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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역사

草霧 2013. 11. 6. 19:37

 

 

한강

 

 

 

1. 한강의 역사

세종실록지리지, 대동지, 동국여지승람, 택리지 등 옛 문헌에 발원지로 기록된 곳은 오대산 우통수라는 샘이다. 한강은 남한강을 본류로 북한강이 합쳐 이뤄진다. 남한강 길이 394.25km, 북한강의 길이 325.5km, 남한강이 북한강 보다 68.75km 더 길다. 한강의 전체 길이는 497.5km(김포 월곶면 용장리 유도산정-태백시 창죽동 금대산 북쪽계곡) 이다.

 

남한강: 강원 태백 금대산 북쪽계곡에서 발원-섬강과 흑천과 합류

북한강: 강원 금강산에서 발원-금강천,금성천과 합쳐-파로호를 이루고-소양강과 합류

 

양수리-파주 곡릉천과 임진강-김포반도-강화만-황해

 

2. 한강의 옛 이름

한사군과 삼국시대 초기-대수

고구려-아리수

백제-욱리하

신라-이하(상류), 왕봉하(하류)

고려-열수, 사평도 또는 사리진

조선-경강

백제가 동진과 교통하여 중국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한수또는 한강이라고만 불리움.

 

3. 선사시대의 한강

한강 유역에서 구석기, 신석기 시대 유물이 각지에서 발견되고 있으나, 암사동 선사유적지는 신석기문화를 대표하는 것이며, 그들의 실생활을 엿볼 수 있는 토기, 석기, 골각기 등이 발견되고 있다.

 

4. 청동기 시대의 한강

동북지방(함경남북도)와 서북지방(평남, 황해)의 영향, 민무늬토기와 청동기문화가 성립. 양 지역의 문화는 자체적인 발전과 혼합을 통해 한강 유역의 독특한 청동기 문화를 이룩. 한반도 남부지방으로 문화를 전파하는 중간매개지역의 역할도 담당.

 

5. 삼국시대의 한강

한강 유역이 반도의 중앙부를 축으로 관류하는 큰 강인 만큼 한반도의 중심무대지가 되었기에 삼국쟁패의 주요 과녁이 되었고 한강 유역을 점유한 국가는 영토적 확장과 국가 발전의 강력한 터전을 마련한 결과가 되었다.

 

6. 고려시대의 한강

송악의 호족출신 왕건은 918년 고려를 건국, 935년 후삼국을 통일. 문종21년 당시 양주를 남경으로 승격시켜 개경 및 서경과 함께 3대 요지

 

고려 말 1382(우왕8)한양천도 단행, 13832월 개성으로 돌아옴, 공양왕 때 13909월 다시 한양천도 단행, 13912월 개성으로 돌아옴

 

7. 조선시대의 한강

태조 3(1394)1025() 천도 실현

 

한양천도의 배경

풍수지리설 영향-개경이 지덕이 쇠패한 땅

왕위획득과 관련된 정치적 정황-개성의 구가세족의 반발에 대처

인문지리적 위치의 중요성-지세가 훌륭하고 군사적 방위에 있어서 천연의 요새지, 수륙 교통이 편리한 곳(보급로 역할)

 

8. 근세의 한강

1888년 한강에 증기선이 최초로 운항

1890년 중국인 거상 동순태가 100t의 증기선을 용산과 인천 사이 취항

1900년 근대식 철교가 완공

1909년 경인철도 개통

1916년 인도교 가설

1936년 폭20m, 10km 길이의 새 인도교 완공

1912,1920,1925 세 차례의 대홍수

1925(을축년)대홍수 715~184일간 400~500mm 강수량

용산과 남대문 앞까지 물바다. 잠실동과 신천동-부리도(하중도)

19704-1975년 마무리, 하중도를 육지화하는 대공사, 석촌호수(하적호)

 

9. 한강의 조운

조선시대 :육로-주로 파발을 중심으로 한 통신로를 개발

수로-화물의 운송하는 정책을 펼침

 

수로 교통의 요충지

서해안과 한강하류-호남,호서(양호)와 황해,평안(양서)의 물자가 한양으로 운송

한강 상류-남한강,북한강을 통해 충북과 강원의 운하가 한양으로 운송

 

한강의 나루터

광나루, 삼밭나루, 서빙고나루, 동작나루, 노들나루, 삼개나루, 서강나루, 양화나루

5강진로-광나루,삼밭나루,동작나루,노들나루,서빙고나루-중요 교통로

 

한강변의 상업 발달

경강 상인의 치부 수단-곡물 운수업과 선상활동

 

10. 한강과 군사활동

임진왜란-1592(선조25) 왜장 소서행장과 가등청정이 이끄는 20만 대군이 정명가도를 이유로 침공. 초기에 한강을 쉽게 도강하여 북진, 그 뒤 원호, 변웅성 등이 남한강 전투에서 승리-적의 보급로와 진출로를 차단하는 큰 역할. 권율 장군의 행주산성 승전을 계기로 왜적을 퇴각의 궁지로 몰아넣음. 벽제관 싸움-전의를 상실

 

11. 한강의 조운

-선박이 드나들 수 있었던 곳은 하구에서 영월까지 330km, 양수리에서 화천까지 138km

-한강은 낙동강과 연결되어 조선조 영남지방과 서울을 연결했으며 강을 중심으로 광주, 여주, 충주, 원주 등 대도시를 발달시킴.

