문(·小門)을 설치하였는데 그중 세 개는 대문(大門)이고 다섯 개는 소문(小門)이었다. 그리고 3大門에 위계(位階)가 있었으니 첫째가 숭례문(崇禮門;南大門)이었고 두번째가 흥인문(興仁門:東大門)이었다. ()를 숭상(崇尙)한다는 뜻의 남대문에 대한 대칭(對稱)으로 동쪽의 大門은 인()을 흥()하게 한다는 뜻의 명칭이었다. 그러나 흥인문(興仁門) 또는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는 이름으로 이 문()을 부르는 사람은 거의없고 모두가 속칭인 동대문이란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으니 아마 동대문이라는 이름은 전국 방방곡곡에 즉시로 퍼져 나갔을 것이다. 또 한가지 특기할 것은 서울이 아닌 지방의 큰 고을에도 성문이 있어 남문이니 동문이니 하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고 개중에는 개성의 경우처럼 남대문이라는 것도 있기는 하다. 그런데 어떤 지방에 가도 동문(東門)을 동대문이라고 불리워지는 예는 없다. 그러므로 동대문이란 지명은 온 나라 안에 단 한 개밖에 없는 고유명사가 된 것이다.

 

조선왕조시대, 이 동대문을 나서면 강원도일대로 통했고 혹 삼남지방(三南地方)으로 가는 사람들 중에도 이 문을 나서서 한강 뚝을 따라 살곶이다리를 건넜으며 북쪽 함경도로 가는 이중에도 동소문(東小門)을 택하지 않고 동대문에서 안암동·종암동의 길을 택하는 자도 있었다. 해가 동쪽에서 뜨기에 동녘은 예나 지금이나 모든 사람의 고향이고 또 그곳이 비옥한 땅이면 농경사회의 중심이 되기 마련이다. 조선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자신의 능묘(陵墓)인 동교(東郊)의 끝에서 찾아 근심을 잊게 되었다(忘憂)고 했고 조선왕조 마지막의 능묘(陵墓)도 동교(東郊)가 끝나는 자리에 섰으니 모두가 동방숭앙사상(東方崇仰思想)의 발로(發露)였었다.

 

도성(都城)밖 동교(東郊)가 마음의 고향이었을 뿐 아니라 이곳이 또한 대단히 비옥한 땅이었기 때문에 왕실에서 신농씨(神農氏)에게 제사지내는 선농단(先農壇)이 동대문에서 도보 30분거리에 설치되었으며 이 선농단제(先農壇祭)는 이 나라가 일제의 완전식민지가 되어버리기 3개월 전인 융희(隆熙) 4(1910) 55일까지 이어지고 잇다. 참고로 융희 3(1909) 45일에 선농단하(先農壇下) 동적전(東籍田)에서 거행된 순종황제의 친경(親耕)때 모였던 백성들이 부른 친경가(親耕歌)1(모두3)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융희(隆熙) 345일이라 선농단하 동적전(東籍田) 친임(親臨)하시와 천하대본 농사로 세우오야 만민이 표준으로 미시는 장가

 

삼천리강산 이리로 개간(開墾)일세. 농상증(農桑增) 호구증(戶口增) 융희만만세(隆熙萬萬歲)

 

오늘날 동대문구의 범성(範城)은 그렇게 넓지 않으며 지난날 동대문구 관내에 있던 동대문도 동묘(東廟)도 이제는 타구 관내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에는 리문(里門)의 옛 유적터가 있고 사도세자의 처음 무덤터였던 배봉산이 있으며 홍릉의 울창한 숲과 세종대왕기념관, 청량사, 선농단지 등등 관내에는 역사의 향기어린 곳이 허다히 산재하여 오랜 전통을 지닌 동교(東郊)의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다.

 

새로운 모습으로의 승화(昇華)를 향하여

이 지구상의 모든 지역은 그 지역마다의 특색있는 얼굴을 지니고 있다. 서울의 경우만 보더라도 같은 사대문 안이지만 종로와 중구의 모습이 판이하게 다름을 알 수가 있다. 또 같은 성()밖이지만 동대문 지역과 서대문지역의 모습이 전혀 달라 각각 그 특색을 지니고 있다. 동대문구에 바로 이웃해 있는 성동구·성북구와 동대문구의 모습이 전혀 다르고 중랑천을 사이에 둔 중랑구와 동대문구의 모습은 처음부터 비교가 되지를 않을 정도로 다르다.

 

조선왕조시대 말까지의 모습은 성북지역·동대문지역·성동지역간에 별로 큰 차이가 나지를 않았다. 성북구에는 북한산이 있었고 동대문구내에는 그렇게 큰산이 없었다는 차이는 있지만 그러한 점을 빼면 대동소이한 평화로운 농촌지역이었다. 그 모습들이 달라지는 것은 개화기·일제시대 이후의 일이다. 다 같은 서울의 동교(東郊)이면서 성북이나 성동에 비해 동대문지역은 훨씬 빨리 개화되었고 그러므로 훨씬 빠르게 발전해 간다.

 

동대문구에 개화의 물결이 물리적인 형태로 들어오는 것은 우선 명성황후의 국장(國葬)과 능묘(陵墓)가 설치되는 1897년부터의 일이고 이 홍릉(洪陵)이 있었기에 고·순종 양황제의 잦은 능행(陵行)이 있었으며 또 1899518(4월 초 8)에는 이나라 최초의 전차가 청량리까지 통하게 된다. 당시의 서울거리에는 몇대의 자전거와 인력차가 달리고 있을 뿐이고 한 대의 마차도 없었고 하물며 자동차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시대였으니 천지개벽에 가까운 사실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답십리에 전차가 들어간 것이 1914년이었고 성북구의 중심인 돈암동에 전차가 들어간 것이 1941년이었으니 신설동, 청량리가 얼마나 빨리 개발되기 시작한 것인가를 추측하고도 남음이 있다.

 

근대적인 가로수가 동대문 밖에서부터 청량리까지 심어진 것도 1890년대의 후반기였고 그것은 한반도 전역을 통하여 최초의 일이었다. 경원선이 개통됨에 따라 청량리역이 영업을 시작한 것이 1914년이었고 경춘철도의 성동역이 영업을 개시한 것은 1939년이었다.

 

지금 미주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자리에 경성제국대학 예과건물이 준공되어 시업식(始業式)을 거행된 것이 1924510일이었고 신설동에 종연방적주식회사 경성공장이 입지한 것이 192511월이었으며 역시 신설동에 경성경마장이 설립되어 낙성식을 거행한 것은 19289월이었다.

