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자의 국립묘지’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묘지 모란공원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606-1번지 마석 모란공원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은 130여명의 민족·민주열사가 묻혀 있는 ‘민주화운동의 상징적인 성지’로 꼽히지만, 장소가 비좁고 표지판이나 진입로, 편의시설 등이 없어 참배객들이 큰 불편을 겪고 있다.
청량리 시장이나 청량리역에서 30번이나 좌석 330번을 타고 마석시내에 도착,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샛터가는 버스를 타면 모란공원을 지나간다. 또는 좌석 1330번을 타면 모란공원 바로 앞에 하차한다. 샛터에서 마석이나 서울로 나오는 버스를 타도 모란공원을 거쳐간다. 기차의 경우엔 청량리역에서 경춘선을 타고 마석역에서 하차한다.
모란공원 관리사무소 031-594-6362
모란공원은 ‘민주열사들의 안식처’
전태일 이후 공권력에 희생 당한 열사들 하나 둘 영면
고 이상림, 고 양회성, 고 한대성, 고 이성수. 지난 1월 9일 용산참사 희생자 5명의 유해가 사건 발생 1년 만에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안치됐다.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은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열사의 성지로 불린다.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공권력에 의해 희생당했거나 자기 목숨을 던진 이들이 ‘민주열사’의 이름으로 이곳에서 영면을 취하고 있다.
민주열사 묘역은 사설공원 묘지인 모란공원의 일부에 불과하다. 모란공원은 1966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해 매장이 가능해진 것은 1969년 무렵이라고 알려져 있다. 현재 1만2000여 기 가운데 110여 기가 민주열사들의 묘다. 사설묘지인 데도 유가협과 개별 기념사업회들이 추모비를 세우고 묘역 안내도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모란공원 측의 협조를 얻어 가능했던 일이다.
문익환 목사·박종철 열사도 잠들어 민주열사 묘역의 출발은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의 죽음이다.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열사들과 관련한 보훈사업을 하는 민간단체 추모단체연대회(이하 추모연대)의 이형숙 사무처장에 따르면 “당시 전태일 열사의 죽음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자 정부는 장례위원회를 꾸리고 장지를 물색했다. 모란공원이 장지로 결정된 건 정부가 서울에서 떨어진 곳으로 장지를 선택하려 했기 때문이다.” 당시 동대문에는 모란공원으로 가는 버스가 있었다.
전태일의 죽음 이후 민주열사들의 유해가 하나 둘 모란공원으로 왔다. 이 사무처장은 “고인들이 전태일 열사 옆에 묻히고 싶다고 뜻을 밝힌 경우도 있고, 고인과 함께 운동한 이들과 유족들이 고인의 뜻을 살린다는 의미에서 전태일 열사 묘지 근처로 자리를 잡은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박계현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은 “전태일 열사의 상징성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묘지에 안장된 민주열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곳이 왜 민주열사의 성지로 불리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통일운동의 대부 문익환 목사(1918~1994), 서울대 3학년 재학 중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받다가 고문으로 사망해 1987년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열사(1965~1987), 1960년대 교원노조를 결성하고 장준하·함석헌 선생 등과 함께 민주화 운동을 했던 계훈제 선생(1921~1999), 박정희 정권 시기 대표적인 의문사 사건으로 기록된 최종길 전 서울대 교수(1932~1973), 1970년대 한국 민중신학의 좌장으로서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 시기에 교수직 박탈·수감·복직을 거듭한 안병무 선생(1922~1996), 1979년 박정희 정권 붕괴의 서곡이 된 YH무역 노동자 신민당사 투쟁에서 사망한 김경숙 열사(1958~1979), 한국 비판사회학의 1세대로 민중운동에 헌신했던 김진균 전 서울대 교수(1937~2004), 1991년 5월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사망한 당시 성균관대 재학생 김귀정 열사(1966~1991), <전태일 평전>의 저자인 대표적인 인권법률가 조영래 변호사(1965~1990) 등 군사정권 시기 민주화 운동의 대표적 이름들이 이 묘역의 묘비 아래 묻혀 있다.
시민단체 추천 얻어야 갈 수 있어 민주열사 묘역에는 군사정권이 종식된 이후에도 ‘열사’들의 유해가 안치됐다. 1996년 청구성심병원 노조위원장으로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2006년 8월 위암으로 사망한 이정미씨, 2005년 11월 여의도 농민대회에 참가했다가 시위 도중 입은 부상으로 사망한 전용철씨, 2007년 4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해 분신한 허세욱씨도 민주열사 묘역에 묻혔다. 기륭전자 권명희 조합원도 투병과 투쟁을 나란히 치르다가 결국 2008년 9월 모란공원 납골당에 안치됐다.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은 ‘열사’들의 유해가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현재 민주열사 묘역에서 열리는 추모제나 행사와 관련된 단체는 추모연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유가협 등 3개 단체다. 이들 단체는 민주열사를 재야열사, 의문사, 노동열사, 학생열사의 범주로 구분한다. 이 세 단체는 지난해 공동으로 자료집을 발간했다.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묻혀 있는 민주열사는 110여 명이다. 그러나 정확한 숫자는 단체마다 조금씩 다르게 추산하고 있다. 홍용학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념사업팀 과장은 “단체마다 입장이 조금씩 달라 정확한 숫자에는 차이가 난다”고 말했다.
민주열사 묘역에 묻히기 위해 갖춰야 할 조건이 명확하게 규정돼 있지는 않다. 이형주 사무처장은 “민주열사 묘역에 들어가려면 단체의 추천을 받아야 한다”면서 “용산참사는 공권력 남용과 민주주의 문제를 제기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범대위의 추천과 유족 동의를 거쳐 희생자들의 유해가 민주열사 묘역으로 가게 됐다”고 전했다.
“만인을 위한 꿈을 하늘 아닌 땅에서 이루고자 한 청춘들 누웠나니, 스스로 몸을 바쳐 더욱 푸르고 이슬처럼 살리라던 맹세는 더욱 가슴 저미누나. 의로운 것이야말로 진실임을, 싸우는 것이야말로 양심임을 이 비 앞에 서면 새삼 알리라. 어두운 세상 밝히고자 제 자신 바쳐 해방의 등불 되었으니 꽃 넋들은 늘 산 자의 빛이요 볕뉘라. 지나는 이 있어 스스로 빛을 발한 이 불멸의 영혼들에게서 삼가 불씨를 구할 지어니.”
1997년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이하 유가협)이 세운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 추모비에 적힌 문구다. 해마다 민주주의의의 참뜻과 노동자의 권리가 무엇인지 되묻고자 하는 많은 사람이 민주열사 묘역을 찾는 이유일 것이다.
