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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제 8회차(11월18일) 하반기 서울역사문화탐방, 남산 및 해방촌

草霧 2013. 11. 11. 21:02

 

 

 

2013년 제 8회차(1118)

 

하반기 서울역사문화탐방

    

 

 

 

 

주 제 : '해방촌 골목길에 담긴 외세의 침략과 분단 속 서민의 애환'

 

답 사 : 남산 및 해방촌 일대

강 사 : 안창모(경기대학교 건축대학원 교수)

 

일 시 : 2013. 11. 18() 14:00~17:00

 

장 소 : 서울 힐튼호텔 맞은편 성곽길

 

 

이태원표지석 - 용산고(학병도 참전기념비) - 108계단- 영락보린원(전생서터) - 독일문화원 - 해방촌오거리 - 해방교회 - 해방촌성당 - 해병대 초대교회 - 신흥로 해방촌 안내판(경리단 초입) - 보성여중고 - 해방촌오거리 - 신흥재래시장 - 센터니얼 크리스챤스쿨을 보고서 돌아가는 코스 (3시간 내외)

  

 

 

 

  

장충체육관~신라호텔~남산2호터널~자유센터~남산 봉화대 ~남산공원

 

남산입구~해방촌~용산고~코이너캠프~전쟁기념관~사우스포스트 주변

 

    

 

 

 

'해방촌 골목길에 담긴 외세의 침략과 분단 속 서민의 애환'

 

 

일제수탈 피난처도시개발의 그늘

토지 빼앗긴 농민들 거주지

6·25 뒤엔 해방촌으로 명맥

정권마다 강제이주로 마찰

    

 

 

 

해방촌이란?

서울시 용산구 용산2가동, 용산1가동일부(용산고 서쪽, 남산타워 남쪽=남산 밑의 언덕에 형성된 마을) 원래는 일본군 20사단의 사격장, 가난한 일본인들이 군부대에 기대살던곳-해방후 미군정이 접수했으나 통제력 미약으로 실향민 차지 - 북에서 내려온 실향민이 육군형무소로 사용 - 미국관사로 사용, 45년 광복과 함께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 북쪽에서 월남한 사람, 한국전쟁으로 인해 피난온 사람들 정착..

 

이범선선생 '오발탄'

 

달동네의 역사

일제 강점이 시작된 1910년대, 일제에 땅을 빼앗기고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농민들은 일자리와 먹을 것을 찾아 서울로 모여들었다. 살 집이 없던 이들 대부분은 산비탈, 제방 등에 움집 같은 토막을 짓고 집단으로 생활했다. 땅을 파 토굴을 만들고, 그 위에 거적 따위를 얹어 만들었다. 이런 가난한 집들이 집단을 이루고 개량되면서 달동네가 탄생했다.

 

1927년 조선총독부가 파악한 토막민은 3000여명이었다. 이들은 주로 홍제동, 돈암동, 아현동, 신당동, 금호동 등지에 흩어져 살았다. 토막민은 1920~30년대를 거치며 급속히 늘어나 1942년에는 37000여명에 달했다. 그러나 이듬해, 일제는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틈을 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토막집을 정리해 나갔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1996년 펴낸 <일제강점기 도시계획연구>에서 조선총독부와 경성부는 토막민들을 구슬려 속이거나 강제로 징집해 일본 홋카이도나 사할린 탄광으로 징용해갔다고 썼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서울의 무허가 주택은 더 늘어났다. 서울 남산자락 밑에 자리한 우리나라 공식 1호 달동네 판자촌인 해방촌’(용산구 용산동2)도 이 때 형성됐다. 이 시기의 무허가 집들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종이상자, 양철, 함석 등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이 가운데 미군들의 전투식량을 담은 (C)-레이션 박스가 주요 자재였던 터라 무허가 판잣집을 하코(상자·)라는 일본말을 써 하꼬방이라고 불렀다.

 

전쟁에 따른 파괴와 상처가 복구될 무렵인 1950년대 말부터 서울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피란민과 이농민들이 서울로 흘러들어와 도시빈민으로 전락했다. 이들은 도심에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생활했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은 1959년 미아리에 정착지 사업을 벌여 도심의 무허가 거주민들을 강제이주시켰다. 이 사업에 따라 1970년까지 상계동, 중계동, 도봉동, 창동, 쌍문동, 구로동, 사당동, 신림동, 봉천동, 가락동 등 서울 외곽지역으로 달동네가 확산됐다.

 

이런 달동네는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공영재개발과 합동재개발을 통한 불량촌 재개발 사업으로 하나둘 사라졌다. 70년대 후반 건설붐을 타고 중동으로 눈을 돌린 건설자본이 당시 투입한 인력과 기술을 바탕으로 80년대 상계동, 사당동, 신당동 등 달동네를 하나하나 재개발해 나가기 시작했다. 하늘 아래서 가장 가까이 달을 볼 수 있고, 가장 먼저 달이 뜬다는 뜻의 달동네라는 말도 이때부터 유행했다.

 

재개발로 하나둘 사라져가던 서울의 달동네들은 2002년 이명박씨가 서울시장이 된 뒤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없어지기 시작했다. 이 시장은 그 전의 재개발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재개발인 뉴타운사업을 추진했다. 2005년까지 은평, 왕십리, 길음, 아현, 돈의문, 영등포, 노량진 등 서울시내 26개 지역이 뉴타운 주택재개발사업 대상지로 지정됐다. 남아 있던 달동네 대부분이 여기에 포함됐다. 뉴타운 사업은 불량주택 정비라는 측면에서 긍정적 대목이 있으나, 세입자 문제, 집값·땅값 폭등, 고층 아파트 일변도의 주택 공급 등 수많은 사회 문제를 낳았다.

