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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한성 그리고, 경성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草霧 2013. 11. 15. 16:07

 

 

 

한양, 한성 그리고, 경성

  

서울특별시 漢城 特別市

 

 

 

 

 

 

 

Seoul Special City (Sŏul T'ŭkpyŏlsi)

 

 

 

 

수도 서울의 관습 헌법론

한반도의 중부에 있는 대한민국의 최대 도시이자 수도이다.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백제의 수도였고, 1394년 조선의 수도가 된 이후로 대한민국 정부중앙청사 소재지가 되기까지 600년 이상 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동경 126°45'127°11', 북위 37°25'37°41’

도시의 중앙으로 한강이 흐르고, 북한산, 관악산, 도봉산, 불암산, 인능산 등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의 도시이다. 동쪽은 남양주시·구리시·하남시, 서쪽은 고양시·김포시·부천시, 남쪽은 성남시·과천시·안양시·광명시, 북쪽은 의정부시·양주시에 접해 있다.

 

 

 

 

 

"서울"의 어원

학계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수도(首都)를 뜻하는 신라 계통의 고유어였던 서라벌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이때 한자 가차 표기인 서라벌이 원래 어떤 의미 였을지에 대해서도 여러 학설이 존재한다. 삼국사기 등에서 서라벌을 금성(金城)으로도 표기했다는 것에 착안하여 "[]-[]"의 뜻이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신라(新羅)까지 포함하여 "[: , ]-[: , ]",'새로운 땅'이라는 뜻으로 새기는 견해도 있다.

 

고대-중세 한국어에서 서라벌을 정확히 어떻게 발음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확인된 바가 없으며, 그 발음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훈민정음의 창제 후 "셔블"이라는 표기가 등장하고 나서이다. 해방 이후 한국을 통치하던 미군정청의 문서에서, 서울특별시의 영문 공식 명칭은 "Seoul Independent City"였다. 직역하면 "서울독립시"이나, 독립시라는 표현이 어색하다는 한국적 관점에 따라 "특별시"(special city)로 번역한 것이 굳어져 현재 공식명칭(the Seoul Special City)에 이르고 있다.

    

 

 

 

서울이라는 명칭은 삼국사기·삼국유사등의 기록에 보이는 서벌(徐伐서나벌(徐那伐서라벌(徐羅伐서야벌(徐耶伐) 등에서 비롯되어 변천된 것으로, 이러한 칭호는 신라 초기 도읍지의 지명인 동시에 국명이기도 하였다. 삼국지등 중국 사서에 보이는 사로(斯盧사라(斯羅신로(新盧) 등의 국명도 서울과 같은 음훈(音訓)으로, 서벌·서라벌 등의 다른 표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백제의 도읍을 소부리所夫里라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서울의 본래의 뜻에 관해서는 몇 가지 이설(異說)이 있지만, (서나(徐那서라(徐羅)는 높고신령(神靈)하다는 우리말 수리’·‘’·‘의 음사(音寫)이고, ()은 들판을 의미하는 우리말 의 음사이다. 따라서 서울’, 즉 서벌·서나벌·서라벌은 상읍(上邑) 또는 수도(首都)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Seoul, 漢城, 首尔, ソウル 소우루

서울의 로마자표기 ‘Seoul’19세기 프랑스 선교사들이 서울을 ‘Sé-oul -로 표기한 데서 비롯되었다. 오늘날 프랑스에서는 서울을 ‘Séoul’로 표기하고, 스페인어권에서는 ‘Seúl’로 쓰나 모두 '쎄울'로 읽는다. 대표적인 예로 1981930일 독일 바덴바덴에서 스페인 출신 IOC 사마란치 위원장이 제24회 올림픽 개최지 선정발표때 '쎄울' 이라고 외친 바 있다. , 영미권에서는 일반적으로 ‘Seoul’로 쓰고 영혼을 뜻하는 단어 ‘Soul’와 같은 '쏘울'로 읽는다. 서울시에서는 이러한 점을 착안하여 20061113일 서울시의 서브슬로건(Sub slogan)Soul of Asia로 지정하였다.

 

서울은 한자어가 아닌 고유어 지명이기 때문에 중국을 비롯한 한자 문화권에서는 오랫동안 서울을 조선시대의 명칭이었던 한성(汉城, 漢城, Hànchéng 한청)으로 써왔다. 최근(20051)에는 서울시가 서울과 발음이 유사한 首尔 (首爾, Shǒuěr 서우얼)’을 서울의 공식적인 중국어 표기로 정하면서 점차 이표기가 확산되어 가는 추세이다. 일본어 표기는 ソウル 소우루로 많이 쓴다.

 

 

한성(漢城), 경성(京城), 徐蔚(서울), 수선(首善)

조선시대에는 서울을 한성(漢城) 이외에도 경부(京府), 경성(京城), 경도(京都), 경사(京師) 등으로 쓰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며, 김정호의 수선전도에서 알 수 있듯 수선(首善)으로 표기한 예도 있다. 그 밖의 표기 중에는 서울의 한자 음차 표기로서 박제가가 북학의에서 썼던 '徐蔚(서울)'이 있다.

 

이는 모두 수도를 뜻하는 일반명사들로서 '서울'이 원래는 서울 지역(사대문 안과 강북의 성저십리)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 수도를 뜻하는 일반명사였다는 방증이다. 국어사전에서는 일반명사 '서울''한 나라의 중앙 정부가 있고, 경제, 문화, 정치 등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도시'라고 정의하고 있다. 1910101일에 일제가 한성부를 경성부(京城府)로 개칭하면서 일제강점기에 서울은 주로 경성(京城)으로 불렸으며, 1945년 광복 후에는 '경성'이란 말은 도태되고 거의 '서울'로 부르게 되었다.

 

  

 

기원전 3~4천년, 암사동선사주거지

중랑천변의 면목동, 강동구 암사동, 송파구 가락동, 강남구 역삼동과 성동구 응봉 등지에서 구석기 유물, 신석기시대의 유적으로 암사동선사주거지, 미사리유적과 함께 주목을 끈다. 암사동 유적은 한강유역의 신석기문화를 대표하는 것으로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유적이다. 이 청동기문화는 무문토기(민토기)와 함께 전개되었다. 역삼동 움집터(매봉터널 위), 가락동 움집터, 가락동 4·5호 움집터, 응봉유적, 아차산 유적 등이 있다. 그리고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묘제(墓制)로 고인돌(支石墓)과 석관묘(石棺墓)로 정릉동·양재동·개포동·원지동·고척동 등지에 개석식 고인돌이 흩어져 있었다. 한편 미사리·신매리 움집터 등의 10여개의 유적이 있다.

 

 

 

 

위례성(慰禮城)과 풍납토성, 아차산성 그리고, 남평양, 한산주

삼한시대 마한에 속하였다. 삼국시대에는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하북 위례성을 중심으로 백제의 수도였다. 한강 유역은 삼국의 주도권 쟁탈이 치열했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점령한 후 고구려 영토가 되어 북한산주를 설치하고, 위례성을 남평양이라고 하였다. 551년 백제는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물리치고 한강 하류지역을 되찾았다. 그러나 553년 백제의 도읍지였던 서울을 신라가 차지하자 나제동맹이 깨어져서 전쟁이 발발하고, 신라 진흥왕이 점령하여 남천주라고 개칭하였다. 통일신라시대 687년 한산주에 편입되었고, 757년 한양군으로 개칭되었다.

 

서기전 18년 온조가 도읍(都邑)한 위례성(慰禮城)이나 한성(漢城) 등에 대해서는 서울·광주(廣州직산(稷山)에 위치했을 것이라는 각각의 의견들이 있다. 그런데 이 위례성은 기록을 통해 볼 때 하북위례성과 하남위례성으로 구분되는데, 하북위례성은 북한산 동쪽 기슭으로 미아리·수유리 일대로 보는 견해와 세검정·평창동 일대로 보는 견해가 있고, 하남위례성은 한강 남쪽 지금의 경기도 하남시 춘궁리 일대 속칭 '고골'이나 '교촌(校村)'으로 비정하기도 하며, 서울특별시 송파구 및 강동구 일대를 주목하기도 한다.