모란공원은 경기도 가평군 마석에 있는 공원묘지입니다. 모란공원에는 1970년 전태일 열사가 민주열사 묘역에 묻히신 이래로 한 시대를 거치면서 모두 쉰 여덟분의 민주 열사·희생자들이 민주열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전태일 열사, 김경숙열사등 노동열사, 김귀정, 박종철, 박래전, 천세용열사등 학생열사, 계훈제선생, 문익환목사등 한 평생을 이 땅의 민주화와 조국통일을 위해 바치신 분들이 모란 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묻히셨습니다. 이제 모란공원은 남한사회에서 민족민주운동을 하는 이들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추모비> 만인을 위한 꿈을 하늘 아닌 땅에서 이루고자 한 청춘들 누웠나니, 스스로 몸을 바쳐 더욱 푸르고 이슬처럼 살리라던 맹세는 더욱 가슴 저미누나. 의로운 것이야말로 진실임을, 싸우는 것이야말로 양심임을 이 비 앞에 서면 새삼 알리라. 어두운 세상 밝히고자 제 자신 바쳐 해방의 등불 되었으니 꽃 넋들은 늘 산 자의 빛이요 볕뉘라. 지나는 이 있어 스스로 빛을 발한 이 불멸의 영혼들에게서 삼가 불씨를 구할 지어니. 1997년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글 서해성 글씨 박용길, 신영복 설계 및 조각 홍성담
민주화운동 관련자 약 109명(2009년 3월 2일 기준)
◦ 모란공원의 역사 - 1966년 마석 모란공원 조성 - 1969년 안장이 시작됨 - 1970년 민주화운동 관련 희생자들이 안장되기 시작함. 전태일의 안장을 최초로 보고 있음 - 1973년 국내 의문사 사건 제1호인 최종길 교수 안장 - 현재 안장된 희생자의 숫자에 대해서는 기준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 이번 조사에서는 최대주의 원칙에 의해 109명으로 확정했으며, 이 외에도 다소 관련성이 있는 몇 기의 희생자가 안장되어 있었음
◦ 이 가운데 다수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서 관련자로 인정됨
◦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진상이 밝혀진 분들이 있음
경기 마석 모란공원 가보니 전태일·문익환·김근태 등 잠든 곳 표지판·진입로 없어 찾기 힘들어 국립묘지 승격해 희생자 예우해야 3일 안철수·문재인 등 야권의 주요 대선후보들이 잇따라 방문한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의 ‘민족·민주열사 묘역’에서 열사들의 묘를 찾기가 매우 힘들었다. 묘역 입구엔 작은 묘지도 하나만 달랑 세워져 있을 뿐, 안내 표지판이나 진입로가 없었기 때문이다.
‘통일운동의 선구자, 겨레의 벗’ 글귀가 새겨진 문익환 목사의 묘와 반대편의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묘’, 중앙에 자리한 ‘삼백만 근로자 대표’ 전태일 열사의 묘를 참배하기 위해 수백기의 무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비석을 일일이 확인해야 했다. 벼랑 위에 세운 문 목사 부부 묘소의 크기는 3×3m에 불과해 참배객 10명을 맞기에도 비좁아 보였다.
모란공원에 민주열사 묘역이 조성된 것은 1970년 분신 자살한 전태일 열사의 묘가 공안당국의 방해로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사립 모란공원에 안장됐던 데서 비롯됐다. 이후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에 저항하다 희생된 노동자·농민·빈민·학생·지식인들이 ‘전태일 열사 곁에 묻히고 싶다’며 하나둘씩 모여들어 자연스럽게 민주열사 묘역이 만들어졌다. 모란공원 묘역엔 전태일 열사와 그의 어머니 이소선씨를 비롯해 문익환 목사, 재야운동가 계훈제, 최종길 전 서울대 교수, 인혁당 사건 피해자 김용원, 조영래 변호사, 김근태 전 민주당 상임고문, 박종철 열사 등 130여명의 민주인사들이 묻혀 있다.
지난해 말 고문 후유증으로 생을 마감한 김근태 민주당 고문도 국립 대전현충원을 마다하고 ‘민주화운동 동지들과 함께 묻히겠다’며 모란공원을 택할 만큼, 광주광역시 망월동 묘역과 함께 ‘민주화운동의 성지’로 꼽힌다.
하지만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은 수백기의 일반 묘지와 뒤섞여 있는데다, 장소가 협소하고 편의시설이나 기반시설 등이 전혀 없어 희생자 예우 대책이 시급하다. 신형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홍보실장은 “사설묘지이므로 협소해도 확장할 수 없고 편의시설이나 기반시설들을 설치하기도 어려운 형편”이라고 고충을 토로했다.
시민 안명남(63·파주시 문산읍)씨는 “민주열사 묘역에 들어설 때마다 너무 초라해서 눈물이 나온다”며 “민주화를 위해 정의와 열정으로 싸우다 희생된 사람들이다. 하루빨리 국립묘지를 만들어 성역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묘역에서 만난 한 참배객도 “3·15 마산의거나 4·19, 5·18 등 이승만과 전두환 독재정권에 맞서다 숨진 희생자들은 국립묘지에 갔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의 희생자들은 국립묘지에조차 못 들어갔다”며 민주열사 묘역을 국립묘지로 조성할 것을 촉구했다.
모란공원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노동자나 대학생들이 순례코스로 많이 찾고 있지만 따로 민주열사 묘역으로 지정하거나 관리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대학생 민주주의 현장탐방
한국 변혁운동을 이끌어 온 민족민주열사
한국의 현대사는 외세와 분단, 독재정권의 이데올로기 탄압, 압축적인 산업화 과정에서 국민들은 독재정권의 정권유지 도구로 전락되어 각종 악법과 자본권력, 언론권력, 정보기관을 통한 감시와 통제속에 억압을 받으며 제대로 숨조차 쉴 수 없던 시기를 지나 왔다.
이러한 반이성적 시대를 지나오며 항상 진실과 정의를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워온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고, 직장에서 쫓겨났으며, 사법사형을 당하고, 실종되어 의문을 죽음을 당하여 실체조차 밝히지 못하기도 하였다.
민주화 과정에서 4.19와 5.18 관련 열사를 제외하고 운명하신 열사․희생자들은 500여분에 이른다. 우리는 이분들을 ‘민족민주열사․희생자’라 부르며 동료와 조직,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바쳐가며 살아온 아름다운 삶을 기리고 알려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사업들은 추모사업, 기념사업, 정신계승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되고 있다.
1) 열사의 정의 사회 운동적 계급적으로 열사를 “피지배세력의 이해를 추구하기 위한 저항활동의 과정에서 반(半)강제적으로 희생당한 사람.” 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정의는 자본주의 사회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의 국가 중심의 사고, 희생자 중심 혹은 사건 중심의 사고, 그리고 사회적 관계를 부차화하는 사고 등을 극복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고민한 것이다.
‘피지배세력의 이해’가 의미하는 것은 ‘열사’가 발생하게 된 당시의 사회적 관계를 반영하고, 그러한 관계에서 형성되어 있던 지배-피지배의 관계에서 ‘열사’를 규명하려는 시도이다. 직․간접적으로 강요된 희생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열사들은 자의든 타의든 ‘강요’된 상태에서 희생을 당하였다. 그런데 ‘강요’의 방식도 다양할 수 있다. 지배세력에 의한 직접적 강요도 존재하고 간접적 강요도 존재한다. 또한 우발적이든 계획적이든 자의에 의한 선택이라 할지라도, 사회적 관계에서 ‘강요’되는 측면을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열사들의 정의에서 공통적인 것은 첫째, 지배세력과의 관계에서 피해를 보고 있는 피지배세력의 이해를 추구했다는 점 둘째, 지배세력에 대한 저항활동이 실질적으로 존재했었다는 점 셋째, 사망에 이르는 과정에 반(半)강제적 요인이 작용했다는 점이다.
