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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神靈)스러운 빛이 가득 서린 땅, 영광(靈光)

草霧 2013. 11. 5. 15:46

 

 

 

 

신령(神靈)스러운 빛이 가득 서린 땅, 영광(靈光)

 

 

 

불갑사 내산서원 신천리 삼층석탑

원불교 영산성지 법성포 백제불교 최초도래지 -

 

 

전라남도의 북서부 끝 해안에 위치한 영광은 북쪽으로 전라북도 고창군과 맞붙어 있다. 지금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영광굴비뿐이지만, 이곳은 예전부터 옥당골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지방 수령을 지내려면 남으로는 전라도 영광이요, 북으로는 황해도 안악이라는 말이 있었을 만큼 각종 물산이 풍부하고, 우리나라 서남해안을 연결하는 뱃길의 중요한 거점으로서 번성하던 고장이다.

 

고려 성종 11(992) 정부에서 남쪽 지방에 열두 군데의 조창을 설치할 때 지금의 영광 법성포에는 부용창이 두어졌다. 부용창은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나주의 영산창(영산포)과 함께 전라도의 2대 조창으로서 가장 번성한 포구이자 문물의 집산지가 되었다.

 

그후 조선 중종9(1514)에 영산창이 패쇄된 후에는 전라남도 전 지역의 세미를 관할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조창이 되었다. 더불어 이 조잧을 방비하기 위해 수군 만호가 배치되었고 숙종 34(1708)에는 법성진으로 승격, 수군첨절제사가 주둔하게 됨에 따라 바다의 자원과 세미를 받아들이는 곳이자 수군기지로서, 또 전라도 최대의 포구로서 번영을 누렸다.

    

 

 

 

1970년대 이래 서해안 조기잡이는 쇠퇴의 길을 걷고 있고 법성포는 토사가 쌓여 항구로서의 구실을 다해가고 있다. 모든 물산을 뱃길로 수송해야 했던 옛적에 칠산어장에 어부들의 노래가 가득하던 한 시기 전에, '서울 저자와 같이 떠드는 소리가 가득했던 영광의 榮光은 이제 빛을 잃어가고 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더 큰 구실을 했던 고장이지만, 조기 파시나 조창·조운선 운영 등 주로 유동인구에 의해 번영했던 까닭인지 문화유적이나 유물은 많지 않은 편이다. 오늘날 이곳에서 찾아볼 만한 곳으로는 조선의 대쪽 선비 수은 강항을 기리는 내산서원과 불교의 남방해로 유입 설화가 간직된 불갑사를 꼽을 수 있겠다.

 

 

상사화 붉은 파도 끝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찰

 

    

영광 불갑사 (佛甲寺)

 

 

 

 

백제 침류왕때 인도승 마라난타에 의해 창건된 백제불교 초전지로써 역사적 의의가 큰 사찰

불갑사(佛甲寺)의 갑자(甲字)는 첫째라는 뜻을 가집니다. 예로부터 한자문화권(漢字文化圈)에 속한 우리나라에서는 으뜸이라는 뜻을 갑자(甲字)를 표기해 왔습니다. 그러한 의미로 본다면 불갑(佛甲)은 부처의 으뜸입니다. 다시 새기면 부처는 불사(佛寺)를 의미하며 으뜸이란 최초라는 뜻과도 통하게 됩니다. 정리해 보면 이는 최초로 마련된 절이라는 이름이 됩니다.

 

이와 같은 이름을 같게 된 연유는 백제(百濟)땅에 최초로 불교를 전한 사람은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이며 동진(東晋)에서 서기 384(침류왕(枕流王) 원년(元年))에 도래하였는데 불가(佛家)에서는 법성포(法聖浦) 도래지(渡來地) 로 정착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동진(東晋)에서 백제 땅에 불법(佛法)을 전하고저 건너와서 첫발을 내디딘 곳이 법성포라는 것입니다.