 

송파구 일대의 석촌동 적석총(積石塚) 발굴, 풍납리토성의 발굴, 그리고 양평군 문호리·양수리, 남양주군 금남리 적석총 유적 발굴을 통하여 고구려 유이민 집단이 백제국을 건설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특히 2002년 이후 풍납리토성의 발굴 성과에 따라 하남위례성의 위치를 이곳에 비정하기도 한다. 물론 구체적으로 도성의 위치가 정확히 어느 곳인가는 현재까지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지만, 오늘날의 서울 인근지방이었던 것이라는 주장에는 이의가 없다. 이러한 도읍지로서의 서울 지역은 삼국의 각축장(角逐場)이 되어 백제가 패배하여 웅주(熊州)로 도읍을 옮김으로써, 점차 도읍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396년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백제를 침공하여 한강 이북 58() 700()을 취하여 백제 아신왕을 굴복시켰으며, 뒤이어 장수왕은 475년에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백제 수도인 한성을 점령하고 개로왕을 전사(戰死)시켰다. 이에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은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긴다. 그 후 동성왕 21(499) 가뭄에 따른 기근으로 한산(漢山) 백성 2천여 명이 고구려에 망명하니, 이 지역의 공동화(空洞化) 현상이 빚어졌다 하겠다.

 

그리고 한강유역 한성을 차지한 고구려는 77년간 이곳을 통치하면서 전방(前方) 전초기지(前哨基地)로서 북한산군(北漢山郡) 소속의 남평양(南平壤)을 설치하였다. 이로써 이곳은 통치주체가 바뀜에 따라 도성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전방 군사기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나제(羅濟)연합군이 결성되어 한강유역을 회복하고자 하는 전쟁이 계속되고, 급기야 신라 진흥왕이 백제가 수복한 한강 하류지역을 차지함으로써, 옛 한성지역은 도읍지로서의 지위를 찾지 못하고 신라의 서북 변방지역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이어 신라는 진흥왕에 의해 553년 이곳에 군사적 개척지로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557년에는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하였다. 이어 남천주(南川州), 다시 북한산주 등을 설치하였는데, 이들 주()의 치소(治所)는 이천(利川광주(廣州) 등으로 백제의 한성 보다 남쪽에 위치하였다.

 

이렇듯 삼국시대에 서울 지역을 중심한 한강 하류유역은 이 지역의 경략(經略) 여부에 따라 각국의 흥망성쇠가 결정되었다는 필연성을 가짐으로써 역사적 중요성을 갖는다. 우선 정치·군사적인 면에서 백제 초기의 도읍지였다는 점 이외에 삼국간의 군사적 쟁패지(爭覇地) 또는 삼국 통일의 완수를 위한 당나라 군사 축출의 최후 거점이었다는데 커다란 의미가 있다.

 

또한 문화적인 면에서도 남북 문화권의 경계지로서, 그리고 중국 문화와의 접촉지로서 새로운 문화 개발의 전초지(前哨地)로서의 역사적 의미가 크다. 이러한 삼국의 각축 과정에서 한강유역의 서울 지방은 거의 피폐된 듯하며, 풍납리토성·몽촌토성·방이동백제고분군·석촌동초기백제적석총·아차산성·사당동 백제요지(百濟窯址) 등의 일부 유적이 남아 있다. 고구려와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관련하여 아차산성의 고구려 보루산성 구조와 출토된 토기가 남아 있고,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장의사지 당간지주와 장한성·호암산성 등 한강변 산성 체제를 볼 수 있다.

 

그 후 685년 신라 신문왕이 통일된 국가를 9() 5소경(小京)으로 나누어 정하고, 서울지방을 포함한 주를 한산주(漢山州)라 하고, 그 치소를 광주(廣州)에 둠으로써 민정(民政) 조직을 갖추었는데, 그 이전에는 군사적 성격이 짙은 전략기지로 기능하였던 것을 짐작케 한다. 이후 한산주는 757(경덕왕 7)한주(漢州)로 고쳐지고, 지금의 서울 지방에는 한양군(漢陽郡)을 설치하는 등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였으며, 한양군의 영현(領縣)으로 황양현(荒讓縣, 豊壤)과 우왕현(遇王縣, 幸州)이 있어 이를 관할하였다. 이로써 서울 지방은 도읍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지만, 지방 군현의 하나로 지방관이 관할하는 지방 행정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라 말기에 들어 이곳은 822(헌덕왕 14) 웅천주도독(熊川州都督)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의 세력권에 편입되기도 하였으며, 825년에는 김헌창의 아들 범문이 또한 반란을 일으켜 이 지방을 도읍지로 정하고자 하여 북한산주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후삼국시대가 전개되자 신라 통치영역에 있던 서울 지방은 태봉(泰封)의 궁예가 왕건으로 하여금 양주·견주(見州) 등을 공략하게 함으로써 이곳은 궁예의 세력권에 편제되었다. 후백제의 견훤이 나주(羅州)를 통하여 왕건에게 귀부(歸附)하자 그를 상부(尙父)로 모시고 양주(楊州)를 식읍(食邑)으로 주고 있는데, 이는 양주가 태조 왕건 정권의 직할지(直轄地)였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된다. 반면에 서울 인근 광주(廣州), 금주(衿州), 파주(坡州), 이천(利川), 공암(孔巖) 등에는 호족의 성격을 띤 지방세력들이 웅거하였다.

 

 

양주(楊州), 남경(南京), 한양

고려시대 918년 양주로 불렸고, 1067(고려 문종21) 남경(南京)으로 승격되었다. 1308년 남경을 한양부로 개편하였고, 1356(공민왕 5) 한양부를 남경으로 개칭하였다.

 

고려시대 서울 지방은 국초에는 양주(楊州), 문종 이후 충렬왕 때까지는 남경(南京), 충선왕 이후 고려 말까지는 한양이라 불리었다. 양주지방이 중앙정부에 의해 직접적인 지방통치체제로 편제된 것은 983(성종 2)으로 전국에 12()을 설치하고 지방관(地方官)을 파견함에서 비롯되었다. 이어 경종 때 전시과를 실시하면서 양주를 비롯한 전시과 대상지역을 선정함으로써 지방관을 파견할 수 있는 배경을 마련하였다. 한편 1067(문종 21) 양주에 서경(西京) 동경(東京)과 더불어 삼경(三京)의 하나인 남경(南京)이 설치되었다. 그 설치 동기는 정치 경제 군사적인 중요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그보다 지리도참사상(地理圖讖思想)에 근원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지방행정상 한강의 북부지방은 남경이, 남부지방은 광주목(廣州牧)이 관할하였다.

 

그러나 도참사상에 따른 길조(吉兆)가 나타나지 않자 남경은 곧 폐지되었다가 숙종 때 다시 재건되고 궁궐이 신축되었다. 1101(숙종 6) 9월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이 설치되고 남경의 궁궐 후보지를 물색하게 하였는데, 이 때 보고된 곳은 지금 서울 동대문 밖의 노원(蘆原), 도봉산 아래의 해촌(海村) 방면, 한강 연안의 용산 방면, 면악(面岳) 남쪽인 지금의 경복궁 부근이었으며, 그중 면악 남쪽이 우선으로 지목되었다. 이렇게 숙종 때 재건된 남경은 충렬왕 말기까지 약 2세기간 지속되었다. 즉 숙종에 이어 예종·인종·의종의 계속적인 남경 행차가 있었으며, 고종 때 강도(江都)로 피난 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의(御衣)를 남경 가궐(假闕)에 안치시키기도 하였다.

 

1308(충렬왕 34) 즉위한 충선왕은 중앙과 지방의 관계를 개편하였는데, 이때 남경을 한양부(漢陽府)로 개편하면서 삼경제는 폐지되었다. 이때 한양부는 고양(高陽양주·포천(抱川) 등 현재의 한강 이북 서울 지방과 그 주변 일대만 관할하였으며, 왕의 순주(巡駐)와 어의 안치 등은 사라지고 개경(開京)과 가깝기 때문에 국왕의 유행(遊幸)과 사냥터가 되었다. 그 예로 충숙왕은 1317(충숙왕 4)에 한양에 가서 사냥하고, 1325(충숙왕 12)에는 조국공주(曹國公主)와 더불어 유행하여 용산행궁(龍山行宮)에서 용산원자(龍山元子)를 낳았다. 이렇듯 한양부는 남경 때의 국가 기업(基業) 융성을 위한 순행처(巡幸處)가 아니라 단순 휴양지로 변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 말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대두되면서 한양부는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이는 공민왕의 배원(排元)정책에 따른 관제(官制)의 환원으로서의 남경의 부활과 남경 천도(遷都)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물론 남경으로 환원은 치폐(置廢)를 거듭하고, 남경 천도는 당시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지만, 한강 유역의 서울 지방의 중요성이 다시 확인된 것이라 하겠다. 나아가 우왕 9년의 한양 천도 5개월, 1390(공양왕 2)의 한양천도 5개월 등 실질적인 한양 천도는 조선왕조와 연계시켜 볼 때, 이미 풍수지리적으로나 군사 사회경제적으로 그 중요성이 더욱 두드러지는 점이라 하겠다.