2) 열사투쟁의 역사적 성격 ‘열사’들은 운동사적으로 지대한 영향들을 미쳤고, 현실의 운동에도 그 영향을 지속시키는 경우도 있다. 물론 ‘열사’에 대한 개념적 정의를 모색하거나 현실화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고민을 해야 하겠지만, 아예 거론조차 되지 않고 있는 수많은 ‘열사’들의 영향력이 역사적으로는 더 크게 작동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 이러한 ‘열사’들에 대한 개별적 성격은 차치한다 하더라도, 한국의 운동사에 적용시킬 수 있는 ‘열사투쟁의 성격’을 일반화시킬 필요는 존재한다.
저항 (지속)폭발적 성격 : 저항의 과정에서 열사들이 발생하곤 하였다. 이는 두가지 경우로 나타나는데 저항이 폭발하지 않고 열사투쟁 그 자체로 잠잠해지는 경우와 다른 하나는 저항이 폭발적으로 확대되는 경우이다. 전자는 대부분 열사들의 투쟁을 개별적, 우발적, 반체제적․반국가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다. 그러나 후자는 반정부적인 정치투쟁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경향이다.
저항주체 형성적 성격 : 지배세력에게 저항할 수 있는 다양한 주체들을 형성하는 투쟁의 과정에서 수많은 ‘열사’들이 발생하였다.
저항역량 전이적 성격 : 피지배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주체적 측면에서 볼 때, 지배세력에 대한 저항역량을 개인으로부터 조직으로, 개인으로부터 대중으로, 개인으로부터 계급으로 전이시키는 ‘열사’들의 투쟁을 의미한다.(김영수-열사학교 강의내용)
3) 현실운동과 열사정신 열사정신은 변할 수 없으나 시기에 따라 우선 과제에서 약간 차이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기본 열사정신은 사회적, 실질적 민주주의 실현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민주주의는 독재에 반대하는 단순하고 협소한 절차적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개념이 아니라 신자유주의를 비롯한 사유재산과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반대하고, 외세에 의한 억압과 분단이 없는 세상, 사회 각 영역에서 민중들의 기본권과 생존권이 보장되고 확대되며 이를 제도화하며, 실질적 경제적 평등이 이룩된 사회로 노동해방, 인간해방이 된 세상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시기 열사정신은 정치 민주화에 상당부분 집중되었다. 열사들의 투쟁은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정치적, 절차적 민주주의를 상당부분 앞당겨 놓았다. 열사들은 50년대 이후 진보당사건, 인혁당 사건 등의 사법 사형 희생과 70년대 전태일열사를 비롯한 87년 민주화 과정까지 열사들은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 보장과 절차적 민주화를 요구하며 운명하였다.
하지만, 사회민주주의 실현을 통한 실질적 민주화는 지금부터 시작이라 볼 수 있다. 90년대 들어서며 열사들은 각 사회 영역에서 실질적 사회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투쟁의 과정에서 돌아가셨다. 교육민주화와 교육제도개혁, 장애운동, 통일운동, 빈민운동, 농민운동을 비롯하여 노동운동도 구체적 사안들에 따라 열사들의 요구는 같으면서도 다르다. 이러한 열사들의 정신을 오늘날의 우리가 얼마만큼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는 지 되돌아 볼 때이다.
3. 올바른 열사정신계승 사업은 우리 현실에 맞는 사회적 임무와 과제를 끊임없이 되짚어 보고 이러한 과제에 복무하는 것이다. 각자 자신의 처지와 실정에 차이가 있겠으나, 열사들이 살았던 삶처럼 최선의 노력을 통해 실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또한, 열사들이 단지 화석화되거나 박제화 된 삶이 아닐 수 있게 만들어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 각 열사들의 삶과 정체성을 끊임없이 재편성해 가는 과정과 각 요소요소에 배치하고 이를 되살리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의 현대사는 외세와 분단, 독재정권의 이데올로기 탄압, 압축적인 산업화 과정에서 국민들은 독재정권의 정권유지 도구로 전락되어 각종 악법과 자본권력, 언론권력, 정보기관을 통한 감시와 통제속에 억압을 받으며 제대로 숨조차 쉴 수 없던 시기를 지나 왔다.
이러한 반이성적 시대를 지나오며 항상 진실과 정의를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워온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고, 직장에서 쫓겨났으며, 사법사형을 당하고, 실종되어 의문을 죽음을 당하여 실체조차 밝히지 못하기도 하였다.
민주화 과정에서 4.19와 5.18 관련 열사를 제외하고 운명하신 열사들은 400여분(추모연대 집계)에 이른다. 우리는 이분들을 ‘민족민주열사․희생자’라 부르며 동료와 조직,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바쳐가며 살아온 아름다운 삶을 기리고 알려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사업들은 추모사업, 기념사업, 정신계승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되고 있다.
현실운동과 열사정신 열사정신은 변할 수 없으나 시기에 따라 우선 과제에서 약간 차이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기본 열사정신은 사회적, 실질적 민주주의 실현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민주주의는 독재에 반대하는 단순하고 협소한 절차적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개념이 아니라 신자유주의를 비롯한 사유재산과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반대하고, 외세에 의한 억압과 분단이 없는 세상, 사회 각 영역에서 민중들의 기본권과 생존권이 보장되고 확대되며 이를 제도화하며, 실질적 경제적 평등이 이룩된 사회로 노동해방, 인간해방이 된 세상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시기 열사정신은 정치 민주화에 상당부분 집중되었다. 열사들의 투쟁은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정치적, 절차적 민주주의를 상당부분 앞당겨 놓았다. 열사들은 50년대 이후 진보당사건, 인혁당 사건 등의 사법 사형 희생과 70년대 전태일열사를 비롯한 87년 민주화 과정까지 열사들은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 보장과 절차적 민주화를 요구하며 운명하였다.
하지만, 사회민주주의 실현을 통한 실질적 민주화는 지금부터 시작이라 볼 수 있다. 90년대 들어서며 열사들은 각 사회 영역에서 실질적 사회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투쟁의 과정에서 돌아가셨다. 교육민주화와 교육제도개혁, 장애운동, 통일운동, 빈민운동, 농민운동을 비롯하여 노동운동도 구체적 사안들에 따라 열사들의 요구는 같으면서도 다르다. 이러한 열사들의 정신을 오늘날의 우리가 얼마만큼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는 지 되돌아 볼 때이다.
열사들의 투쟁으로 만들어온 민중역사
1. 국가권력, 자본의 폭력에 죽음으로 맞서온 열사
1. 열사의 정신의 시대적 배경 한국근현대사는 일제 식민지전해왔다. 열사의 정신은 외세를 배격하고, 민중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1894년 갑오농민항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러한 자주적, 민중해방 정신은 구한말 의병운동으로 일제 강점기의 민족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해방이후에는 독재정권과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4.19혁명과 5.18민중항쟁, 87년 6월 및 7, 8, 9월 노동자투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민주주의 발전과 조국통일, 자주 국가를 만드는 과정으로 이어지며 민족민주열사 정신은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해방이후 - 1960년 이승만정권시기 열사, 희생자 해방을 맞은 우리 사회의 과제는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의 자주와 민중이 잘 사는 사회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를 해결하지 못한 채 한국전쟁을 맞았다.
