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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석조물(石造物)

草霧 2013. 11. 6. 19:14

 

 

한국의 석조물(石造物)

 

 

 

 

 

석조물로서 오늘날 남아있는 우리나라의 유적, 유물은 그 수효가 다른 문화재에 비해 단연 으뜸이다. 이것은 여러 종류의 석재가 풍부한 까닭이며 특히 화강암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화강암은 다른 암석보다 풍부하였고 암질(巖質)에 있어서도 다른 석질보다 연질(軟質)이어서 우선 채석(採石)하는데 빠르고 돌다듬기에 손쉬우며 여러 가지 조각에 적합한 석질이므로 주재료로 선택된 까닭이다. 불교가 들어온 4세기 후반 이후부터는 불교적인 미술품 전반에 걸쳐서 화강암이 그 조성재료로써 이용되었고, 방방곡곡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석조물이 건조되기에 이른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여러 석조물을 살펴보면 석조탑파나 석조불상 등 사찰에서 승려와 신도들의 직접적인 예배대상이 되는 것을 비롯하여 석조부도, 석등(石燈), 노주(露柱), 석련대(石連臺), 당간지주(幢竿支柱), 석비(石碑), 석주(石柱) 등 여러 가지 불교적인 미술품과 석수(石獸), 석교(石橋), 석표(石標), 석빙고(石氷庫) 등의 많은 석조물이 있으니 석재로 이루어진 조형물의 다채로움을 알 수 있다. 석조물을 가공하는 데에는 날카로운 쇠붙이 도구말고는 사용구가 없다. 아무런 가식(假飾)이 없으며 어떠한 다른 빛깔도 채색되지 않고 그 형태를 달리하면서 저마다 그 나름의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다.

 

 

 

 

석조부도(石造浮屠)

승탑(僧塔)이라고도 하며 고승(高僧)의 묘탑(墓塔)을 말한다. 탑이나 부도는 그 어원에 있어서는 같은 것인데 일반적으로 탑이라고 할 때는 예배대상인 불탑을 가리키며 부도는 승려의 묘탑만을 일컫는다. 이러한 부도는 불교전래 이후 오래 전부터 건조되었을 것이지만, 삼국시대의 것은 없고 오늘날 전하는 유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지금은 경복궁안에 옮겨놓은 전흥법사 염거화상탑이다. 염거화상탑을 최고의 유례(遺例)로 보았을 때, 이를 한 기점으로 하여 부도의 형식을 고찰해야 할 것인데 이후의 부도는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것인 쌍봉사 철감선사탑과 대안사 적인대사 조륜청부탑,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 등 대부분이 염거화상탑의 형식을 따른 것들이다.

 

모두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을 기본으로 삼아 건조된 것으로서 다만 조형(造形)의 세부양식이나 각 부의 조각수법에 있어 시기적으로 다소의 차이를 보일 뿐 기본형태에 있어서는 거의 다 이같은 팔각원당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팔각원당형이란 팔각형을 기본으로 하여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 등의 기단부는 물론 이 위에 놓이는 탑신받침대, 탑신부, 옥개석, 상륜부가 팔각으로 조성되어 층층이 쌓인 것으로 이들의 평면은 곧 팔각이다.

 

그리하여 각 시대를 통하여 보더라도 이 팔각의 기본형은 신라는 물론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크게 유행되어서 대부분의 부도가 이 형식을 따랐고 조선왕조에까지 많은 영향을 주어 상당한 유례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각 부재가 원형으로 변해가는 것은 신라 말기에서 고려시대에 걸쳐 나타나는 형식인데 이것은 곧 모()를 죽여서 원형으로 만든 새로운 의장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변형 역시 팔각의 기본형에서 비롯된 것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예컨대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릉공탑은 각기 기단부에 있어서 팔각을 떠나 평면이 원형으로 변한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고려시대에 와서 정토사 홍법국사 실상탑은 탑신이 구형으로 되어 전면을 원형으로 변형시킨 기발한 의장이고 흥법사 진공대사탑과 여주의 고달사 원종대사 혜진탑 등은 일부 부재가 원형으로 변하는 동시에 중대석이 특히 커져서 그 표면에 구름 속의 용(雲龍紋)을 조각한 새로운 양식을 보이고 있어 주목을 끈다.

 

이밖에 또 고려시대에는 평면 팔각에서 완전히 떠나 사각을 기본으로 삼은 부도가 있으니, 그 좋은 예로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과 영전사지 보제존자 사리탑을 들 수 있는데 특히 영전사지 보제존자 사리탑은 그 형태가 일반형석탑과 같이 방형중층(方形重層)이므로 외형만으로는 석탑인지 부도인지 구별할 수 없어서 또한 주의를 끄는 형식이다.

 

부도(浮屠)의 세부명칭

각원당의 중적형식(重積形式) 이외에 또 하나의 양식이 있으니 그것이 석종형(石鐘形) 부도라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주로 고려말기 이후 조선왕조 전시대를 통하여 가장 많이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고려초기와 신라하대에 건조된 석종형부도가 몇 기 남아 있으므로 그 시원은 하한을 통일신라하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울산의 태화사지 십이지상부도는 그 표면에 조각한 십이지상의 형태나 수법으로 보아 신라시대의 조성품이 틀림없고, 김제의 금산사석종은 그 주변의 장식조각으로 미루어 고려초기인 10세기에 건조한 것으로 추정되며, 여주의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은 고려말에 조성된 석종형부도의 대표라 하겠다.

