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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 [奇皇后]는 역사왜곡? 아니면, 창작?

草霧 2013. 11. 6. 12:50

 

 

기황후는 역사왜곡? 아니면, 창작?

 

 

 

강대국인 황제국이나 상국(아래 '황제국'으로 통일)이 신하국에 공녀를 요구한 일차적 목적은 궁녀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공녀가 고관의 첩이 되거나 유곽에 투입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였다. 대부분의 공녀는 황제국에 가서 궁녀가 되었다. 기황후도 몽골 궁궐의 일반 궁녀로 시작했다. 그는 차를 따르는 궁녀였다. 황제국이 신하국에서 궁녀를 충원한 것은 궁녀를 모으기가 그만큼 힘들었기 때문이다. 황제국이든 신하국이든, 궁녀를 모으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다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이런 일을 신하국에 떠넘긴 것이다.

어떤 사극에서는 궁녀가 선망의 대상이었던 것처럼 묘사되지만, 실제로 궁녀는 노예 혹은 노비와 다를 바 없었다. 궁녀는 자유인 신분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중노동을 해야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여성들은 궁녀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궁녀를 청와대 여직원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일반 백성들은 궁녀 직업을 기피했지만, 궁궐에서는 어떻게든 궁녀를 확보해야 했다. 궁궐에 일손이 많이 필요한 경우에는 강제로 궁녀를 모집하기도 했다. 이때마다 민간에서는 거센 저항이 나타나곤 했다.

예컨대, 조선 효종 4년 9월 24일자(음력) 즉 1653년 11월 13일자(양력) <효종실록>에 따르면, 궁녀 지원자들이 나타나지 않자 국가에서는 관리들을 풀어 민간 여성들을 잡아갔다. 그러자 민간에서 소요 수준의 저항이 나타나고 어린 딸을 서둘러 결혼시키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흔히, 조혼 풍습은 공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생긴 풍습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조혼 풍습은 공녀뿐만 아니라 궁녀로도 끌려가지 않기 위해 생긴 풍습이었다. 백성들은 남의 나라 궁궐뿐만 아니라 자기 나라 궁궐에 끌려가는 것도 원치 않았다. 백성들이 이 정도로 궁녀를 기피했기 때문에, 조선왕조의 경우에는 공노비(관노비) 중에서 궁녀를 충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궁녀가 되면 왕을 유혹해서 왕비가 될 기회가 생기지 않느냐?'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상당수의 궁녀는 평생토록 왕의 근처에 가지도 못했고, 어쩌다 왕의 관심을 끈다 해도 왕비나 후궁에 의해 목숨을 잃기 쉬웠다. 궁녀 신분으로 왕비가 된 장희빈은 매우 이례적인 인물이었다. 구한말 궁녀들의 증언을 수록한 역사학자 김용숙의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에 따르면 고종의 눈길을 받은 궁녀가 다음 날 어디론가 사라지는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이렇게 궁녀를 뽑는 일이 힘들었기 때문에, 황제국은 자국민들의 저항을 피할 목적으로 신하국에 공녀를 요청했다. 신하국은 자기 나라 궁궐에 들일 궁녀뿐만 아니라 황제국 궁궐에 들일 궁녀까지 뽑아야 했으니,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공녀와 궁녀는 실상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궁궐 일꾼이라는 점에서 양자는 똑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공'과 '궁'이 점 하나 차이인 것과 같았다. 여담이지만, 공녀의 '공'에는 점(ㅗ)이 위쪽에 찍혀 있고, 궁녀의 '궁'에는 아래쪽에 점(ㅜ)이 찍혀 있다. 고려시대 여인들을 포함해서 역대 한민족 여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공녀는 위쪽 즉 북쪽 궁궐로 가는 여인이고 궁녀는 그냥 이쪽 궁궐로 가는 여인이었다.

 

'황제국은 남의 나라 여성들을 끌고 가서 궁녀로 충원했으니, 참 편하게 궁녀를 모집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물론 공녀 제도를 이용하는 황제국은 자국 백성들의 저항을 받지 않고 궁녀를 모을 수 있었다. 이 점에서 황제국은 편한 입장이었다. 

하지만, 경제적 측면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공녀를 확보하는 일은 궁녀를 확보하는 일보다 비용이 훨씬 더 높았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경우에 공녀는 국가 간의 무역거래를 통해서 매매됐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서에는 생구(生口) 매매에 관한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이것은 일종의 인신매매였다. 노예제나 노비제가 존재하던 시대에는 사람을 매매하는 행위가 당연한 일로 인식되었다. 생구란 표현은 <삼국사기>에도 나온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온조왕이 적진에서 사로잡은 노예들을 '생구'로 표현했다.