한국전쟁 뒤 이승만 정권은 자신의 기반을 더욱 강화하기 시작했다. 일인독재, 장기집권을 위해 이 정권은 전쟁의 폐허 더미 속의 국민들에게 ‘반공주의’를 내세워 전 사회를 이념 대립의 장으로 만들고, 국민의 민주주의, 통일에 대한 열망을 억누르고 독재에 반대하는 정치인을 탄압하는 무기로 사용했다. 정치는 사사오입 개헌 등 폭력정치가 난무하고, 경제는 원조를 통해 소수의 자본가들이 부를 축적하는 동안 민중의 삶은 파탄으로 내몰렸다.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일어선 민중의 저항은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3. 1961년-1979년 박정희정권시기 열사․희생자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민중의 저항은 5.16 군사쿠데타로 등장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힘에 눌렸다. 군사독재정권은 한 손에는 ‘반공’을, 다른 한 손에는 ‘조국근대화’, ‘선성장․후분배’를 앞세운 산업화와 고도성장의 논리 속에 노동자․ 농민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했다.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은 ‘고도성장의 논리’가 독점재벌 중심의 성장에 불과한 것이며, 그 뒤에 감추었던 소외된 노동자들의 삶의 근본문제를 사회전면에 고발하였다.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은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포장으로 유신체제을 만들어 ‘1인 독재’를 더욱 강화했다. ‘선진조국 창조’를 내세운 중화학공업화의 추진은 정권의 비호 아래 독점재벌을 비약적으로 키웠다. 경제성장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던’ 노동자들은 생존을 지키기 위해,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민주노조를 건설하고 독재정권과 자본에 대항한 지난한 투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유신체제 등장으로 학생, 지식인, 재야인사들은 반독재민주화투쟁들이 이어졌다. 유신 말기 YH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유신독재를 흔들었으며, 그 힘은 부마항쟁과 10.26 사건으로 이어지면서 박정희 18년 독재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1980년 봄, 국민들의 군부독재 종식과 민주정치 실현의 외침은 5월 18일 광주의 민중항쟁을 군화발로 짓밟고 등장한 신군부 세력의 5공화국 등장으로 막을 내렸다.
4. 1980년- 1987년 전두환정권시기 열사․희생자 전두환 신군부정권은 민주노조를 강제해산하고 정치인들의 정치활동 통제했다. 재벌들의 과잉중복투자로 중화학공업화 정책이 위기에 처하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정권은 더 강력한 노동자 통제와 농산물 가격 통제, 그리고 더 많은 외국자본을 들여왔다. 그 결과 노동자․농민의 삶은 다시 벼랑 끝으로 몰렸고, 경제의 자립성은 더 무너져갔다. 독재정권의 억압에도 학생들은 학원민주화투쟁을 벌였고, 노동자들은 민주노조를 다시 세우기 위한 투쟁과 생존권확보를 위한 노동조건개선투쟁이 일어났다. 1985년부터 불거져 나온 대통령 직선제를 위한 개헌 문제는 독재정권의 성고문사건과 고문치사사건 같은 반인간적, 반여성적 문제와 연결되어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을 높아갔다. 1987년 6월항쟁과 뒤 이은 7․8․9 노동자들 대투쟁은 시민, 학생, 노동자들이 정치․경제 등 사회 전반의 민주화를 요구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5.1988년-1992년 노태우정권시기 열사․희생자 국민이 확보한 ‘직선제 개헌’으로 ‘선거’를 통해 등장한 노태우정권은 군부독재정권의 연장이었으며, 보수대연합을 통해 정치적 부담을 줄이려 하였다. 노동자책임론으로 경제위기론을 유포하며, 성장하는 민주노조운동을 억누르기 위해 노동현장에는 여전히 백골단과 전투경찰의 폭력이 난무하였고, 농민시위, 학생들의 학원민주화와 통일운동도 전투경찰의 폭력으로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의문의 죽음과 경찰에 의해 강경대 학생이 맞아 죽는 사건도 터졌다.
6.1993-1997년 김영삼 정권시기 열사․희생자 ‘문민정부’를 내세운 김영삼정권은 보수3당 합당으로 등장한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경제회복과 안정을 주요과제로 내세웠으나 선진 자본주의의 시장개방 압력이 가속화되자, ‘세계화’와 ‘국가경쟁력확보’라는 명분으로 다시 민주주의질서를 무시하고 노동자․농민통제를 강화했다. ‘세계화’라는 허울은 우르과이라운드 협상타결과 OECD가입으로 이어졌다. 수입개방을 반대하는 수많은 농민들의 요구는 폭력으로 진압되고 많은 농민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이는 1996년 12월 ‘노동관계법과 안기부법 날치기’통과로 이어져, 전국에서 노동자 정치총파업과 민주 시민사회단체들의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연대가 이어졌다. 이러한 연대는 국민적 공감으로 이어져 김영삼 정권은 뒤 이은 선거에서 패배한다.
7. 1998년-...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신자유주의 정권시기 열사․희생자 뒤 이어 등장한 김대중 정권과 현재의 노무현 정권은 ‘경제위기’ 속에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쳐, 노동자․ 민중의 삶을 파산을 맞았다. 금융시장 개방과 기업구조조정은 재벌 개혁․ 경제민주화와는 거리가 먼 인수합병 간소화로 자본과 기술이 유출되고, 알짜 공기업들은 해외에 매각되었다. 노동자들의 현실도 급격히 변화되었다. 정권이 들이미는 ‘사회적 대타협’이라는 명분은 자본의 일방적인 이해를 대변하면서, 노동자들은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거센 저항이 일어났다. 실업 만연, 비정규직 양산으로 노동자․ 민중은 고용불안과 노동조건 후퇴로 심각한 생존의 타격을 받았다. 그 결과로 재벌의 부가 세계에서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인데 반해 거리로 내몰린 실업자들은 생존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조차 박탈당하는 등 우리 사회 안에 빈부격차는 더욱 심해졌다. 한미 FTA 등 자본 중심의 사회구조를 중층 구조를 만들어 민중들의 생존권은 위협받고 있다.
빈부격차 해소와 민중의 삶의 질 개선을 위한 요구는 형식적으로 일부 진전된 민주주의 사회에서, 각 부문의 실질적 민주화 요구로 이어지며, 지금도 거리와 각자 위치에서 계속되고 있다.
마석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된 열사 ․ 희생자
민족민주열사들에 대하여 쉽게 소개하고자 노동,사회,학생으로 분류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열사, 희생자들의 삶은 같으며 그 지향은 인간해방임을 우리 모두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 노동열사 •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당시 22세)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현실을 자신의 힘으로 개선하려는 강한 의지로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를 조직하고 이를 투쟁단체인 ‘삼동친목회’로 조직하여 투쟁하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는 유언을 남기고 산화하였다.
1971년 5월 16일 김진수 (당시 23세) 한영섬유 노동자로 노동조합을 파괴하려는 구사대에게 피습당하여 운명하였다.