 

조선왕조에 이르러서는 거의 석종형부도인데 이것은 아마도 석종형이 규모가 작고, 또 그 조성건립의 과정에 있어서 종전의 팔각원당형보다는 손쉽고 빠르기 때문에 당시의 시대적 요청에 의하여 자연히 성행된 양식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오늘날 각 사찰에의 부도군에서 볼 수 있듯이 수십기씩의 석종형부도가 거의 같은 형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전의 팔각원당형부도는 조선왕조 초기와 전기인 임진왜란 이전에 건립된 몇 기의 유례를 보이고 있으니, 양주의 회암사지 부도와 보은 법주사 복천암 수암화상탑, 복천암 학조등곡화상탑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당간(幢竿)과 지주(支柱)

당간지주는 당간(幢竿)을 세우기 위하여 좌우에 지탱하도록 세운 기둥(支柱)을 말한다. 당간은 그 당()을 달아두는 장대인데 지주는 모두 석조이나 당간은 석조 혹은 철조로 되어 있다. 당이란 불가에서 사찰의 문앞에 꽂는 기치(旗幟)의 하나인데 속칭 괘불(掛佛)이라 하여 그 표면에 불화가 그려져 있으며 기도나 법회 등 큰 의식이 있을 때만 당간에 달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당과 당간의 조성은 통일신라시대부터 각 사찰에서 성행한 것으로서 당은 없고 당간과 그 지주만이 사찰의 입구에 세워졌던 그 모습대로 현재까지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당간도 오랜 세월에 파손되어 남아있는 것이 극히 드물며 대개의 경우는 지주만 남아 있어서 당시의 상황을 짐작케 한다. 현재 남아있는 대표적인 당간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공주의 갑사(甲寺) 철당간이 있고 고려시대의 것으로는 청주시내의 용두사지(龍頭寺址) 철당간과 나주의 동문밖석당간, 담양 읍내리 당간 등이 있으며, 호암미술관에 소장중인 용두보당도 당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철당간은 각기 그 규모가 다르나 주성(鑄成) 및 건립의 양식수법은 같은 것으로서 직경 4050cm, 높이 6070cm의 철통(鐵筒)20여개씩 연결하여 건립하고 석당간도 몇개의 가늘고 긴 돌기둥을 연결하여 세운다.

 

그러나 그 석재의 결구수법은 철당간과는 달리 상하연접(上下連接)되는 양단(兩端)을 반씩 깎아내어 접착시킨 것인데 이것은 철통을 쌓아올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양식이라 하겠다. 지주는 방형의 돌기둥을 60100cm의 간격으로 양쪽에 세우고 그 내면에 상대하여 간을 설치하기 위한 간구(竿溝)나 간공(竿孔)을 마련한 것이 기본형태이며 하부는 간대(竿臺)와 기단부를 시설하고 있다. 간구는 반드시 내면상단에 마련하였으나 밑으로 내려오면서 간공은 그 수효가 일정치 않아서 하나 혹은 둘 있는 것도 있으며, 형태 또한 어떤 것은 관통된 것도 있다.

 

이러한 기본형은 시대가 흐름에도 변화가 없으며 다만 양지주를 장식하는 각 면에 문양과 지주의 치석수법만이 시대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 신라시대의 지주로는 영주의 부석사(浮石寺) 당간지주와 김제의 금산사(金山寺) 당간지주가 간대와 기단부를 갖춘 대표작으로서 또한 각 부에 세련된 작풍을 보이고 있는데, 고려시대에 이르면 신라시대와 같이 내면을 제외한 각 면에 종선문(縱線紋)을 장식하고 주두(柱頭)도 원호(圓弧)를 이루며 간대, 기단 등 각 부가 구비

 

 

 

 

당간지주(幢竿支柱)의 세부명칭

되었으나 그 문대(紋帶)가 형식화 혹은 약화되어 정교하지 못하고 치석(治石)도 고르지 않아서 둔중감을 준다. 그 예로는 춘천의 근화동(槿花洞) 당간지주와 천원의 천흥사지(天興寺址) 당간지주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조선시대에 이르면 볼만한 당간이나 지주를 남기고 있지 않으니 역시 시대적인 문제를 생각해야 될 것이다.

석등(石燈)

석등은 불()을 밝히기 위하여 만든 석조등기(石造燈器)이다. 석등은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법당(法堂) 앞에 건립하였던 것이다. 그 예를 익산의 미륵사지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삼국시대 석등의 예로는 이곳 미륵사지의 석등부재 이외에 발견된 것이 없으므로 삼국시대의 석등 양식에 대하여는 재론할 자료가 없으며 다만 그 시원(始原)이 삼국시대까지 올라간다는 것뿐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각 사찰에 많은 석등이 건조되었는데 그 기본형은 하대석 위에 간주(間柱 : 중대석)를 세우고 그 위에 상대석을 놓아 화사석(火舍石)을 받치고 그 위에 옥개석을 덮음으로써 이루어졌다. 그 형태는 평면이 팔각으로 조성되었는데 이 전형적인 팔각의 시원은 현재 부여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는 미륵사지석등의 팔각화사석을 생각해야 되겠다. 우리나라 석등의 주류적인 양식은 통일신라시대에 성행된 팔각이 기본형인데 이러한 형태는 이후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변하여서 시대적 또는 지역적인 특징을 보이게 된다.

 

예컨대 팔각의 화사석 사면에 보살상(菩薩像)이나 사천왕상(四川王像)을 조각하기도 하고 특히 호남지방에서는 남원 실상사(實相寺) 석등이나 임실 용암리(龍巖里) 석등처럼 고복형(鼓腹形)의 간주(竿柱)가 나타나서 지방적인 특색을 보인다. 그리고 기본적인 각 부재는 구비하고 있으나 그 형태가 변형된 이형양식이 나타나서 현재 몇 개의 예를 남기고 있으니 보은의 법주사 쌍사자석등이 그중 하나다. 중국 흑룡강성에서는 발해시대의 석등이 발굴되어 발해문화의 일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시대에 있어서도 초기에는 전대인 통일신라 때의 팔각 전형의 주류를 계승한 양식을 볼 수 있는데, 각 부의 조각수법이 세련되지 못하고 전체적인 형태가 둔중(鈍重)함을 면치 못한다.

 

그러나 이 시대의 석등에서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팔각양식을 벗어나 하나의 새로운 양식을 이룩한 형태를 보이고 있으니 논산의 관촉사지(灌燭寺址) 석등이나 개풍의 현화사지석등 (玄化寺址石燈 :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있음)이 그 좋은 예이다. 이들은 방형을 기본형으로 하고 간주는 원형이며 그 위에 방형의 앙련석(仰蓮石), 화사석, 개석(蓋石)을 얹고 있다.