 

광복후의 변화, 인구집중현상은 서울시내 전역에 걸친 공통적인 현상이었지만 그중에서도 동대문구 관내에의 인구집중은 매우 초기에 그것도 대량으로 진행하게 된다. 1960년대의 말에는 이미 신설·용두·제기·전농·청량리 등 각 동에는 거의 공지를 찾아볼 수 없을 만치 주택이 빽빽히 들어서게 되었고 이 경향이 1970년대 전반기에 들어서는 답십리·휘경·회기·이문 등 각 동에도 똑같이 전개되고 있다. 답십리·전농·휘경·회기·이문 등 각 동에 인구가 이동하고 주택이 들어서고 할 당시의 속도는 너무나 빨라서 미처 서울시가 계획적인 개발, 예컨대 구획정리사업등을 전개할 겨를이 없었다. 그것은 청량리역을 중심으로 한 이 일대가 교통면에서나 교육면에서 서울시내의 다른 지역에 비해 대단히 편리했기 때문에 빠른 시일내에 대량인구의 집적·정주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대에 들어선 이들 대량의 주택들은 물론 예외가 있기는 하나 그 대다수는 30평 정도의 대지에 20평 정도의 건물들, 이른바 집장수 집으로 점거되어 있어서 소득수준이 6천달러를 넘어 1만달러를 향하고 있는 현재의 시점에서는 거의 모두가 재개발되어야 할 처지에 있다.

 

물론 동대문구 관내에도 구획정리수법에 의하여 새롭게 개발된 지역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날 경성경마장이 소재했던 신설동일대에 동대문지구 구획정리사업이 실시된 것은 1960년대의 전반기였으나 이미 30년전의 일이라서 그 건물들의 거의가 재개발되어야 할 시점에 있는 실정이다. 장안평지구 구획정리사업이 실시된 것은 1970년대의 후반기에서 80년대의 초에 걸쳐서였으니 이 지역만은 신개발지로서 타 지역에 비해 손색이 없으나 불행히도 그 범역이 협소하여 동대문구 전체의 모습에 큰 변화를 가져 올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산업면에 있어서도 사정은 동일하다. 경성시장에서 청량리시장까지, 그리고 그남쪽의 수산시장·청과물 도매시장은 그 규모면에 있어서나 거래량에 있어서 그리고 그것이 다루는 상품의 다양성 등에 있어서 가히 한국최고 또는 한국을 대표하는 지위에 있다. 서울 청량리역 근처 경동시장의 이름을 모르는 한국인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경동시장이 재래식 시장의 대표일 수 있어도 근대식 시장의 범주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한마디로 동대문구 관내의 주택과 산업시설은 거의 모두가 초로의 상태에 접어들었거나 그 상태를 넘어 서려고 하고있다. 전통이 있기에 그리고 빨리 개발되었기에 처해진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다행히 동대문구 관내 주거지역 도처에서 현재 재개발을 향한 거센 물결이 일어나고 있다. 아마도 앞으로 10년 내지 20년내에 이 지역 일대는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탈피되고 승화될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예측을 가능하게 해주는 밑바탕에 관내 50여만 주민의 강한 주민의식이 뒷받침되어 있는 것이다. 동대문구 일대가 화려하게 변신(變身)함으로써 아름답고 살기좋은 환경이 마련될 미래를 향하여 오늘도 또 내일도 착실한 발걸음을 옮기기로 하자.

 

 

청백리의 표상

동쪽은 중랑천을 경계로 중랑구, 서쪽은 정릉천(貞陵川)을 경계로 종로구, 남쪽은 정릉천을 경계로 성동구, 북쪽은 천장산 능선을 경계로 성북구와 접해 있다. 천장산 기슭과 중앙의 배봉산 지역이 산지를 이루고 정릉천·중랑천 유역에는 장안평의 평야가 발달하였다. 장안평은 중랑천 연변의 평지를 이루고 있어, 도심의 팽창에 따라 농경지에서 아파트 주거단지로 변하였다. 일찍이 동대문구는 청량리지역, 경동시장, 청과시장을 중심으로 부도심 근린생활기능을 수행하는 동부 서울의 중심지로써 천호대로, 왕산로, 고산자로 등 주요 간선도로가 관통하고 청량리역 등 교통망이 구축되어 주요 교통관문의 역할을 하고 있다.

 

청량리역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동부 부도심(副都心)의 저지대는 평탄한 지형 때문에 인문(人文)이 발달하기에 좋은 자연환경을 이루고 있다. 철도와 도로망이 사방으로 통하고 주변에 상가가 밀집해 있으며, 청량리역을 중심으로 인구의 조밀화와 상업기능의 집약화를 가져왔다. 청량리역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은 철도와 지하철 5호선의 개통으로 도로교통망의 발달로 점차 이 지역은 서울 동부의 관문으로 발전하고 있다. 또한 종로의 연장선상에 있는 왕산로(旺山路)와 망우로 및 사가정길·답십리길이 구의 동서를 통과하며, 고산자로·홍릉길·전농로 와 천호대로와 연결되는 한천로 등 간선도로가 구의 남북의 통과한다.

    

중랑천과 청계천이 각각 구의 동쪽과 서남쪽 경계를 흐르며, 중랑천 연안의 장안동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1985년에는 상주인구가 94만 명으로 서울시 전체인구의 10%를 차지했었으나 중랑구가 분리됨에 따라 1996년 현재 약 4%에 불과한 40만 명 정도이다. 서울의 주요부도심 중의 하나이며, 서울시와 경기도·강원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로 상업과 서비스업이 발달했다. 1899년에 전차가 부설되었고, 최초의 고가도로인 삼일고가도로가 건설되었으며, 신설동-성수 간 국철, 성북-용산 간 국철 등이 통과하여 시내교통이 편리하다. 또한 경원선·경춘선·중앙선·교외선이 청량리역을 시·종점으로 하고, 경기도의 구리시·남양주시를 연결하는 버스들이 청량리 로터리를 중심으로 왕래하고 있다.

 

서울 동부 중앙에 위치하며, 남쪽은 성동구와 접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중랑천을 경계로 중랑구, 북쪽으로는 성북구, 서쪽으로는 종로구와 접하고 있다. 청량리지역, 경동시장, 청과시장을 중심으로 부도심 근린 생활기능을 수행하는 동부 서울의 중심지로서 천호대로, 왕산로, 고산자로 등 주요 간선도로가 관통하고 청량리역 등 지하철 1호선 및 2호선이 통과하는 교통망이 구축되어 주요 교통관문의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한국과학기술원, 산업연구원 등 8개의 전문시설과 경희대, 한국외국어대, 서울시립대 등이 위치하여 인재육성의 산실이 되고 있다.

 

인구가 조밀한 지구는 전농동을 비롯해 이문·청량리·답십리·용두동 등이다. 특히 경동시장은 명절 때는 제수용품, 김장철에는 마늘·고추 등 양념류의 거래가 활발한 곳으로 유명하며, 근처에는 한약 건재상들이 모여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청량리동에는 한국개발연구원을 비롯해 산림청·산업연구원 등이 있으며, 휘경동 지역에도 건설부 산하의 건설공무원교육원·국립건설시험소 등의 국가연구기관이 진출해 있어 학술연구기관의 중심지로 발전하고 있다.