    

남산자락 위치근대화의 뒤안 보는 듯

해방촌은 남산 3호 터널을 빠져나와 강남으로 달리는 반포대로의 서쪽, 남산 중턱의 소월길과 용산 미군기지 사이 산기슭에 자라난 동네로 용산2가동의 또다른 이름이다. 2만명도 넘는 사람들이 사는 큰 동네건만 그 옆을 스쳐지나가는 반포로와는 미군기지 다 가서야 옹색한 샛길을 통해 한번 만날 뿐이다. 이 길 아니고는 북쪽의 소월길, 서쪽의 후암동 길로만 출입이 가능해 해방촌은 시민의 일상적인 시야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서북출신 월남민 주류신앙공동체같은 생활

 

 

 

 

소월길에서 한강을 향하면 하늘로 솟은 교회첨탑 아래 산허리를 온통 뒤덮은 집들이 이탈리아의 언덕 위 중세도시를 연상시킨다. 바로 해방촌이다. 이제는 포장된 대로도 생겨 용달차 사이에 심심찮게 자가용도 보이고, 빽빽하게 들어찬 다가구 주택들의 벽돌담에 노란 가스관이 어수선한 것이 여늬 주택가와 그리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러나 꼬불거리고 가파른 골목길에, 밀면 쓰러질 듯한 키높이의 판잣집들은 동네를 압도하는 해방교회와 함께 예사롭지 않은 이 동네의 역사를 증언한다. 해방과 한국전쟁 뒤 춥고 배고픈시절을 살아온 세대에게 해방촌은 한 시대의 상징이다.

 

고향을 뒤에 두고 38선을 넘어와 맨주먹으로 객지삶을 개척해야 했던 실향민에게, 특히 종교의 억압을 피해 탈출한 월남민에게 해방촌은 문자 그대로 해방의 마을이자 가나안이었다. 주민끼리 서로 돕는 가운데 고난을 딛고 생활을 일구어간 보금자리였으며, 이들이 개별적 집단적으로 이룩한 근대화의 한 기념비였다.

 

지금 해방촌이 들어선 남산 기슭은 조선조 내내 인가가 드믄 솔밭이었다. 행정적으로는 성저십리(城底十里)에 속해 한성부가 관장하는 땅이었지만, 도성은 능선 넘어 남촌에서 끝났고 이태원에서 도성으로 들어가는 길도 남산의 여백을 피해 후암동으로 돌아갔다.

 

조선 후기에 도성이 유민들로 넘쳐나고, 세곡수송선이 닿던 용산강 마포강에 경강상인의 마을이 융성했지만 이 지역은 여전히 한적한 산기슭일 뿐이었다. 갑오개혁까지도 왕실과 문묘의 제사에 쓸 황소 양 돼지를 기르던 전생서(典牲署)가 해방촌 부근, 지금의 후암동 한 구석에 남아있을 수 있던 것도 이런 까닭이었다.

 

격동의 세기말 세기초에 이르러 남산 남쪽에도 변화의 물결이 밀어닥친다. 1894년 동학란을 빌미로 서울에 들어와 지금 효창동 일대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조선정부를 압박해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고 다음해 용산 땅 300만평을 강제수용해 대규모 군사기지를 만든다.

 

서울역, 용산역을 잇는 한강로와 용산 군기지를 가로질러 남대문에 연결하는 후암동길도 이때 개설된다. 이에 따라 해방촌과 서쪽으로 잇다은 후암동은 한강로를 따라 펼쳐진 남영동, 동자동, 청파동, 원효로와 함께 대표적인 일본인 거주지로 성장한다. 일본인 자녀를 위한 교육기관으로 용산중고교와 수도여중고교도 세워진다.

 

해방촌은 말 그대로 해방과 함께 생겨나고 한국전쟁과 함께 자랐다. 8·15 해방이 되자 30만명을 웃도는 월남동포, 해외로부터의 귀환동포가 일본인이 떠난 서울로 밀려들고 한국전쟁으로 150만에서 200만명에 달하는 월남동포 중 상당수가 전쟁으로 주택재고의 3할을 잃고 페허가 된 서울에서 새 삶을 찾는다.

 

이 혼돈의 시대에 당국은 일본인이 남기고 간 가옥들을 접수해 실향민에게 불하하지만, 물밀듯이 들어오는 유입인구를 담기에 적산가옥은 턱없이 모자랐다. 이에 이들은 당국의 묵인 아래 산비탈, 하천변의 공유지마다 판잣집 동네를 만든다. 해방촌도 그런 시대의 산물이다.

 

해방 뒤, 후암동 등 남산 밑의 일본동네는 월남민, 특히 서북지역 출신자들이 이어받는다. 뒤따라 내려온 사람들은 먼저 정착한 동향인들의 동네 가까운 산비탈에 해방촌을 짓고 정착한다. 첫 정착자들 가운데에는 평안북도 선천 사람들이 많아 동네에 군민회까지 두었다. 여러 세대가 힘을 합쳐 루핑과 판자와 깡통 등으로 집을 지었는데 하도 허술해 옆집 방귀소리가 들릴 지경이었고 식수는 남산의 샘물로, 볼 일은 공중변소로 해결했다.

 

리어카 하나 간신히 다닐 길밖에 없어 차를 타려면 후암동 종점까지 내려가야 했고 그나마 비오면 진흙탕이 되버려 해방촌 사람들은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고 했다. 동네에서 만 담배와 염색한 군복을 남대문 시장에 내다팔거나 심지어 지게를 져야 하는 생활이었지만, 이들은 해방교회 등을 세워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공산치하에서 문을 닫아야 했던 고향의 기독교 명문 보성여중고교와 숭실중고교를 다시 세워 자녀들의 앞날에 투자한다.

 

지금의 해방촌은 옛 해방촌이 아니다. 동네 위쪽으로는 소월길이 뚫리고 아래로는 반포대로가 열려 교통이 나아졌다. 무허가로 깔고앉았던 땅도 불하돼 어엿한 지번까지 부여받았고, 환경개선사업이 진행돼 집들도 번듯해졌다. 숭실중고교는 응암동으로 이사가고 그 자리에는 입시학원이 들어섰다. 담배말이와 군복염색 대신 스웨터짜기 등 가내수공업이 자리잡았고, 근면한 초기정착자들은 성공해 동대문 평화시장으로 진출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나가고 새로운 빈곤층이 그 자리를 대물림했다. 이제 해방촌은 더 이상 서북사람들의 동네가 아니다.

    

 

도시의 종양천덕꾸러기 불구 건강성 가득

당국의 입장에서 해방촌은 불법정착민의 불량주거지로, 개조되어 마땅한 문제동네였다. 강제력을 동원해 철거한 뒤 집단이주시키거나, 시민아파트를 지어 집단수용하거나, 양성화해서 주민 스스로 환경개선하도록 만들거나, 건설업체와 합동으로 재개발하도록 하는 것이 불량촌에 대한 당국의 정책이었다.