 

이형양식인 전대의 사자석등형이 이 시대에도 계승되어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석등의 유례를 보이고 있는데 이것의 쌍사자는 신라시대와 같이 두 발로 서서 직접 상대석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방형의 하대석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을 뿐 상대를 직접 받치지 않고 그 위에 다른 부재가 받치도록 되어 있어 또한 주체적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퇴화적인 현상임을 볼 수 있다.

 

조선왕조에 이르면 사원의 개창이 거의 없고 따라서 석조물의 건조도 위축되었으므로 볼만한 것이 없다. 그런데 중원의 청룡사지(靑龍寺址) 쌍사자석등은 전대의 사자석등 양식을 계승한 것이 분명하므로 이러한 전형이 조선왕조 초엽에도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 한편 석등은 비단 사찰에만 세우는 장엄(莊嚴)이 아니고 능묘(陵墓) 앞에도 장명등(長明燈)으로서 건조하였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능묘장엄물로서의 석등은 공민왕 현릉(玄陵)의 장명등을 들 수 있겠는데 고려시대 말기에 세워져서 이후 조선왕조의 왕릉(王陵)에는 반드시 장명등을 설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고려말부터 나타난 장명등의 석등양식은 모두 방형의 기본형이지만 이보다 앞서 유행하였던 세장한 간주는 얹어지고 짧고 몽락한 형태로 변하고 있으니 이러한 변화과정은 이미 고려말의 건조물인 여주의 신륵사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鍾) 앞 석등에서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석등(石燈)의 세부명칭

 

석비(石碑)

삼국시대부터 세워진 것으로서 고구려의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 백제의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新羅眞興王巡守碑) 등이 남아 있으나 이들은 귀중한 사료로서 주목되는 것이지 조형적인 미술품으로서 특기할 만한 유물이 못된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서는 초기부터 삼국시대의 옛 모습에서 벗어나 비신을 중심하여 밑에는 신석(身石)을 받치는 비좌(碑座)와 그 위에는 비신을 덮는 개석(蓋石)이 구비되어 이것이 곧 귀부(龜趺)와 이수()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형식의 비석은 어떠한 사실을 발생당초 또는 그와 머지 않은 시기에 상세하게 밝혀 놓았기 때문에 그 비문의 내용은 역사적으로 기록될 대상이 되었고 서체는 금석학의 입장에서 중요한 연구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귀부와 이

 

석비(石碑)의 세부명칭

수의 여러 조각은 미술사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며 더욱이 그 석비의 건립연대가 명기(明記)된 것은 더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석비는 대개 묘비(墓碑)와 탑비(塔碑)가 있는데 묘비로는 경주의 신라 태종무열왕릉비(현재는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 있음)를 대표작으로 들 수 있겠다. 탑비는 경남 하동의 쌍계사 진감선사(眞鑑禪師) 대공탑비(大空塔碑)와 경복궁내의 월광사 원랑선사탑비(圓朗禪師塔碑) 같은 9세기풍의 유품이 있고 이것이 고려때까지 계승되어서 역시 귀부와 이수를 갖춘 비석이 건립되었는데 부분적으로는 퇴화 혹은 변형된 양식도 있으나 대체적으로 기본형은 유지하고 있다.

 

고려시대 중엽에 이르면 한편으로 다른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으니 귀부 대신 장방형 개석의 비좌가 생기고 이수도 장방형개석이 되어 선봉사 대각국사비(大覺國師碑)와 같은 형태를 볼 수 있다. 그리고 또 개석을 생략하고 비신 상부의 양쪽 모()를 죽인 것도 있으니 경북 영일의 보경사 원진국사비(圓眞國師碑)는 그 좋은 예라 하겠다. 이러한 변형적인 양식은 고려말기에 이르면서 더욱 성행하였고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같은 경향으로 일관하였으니 서울 파고다공원의 원각사비(圓覺寺碑) 가 그 유례이다.

석련대(石蓮臺)

연화문(蓮花紋)이 조식(彫飾)된 석조불좌대(石造佛座臺)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불상의 조성과 함께 건조되었으므로 마땅히 삼국시대에 그 시원을 두어야 할 것이다. 그 기본형은 방형, 원형, 팔각원당형의 형식을 취하며 상··하대로 구성되었는데 상·하대는 각각 앙복련(仰伏蓮)을 조각하였으며 중대는 간주형(竿柱形)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기본형은 신라와 고려시대에 일괄한 양식이다.

 

그러나 방형이나 십각형의 형태는 신라말기부터 고려시대에 이르는 양식으로서 나말여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김제의 금산사(金山寺) 석련대가 십각형이고 고려초기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여주의 고달사지(高達寺址) 석불좌(石佛座)가 장방형으로서 각기 대표작이라 하겠다.

석조(石槽)

석조란 큰 돌을 넓게 파고 물을 받아 사용하도록 만든 일종의 돌그릇으로 흔히 사찰에서 물을 담아 두기도 하고 때로는 큰 일을 치르고 나서 기물을 씻을 때에 물을 받아쓰는 수조(水槽)를 말한다. 그 형태는 시대에 따라 다른데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는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공주국립박물관의 공주 중동(中洞) 석조, 공주 반죽동(班竹洞) 석조와 부여국립박물관의 부여석조가 원형(圓形)이고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경주 보문리석조(普門里石槽)는 장방형이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도 석조를 만들어 사용하였으나 전대와 같이 규모가 크지는 않다.

노주(露柱)

노주는 현재 김제의 금산사노주가 있다. 건조년대를 고려시대로 추정하고 있으므로 이보다 앞서는 통일신라에도 존재하였을 것이다. 금산사노주는 상부의 보주(寶珠)만 없으면 방형이 불좌대처럼 구성된 특이한 석조물인데 아마도 불가의 공양대(供養臺)로 쓰였던 것 같다.