 

 

 

배봉산

배봉산 자락에는 영우원과 휘경원 터가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영우원은 조선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소이며, 휘경원은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였던 수빈 박씨의 묘소이다. 배봉산이라는 이름도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에서 나온 것인데, 정조가 평생에 못 다한 불효를 한다며 날마다 부친의 묘소를 향해 배례하게 되면서 산이름이 배봉산(拜峰山)‘으로 불렸다는 설이있다. 이 외에도 이곳 산기슭에 영우원과 휘경원 등 왕실의 묘원이 마련되면서 길손들이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기 때문에 배봉(拜峰)으로 불렸다는 설이 있고, 산의 형상이 도성을 향하여 절하는 형세를 띄었기 때문에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배봉산~답십리근린공원~중랑천제방이 연결된 7.2km의 동대문 녹지 순환길이 있다.

 

중랑천

옛날 중랑천은 도봉동 부근에서는 서원천(書院川)으로 불리었고, 들판과 들판사이를 흐르는 강이라는 뜻으로 샛개, 샛강으로도 불리었으며, 강으로 흘러들어가는 내이므로 한천(漢天), 한내라고도 불렀다. 면목동 일대에서는 중광개라고도 하였다. 1911년 일제에 의해 발행된 경성부지도에서 중량교(中梁橋)를 중랑교(中浪橋)로 표기해 놓은 이후 이를 추종한 각종 문헌에서 중랑천(中浪川)이라고 표기하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청계천

도성안, 곧 서울 분지의 물을 모아 서출동류(西出東流,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름)하며, 일명 개천(開川) 또는 청풍계천(淸豊溪川)이라 불렀다. 개천(開川)이란 조선조 태종 때 하천정비를 시작하고 영조 36(1760)년 인부 20만명을 동원하여 57일간 내의 바닥을 파고 모래를 치우며 하천을 바로잡아 정리했는데 이 때 하천을 열었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일설에는 하천정비를 시작한 태종, 세종 때부터 개천으로 불렀다고도 한다.

 

정릉천, 홍릉천(洪陵)

조선조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인 강씨의 무덤 정릉(貞陵)’이 있었던 데서 비롯되었는데 정릉은 본디 강비가 죽은 뒤 태조 이성계의 고집으로 도성 안 정동(오늘날 덕수궁 인근)에 안치하였으나 태종에 의해 1·2차 왕자의 난을 치르면서 계비 강씨의 무덤을 오늘의 정릉 골짜기로 이장하게 되었다.

 

하정 유관에 얽힌 이야기

청백리의 표상, 효자 유계문, 검소하고 근면한 유관선생, 너무나 서민적인 하정 유관, '우산각 골'과 하정 유관.

 

안암천, 안감내 다리에 얽힌 옛날 이야기

지금은 서울 한가운데로 한강이 흐르고 있지만 예전 조선시대의 한양인 그 당시 서울 한가운데는 청계천이 흐르고 있었다.

 

회묘에 얽힌 옛날 이야기

우리구 회기동, 현재는 천장산 아래 경희대학교가 위치하여 큰 터를 잡고 교육의 요람으로써 뿐 아니라 동서양방을 겸한 병원, 예술 문화공연장인 평화의 전당 등을 건축하여 그 일대가 번창하고 있지만 조선시대 때는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묘가 있던 곳으로 '회묘리'라 불렸다.

 

동대문에 얽힌 옛이야기

조선초기 수도인 한양에는 외곽이 토성으로 쌓여 있었고, ···북으로 각각 커다란 대문이 나 있었다. 그래서 4대문 안을 문안 또는 성안이라 하였다.

 

꽁보리밥과 가평현감

조선시대 선조대왕때 영의정을 지냈던 오성 이항복 대감께서 경기도 가평으로 여름휴가를 가던 길이었다. 대감께서 공무가 아닌 사행길이라 평복 차림으로 그 당시 고관들이 행차할 때 타던 가마 대신에 조랑말을 타고 하인 한명을 앞세워 길을 떠났다.

 

지혜로운 창마을 떡장수

현재 서울시립대학교가 위치한 전농동에서 정신병원이 있는 청량리 쪽으로 넘어 가려면 시멘트다리를 넘어야 하는데 이 다리를 가리켜 '떡전교' 또는 '떡전다리'라 부른다.

 

엄귀비의 무덤, 영휘원

우리 구 청량리2동으로 편입된 홍릉 일대는 원래 조선왕조 왕가 소유 국유림이었다. 지금은 도로가 나고 구획정리가 되어서 분간하기가 쉽지 않지만 홍릉 일대는 서울의 주산인 북악산 줄기가 뻗어내려 오다가 천장산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야산지대로서 왕가에서 주로 능 터로 사용했던 곳이다.

 

슬픈 왕세손의 무덤, 숭인원

홍릉에 있는 영휘원 경내 입구에는 또 하나의 큰 무덤이 있으니 곧 비운의 왕세자 이은()의 아들 즉 순종의 왕세손인 이진()의 무덤이다.

 

설롱탕인가, 설렁탕인가

모든 것이 음력(陰曆)에 기초했던 옛날에는 1년을 24절기로 나누었다. 긴 겨울이 거의 끝날 무렵에 봄에 들어선다는 입춘(立春)이 오면 이어서 겨우내 내렸던 눈 대신에 비가 온다는 뜻의 우수(雨水)가 지나고 보름 뒤에 긴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가 깨어난다는 경칩(驚蟄)이 따라온다.

 

전차가 처음 다녔던 길, 청량리

지금은 서울시내 곳곳이 지하철로 연결되어 있고 자동차가 홍수를 이루고 있지만 약 100년 전만 해도 서울거리에는 사람이 끌거나 밀어서 움직이는 인력거가 가장 편리하고 빠른 교통수단이었다.

 

보제원에서 하룻밤 쉬어 갑시다

조선시대 흥인문(동대문) 3리 지점에 보제원이 있었다. 보제원이란 명칭 그대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보호하는 구휼기관이었다.

 

용이 승천한 용두리 찬물내기

풍수지리적으로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은 북악산 줄기에서 아차산으로 이어지는 구릉 가운데 하나인 산자락을 중심으로 생긴 분지에 동네가 형성되었고, 동네를 감싸고 지나가는 뒷산은 마치 용이 꿈틀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다가 종로쪽으로 향한 동네의 진입부분은 용의 머리에 해당되므로.

 

봉이 김선달의 용두리 찬물내기 물장사

평양에서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은 금강산으로 들어가 이곳 저곳을 유람하기로 마음먹었다. 대동강물을 팔아 챙긴 돈 4000냥 중에 일부는 어려운 이웃들을 위하여 기부하고.