생구는 황제국과 신하국 사이에서 조공 물품으로 거래되었다. 조공무역은 신하국이 조공 물품을 바치면 황제국이 회사(回賜) 즉 답례 물품을 하사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신하국만 일방적으로 바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대부분의 조공무역은 이렇게 물물교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주요 조공품목 중 하나가 바로 생구 즉 공녀였다. 조선과 명나라의 무역을 예로 들면, 조선이 제공한 주요 품목은 말·은·공녀 등이었고, 명나라가 제공한 주요 품목은 비단 등이었다.

공녀가 유상으로 매매되었다는 점은, 고려 고종 18년 12월 23일(음력) 즉 1232년 1월 16일(양력)에 고려 조정에 도착한 몽골의 국서에서도 나타난다.

<고려사> '고종 세가'에 실린 이 국서에 따르면, 칭기즈칸의 셋째 아들인 몽골 황제 오고데이칸(우구데이칸)은 "사신을 통해 고려왕에게 물건을 보내니 그것을 받으면 답례 물품을 보내라"고 하면서 남녀 인질 및 금·은·구슬·말·수달피 등과 함께 공녀를 보낼 것을 요구했다. 금·은·구슬 등과 함께 사람까지도 물건으로 취급했던 것이다.

이처럼 일반적인 경우에 황제국은 공녀를 확보하기 위해 비용을 투입해야 했다. 모든 경우에 다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황제국은 신하국에 비용을 지급하고 공녀를 데려갔다. 그래서 자국 백성을 궁에 들일 때보다 신하국 백성을 궁에 들일 때가 훨씬 더 비용이 많이 들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드라마 <기황후> 제1회에서처럼 몽골 군인들이 공녀들에게 화살을 마구 쏘아대는 장면을 봤다면 몽골 황제는 아마 기겁했을 것이다. 비용을 지불하고 사들이는 공녀들에게 화살을 쏘아대는 것이니 말이다. 공녀와 궁녀는 점 하나 차이였지만, 공녀는 유상 거래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아주 귀중하게 다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역사 왜곡과 미화, 기황후 방영금지 청원!

 

 

 

대제국을 지배한 여자 기황후

 

기황후(중국어: 奇皇后, 1315년경 - 1369년)

 

 

원나라 원 혜종황후였다. 몽골명은 솔롱고 올제이 후투그(ᠥᠯᠽᠢᠶᠺᠣᠲᠣᠭ, 한자肅良合 完者 忽都 숙량합 완자 홀도)이며, 존호는 보현숙성황후(普顯淑聖皇后)이다. 고려 출신의 여자로, 고려후기의 무신 기홍영의 증손녀이자 고려 고종의 사위인 기온의 종손녀였다. 원나라에 바쳐지는 공녀 중의 한사람이었으며 고려 출신 환관 고용보(高龍普)의 주선으로 황궁의 궁녀가 되었다가 원 혜종의 총애를 얻어 귀빈으로 책봉되고, 훗날 혜종의 뒤를 이어 황제로 등극하는 아들 아유르시리다르를 낳았다. 정적관계였던 제2황후 탕기시리가 역모죄로 사사되자 외국인은 정궁으로 삼을 수 없다는 재상 메르키트 바얀의 반대를 견뎌내고 제2황후가 되었고, 1365년에 제1황후인 곤기라트 출신의 바얀 후투그 사망하자 제1황후로 등극하였다. 이후 아들 아유르시리다르를 황태자로 옹립하였고, 휘정원자정원(資政院)으로 개편해 심복인 고용보를 초대 자정원사(資政院使)에 임명한 뒤 고려인 출신 환관과 고려인 출신 관리 및 일부 몽골관료들을 포진시켜 자신의 친위대로 삼았다.

 

친정인 기씨 일족을 통해 고려 왕실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얼마못가 사라졌다. 공민왕에 의해 친정오빠 기철 등이 살해되자 원 혜종을 사주하여 충선왕의 서자 덕흥군을 왕으로 앉히고 고려를 침공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태자인 아유르시리다르의 비(妃) 역시 고려여인으로 정하여 권씨(權氏)를 태자비로 삼았다.

 

당시 원나라는 징기스칸의 확장정책으로 징기스칸의 병력이 닫는 곳은 모두 징기스칸의 휘하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고려는 30년간의 항쟁으로 직접적인 합병은 면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기황후는 대원제국의 제2황후를 거쳐 황태자를 낳고 제1황후가 된 것이다. 기황후가 황후가 되기전 원나라는 고려의 조정을 마음대로 조정하였다. 원나라의 승인이 없이는 고려 왕도 되지못한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30년간의 항쟁으로 합병은 면했지만 고려는 원나라의 속국이었다.


그러한 관계로 고려 조정에서는 고려 스스로 원나라의 1개성으로 들어가자는 논의가 활발했던 때가 기황후가 황후가 되기전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기황후가 원의 황후가 되면서 고려조정에서 스스로 원의 속국. 1개의 성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논의는 중단된 것이다. 그것은 기황후가 황후가 되면서 고려침략의 두려움이 해소 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는 기황후가 고려의 자주권을 보장해준 역할이 된 것이었다.