 

이에 따라 해방촌은 1960년대에 양성화되고, 70년대에는 재개발계획이 구상된다. 그러나 재개발로 밀려나갈 것을 우려한 영세민들의 저항으로 그 계획은 무산되고 자율적인 환경개선의 길로 접어든다. 부분적으로 고층 아파트를 지으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남산의 주변환경을 보전하자는 공론에 밀려 다가구 주택이 들어서는 데에 그친다.

 

동소문동, 현저동, 옥수동, 창신동, 봉천동 언덕 위의 달동네를 허물고 들어선 아파트 숲이 여기는 피해갔던 것이다. 개발론자의 눈에 불량촌은 수술해 마땅한 도시의 종양이다. 그러나 과연 해방촌은 종양이었던가. 불량촌의 거주자는, 이들이 그리듯, 탈출구 없는 빈곤의 문화에 찌든 주변적 인간, 구제할 길 없는 한계적 계층인가. 이들의 비공식적경제활동은 정말 조국근대화의 공식부문과 무관한 별개의 활동인가. 물리적으로 불량한 환경에는 사회적으로 이탈된 삶이 담길 수밖에 없는가. 어째서 불량한 해방촌범죄없는 마을이 될 수 있었을까. 불량촌의 재개발에서 이익을 보는 것은 누구이며 손해를 보는 것은 누구인가. 소월길 건너 남산의 무성한 소나무 숲과 대조적으로 해방촌에는 나무가 없다. 나무를 심을 만한 변변한 길도 없고, 그럴 만한 마당이 있는 집도 드물다. 호화로운 하얏트 호텔과 그 아래 이태원, 한남동의 호화주택에 비해 해방촌의 집들은 너무나 초라하다. 그 흔한 피자가게, 카페 하나 없고 외래어 간판 하나 보이지 않는다. 떡볶이 집, 만화가게, 비디오 집과 알전구가 매달린 초라한 재래시장이 고작이다. 그러나 해방촌에는 나름대로의 역사와 꿈과 희망이 서려있다.

 

달을 안고 옹기종기 모여사는 우리들, 근심 잘날 없어도 마음만은 부자라네, 우리 동네 달동네십여년전 텔레비전 연속극 달동네의 주제곡에 나오던 구절 그대로다. 가파른 계단길, 한뼘의 땅도 허투루 쓰기 어려운 옹색한 동네지만 블록 담장 옆에 깨진 옹기그릇일망정 과꽃이 피어나는 한 해방촌에는 내일이 있다. 한국근대화의 한 기념비이면서 인간해방의 동네일 수 있다.

    

강홍빈<서울시립대 교수·서울학연구소장>

    

 

 

 

 

 

서울에서 낡고 뒤처진 동네 대표격인 용산구 해방촌

장기체류 외국인과 젊은이들 발길 늘어

낡고 쇠잔한 풍경에 학생·주민 함께 작업한 골목 벽화

이국적 카페·레스토랑들이

여긴 못 살 데여. 걸어다니기도 힘들고 개발도 안 되고.” 서울 용산구 용산2가동, 속칭 해방촌. 해방촌 들머리 골목길에서 만난 70대 어르신은 고개부터 절레절레 저었다. ‘못 살 데35년째 살고 있는 그는 이곳이 서울 한복판에서 가장 낙후된 동네일 것이라고 했다. 주민 스스로 가장 뒤처진 동네라고 여기는 동네. 1945년 광복 뒤 이북에서 내려온 이주민들이 터를 잡은 이래 한국전쟁 피난민들이 몰려와 정착하며 이뤄진, 남산 자락 비탈마을이 해방촌이다.

 

해방촌 옛 선천군민회쪽에서 바라본 남산타워

수십년간 정체됐던 이 산비탈 골목마을에 최근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몇년 전부터 이태원 쪽에 비해 물가·방값 싼 곳을 찾아 들어오는 외국인들이 늘어났고, 들머리 도로변으론 덩달아 영어 간판을 단 레스토랑·카페들이 잇따라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태원 쪽과 가까운 언덕길 도로변 가게들엔 영어 병기 간판이 즐비하다. 해방촌 언덕길 들머리 고바우수퍼 주인은 “3~4년 전부터 외국인이 크게 늘어, 이젠 손님의 80%가 외국인이라고 말했다.

 

요즘엔 해방촌 낡은 골목길을 탐방하는 젊은이들 발길도 부쩍 늘고 있다. 용산구청이 마련한 아트빌리지’ ‘그린파킹(담장 허물기)’ 사업 등이 지난 1월 마무리돼, 동네 곳곳에 벽화가 그려지고 조형물이 설치되면서 볼거리도 풍성해졌다. 지역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뜻있는 주민들의 노력도 이어진다. 지역민 쉼터이자 도서관인 종점 수다방’, 열린 공간 빈가게’, 연구 공간 수유너머 아르(R)’ 등 주민의 문화사랑방 구실을 하는 공간들이 그곳이다. 이렇듯 못 살 데에서 구경하며 느끼고 배울 만한 동네로 변하고 있는 해방촌 골목길을 산책하고 왔다. 말이 산책이지, 가벼운 산행에 가까운 골목길 탐방이다. 그래도 그 정도 발품은 팔며 둘러볼 만한 동네다.

 

지하철 6호선 녹사평역이나 4호선 숙대입구역에서 해방촌 탐방을 시작하고 마무리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남산 남서쪽 자락의 한 종점(해방촌 옛 버스종점)과 다른 종점(후암동 종점)을 잇는 길이다. 더 다르게 표현하면, 용산 미군부대 동쪽 담벽(녹사평역)~북쪽 담벽을 산비탈로 에둘러 걸으며 둘러보는 탐방로다.

 

어느 길에서 탐방을 시작하든 거치게 돼 있는 곳이, 해방촌의 가장 높은 지역에 자리한 중심거리 해방촌 오거리. 오거리에 서서, 모여든 길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남산과 용산 미군부대 사이 산비탈에 자리잡은 해방촌의 얼개를 금세 이해하게 된다.

 

오거리 한편 건물 처마 밑에서 20여년째 두부·메밀묵 좌판을 하고 있는 두부 아줌마’(65)가 혼잣말을 내뱉으셨다. “터널 요금 안 낼라구들 이리로 지나간다데요.” 이 오거리가 어떤 오거리인가. 편도 1차로 너비를 겨우 면한 비좁은 비탈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차량들을 달고 모여들어 손바닥만한 공간을 만들고는 온종일 뿡뿡 빵빵 정체를 빚으며 법석을 떠는 곳이다.