석수(石獸)

석조수상(石彫獸像)으로서 백제 무녕왕릉(武寧王陵) 석수와 같은 삼국시대의 것이 있으나 극히 드물며 이후 통일신라시대부터 크게 유행하였으며 고려, 조선왕조에 이르기까지 여러 왕릉 앞에 많은 석수를 배치할 정도로 성행하였다. 경주 불국사 다보탑(多寶塔) 석사자(石獅子)와 여러 유적의 호석(護石) 또는 장식 등으로, 발해 정효공주묘 앞의 석사자 등과 같이 능묘 장식물로 이용되고 있다.

 

이렇게 석사자 만이 아니라 석호상(石虎像)도 능묘 앞에서 볼 수 있으며 특히 십이지생초(十二支生肖) 같은 여러 수상(獸像)은 신라·고려를 거쳐 조선왕조에 이르기까지 계속 조각되어 각종 유적의 주위를 장식하고 있다.

()의 의미와 변천

탑은 탑파(塔婆)를 줄인 말로 원래는 범어(梵語 ; Sanskrit)'Stupa' 또는 파리어(巴梨語 ; Pali)'Thupa'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탑파는 불교가 발생하기 전부터 고대인도에서 '무덤'의 뜻으로, 즉 사람이 죽고나면 화장(火葬)을 한 후 흙과 돌로 돔(Dome)과 원분(圓墳)을 만든 것을 가리켰다.

 

이러한 탑파는 불교발생과 더불어 교주인 석가모니가 입멸(入滅, 涅槃)하자 제자들이 그의 유해를 당시의 사회 장속(葬俗)에 따라 다비(茶毘 ; 火葬)하였고, 다비 후 그 유골인 사리(舍利)를 봉안하면서 불교적인 조형물이 되었다. 그러므로 탑파의 의미는 '신골(身骨)을 담고 흙과 돌을 쌓아올린 불신골(佛身骨, 眞身舍利)을 봉안하는 묘()'라는 뜻에서,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축조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당시 인도에서는 8국이 석가모니의 사리를 서로 차지하려는 쟁탈전이 벌어졌는데, 제자인 도노나(徒盧那)의 의견에 따라 사리를 똑같이 나누어 각각 탑을 세우니 이를 '분사리(分舍利)' 또는 '사리팔분(舍利八分)'이라 한다. 사리신앙은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한 것이며, 불탑의 기원 역시 바로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석가모니가 입멸한 지 백년이 지나서 대인도제국을 건설한 마우리아(Maurya)왕조의 아육왕(阿育王 ; Asoka, 272232 B.C.)은 불사리를 봉안한 8개의 탑을 발굴하여 다시 84천으로 나누어 전국에 널리 사리탑을 세우고 불교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따라서 불탑의 성격은 처음에는 불신골을 모신 무덤이었으나 점차 불교의 거룩한 가르침을 뚜렷이 표시함으로써 그 믿음을 세상에 널리 퍼뜨리기 위한 기념물로 바뀌어 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인도의 불탑으로 초기의 것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그 형태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기원전 3세기경의 산치(sanchi)대탑을 보면, 반구형의 복발(覆鉢)을 봉분(峯墳)하듯 흙과 돌로 쌓아 올리고, 그 위에는 제단에 비유되는 판석(板石)을 방형(方形)으로 울타리같이 짜서 평두(平頭)라는 것을 만들고 불사리를 안치하였으며, 평두의 중앙에는 다시 산간(傘竿)을 세워 세계의 중추 내지는 '생명의 나무'란 뜻을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반구형의 분묘 모양은 후대로 오면서 그 밑에 높은 기단을 만들어 탑신을 받치고 있으며 상륜(相輪)도 그 수효가 늘어나는 한편 주위에는 돌난간을 돌리고 아름다운 조각을 새겨 넣었다. 중국에서는 후한 명제때(5775)1세기경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불탑도 함께 건립되었으나 당시의 불탑으로 전해지는 것은 없다. 그러나 운강석굴 등에 새겨진 모습을 보면 초기의 탑들은 목조에 의한 다층누각(多層樓閣)형식이었으며, 꼭대기에는 인도탑형식이 그대로 축소된 상륜부가 얹혀 있음을 알 수 있다.

 

남북조시대에 이르면 중국탑의 양식이 정립되는데, 숭악사815층전탑(嵩岳寺八角十五層塼塔 ; 523년 건립)은 그 대표적인 예이며, 이후 주로 8각형의 전탑이 중국탑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으로부터 불교가 수용되면서 불탑이 만들어지는데 그 형식은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목탑이 중심을 이루었으나 차츰 우리나라의 독특한 양식으로 석탑(石塔)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 탑의 종류와 형식

 

탑파의 성격

 

불탑(佛塔)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함

 

승탑(僧塔; 浮屠) 승려의 유골(遺骨)을 모심

 

 

 

 

건조재료(建造材料)

 

 

목조탑파(木造塔婆)

지금은 전해지는 예가 없기 때문에 그 형식을 알 수 없으나, 조선후기건축인 법주사(法住寺) 팔상전(捌相殿 ; 1605), 쌍봉사(雙峰寺) 대웅전(大雄殿 ; 17세기) 등이 탑파형식을 따른 건물이라는 점에서 추측해 볼 때, 방형중층(方形重層)의 누각형식으로 보여진다.

목탑의 양식을 따른 석탑(石塔)

기단이 얕은 단층기단(單層基壇)이고, 옥개석의 폭()은 탑신의 폭에 비하여 현저히 넓고, 옥개석밑은 목조건축의 공포구조(供包構造)를 모방하였고, 옥개석의 추녀 밑은 네 귀가 위로 반전(反轉)되어 목조건축의 형식을 따랐고, 각 부()의 구조는 많은 돌을 써서 목조건축의 가구법(架構法)을 따랐다.

 

특히 익산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은 일면삼칸(一面三間)의 건물형식을 취하였는데 가운데칸(中間間)은 개방되어 내부로 통하게 되어 있고 내부에서 교차되는 중심에는 거대한 찰주석(擦柱石)이 있어 가장 충실히 목조탑의 형식을 따른 것이라 하겠다. 이런 목조탑의 양식을 따른 석조탑의 예로는 백제시대의 익산 미륵사지석탑,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 고려시대의 익산 왕궁리(王宮里) 오층석탑 등이 있다.