-조운제도는 고려시대 만들어져 남방 연해안과 한강수로변 12조창을 두고 조세로 징수한 미곡이나 포목을 선박으로 운송함.

-정선-영월-영춘-단양-청풍-충주-원주-여주-천녕-양근, 광주 땅에 이르는 동안 많은 나루

- 뱃길로 영춘-서울, 닷새반 단양-서울, 닷새 충주-서울, 나흘 여주-서울, 이틀 이포-서울, 하루

- 세닙미 운반

- 상인들의 사상행위-강상이라 함

- 마포에서 소금 30가마를 싣고 이레만에 남한강 상류 목계나루에 가면 값이 다섯배

- 영남지역 산물과 교환

- 북진, 상진나루 등은 충주호 물 밑에 수몰

 

잠실이란?

 

국립양잠소 격인 잠실도회가 설치되었기 때문.

 

잠실도회란 역대 조선의 임금들이 양잠을 권장하기 위해 정부에서 세운 기관.

-양잠 종자를 길러 분양하거나 양잠 기술을 연구, 보급하며 뽕나무 종자를 보급하는 역할을 맡은 곳.

-조선 초 태종때 전국에 건립되기 시작. 세종 때는 서울에도 궁궐 이외에 몇 개의 잠실도회가 생김. 이때 생긴 것이 동잠실과 서잠실(연희동), 그 뒤 신잠실(잠원동)도 생김.

-잠실이란 용어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이전부터 사용되었던 용어로서 우리 나라는 유교를 받아들이면서 이를 인용해서 널리 쓰여지게 됨.

-흔히 잠실이라 하면 민간에서 잠종을 받아다가 뽕잎을 먹이고 누에를 치는 곳을 일컫는다. 그러나 조선 전기 각종 문헌에서 볼 수 있는 잠실은 일반 민가의 잠실이 아니라 국립양잠소 격인 잠실도회를 뜻한다.

 

잠실은 과거 자양동과 연결된 반도였다.

-중종15(1520)에 홍수가 나면서 샛강이 생겨 이 새로난 샛강을 신포 또는 신천이라 부름.

-이때에 섬이 생겼는데 이 섬을 잠실도 라 하고 서쪽의 작은 섬을 부리도 라함.

-1930년대만 해도 잠실섬은 온통 뽕나무가 무성했으나 1940년경 주민들이 뽕나무를 뽑아내고 대신 채소밭을 일궈 서울에 채소를 공급하는 곳으로 바뀜.

-1971년 당시만 해도 잠실지역은 모래섬으로 300여 가구가 살고 있었다.

-강북시가지와 광주대단지 사이의 대규모 신시가지를 건설하기 위해 영동 600만평과 잠실 400만평을 묶어 하나의 거대한 주택단지를 조성케 함.

-잠실 시영아파트13평형이 1975~6년 건립, 1~4단지 아파트가 1976년 건립, 고층(5단지)아파트가1977년 건립.

 

삼전나루, 송파나루

-삼밭나루는 한강에서 부교를 맨처음 가설했던 곳이다. 세종이 태종의 묘인 헌릉을 참배하기 위해 1439(세종21)에 튼 것인데, 1536(중종31)에 배를 잇대어 놓은 부교를 가설.

 

-이는 조선 후기 정조가 화성 융릉을 참배하기 위해 노들나루에 부교를 가설한 것보다 250년 앞선 것이다.-병자호란 이후 삼전도에 대한 주민들의 인상이 안좋고 하면서 송파나루가 더 유명해짐.

 

-원래 송파라는 마을은 광나루보다 동쪽 상류인 광주군 동부면 선리라는 곳에 있었는데 1647(인조25)년 큰 장마로 마을이 온통 떠내려간 뒤 삼밭나루 동쪽, 지금의 석촌호수 지대로 옮겨살면서 나루를 트고 자기 동에 이름을 따서 송파라 함.

 

-송파나루는 송파장이 5일장에서 매일장이 서야 할 정도로 삼전나루를 제치고 조선 최대의 나루로 성장.

 

-송파장이 흥청거린 이유는

강남쪽 언덕으로 다른 곳 보다 완만하여 배를 쉽게 댈수 있다.