1979년 8월 11일 김경숙 (당시 21세) YH노조 조직부 차장으로 활동 중 악덕기업주가 폐업을 감행하자 폐업 철회를 위해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하다 경찰의 폭력에 의하여 운명하였다.
1986년 3월 18일 박영진 (당시 29세) 신흥정밀에 입사하여 부당노동행위 및 임금착취에 대한 항의 중 해고 철회 투쟁을 벌이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노동3권 보장하라”며 분신한 뒤 “전태일 선배가 못다한 일을 내가 하겠다. 1천만 노동자의 권리를 찾겠다. 끝까지 투쟁해야 한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운명하였다.
1988년 7월 2일 문송면 (당시 15세) 협성계공(주) 노동자로 입사 2개월 만에 수은중독 증상을 보여 노동부에 산재요양신청서를 제출했으나, 어떠한 실질적인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결국 동지는 만 열다섯살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1988년 7월 8일 성완희 (당시 29세) 강원 태백탄광 노동자로 파업을 주동한 뒤 회사측의 탄압에 맞서 투쟁하다 두번의 해고를 당했으나 복직을 쟁취하였다. 그러나 동료가 해고되자 복직투쟁을 전개하던 중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분신하였다.
1988년 7월 17일 송철순 (당시 25세) 세창물산에 입사하여 노조창립과 함께 사무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던 중 ‘파업기금마련 연대집회’ 준비로 현수막을 설치하다 허술한 슬레이트 지붕이 무너져 추락하여 숨을 거두었다.
1989년 5월 4일 김종수 (당시 24세) 서광 구로공장 노동자로 ‘노동운동탄압분쇄, 임금인상 완전쟁취’를 내걸고 파업하던 중 회사측의 탄압에 맞서 “무노동 무임금 철폐, 민주노조 사수”를 외치며 분신하였다.
1989년 5월 24일 조정식 (당시 26세) 반제동맹사건으로 수감되었다 석방된 후 산업재해를 추방하고 노동해방을 염원하면서 영전기계에 입사하여 노동운동을 하던 중 선반작업과정에서 산업재해를 당하여 운명하였다.
1989년 7월 8일 이종대 (당시 41세) 1988년 9월 기아산업노조 대의원 당선. 해고자복직․임금인상 쟁취, 노조민주화를 위해 헌신. 어용노조위원장, 독단으로 임금협상 타결하고 동지를 해고함. 1989년 7월 3일 부당해고에 항의하며 분신, 8일 운명
1989년 9월 15일 김종하 (당시 28세) 경동산업 노동자로 노조민주화 조직인 ‘디딤돌’을 결성하여 활동하던 그는 회사의 부당징계 조치에 항의하여 농성하다 강현중 동지와 함께 분신하였다.
1990년 4월 4일 강민호 (당시 24세) 한신대 생으로 구로구청 부정투표함 사건에서 최후까지 투쟁하다 2년형을 선고받기도 한 그는 노동자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노동자의 삶을 살기로 결심, 대붕전선에 입사하여 야간작업 중 기계에 휘말려 운명하였다.
1991년 1월 5일 김봉환 (당시 54세) 원진레이온 근무 중 몸이 아파 퇴사한 뒤 7년만인 90년에 직엄병 판정을 받았으나 회사와 노동부가 요양신청을 거부하여 치료를 받지 못하고 운명하였다. 장례식날 경찰의 폭행으로 장례를 치루지 못해 137일동안 정문 앞에서 시신이 썩어가야 했다.
1991년 6월 24일 석광수 (당시 30세) 인천 공성교통 노동자로 회사측의 성실한 교섭자세를 촉구하기 위한 차량시위 도중에 경찰의 폭력적인 조합원 연행에 항의하여 분신하였다.
1991년 8월 22일 김처칠 (당시 35세) 합동물산 노동조합 위원장이었던 그는 지·도급제 철폐투쟁을 1년동안 지속하는 과정에서 기사들이 축구를 하다 한강에 공을 빠트리자 공을 건지러 들어갔다가 운명하였다.
1992년 2월 15일 강희수 (당시 45세) 원진레이온 노동자로 산재치료를 거부당한뒤 운명.
1992년 8월 29일 박태순 (당시 27세) 한신대 학생운동 후 부천에서 노동운동에 투신 기무사의 추적을 받던중 시흥역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중 밝혀지기전까지 행방불명으로 알려져 있었다.
1993년 5월 21일 고정자 원진레이온에서 15년간 근무하였으며 91년 역학조사 결과 의학적으로 직업병 판정을 받았으나 법률적으로는 정상으로 판정되어 1년간 방치되는 과정에서 증세가 더욱 악화되어 직업병 증세인 정신분열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93년 9월 9일 임혜란 (당시 28세) 인천 대한 트랜스(주)에 입사하여 노동쟁의와 관련하여 해고당하고 업무방해 혐의로 6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인천노동 선교문화원 창립에 참여하여 활동하다 백혈병으로 운명하였다.
1993년 10월 26일 최 웅 (당시 29세) 경동산업에 입사하여 풍물패와 ‘디딤돌’ 활동으로 해고된 뒤 인천지역해고자협의회와 ‘우리’ 노동상담실에서 근무하는 등 노동운동에 헌신하다가 신혼여행길에 불의의 사고로 운명하였다.
1994년 2월 19일 김상옥 (당시 34세) 두 번의 투옥, 4년간의 현장 노동자 생활, 학생운동에서 노동운동으로 쉼없이 달려간 80년대의 운동가로 위암에 걸려 운명하였다
1996년 1월 13일 김시자 (당시 36세) 한일병원 노동조합 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중 본조 한국전력위원장이 지부장 7명을 징계하자 이의 철회와 ‘어용노조 즉각퇴진’을 요구하며 분신, 운명하였다.
1996년 5월 2일 유구영 (당시 40세) 고려대를 졸업하고 영등포기계공단 노조 사무국장으로 활동 하였고 서노협 선봉대장 및 정책실장, 민주노총 정책기획실 정책부국장으로 활동하면서 한평생을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바치다 간암으로 운명하였다.
1998년 2월 24일 최명아 (당시 35세) 인천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고, 95년부터 민주노총 조직1부장으로 뜨거운 열정과 강한 책임감으로 활동해오다 과로로 쓰러져 운명하였다.
1998년 12월 28일 조현식 (당시 34세) 경기도 광주에서 ‘노동법률상담소’에서 일하면서 노동운동을 시작해 ‘일하는 사람들’ 회장, 광주지역 건설일용노동조합위원장, 민주주의민족통일경기동부연합 정책위원으로 활동하다 사무실에 화재가 발생해 운명하였다.
1999년 1월 30일 정성범 (당시 32세) 학생운동과 전국민주학생연맹위원, 사노맹중앙연락국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노동운동에 헌신 전노협 총무부장을 역임하였고, 민주노총 충남서부지구협의회 조사통계부장으로 활동하다 건강악화로 투병 중 운명하였다.
1999년 5월 21일 배동복 (당시 37세) 영창악기 노동조합에서 활동하다 노동시간 40시간 쟁취와 정리해고중단 노숙투쟁을 치루고 귀가 도중 불의의 사고로 운명하였다.