 

뒤주 속에 갖혀 죽은 사도세자

현재 휘경2, 전농동, 답십리에 걸쳐있는 배봉산은 예전에는 경기도 양주 땅이었다. 이 산이 배봉산(拜峰山)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사도세자의 무덤이 그곳에 있어 서울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이곳을 지날 때마다 사도세자의 무덤을 향하여 절()을 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허위의 충절이 서린 왕산로

"나라가 어찌 이렇게 허망하게 왜놈들에게 유린당할 수 있습니까?"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한데 백성들이 어찌 가만히 보고만 있겠소이까?".

 

송파산대놀이 예능보유자 김학석

송파산대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49)의 예능보유자로 19956월 지정된 김학석(62, 현 동대문문화원 이사)씨는 이문2동에서만 무려 40여년을 살고있는 우리고장의 자랑스런 문화예술인이다.

 

경기민요 예능보유자후보 김금숙

중요무형문화재 제57(1975712일 지정) 경기민요 예능보유자 후보인 김금숙(동대문문화원 이사)씨는 현재 회기동에 소재한 김금숙경기민요연수원에서 왕성한 후진양성을 하고 있다.

 

서울약령시 - 보제원

흥인문 밖 3리 지점(현재 안암동로터리) 선농단 서쪽에 보제원이 있었다. ‘이란 조선시대에 공적인 업무로 여행하는 자에게 숙식을 제공하기 위하여 주요한 길목에 설치된 것인데, 서울 인근의 원으로는 서대문 밖의 홍제원, 남대문 밖의 이태원, 광희문 밖의 전관원 등이 있었다. 보제원은 동대문 밖, 한성에서 동북방향으로 드나드는 길목에 설치되어 있었다. 보제원은 공용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하는 역할 외에도, 태종때부터 성종때까지 한의원과 의좌, 간사회 등을 배치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진료를 해주기도 하였다.

 

보제원은 주로 도성내 병자의 구료를 주업무로 했지만, 때로는 무의탁자를 수용하고 행려병자를 구료하는 역할도 하였으며, 사망시 매장까지 해주는 등 구휼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세종실록을 보면 보제원과 홍제원을 설치하고 배고픈 사람들의 진제장으로 사용하고자 토자 형태로 2칸을 건립했다는 기록이 있다 옛날부터 흥인문 밖 보제원 주위에는 경기도 · 강원도 쪽에서 한약재를 캐서 가져와 파는 약재상인들이 많았다. 그곳이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목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보제원에서는 바로 이러한 한약재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오늘날 용두동과 제기동 일대에 서울약령시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역사적인 전통에서 비롯되었다.

 

홍릉숲일대

지금 홍릉숲이 위치한 자리에는 조선왕조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의 능이 있었다. 명성황후의 능을 홍릉이라 하는데, 숲의 이름도 능의 이름을 따서 붙여지게 된 것이다. 홍릉은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이장되어, 현재 홍릉숲에는 이장되기 전 홍릉의 터만 표시되어 있다.

 

고미술상가 http://www.gomisul.or.kr

마장동 사거리를 지나 천호대교 쪽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동대문구의 숨겨진 명소 고미술 상가가 있다. 답십리4동과 5동을 차지하고 있는 이 골동품 상가거리는 '전통박물관' 이라 할 만하다.

 

 

 

서울풍물시장

산림과학관

경희대자연사박물관

경희대중앙박물관

서울시립대 박물관

서울약령시한의약박물관

경희대학교 한의학역사박물관

정보화도서관

동대문도서관

이문체육문화센터어린이도서관

장안어린이도서관

용두어린이영어도서관

국립산림과학원

한국과학기술원

한국개발연구원

한국국방연구원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북한연구소

산업연구원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한방문화축제

선농제향

청룡문화제

아까시꽃큰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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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농제

경동시장

부군당제

산고사제

산신제(청량리)

산신제(회기)

영신제

장령당(도당)

한의약거리

제기동어항거리

답십리고미술상가

 

 

 

 

영휘원(永徽園), 숭인원, 휘경원(徽慶園), 선농단

 

 

제기동에 선농단과 천연기념물 제240호로 지정된 향나무가 있으며, 선농단 서쪽에는 보제원(普濟院)이 있어 여행객의 숙박과 진휼 및 경로잔치의 장소로 이용되었다. 청량리동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내에는 조선시대에 수표교 옆에 세워져 있던 수표가 이전되어 있고, 영릉에 있던 세종대왕신도비도 옮겨져 있다. 그 밖에 고종의 후궁 엄비(嚴妃)의 묘소인 영휘원(永徽園)과 영친왕의 장남 진()의 묘소 숭인원(崇仁園) 등이 있으며, 배봉산에는 목장성터와 휘경원이 있었다.

 

 

 

서울 영휘원(永徽園)과 숭인원, 휘경원(徽慶園) - 사적 361

서울 선농단(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5) - 사적 436

서울 선농단 용두동의 옛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자리에 향나무 - 천연기념물 제240

서울 영휘원 산사나무 - 천연기념물 제506

세종대왕신도비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2-1

청량리역 검수차고 - 등록문화재 제269

능엄경언해 보물 제763

몽산화상법 보물 제769

금강경삼가해 보물 제772-(1)

서울 청계천 수표 보물 제838

서울 세종 영릉 신도비 보물 제1805

송파산대놀이 무형문화재 제49

배연신굿 무형문화재 제28-나호

서울 선농단향나무 천연기념물 제240

서울 영휘원 산사나무 천연기념물 제506

서울 영휘원 사적 제361

서울 선농단 사적 제436

사복시 살곶이 목장지도 서울시유형문화재 제295

구영릉석물 서울시 유형문화재 42

연화사 아미타괘불도 서울시유형문화재 제342

연화사 칠성도 서울시유형문화재 제343

연화사 천수관음도 서울시유형문화재 제344

연화사 신중 서울시유형문화재 제345

연화사 지장시왕도 서울시유형문화재 제346

연화사 산신도 서울시 문화재자료 제56

서울 청량리역 구 검수차고 등록문화제 제269

청강 김영훈 진료기록물 등록문화제 제503

공병우 세벌식 타자기 등록문화재 제552-1

선농단

영휘원(永徽園)숭인원 사적 제361

세종대왕기념관, 능엄경언해(보물 제763),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보물 제769), 금강경삼가해(보물 제772-(1)), 서울 청계천 수표, 세종대왕신도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2)

홍릉수목원

청량사(淸凉寺)

연화사

보제원 터(普濟院址)

성동역 터(城東驛址)

홍릉 터(洪陵址)

휘경원 터(徽慶園址)

전영택 집 터

 

 

 

 

 

    

 

반일코스

경희의료원 한방병원

서울약령시 및 한의약 박물관

장안동 · 답십리 고미술 거리

청계천

홍릉숲

영휘원 · 숭인원, 세종대왕 기념관

 

1일코스

경희의료원 한방병원(반일) -> 서울약령시 한의약 박물관 -> 서울약령시장(전일), 선농제향 행사

 