 

지명을 보더라도 예전에 법성포를 아무포(阿無浦)라 불렀다고 하는데 이 아무(阿無)라는 염불(念佛)의 의미는 귀명무량수불(歸命無量壽佛) 귀명무량광불(歸命無量光佛)이니 즉 아미타불(阿彌陀佛)에 돌아가 구원을 바란다는 말입니다. 그 후에 부용포(芙蓉浦)라 하여 부용(芙蓉)이란 연화(蓮花)의 별칭으로서 연꽃은 본래 불교(佛敎)에서 신성(神聖)과 순결(純潔)의 표상(表象)인 것이다. 이렇듯 불연(佛緣) 깊은 지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남 영광군 불갑산(516m)기슭에 자리 잡은 불갑사는 백제 침류왕 원년(384)에 인도승 마라난타가 백제에 불교를 전래하면서 제일 처음 지은 절이라 하여 불갑사(부처, 처음)라 하였다.

 

돌계단을 올라 처음 마주하게 되는 천왕문 안에 있는 사천왕상은 신라 진흥왕 때 연기조사가 목각하였는데, 고종 1년 설두선사가 중수하면서 폐사된 전북 흥덕 연기사에서 옮겨 왔다고 전해진다.

 

보물 제830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정면 3, 측면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정면과 측면의 가운데 문의 문살은 모두 연화와 국화 문양으로 만들었고 좌우 칸에는 소슬 빗살무늬로 처리하여 화사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경내에는 만세루, 명부전, 일광당, 그리고 요사채가 있고, 절 뒤에는 천연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된 참식나무 군락이 있다. 참식나무는 녹나무과에 속하는 상록 활엽수로 10 월에서 11월에 암꽃과 수꽃이 각각 다른 그루에서 피며, 다음해 10월쯤에 열매가 붉게 익어 꽃과 열매를 함께 볼 수 있다.

 

1. 해불암(海佛庵)

해불암은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 1번지에 위치하며 불갑사에 소속된 산내암자로서 정확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그 경치가 뛰어나며 옛부터 호남지역의 참선 수행 도량으로서 이름난 4곳의 성지 가운데 하나로 꼽혀왔다. 백제말엽 ~ 고려초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말 각진국사가 불갑사에 주석 하시면서 불갑산내에 31암자가 형성 되었는데 해불암도 이 가운데 하나이며 불갑사 5대암자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해불암은 역대로 고승들이 많이 주석하였으며, 정유재란때 전소 되었으나, 그 후 법릉선사의 중창과 연화 인욱 대선사의 중창으로 가람의 면모를 되찾았다. 이 사실은 백암 성총 스님의 모악산 해불암기(한국불교전서 제8476)에 자세히 실려있다. 그 후 1741년경의 채은선사의 중수를 거쳐 1870년 설두대사의 중수와 자운천우선사의 중수를 거쳐 가람의 빛을 이어내려 왔으나 6.25동란시 전소 되어 버리고 해불암에 모셔져 있던 아미타여래삼존불좌상과 지장 시왕도, 칠성탱화, 신중탱화 등이 당시 불갑사 포교당인 영광읍 원각사로 옮겨 모셔져서 현재까지 봉안되어 있다.

 

해불암에는 설두대사의 중수시에 굉장히 늙은 차나무가 고사되어 있었는데 설두대사의 중수로 불갑사가 다시 흥성하게 되자 차나무에 새 잎이 돋았다고 한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불갑사가 흥성하면 차나무에 새 잎이 돋고 불갑사가 쇠폐하면 차나무가 다시 고사 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누군가에 의해 베어져 없어져 버려서 아쉬운 마음 금할길 없다.

 

해불암에서는 연화 인욱 대선사와 그 제자인 구련 선하, 구화 처열, 구용 도인 등이 머물면서 수행하였고, 조선조 후기와 구한말 시대에는 설두대사의 주석이후 금화 유성, 학명 계종 스님등이 선풍을 드날렸으니 그 도향이 호남지역을 가득 채웠었다. 현재 대웅전 1, 요사 2동의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2. 전일암( 餞日庵)

전일암은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 16번지에 위치하며, 불갑사에 소속된 산내암자로서 그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말 각진국사의 주석당시 31산내암자중 하나였으며, 불갑산내 5대암자에 속한다. 전일암은 주로 노승들의 무위 안락 정진처였으며, 불갑사 전체가 정유재란때 소실 되었으나, 유일하게 전일암만 소진을 면하여 불갑사 4중창의 터전이 되었다. 이 곳은 강항 수은 선생이 머물며 수도하여 개안의 경지를 얻은 곳이기도 하다.

