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사동 선사주거지
1. 암사동 선사주거지 시대적 배경 지구에 처음 생명체가 살기 시작한 것은 약 35억년전이며,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약 70만년전이다. 이를 학자들이 명확한 시대구분을 위해 선사시대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선사시대는 구석기시대(BC 약 500만년전~1만년전), 신석기시대(BC1만년저~1천년전), 청동기시대,철기시대로 주로 사용된 도구에 따라 시기를 구분하였다. 이곳 송파시 인근에 있는 선사시대의 유적 가운데 미사리 유적과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이 주거지라 할 수 있는 암사동유적지가 있다.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의 분류는 사람들이 글자를 만들어 내서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때부터를 역사시대라고 하면 그 이전시대를 선사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청동기시대 연맹왕국인 고조선이 있었으나 중국의 역사 삼국지위지동이전에 기록이 있고, 고려시대에 지어진 삼국유사,제왕운기에 나타난 고조선의 역사는 그당시의 기록이 아니어서 역사시대가 아닌 선사시대로 구분한다. 역사기록이 있는 시대는 “역사시대”라 하며 서양사학자들이 서양사를 근거로 분류한 고대,중세,근대,현대로 한 시대를 대표하는 왕조나 문화와 같은 기준에 따라 다시 분류하기도 한다.
인류 역사의 99.9%를 차지하는 "구석기시대"는 모루떼기나 직접떼기, 간접떼기, 눌러떼기 등의 방법으로 자연의 돌을 깨뜨리거나 떼어내어 사용한 '뗀석기(타제석기:打製石器)'를 썼으며 추위와 비를 피하기 위해 동굴 안에서 생활했다. 수렵과 채집 위주의 생활을 했던 이 시기의 가장 큰 사건은 불의 사용으로 인류의 활동시간과 생활영역이 이전보다 훨씬 넓어진 계기가 됐다. 큰 강을 끼고 있는 단구지형이나 석회암지대 동굴에서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되었다. 유물로는 '전곡리 주먹도끼; 팔매돌; 자르개; 찌르개; 긁개; 찍개; 밀개; 짐승 뼈; 사람 뼈'등이 있고 함북 선봉군 굴포리 유적, 충남 공주군 석장리 유적, 경기 연천군 한탄강 일대, 상원 검은모루 유적, 제원 점말동굴 유적 등 40여 곳이 발견되었다.
간석기와 질그릇을 발명해 낸 "신석기시대"는 빙하기가 끝난 후 대륙의 공기가 따뜻해지고 물이 풍부해지면서 인류의 삶이 풍족해진 시기다. 더 이상 식량을 찾아 옮겨다닐 필요 없이 정착생활만으로도 물고기와 열매들을 풍족하게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들은 돌을 깨뜨려 숫돌로 갈아 만든 간석기(마제석기:磨製石器)를 사용했으며 어로와 수렵, 목축과 함께 쟁기와 보습 등의 도구를 이용한 초기 농경생활도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8천년에서 1만 년 전쯤에 신석기가 시작되었으며 강가와 바닷가에 많은 유적이 남아있다.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로는 '돌살촉; 돌도끼; 돌칼; 가락바퀴; 돌괭이; 작살; 돌추; 돌바늘; 뼈연모; 치레거리; 패총; 납작밑토기. 그물무늬 토기. 둥근밑토기 등 다양한 모양의 빗살무늬토기'가 있다. 서울 암사동과 동삼동, 미사리, 연대도, 강원 오산리, 동해안 일대 유적이 신석기시대 것이다.
계급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주는 고인돌유적과 청동연모가 있는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10C부터 시작되었으며, 활발한 농경생활의 영향으로 넓은 들판을 끼고 있는 낮은 언덕에 삶터를 잡았다. 청동기 시대 유물로는 '무문토기; 붉은 간 토기; 반달돌칼; 돌도끼; 별도끼; 달도끼; 돌낫; 후치; 절구; 따비; 비파형동검; 농경문 청동기; 청동검; 청동거울; 청동 치레거리; 고인돌무덤. 돌무지. 움무덤. 독무덤 등 여러 형태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여주 흔암리유적과 부여 송국리 유적, 평양 남경유적, 울산 검단리 유적, 울산 무거동 유적들이 이 시대 것이다.