 

차선도 없고 건널목도 없고 신호등도 없으며 인도도 따로 없는, 차량·손수레·보행자들 모두의 해방구다. 마을버스, 트럭·승용차들과 폐지를 실은 손수레, 아기를 태운 유모차, 통학하는 학생들, 보행기에 의지한 실향민 어르신, 개 목줄을 잡고 산책하는 외국인 들이 뒤엉켜 오고가는 사이로 경유 배달, 피자 배달 오토바이들이 날쌔게 비집고 내달리는 거리다.

 

다섯 가닥의 길 중 남산순환로인 소월로로 이어지는 맨 위쪽 길을 빼고 네 가닥이 모두 가파른 비탈길이다. 길 두 가닥은 우여곡절을 거쳐 경리단(국군재정관리단) 쪽으로 내려가고, 다른 두 가닥은 좌고우면하다 후암동 쪽으로 내려간다. 오거리로 숨차게 올라오는 모든 길들의 지배자는 두말할 것 없이 전깃줄들과 남산타워(N서울타워). 어느 골목길이든 어김없이 얽히고설킨 전깃줄들이 탐방자를 기다리고, 어느 골목길에서든 어김없이 남산타워가 탐방자를 지켜본다. 남산타워는 대개 거미줄(전깃줄)에 휘감긴 모습으로 나타난다.

 

전깃줄·비탈길·계단길 3요소로 구성된 해방촌에서 가장 이름난 계단이 ‘108계단이다. 후암동 종점 로터리에서 올려다보이는,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108개의 대리석 계단이다. 지금은 계단이 둘로 나뉘고 가운데 정원이 만들어져 있지만, 본디 하나의 널찍한 돌층계였다. 일본인들은 왜 이곳에 돌계단을 만들었을까.

 

계단 위쪽에 왜놈들이 참배하는 신사가 있었어요.” 평남 중화 출신 실향민 주민 최용관(80)씨는 지금 빌라촌이 된 옛 선천군민회 자리가 바로 신사 터였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옛 숭실학교 자리인 외국인학교 아래쪽의 빌라·연립주택촌 일대를 선천군민회라 부른다.

 

광복 뒤 주로 평안북도 선천군 출신들이 모여살며 붙은 이름이다. 이 일대엔 지금도 낡고 허물어져 가는, 50~60년대 집들이 몇 채 남아 있다. 옛 해방촌 흔적으로 용산2가동 주민센터 뒤쪽에 선 비석(동장 이봉천 기적비)도 있다. 남산기원에서 만난 주민 김영무(71)씨는 해방촌에서 투표로 뽑은 첫 동장을 기리는 비석이라고 말했다. 세금 감면 등 주민을 위해 크게 애쓴 분이라고 한다.

 

해방촌에 남은 낡고 쇠잔한 풍경을 만나고 싶다면, 해방촌성당 옆에서 미로처럼 이어지는 비탈길로 내려서거나, 후미진 뒷골목을 연상케 하는 신흥시장 안으로 들어서면 된다. 오거리에서 외국인학교 쪽으로 내려가다(또는 해방교회 쪽에서 내려가다) 보면 어둡고 음산한 분위기를 드리운 신흥시장 입구를 만난다. 희미한 불빛 아래 정육점과 반찬가게 몇 곳만이 남아 있다.

 

 

 

 

30년째 반찬가게를 해왔다는 할머니(75)동네가 공원이 돼 시장이 철거된다고 해서 다 떠나고, 시장 안에 집이 있는 사람만 남았다고 했다. 그러나 용산공원과 남산을 잇는 녹지축 공원 계획은 무산된 지 오래다. 그래도 시장 입구에는 저렴한 가격, 싱싱한 물건, 전통시장 상품권으로 제수용품을 마련합시다펼침막이 펄럭인다.

 

해방촌의 시장 상권이 쇠퇴하게 된 건 60~70년대 크게 번창했던 일명 요꼬’(스웨터 가내수공업)라 불리는 편물업이 시들해지면서라고 한다. 온 식구가 달려들어 스웨터를 만들던 편물업은 의류산업 발달로 설자리를 잃게 됐다. ‘요꼬이전 50년대의 해방촌 주력 산업은 가짜 담배(일명 야미 담배’) 제조였다. “담배꽁초를 주워다가 까서 말린 다음, 타자기처럼 생긴 담배 마는 기계를 써서 가짜 담배를 만들어 팔았다.”(주민 김영무씨)

 

낡은 해방촌 골목에 활력을 불어넣는 풍경이 벽화들이다. 108계단 주변에서부터 신천교회, 외국인학교 등을 거쳐, 해방촌성당과 해방촌 오거리로 오르는 골목과 도로변 곳곳에 보성여고생들과 서울대 건축학과 학생, 주민들이 함께 작업한 벽화 그림들을 만날 수 있다. 벽화는 이태원 쪽 들머리에서 오거리 쪽으로 오르다,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신흥로14길에서도 만날 수 있다. 번듯한 주택들이 대부분인 이 골목 벽화는 그린파킹사업(담장 허물기 사업)을 하며 그려진 것들이다.

 

해방촌 탐방을 후암동 쪽으로 내려서며 마무리한다면 후암동 종점로터리 북쪽 골목길 두텁바위(후암동의 옛 한글 지명)안으로 들어서볼 만하다. 또다른 벽화 골목이다. 두텁바위로 안 복지법인 영락보린원정문 앞에 조선시대 궁중 제사 때 쓸 가축을 기르던 관아였던 전생서터 표석이 있다.

 

용산고 정문 옆엔 이태원 터표석도 있다. 이태원이란 조선시대 서울 근교에 설치했던 여행자들의 숙소 4곳 중 한 곳. 이태원동 지명이 여기서 유래했다. 용산고 안으로 들어가면 한국전쟁 때 포병으로 참전해 순국한 학생들을 기리는 순국학도탑을 볼 수 있다. 포병 자원 학도병들이 용산고에서 모여 평양으로 향했다고 한다.