 

전일암에 관한 역사적 기록으로서 백암 성총 스님의 전일암화공불기유증문(한국불교전서 제832, 480)이 있으며, 불갑사에 필사본으로 내려오는 모악산 불갑사기가 있고, 1822년의 불갑사 팔상전 상량문에 보면 10여대중이 상주 수행하는 꽤 규모있는 암자였던것을 알 수 있다. 6.25동란시 전소 되었었고, 그 후 자그마한 모암으로 지어졌다가 1970년대 초에 정면5칸 측면2칸의 목조 한와가로서 지어져 암자격을 갖추었으나, 1985년 한 스님의 실화로 소실되어 현재 초라한 흑집으로 자취나마 없어지지 않고, 간간히 찾는 스님들에 의해 조용한 정진처가 되고 있다.

 

3. 불영대(佛影臺)

불영대는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 3번지에 위치하며 불갑사에 소속된 산내암자로서 고려말 각진국사 주석당시 불갑사 31암자 가운데 하나였으며, 불갑산내 5대암자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정유재란때 전소되고 법릉선사의 4중창시 복원한 11암자 가운데 하나다(모악산 불갑사기). 불영대는 10여명 이상이 상주 수행하는 도량이었으며, 이 사실은 1822년 불갑사 팔상전 3중창 상량문에 보인다. 1904년에는 이 곳에서 불갑사 사천왕문에 봉안한 사천왕 탱화가 금화 유성, 우담 선주, 관하 종인 스님에 의하여 조성 되었다.

 

불영대는 6.25동란시 소실 되었으나 1955년경에 현재의 정면3칸 측면2칸의 건물로 복원되어 졌다. 현재 불영대에 놓여져 있는 주춧돌로 보아서 불타기 이전 불영대는 정면5칸 측면2칸 규모의 건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4. 수도암(修道庵)

수도암은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 435번지에 위치하며 불갑사에 소속된 산내암자로서 고려말 각진국사의 주석당시 불갑사 31암자의 하나로서 불갑산내 5대암자 가운데 하나이다. 정유재란때 전소되고 법릉선사의 4중창당시 복원한 11암자 가운데 하나였으며, 1822년 불갑사 팔상전 상량문에 보면 7명의 대중이 상주 수행하던 도량이었다. 그러나 6.25동란으로 다시 소실되었고 그 후 현재의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인법당으로 지어졌다. 현재는 그 위에 산신각 한동이 더 세워져 있다. 이 터는 31암자 가운데 하나이었던 곳으로 보인다.

 

5. 무각선원

 

 

 

 

마라난타존자(摩羅難陀尊者)

백제에 불교를 처음으로 전한 사람은 384년에 동진으로부터 건너온 마라난타(摩羅難陀)대사이다. 그는 중국의 승려가 아닌 인도의 승려로서 중국을 거쳐 백제로 왔으며. 그가 올 당시 동진의 효무제(孝武帝)는 궁 안에 절을 지을 정도로 불교를 깊이 믿고 받들던 군주였다. '해동고승전'에 백제의 왕이 교외에까지 나와서 마라난타대사를 맞아들인 것을 보면 그가 동진 과의 공식적인 문화교류 사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불교가 그 당시 고구려가 수입한 도교(道敎)와 습합된 청담격의(淸淡格義) 중국식 불교가 아니라 인도불교가 직수입된 것이 특징인 것은 마라난타대사가 인도승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백제왕이 친히 나가 맞을 정도의 비중 있는 인물이었음에도 중국측 사서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어 그가 중국에 장 기간 채류하면서 활동한 인물이 아니라 그 곳을 경유해 곧바로 백제로 왔음을 알 수 있으며 그가 전한 불교가 순수한 인도 불교 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일본의 현존하는 사찰인 선광사(善光寺)의 창사 연기설화에는 "생신인미타여래께서 천축(天竺)에 화도를 마치고 백제국 으로 날아와서 왕궁의 내전 위에 매우 밝은 빛을 발하여 대궐 안을 환히 비추었다"고 하여 여래 광명이 인도에서 직접 백제의 궁중으로 비천해 온 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해동고승전'에 마라난타는 인도 출신의 승려이다. 그는 신통력을 가진자로서 그의 수행 정도는 가히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스님은 불교를 전파하는데 뜻을 두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교화하였으므로 결코 한곳에 머무르는 일이 없었다. 옛 기록을 살펴보면 그는 원래 인도의 간다라에서 중국으로 들어와 사람들에게 불교의 가르침을 전했으며 향의 연기를 증거로 하여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그는 수많은 어려운 일들을 겪었지만 인연이 닿은 곳이면 그 곳이 아무리 먼 곳이라도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한다.