 

오늘날 살펴 볼 수 있는 고려시대의 문화유적으로는 북한산 승가사의 마애불과 승가사석조승가대사상, 문수사, 삼천사지 마애불, 진관사(신혈사 유적), 중흥사지, 태고사 원증국사탑과 탑비 등을 볼 수 있다. 또 유지(遺址)로 고려 남경 궁궐지, 한양부 향교(鄕校)와 성황당터 등이 있다. 교통시설로 영서역·노원역·청파역의 역참(驛站)과 사평나루가 있으며, 정자로는 용산호(龍山湖)의 추흥정과 반송정이 있었으며, 강감찬의 낙성대가 복원되어 있고, 그 삼층석탑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한종유의 저자도(楮子島) 풍류(風流)가 전한다.

 

 

한성부 (漢城府)

조선 태조가 1392년 개경에서 조선을 건국하고, 139410월 한양으로 천도했다. 1395년에는 한성부로 개칭하고 5() 52()의 행정 구역을 확정했다. 한성부의 지리적 범위는 사대문 안 도성과 도성 밖 10(4km)까지의 성저십리(城底十里)로 구성되었다. 1398년 숭례문을 완공하였고, 1404년 경복궁을 준공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때 5부제를 5서제(署制)로 고치고 47288775동이 되었다. 대한제국시대 1897년 최초로 가로등이 설치되었고, 1899년 서대문~청량리 단선전차를 개통하였다. 1900년 한강 가교가 준공되었다. 1902년 한성전화소는 서울시내전화교환업무를 시작하였다. 1908년 전차선로 가설을 위해 성곽을 철거하였다.

 

1394년 태조 이성계는 한양으로 천도하여 한양은 500년간 조선왕조의 도읍지가 되었다. 이듬해 한양부를 한성부(漢城府)로 개칭하고, 한성부를 552방으로 구획하였으며 점차 도시시설을 마련하여 수도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한양 천도의 배경으로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의 영향과 신왕조 창건 과정에서의 고려 왕실과 구 귀족세력의 저항으로부터의 탈피를 들고 있으며, 나아가 한강을 끼고 있는 한양의 인문지리적 위치와 풍수지리적 위치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서울 지역은 산과 하천의 배치가 풍수지리적으로 길지(吉地)에 해당하며 우리나라 전체로 볼 때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또 수륙교통이 편리하며 군사적 방어에도 유리하여 조선시대 서울로 정해진 이래 일국의 수도로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즉 서울의 산수를 보면 진산(鎭山, 祖山)인 북한산에서 주산(主山)인 북악산(백악)에 연결되며, 응봉과 낙산이 좌청룡(左靑龍)을 이루고, 인왕산이 우백호(右白虎)가 되며, 목멱산은 안산(案山)에 해당된다. 그리고 그 중앙에 내수(內水)인 청계천이 흘러 한천(漢川: 중랑천)과 합류되어 외수(外水)인 한강에 유입된다. 이렇게 하천이 분지를 빠져 나가는 수가(水口)가 산에 둘러싸여 밖에서 볼 수 없는 형국을 풍수에서 이상적인 산수의 배치로 보고 있다. 이러한 명당자리에 조선왕조의 궁궐·종묘·사직단·관아·문묘 등 국가를 상징하는 주요 건물들이 건설되었던 것이다.

 

 

 

 

특히 세종 때는 한성의 주산이 창덕궁의 뒷산인 북산 즉 응봉이어야 하며, 따라서 정궁의 명당자리는 창덕궁 자리보다 약간 서쪽인 향교동(鄕校洞)으로 뻗은 산줄기에 딸린 승문원 자리라는 풍수지리설이 대두되어, 향교동 일대가 주목되기도 하였다. 아울러 조선시대 서울은 조운(漕運)이 통하고 도로가 균등하며, 배와 수레교통이 좋아 주민들의 생활이 편하여 도읍으로서의 좋은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동남쪽을 제외하면 모두 좁은 고개를 통해야만 들어올 수 있어 군사적 방어에도 유리한 곳이었다.

 

한양 정도(定都) 당시 수도의 도시 구상은 자연지리 및 풍수지리 조건에 따른 성터城基와 성문(城門)의 결정, 그리고 궁궐·종묘·사직단·문묘·관아·시전 등 주요 시설의 입지와 수계(水系)를 이용한 도로망의 결정으로 규정되었다. 성곽(城郭)의 위치는 도읍지 선정 때부터 고려된 것으로 풍수지리상의 주산인 백악을 현무(玄武), 안산인 목멱산을 주작(朱雀)으로, 서산인 인왕산을 백호(白虎), 동산인 낙타산을 청룡(靑龍)으로 한 내사산을 연결하는 약 18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성문의 위치는 방위와 자연지세 풍수지리 도로와의 연결을 고려하여 8방위 원칙에 따랐다.

 

그리고 궁궐·종묘·사직·문묘·시전 등 중요 시설의 입지는 풍수지리설에 의한 명당혈처(明堂穴處)주례(周禮)동관(冬官) 고공기(考工記)의 관례인 전조후시(前朝後市)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에 따랐다. 주산인 백악을 배산(背山)으로 주 궁궐인 경복궁을 북쪽에 입지시키고, 좌묘우사의 원칙에 따라 경복궁 좌측의 부주산(副主山)인 응봉을 배경으로 한 산줄기 흐름의 남단에 종묘 터를 잡고, 우측의 인왕산 동남쪽 산줄기 끝에 동쪽에 사단(社壇), 서쪽에 직단(稷壇)의 사직단을 건립하였다.

 

또 응봉 동쪽 기슭에 문묘와 성균관의 터를 잡았다. 또 전조후시의 원칙에 따라 경복궁 광화문 앞 도로 양측에 의정부·육조·한성부·기로소·사헌부 등 정부 관아를 배치하였고, 정도 후 경복궁 후문인 신무문(神武門) 밖에 일시 장시(場市)를 개설하여 왕실과 관아 및 도성 주민에게 일용품을 공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무문 밖의 장시는 신도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태종 때에 이르러 종로 간선도로에 시전(市廛) 터를 잡아서 도시의 활동 축을 삼았다. 그리고 경복궁의 좌우와 종로 남쪽에 주민들의 주거지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한양도성 내의 물줄기는 도시의 골격 형성, 즉 도로망 구성과 중요 시설의 입지 선정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동시에 5부제(五部制) 행정구역과도 관련된다.

 

즉 경복궁과 중앙관아의 연결을 위한 상징가로축으로 황토현(黃土峴, 광화문사거리)에서 광화문까지의 대로(大路)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청계천이 동서로 흐르기 때문에 청계천 북쪽으로 이와 나란히 황토현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흥인문(興仁門)까지, 서쪽으로 돈의문(敦義門)까지 연결하는 동서관통로(종로)를 설정하였다. 이는 도성의 반을 가르는 횡선이 되었고, 시전을 중심으로 한 도시의 활동축을 동서로 설정하였다. 그리고 도성의 정문인 숭례문(崇禮門)에서 대광통교(大廣通橋 : 雲從街)까지 대로를 연결하여 주 진입로를 설정하였다. 이상의 네 축을 골격으로 나머지 성문과 주요 도시시설과의 연결 및 5부제의 행정구역 경계를 따라 중로(中路)와 소로(小路)를 설정하였다. 한 예로 중부의 구역은 육조거리와 청계천, 그리고 이현(梨峴)을 거쳐 창덕궁 돈화문으로 빠지는 거리와 경복궁에서 종묘까지의 거리 안으로 하였다.