경기도 광주부에 속해 서울의 육의전 난전금권의 범위를 벗어날 수 있었다.

도성에 가까워 사상도 많고 소비자도 편하고 값이 쌌다.

육로교통도 편한 곳이다.

 

-송파장이 활발해지자 송파산대놀이가 생겨남.

-일제시대에 소를 거래하는 우시장 정도로 변했다가 1929년 마장동에 도축장이 생기면서 송파장은 사라지게 됨.

 

한강의 큰 홍수

-1912년과 1920, 1925년의 세차례 홍수

-1925(을축)대홍수는 715일에서18일까지 4일간에 걸쳐 400~500mm의 높은 강수량을 보임.

-노도와 같은 홍수물은 한강 제방을 무너뜨리고 순식간에 용산, 남대문 앞까지 일대를 물바다로 만듬.

-19704월 부리도 유역 북쪽 물길을 넓게하고 남쪽하천을 폐쇄함으로써 하중도를 육지로 만듬.

 

석촌동고분, 사적243(75,5,27 지정) 면적 17,000

 

적석총은 1976~8년과 1983~4년에 두차례 걸쳐 서울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함.

-백제초기에 만들어진 무덤.

-무덤 형식은 기원전 후부터 나타나는 고구려 무덤형식인 기단식적석총 임.

 

적석총3호분

-5단 이상으로 추정됨

-묘곽이 파괴되고 도굴당해 완전한 유물을 출토되지 않음.

-규모는 55.5×43.7×4.5M.

-3단 중앙에서 석곽이 위치 함. 석곽 규모는 2×1.5×0.8m이다.

-금관에 장식하는 금으로 만든 영락과 중국 육조시대의 자기항아리 목부분 등이 출토.

-고고학자들은 이 무덤을 근초고왕(374년 사망)의 무덤으로 추측.

 

장군총은 광개토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한변 길이가 30m정도이며 높이는 7단으로 11.28m이다.

 

적석총 4호분

-발굴 당시 원형의 겉모습을 그대로 하고 있다.

-규모는 17×17×2m 이며, 관은 3단 중앙에 위치하였다.

-석실의 크기는 가로 세로 4.6m이며, 남쪽 벽 중앙에 연도가 달렸다.

-연도의 규모는 길이 2.36m, 1.7m이다.

-속에는 진흙으로 메운 구조로 3호분과는 달리 고구려식이 아니어서 한강유역에서 지역화한 양식이다.(김원용교수-한강판 적석총)

-금으로 만든 세환식 귀걸이가 출토, 기와편도 많이 출토.

-봉토 위에 기와를 얹은 것으로 추측.

-옆으로 세운 돌은 이후 신라에서 12지신상으로 발전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석촌동-돌이 많아 돌말이라 불림.

-백제시대부터 돌무지무덤이 많아 돌마을

-병자호란 때 청군이 이곳에 진터를 만들면서 돌이 많아졌다는 설.

-해방전까지 89기의 무덤(적석총23, 봉토분66)이 있었으나 일인들의 마을에 집을 짓고 도굴해 감.

 

1985년 사적지로 꾸미고 3-4호분의 사잇길을 지하로 만듬.

 

방이동 고분군, 사적27079,12,28 면적9175

 

755, 763기 도합8기의 고분을 확인할 당시에도 민간인 무덤30여기가 뒤썪여 있었음.

 

선사시대 주저지에서나 볼 수 있는 노지가 나오고, 석상, 석검의 파편, 백제시대의 토기 등이 발견.

 

1호분

-굴식 돌방무덤

-봉분의 지름이112m 높이2.2m

-널길을 안으로 들어갈수록 조금씩 넓어짐.

-뚜껑돌은 장방형의 판석4매로 덮음

-널방은 천장을 판석1장의 뚜껑돌로 얹어 궁륭형천정을 만듬.

-널방의 크기는 길이3m, 너비2.46m, 높이2.15m

-돌방벽면을 쌓을 때 돌과 돌 사이에 진흙으로 메우고, 벽면에는 진흙을 얇게 바름.

-주검받침의 크기 길이2.4m너비2.1m높이30cm

-유물은 토기 3

-공주 송산리 5호분과 그 구조와 형식이 흡사, 이를 통해 방이동 고분 양식이 공주고분으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게 함.

 

2,3호분

-발굴하지 않아 내부구조를 알 수 없다.

 

4,5호분

-4호분은 굴식 돌방 무덤이고 5호분은 구덩식 돌덧널무덤이다.

 

6호분

-돌방중간에 돌벽을 쌓아 서쪽과 동쪽에 각각 무덤방을 만든 특이한 구조의 굴식 돌방무덤이다.

-2점의 사람뼈와 굽다리 접시가 출토 되었는데 접시는 회청색의 경질토기로 전형적인 신라토기이다. 백제와 신라의 교역에 의한 결과라고 해석되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