 

 

 

불갑사(佛甲寺)는 호남(湖南)의 명찰(名刹)로 유서(由緖)깊은 고찰(古刹)이다. 삼국시대 백제에 불교를 처음 전래한 인도스님 마라난타존자(摩羅難陀尊者)가 남중국 동진(南中國 東晋)을 거쳐 백제 침류왕 1 년에 영광땅 법성포로 들어와 모악산에 최초로 사찰을 창건하였는데, 이 절이 제불사(諸佛寺)의 시원(始原)이요 으뜸이 된다고 하여 불갑사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옛 백제지역의 고찰(古刹)을 대부분이 백제가 멸망되면서 백제서기가 유실되어 그 창건역사를 고증할 수 없는 것처럼 완벽한 고증은 현재로서는 어렵지만, 불갑사 고적기(古蹟記)에서 불갑사의 최초 창건을 "羅濟之始 漢魏之間"이라고 하여 불갑사가 백제초기에 창건된 사찰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점과, 이 지역에 전해내려오는 구전(口傳)과 지명(地名), 사명(寺名), 그리고 마란난타존자의 행적을 살펴봄으로서 어느 정도의 확신은 가능하다.

 

마라난타존자가 최초 상륙했다는 법성포(法聲浦)의 백제시대 옛 지명은 아무포(阿無浦)로 불리웠으며, 고려시대 부용포(芙蓉浦), 고려말 이후 법성포로 되었다.

 

아무포는 나무아미타불의 음을 함축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지명으로 보인다. 이는 마라난타존자가 중국에서 백제에 당도할 때 아미타불상을 모시고와 처음 도착한 포구가에 모셔 놓았었다는 구전과 마라난타존자가 극락정토신앙과 염불을 중심으로 불법을 교화했었다는 점, 그리고 인도스님에 의한 백제포교의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일본쪽 설화 (살아있는 몸을 가진 아이타 여래가 천축에서 교화를 마치고 백제로 날아와 내전 위에 나타나 눈부신 빛을 내어 궁중을 다 비추니...용안이 빛을 잃고 신하들이 혼비백산하였다.

 