황후가 된후, 고려 조정에서는 기황후의 오빠 기철을 덕성부원군에 봉하게 된다. 이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고려조정은 어떻게든 대원제국의 침략을 받지않고 안전하게 살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대원제국 황후인 기황후의 오빠 기철을 등에 업고 고려왕실의 안정을 꾀하고자 먼저 작위를 내린것이 덕성부원군 이라는 벼슬이었다. 또 원나라는 기철에게 정동행성의 수장으로 임명하게 된다. 이렇게 권력이 기철에게 집중되면서 권겸을 비롯한 많은 당시의 권세가들이 기철의 수중에 들어간다. 이것은 고려스스로 왕권을 약화시키는 단초를 제공한 것이 되고만다. 이러한 것은 당시의 고려왕실이 원의 조정을 받는 허수아비 왕실인 상황에서 어쩔수없는 선택이었다. 이로 인해, 기철을 비롯한 친원파. 당시 주류층의 권세가들은 황후의 세에 힘입어 권세를 누리게된다.

 

 

 

 

이에 고려 공민왕1356년 원나라가 약화되는 틈을 타서 기철을 비롯한 친원파 권겸 등을 멸하였다. 1364년 이로인해 기황후는 공민왕을 폐위하고 타시 테무르(충선왕(공민왕의 조부)의 서자(庶子) 셋째 아들 덕흥군.공민왕의 삼춘)를 고려의 왕으로 세우려 고려로 1만의 군사를 보냈지만, 압록강을 건너던 중 고려군에게 폐퇴하게 된다. 공민왕은 10년간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었던 인물이다. 원이 고려왕을 내정할때의 기준에 들지 않은것을 기철이 천거하여 고려왕이 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기황후는 공민왕에 의해 참살된것에 더욱 격분한 나머지 1만의 군사를 고려인 최윤장수 에게 맏겨 보내서 공민왕을 폐위시키기 위한 출정이었던 것이다.

 

기황후는 당시 집안의 멸족 소식을 접하고 극도로 분노하였다.[2] 그녀는 원 혜종을 설득하여 공민왕에 대한 복수를 요구하였고, 1364년(공민왕 13년) 원나라 황제는 기황후의 뜻에 따라 '공민왕을 폐하고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왕으로 책봉한다'고 했다.[2] 그러나 자신의 명이 먹혀들지 않자 기황후는 덕흥군에게 원나라 군사 1만명을 주어 고려 정벌을 명한다. 이들은 평안도 지방까지 진출하였으나 최영·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대에 패한다.

 

1365년, 제1 황후인 곤기라트 출신의 바얀 후투그가 죽은 후에 기황후는 제1황후가 되었다. 이는 이민족 출신을 황후로 책봉하지 않는 원나라의 전례를 깨뜨리고 정후가 된 것이었다.

 

기황후는 고려국 금강산 장안사에 거액의 내탕금(內帑金: 판공비)을 내어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키고 많은 불상을 봉안하였다.[5] 그녀는 특별히 며느리도 고려 출신 여성으로 정하여 권씨(權氏)를 황태자비로 삼게 했다.

 

1368년, 주원장의 25만 명나라 대군이 대도를 점령하자 북원으로 전락한 원나라는 응창부(應昌府)로 천도를 하였다. 기황후도 이때 응창으로 이동하였다. 그 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응창은 내몽골 자치구에 있는 타알 호수(Lake Taal)에 위치했었다.

 

1368년 응창에서 포로가 되고 1369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1370년, 남편인 혜종이 죽고 그의 아들 아유르시리다르가 황좌를 계승한다. 그러나 아들 아유르시리다르는 후사를 남기지 못했고 그녀가 친히 간택함 며느리 권황후는 딸만 1명 낳았다. 이로써 그녀의 후손은 끊어졌다.

 

기황후 묘 또는 기황후 능

 

중국 원나라의 마지막 황후인 기황후의 능이다.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상1리 산145에 소재해 있다. 그러나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아 주변지역은 경작지와 민묘가 들어서는 등 훼손되어 있는 상태이다. 주변에는 마정승 묘와 이정승 묘로 알려진 고분 2기가 존재하고 있으나 역시 비지정문화재로 있다.

 

재궁동의 유래

기황후의 능과 재실이 있던 지역은 재실, 재궁에서 이름이 유래하여 재궁동(齋宮洞)이라 불렸다. 이는 발음이 순화되어 쟁골이라 불리기도 했고, 아랫쟁골, 윗쟁골 등으로 마을이 나뉘기도 했다.

 

기황후능 동쪽에는 마정승 묘(馬政丞 墓)와 이정승 묘(李政丞 墓)로 알려진 고분 2기가 존재한다. 기황후의 측근이나 가까운 사람들의 묘역으로 추정되나 매장자의 정확한 신분은 알 수 없고 이 고분들 역시 방치되어 있다.