 

이러한 도시시설이 갖추어지기 전 천도 당시 한양에는 옛 남경의 시설이 거의 없었다. 왕실과 정부 일행이 13941028일한양에 도착하여서는 고려시대 한양부의 객사(客舍)에 임시 왕궁을 정하고, 관아(官衙)와 관리 역시 민호(民戶)를 점유하여 임시 거처하는 형편이었다. 이렇게 볼 때 한양 천도 당시에는 이미 고려 숙종 9(1104)에 개창된 남경 이궁(離宮)의 연흥전(延興殿)이나 한양부 관아 등의 건물은 이미 붕괴되었거나 쇠락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새 도읍의 새 궁궐지는 고려 숙종 때 남경 이궁인 연흥전 등 옛 궁전이 있던 곳을 피하여, 그 바로 남쪽에 해산(亥山, 서북악인 白嶽)을 주산으로 하여 임좌병향(壬坐丙向: 북좌남향)으로 정하니, '국면이 평탄하고 넓으며 전방의 산이 모두 앞에서 조회(朝會)하여 읍()하는 것과 같았다'는 기록을 볼 때, 새 도읍지의 궁궐은 고려시대의 남경 궁궐터와 관련하여 조금 넓은 곳을 찾아 앞으로 나와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한성부의 청사는 한양 천도 후 경복궁과 각 관아와 함께 육조거리에 건축되었는데, 그 위치는 의정부(議政府)와 이조(吏曹)의 남쪽이며, 호조(戶曹)의 북쪽인 중부(中部) 징청방(澄淸坊)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고려 후기 한양부의 성황당이 있었던 곳으로, 처음 건축할 때 성황당을 다른 곳으로 옮겼는데, 태종 6(1406) 6월에 예조(禮曹)의 계청으로 전에 있던 부근에 다시 성황당을 봉사(奉祠)하였다. 여기서 성황당은 해당 고을과 관아의 수호신으로 관아 안에 혹은 산성 가까이에 위치하여 봉사하는 곳이었으므로, 조선왕조의 수부(首府)인 한성부도 고려의 한양부가 있던 자리에 위치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고려 한양부의 지방교육기관이었던 향교가 한성부 중부 경행방(慶幸坊)의 교동(校洞, 향교동) 즉 오늘날의 종로구 경운동 일대에 위치하였었는데, 그 동쪽에 창덕궁과 종묘가 자리 잡고, 그 외 외교문서를 관장하던 승문원(承文院)과 대학인 성균관(成均館) 및 문묘(文廟) 등 문한(文翰)과 교육기관이 위치하게 된다. 따라서 조선왕조의 한양 천도는 바로 궁궐 지방관아 교육기관 등에 있어서 고려 중기 남경의 전통과 후기의 한양부 전통을 이어서 확장한 규모의 도읍으로 건설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오늘날 서울에 전하는 조선시대의 문화유적은 위에서 열거한 한성부의 도시 시설이 대부분을 이룬다. 이는 정치·경제·사회·문화·대외관계의 중심시설로서 도성 내외에 기능별로 분포되어 있다. 즉 도성과 성곽 내의 5대 궁궐 및 종묘·사직단·문묘·육조거리의 관아 시설과 목멱신사·백악신사·원구단 등의 구성은 조선의 통치이념과 정치행위 및 시행기관으로 기능하였다. 또 시전(市廛)을 형성하여 경제 유통을 관장하게 하고, 도성의 관방과 치안을 위한 군영(軍營)이 설치되었고, 외교관계 시설인 태평관·북평관·동평관 등이 자리 잡았다. 그리고 팔도로 뻗어나가는 교통·통신시설 및 군량미와 관리들의 녹봉(祿俸)을 지급하던 각종 창고, 왕족의 원찰(願刹), 사대부들의 거주공간과 사당 및 정자 등 풍류생활 터 등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15세기 초 세종 10(1428)의 한성부 도성 안의 인구는 103328(1428)이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왕실 및 양반관료와 그 가족들, 군역에 복무하는 군인들, 각종 관청에 사역되는 관노비와 사노비, 공장·상인들이었다. 그리고 성저십리 지역은 대부분 농경지역이였다. 따라서 당시 한성부는 정치·행정중심의 소비도시로서의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건국 이후 2세기 동안 조선왕조는 태평성대의 영화를 누리다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그리고 뒤이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전국이 심한 병화의 재난을 입게 되었다. 특히 임진왜란으로 수도 한성부의 피해가 막대해 경복궁·창덕궁·창경궁·종묘·문묘 등 개국 이후 건설된 수도의 모든 시설이 거의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 이후 광해군 연간의 대규모 중건공사로 도읍지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그러나 1624(인조 2) 이괄(李适)의 난과 정묘·병자호란으로 한성부는 청군(淸軍)의 약탈·방화 등으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상황을 겪어야만 했다.

 

조선왕조는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조선왕조는 외침의 시련을 극복하고 새로운 도약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대동법 실시, 균역법 시행(1750), 공장안(工匠案)의 폐지 등 일련의 사회·경제 개혁을 통하여 정치·행정도시에서 상공업도시로 발전을 꾀하였다. 성안에는 종루(鐘樓이현(梨峴칠패(七牌)3대 시전을 중심으로 상품 교역이 활발해졌다. 또한 경강상인(京江商人)의 활약은 상업자본의 형성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양상을 나타내었다. 즉 경강상인은 운수업과 상업활동을 활발하게 벌였으며, 그들은 자본의 축적을 통하여 18·19세기 자본주의 맹아(萌芽)를 잉태시킨 시대변혁의 주인공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주로 용산·마포·서강·동작·두모포·송파 등지를 중심무대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행사하던 운종가(雲從街) 일대의 육의전(六矣廛)을 비롯한 시전(市廛) 어용상인들과 대항하였으며, 1791년 신해통공(辛亥通共) 이후에 시전상인을 능가하여 서울의 상권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이러한 한성부의 도시적 성격 및 양상은 19세기 중엽 한성부의 인구 증가로 나타났으며, 대체로 조선 초기의 2배에 이르는 203,901(1835)으로 늘어난 것으로 기록에 보인다. 한편 19세기 초 외척정치가 진행되면서 그들의 본거지인 인왕산 아래 청운동 일대는 우대라 불리면서 권문세가들의 주거공간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한편 19세기 후기에 들어 서울은 흥선대원군의 등장과 더불어 내정개혁을 통한 왕권강화정책이 시행되어 경복궁이 복원되고, 운현궁을 중심으로 정치가 이루어졌다. 아울러 대외적으로는 서구열강의 제국주의 세력과 대응하며 국제질서에 편입되는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고종 초 천주교 박해를 구실로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楊花津)까지 올라왔고, 급기야 병인양요(丙寅洋擾)를 일으켰다. 1871년에는 통상을 요구하는 미국에 의해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났고, 1875년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이듬해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어 한강을 통해 제국주의 세력이 한양에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1890년경부터 용산 일대는 일본제국주의 세력이, 마포구 당인동 일대에 중국 세력이 진출하면서 처음에는 개시장(開市場)을 통한 경제침투가 시작되더니, 급기야 제국주의 침략이 시작되었다. 이 지역에는 개시장이 설치되고, 사람의 통행을 위해 1888년 한강에 증기선이 취항하였으며, 1900년대에는 전차와 철도가 놓이고, 한강에 철교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고종의 친정에 따라 개화정책이 추진되었으며 이후 임오군란, 갑신정변을 겪으면서 정치집단의 갈등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모색하였다.

 

이후 일제와 청나라의 간섭과 침탈과정에서 갑오개혁, 갑오농민운동, 을미사변, 아관파천을 겪고, 1897년 대한제국 선포와 경운궁 중건을 시작으로 광무개혁을 통해 부국강병을 꾀하였다. 그러나 일제를 선봉으로 제국주의 열강세력의 침탈과 이들에 의해 강요된 파행적인 교역·교통·산업 등의 변화는 결국 조선을 식민지로 전락하게 하였다. 이러한 형세와 병행해 새로운 근대적 시설인 철도·전차·전신·전화 등의 설비가 시작되고, 서양식 학교·병원이 설치되었으며, 수도(水道)의 급수가 개시되었다.

 

 

경성부 (京城府)

1910년 국권을 침탈한 일본 제국은 한성부를 경성부로 개칭하고 경기도에 예속시켜 지위를 격하시켰다. 1911년 경성부의 하부기관을 58면으로 구분하여 성 안은 동····중의 5부로, 성 밖은 용산·서강·숭신·두모·인창·은평·연희·한지의 8개면으로 구분하였다. 1914년 면() 제도를 폐지하고 부제(府制)를 실시하면서 용산·숭신·인창·한지·두모면의 일부를 경성부에 편입시키고, 명칭은 정()으로 바꾸었다. 1936년 고양군·시흥군·김포군의 일부 면들이 편입되어 행정구역이 확장되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도성의 성문이나 성벽일부를 훼손하고 신작로나 철로를 개설하는 등, 조선 개국 이후로 존재했던 서울의 역사성과 공간구조 및 이용성이 매우 심각하게 왜곡·훼손되었다. 1943년 구제를 실시하여, 중구·종로구·동대문구·성동구·서대문구·용산구·영등포구 7개 구로 나누었다.

 

1906년 일본의 통감부가 설치되고 1907년 군대해산에 이르자 이에 저항하여 의병전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1910년 일제 강점에 따라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어 한성부는 경성부(京城府)로 개칭되어 경기도 예하의 지방행정단위로 전락하였다. 경성부에는 총독부 이외에 조선군사령부(朝鮮軍司令部조선은행·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이 식민지 침탈기관이 설치되었고, 경인선(京仁線경부선(京釜線경의선(京義線경원선(京元線) 등의 철도망을 통하여 경제적 침탈과 군수품의 수송을 꾀하였다.