이때 여래가 군신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근신하지 마라. 너희 왕이 옛날 천축에서 월개 장자로 있을 적에 극락세계의 나를 청하여 공경하고 공양하였기에 지금 이 나라 임금이 되었으나 향락에 빠져 주야로 악업을 지어 3악도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너희를 제도하기 위해 이 나라에 왔느니라..." 그 뒤 큰절을 지어 여래를 받들게 되니 비구들이 별같이 절 안에 늘어서서 주야로 경전을 외고 군신이 밖에 구름처럼 모여 조석으로 그 명호를 불렀다. 온 나라 백성들이 오랜 세월 공경하며 예배하였다) 는 선광사 연기(善光寺 緣起)의 기록을 볼 때 마라난타 스님은 포구에 상륙한 후 아미타불 정토신앙을 전파했을 것이며 이로부터 아무포라고 불리다가, 불법을 꽃피웠다는 의미의 부용포, 뒤에는 더 명확하게 성인이 불법을 전래한 포구라는 의미의 법성포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고려 태조 때부터 불리우게 된 영광(靈光)이라는 지명은 우주법계와 억만생령이 본래부터 함유하고 있는 깨달음의 빛이라는 뜻이며, 불법을 들여온 은혜로운 고장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또한 아미타불을 다른 말로 "무량광불"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무량한 깨달음의 빛이라는 뜻이며, 영광이라는 말과도 의미가 통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광이라는 지명도 불교 명칭이라고 보아야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침류왕 원년(384)에 마라난타 스님이 동진에서 오자 왕이 교외로 나가 궁궐안으로 맞아들여 예경함으로써 백제불교가 시작되었다. 그 이듬해 한산에 사찰을 세우고 열명을 출가 시켰다." 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한가지 짚어보아야 할 것은 마라난타존자는 공식적인 국가적 전교사절로 온 것이 아니라면 국왕이 처음부터 마라난타존자를 영접했다고 보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오히려 마라난타존자가 법성포에 당도하여 영광의 법성포 및 불갑사 지역, 나주의 불호사 지역 등 남쪽지역에 교화의 발길을 재촉한 뒤에 당시의 수도인 한산으로 향해 온다는 이야기를 국왕이 듣고 나서 궁궐로 영접해 들여 가르침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삼국사기에서는 "마라난타존자는 여환삼매(如幻三昧)를 얻어, 불에 들어가도 타지않으며 쇠붙이나 돌로 변신할 수 있는 등 무궁무진하게 화현(化現)하였다." 라고 하였고, 해동고승전에서는 "신통한 이적으로 사물에 감통(感通)하니 그 변화를 헤아릴 수 없었다. 사방으로 돌아 다니는데 뜻을 두어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았으며, 교화의 인연이 닿는 곳이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나서서 갔다." 라고 하여 마라난타존자의 신통력과 불법전파의 열정을 나타내 보여 주고 있다. 또한, 나주 불호사의 상량문과 단청기에는 마라난타존자 창건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마라난타존자가 법성포로 상륙하여 불갑사와 불호사를 창건한 후 한산으로 올라가 불법을 전파했다고 전래 되어오는 사실을 뒷받침 해주는 간접적 고증자료 이기도하다.

 

마라난타존자의 불법전래 후 392년 백제 아신왕은 불법을 믿으라는 교령을 전국적으로 내리게 된다.

 

그 후 약 140년간 불법에 관한 기록은 나타나 있지 않고 단지 미륵 불광사 사적의 "백제 성왕 7(526)에 겸익이 인도에서 배달다삼장과 함께 범어(梵語)원전 논장(論藏(아비달마))5부 율장(律藏)을 가지고 귀국하자 왕은 나라안의 명승 28인을 소집하여 겸익법사와 함께 율장 72권을 번역하게 했다."

 

는 점과, 조선도교사(이능화)"백제에서는 고구려와 달리 도교가 발을 붙이지 못할 정도로 불교가 성행하여 승려와 사람이 매우 많았다." 고 하는 기록을 통하여 백제시대에 불교가 융성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역시 불갑사도 백제 말기까지 여전히 사원의 역할을 유지하고 수행교화의 도량으로 융성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가 멸망할 때 영광지역의 저항이 거세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불갑사도 전화를 면치 못하고 쇠폐했었으리라 짐작된다.

 

행사존자(行思尊者)

불갑사의 2창은 행사존자에 의해 700~740년경에 이루어졌다. 혹자는 노승이 법당개연시 "정원원년개조(貞元元年改造 )"라는 대서육자를 보았다는 기록을 토대로 785년으로 보는 경우가 있으나, 이 기록은 2창시 지은 법당을 정원원년에 개조했다는 것이므로 2창은 785년 이전으로 보아야 한다.

 

행사스님은 당나라로부터 건너 들어와 불갑사를 2중창하고 나서 산너머 함평 용천사를 개창하였다고 하는 기록이 조선중엽 백암성총의 용천사 숙석루계권문에 나타나있다. 이렇게보면 불갑사는 불법의 정맥을 이은 선문의 조종(祖宗) 6조혜능대사의 상수제자인 청원행사스님이 선문(禪門)을 연 곳이기 때문에 통일신라말의 구산선문(九山禪門)이 벌어지기 이전에 벌써 선문의 꽃을 피운 곳이 된다.