전조탑파(塼造塔婆)

전탑은 벽돌을 만들어 쌓은 탑으로, 안동 등 일부지역에 남아 있으나 크게 유행하지는 못한 형식이다. 전탑의 특징은 단층기단 위에 탑신을 세우며, 옥개석(屋蓋石) 위아래는 모두 층단(層段)을 이루고, 옥개석의 폭이 현저하게 좁아지며, 옥개석의 추녀 밑이 끝까지 직선이 된다.

 

통일신라시대에 건탑(建塔)에서 보는 옥개석 위에 기와를 입힌 수법 또한 전탑에 앞서 목탑이 있었다는 증거가 되며, 단층의 기단에 감실(龕室)을 개설함에 있어 그 주변과 감실 자체에 화강암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전탑의 예로는 안동 신세동(新世洞) 층전탑(8세기), 안동 동부동 5층전탑(8세기), 안동 조탑동 5층전탑(8세기),중국 장백 조선족 자치현에 있는 영광탑이라 불리우는 발해시대의 5층전탑, 칠곡 송림사 5층전탑(9세기),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고려) 등이 있다.

모전석조탑파(模塼石造塔婆)

돌을 벽돌과 같이 모각(模刻)하여 만들어 쌓은 모전석탑은 건탑재료로 석재(石材)가 이용되었을뿐, 그 형식은 전탑과 같은 축조과정(築造過程)을 거치기 때문에 그 형태는 전탑과 다를바 없다. 이런 석탑으로는 경주 분황사(芬皇寺) 모전석탑(634), 영양 봉감 5층모전석탑(고려), 제천 장락리 7층모전석탑(고려), 정선 정암사 수마노탑(水瑪瑙塔 ; 고려) 등이 있다.

모전석탑유형(模塼石塔類型)의 석탑

이탑은 석재를 벽돌과 같이 가공하지 않고 전탑의 외형만을 모방한 탑으로 전탑이나 모전석탑과는 다른 특수한 석탑이다. 이러한 것은 수에 있어서는 많지 않으나 이것으로 문화의 한 수용단계에서 나타난 특이한 현상을 찾아 볼 수 있겠으며, 이색적인 전탑에 대한 호기심과 평소에 연마한 석조(石造) 기술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하겠다.

 

탑신부의 전체적인 형태로는 옥개의 단촉(短促), 옥개상하면의 층단표현(層段表現) 등 전탑의 특징을 갖추고 있으며, 이 유형에서 주목되는 것은 기단부의 구조인데 일반형석탑에서 볼 수 있는 축조기법을 이용하여 단층 혹은 이층의 기단을 이루고 있는 것이 있고, 또 하나의 형식은 촉석(數石)으로 구축하여 괴체성(塊體性)을 보이며 입방체의 이형(異形) 기단을 이루고 있는 점이다.

 

그리고 탑신부에 있어서는 일반형석탑의 옥개석과 같이 괴체성을 보이고 있는 옥신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 유형의 탑()으로는 의성 탑리 5층석탑(700년 전후), 선산 죽장동 5층석탑(통일신라), 선산 낙산동 3층석탑(8세기), 경주 남산리 동3층석탑(9세기), 경주 서악리 3층석탑(9세기), 의성 빙산사지 5층석탑(나말여초), 강진 월남사지 모전석탑(고려) 등이 있다.

 

석조탑파(石造塔婆)

우리나라 탑파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탑이다. 우리나라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재료인 돌을 이용한 조탑(造塔)은 한국을 '석탑의 나라'라고 일컬어지게 할 정도이다. 석탑은 탑의 시대적 변천 부분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고 있다.

 

금동탑(金銅塔)

청동탑과 금동탑 등 금속제 탑들은 건물내의 봉안탑으로 만들어진 공예품들로 많은 수의 예들이 있다.

 

 

 

 

탑의 시대적 변천

 

 

. 삼국시대

 

1. 고구려의 탑

고구려의 탑으로는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영탑사(靈塔寺)87층석탑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평양 청암리 금강사지(金剛寺址), 대동군 상오리사지 등에는 8각의 목탑지가 남아 있는 점으로 볼 때 주로 평면 8각의 탑들이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고구려의 양식은 이후 이 지역의 고려시대 석탑에 계승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는 평양 영명사(永明寺) 85층석탑, 대동 광법사(廣法寺) 85층석탑, 대동 율리사지 85층석탑, 평창 월정사(月精寺) 89층석탑, 김제 금산사(金山寺) 6각다층석탑(이상 고려)이 있으며, 묘향산 보현사(普賢寺) 813층석탑, 남양주 수종사(水鍾寺) 85층석탑, 여주 신륵사(神勒寺) 다층석탑(이상 조선) 등에도 영향을 미쳤다.

 

2. 백제의 탑

백제에서도 처음에는 목탑이 건립되었으나 남아있는 것은 없고, 부여 군수리사지, 부여 금강사지, 익산 제석사지 등에 탑지만이 남아 있는데, 평면 방형인 점이 특징이다. 그러나 백제탑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이라고 할 수 있는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이 탑을 보완하여 백제식의 석탑양식을 완성한 정림사지석탑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 탑들은 목탑의 각 부재에서의 여러 양식을 목재 대신에 석재로서 충실히 구현한 석탑으로서 그 특징을 보면, 기단이 얕은 단층기단이고, 옥개석의 폭은 비교적 얇고 넓으며, 네 귀에서 반전하고, 내림마루를 각출했다. 아울러 각 부의 구조는 목조건축의 가구법(架構法)을 따라 많은 돌을 썼으며, 우주(隅柱)에는 배흘림이 나타난다. 특히,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 있어서는 13칸의 건물형식을 취하였는데 중간칸은 개방되어 내부로 통하게 되어 있고, 내부에서 교차되는 중심에는 거대한 찰주석(擦柱石)이 있는 점은 목탑의 형식을 매우 충실히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백제탑의 양식은 이후 이 지역의 고려시대 석탑에 계승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는 익산 왕궁리 5층석탑, 부여 무량사 5층석탑, 김제 금산사 5층석탑, 계룡산 남매탑(7층탑), 담양 읍내리 5층석탑, 남원 만복사지 5층석탑, 서울 홍제동 5층석탑(이상 미륵사지계), 서천 비인 5층석탑, 계룡산 남매탑(5층탑), 부여 장하리 3층석탑, 정읍 은선리 3층석탑(이상 정림사지계) 등이 있다.