    

 

 

 

 

오 늘 서울여행은 용산2가동 흔히 해방촌이라 부르는 곳입니다. 해방촌은 그 지명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해방과 함께 형성된 동네이지요. 일제로 부터의 해방 직후에 이북에서 내려온 오갈 곳 없는 실향민들이 판잣집을 짓기 시작한 후, 한국전쟁을 거치며 월남민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형성된 동네라고 하네요. 또한 이후 산업화과정 속에서는 이촌향도한 농촌민들의 보금자리역할을 하기도 했던 곳이랍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용산동2가와 일부 후암동 산동네가 포함된 이곳 해방촌에 가려면 지하철 6호선 녹사평역이나, 1호선 남영역, 4호선 숙대입구역에서 찾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영역 방향에서 해방촌 방향으로는 정면으로 미군부대가 넓게 자리잡고 있어 도보로 군부대를 우회하자면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니 2번 마을버스나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오늘은 숙대입구역을 시작으로 후암동길을 통해 해방촌을 올라 보았습니다. 숙대입구역에서 남산 N서울타워를 바라보며 걷다보면 용산고등학교 정문을 지나 우리은행 앞 삼거리가 나옵니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보면 다가구 주택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곳이 해방촌이랍니다.

 

[108계단]

 108계단 윗쪽으로 해방촌 중심거리가 펼쳐집니다.

이제 해방촌의 중심부로 올라서자면 해방촌 사 람들이 수십년 동안 오르락 내리락 밟고 다녔을 108계단을 거쳐야 합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신사(神社)의 계단이었다고도 말하는 이곳 계단의 층수를 세어보면 107개가 나옵니다. “원래 108개였던 것이 공사중 하나가 없어져 지금은 107개래요라고 지나는 학생들이 알려주었지만 확인은~ 어쨌튼 ‘108계단이란 이름은 해방이후 이곳 주민들이 살아 온 삶의 역경을 표현하고자 했던 듯 꽤 가파른 경사를 보입니다.

 

[해방촌 시장통 중심거리]

거리명은 용산2가동이 아닌 해방촌로로 불리어 집니다. 뒷쪽으로 해방교회가 보입니다.

계단을 올라서면 약간은 정리되지 않은 듯 하면서도 다소 한적한 모습을 보이는 중심 시장 거리가 펼쳐집니다. 이 중심거리에서 조금이라도 옆골목으로 들어서면, 산기슭이라는 지형적 특징 때문에 역동적이고 긴장감 넘치는 계단 골목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집들도 윗집의 발코니가 아랫집의 지붕이 될듯한 구조를 보입니다.

 

['해방'이란 상호가 언어경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곳 중심거리의 명칭은 용산동 2가라는 이름보다는 해방촌길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습다. 또 아직도 해방이란 명칭이 들은 상점들도 간간히 볼 수 있습다.

 

[해방교회]

해방촌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는 해방교회.. 어린이집도 함께 운영하고 있답니다.

시 장거리를 통해 해방오거리에서 보성여중고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면, 해방촌의 랜드마크 역할을 해온 해방교회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지역 초기 이민자에는 유독 평안북도 선천지역 출신이 많았다고 합니다. 선천은 일제시대 때부터 이미 개신교 신자가 뿌리내린 지역이었고, 일제로 부터의 광복이후 북한 공산군의 종교불허로 인해 이들 많은 교인들이 월남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월남한 교인들은, 나중에 영락교회로 이름이 바뀐 을지로 2가의 베다니 전도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이후 꾸준히 교세가 성장하여 그 숫자가 많아지자 이곳 해방촌 일대로 근거를 옮긴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해방교회를 세우게 되었답니다.

 

특히 일본제국주의에 억압당하던 월남 기독교인들이 일본 신사가 자리했던 이곳 해방촌 언덕위에 자리하여 일본 신사를 깔고 앉았다는 상징성은 해방촌 사람들로부터 정신적 랜드마크로 자리해 왔다고 할 수 있지요.

 

[보성여중고교]

현관의 게시물에 따르면 1907년 평북 선천에서 개교하였다고 합니다.

해방교회를 지나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기독교계 학교인 보성여중고가 있습니다. 멀리 앞쪽으로 한강과 관악산 전경이 펼쳐지고, 뒤편으로는 남산 N타워의 야경까지 어우러지는 남산 기슭에 기분 좋은 남향을 취하고 있지요.

 

그러나 이 학교는 원래 평안북도 선천에 개교 하였었다고 하네요. 중간에 공산 정권에 의해 폐교 되기도 하였으나, 영락교회를 중심으로 재 개교 하여 2007년으로 개교 100주년을 맞았다고 합니다. 한때 서울의 다른 지역에 사는 선천 사람들까지도 먼 등하교길을 마다하지 않고 이곳 학교까지 통학을 시켰다고 하니, 월남한 사람들에게 이 학교가 가지는 상징성 또한 매우 컸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가내 스웨터 공장]

한때는 해방촌 가구의 70% 정도가 스웨터 제조업에 종사한적도 있다고 하네요

보성여중고교를 지나 남쪽으로 계속 내려가면 미군기지와 이태원, 남대문 시장으로 이어집니다. 비탈길을 내려가며 골목골목 간간히 열려있는 집 문틈으로는 스웨터 등을 만드는 가내공장을 아직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한때는 전국 스웨터 물량의 30%, 남대문시장 물량의 70%를 이곳 해방촌에서 책임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집집마다 봉제공장이나 실공장이 들어서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돈을 번 많은 월남민들은 이곳을 빠져나갔고, 70년대 산업화와 더불어 서울의 꿈을 안고 이촌향도한 지방 출신들이 이곳에 자리잡게 되었겠지요.

 

최근 중국산 편물의 유입으로 시장점유율이 나날이 떨어지고 있으나, 해방촌의 월남인들이 강력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이 스웨터를 바탕으로 한 경제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미군 상대 상점]

해방촌에서 녹사평역으로 내려가는 길가에는 영어 간판이나 외국인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해 방 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태원은 미군기지로서 군사지역으로 자리잡았고, 미군들을 위한 가게나 주점, 기지촌 등이 들어서면서 미군위락지대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그 흔적은 여전히 남아 여전히 곳곳에 영어식 간판과 상점을 이용하는 외국인들을 쉽게 볼 수 있답니다.

 

계리사 사무실 서기인 철호는 월남 가족의 가장이다. 그는 전쟁통에 정신 이상이 된 어머니를 모시고 만삭이 된 아내, 제대하고 2년이 넘도록 방황만 하고 있는 동생 영호, 양공주가 된 여동생 명숙과 함께 살고 있다. 산비탈 해방촌 다 쓰러져 가는 판잣집인 그의 집에 들어가면 어머니의 '가자! 가자!' 하는 소리가 들린다. 삼팔선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수없이 말했으나, 어머니는 이해도 못하고 그 소리를 멈추지도 않는다.”