 

고려말 각진국사가 불갑사에 와서 주석하기전 젊은 시절에 행각하며 잠시 머물렀었을 때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스님은 다음에 마땅히 이 절에 머무실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는 각진국사 비문의 기록을 보면 그 이전부터 절이 존재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고려중기 영광에서 배출된 정각국사 지겸(1145~1229)의 존재를 통해서도 고려초 중기까지 가람이 계속 존속되어 온 것을 알 수 있다.

 

지겸(志謙)은 선사 사충(嗣忠)에게 출가하여 금산사로 올라가 구족계를 받았고, 보조지눌, 진각혜심과 교우가 깊었으며 고려 무신의 집권시 최씨무신정권을 교화시켰다. 최근에 그의 저서 종문원상집(宗門圓相集)이 발견되었다.

 

당시 이규보가 국사의 학덕에 대해서 평하기를 진인(眞人)이 나와 도()와 합하고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얻어 생령(生靈)을 도주(陶鑄)하니, 이는 바로 우리국사라고 하면서 명()을 짓기를, 달마의 마음을 전하여 영광(靈光)이 동방에 빛나는데, 후학들은 거꾸로 보니 마치 거울을 등지고서 비치기를 바라는 격이다. 밝고 밝은 국사시여, 태양처럼 걸으시니, 한번 연기(煙氣)를 띄우매 몽매함이 모두 깨우쳐졌다. 법왕이 세상에 출현하시니 조사의 달이 다시 빛나고, 깨닫는 길이 남쪽을 맡으니 배우는 자 돌아갈 곳을 알리라.... 라고 하였다.

 

이 비문(碑文)대로라면 지겸스님은 정말로 훌륭한 분으로 사료된다. 그래서 스님의 행적을 사실대로 기록하여 후세 사람들이 오히려 괴이하게 여기고 의구심을 낼까 봐 이규보는 적지 않는다고 까지 했다.

 

각진국사

고려말 1341년 각진국사가 주석하면서부터 이루어졌다. 각진국사는 송광사의 수선사 제 13 세주(世主)로 계시다가 만년에 하산소(下山所)가 왕명에 의해 불갑사로 정해지자, 평소 따르던 제자 천여명이 몰려들어와 총림(叢林)을 이루게 되었고, 동구(洞口)가 그 무리를 수용하기에 비좁았으며, 이로부터 중창불사를 시작하여 5 백여칸의 거찰(巨刹)을 이루었고 승방 칠십여원, 낭환 사백여주, 31산내암자, 누각높이 90, 법당은 수백인이 앉을 수 있는 규모가 되었다.

 

각진국사에 의해 가람이 장엄하고 수려하게 가꾸어진 후 불갑사는 불지종가(佛之宗家)라고 불리워졌으며, 호남(湖南)의 제일가경(第一佳景)이요 해동(海東)의 무쌍보계(無雙寶界)라고 칭송되었다. 이에 동()에는 토함의 일출(日出) (西)에는 연실의 낙조(落照), ()에는 불국(佛國) (西)에는 불갑(佛甲)이라는 말로써 산수의 풍광과 가람의 장려함이 대비되기도 하였다.

 

각진국사는 왕이 불갑사를 하산주석처로 내리자 문인 심백(心白), 지부(智孚) 등으로 하여금 배편으로 원나라에 가서 대장경을 구해오도록 하여 충혜왕 2, 충목왕 4, 공민왕 1년의 모두 3회에 걸쳐 제방의 고승석덕을 초빙하여 대대적인 전장법회(轉藏法會)를 개최함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전장의 공덕으로 보답하여 복국의 터를 닦았다.