 

마정승묘는 기황후 묘소의 동쪽, 아랫쟁골과 쟁골 사이, 북쪽으로 뻗어 나온 산부리에 있다. 이는 단지 전설상에 마정승 묘라 전해 올 뿐, 피장인의 이름과 관직 등 자세한 내용이 전해오지 않고 있다. 봉분은 허물어져 형태를 알아볼 수 없고, 마을 주민들의 제보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 때까지 봉분 아래 도로변에 있었던 비석 또한 논 속에 매몰되어 있다. 이정승 묘(李政丞 墓)는 마정승 묘의 동쪽, 산부리 끝에 있는 고분으로, 상석·문관석 등의 석물이 남아 있으나, 매장된 인물이 정확히 누군가는 알수 없다.

 

한국의 경기도 연천군 상리(上里)에는 기황후의 묘로 알려진 고분(古墳)이 있다.그녀의 시신은 조선으로 운구되어 경기도 연천현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시신이 언제 조선에 운구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금강산 장안사에는 그녀의 위패가 봉안되어 넋을 기리기도 했다.

 

경기도 연천군에 안장된 뒤 그녀를 제향하는 큰 재실이 있어 그 주변은 재궁동(齋宮洞) 또는 쟁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현재 경기도 연천군에는 연천읍 상1리에 기황후 묘가 존재하고 있으나, 한국전쟁으로 비석과 석물을 잃어버렸고 비지정문화재라 하여 보존처리되지 않고 있다.

 

'원사(元史) 후비열전'에 의하면 "혜종을 모시면서 비(妃:기씨)의 천성이 총명해 갈수록 총애를 받았다.[3]"고 한다.


기황후가 대원제국의 황후가 되면서 80년간 자행 되었던 공녀징발을 막았고, 친정나라 고려의 국력을 키우기위해 제주도에 대규모 초지를 조성하도록 재정지원을 하고, 군마를 키우게도 하였다. 제주도의 초지와 군마는 기황후가 친정 나라에 보낸 선물이었다.


또, 황후가 되면서 고려스스로. 고려 조정내에서 일었던 원나라 1개의 성으로 입성하려는 것을 막았던 것이다. 시집간 딸의 입장에서는 친정나라가 부강하고 힘이있어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기황후는 뼈저리게 느낀것 같았다. 이러한것 때문에 당시 고려는 자주권을 지킬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때 기황후가 왕비.황후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면, 고려는 고려조정의 뜻과 같이 원나라 1개의 성으로 스스로 편입 되었을 것이고, 이어지는 명나라에 의해 중국의 1개성으로 자리매김 할 뻔 한것을, 마침 기황후의 황후등극으로 면하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는 기철을 비롯한 친원 세력의 권세가 다소 높았다고는 하나 우리민족. 한민족으로서는 너무나 다행스런 부분이었다.

 

그가 고려의 공녀출신 첫 후비(后妃)는 아니었다. 고려출신의 여성이 중국의 궁녀가 되어 후비에 이른 이로는 세조(世祖) 쿠빌라이(忽必烈)의 총애를 받은 이씨(李氏)가 있었고 인종(仁宗)때에 영비(英妃) 달마홀도(達麻忽都)가 있었다.

 

"딸을 낳으면 비밀에 부치고 남이 알세라 걱정하는 형편이라 이웃도 그 딸을 볼 수가 없다. 딸을 숨긴 사실이 발각되면 온 마을이 피해를 입게 되며 친족을 묶어두고 취조하여 모멸감을 준다. 처녀를 선발하는 과정에서 뇌물이 오가는데, 돈 있는 자는 빠지고 돈 없는 자는 끌려간다."

 

 

 

-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 설정이 역사적 사실과 어떻게 다른가?
"우선 원나라 황제 순제부터가 그렇다. 당시 기황후의 남편인 원나라 황제 순제는 불과 서른에 불과한 나이지만, 드라마에서는 60이 넘은 노인으로 나온다. 무려 30년 이상의 나이차이가 나는 것으로 묘사된 것은 드라마라고 하더라도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기황후의 정적인 다나실리 황후의 아들로 나오는 '쿤란'은 가상 인물이 맞는가?
"다나실리 황후에게는 아들이 없다. 그런데도 '쿤란'이라는 가상적 인물을 내세워 보탑실리와의 로맨스를 억지로 만들어내고 있다. 이는 원나라 황실의 족보 자체를 왜곡하는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 가장 큰 문제는 기황후가 사실과 다르게 그려져 있다는 점인데?
"황제가 퇴폐와 환락에 빠져 정사를 뒤로 미루게 만든 것을 기황후가 지시하고 주도한 것으로 묘사한 것이 사실과 다르다. 황제가 '계급무계궁'이라는 곳을 지어 놓고 그곳에서 쾌락에 빠진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순전히 그 밑의 신하인 합마와 노적사와 같은 간신들로 인한 결과였다. 기황후는 황제의 마음을 돌려 나라를 바르게 세우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황제를 유혹한 합마와 노적사까지 처단할 정도였다. 그 계급무계궁을 폐하게 만든 것도 바로 기황후이다. 드라마의 왜곡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연대의 불일치는 둘째 치고라도, 기본적인 사실 또한 제대로 그리지 않고 있다."