 

6.25 직후 남북 분단으로 인해 월남한 실향민들이 극도의 궁핍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힘겨움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는 소설 '오발탄'에서는, 이곳 '해방촌'을 그 이름과는 달리 비참하고 가난에 찌든 삶의 공간으로, 그 시대 사회의 비극적 현실을 나타내는 곳으로 표현하기도 했지요.

 

오발탄에 서 표현 하였듯이 이곳은 월남한 실향민들이 극도의 궁핍속에서 살아가던 서울 속에서 격리된 또 다른 작은 마을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곳은 산업화과정 속에서 상경한 농촌민들의 보금자리역할을 하기도 했지요. 이와 같이 소수집단이 그들이 살고 있는 곳, 즉 주거지와 관련하여 불균등하게 분포하는 경향을 격리라 지칭합니다.

 

또한 소수집단의 거주구역이 모도시내에 자치적 성격을 띠고 격리된 경우, 그리고 그 소수집단이 모도시의 다수집단에 의해 음으로든 양으로든 차별을 받는 경우, 그러한 격리된 거주구역을 게토라고 표현하기도 한답니다. 현재 주민들이 들으시면 불쾌하실 수 있겠지만 해방촌은 해방과 한국전쟁이라는 근현대사 과정에서 만들어진 월남인 사람들의 마을로서, 또한 산업화과정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마을로서 서울속의 게토라고 표현해 봅니다.

 

남산이 역사에서 그 존재를 새삼스럽게 드러낸 것은 개항 이후다. 남산에는 서울을 도읍으로 정하는데 큰 공을 세운 조선의 국사, 무학대사의 초상이 모셔져 있었다. 우리에게 國師堂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목멱신사는 고종연간까지 매년 봄가을 국가에서 치르는 醮祭를 극진히 받아왔다. 남산의 변화가 시작된 것은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부터다. 1893년 도성 안에 외인의 거주가 허락된 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자국민을 남산의 북사면에 정착시켰고, 일인 마을이 만들어졌다.

 

식민지배의 심장부가 된 북측 산록

이 때 일본은 임진왜란 때 자신들이 남산에 성을 쌓았다고 주장하며 남산일대를 왜성대라 부르고 연고권을 강조하기도 했다. 남산에 터를 잡은 일인들은 지금의 숭의여자대학 터에 경성신사를 세웠고 그 아래에는 을사늑약 체결과 함께 통감부가 세워졌다.

 

통감부 청사는 한국을 강제로 병합한 뒤에는 1926년까지 총독부로 사용됐으며, 그 후에는 일왕의 은혜를 어린이들에게 베푼다는 의미의 은사과학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6·25전쟁을 겪으면서 화재로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지금 애니메이션 센터가 세워졌다. 그 밖에도 총독부 건너편에 일본인 사찰이 위치했으니, 명실상부하게 남산의 북측 산록은 식민지배의 심장부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남산의 공간적, 정치적 위상에 변화가 생긴것은 1926년에 경복궁 내에 신청사를 지으면서부터다. 일제는 신청사로 옮기면서 동시에 남산의 성곽을 철거하고 능선을 깎아 조선신궁을 완성해냈고, 이로써 조선 내 최고의 신사가 경성신사에서 조선신사로 바뀌었다. 한편 현재의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위치했던 경성부청(현 서울시청)도 덕수궁 앞으로 옮겨졌다. 이로써 남산의 북측산록에 자리 잡았던 식민 지배 권력이 경복궁과 남산 그리고 덕수궁 앞으로 분산 배치됨으로써 서울의 도시공간 전체를 관통하는 식민지 지배체제가 완성됐다.

 

이후에도 남산의 훼손은 지속됐다. 장충단에는 일인을 위한 공원이 조성되고, 식민지배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찰이 건축됐다. 사찰의 정문에는 경희궁의 정문이었던 흥화문이 사용됐다. 박문사 자리에 들어선 현재의 신라호텔에는 정문과 진입로 그리고 계단 등 박문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해방 후에도 수난은 끊이지 않았다. 해방 전 남산에 식민지배의 상처가 남아있다면, 해방 후에는 전쟁과 분단의 흔적이 곳곳에 새겨졌다. 해방 후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남산의 남측 산록에 해방촌이라 불리는 슬럼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서울역을 마주하고 있는 남산의 서측 산록에는양동이라 불리는 사창가가 형성되기도 했다.

 

사창가·터널·호텔정점에 달한 훼손

한 때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조선신궁 자리에 세워지기도 했지만 4·19혁명으로 사라졌고 신궁터 옆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의사 기념관이 세워졌다. 지금은 대우빌딩 건설과 재개발사업으로 힐튼호텔이 들어섬에 따라 옛 흔적이 사라지고 없지만, 그 과정에서 남묘가 위치를 잃어버리고 사당동으로 쫓겨났다.

 

한편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정부가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남산에 자유센터를 건설해 한국을 아시아 반공의 성지로 만들고자 했으며, 1968년의 무장공비에 의한 청와대 습격사건인 121사태가 발발하면서 유사시에 방공호로 사용하기위한 남산 1호 터널과 2호 터널이 건설되기도 했다. 이밖에도 외국인을 위한 임대아파트가 건설되고 하얏트호텔이 건설되면서 남산의 훼손은 정점에 달했다.

 

다행히 1990년대 이후 남산 제 모습 찾기운동이 벌어지면서, 남산에 건설됐던 외국인을 위한 아파트가 철거되고 신사의 흔적을 지우고 성곽이 복원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박정희정부의 권력기반이었던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도 민주화시대를 맞아 남산을 떠났다.

 

그러나 지난 100여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한국근현대사의 현장을 지우고, 마치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되돌려 놓는 것만이 능사인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百聞不如一見’, ‘Out of sight, out of mind’라고 했다. 비록 잘못된 역사라도 그 흔적을 남겨, 어떠한 교훈으로 삼을 것인지는 당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다.

    

 

 

전통 혼례 장소 '한국의 집'에 숨겨진 비밀

이날 강사를 맡은 이순우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은 첫 번째 행선지인 '한국의 집'으로 가는 도중, 충무로 사거리에서 북쪽으로 뻗은 도로를 가리켰다. 창덕궁으로 향하는 도로였다. 이 소장은 일제가 조선의 국권을 빼앗은 이후 '새로운 권력'인 남산 총독부와 '옛날 권력'인 조선 국왕의 거처를 잇는 도로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경술국치 이후 '이왕(李王)'으로 격하된 순종 황제는 매년 새해마다 창덕궁에서 이 길을 따라 총독부 관저로 와야 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총독을 통해 일본 도쿄에 있는 일본 천황에게 '신년하례 전보'를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치욕을 줄 목적으로 일제는 계획적으로 창덕궁과 남산을 잇는 도로를 건설했다는 것이다.