 

아울러 일제에 의해 영등포 지역이 공업화되면서 병참기지화(兵站基地化) 되었고, 점차 노량진 일대가 서울권에 편입되어 한강을 중심으로 한 강남지역이 새로운 도심권으로 등장하게 된다. 한편 내선일체를 내세운 동화정책(同化政策)의 일환으로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해 의학·상업·공업·광업 등의 각종 전문학교가 설립되었다. 태평양전쟁을 전후해서는 남산 중턱에 있는 조선신궁(朝鮮神宮) 등이 설치되어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창씨개명과 한글 사용 금지 등으로 민족문화를 말살하고자 하였다. 이때 한국인들은 주로 청계천 북쪽의 종로를 중심으로 한 북촌에 주로 살았고 일본인들은 대부분이 남산 북쪽 사면의 남촌과 용산에 주로 거주하였다. 특히 용산 지역은 조선군사령부 등 군사시설이 집결되어 있었다.

 

 

 

 

 

서울시 (漢城 特別市)

1945년 광복 후 서울에는 미군이 진주하여 군정을 시행하였다. 서울은 1946928일경기도의 관할에서 벗어나 도와 같은 수준의 서울시로 승격되고, 8개구를 관할하였으며, 과거의 일본식 지명과 행정구역을 한국식 이름으로 바꾸었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에 따라 수도의 지위를 재확인하였으며, 1949815일서울특별시로 승격되었으며 당시 서울 인구는 140만 명이었다. 서울은 19506월에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폐허화되었으나 1953년 휴전협정의 체결과 함께 수도로서의 기능을 되찾게 되었다.

 

그리고 1949년성북구의 설치와 1963년의 서울 시역(市域) 확대로 인하여 서울특별시는 명실공히 한강을 중심으로 한 강남·강북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한편 1962서울특별시 행정에 관한 특별조치법의 제정으로 서울특별시는 국무총리의 직속기구가 되었으며, 점차 중앙정부의 감독에서 벗어나 자치적인 도시정부로 발전되었다. 그리고 1991년 자치정부가 성립되었으며 아울러 1995년에는 25개 구청의 기초자치단체를 거느리게 되었다.

 

1970년대부터 한강개발이 추진되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시세(市勢)를 한강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균형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1970년대 들어 급증하는 도시 행정의 수요를 타개하기 위해 한강이남 지역을 집중적으로 개발하였다. 이어 1986년에 아시아경기대회가 개최되고, 1988년에는 한강변 잠실 지역에서 인류의 최대 축제인 올림픽이 개최되었고, 새로운 천년의 시작과 더불어 2002년에는 월드컵 축구경기대회를 열게 되어 세계인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 부각되고 있다. 한민족의 웅비하는 모습을 한강의 기적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한강을 끼고 있는 서울의 역사·지리적인 가치는 한민족의 역사 중심이자 상징인 것이다.

 

 

 

 

 

 

 

 

 

 

25개 자치구와 423개 행정동

1962년 서울특별시행정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어 국무총리 직속기구가 되었고, 시장의 행정적 지위도 장관급으로 격상되었다. 대한민국 국토의 0.6%에 불과하지만 대한민국 인구의 1/5 이상인 약 1050만 명이 살고 있어서 인구밀도가 매우 높다. 대한민국 지방자치단체 중 예산 규모가 가장 크다. 행정구역으로는 25개 구, 426개 동이 있다. 시청은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1가에 있다.

 

1973년 도봉구와 관악구, 1975년 강남구, 1977년 강서구, 1979년 은평구, 강동구, 1980년 동작구, 구로구, 1988년 중랑구, 노원구, 양천구, 서초구, 송파구, 1995년 강북구, 광진구, 금천구가 신설되었다.

 

 

종로구 · 중구 · 용산구 · 성동구 · 광진구 · 동대문구 · 중랑구 · 성북구 · 강북구 · 도봉구 · 노원구 · 은평구 · 서대문구 · 마포구 · 양천구 · 강서구 · 구로구 · 금천구 · 영등포구 · 동작구 · 관악구 · 서초구 · 강남구 · 송파구 · 강동구

 

 

 

 

 

 

 

 

 

 

국보 159, 보물 473, 사적 72, 천연기념물 12, 중요무형문화재 45, 중요민속자료 29, 서울특별시 지정 유형문화재 231, 기념물 25, 민속자료 29, 문화재자료 41, 무형문화재 37

 

구석기시대 유적은 면목동 유적

신석기시대의 유적으로 암사동선사주거지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 역삼동주거지, 명일·가락동유적, 원지·우면동 고인돌

백제·고구려·신라의 석촌동백제초기적석총, 방이동고분군과 성곽

고려시대의 불교유적

조선시대의 궁궐·도성·종묘·사직·왕릉

대한제국 이후 건립된 근대건축 유물

 

 

 

 

1. 건조물

경복궁, 경복궁 근정전·경회루·인정전·자경전·자경전십장생굴뚝·아미산굴뚝·근정문및행각·동십자각, 창덕궁(후원포함), 창덕궁 인정전·돈화문·인정문·선정전·희정당·대조전·구선원전, 창경궁, 창경궁 명정전·홍화문·명정전동회랑및명정문·옥천교·통명전, 덕수궁(경운궁), 덕수궁 중화전 및 중화문·함녕전, 경희궁지, 흥화문·숭정전, 우정총국, 종친부, 삼군부청헌당·총무당, 구미국공사관, 양천향교지 등

 

2. ··사 유적

종묘와 종묘 정전·영녕전, 서울문묘, 서울동묘, 서울사직단정문, 선잠단지, 서울사직단, 서울문묘일원, 육상궁, 원구단, 선농단, 지덕사부묘소, 청권사부묘소, 선희궁지

 

3. 성곽 유적

서울성곽, 서울숭례문, 서울흥인지문, 광주풍납리토성, 북한산성, 아찻한성, 몽촌토성, 한우물및주변산성지, 양천고성지, 홍지문과탕춘대성 등

 

4. 주거·누정

운현궁·용양봉저정·봉황각·석파정·이화장·침류각·세검정·안국동윤보선가 등

 

5. 기타 유적지·명승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 함춘원지, 사당동백제요지, 구서울구치소, 효창공원, 탑골공원, 성락원,양화나루·잠두봉유적, 낙성대, 정업원구기, 어정, 낙성대유지, 무악동봉수대지, 남산봉수대지, 아차산봉수대지, 수표, 독립문, 영은문주초,살곶이다리,수표교 등

 

6. 근대건축

구대한의원본관, 약현성당, 구러시아공사관, 구벨기에영사관, 용산신학교와 원효로성당, 정동교회, 명동성당, 연세대학교 스팀슨관·언더우드관·아펜젤러관, 구서울대학교본관, 구공업전습소본관, 한국은행본관, 중앙고등학교 본관·서관·동관, 서울역사, 고려대학교 본관·중앙도서관, 서울성공회성당, 천도교중앙대교당, 번사창, 중명전, 구제일은행본점, 뚝도수원지제1정수장, 경교장, 승동교회, 동아일보사옥, 구배재학당동관

 

7. 창덕궁과 종묘 일원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8. 전적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세계기록문화유산을 비롯하여 동국정운, 이태조호적원본, 비변사등록부의정부등록, 월인천강지곡, 월인석보, 제왕운기,대동여지도, 수선전도목판, 근사록, 백범일지

9. 회화작품

독서당계회도, 이길룡필남지기로회도, 호조낭관계회도, 정선필육상묘도, 이색영정, 목장지도, 흥선대원군영정 등

 

10. 서예작품

안중근의사유적 일체와 김정희유묵 예서대련, 봉은사 김정희서 판전현판

 

11. 도자기

청자사자유개향로, 백자철화포도문호, 분청사기인화문태호, 청화백자매조죽문호, 청자투각돈

 

12.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와 삼전도비, 한긃고비, 고종즉위사십년칭경기념비 등 각종 기념비와 신도비 및 암각글씨 등

 

13. 불교문화재

봉은사 선불당 등 사찰건물과 승가사석조승가대사상 등 불상, 조개사대웅전후불탱화 등 불화, 원각사지 십층석탑 등 불탑,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 등 부도, 대원각사비 등 탑비, 고달사지쌍사자석등 등 석등, 장의사지당간지주 등, 그 외 동종·사리유물·금고·향로·목각탱, 상지은니묘법연화경 등 150여종의 불경

 

14. 천연기념물

서울원효로의 백송, 서울재동의 백송, 서울수송동의 백송, 서울문묘의 은행나무, 한강의 황쏘가리, 창덕궁의 향나무, 서울용두동선농단의 향나무, 창덕궁의 다래나무, 삼청동의 등나무, 삼청동의 측백나무, 서울신림동의 굴참나무 등

 

15. 서울특별시지정보호수

잠실리뽕나무·화양동느티나무·손기정월계관수 등

 

16. 과학기기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 보루각자격루, 혼천시계, 금영측우기·복각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숭정구년명신법지평일구·신법지평일구·간평일구·혼개일구·대구선화당측우대창덕궁측우대·앙부일구·창덕궁풍기대·경복궁풍기대·창경궁관천대·관상감관천대 등

 

 

 

 

 

 

 

초등학교 572개교, 중학교 368개교, 고등학교 297개교, 특수학교 17개교, 전문대학 10개교, 교육대학 1개교, 대학교 38개교, 대학원 354개교, 임업연구원·한국과학기술원·산업연구원 등 각종 연구기관 및 단체

 

 

 

 

1. 성균관(成均館)

성균관은 고구려의 태학(太學), 통일신라시대의 국학(國學)의 전통을 이어 고려시대에 국자감(國子監성균감(成均監) 등으로 불리다가 고려 말 성균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조선왕조가 이를 계승하였다. 1394(태조 3) 10월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개성 자하동에 있던 성균관을 한양 숭교방(崇敎坊 : 지금의 성균관대학교 구내)으로 옮겼다. 성균관에는 유학을 강의하는 명륜당(明倫堂), 공자를 모신 문묘(文廟), 유생들이 거처하는 동재(東齋서재(西齋), 도서관인 존경각(尊經閣) 등이 있었다.