- 기황후를 바라보는 드라마의 시각은 어떤가?
"기황후를 바라보는 드라마의 시각은 이러한 왜곡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다. 드라마에서 기황후는 시종일관 재물을 탐하고 권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고려를 핍박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너무나 다르다." 

▲ <신돈>에서 기황후 역할을 맡은 배우 김혜리
ⓒ iMBC

- 기황후는 어떤 인물이었나?
"드라마에서처럼 원나라 황제 순제가 쾌락과 방탕에 빠져 있었던 반면 기황후는 틈틈이 <여효경>과 <사서>를 읽었으며, 역대 황후들의 덕행에 대해 공부했다. 또한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진상품 중에서 진귀한 식품들은 먼저 태묘에 보내 제사를 올리게 한 뒤에야 비로소 먹을 정도였다.

그녀는 황제의 일을 대신하기도 했다. 당시 원나라 전체에 대기근이 일어 사망한 사람이 20만이 넘었다. 이에 기황후는 사재를 모두 털어 시체를 거두게 하여 경도 11문 밖에 묻어 장사지내주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대규모 수륙대회(水陸大會)를 열어 그들의 영혼을 위로해주기까지 했다. 이 대기근을 위해 그녀는 2만7090냥을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사용했고, 쌀 560여 가마를 풀어 허기를 면하게 했다. 불심이 깊었던 그녀는 화엄당 보수공사를 벌였을 때 1백만 냥을 시주했으며, 고려 금강산의 장안사에 엄청난 돈을 보내어 70여 칸 규모로 중건하도록 했다.

고려 여인이 원나라 황실의 주인으로 머무는 동안 그 영향은 정치적인 부분에만 그치지 않았다. 수많은 원나라의 여인들이 기황후가 입었던 고려의 저고리와 치마를 앞다투어 입게 되어 복식 쪽에 선풍적인 유행을 일으켰고, 이런 영향은 음악을 비롯해서 생활 풍속, 음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퍼져갔다.

우리나라의 전통 한과의 일종인 매작과와 비슷한 음식이 전해지고 고려병, 고려다식, 고려조청이 전해졌다. 이를 역사적으로 고려양(高麗樣)이라고 한다. 기황후는 과연 오늘날 거세게 일고 있는 한류(韓流)의 원조격인 셈이다. 이처럼 기황후는 고려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인물이며, 그녀의 존재 덕분에 고려가 간신히 유지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기황후는 충렬왕 이후 80여년간 계속되던 공녀 징발을 금지했고, 환관의 징발을 축소했다. 뿐만 아니라 원의 조정과 고려에서 공공연하게 거론된, 고려를 원에 속한 하나의 성으로 만들자는 '입성론(立省論)' 논의를 폐지하기도 했다. 그때 만약 기황후가 입성론을 막지 못하여 고려가 원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홍건적에 의해 원이 망하면서 그들은 고려까지도 원이라 하여 우리 땅에까지 명나라가 세워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그녀는 우리말을 고수하여 원나라에 있는 고려 출신의 사람에게는 항상 고려말을 잊지 않도록 했다. 그녀가 없었다면 현재 우리는 한국어 대신 중국어를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 왜 이런 왜곡 현상이 나타난다고 보나?
"기황후가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원나라와 명나라의 사관(史官)들에 의해서다. 원나라는 고려 출신의 공녀가 정후 자리에 오르고, 그 아들까지 황제에 오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기황후를 사리사욕만 채우고 권모술수에 능한 여인으로 저평가했다.

명나라 또한 원을 오랑캐족이라 칭하여 그 마지막 황제의 어머니인 기황후를 원을 망하게 한 장본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따라서 이 드라마에서 보이는 기황후에 대한 평가는 순전히 이런 중국의 사관을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인 것이다. 통탄할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고려 이후에 들어선 조선 또한 기황후를 극도로 폄하했다. 원을 밀어내고 건국한 명에게 사대를 행했던 조선은 기황후를 왜곡한 명의 사관을 그대로 이어 받고 있었다.