 

3. 신라의 탑

신라에서도 처음에는 목탑이 건립되었으나 남아있지 않고, 황룡사9층목탑의 탑지(塔址)만이 남아 있다. 석탑으로서는 모전석탑인 분황사탑만이 남아 있는데, 이것은 신라의 석탑이 백제와는 달리 전탑을 모방하면서 출발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 통일신라시대

1. 전형적양식(典型的樣式)의 성립

통일신라시대 초기에 우리나라 석탑은 하나의 형식으로 집약·정돈되는데 이러한 양식의 가장 시원적인 석탑은 감은사지(感恩寺址) 3층석탑(682)과 고선사지(高仙寺址) 3층석탑(686년 이전)으로, 이 탑의 양식은 이후 우리나라 석탑의 전형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이 탑의 특징으로는 기단이 2(상층기단이 높음)이며, 갑석(甲石)과 옥개석의 상면에는 2단의 각형(角形)괴임을 두었다. 기단부 상·하층의 면석(面石)에는 우주와 탱주(撑柱 ; 상층 2, 하층 3)를 세웠고, 탑신부의 옥신석 양쪽에도 우주를 세웠다. 옥개석은 폭이 줄어들었고, 하면에는 5개의 층단(層段 ; 옥개받침)이 있으나 상면인 낙수면(落水面)은 층단이 없이 경사를 이룬다.

 

추녀 밑은 전각(轉角)에 이르기까지 직선을 이루고 있으나, 전각부에서 추녀 끝이 들리면서 목조건축의 지붕을 모방하고 있다. 이와 같은 특징들은 목탑과 전탑의 형식이 같이 나타난 결과라 할 수 있다. 또한 각 부의 구성이 백제탑과 같이 많은 석재를 이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목조건축에서의 구조성을 잃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기가 내려옴에 따라 초기적인 가구가 점차 희박해져서 석재의 수가 줄어들며 형식도 변화를 보이는데, 월성 나원리 5층석탑(7세기 후반)에서는 옥신은 2층 이상부터, 옥개석은 3층 이상부터 1석식이다.

 

경주 구황리 3층석탑(700년 전후)에서는 탑신의 각 면석이 조립식이 아닌 1석으로 만들어 우주를 따로 세우지 않고 양모서리에 각출하였으며, 하층기단의 탱주도 3주에서 2주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괴체성(塊體性)의 경향은 다시 기단부터 탑신부를 구분할 필요없이 석탑 전체에 영향을 미치어 앞선 시대의 복잡한 가구양식이 간략화되었으며, 기단과 탑신부의 균형도 높고 큰 기단과 방대한 탑신부가 시대가 내려오면서 거의 비슷한 크기로 되어감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시원적인 양식에서 변화하여 우리나라 석탑의 가장 일반적인 양식, 즉 전형양식의 전형이 나타난다.

2. 전형양식의 완성

통일신라시대의 조탑활동은 그 성대(盛代)8세기 중엽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며, 전형양식이 완성되어 정형화(定型化)된 석탑이 나타난다. 이러한 석탑의 형식은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구축된 지대석 위에 2층기단을 놓고, 그 위에 탑신부, 상륜부 순으로 건조되었다. 기단부는 상·하층이 같은 형식으로 각 면석에는 양쪽에 우주를 표시하고 중간에 2주의 탱주를 모각하였으며, 상층기단갑석에는 부연(副椽)을 마련하고, 탑신부를 받고 있는 괴임대는 각형 2단을 정연하게 각출하였다.

 

탑신부에서 옥신은 각면에 우주를 표시하고, 옥개석은 하면에 5단의 옥개받침을 마련하였으며, 상면에는 2단의 각형 괴임을 각출하여 그 윗층의 옥신석을 받고 있다. 이상과 같은 형식은 감은사지 3층석탑이나 고선사지 층석탑과 같은 시원적인 신라양식의 전형이 완성되어 정형화한 것으로, 여러 개의 석재가 생략되어 괴체(塊體)의 옥신과 옥개를 이루게 되었고, 하층기단 면석의 탱주가 3주에서 2주로 줄어든 점이 현저하게 눈에 띤다.

 

이러한 양식의 예로는 불국사 3층석탑(석가탑), 갈항사 동·3층석탑, 창녕 술정리 동3층석탑, 청도 봉기동 3층석탑(이상 8세기 중엽), 속초 향성사지 3층석탑(9세기) 등이 있다. 특히 이 중에서도 갈항사 3층석탑은 동탑의 상층기단 면석에 건립연기가 음각되어 있으며, 이 명문에 의하여 신라 경덕왕 17(758)에 건립된 사실을 알 수 있어서 이 쌍탑은 다른 석탑의 건립연대를 추정함에 있어서 표준이 되고 있다.

 

3. 신라하대 전형양식의 변형

8세기 중엽에 완성된 전형양식은 9세기에 들어오면 점차 변화하기 시작하여 9세기 후반에는 현저한 변화를 보이게 된다. 기단의 탱주와 옥개받침, 탑신괴임에서 그 수가 줄어들고, 전각의 반전이 심해질 뿐만 아니라 단층기단의 형식도 다시 나타나는 등 부분적 혹은 전반적으로 많은 변화가 나타난다. 특히 무엇보다도 큰 특징은 석탑의 크기가 전반적으로 작아진다.