2~3일코스

서울약령시 한의약 문화축제

 

한방으로 지키는 건강

경희의료원 한방병원(반일) -> 서울약령시 한의약 박물관 -> 서울약령시장(전일)

 

고미술의 향기와 함께

장안동 · 답십리 고미술 거리

 

자연과 함께하는 도보 여행

청계천하류(반일) -> 홍릉수목원(반일) -> 배봉산 생태공원(2시간) -> 중랑천(반일)

 

선조의 문화유산을 찾아서

선농단(1시간) -> 영휘원 · 숭인원, 세종대왕기념관(반일) -> 청량사(2시간) -> 연화사(2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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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정동 기준 10, 행정동 기준은 14

    신설(新設용두(龍頭제기(祭基전농(典農답십리(踏十里장안(長安청량리(淸凉里회기(回基휘경(徽慶이문(里門)

     

     

     

     

     

     

     

    신설동 新設洞

    동대문구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신설동은 조선시대 동부숭신방(崇信坊)에 새로 설치한 마을이라 하여 신설계(新設契)라 하던 것을 갑오개혁 때 신설동(新設洞)이라 하였는데, 과거에는 이곳을새말또는신리(新里)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또한 동대문시립도서관일대를우산각골(雨傘閣里)또는우선동(遇仙洞)이라고 하였는데, 우산각(雨傘閣)이란 조선 세종때 우의정을 지낸 하정(夏亭) 유관(柳寬) 선생이 살던 집을 부르던 이름으로 하정(夏亭)선생은 비가 오는 날에는 방에서 우산(雨傘)을 받쳐들고 비를 피했을 정도로 생활이 청렴(淸廉)하여 청백리(淸白吏)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숭인동 동묘(東廟) 동쪽에서부터 신설동 남쪽 청계천로 변에는 타원형으로 자리 잡은 경마장(競馬場)이 있었습니다. 경마장은 원래 용산(龍山) 이촌동(二村洞)에 있었으나 1925년 을축년(乙丑年) 대홍수 때 시설이 유실 되어 신설동 85번지 일대로 옮겨졌으며, 1928년부터 1954년 뚝섬으로 이전(移轉)할 때까지 경성경마장(京城競馬場)이란 이름으로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신설동에는동대문도서관」「동대문우체국」「동대문등기소등 공공기관과우산각공원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용두동 龍頭洞

    왕산로(旺山路)와 하정로(夏亭路) 주변에 신설동과 경계하고 있는 용두동의 동명은 예전에 마을 뒷산의 산세(山勢)'()의 머리'와 같다하여용머리또는용두리(龍頭里)라고 불리었는데 연유합니다. 예전 이지역에는 홍릉천, 성북천, 정릉천 등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지나고 있어 물 맛 좋은 곳'으로 이름이 나 있었으며, 개울가에 형성된홍릉내 빨래터(전 오스카극장 자리)와 정릉내 빨래터(현 한솔동의보감 건물)는 널리 소문난 빨래터였으며, 왕산로 현 남성공업사 자리에 있었던찬우물터의 우물맛은 이가 시릴 정도로 차고 꿀맛 같아서 도성(都城)안으로 들어가는 길손들은 물론 성안의 사람들도 동대문(東大門)을 나와서 꼭 이 물을 마셨다고 합니다. 예전동마장버스터미널자리였던 용두동 39번지에는동대문구청신청사 가 자리하고 있으며, 용두동 64번지에는 한의약전시관·문화관이 자리하고, 용두동 34번지일대 새로운 동대문구청사건너편에는용두근린공원이 조성되었습니다.

     

     

    제기동 祭基洞

    제기동이란 동 이름은 "제사를 지내는 자리()" 라는 의미 에서 비롯되었다 제기동은 본래 춘분과 추분에 나라의 임금이 직접 행차하시어 풍농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린데서 비롯된 제단(祭壇:先農壇)이 있었다 하여 "제터"또는 "계터" 마을이라 불렀다. ()터 마을을 한자로 뜻빌림(意譯)한 것이 제기동이다. 제기동은 "제사를지내는 터"에서 비롯되었듯이 그 제사를 올리던 터가 바로 선농단 이다. 선농단은 조선왕조가 개국하면서 농본정책을 펴, 일찍이 농사 짓는 법을 가르친 제신농씨(帝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게 제사 를 지내기 위하여 설치한 제단이다. 제사는 그 해의 풍년을 기원, 매년 경칩이 지난 뒤 길한날을 가려 왕이 친림하여 제사를 지내고 가뭄이 심할때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으며, 제사를 지내고 나서 국왕을 비롯하여 조정중신,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차례로 밭을 간 뒤, 국왕이 백성을 위로하기 위하여 소를 잡고, 밥과 술을 내렸으므로 그 국밥을 '선농단'에서 내린 것이라 하여 '선농탕''설롱탕' '설렁탕 '으로 변한 것이 오늘날 설렁탕의 유래이다.

     

    제기동(祭基洞)은 조선조 초기부터 한성부(漢城府) 동부 인창방(仁昌坊)에 속해 있었으나, 조선조 영조 27(1751)에 반포도성삼군문분계총록을 보면 한성부 동부 인창방 제기리계(祭基리계)로 나타나 있기도 하다. 갑오개혁(1894)때에는 동서(東暑) 인창방 동소문외계(東小門外 ) 제기리로 불렸고 일제시대 때인 1910년 한성부를 경성부(京城府)로 바꾸고 도성 밖동()8(용산,서강,두모,숭신,인창,은평,연희,한지)으로 개편, 재기리는 인창면에 속하게 되었다. 191441(경기도고시 제7) 일제가 동 이름과 구역을 축소 조정할 때 제기리는 성밖이라는 이유로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 편입되었다가, 193641(총독부령제8) 경성부 구역확정에 따라 경성부에 편입, 제기동은 일제식 땅이름으로 제기정(祭基町)으로 바뀌었다. 광복 다음해인 1946101일 일제식 땅이름을 정리할 때 제기정을 현재의 제기동으로 고쳤다. 조선왕조때 현 경동시장 일대는 정릉천과 청계천의 풍부한 물로 미나리밭을 이루고 있었다. 1946년 미군정 당시 "원목 조합터"라 불리기도 했으며 건축재료 최대공급처이기도 했으며, 우리나라 사설철도 였던 경춘선의 시발역인 성동역이 오늘의 미도파 청량리점 자리에 있었다. 8·15광복을 전후하여 성동역 주위에는 경춘선과 중앙선을 이용하여 강원도,경상도 등지에서 올라오는 한약재를 취급하는 한약상가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여 오늘날 경동약령시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조선조때 구휼기관이던 보제원(현 안암로터리부근)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유추된다 . 또한 조선시대 길손들에게 무료로 숙소(宿所)를 제공하고 병자들에게 약을 지어 주었다는보제원(普濟院)터가 있으며, 예전 경춘선(京春線)의 시발역 (始發驛)이었던성동역(城東驛)이 지금의 미도파백화점 자리에 있었고, 전국 한약재의 70%가 유통되고 있는경동약령시(京東藥令市)와 그외경동시장」「청량리시장」「동서시장등이 있습니다.