1999년 8월 27일 김종배 (당시 37세) 박창수 열사 사인진상규명 투쟁으로 구속되기도 했던 동지는 전 전노협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고, 전노협 해산 후 ‘전노협 백서발간에 앞장섰다. 공공연맹 건설과 교육국장으로 활동하다 불의의 사고로 운명하였다.
2000년 2월 29일 김명한(당시 32세) (주)신흥 조합원, 민중당 민주노동당 당원. 99년 임단투 파업투쟁 비상대책위, 노동조합 사무국장등 노동조합과 당활동가로서 열성적으로 활동하던 중 운명하였다.
2000년 8월 26일 최진욱(당시 29세) 사회보험노조 경인본부에서 교선부장, 전국 대의원 등 노조간부로 헌신적인활동을 하다 8월 7일 공안탄압분쇄 민주노총 집회 집회 참석 도중 깃대가 전차선에 닿아 감전사고를 당해 운명하였다.
2001년 2월 23일 이옥순 (당시 48세) 70년대 원풍모방에 입사하여 노동운동을 시작하였고 91년부터 장기수 선생님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운명전까지 통일을 여는 여성모임 ‘금강초롱’ 회장, 70민노회 사무국장, 전국연합 대외협력위원장으로 활동하다 폐암으로 운명하였다.
2001년 5월 18일 김순조(당시 36세) 안산지역 노동운동과 민주화투쟁 중 해고되었다. 안산 한벗노동자회 결성에 참여하였고, 창흥정밀노조 사무장으로 임단협을 준비하던중 불의의 산재사고로 운명하였다.
2001년 9월 5일 안동근(당시 41세) 건설 레미콘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10여년간 조직화와 투쟁을 통해 2000년 전국건설운송노조 건설 사무처장을 역임하였다. 2001년 레미콘노동자 상경투쟁등을 조직하였고, 과로로 인한 병으로 투병하다 운명하였다.
2002년 3월 8일 유순조(당시 53세) 1950년 충청도에서 태어남. 84년 인천지역의 이천전기에 입사 87년 노동자대투쟁에 참여 투옥됨. 이후 이천전기에서 세차례에 걸친 해고투쟁을 전개하다 98년 IMF시 정리해고 반대투쟁을 전개한던중 구속되기도 하였다. 2002년 3월 8일 대장암으로 운명하였다.
2002년 4월 2일 김기욱(당시 39세) 대우중공업노동자로 노래패, 인천지역금속노동자노래패 연합 결성 및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노조 간부와 대의원으로 인천노동문화제 준비위원장 등 노동문화운동에 전념하던 중 간암으로 운명하였다.
2002년 5월 21일 한경석(당시 40세) 부천 신광전자노조 위원장을 역임하며 89년부천지역임금인상투쟁과 전노협부위원장활동중 구속되었다. 95년 복직되어 민주노총부천시협 활동 등 노동운동에 헌신하다 백혈병으로 운명하였다.
2002년 11월 22일 천덕명(당시 38세) 택시노동자로 인천 경인운수노조에서 대의원으로 활동중 2002년 9월 택시제도개선을 위한 민주택시인천본부 65일파업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로인해 사측의 집중탄압을 받았고,이에 맞서 월급제 사수와 인간다운 삶을 위해 분신하였다.
2003년 8월 4일 송석창 (당시 39세) 1964년 전북 진안 출생. 89년 전주시 완산구 지역의료보험조합 입사. 99년 국민연금 관리공단 전입. 2003년 8월 4일.‘국민에게 사랑받는 국민연금제도 개선’을 호소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2004년 2월 13일 박동진(당시 43세) 의료보험노조 서울본부 사무국장, 본부장 등 역임 두차례 해고됨. 2001년 해복투순회투쟁 및 이사장이임식저지 건으로 수배생활 중 암진단, 병원치료가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운명하였다.
2004년 12월 30일 박상윤(당시 39세) 인쇄노조 활동등 노동현장에서 노조 민주화운동과 이후 민주노총 서울본부 조직국장, 사무처장으로 활동하며 비정규직 및 특수고용노동자 조직사업을 하던중 운명하였다.
2005년 6월 14일 김태환(당시 39세) 수안보관광호텔 노동조합 위원장과 한국노총 충주지부장으로 활동하던 중 충주지역 레미콘 노조 파업관련 농성지원 중 경찰에 의해 죽음을 당하였다.
2006년 8월 19일 이정미(당시 41세) 청구성심병원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노동법개악 투쟁등 참여. 병노협 준비활동 등 중소병원 노동자들의 투쟁에 항상 함께 하던 중 위암으로 운명하였다.
2007년 1월 23일 전응재(당시 44세) 민주택시연맹 인천 우창기업분회에서 조합원으로 활동하던 중, 택시자본의 월급제 파괴책동과 동료들의 부당해고등 노동탄압에 맞서 분신 운명하였다.
2007년 3월 28일 김미영(당시 39세) 삼기전자 노조 결성을 주도하고 위원장으로 활동 함. 이후 전국여성노조인천지부에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조직화와 권리 확대를 위해 열성적으로 활동하던 중 운명하였다.
2007년 4월 15일 허세욱(당시 55세) 한독운수 노동조합 조합원으로서, 민주노동당 당원, 참여연대, 평통사 회원으로서 누구보다 투쟁에 헌신적이었으며, 협상 최종 시한을 넘겨 강행되고 있는 한미FTA를 저지하기 위해 분신 운명하였다.
2007년 4월 23일 문성환(당시 40세) 기아자동차 노조원으로서 헌신적으로 활동하던 중 과로사로 운명하였다.
2008년 9월 4일 차봉천(당시 62세) 전국공무원 직장협의회 총연합(전공련)위원장, 전국공무원노조 초대위원장으로서 헌신적으로 활동하던중 운명하였다.
2007년 10월 27일 정해진(당시 46세) 전기분야 노동자로서 민주노조 사수, 단체협약체결을 위하여 인천전기원 총파업을 진행하던중 분신, 운명하였다. ‘투쟁하지 않는 요구는 구걸이다’
2008년 11월 28일 박윤정(당시 32세) 한국외국어대. 한총련 학생운동 활동 이후 민주노총 총무국, 선전국원으로서 헌신적으로 활동하던중 급성 폐렴으로 운명하였다.
• 학생열사 •
1983년 12월 11일 한희철 (당시 22세) 군입대 후 시위주동자로 수배중인 친구에게 주민등록증을 발급 받게 하기 위해 동사무소에 근무하는 친구에게 편지를 써 주었는데 이후 편지가 들통나고 보안대에 끌려가 조사를 받은 뒤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1985년 10월 11일 우종원 (당시 23세) 85년 서울대 운동권에서 핵심적인 위치에 있던 그는 민추위 관련으로 수배를 받아오다 경부선 철로변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1985년 10월 21일 송광영(당시 27세) 경원대 학생으로 “학원악법 철폐하고 독재정권 물러가라!”,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군사독재에 항거하여 분신하였다.
1986년 6월 5일 이경환 (당시 19세) 조국 사랑의 순수한 열정으로 사회 모순에 대해 가슴 아파하다 청량리 맘모스 호텔 옥상에서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투신하였다.