 

성균관 유생들에게는 상당한 정도의 자유가 보장되었는데, 이를테면 국가정책에 실정이 있거나 명륜풍교(明倫風敎)에 해가 될 만한 일이 있다고 생각될 때는 유소(儒疏)로써 탄핵도 하였다. 만일 이 유소에 대해 국가가 보복을 하면 학교 식당에 들어가지 않는 권당(捲堂), 기숙사에서 모두 나가는 공재(空齋), 성균관을 나와 버리는 공관(空館) 등을 단행해 대항했는데, 이는 현대의 동맹휴학과도 같은 것이다.

 

성균관은 서울에만 있는 유일한 중앙국립대학으로서, 유교이념에 입각한 학술 연마에 의한 지도적 인재를 배출해 한국문예의 총본산으로서 사명을 다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경학원(經學院)이라 불렀고, 명륜당과 부속건물에 명륜전문학교를 세웠는데 광복 후 이것이 성균관대학교로 발전하였다.

 

2. 4부학당(四部學堂)

고려시대의 교육제도를 답습한 것으로, 중학(中學동학(東學서학(西學남학(南學)을 말한다. 중학은 중학동 한국일보 자리에, 동학은 종로6가 이화여자대학교부속병원 자리에, 서학은 태평로1가 조선일보사 뒤쪽에, 남학은 필동 극동빌딩 자리에 있었다. 4부학당에는 문묘가 설치되지 않았으며, 문묘에 대한 행사는 성균관의 문묘를 이용하였다. 학생 정원은 각 학당에 100명씩 총 400명이었는데, 이는 당시 서울 전체의 학령인구를 고려할 때 교육기회가 극히 적었음을 의미한다. 더구나 학생들이 입학해 공부하는 숫자가 정원보다 적었다는 기록이 자주 보이는 것은 4부학당 교육의 부진성을 말해 준다.

 

4부학당은 독립된 교육기관이라기보다는 성균관에 예속된 부속학교의 성격을 띤 것으로 성균관 관원이 교관으로 파견되었고, 학당의 잡무를 처리하는 서리는 물론 노비까지도 모두 성균관의 서리와 노비로 충당되었다. 기숙사인 재사(齋舍)가 마련되었고, 학비는 모두 관급(官給)으로 면학 분위기가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학당이 불타 그 뒤 다시 건물을 세웠으나, 학생수가 격감해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그러다가 조선 말에 외국인 선교사들이 사학(私學)을 세울 때 배재학당(培材學堂이화학당(梨花學堂) 등 그 이름을 따서 붙였다.

 

3. 잡학(雜學)

잡학은 지금의 실업교육기관으로, 기술교육은 국가의 필요에 따라 인원을 뽑아 중앙의 소관 아문(衙門)에서 전문적으로 교육시켰다. 또 의학은 전의감(典醫監혜민서(惠民署)에서, 천문학·풍수지리·명과학(命課學)은 관상감(觀象監)에서, 산학(算學)은 호조에서, 율학(律學)은 형조에서, 화학(畵學)은 도화서(圖怜署)에서, 도학(道學)은 소격서(昭格署)에서 교육하였다.

 

4. 근대교육기관

19세기 중엽 1885(고종 22)에 한국 근대학교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광혜원(廣惠院 :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전신)과 배재학당이, 1886년에 이화학당 등이 선교사에 의해 설립되었다. 한편, 정부에서도 근대적인 관학으로 1883년 동문학(同文學), 1886년 육영공원(育英公院)을 설립. 18953월 교육입국조서(敎育立國詔書), 1895년 한성사범학교·외국어학교·법관양성소, 1899년 경성의학교, 1900년 한성중학교(지금의 경기고등학교), 1904년 농상공학교(農商工學校) 또한 1895년 민영환(閔泳煥)의 흥화학교(興化學校), 한성의숙(漢城義塾), 1896년 민영기(閔泳綺)의 중교의숙(中橋義塾) 등을 세웠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에는 사학의 설립이 곧 교육구국운동이라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1923329일 서울 기독교중앙청년회(YMCA) 회관에서 조선민립대학기성회발기총회가 열렸지만 민립대학의 설치는 일제에 의해 무산, 19245월 국립대학으로서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었다. 경성제국대학은 광복 후 서울대학교로 발전하였다.

 

 

 

 

 

 

송파산대(松坡山臺) 놀이 · 답교(踏橋) 놀이 · 연등 놀이

 

 

 

 

1. 송파산대(松坡山臺) 놀이

조선 후기 송파진(松坡津 : 지금의 잠실 석촌호수)에서 발생한 탈놀음으로 정월대보름·단오·칠월백중·추석 등의 명절에 거행되었다. 송파진은 당시 많은 객주(客主)가 자리 잡고 있어 상인들의 내왕이 빈번했던 한강 주변의 이름 높은 향시가 발달했던 곳으로, 풍성하고 다양한 교역에 따른 사회적·경제적 여력을 바탕으로 이러한 놀이가 성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송파산대놀이는 개화기 무렵 한때 퇴조되기도 했지만, 1900년 초 구파발본산대의 연희자 윤희중(尹熙重)에 의해 재연되었고, 그 뒤 연중행사로 정월보름·단오·추석에 연희를 했으며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이 놀이는 탈춤 열두 마당이 그대로 전승되고 있고, 가면수도 32개로 산대도감탈들이 거의 보존되어 있으며, 춤사위도 40여 종으로 세분화되어 있어 매우 중요한 탈춤 자료가 된다. 내용에서는 거만하게 거드름을 피우며 추는 거드름춤을 비롯해 앉았다 뛰어오르는 깨끼춤 등 일반 무용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춤의 내용이나 대화의 내용에서는 한 시대의 사회상을 풍자적이고 해학적으로 엮어 가고 있다. 1973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99호로 지정되었다.

 

2. 답교(踏橋) 놀이 (송파답교놀이, 몽촌답교놀이)

매년 정월대보름을 전후해 거리에 나가서 다리를 밟는 놀이로, ‘댁깨또는 다리밟기라고도 한다. 12개의 다리를 밟으면 일 년 동안 다리에 병이 나지 않고 재앙도 막는다 해 고려 때부터 남녀노소 누구나 전국적으로 이루어졌던 세시풍속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와서는 서울근교에서 남자들이 농악에 맞추어 무동(舞童)을 세우고 여러 배역으로 분장해 다리 위나 마을에서 한바탕 놀이를 벌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볼 수 있는 오락적인 민속놀이로서의 답교놀이이다.

 

놀이패들은 도포·정자관·전립·협수·전복·머릿수건·행전·홍색치마·댕기리 등 상민에서부터 양반에 이르기까지 각자 주어진 배역에 따라 의상을 입고 나쟁이·별감·집사·양반·왜장·상좌·소무·무동·윗동무·밑동무 등으로 분장한 다음, 용두기(龍頭旗)와 영기(令旗)를 앞세워 정초부터 대보름 후까지 하루에 두세 집씩 마을을 돌면서 놀이판을 벌였는데, 집터를 울려 벽사진경(陽邪進慶)함으로써 음주대접을 받았다. 이 때 사용되는 악기는 장구·호적·제금·소고 등이며, 굿거리와 타령장단에 맞추어 춤판과 놀량·앞산타령·뒷산타령·능개타령·선소리판 등이 펼쳐진다.