     

     

    전농동 典農洞

    청량리역 뒤쪽에 위치한 전농동은 조선초부터 농업을 중시한 관계로 국왕의 친경지였던 籍田(적전, 일명 典農)이 있었기 때문에 典農里라고 명명 되었다. 典農洞은 조선초에 한성부 東部 仁昌坊에 속하였으며 영조 27(1751)에 도성 수어를 위해 반포한 都城三門分界總錄에 보면 한성부 동부 인창방 (城外) 典農里契로 나타나고 갑오개혁때는 한성부 東署 仁昌防 (城外) 東小門契典農里로 기록되어 있다. 그 뒤 일제의 침략으로 한일합방이 되자 191141(경기도령 제3)에는 京城府 인창면 전농리로 칭하고 191441(경기도 고시 제7)에는 경기도에 편입시켜 고양군 숭인면 전농리로 되었으나 193641(총독부령 제8) 경성부 확장때 편입되어 경성부 典農町(전농정)이 되었다. 194341區制 실시에 따라 東大門區에 속하였다. 광복후 194610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바꿈에 따라 典農町典農洞으로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동의 명칭이 된 籍田은 왕이 친히 갈던 밭으로 텃골(톳구리)에 있었으며 이곳에는 典農의 일을 보던 泌芬閣(필분각)이 있었다. 이 밭에서 나온 곡식을 저장하였으므로 창마을(倉村, 創洞)이란 이름이 전해오며, 이 곡식은 종묘 제사에 사용하였다. 텃골, 창마을외에도 典農洞의 자연촌락명으로 샛밭, 활터밭, 창방재, 월촌, 성외동등 7개가 있다. 명칭 조선시대 초기부터 왕의 친경지였던 적전(籍典)(일명 典農)이었기 때문에 典農里 라고 명명되었다. 沿革 조선초 태조5년에 도성 및 성저(城底)를 동서남북의 552방의 坊名(방명)을 붙일 때 東部 12仁昌坊에 소속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영조 27(1751)에 도성 수비를 위한 도성3군분계총록東部仁昌坊(城外)典農里契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갑오개혁 때에는 한성부 東西 仁昌坊(城外)東西門外契의 전농리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이 지역엔샛말-일명 간촌(間村)」「활터말-일명 궁촌(弓村)」「창방재(昌防嶺)」「창마을-일명 창촌(倉村)」「텃골-일명 기곡(基谷)」「건너말-일명 월촌(越村)」「성너머말-일명 성외동(城外洞)7개의 자연부락이 있었으며, 전농4동에는서낭당」「부군당(府君堂)등 토속신당(神堂)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농동에는 서울 동부지역 철도교통의 관문인청량리역(淸凉里驛)이 있으며, 배봉산(拜峰山)아래서울시립대학교(市立大學校)배봉산근린공원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답십리동 踏十里洞

    조선초 무학대사가 도읍을 정하려고 이곳을 밟았다 하여 '답심리(踏尋里)'로 불리었다는 설과 도성(都城), 즉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부터 10리 정도 떨어진 곳이라하여 왕십리와 같이 답십리라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 청계천 하류지역이었던 이 지역의 들(:)10리벌 같이 넓어서 답십리(踏十里)가 되었다는 설, 즉 동대문(東大門)으로부터 10리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다하여 왕십리(往十里)와 같은 의미로 답십리(踏十里)라 하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작은답십리'로 불렸던 답십리제3동은 답십리에 속해 있던 작은 부락들 중 하나였던 현 답십리제3동은 예전에 '작은답십리'로 불리던 지였이었다고 합니다. 답십리동 속의 자연촌락으로 원말(元洞, 현 답십리5), 너머말(현 답십리1), 웃말, 작은답십리, 새말(新村), 간데메(中山) 등이 있었다. 작은답십리는 현재 답십리3동이며, 중산(간데메)은 동대문구의 허파역할을 하는 간데메공원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청계천 하류지역이었던 이 마을 일대에는 미나리깡과 시금치, 채소밭이 넓게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조에는 한성부(漢城府)에 속하였는데 영조(英祖) 27(1751)에 도성 방어를 위해 간행된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을 보면 한성부(漢城府) 동부(東部) 인창방(仁昌坊:城外) 踏十里契로 나타난다. 그 뒤 甲午改革 때에는 한성부(漢城府) 동서(東署) 인창방(仁昌坊) 동소문외계(東小門外契) 답십리계로 되었다. 일제의 강점으로 국권을 잃은 뒤인 191141(경기도령 제3) 이 곳은 경성부(京城府) 인창면(仁昌面)에 속하고, 이어서 191441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 편입되었다가 193641(총독부령 제8) 경성부 확장에 따라 경성부에 편입되어 답십리정(踏十里町)이라 하였다.194341(부령 제163)에 구제 실시에 따라 답십리정은 동대문구에 속하게 되었다. 광복후 1946101일 일제식 동명 개칭에 따라 답십리정은 답십리동으로 되었다.

     

    천호대로 북쪽과 한천로 서쪽에 위치한 답십리동은 조선초 무학대사가 도읍을 정하려고 이곳을 밟았다 하여 답심리(踏尋里)로 불리었다는 설이 있으며 이 곳이 도성, 즉 동대문으로부터 10리 정도 떨어진 논과 밭으로 도성내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농사를 짓는 곳이라 하여 답십리란 마을 이름이 붙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초부터 한성부 동리 인창방에 속해 있는 역외 지역이었고 영조 27(1751)에 간행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을보면 漢城府 東部 仁昌坊(城外) 踏十里契로 되어 있으며 그 뒤 甲午改革 때에는 漢城府 東署 仁昌坊(城外) 東大門外界 踏十里로 나타난다. 현재 답십리 지역엔자동차부품상가」「고미술상가」「황물상가등 특화거리가 조성되어 있으며답십리근린공원」「간데메공원」「동대문 문화회관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장안동 長安洞

    중랑천을 동쪽에 끼고 있는 장안동은 조선시대에는 장한벌 또는 장한평이라 부른데서 동명이 유래한다. 장한벌은 송정동과 답십리 사이에 있었던 벌판으로 조선시대 군마의 방목장이자 기마훈련장이었다. 이에 따라 '마장안벌'이라 하던 것이 '장안벌'로 줄여지고 이 명칭이 '장안벌' 또는 '장한벌'이라 불리게 되었다. 장한벌은 중랑천의 범람원이었으나 개화기로부터 차차 농토로 개척되어 비옥한 농토로 변하였다. 일본은 경술합방으로 국권을 침탈하고는 토지조사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장한벌의 토지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소속을 시켰다. 이후 해방이 되고 미 군정하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후신인 신한공사의 관리에 들어갔다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의 농지개혁때 실제 경작자 들에게 분배되었다. 그 후 동대문 지역에 인구집중현상이 현저하여지자 이곳을 농지로 유지할 수 없게되어 서울특별시에서는 1975년부터 이곳에 토지구획정리사업을 실시하여 농지에서 주택지로 전환하였다. 이 지역의 원래 이름이었던 장한평, 장한벌의 이름을 남기기 위하여 현재 지하철 5호선이 통과하고 있는 이곳의 지하철역 이름을 장한평(長漢坪驛)으로 이름을 지어 옛 이름을 이어가고 있으며, 동대문구 장안동 중고자동차시장 앞을 기점으로 하여 장안동을 남북으로 종단하여 사가정길과 교차하는 도로를 장한로(長漢路)로 명명하여 그 이름을 이어가고 있다.