 

이러한 변형은 조형예술품 자체의 양식적인 변화에서 일어난 결과라고도 하겠으나 한편으로는 당시의 사회·정치적인 여러 여건에서 기인된 것이라 할 수 있다. 9세기 이후부터는 왕실의 왕위쟁탈전과 지방 호족세력의 할거로 인하여 사회가 혼란해지고, 중앙의 지방통제가 약화된 시기로서 예술도 힘찬 기상에서 섬약한 모습으로 변해간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이 때는 선종(禪宗)이 크게 유행하기 시작한 시기로 이것도 조형예술품의 변화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판단된다.

 

전형양식의 변화

세기에 들어오면 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신라석탑의 전형적 정형은 차차 변형되어감을 볼 수 있다. 기단부나 옥개석에서 약간의 부분적인 변화는 있으나 8세기 중엽의 전형양식을 잘 계승한 대표적인 탑으로는 870년경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진 보림사 동·3층석탑 2기가 있다.

 

이 탑은 하층기단에서는 2()의 탱주가 정연하나 상층기단에서는 1주로 줄어들었으며, 옥개받침은 5단을 유지하고 있으나, 네 귀퉁이 전각의 반전이 아주 심해지고 있다. 이와 같이 기단부의 탱주가 상층기단에서 주로 변하고, 옥개받침은 (五段)으로 성대(세기중엽)의 정형을 잘 계승하고 있는 석탑의 예로는 보림사 3층석탑을 비롯하여, 부석사 3층석탑, 울진 청송사지 3층석탑, 단속사지 동·3층석탑, 합천 청량사 3층석탑 등이 있다.

 

더욱 변화된 석탑

9세기 후반에 이르러 위에서 본 석탑보다 규모가 작아지고 양식면에서도 더욱 큰 변화를 보이는 석탑들이 나타난다. 기단부에서는 석재가 줄어들었고, ·하층 모두 면석의 탱주가 2주에서 1주로 줄어들었으며, 탑신부에 있어서는 옥개받침의 수가 5단에서 4단으로 간략화되고 있다.

 

그리고 탑신괴임의 모각수법이나 옥신괴임 및 낙수면 전각의 치석형식(治石形式)에서 성대의 전형으로부터 변형되어 간략화 또는 부분적으로 생략되었다. 이러한 양식을 갖춘 석탑으로는 실상사 동·3층석탑, 동화사 금당암 동·3층석탑 및 비로암 3층석탑, 경주 효현리 3층석탑, 경산 불굴사 3층석탑, 양양 오색리 3층석탑, 홍천 물걸리 3층석탑 등이 있으며, 이 탑들의 건립시기는 거의 같은 시기인 9세기 후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단층기단의 형식

신라 하대에 이르면 또 하나의 변형된 형식으로 단층기단이 출현하는데, 기단부의 구조가 2중기단이라는 기본형에서 벗어나 단층기단 위에 바로 탑신부를 받고 있는 형식이다. 이 형태는 형식적으로 낮은 하층기단이 생략되어 지대석 위에 바로 상층기단이 놓이게 된 것이다.

 

이러한 단층기단을 가진 석탑에서는 여러 개의 장대석을 결구하여 지대석을 마련한 위에 기단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나, 간혹 지대석 대신에 자연암반에 기단면석을 조립한 석탑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유형의 석탑으로는 표충사 3층석탑, 봉암사 3층석탑, 문경 내화리 3층석탑, 화엄사 동5층석탑, 경주 남산 용장사곡 3층석탑(자연암반에 기단면석을 건립) 등이 있다. 이러한 양식의 석탑은 다음 고려시대의 양식에 많은 영향을 주어서 신라석탑의 전형적인 기단 양식인 2층기단이 유행하는 한편 단층기단의 석탑도 많이 건조되었던 것이다.

4. 이형적(異型的)인 석탑

이상에서 살펴본 일반형 석탑과는 기본양식과 형태를 달리하는 이형적인 석탑이 있다. 이형석탑이라 함은 석탑의 건조방법이나 각 부재의 결구방식이 전형에서 벗어나 외관상으로 특이한 형태를 보이는 석탑이다.

 

즉 방형 중층의 일반형 석탑의 기본형식을 간직하면서 신라의 전형양식에서 탈피하여 외양상으로 특수한 가구를 보이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특이한 형태의 석탑이 출현하는 것은 8세기 중엽의 통일성대에 있어서 꽃피었던 장식적 의장이 석탑에까지 영향을 미침으로써 전형에서 이형이 탄생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양식의 석탑으로는 불국사 다보탑(8세기 중엽), 화엄사 4사자 층석탑(8세기 중엽), 석굴암 3층석탑, 실상사 백장암 3층석탑(9세기), 월성 정혜사지 13층석탑(9세기) 등이 있으며, 고려시대의 이형석탑인 홍천 괘석리 4사자3층석탑, 제천 사자빈신사지 석탑(1022) 등에 계승되었다.

 

그리고 이형석탑의 경우 많은 탑이 사자를 이용하고 있는데, 사자는 불교에서 연꽃과 함께 상징적인 존재로서 각종 불교미술품의 표면장식과 주요부분의 구성에서 광범위하게 이용되었다. 즉 사자상은 불상대좌, 석탑, 부도, 석등, 비 등의 기단 혹은 대석에 표면장식으로 조각하여 장엄(莊嚴)의 뜻을 나타냈고, 석탑의 기단과 석등의 대석에도 원각(圓刻)한 사자상이 배치되고 있다. 이처럼 사자를 불교미술품에 이용한 것은 사자가 백수의 왕이라는 관념에서 여래(如來)의 위치에 비유한데 기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사자의 용맹한 기상을 적용시켜 소위 왕자의 기풍을 지닌 사자의 위용을 표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5. 장식적인 탑

8세기 중엽에 비롯된 또 하나의 특색은 장식적인 석탑이 나타난 일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신라양식의 전형인 방형중층의 기본형을 갖추고 있으며, 시기상으로는 대부분 9세기에 많이 건립되었다. 이러한 장식적인 석탑이 나타나는 현상은 특수양식의 석탑과 같은 연유에서 일어나게 된 것인데, 이렇듯 석탑의 표면에 조식(彫飾)이 가해져서 여러 가지 불교상의 조각이 나타나는 것을 석탑의 장엄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장식성이 농후해져서 석탑 자체가 하나의 장식으로 보여지게 된 점은 결국 탑의 가치를 더욱 저하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석탑의 장엄은 상·하층의 기단부와 초층 옥신면 등에 가장 많이 장식되는데 조식의 종류로서는 불·보살상을 비롯하여, 사천왕(四天王), 팔부신중(八部神衆), 인왕(仁王), 비천(飛天), 십이지상(十二支像) 등이 있고, 문양으로는 연꽃, 안상(眼象)이 있는 외에 구름··사자상 등이 간혹 있다. 이러한 조식은 여러 종류에서 어느 한가지가 조각되는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두 가지 이상이 조각되는 수도 있다.