1986년 6월 21일 김성수 (당시 18세) 서울대 학생으로 총학생회 연극부에서 활동하다 정체불명의 사람에게 전화를 받고 집을 나간 뒤 부산 송도 앞바다에서 시맨트 덩어리에 매달려 있는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당시 23세) 서울대생으로 수배자 검거에 혈안이 된 치안본부 대공분실요원에게 연행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한 끝에 운명하였다. 열사의 죽음은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1988년 6월 6일 박래전 (당시 25세) 숭실대생으로 인문대 학생회장으로 활동하다 학생회관 옥상에서 “청년학도여 역사가 부른다. 군사파쇼 타도하자”라고 외친 뒤 분신하였다.
1990년 3월 28일 김용갑(당시24세) 89년 비민주적 학사운영과 폭력비리가 많았던 속초동운전뭉대 입학후 학원민주화투쟁을 적극참였고,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어 등록금동결투쟁을 벌이며 학교당국과 마찰중 실종 사고에 의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1990년 11월 8일 최응현 (당시 22세) 한양대 학생으로 전방입소 반대투위 부위원장으로 활동 중 구속되었다 복학한 뒤 민주화투쟁에 제대로 복무하지 못함을 자책하는 유서를 남기고 투신하였다.
1991년 2월 3일 남현진 (당시 22세) 한국외국어대생으로 학생회 간부로 활동 중 군 입대. 상관이 “통일이 되면 우리의 적은 누구인가?” 라는 물음에 “미제국주의다”라고 대답한 뒤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1991년 5월 3일 천세용 (당시 21세) 경원대생으로 민족사연구회 ‘한얼’에서 활동하였던 그는 ‘강경대학우 폭력살인 자행한 노태우 정권 타도를 위한 결의대회’ 도중 몸에 불을 붙인채 투신하였다.
1991년 5월 25일 김귀정 (당시 26세) 성균관대생으로 심산연구회 회장과 동아리연합회 총무부장을 역임했던 그는 제4차 국민대회에 참가하였다 경찰의 무차별적인 진압작전에 포위되어 백골단의 폭력에 의해 운명하였다.
1991년 8월 3일 고재욱 (당시 21세) 류정하 (당시 26세) 신구전문대생으로 총학생회 간부로 활동하다 수련회에서 학우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고 구하기 위해 물속으로 뛰어들어갔으나 심장마비로 운명하였다.
1995년 12월 14일 장현구 (당시 25세) 경원대생으로 93년도에 총학생회 학원자주화 추진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중 파행적 학원운영 중지와 경원대 부정입시사건에 대해 진상을 밝힐 것을 요구하였으나 학교측의 탄압이 계속되자 송파사거리에서 분신하였다
1996년 4월 6일 진철원(당시 20세) 경원대입학 한얼 동아리 활동중 학교당국의 고질적 사학비리에 대항하던 장현구동지의 분신관련 명예회복과 진상규명 투쟁을 벌이던중 재단의 살인적 학원운영과 학생들의 무더기 징계와 구속수배에 맞서 분신운명하였다.
1996년 4월 7일 권희정 (당시 23세) 성신여대생으로 ‘등록금 문제와 교육환경 개선을 위한 학원 자주화투쟁’을 모범적으로 전개하였으며 기나긴 단식투쟁을 통해 견결한 투쟁의지를 갖고 완전해결을 강력하게 촉구하다 단식후유증으로 운명하였다.
1997년 2월 13일 한상근 (당시 26세) 용인대 동아리 연합회 회장을 역임하며, 총학생회 학원자주화 추진위원회 산하 ‘대학종합평가인정제소위’ 위원장으로 활동던 중 학교당국의 일방적인 학사운영에 항의하며, 분신하였다.
1997년 9월 21일 이형관 (당시 25세) 군산대 생으로 군산대 신문 편집장, 전대기련 전북지부 집행부, 전대기련 중앙집행위원을 역임하면서 정력적으로 대학언론운동을 해오다 계속되는 밤샘회의에도 불구하고 대학언론 탄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원광대로 가던 도중 쓰러져 뇌출혈로 운명하였다.
• 사회운동열사 •
1969년 11월 4일 권재혁 (당시 45세) 해방직전 독립운동 모임 장소 문지기를 하면서 민족의식 키움. 1960년 4월 혁명시 육사 경제학과 교수 역임. 중앙정보부에 의해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으로 조작사형 당함.
1973년 10월 19일 최종길 (당시 42세) 서울대 법대 교수로 중앙정보부에서 조작한 ‘유럽거점 대규모 간첩단사건’으로 조사를 받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1986년 5월 26일 김상원 (당시 33세) 86년 영등포에서 불신검문에 항의하다 연행되었고 이과정에서 구타로 식물인간이 된 채 77일간 투병생활 후 운명하였다. 경찰의 반인권적 처사에 맞서 가족의 오랜 법정싸움 끝에 경찰의 유죄가 인정되었다.
1988년 5월 13일 고정희 (당시 29세) 연세대생으로 민족통일애국청년단 중앙본부에서 대통령 선거운동을 하다 서초서 대공과에 연행 당해 정신병원에 강제 수용된 뒤 강남 성모병원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1989년 12월 11일 이재식 (당시 37세) 89년부터 노점상을 시작한 그는 노태우정권의 무자비하고 대책없는 노점상 철거에 항의하여 분신하였다.
1990년 12월 6일 김병곤 (당시 37세) 민청학련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석방 후 민청련 활동을 하던 중 구로구청 부정투표함 사건으로 구속되어 교도소 생활을 하다 위암3기로 운명하였다.
1990년12월 12일 조영래 (당시 43세) ‘전태일 평전’의 저자이기도 한 그는 인권 변호사로서 많은 사건을 담당하였고,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을 만드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다 지병인 폐암으로 운명하였다.
1991년 4월 25일 김영환 (당시 26세) 한겨레 사회연구소 연구원으로 한미군사관계, 평화, 군축문제, 남북관계, 통일문제 등을 연구하던 그는 강경대 학생이 운명한 다음날 자취방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1991년 5월 8일 김기설 (당시 27세) 전민련본부 사회부장으로 활동하던 중 강경대 학생의 죽음 이후 범국민 대책회의에 참가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다 “폭력살인 만행 노태우정권 타도하자”라고 외치고 분신하였다.
1993년 8월 15일 성순희 (당시 56세) 손병선씨와 결혼하여 생선장사, 꽃장사 등을 하며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던 그는 큰 딸이 해직된 후 전교조 교사가족회 서울지역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남편이 안기부에 연행된 뒤 기나긴 수배생활을 하다 운명하였다.
1993년 9월 11일 김영자 (당시 50세) 여성농민운동사의 산 증인이요 여성농민의 주인된 삶을 위하여 이땅의 자주․자립적 농업의 건설과 진정한 농민해방을 염원하며 온 몸으로 헌신하다 갑작스런 위암으로 운명하였다.
1994년 1월 18일 문익환 (당시 77세) 76년 ‘3․1 구국선언’으로 감옥에 처음 가신 후 6번의 감옥 생활을 하면서 평생을 나라의 민주화화 통일을 위해 바쳤다.
1994년 1월 26일 이오순 (당시 69세) 송광영 열사의 어머니로 유가협에서 활동하면서 자식의 정신과 뜻을 따라 이땅의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헌신하였다.