 

이어서 첫 행선지인 한국의 집으로 향했다. 한국식 전통 혼례를 치르는 장소로 인기 끄는 장소로만 알고 있던 한국의 집, 이곳이 조선 총독부의 '2인자'였던 역대 정무총감들의 관저였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당시 건물만 없을 뿐, 정무총감 관저 공간을 그대로 이어받아 해방 이후 한국의 집이 들어선 것이다. 당시의 흔적을 직접 느낄 수 있는 것은 한국의 집 뒤쪽에 있는 비밀 방공호 흔적이었다. 이곳은 현재는 김치 저장고로 쓰이고 있었다.

 

바로 옆쪽에 있는 남산골 한옥마을은 예전에 학교에서도 몇 번 방문했다. 그러나 이번 답사에서 이 자리에 옛 수도경비사령부(아래 수경사, 현 수도방위사령부)가 있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한옥 마을 입구로 들어와 약간 언덕을 오르다가 구석에 있는 표석을 봤다. 표석엔 이곳이 옛 수경사 자리였다고 적혀 있었다. 이 소장은 이곳에 수경사가 들어서기 이전엔 일제의 한국 주차군 사령부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주차군 사령부는 1904부터 1908년까지 존재했다. 러일전쟁 당시 이곳에서 한국의 무력 점령, 치안 확보, 방비 등이 획책되었다.

 

이 소장은 이곳 주변의 당시 이름을 일제가 '장곡천정(長谷川町)'이라 붙였는데, '장곡천'은 제2대 조선 총독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를 기리고자 붙인 이름이라 한다. 심지어 수경사 표석이 있던 잔디밭 일대는 당시 '호도원(好道園)', 즉 하세가와 요시미치의 이름이 붙은 정원이었다 한다. 주차군 사령부가 있던 자리를 이승만 정권 당시엔 헌병대 사령부가 썼고, 그 이후엔 수경사가 그대로 썼다고 한다. 이 소장은 "이곳뿐만 아니라 일본군이 과거에 쓰던 자리를 거의 그대로 우리나라 군대가 썼던 일들이 많다"고 했다.

    

 

"정보부 가는 길, 교통사고 나서 죽어버렸으면..."

다음 동선(動線)은 남산의 옛 중앙정보부 관련 흔적들을 돌아보는 길이었다. 더운 날씨에 힘겨워하며 길을 가던 중, 좌측에 한 터널이 보였다. 이순우 소장은 바로 이 터널이 과거 정보부에 체포된 사람들이 끌려가던 길이라며, 이 터널을 지나면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공포에 떨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터널은 알록달록 채색이 되어 있었지만, 낮 시간임에도 뭔가 서늘하고 음침한 느낌이 들었다. 중앙정보부가 그들 입장에선 '위치 선정'을 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국가정보원이 위치한 서초구 세곡동도 대모산 기슭의 사람들 눈에 잘 안 띄는 곳에 있다.

 

현재는 서울 유스호스텔이 들어선 위치. 이곳이 바로 옛 중앙정보부 본관이 있었던 자리다. 수많은 민주화 인사들이 고통에 시달렸던 곳, 바로 그 현장에서 당시 고초를 겪었던 민주화 운동 원로 이해학 목사의 체험담을 들었다. 전망이 탁 트인 유스호스텔 옥상에서 이 목사의 이야기를 약 50분 가량 들었다. 이 목사는 1973'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에서 민주화를 위한 여러 활동을 하던 중 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체포됐다. 그는 실로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웠던 경험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것 벗어!" 하면서 팬티까지 다 벗깁니다. 그리고 엄청나게 두들겨 패는데, 그냥 패는 게 아니라 침대목으로 패는데, 온몸을 시퍼렇게 짓뭉갰습니다. (중략) 군홧발로 막 걷어차고, 짓이겨져서 바닥에서 벌벌 기는 겁니다. 그때 이 사람들히 했던 말들이 "너 여기서 죽여도 아무도 몰라!" 공포감을 줍니다. 그리고 아주 치욕스러운 얘기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성기를 갖다가 각목으로 쿡쿡 찌르면서 "이것 가지고 뭔 일 하겠냐?" 이러면서 온갖 모욕적인 말들을 했습니다.

 

이 목사는 그 해 말에도 유신반대 투쟁을 벌이다가 중앙정보부에 다시 연행되었다. 그는 다시 끌려오던 당시의 공포감을 이야기하면서, '차라리 지금 나를 싣고 가는 (중앙정보부의) 이 차가 중간에 교통사고가 나서 나도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말했다. 두 번째로 끌려갔을 때는 고문을 당하지 않았는데, 이는 같은 해 1019일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이후 의문사 당한 최종길 당시 서울대 교수 '덕분'이었다고 한다.

 

이 목사는 "최 교수가 그렇게 끌려가서 죽고 난 직후라, 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고문을 실시하긴 힘든 상황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목사의 이날 체험담엔 당시 독재 정권에 의해 느껴야했던 고통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화를 열망했던 한 종교인의 심정이 절절이 담겨 있었다.

 

서울 유스호스텔 바로 아래에 옛 통감. 총독관저 터가 있었다. 바로 이곳이 1910822'경술국치', 즉 일제에 의한 한국 강제병합이 이루어진 곳이다. 한 마디로 우리나라가 완전히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현장인 것이다. 조선이 완전히 일제의 식민지가 되면서 통감은 '총독'으로 지위명이 바뀌었다. 이 소장은 당시 조약에 서명한 데라우치 마사다케(?正毅) 조선 통감의 그날 밤 일기 내용을 이야기했다.

 

"데라우치가 뒤에 한 꼭지에 덧붙이길, '합병문제는 여차히 용이하게 조인을 완료했다'고 하고, 뒤에 두 글자를 덧붙였습니다. 표현상으로 가가(呵呵)에요. 이게 뭐냐면 '가가대소(呵呵大笑)'란 말에서도 볼 수 있듯이 (아주 기분이 좋아서) 깔깔깔 웃는 표현이거든요? 오늘날로 비유하면 'ㅋㅋㅋ' 같은 건데, 당시 '합병조약'을 조인하고 난 데라우치의 기고만장함과 기쁨이 표현된 거라 할 수 있겠습니다."