 

이러한 유형의 석탑으로서 기단부와 탑신부에까지 장엄이 있는 석탑으로는 경주 원원사지 석탑(8세기 중엽 ; 사천왕·12지신), 양양 진전사지 3층석탑(9세기 후반 ; 여래·팔부신중·비천), 영양 화천동 3층석탑(9세기 ; 사천왕·팔부신중·비천), 산청 범학리 3층석탑(9세기 ; 보살·팔부신중), 구례 화엄사 서5층석탑(9세기 ; 사천왕·팔부신중·12지신), 광양 중흥산성 3층석탑(9세기 ; 여래·인왕+사천왕+공양상), 의성 관덕동 3층석탑(9세기 ; 보살·보살+사천왕·비천), 영양 현일동 3층석탑(9세기 ; 사천왕상·팔부신중·12지신) 등이 있고, 기단부에만 장엄을 취한 석탑으로는 양양 선림원지 층석탑(9세기 ; 팔부신중), 영천 신월동 3층석탑(9세기 ; 팔부신중), 운문사 3층석탑(9세기 ; 팔부신중), 횡성 중금리 동·3층석탑(9세기 ; 팔부신중), 경주 남산리 서3층석탑(9세기 ; 팔부신중), 예천 동본동 3층석탑(9세기 ; 사천왕) 등이 있으며, 탑신부에만 장엄이 있는 석탑으로는 월성 장항리 서5층석탑(8세기 중엽 ; 인왕), 경주 서악리 3층석탑(9세기 ; 인왕), 청암사 수도암 동·3층석탑(9세기 ; 여래) 등이 있다. 이와 같은 장식적인 석탑도 이후의 고려시대까지 영향을 미쳐서 예천 개심사지 5층석탑(1010; 인왕·팔부신중·12지신), 함양 승안사지 3층석탑(고려 ; 사천왕·여래+보살+비천), 군위 지보사 3층석탑(고려 ; 팔부신중·사자) 등에 계승되었다.

. 고려시대

 

1. 고려의 탑

고려시대에도 불교는 국교로서 숭상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원이 건립되었고, 이에 따라 조탑활동도 매우 활발하였는데 당시의 탑들은 대부분 신라석탑의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일부지역에서는 전형양식에서 벗어나 고구려와 백제탑의 양식을 계승하는 석탑도 많이 세워졌고, 4사자3층석탑과 같은 이형석탑과 전탑을 계승하는 석탑도 건립되고 있다. 고구려와 백제탑의 양식을 계승한 석탑이나 전대의 석탑을 모방한 석탑들은 이미 앞선 시대의 탑을 보면서 같이 언급하였으므로 여기에는 신라형식을 계승한 석탑에 대해서만 살펴본다.

 

신라의 석탑양식을 계승하였으나 부분적인 변화가 있는 고려시대 석탑의 일반적인 특징은 탑신부의 각 부재가 폭에 비하여 높아져서 전체적으로 고준(高峻)해지며, 옥신 밑에는 별석(別石)이 삽입되기도 한다. 옥개석의 처마 밑이 전각에서 심하게 반전되며, 옥개받침의 수가 줄어든다. 초층옥신 밑의 별석 또는 기단갑석상면에는 연화문이 조식되기도 한다. 아울러 이중기단과 함께 단층기단도 유행하며, 다층석탑이 많이 건립된다. 이처럼 고려의 석탑은 신라의 전형양식을 따르면서도 부분적으로 변화를 보임으로서 전체적인 조형감각이 달라지고 있다.

 

즉 신라시대의 조형이 명쾌하면서도 장중하여 안정된 비례를 보여주는데 비해 고려시대의 석탑은 둔후(鈍厚)하고 고준하여 불안정감을 주고 있다. 물론 거탑(巨塔)이 건립되기는 했지만 정신과 기술 양면의 변화가 비례의 불안정, 형태의 왜소화, 그리고 조형감각의 둔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런 탑의 예로는 예천 개심사지 5층석탑과 광주 춘궁리 양탑, 정두사 5층석탑 등이 있다. 한편, 고려후기의 탑으로 경천사 10층석탑은 대리석을 이용하여 목조건물(다포식)을 충실히 그대로 모방한 목탑양식인데, 기단과 탑신 모두에 불·보살·천인·신장··사자·연꽃문 등을 화려하게 조식하였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점판암으로 만든 소규모의 청석탑(靑石塔)이 비교적 많이 건립된 점도 하나의 특징이라 하겠다.

. 조선시대

 

1. 조선의 탑

조선시대에는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과 함께, 불교에서의 예배대상도 불상이 안치된 불당중심으로 변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탑파의 건립을 거의 볼 수 없을 정도로 조탑활동이 쇠퇴하였다.

 

다만 전대의 탑을 모방한 원각사지 10층석탑(1467, 경천사탑 모방), 함양 벽송사 3층석탑(1520, 신라전형양식 계승), 양양 낙산사 층석탑(15세기 중엽),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1472), 여주 수종사 85층석탑(1493) 등이 세워졌다.

 

그리고 조선후기의 것으로 법주사 팔상전(1605)과 쌍봉사 대웅전(17세기)이 남아있는데, 목탑양식의 예를 보여주는 중요한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