철기문화가 들어오면서 사회와 경제에 커다란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철기시대"는 기원전 3C~4C부터 기원전후 시기로 생산력의 증가와 사회 규모의 확대, 경제 규모의 변화 등이 나타나게 된다. 위원 용연동, 경주 조양동, 사라리, 강계 길다동, 광주 신창동 생활유적, 김해 패총, 성산패총, 동래패총 조개더미유적과 철제무기; 농기구; 세형동검; 청동거울; 방울 등 의례용 유물들이 나왔다.
2. 암사동 선사주거지의 발견 동기 이곳은 기원전 3,000 ∼ 4,000년경의 신석기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집터가 남아 있는 곳으로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서 밝혀진 신석기시대 최대의 집단 취락터이다.
이 유적은 1925년 을축년 홍수에 한강변 모래언덕 지대가 심하게 패어져 수많은 빗살무늬토기 조각이 노출되면서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지임이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1967년에는 대학연합발굴단, 1968년에는 서울사대 조사팀, 1971∼1974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 그리고 1983년에는 서울대 암사동 유적발굴단에 의한 대규모 조사로 수혈주거지군(樹穴住居地群)과 그 부속시설이 확인되었고, 이후 계속된 발굴조사에 의해 많은 빗살무늬토기와 석기는 물론 청동기시대의 유물도 출토되었다.
이 유적에서는 세 개의 문화층에서 20여 기의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최하층은 전형적인 빗살무늬토기문화층으로 대부분의 주거지가 여기에 속한다. 중간층에서는 무문계 빗살무늬토기가 상당수 출토되어 빗살무늬토기에서 무문토기시대에 걸치는 과도기적 양상이 주목된다. 최상층은 백제시대문화층으로서 합구식 옹관묘(甕棺墓)와 건물의 적심석 등이 발견되었다
이 암사동 선사주거지유적은 1979년 7월 26일 사적 제 267호로 지정되었고 1981∼1988년까지 유적지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총면적 78,133㎡의 문화재 보호구역을 확대하여 9차에 걸친 복원공사로 신석기 시대 움집이 복원되었고 선사유적전시관을 건립하였으며, 이용시민들의 불편이 없도록 주차장, 산책로 등 편의 시설을 완비하여 '88년8월 준공되어 개방되고 있다.
3. 신석기인들의 생활상 한반도의 남쪽에 위치한 한강은 북쪽으로는 금강산, 남쪽으로는 태백산, 서남쪽으로는 칠현산에서 발원한 물들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따라 흐르고 흘러 이곳 한강으로 모여들어서 남한강, 북한강으로 두 큰 물줄기가 모여 양수리(=두물머리)에서 만나고, 두 강이 만나 한 물줄기를 만든후 서울터가 있는 한강하류로 흘러든다.
사람들이 몇몇 취락지에 모여살던 선사시대에는 쉽게 먹거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중요했지만, 차차로 국가를 이룰만큼 사람들이 군집을 이루어 힘이 커졌던 때부터 이곳은 또다른 이유들로 중요했다. 즉 삼국시대 이후로 이 한강을 차지한 나라가 패권국가! 즉 이 한반도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강은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던 강이다.
이렇게 한강이 있으므로 해서 서울터는 최고의 천연요새가 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물이 풍부하고 땅이 기름져서 농사짓기에도 아주 좋은 땅이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 그 허리를 띠두르고 있는 한강에는 구석기.신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집단취락 유적지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이곳 암사동 유적지도 그런 곳들 중에 하나이다.
이 가운데 신석기시대에 해당되는 빗살무늬토기문화층은 드러난 유물ㆍ유적으로 볼 때 우리 나라 중서부 지방 신석기시대 문화를 대표할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우리 나라 신석기시대 집터로써 암사동 유적은 제일 먼저 알려진 곳으로 이 유적의 연대는 방사성탄소 연대측정법에 의해 기원전 4∼3천년 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석기시대에는 거의대부분 땅을 깊이 파고 움집을 견고하게 지어서 살았다.