1994년 8월 12일 이범영 (당시 39세) 한청협을 결성하고 의장을 역임한 그는 76년 첫 구속이래 구속 3번 수배 3번을 거치면서 한걸음 물러섬 없이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에 헌신해왔으나 이 기간 중 얻은 병이 원인이 되어 운명하였다.
1995년 11월 28일 이덕인(당시 28세) 1990년 6월부터 아암도에서 노점시작, 구청의 노점철거에 맞서 망루농성 중 생필품보급을 위해 나오던 중 실종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1996년 1월 최종진(당시 47세) 기독교농민회 활동을 하며 농어촌 부채탕감투쟁등으로 투옥되기도 하였고, 전민련, 전국농민회총연맹 사무처장등을 역임하고, 우리농업살리기 활동도 하였다. 96년 폐암으로 운명하였다.
1996년 10월 3일 김말룡 (당시 69세) 8차례에 걸친 투옥에도 굴하지 않고 이땅의 노동자 권리를 위해 초지일관 싸워온 ‘한국 노동운동의 산 증인’이다. 국회의원 재직 시절에도 항상 노동자와 함께 하고자 했으며 청렴결백한 활동으로 모범이 되었다.
1997년 2월 15일 민병일 (당시 39세) 95년부터 구갈철거민대책위원회에서 활동해오던 동지는 노점으로 생계를 이어가다 장사도구를 빼앗겨 파출소에 민원을 제기하러 갔다가 경찰관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해 두개골함몰의 중상을 입고 투병하다 운명하였다.
1999년 3월 14일 계훈제 (당시 79세) 서울대 재학시절부터 학생회장으로 민주화운동에 투신했으며 ‘사상계’ 편집장,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부의장 등을 거치면서 3차례나 옥고를 치르고, 평생을 민주화투쟁에 헌신한 재야운동권의 원로로 지병으로 운명하였다.
2002년 1월 18일 김남준 (당시 36세) 여주지역에서 민중정치연합, 진보정치연합 여주대표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민중후보 출마도 하였다. 우리문화연구소와 민예총 여주지부 사무국장 등, 이천노동상담소 활동중 운명하였다.
2003년 3월 3일 정태수(당시34세) 장애인운동청년연합 조직부장, 장애인자립생활추진위 조직부장등을 역임하며 장애해방을 위해 헌신 아암도 생존권투쟁 중 구속서울장애인연맹에서 활동하던 중 ‘제1기 장애인학교’ 수료식 도중 과로로 운명하였다.
2003년 4월 13일 강희철(당시 42세) 인천민주노동청년회, 통일을 여는 민주노동자회 조직위원장, 노동자통일대 백두, 평화와참여로가는 인천연대 본부장, 전국연합 조직, 정치위원장을 역임하며 청년운동과 통일운동에 헌신하다 뇌출혈로 쓰러져 운명하였다.
2003년 11월 20일 제종철(당시 34세) 한총련 연대사업 활동후 저소득 실직가정 방과후 학교등 인천지역활동후 미군 장갑차여중생고신효순심미선살인사건범대위 상황부실장, 의정부일반노조 활동 중 의정부철로에서 열차사고로 운명하였다.
2004년 2월 14일 김진균(당시 67세)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80년 해직 84년 복직되었다.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공동의장으로 활동하며 민중중심의 사회이론정립에 전념하였다. 전노협, 민주노총 고문등을 역임하였고, 후진양성과 많은 진보 사회단체에서 대표로 활동하던 중 직장암으로 운명하였다.
2004년 6월 8일 강지연(당시 35세) 민중병원에서의 노동운동을 시작으로 노동자 문예운동을 진행함. 전국여성노동조합 서울지부 활동중 운명하였다.
2004년 11월 15일 조용술(당시 85세) 전민련고문, 전국연합 상임고문, 범민련남측본부 고문, 통일민족대회 고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우리하나되기운동본부 고문등 평생을 민주주의와 통일운동에 헌신하시다 운명하였다.
2005년 1월 7일 김남식(당시 81세) 해방후 자주적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고려대 아시아문제연구소, 통일부, 국제문제조사연구소등 현대사와 통일 관련 연구활동. 통일뉴스 상임고문을 맡아 숱한 저술과 강연 글을 통해 민족 자주권을 설파 옹호하였다.
2005년 4월 29일 엄성준(당시 35세) 숭실대 재학중 농촌문제연구회 활동을 하였다. 졸업 후 농민운동에 투신하여 충남 진천군 농민회 지회 창립에 헌신하였다. 농민회 정책실장으로 활동 중 봄농활 수행차 내려온 학생들을 태우고 운전하던중 사고로 운명하였다.
2005년 11월 24일 전용철(당시43세) 신자유주의 농업정책에 의한 쌀수입개방, 자주농업 사수를 위한 농민대회 중 경찰 방패에 의한 폭력으로 부상을 당한 후 운명하였다. 경찰의 과잉진압을 규탄과 사인진상규명을 위한 범국민대책위를 구성하여 진상을 규명하고 운명한지 40여일 만에 안장되었다.
2007년 11월 16일 권중희(당시71세) 백범 김구선생 암살범 안두희를 ‘정의봉’으로 응징. 진상규명 촉구에 앞장. 민족정기구현회 설립, 6.15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고문 등 통일운동 일선에서 활동하던 중 운명하였다.
2008년 7월 26일 정유미(당시45세) 재미한국청년 연합 ‘한청’ 시카고 지부, 청년교육문화원 원장, 시카고지부 국제연대위원으로 전민특위 공동사무국으로 치열하게 활동하던중 운명하였다.
▣ 모란공원 가는 길
⊙ 버스 - 1330번 좌석 버스 (청량리에서 출발하는 청평행 좌석버스 - 모란공원 바로 앞에서 내리면 됩니다) - 330번 765번 좌석버스, 30번 일반버스 (청량리 역앞에서 타고 마석종점에서 내린후 도보로 약 10분 걸어야합니다.)
⊙ 기차 - 청량리 기차역에서 탑승, 마석역에서 내린후 도보로 약 15분 정도 걸어야 합니다. - 하루에 8번 : 청량리역 출발시간은 05시25분, 06시15분, 07시50분, 11시50분, 15시 50분, 19시, 20시40분, 22시 30분입니다. 소요시간은 약 45분에서 50분입니다.
⊙ 자가용 - 서울에서 출발 : 도농 삼거리(여기서 좌회전) → 남양주 금곡 → 마치터널 → 마석 (대성리 방향으로 큰 길을 따라서 약 1㎞정도 가면 됩니다.
- 지방에서 출발할 경우 :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구리I.C → 도농삼거리 (이하는 서울에서 출발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
'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 > 밥 먹고 도시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역사문화탐방 제8차 교육 답사, 2013.11.18(월) 진행 (0) | 2013.11.15 |
---|---|
한양, 한성 그리고, 경성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0) | 2013.11.15 |
망우리 비명(碑銘)으로 읽는 근현대 인물사, 망우리 공원묘지 (0) | 2013.11.12 |
2013년 제 8회차(11월18일) 하반기 서울역사문화탐방, 남산 및 해방촌 (0) | 2013.11.11 |
서울 문학기행 (0) | 2013.1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