     

    원래 동쪽으로 한내(漢川-중랑천의 옛이름)를 등지고 발달한 평야라 하여장한벌또는장한평(長漢坪)이라고 한데서 비롯 되었다는 설과 조선시대 도성에서 사용하는 군마(軍馬)를 키우던 '목마장(牧馬場) 안쪽의 벌판'이란 뜻의 마장안벌로 부르던 것을 줄여장안벌」「장안평이라 하였는데 일제(日帝)때 한자음장안(長安)으로소리 옮김을 하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도성의 동부지역 대부분은 양마장(養馬場) , 말을 키우던 목장(牧場)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동대문구의 장안동(長安洞)과 성동구의 마장동(馬場洞-숫말을 키우던 곳) 송정동(松亭洞-솔마장벌, 내박배)성수동 (聖水洞-뚝섬 살곶이벌) 중랑구의 면목동(面牧洞) 광진구의 자양동(紫陽洞-암말을 키우던 곳)등은 모두 마장(馬場)과 관련이 있다하겠습니다. 현재 장안동 지역엔동대문소방서」「동대문구민회관」「동대문구민체육센터가 자리하고 있으며,장안근린공원」「장평근린공원을비롯하여장일공원」「이슬공원」「안골공원」「샛별공원」「마로니에공원」「늘봄공원」「한내공원」「미나리공원」「물레방아공원」「미리내공원」「장미공원」「늘푸른공원등 많은 공원들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청량리동 淸凉里洞

    현재 이 동 61번지에 청량사(淸凉寺)가 있음으로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예전에 청량사가 위치한 바리산이 수목이 울창하고 맑은 샘물이 흐르는 데다가 남서쪽이 트여서 늘 시원하므로 청량한 곳으로 불리어 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 동은 조선 초부터 한성부 동리 인창방에 속하는 역외 지역이었으며 영조 27(1751)에 도성 수어를 위해 간행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보면 동부인창방(성외) 청량리게로 되어 있다. 그 후 1894년 갑오계획 때에는 동서 인창방(성외) 동소문왹계 청량리로 불리었다. 1910년 경술국치로 일제가 국권을 강점한 후 191141(경기도령 제 3)58면제의 실시로 경기도 경성부 확장에 따라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청량리정으로 칭하고,1943610(부령 제163호에 구제 실시로 동대문구에 속하게 되었으며,광복후 194610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 고유의 명칭으로 고칠 때 청량리정은 청량리동으로 되었다. 청량사는 신라 말기에 세워진 절로서 페허화 했던 것을 1896년에 서울의 비구니 4대승방의 하나인 돌곶이 승방이 이전해 오면서 청량사로 명명했다. 이절은 조선 말에 도성 사람들이 찾아 쉬던 휴양처였으며 일제 때는 애국지사,고승들의 발길이 잦았다. 특히 1939712()에는 오세창,권동진 등이 만해 한용운선생의 회갑연을 이 절에서 조촐하게 마련하기도 했다. 한편 청량사가 위치한 산을 바리봉이라고 하고, 그 앞의 마을은 앞말, 이 앞말과 홍릉 사이의 마을을 샘말이라 하였다. 현재 회기로 변에 자리잡고 있는 산림청에는 임업시험장이 위치하다가 광릉수목원으로 이전했는데 이 경내에는 홍릉 터가 있다. 홍릉은 조선말 명성황후의 능으로서 명성황후는 1895년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게 시해된 뒤 광무원년(1897) 1122일 이곳에 장례했다. 그러나 이곳이 길지가 아니라는 주장이 있엇으므로 현재 미금시의 금곡으로 이장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혼란한 국내외 정세로 미루어지다가 19191월에 고종황제가 붕어하자 이 해 215일 이 곳을 떠나 금곡에 천릉했으므로 홍릉터가 남아 있게 된 것이다. 현재 세종대왕기념관 남쪽(청량리동 204번지), 즉 전일의 홍릉 경내에는 귀비 엄씨의 묘소인 영휘원과 영친왕의 장남 진의 묘소인 숭인원이 있다. 엄귀비는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이었으나 을미사변후 아관파천에서 고종을 모시다가 영친왕을 낳아 비로 책봉되었다. 그가 1911720일에 세상을 떠나자 이해 82일에 이 곳에 장사를 지냈다. 순종의 세손이 되는 진은 19218,일본에서 영친왕과 일본 황족의 딸 이방자 여사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생후 9개월에 우리나라에 귀국했다가 1922511일에 병사하자 엄귀비의 영휘원 경내로 묘소를 정했다. 회기로 홍릉로가 접하는 삼거리에는 세종대왕기념관(청량리동206)이 자리잡고 있다. 이 건물은 197011월에 준공되어 세종대왕에 관한 자료를 전시하는 진열관을 일반에 관람시키고,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고전을 국역하는 일을 맡고 있다. 이 경내에는 1973년 서초구 내곡동의 영릉터에 있었던 세종대왕신도비(서울시 유형문화제 제 42)를 이전하여 세워 놓았고, 그 곳에 묻혀 있었던 여러 석물도 발굴하여 옮겨 왔다. 그리고 이 기념관에는 조선시대 청계천의 수표교에서 수위를 측정하던 수표(보물 제 838)도 이전되어 보존하고 있다. 원래 수표는 세종 23(1441)에 처음에 나무로 제작하여 수위를 측정하다가 돌로 바뀌었는데 현재 보관되어 있는 것은 영조 49(1773)이나 순조 33(1833)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한다. 이 표석은 195911월에 청계천 복개공사때 수표교와 함께 장충단 공원으로 이전 했던 것을 1973107일에 다시 이 곳으로 옮겨 온 것이다.