우리 나라의 경우 신석기시대는 완전한 생산경제의 단계가 아니고 일부 수렵, 채집, 어로에 의존하는 경제단계였기 때문에 대형 저장 시설보다는 대부분 간단한 제작시설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암사동 움집은 한강을 끼고 넓직한 평지에 자리잡고 있고 모두 20여 채의 신석기시대 움집터와 딸린 시설, 돌무지 구조 등이 드러났고, 여러 가지 무늬 토기, 석기 등이 발굴되었다. 움집 형식의 둥근집이 많으며 모를 죽인 네모꼴도 있다. 움집의 크기는 한쪽 길이가 5∼6m쯤이고, 깊이는 50 ∼ 100cm쯤 된다. 집자리 가운데에 돌을 둘러놓은 불땐 집자리가 있고, 입구는 남쪽에 있는 것이 많다. 기둥구멍은 집 한 채에 네 개가 있어 네 바닥은 아무런 시설이 없거나 또는 진흙을 깔아 다진 것이 있는데 그 위에 풀이나 짐승가죽 등을 깔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붕은 모서리에 기둥을 곧게 세우고 도리를 얹고서 서까래를 서로 기대어 세워 한 쪽 끝을 움 중앙에 모이게 묶어 골격을 형성하였는데 서까래 아래 사이에 잔나무 가지나 갈대, 억새 등의 풀을 이어 덮었다. 움집위에 까치구멍이 있었지만 그안으로 빗물이 들어오지 않게 움집위에 덮었으며 울타리도 물이 스며 들지않게 잘 만들어 사용하였다.
토기는 활석ㆍ석면 등이 섞인 것이 있으며, 계란을 반쪽 갈라놓은 모습의 뾰족 밑ㆍ둥근 밑 모양으로 토기의 입언저리ㆍ몸체ㆍ밑 부분으로 나누어 무늬를 새겼다. 입언저리에는 짧은 빗금무늬ㆍ점무늬ㆍ새끼무늬를 새기고, 몸체에는 물고기 등뼈무늬를 주로 장식하였다. 무늬가 없는 납작 밑 토기도 더러 나왔다. 무늬 새긴 부분에 따라, 이른 시기에는 토기 전체에 새긴 것이 많고, 늦은 시기로 오면서 입언저리 부분에만 무늬를 새긴 것이 늘어났다.
출토유물 가운데는 빗살무늬토기ㆍ돌도끼ㆍ돌화살촉ㆍ긁개ㆍ그물추 등의 생활도구 이외에 신석기시대는 완전한 생산경제의 단계가 아니고 일부 수렵, 채집, 어로에 의존하는 경제단계였기 때문에 대형 저장 시설보다는 대부분 간단한 제작시설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한강을 끼고 넓직한 평지에 자리잡고 있어 당시 사람들의 생활기반이 고기잡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나타내준다고 하겠다. 이것은 어망추, 작살 등 어로도구들이 출토되는 것으로 뒷받침되며, 화살촉들의 발견으로 인근 야산에서 수렵을 했으리라는 것도 알 수 있다.
또 도토리, 갈판, 갈돌의 발견은 신석기인 들의 주식량이 도토리였으며 우리나라의 대부부분의 나무는 참나무들이 많아서 인근 야산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도보습, 돌낫 같은 농기구의 출토는 조,수수, 귀리등 밭농사가 일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유물은 돌짐승의 사냥과 가죽을 벗기는 데 쓰였다고 보여지며, 공이는 들짐승의 뼈나 열매 같은 것을 부수는데 쓰였을 것이다. 그리고 갈판과 갈돌은 도토리 알과 같은 열매를 갈아서 가루를 내는데 쓰였을 것이다.
이 암사동선사주거지는 <서울고도 민족문화유적 종합복원계획>의 일환으로 복원공사를 시행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가꾸어 놓은 것이다. 이곳에 세운 9채의 움집은 당시의 움집터 위에 약 2m 두께로 흙을 덮고 그 위에 가상 복원한 것이며, 다시 그 앞에 관람객이 직접 들어가 당시의 생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도록 모형 움집을 만들어 두었다. 또한 원시생활전시관은 8채의 주거지와 1채의 저장용 구덩이를 경화 처리하여 그대로 보존하고, 그 주변에 당시 출토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변화된 점 최초에 입구는 고인돌로 되어 있었고, 움집의 지붕은 볏짚으로 되어 있었으나 모두 신석기시대와 맞지 않아 고인돌입구는 현재와 같이 나무로, 지붕은 갈대나 억새풀로 다시 이어 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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