시대를 잘못 만나, 힘없는 나라에 태어나 원하지 않는 공녀로 차출된 기황후. 인간적으로, 그녀는 불쌍한 여자이다. 하지만 기황후는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대원제국을 발판으로 30여년간 천하를 호령한 위대한 여장부였다. 당시 천하는 원나라에 의해 지배되었고, 그 원의 황실을 손아귀에 넣은 기황후에 의해 움직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로 우리 역사에 기황후처럼 세계사 전체에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신돈>이라는 드라마는 한 인물을 제대로 평가하기는커녕 기존의 역사조차 왜곡하며 한 인물을 철저히 난도질하고 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있던 기황후에 대해 최초로 언급했다는 점은 높이 산다. 그렇다 해도 많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우리 민족의 위대한 인물인 기황후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갖게 하지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

- 그렇게 비판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원사>나 <고려사절요>와 같은 역사적 사료들을 통해서다. 작년부터 기황후란 인물을 중심으로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면서 드라마 <신돈>의 내용이 실제 역사와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 소설 <기황후>(가제)는 어떤 내용이며 어느 정도의 분량으로 언제 출간할 계획인가?
"공녀로 차출된 비운의 여인에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여 천하를 호령한 여성으로 거듭난 기황후의 삶과 역사를 그리고 있다. 당시 천하의 중심은 원나라였고, 그 원을 자신의 치마폭에 두었던 여인이었으니 자신이 곧 천하의 주인이나 다름없었다. 우리나라 인물 중에 어떤 인물도 기황후만큼 그 영향력을 펼친 인물은 없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기황후>의 책은 전 4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먼저 1, 2권이 4월 말경에 발간될 예정이다."

역사적으로 고향에서 천대받던 사람이 타향에서 성공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리 역사에서 보면 고려 출신으로 원나라 순제(順帝)의 황후가 된 기(奇)씨가 대표적인 예다. ‘원사(元史)’에는 기황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황후 기씨는 고려 사람이다. 황태자 애유식리달엽(愛猷識理達獵)을 낳았다. 원래 집안은 미천했으나 후에 귀하게 되어 3대가 모두 왕작으로 추봉됐다.” 고려의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원나라 황제의 부인이 되고 나중에는 황제의 어머니까지 됐으며, 또 그 덕분으로 친정집 삼대가 왕으로 추존됐으니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기황후는 원나라 말 30년간 원나라 황실에서 주도권을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고려 조정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더구나 몽고인이 아니면 황후가 될 수 없다는 금기까지 깨뜨리고 몽고제국의 황후가 되었으니 우리나라 역사에서 한 개인의 성공 사례로 이처럼 극적인 경우는 드물 것이다. 어떻게 고려의 가난한 처녀가 원나라 황후가 됐을까? 한 개인의 성공에는 행운이 따라줘야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각자의 노력도 중요하다. ‘고려판 신데렐라’ 기씨 처녀의 경우에도 여기서 다 설명할 수 없는 인고와 노력이 있었다. 고려 말 기자오(奇子敖)의 딸로 태어난 기씨 처녀는 당시 상국인 원나라에 바쳐진 ‘조공 물품’ 가운데 하나였다. 1333년 8월 원나라로 끌려간 뒤 고려 출신 내시의 도움으로 황제인 순제에게 차를 올리는 일을 맡는다. 그리고 자신의 타고난 미모와 지략을 활용하여 순제의 총애를 받아 제2 황후가 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만큼 질시와 견제도 많아졌다. 제1 황후한테서 온갖 모욕뿐 아니라 심지어 매질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는다.

 

 

 


기황후는 황실에서 모범적인 언행을 보였고, 자금을 모아 자신을 지지해줄 세력을 꾸준히 넓혀나갔다. 굶주리는 백성들에게는 식량을 아끼지 않고 베풀었다. 그러나 이런 선행과 지지세력 확대만으로는 자신의 입지가 확실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권력을 굳건히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황제의 뒤를 이을 아들을 낳는 것이었다. 여기서 기황후는 풍수가 목적하는 탈신공개천명(奪神工改天命-하늘이 하는 일을 빼앗아 천명을 바꾼다)을 시도한다. 황후가 되었지만 아들을 얻지 못하자 ‘북두칠성의 명맥이 비치는 삼첩칠봉(三疊七峰)의 산세를 갖춘 곳에 탑을 세우고 기도를 하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믿어 천하의 이름난 풍수들을 동원해 찾게 한다. 여기에 고려 풍수사들도 동원됐는데, 마침내 제주도 동북 해변에서 바라던 자리를 찾았다. 기황후는 사신을 보내 오층탑을 쌓게 하고 극진한 기도를 올리게 한다. 이곳이 바로 제주시 삼양동 원당봉에 있는 원당사(元堂寺-현재 불탑사) 오층석탑이다. 원당봉이란 산 이름도, 원당사라는 절 이름도 모두 원나라를 뜻한다.
 