 

놀이지역으로는 마포·아현·노들(노량진광화문 밖·살곶이다리·장안리(長安里뚝섬 자마장(자양동) 등을 들 수 있는데 그 중 자마장 답교놀이가 유명했다 하며, 바람들이(風納洞몽촌·송파·돌마리(석촌동) 등의 마을에서는 마을마다 놀이패가 조직되어 있었다. 그러나 1926년 이후로는 모두 없어져, 생존한 기능보유자를 통해 송파답교놀이와 몽촌답교놀이만을 재연할 수 있을 뿐이었다. 다행히도 이 중 송파답교놀이는 198536일서울 석촌동 놀이마당에서 송파민속보존회 주최로 이충선·한유성·문육지 등의 기능보유자들을 통해 복원되어 60년 만에 대보름축제를 벌임으로써 매년 축제공연을 가지게 되었다.

 

3. 연등 놀이

신라 때의 팔관회에서 시작된 유서 깊은 놀이로, 고려 이후 정월보름이나 이월 보름경에 즐기다가 현재는 사월초파일에 거행되고 있다. 연등에는 연화(蓮花)나 어류·과실 등 여러 가지 모양이 있으며, 등 옆면에는 수복(壽福태평만세(太平萬歲) 등의 축원을 써넣는다. 사월초파일이 다가오면 거리 곳곳에 줄을 매어 수많은 연등을 달아 길을 밝히고, 사월초파일 밤 불도들이 연등을 들고 여의도에서 조계사까지 행진하는 제등행렬(提燈行列)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4. 만리동고개의 석전(石戰), 바위절마을 호상놀이와 마들농요·장사편사놀이

유명했다 하나 지금은 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오늘날 바위절마을 호상놀이와 마들농요·장사편사놀이가 연희되고 있으며, 연날리기·제기차기·그네뛰기 등의 몇몇 놀이는 어린이들을 통해 겨우 그 명맥을 계승해 오고 있다.

 

 

 

 

 

 

무형문화재

종묘제례악와 제례 및 석전대제, 남사당놀이·북청사자놀음·봉산탈춤·서도소리·선소리타령·가야금산조및병창·강령탈춤 등

   

 

 

 

부군당(府君堂도당(都堂대동당(大同堂동제당(洞祭堂)

 

 

 

 

1. 부군신(府君神)

주기적으로 이 곳에서 동리 단위의 제를 지낸다. 부군당을 위하는 마을은 전농·수유·서빙고·보광·이태원·응봉·신영·주성동 등이며, 부군신(府君神)으로는 태조 이성계와 세조·김유신(金庾信) 등과 기타 무속신(巫俗神)을 봉안하고 있다. 제일은 대개 3월이나 9·10월 초경에 길일을 택해 정하고 유례식(儒禮式)으로 치제(致祭)하지만, 수유동의 경우는 격년제로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데 부정풀이·대감놀이·조상굿·우물굿·도당굿·산신굿 등의 순서로 진행한다.

 

2. 도당(都堂)

답십리·석관·동빙고·가양·방화동 등으로, 이곳에서는 단군(檀君) 또는 산신을 주신(主神)으로 받들고 있다. 제일은 9월 말 또는 10월 초 길일을 택해 정하며, 제의(祭儀)는 대부분 유례풍으로 분향(焚香재배(再拜소지(燒紙) 순으로 진행된다. 소지는 도가(都家)부터 시작해 동네 안 큰길 순으로 올리게 된다.

 

북한산에도 도당이 있어 3년마다 한 번씩 3월 중 길일을 택해 무속풍의 큰 굿을 거행한다. 산신을 모시는 산신당으로는 신내동의 봉사당(奉祠堂), 평창동의 보현산신각(普賢山神閣), 부암동의 산제당(山祭堂), 도곡동의 산신제당(山神祭堂), 구기동의 천제당(天祭堂) 등이 있다. 제일은 각 마을마다 다르나 보통 3·6·10월 중 택일해 유례풍으로 치제한다. 이 중 봉사당의 산신제는 신내동뿐만 아니라 상봉·중화동이 공동으로 주최해 대동굿을 벌였으나, 근래에는 경비문제 등으로 한 번은 신내동에서 치르고 다음번은 상봉동과 중화동에서 치르는 식으로 격년제로 분담, 준비한다. 경비는 주민들에게 추렴해 마련하는데, 경비가 모아지면 제물을 준비하고 무녀와 잽이 5명을 불러들여 아침부터 종일토록 굿을 벌인다.

 

3. 동제당(洞祭堂)

용문동과 사근동에 남이장군사당(南怡將軍祠堂)이 있어 주기적으로 제를 지내는데, 용문동의 경우 4·7·10월의 1일에 치제하고, 3년마다 41일에 대규모의 제를 무속풍으로 거행한다.

 

이들 동제의 목적은 축재초복(逐災招福)과 길복기구(吉福祈求)이며, 마을에서 공동으로 치성을 드리는 것이므로 초상을 당했다든지 하는 등의 부정이 있을 때는 제관으로 선출되지 못하고, 제일이 정해지면 동민들이 일심동체가 되어 근신하는 등 나름대로 엄격한 관례가 지켜진다. 그리고 인왕산 국사당, 성제묘, 서빙고동부군당, 평창동보현산신각, 선바위, 와룡묘, 관성묘 등의 제례

    

 

 

 

신화·전설·민담(民譚)

 

 

 

 

무조신화(巫祖神話)·바리데기신화·풍신손돌신화, 성씨신화로 한양조씨신화(漢陽趙氏神話)

바리데기신화는 신을 청해 노래와 춤으로 신을 즐겁게 한 다음 공수(무당이 신들린 상태에서 신의 말을 전하는 것이라며 하는 말)를 내려 신의 의사를 듣는 삼단계 구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지노귀무가에 속한다. 그 밖에 제석거리·군웅거리·황제풀이 등 상당수의 무가가 채록되어 있다. 바리데기신화버르더기로도 채록되었다.

 

풍신손돌신화는 억울하게 죽은 뱃사공 손돌의 넋이 풍신(風神)이 되어 해마다 그가 죽은 날을 전후해 날씨를 춥게 하고 바람과 파도를 일으킨다는 이야기이다.

 

한양조씨신화는 시조가 인간이 아닌 화정(花精)의 아들로 태어나 중국과 인연을 맺은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지명유래전설·암석전설·산악전설·수목전설·소지전설(沼池傳說누정탑상전설(樓亭塔像傳說능묘풍수전설(陵墓風水傳說사찰연기전설(寺刹緣起傳說인물전설

 

1. 지명유래전설

밭가는 농부에게 무학(無學)이 도읍터를 물어 정했다는 왕십리와 서울,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하고 지관들로 하여금 동구릉의 건원릉(健元陵) 터를 정하게 하고 근심을 잊었다는 뜻으로 붙여진 망우리전설, 임진왜란 당시 왜병이 비구니를 겁간해 임신시킨 데에서 이태(異胎)라 불리다가 나중에 주민들에 의해 이태원(梨泰院)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전설 등이 있는데, 서울의 지명에는 강한 역사성과 민중의식이 배어 있다.

 

이 밖에 형제애와 관련된 투금뢰전설(投金瀨傳說), 정절과 관련된 도미나루전설(都彌津傳說), 풍수설과 관련된 탄천전설(炭川傳說), 아기장수전설과 관련된 마천전설(馬川傳說)등 다양한 유형을 포함하고 있다.

 

2. 암석전설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천도유래담과 관련된 현저동의 선바위전설(禪巖傳說), 산이동담(山移動談)에서 파생된 광주암전설, 중종과 신씨부인의 역사적 여론과 관련된 치마바위전설(裳巖傳說), 인간의 소박한 욕망과 관련된 쌀바위전설(米巖傳說), 기자신앙(祈子信仰)과 관련된 부암전설(付巖傳說)등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3. 산악전설

북한산의 노적봉(露積峰)은 모양이 곡식의 노적가리처럼 생겼다는 데에서 유래된 것이지만, 목포 유달산의 노적봉이 이순신의 의병술과 관련이 있듯이 서울의 것도 고구려와 백제의 싸움, 또는 도선사상(道仙思想)과 관련이 있다. 불암산은 금강산의 한 부분이었는데, 한양의 남산이 되려고 서울근교로 걸어왔다가 이미 다른 산이 자리를 잡고 있어 돌아가지 못하고 토라져 등을 뒤로하고 서 있게 되었다는 산이동전설과 결부되어 있다.

 

그 밖에 안산(鞍山)은 말의 안장 모양에서, 우면산(牛眠山)은 드러누워 잠자는 소 모양에서 왔다는 등 동물의 형상과 결부되어 있으며, 백운대(白雲臺인수봉·국망봉(國望峰)의 삼각산은 세모로 연결된 형상에서, 절두산(切頭山)은 종교적 교난사건과 관련해 전설이 유래되고 있다.