 

공터 구석에 '통감관저터'라고 쓰인 비석이 있었다. 경술국치 100년이 되던 해인 2010829일 한일 양국의 시민단체 141곳이 같이 세운 비석이다. 글씨는 성공회대 신영복 석좌교수가 썼다. 비석엔 "일제침략기 통감관저가 있었던 곳으로 1910822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총리대신 이완용이 '강제병합' 조약을 조인한 경술국치의 현장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일행은 침통하면서도 숙연한 기분을 안고 이 비석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관저터 바로 옆엔 하야시 곤스케(林 權助) 주한 일본공사의 동상이 있던 터가 있었다. 하야시는 1899년부터 7년 동안 주한 일본 공사로 있으면서 1904년 한일 의정서 체결, 다음 해 을사조약 체결 등에 직접 관여한 '조선 침략의 흑막'이었다. 공터에는 하야시의 동상 기반석이 있었다.

 

해방이 되고 나서 하야시의 동상은 고철상으로 넘어갔으나, 이 기반석은 사라지지 않고 이곳에 이대로 쓰러진 채 방치되었다고 이 소장은 설명했다. 기반석엔 지금도 '남작 하야시 곤스케 군 상(男爵林權助君象)'이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어느 분노한 시민의 손에 의해서인지, '()'자 부분은 훼손되어 있었다.

 

바로 근처의 남산 애니메이션 센터 내엔 이곳에 조선 총독부 청사가 있었음을 알리는 표석이 있었다. 1926년부터 약 20년 남짓한 기간 동안 '조선 식민지배 수뇌부'가 있었던 곳이다. 이 소장은 "이 일대는 오늘날로 치면 총독부의 '정부종합청사'가 있었던 곳"이라고 비유했다.

 

하기야 총독관저, 총독부 청사, 주차군 사령부, 헌병대 사령부, 일본 적십자사 등이 총집결했으니 정부종합청사가 아니고 뭐라 부를까. 이미 1592년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한양을 점령하고 이 위치에 왜성을 쌓아 1년간 주둔하기도 했었다. 일제의 입장에선 자신들 조상의 '발자취'가 남은 이곳을 '행정타운'으로 만든 게 아닐까 싶다.

 

일제 '행정타운'된 남산, ''까지 모셨다

일제는 이 일대에 행정관청 및 군사령부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도 모셨다. 여러 개의 대규모 신사(神社)를 만들어 조선의 정기를 끊으려고 했다. 그 신사 중 하나인 노기 신사(乃木神社)의 흔적이 남은 장소로 향했다. 이 소장은 리라초등학교를 지나서 그 뒤편의 남산원이라는 사회복지시설 내에 그 흔적이 있다고 했다.

 

이곳에선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바자회가 열리고 있어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남산원 입구 바로 옆에선 몇몇 사람들이 바비큐를 굽고 있었는데, 그 바로 뒤에 이곳이 신사의 손 씻는 곳이었음을 알리는 반석이 있었다. 100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인데도 이 반석의 글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노기 신사의 주인공이었던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는 일본 입장에선 '군신(軍神)'과도 같았던 인물로, 러일전쟁 당시 여순전투 등의 승리를 이끌며 명장으로 추앙 받았다. 1912년 일본 천황이었던 메이지(明治)가 사망하자, 그 뒤를 따라 할복할 정도로 '천황의 충신'이기도 했다. 일본 입장에선 '군신이자 충신'이었던 노기를 기리고자, 이곳 남산엔 그를 기리는 신사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어서 간 곳은 조선신궁(朝鮮神宮)이 있었던 자리였다. 조선신궁은 일제가 식민통치를 하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시설 중 하나였다. 일본 천황가의 시조라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와 메이지 천황을 함께 모셨던 곳이다. 일제는 조선신궁을 만들면서 조선시대 때 남산의 수호신을 모시던 국사당(國師堂)이 신궁을 내려다 본다는 이유로 이전했다.

 

현재는 조선신궁의 직접적인 흔적은 찾기 힘들었다. 그러나 현재 남산을 둘러싸고 있는 남산순환도로 중 신궁터 근처의 길이 바로 신궁의 동참도(東參道), 즉 신궁 참배길이었다는 것을 이 소장의 설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렇게 길이 널찍하게 된 것도 당시 일제가 이 길을 참배로로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현재 이 일대에선 서울성곽 복원공사가 한창이었다. 일제 침략의 흔적을 없애고 다시금 우리의 옛 모습을 살리고자 하는 듯해서 기뻤다.

 

마지막으로 간 곳은 용산도서관 바로 옆을 지나는 도로였다. 이곳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후암동은 한때 '해방촌'이란 이름으로 불렸는데, 이 곳 한가운데에 'CCS'라고 쓰인 건물이 보였다. 이곳은 국내 거주 외국인들의 학교인 센테니얼 크리스천 스쿨(Centennial Christian School)이었다.

    

 

 

이 소장은 이 CCS 건물이 있던 위치에 태평양 전쟁 수행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일본 군인들을 모시는 '호국신사(護國神社)'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일본 군인 뿐만 아니라,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조선의 젊은이들 또한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신사의 ''으로 모셔졌다. 1940년대 당시 조선엔 두 개의 호국신사가 있었는데, 하나는 이 곳 후암동 CCS 자리에, 또 하나는 한반도 북단 함경북도 나남(현재의 북한 함경북도 청진시 라남구역)에 있었다. 이날 답사에서 시간 관계상 직접 가보지는 못 했지만, 후암동엔 지금도 호국신사로 올라가는 108계단 등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이날 답사를 통해 남산 일대가 식민지 시기 일제에 의해 철저히 '식민지배의 중심'으로 둔갑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일제에 의해 뿌리 박힌 지배의 흔적들은 지금 이 순간도 뿌리가 완전히 뽑히지 않고 조금씩, 그러나 곳곳에 남아있다. '식민지배의 중심'은 군사독재정권 시절 중앙정보부에 의해 '공작정치의 중심'으로 그 성격이 이어졌다. 그 흔적들을 모른 채 남산을 방문하는 것과, 알고 가는 것은 완전히 다를 것이다. 남산에 남겨진 그리 멀지 않은 치욕의 흔적들을 보면서 역사에 대한 고민을 조금이나마 가져봐도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