이런 노력 덕분에 1339년 기황후는 원나라 황통을 이을 아들을 낳는다. 그 후 그녀는 원나라가 몽고 내륙으로 쫓겨갈 때까지 30년간 원나라의 실권을 장악한다. 1368년 명나라 군대가 베이징을 점령하자 기황후는 가족과 함께 몽고 내륙으로 철수한다. 그곳에서 아들이 황제로 즉위하는데 바로 소종황제(昭宗皇帝)다. 드디어 기황후는 황제의 어머니가 되었다.
 
그 후 원당사 오층석탑은 어찌됐을까? 아들을 못 낳은 수많은 고려와 조선의 여인들이 이곳에 가서 기도하고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세월의 변고 속에서 원당사는 없어졌지만 아직도 오층석탑은 그대로 남아 있어 아들을 얻기 바라는 이들의 의지처가 되고 있다. 특이하게도 오층석탑은 입지가 조선시대 이후의 터 잡기 방식과 다르다.
 
조선 이래 터 잡기가 땅의 형세와 좌향만을 중시하는 반면, 이곳 오층석탑의 위치는 하늘의 방위와 별, 즉 천문을 중시한 흔적이 뚜렷하다. 오층석탑의 좌향이 산세를 기준으로 하지 않고 북극성을 향하는 점도 그 예다. 즉 별을 보고 점을 치거나 별의 기운에 따라 인간 개개인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천문사상(숙명론-宿命論)이 이곳 터 잡기에 반영된 것이다.

 

 

 

 

 

대제국을 지배한 여자 기황후

 

 

 

 

훗날 세계 제국의 지배자로 군림한 기황후의 출발은 절망뿐이었다. 고려인 기자오(奇子敖)의 막내딸이 원나라에 바쳐지는 공녀(貢女)로 결정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비참한 인생길을 동정했다. 목은 이색이 “공녀로 선발되면 우물에 빠져 죽는 사람도 있고, 목을 매어 죽는 사람도 있다”고 말할 정도로 비참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기씨 소녀는 달랐다. 비록 자원한 공녀길은 아니지만 이왕 뽑힌 이상, 이를 새로운 인생의 계기로 삼겠다고 결심했다. 세계를 지배하는 원나라이니 만큼 더 많은 기회가 있으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원 황실에 포진한 고려 출신 환관들의 대표였던 고용보는 기씨 소녀같은 인물이 꼭 필요했다. 기씨 소녀라면 황제 순제(1320~1370)를 주무를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고 그녀를 순제의 다과를 시봉하는 궁녀로 만들었다.

‘원사(元史) 후비열전’이 “순제를 모시면서 비(妃:기씨)의 천성이 총명해 갈수록 총애를 받았다”고 기록한 것처럼 그녀는 곧 순제를 사로잡았다. 여기에는 고려에 대한 순제의 남다른 추억도 작용했다. 명종의 장자로서 황태자였던 토곤 테무르(순제)는 1330년 7월 원 황실 내부의 싸움에 패배해 인천 서쪽 대청도에 유배된 적이 있었다. 1년 5개월을 대청도에서 보낸 그는 원나라로 돌아가 2년 후에 황제에 즉위한다. 동아시아에서 동유럽에 이르는 세계제국의 후계자에서 고려의 작은 섬에 유배되었던 기억은 어려운 시절에 대한 향수와 어우러져 기씨에 대한 호감으로 작용했다.

기씨는 순제를 통해 자기 뜻을 펼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기씨는 곧 큰 시련에 부딪쳤다. 다름 아닌 황후 타나시리의 질투 때문이었다. 타나시리는 채찍으로 기씨를 매질할 정도로 질투가 심했으나, 기씨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순제를 내세워 타나시리와 싸웠다. 타나시리의 친정에 불만을 갖고 있던 순제는 기씨의 의도대로 1335년 승상 빠앤과 손잡고 타나시리의 친정을 황제역모사건에 연루시켜 제거했다. 그리고 타나시리에게 사약을 내렸다.

타나시리를 제거하는데 성공한 기씨는 순제를 대주주로 한 원제국의 CEO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 순제도 그녀가 황후가 되는 것을 지지했으나 원 제국의 또 다른 대주주였던 빠앤이 적극 반대했다. 관직 이름만 246자에 달했던 빠앤은 사실상 순제를 능가하는 실력자였다. 고려의 공녀 출신이 황후가 되겠다는 구상은 원나라의 지배구조상 무리였다. 몽골족은 태조 징기스칸 이래 옹기라트 가문에서 황후를 맞이하는 전통이 있었다. 이에 따라 순제 5년(1337) 황실 전통에 따라 옹기라트 가문의 빠앤후두가 황후가 되었으나 기씨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빠앤까지 축출하기로 결심했다. 기씨는 1339년 순제의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낳아 입지가 더욱 확고해졌다. 기씨의 조종을 받은 순제는 스승 샤라빤과 손잡고 빠앤을 축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녀는 드디어 세계를 지배하는 원제국의 제2황후가 되었다. 기씨의 성공에는 고려 출신들을 주축으로 철저하게 현지화 전략을 펼친 것이 주효했다. ‘원사(元史)’는 그녀가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먼저 징기스칸을 모신 태묘(太廟)에 바친 후에야 자신이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현지화 전략으로 명분을 축적하면서 원의 황실을 장악했던 것이다.