 

4. 수목전설

회현동 은행나무전설은 임진왜란과 결부되어, 왜병에게 쫓기게 된 조선 군사가 망루로 사용하던 나무를 왜병이 베려 하자 홀연 찍힌 자국에서 핏물이 솟아 나와 왜병이 겁을 먹고 달아났다는 호국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충무로의 육신송(六臣松)은 박팽년(朴彭年)의 집터에 있는 나무로 충절을 기리는 후대인들이 붙인 명칭이다. 대청골 회나무, 대치동 은행나무, 용산동 은행나무, 금띠솔 등의 거수·고목들은 대개 지역적 역사나 의식과 결부된 전설을 지니고 있다.

 

5. 장자못전설

욕심 많은 부자의 행위를 풍자한 징치담의 성격을 지니며, 효도와 관련된 효자우물전설등도 유명하다.

 

6. 누각전설

남한산성 축성과 관련된 이회(李晦)숭렬전전설(崇烈殿傳說)과 그 부인의 한을 달랜 잠실의 부군당전설(府君堂傳說)을 들 수 있다. 이 전설은 부당하게 죽은 이회와 그 부인에 대한 민중적 숭앙심을 담고 있다. 세검정(洗劍亭희우정(喜雨亭청계당(淸溪堂청량당(淸凉堂압구정(狎鷗亭) 등의 유래도 역사성과 결부되어 있다. 관우묘(關羽廟)의 전설은 삼국지와 관련된 신앙으로 봉사된 특이성이 주목된다.

 

병자호란 때 청태종의 공덕을 기려 세운 삼전도한비(三田渡汗碑)는 대석의 돌거북이 땀을 흘리고 비석이 기울어져 나중에 다시 세웠는데, 이는 청나라에 대한 민중의 거부적 반응을 돌거북의 땀과 저항으로 나타낸 것이다.

 

헌릉(獻陵)의 태종신도비(太宗神道碑)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쳐들어와 철퇴로 비석을 깨뜨리려 하자, 뇌성벽력이 일고 깨진 부분에서 선혈이 흘러내려 이에 놀란 왜장이 쇠줄로 비석을 얽어매고 사죄의 제사를 드렸다고 전한다.

 

7. 풍수전설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아이를 업고 달아나는 형상인 부아암(負兒巖)의 지세를 달래기 위해 어머니를 위한 무악재, 아이를 위한 떡전거리라고 이름 지은 지명유래담이 있다.

 

거여동의 매화낙지전설(梅花落地傳說)은 임경업(林慶業)의 영웅성과 결부되어 있다. 용녀가 임도령과 동침하고 행운을 얻어 승천하면서 떨어뜨린 비늘이 매화나무로 둔갑을 하고, 그 자리에 선대의 묘지를 이장해 후손 가운데 임경업이 태어났다는 전설은, 지상과 천상을 잇는 인과구조를 지니고 있다.

 

8. 사찰연기전설

고려 현종이 대량원군(大良元君) 시절에 그의 인품을 알아보고 땅속에 굴을 파 숨겨준 인연으로, 진관조사는 진관사(津寬寺)를 창건하였다. 왕권과 관련을 맺은 연기담이다.

 

수락사(水落寺)는 원광법사와 인연을 맺고 있으며, 나중에 덕흥대원군의 원찰(願刹)로 선조에 의해 흥덕사로 명명되었다. 개운사(開雲寺사자암(師子庵내원암(內院庵)의 연기전설도 매우 흥미롭다.

 

9. 인물전설

임경업전설·강감찬전설·최치원전설·남이장군전설·순조가 된 농산스님전설·민충정공전설등이 전하는데, 모두 전승적 일화를 통해 그들의 신이함이나 영웅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민담 (民譚)

한국구비문학대계는 수유·미아동을 중심으로 채록되어 있는데, 오성과 한음·송우암과 허미수·박문수를 가르쳐 준 신동·최치원담·마포 황곱재기·봉이 김선달·번동의 유래150여 화가 채록되어 있다. 한국민속종합보고서에는 죄는 진 대로 간다·세서때라니까·신임사천군수와 주모등이 채록되어 있으며, 향토서울서울의 설화모음이 있다.

    

 

 

 

유흥민요

 

 

 

1. 정치와 관련된 참요(讖謠)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관계를 예언했다는 미나리요, 고종의 총애를 받던 기생 도화(桃花)와 엄비(嚴妃)의 관계를 풍자했다는 도화타령, 녹두장군 전봉준(全琫準)의 앞날을 예언한 파랑새요, 병인양요 때 전쟁을 예고했다는 매화타령, 러일전쟁을 예견했다는 나비참요등이 그것인데, 노래와 사건을 무리하게 연결시킨 측면도 있다.

 

도화타령을 보면 도화라지 도화라지 네가 무삼에 도화라고 하느냐 복숭화꽃이 도화라지/에헤요 에헤야 얼씨구 좋다 좋고 좋네 어화 이봄을 즐겨보세……와 같다. 창부타령·노랫가락등은 무가 계통의 노래로서 무당에서 전문소리꾼, 일반 민중에게로 전파되어, 서울을 중심으로 중부지방에서 많이 부르는 유흥민요가 되었다.

 

또 선소리꾼들에 의해 전파된 노래로는 경복궁타령·한강수타령등이 있다. 경복궁타령 ……경복궁의 역사(役事)가 언제나 끝나 그리던 가속을 만나볼까/에에헤이야 얼럴럴거리고 방아로다/도편수의 거동을 봐라 먹통을 들고서 갈팡질팡한다……하고 부르는데, 경복궁을 짓는 데 동원된 백성들이 자신들의 정서를 노래한 것이다.

 

는실타령건드렁타령도 서울 민요이다. 는실타령은 닭··봉황·솔개·명매기·꾀꼬리·봉접 등을 엮어 놓은 노래이다. 건드렁타령왕십리처녀는 풋나물장수로 나간다지 고비 고사리 두릅나물 용문산채를 사시래요/건드렁 건드렁 건드렁거리고 놀아보자……애오개처녀는 망건장수로 나간다지 인모망건 경조망건 곱쌀망건을 사시래요……, 처녀들이 돈 벌러 나가는 내용이다.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애환과 저항을 담아 전국적으로 전파, 전승되었던 아리랑의 한 구절을 보면 가자가자 어서가자 백두산 덜미에 해저물어 간다같은 가사도 있다.

 

2. 노동요

이앙가·방아타령·밭매기노래

 

3. 부요(婦謠)

시집살이노래·베틀노래·빨래노래·바느질노래·맷돌노래등이 있다. 베틀노래를 들어보면 베틀을 놓세 베틀을 놓세 옥난간에다 베틀을 놓세/에헤요 베짜는 아가씨 사랑노래 베틀에 수심만 지누나/……닭아 닭아 우지를 마라 이베짜기가 다 늦어간다……와 같다.

 

4. 동요(童謠)

술래잡기노래·두꺼비집만들기노래·이갈이노래, 아이들이 논의 새를 쫓으며 부르는 웃녘새야는 노동요의 일종이다. 앞의 말을 되받아 이어가는 꼬리따기노래등은 아이들의 상상력을 확대시키는 효과를 가진 동요이다.

 

 

 

 

132개 국보, 380개 보물, 61개 사적, 11개 천연기념물

 32개 무형문화재, 46개 중요민속자료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전쟁기념관

덕수궁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서대문 형무소

암사동 선사유적지

풍납토성, 몽촌토성

서울 성곽

동관왕묘(동묘)

사직단

환구단

종묘

문묘

성균관

북한산성

원구단

조선 왕릉

백제고분군

장충단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광화문 광장

남대문 시장

남산 한옥마을

대학로

롯데월드

명동

삼청동

COEX(컨벤션 센터)

N서울타워

63빌딩

이태원

인사동

강남역 사거리

디지털미디어시티

타임스퀘어

북촌 한옥 마을

보라매 공원

북서울 꿈의숲

서울숲

서울 올림픽 공원

양재시민의 숲

어린이 대공원

여의도 공원

월드컵 공원

한강 시민 공원

서서울 호수공원

선유도 공원

용산가족공원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

정동제일교회

명동성당

조계사

서울 중앙 성원

정교회 성 니콜라스 대성당

여의도 순복음교회

하이서울페스티벌

서울세계불꽃축제

한강여의도봄꽃축제

서울 등 축제

 

 

 

 

 

 

http://100.daum.net/search/search.do?query=서울특별시

http://ko.wikipedia.org/wiki/%EC%84%9C%EC%9A%B8%ED%8A%B9%EB%B3%84%EC%8B%9C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11s3796b

http://encykorea.aks.ac.kr/Contents/Contents?contents_id=E0028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