     

    현재 이곳 홍릉(洪陵)에는 고종황제(高宗皇帝)의 비 명성황후(明成皇后) 민비(閔妃)의 능지(陵址)였던 홍릉(洪陵)-후일 금곡(金谷)으로 이장과계비 순헌귀비(純憲貴妃) 엄비(嚴妃)의 능()영휘원(永徽園)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의 원자이며 순종(純宗)의 왕세손이었던 이진(李辰)의묘소(墓所)숭인원(崇仁園)」「세종대왕기념관」「홍릉근린공원등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또한 청량리관내에는청량리경찰서」「동대문세무서」「청량리전화국」「청량리정신병원」 「산림청등 공공기관과산업연구원」「산업기술정보원」「국방연구원」「임업연구원」 「한국개발연구원」「한국과학기술원등 각종 연구기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회기동 回基洞

    동쪽과 남쪽의 청량리동, 서쪽의 휘경동, 서쪽의 이문동과 접해 있는 회기동은 조선시대 연산군의 생모 폐비(廢妃) 윤씨(尹氏)의 묘인 회묘(懷墓)가 있어 동 이름이 유래하였다. 당초 회묘(懷墓)1504(연산군10)에 회릉(懷陵)으로 승격되어 마을 이름을 회릉동(懷陵洞)이라 하였으나 후일 능()이 다시 묘()로 격하 됨에 따라 마을 이름을 회묘동(懷墓洞)이라 하였으며, 이 후 회()자는 음이 같은 회()자로 바뀌어 회묘동(回墓洞), 회묘리(回墓里)로 하였다가 다시 회기리(回基里)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후일 회묘(懷墓)는 서삼릉(西三陵)으로 이장(移葬)되었다고 합니다. 회묘는 지금의 경희여자중고교 자리에 있다가, 1967년 경희대학교가 옮겨오면서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이장되었다 현재 천장산(天藏山)밑 회기동 109번지에는 1725(영조1)에 창건된연화사(蓮花寺)가 있으며, 연화사 옆으로경희대학교경희의료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휘경동 徽慶洞

    휘경동의 동이름은 조선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의 묘소 휘경원(徽慶園)이 있는 데에서 유래된다. 수빈 박씨는 판돈령부사 박준원(朴準源)의 셋째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자질과 언행이 특출하여 정조 11년 왕실의 후사를 잇기 위한 후궁 간택에 수위로 뽑혔다. 같은해, 2월에 입궁하여 가순당(嘉順堂)의 궁호를 받았다. 이어서 정조 146월에는 원자(후일의 순자)가 경복궁 집복헌에서 탄생하니 조정이 기뻐하였다. 정조 24년에는 원자가 세자에 책봉되고, 그 해 6월 왕이 승하하니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이 때 순조의 나이 겨우 11세이었다. 때문에 효의왕후가 수렴청정 하였지만, 생모인 수빈의 부조의 공이 또한 컸던 것이다. 수빈이 세상을 떠난 것은 1822(순조22)이었다. 왕은 양주군 배봉산 아래 휘경동 산 78번지를 묘역으로 정하고, 1823(순조23)227일을 택하여 장례식을 거행하였으며 묘소 이름을 휘경(徽慶)으로 하였던 것이다. 그 뒤로 왕은 세자를 데리고 자주 이곳 휘경원에 거동하니, 당시 한적한 마을이던 휘경원 일대는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이름도 휘경원 또는 휘경리로 불렀다. 땅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한 휘경동은, 처음에는 휘경원으로 부르다가 차츰 휘경리, 휘경동 등으로 고쳤다.

     

     

    이문동 里門洞

    조선시대 이곳에 오늘날의 방범초소 역할을 했던 이문(里門)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문이란 성문이나 일반가옥의 대문과 비교해 볼 수 있는 것으로, 큰 가로에서부터 마을로 들어오는 골목길 또는 큰길로 이어지는 작은 길 어귀에 마을문으로 설치된 것이다. 이문의 기원은 고대에 자연발생적으로 생겼던 것이나 조선시대의 이문은 국가적 방범시책으로서 세조년간에 처음 한성에 설치함과 동시에 전국적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세조 11(1465) 118일 임금이 한성부에 이문을 설치하라고 명령하였고, 3개월 후인 122월에 병조에서 보고하기를 " 경중의 이문에 숙직할 인원은 이문내의 사람으로 정했으며, 외방에도 이문을 설치했습니다. 경중의 이문내에 10호 이하는 매일밤 2, 20호 이하는 3, 30호 이하는 4, 30호 이상은 5인을 동원하여 교대로 순찰케 하고 순관과 병조에서 수시로 감독하며, 이문과 가까운 곳에 인접해 있는 경수소는 곧 폐지하고, 외방에서는 수령이 민가가 조밀한 곳을 택하여 이문을 설치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고 세조는 이를 허락하였다. 이와 같이 이문은 마을 규모에 따라 마을을 보호하게 위하여 순찰조를 운영하는 제도였으며, 마을의 도적을 방지하는 관청조직의 일선업무를 주민 스스로 행하는 자율방범 제도였다. , 관설의 치안제도가 아니라 순전히 주민들에 의해 설치되고 관리되었던 주민의 자치치안제였다. 도적을 방지하기 위한 방책으로 당시 시행하였던 제도는 밀고함을 설치하여 의금부의 낭청이나 도성사문을 지키는 오원이 매일 저녁 승정원에 보고케 하는 것 호패제도 부활 경수제도의 시행(경수소는 한성부 치안업무의 말단기관으로 이미 세종 이전에 설치되었다. 세조때 도성내에 87개소, 도성외에 19개소가 있었으며, 도성내의 모든 경수소에는 보병 2명이 부근 방리인 5명을 거느리고 활, , 창 등의 무기를 가지고 숙직하였다.) 등이었는데, 이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도적예방책이었으며 반면에 이문은 순수 민간운영의 치안제도였던 것이다. 한편 이문이 설치된지 불과 6년이 지나 숙직이 이루어지지 않고 무너지기도 하는 실정이 야기되었다. 성종의 노력으로 다시 운영되기도 하였으나 연산군을 거쳐 중종, 명종에 이르러서는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이 때는 이문을 창설한 후 약 100년이 경과된 시점으로 그 동안 이문은 한성부 민생치안을 담당하였으나 점차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숙직을 하지 않는 경향이 나타나는가 하면 이문이 노후하여 파괴되고 무너져서 존재가 없어지는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문은 임란후 대부분 소실됨으로써 그 본래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으며, 영조때 그 존재의 기록이 보일 뿐 순조, 헌종 때에는 그 존재를 감추기 시작했다. 즉 조선후기에는 이문의 운영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동대문구 이문동, 도봉구 쌍문동, 중구 쌍림동의 옛이름인 쌍리문동 등 이문에 관련된 지명이 남아 있어 후세에 이문의 존재를 전하고 있다. 현재 이문동 관내에는한국외국어대학교와 전철외대앞역」「신이문역이 있으며, 이문3동에는 한국철도공사 '수도권북부지사 이문차량사업소' 가 위치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