 

 


제1황후가 있었지만 자기 능력으로 황후가 된 기씨의 위세는 제1황후를 능가했다. 그녀는 흥성궁(興聖宮:현 베이징 중남해 자리)에 거주하면서 황후부속기관인 휘정원을 자정원(資政院)으로 개편해 심복인 고용보를 초대 자정원사(資政院使)로 삼았다. 자정원은 기황후를 추종하는 고려 출신 환관들은 물론 몽골 출신 고위관리들도 가담해 ‘자정원당’이라는 강력한 정치세력을 형성했다. 기황후는 1353년 14세의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황태자로 책봉하는데 성공, 안정적인 경영기반을 구축했다. 또한 그녀는 고려 출신 환관 박불화를 군사 통솔의 최고책임자인 추밀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만들어 군사권까지 장악했다.

기씨는 이렇게 장악한 권력을 누구를 위해 사용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공녀였던 그녀는 힘없는 백성들의 고초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원사 후비열전’은 1358년 북경에 큰 기근이 들자 기황후가 관청에 명해 죽을 쑤어주고, 자정원에서는 금은 포백·곡식 등을 내어 십여 만 명에 달하는 아사자의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규모 아사자가 발생하는 것은 원제국의 위기였다.

기씨는 이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원 황실의 근본적인 체질개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원사’는 순제가 “정사에 태만했다”고 기록한다. 기황후는 이런 무능한 대주주를 젊고 유능한 인물로 교체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기황후는 순제를 양위시키고 황태자를 즉위시켜 위기를 돌파하려 했다. 칼리 피오리나 HP회장이 “디지털 경제시대에 경쟁력을 갖추려면 기업의 과감한 체질개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며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적극적 경영마인드를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 논리였다. 피오리나의 남편 프랭크는 회사를 그만두고 피오리나가 CEO가 될 수 있게 도왔지만 순제는 달랐다. 기황후의 지시를 받은 자정원사 박불화(朴不花)가 양위를 추진하자 순제는 거칠게 반발했다. 순제는 무능·태만해도 최고경영자 자리를 내놓을 생각은 없었다. 그는 대신 황태자에게 중서령추밀사(中書令樞密使)의 직책과 함께 군사권을 주는 것으로 타협했다.

이것이 기황후의 실수였다. 당시 과감한 구조조정은 원나라의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이런 위기의 시기에 순제라는 무능한 최고경영자를 둔 원나라는 급속히 약화됐다. 1366년 원제국은 주원장에게 대도 연경을 빼앗기고 북쪽 몽고초원으로 쫓겨가야 했다. 공녀 출신으로 황후까지 된 기씨 소녀의 ‘몽골리안 드림(Mongolian dream)’도 몽골 초원에 묻혀져 잊혀졌다.

기황후의 친인척

기황후가 우리 민족의 뇌리에 부정적으로 각인된 이유는 오빠 기철(奇轍) 등 친인척 관리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기철은 「고려사」반역조에 올라있을 정도로 평판이 나빴다.

기철은 동생 덕에 원나라로부터 정동행성 참지정사에 임명되고 고려로부터도 덕성부원군에 임명되면서 고려 임금을 우습게 알았다. 공민왕 2년(1353) 기황후의 모친 이씨를 위한 연회에서 공민왕이 조카인 태자에게 무릎꿇고 잔을 올리고 태자가 왕에 앞서 이씨에게 잔을 권하는 것을 본 기철은 기고만장했다. 그는 공민왕과 말을 나란히 하며 걸어가려다가 호위군사들에게 제지당하기도 하고, 공민왕에게 시를 보내면서 신하라는 말을 쓰지 않기도 했다. 여기에 조카 기삼만 등 친족들이 백성들의 전토를 함부로 빼앗는 전횡을 저지르면서 원성의 대상이 되었다.

그 결과 기철은 1356년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로 공민왕에게 주살 당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기황후는 태자에게 “이만큼 장성했는데 어찌 어미의 원수를 갚아주지 않느냐”고 원망했다. 1364년 기황후는 공민왕을 폐한 후 충선왕의 3자 덕흥군(德興君)을 왕에 책봉하고 최유에게 1만 여 군사를 주어 압록강을 건너게 했다. 하지만 최영과 이성계의 군사에게 전멸 당하면서 친정복권계획은 무위로 끝났다. 

 

 

 

 

 

 

기사 관련 사진
 행주기씨유허비 행주 기씨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 가운데 하나. 요즘 TV에서 드라마로 방영되면서 역사왜곡 논란을 빚고 있는 기황후(奇皇后)가 바로 행주 기씨다. 기씨는 행주기씨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