 

불갑사 3창의 기록을 살펴볼 때 낭환(廊環)4백여주의 규모로 서 있었다고 되어있는데 이는 회랑(回廊)이 불국사처럼 가람둘레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리고 불갑사는 고려시대 중후기 영광은 물론이고 압해, 장성, 삼계, 육창, 해제, 모평, 함풍, 임치, 장사, 무송지역 사찰들의 본사격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사실은 삼계에 현존해 있는 천방사지 오층석탑속의 유물에서 불갑사 말사라는 기록이 나온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법릉선사(法稜禪師) 및 해릉(海稜), 채은(采隱), 청봉선사(靑峰禪師)의 중수(重修)

불갑사는 정유재란의 병화(兵禍)로 절이 전소되어 버리고 오직 전일암(餞日菴)만이 남아 황폐해지자, 선조 31(1598) 법릉선사가 불사(佛事)를 발원하여 전각(殿閣)을 중창하고자 하였는데 수은 강항(睡隱 姜沆)선생이 불갑사중수권시문(佛甲寺重修勸施文)을 지어 이 불사를 도왔다. 법릉(法稜)4중창불사 이후 법당과 제불전(諸佛殿)5개동, 방사(房舍)11, 암당(菴堂)11개소나 복원되었다. 불갑사기(寺記)에 이때의 건물명과 배치설명이 되어 있어서 그 당시의 가람 모습을 알 수가 있다.

 

불전은 대웅전, 나한전, 팔상전, 명부전, 관음전의 다섯을 비롯하여 금당이 있었고, 방사(房舍)로는 좌승당(左僧堂), 우선당, 청풍각, 백운당, 문수전, 명경당, 향적전, 향로전, 상실(上室)을 비롯하여 향로전과 상실에 부속된 별실 2, 비전(碑殿), 양진전(養眞殿) 등이 있었고, 만세루, 천왕문, 금강문이 대웅전과 일직선상에 있었다. 산내암자로는 화재를 면한 전일암을 비롯하여 해불암, 명도암, 증지암, 척선대, 남암, 내원암, 청계암, 불영대, 심적암, 수도암, 오진암 등이 복원되었다.

 

1598~1623년까지 대웅전 중창 및 전각들 중창복원, 천계 3년 계해(1623)에 주불(主佛)을 조성하고, 숭정 8년 을해(1635)에 좌우불상 조성, 숭정 7년 갑술(1634)에 번와불사를 비롯하여 순치 18(1661), 건륭 8년 계해(1743), 정묘(1747)에 개금개채가 있었고, 순치 11년 갑오(1654)에 명부전에 모신 지장보살, 시왕 등이 조성되었으며, 1694년 해릉선사에 의해서 법전중수 및 제전각들이 보수되었고, 1702년 팔상도 제작, 1706년 팔상전 주불 및 좌우보처 조성, 1710년 괘불탱화 및 괘불지주 조성, 1741년 채은선사가 다시 각 전각 및 방사에 대하여 대대적인 보수를 하였으며, 청봉당대선사에 의해서 영조 40(건륭 29, 1764) 대웅전 중수, 팔상전 중건, 영조 41(건륭 30, 1765) 향로전 중창 등의 불사를 마무리하고 1777(건륭 42)에 대웅전 후불탱화, 신중탱화, 팔상전 영산회상도, 명부전 지장탱화 등이 조성되었다.

 

만세루는 정유재란 직후 3칸으로 지어졌다가 1644년에 5, 1675년에 7칸으로 늘여지어졌고, 1741년 중수, 1802년 중수가 이루어졌다. 또한 도광 2년 임오(1822)에 팔상전 3중창, 1825년 대웅전 중수 불사가 이루어졌다. 1822년 팔상전 상량문에 보면 불갑사에는 그때까지도 비전, 양진전, 오진암, 전일암, 불영대, 증지암, 해불암, 수도암에 대중이 각 10여명 이상씩 머물러 있었으며, 전체 산내 대중이 100여명에 이르렀다. 법릉선사의 4창 이후 1840년경 까지 불갑사는 본사대중 30여명 각 산내암자 대중 70여명 이상, 도합 100여명 이상의 승려가 수행하는 도량을 꾸준히 유지해 왔으며, 고려말 조선초의 가람 규모나 아름다운 면모에는 못미치더라도 그에 유사한 가람의 풍광을 갖추고 수행납자들의 정진도량으로서, 또한 학문하는 이들의 정진처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해왔었다.

 

이 시대에 불갑사를 거쳐간 훌륭한 스님들과 학자들이 무수히 많지만 대표적으로는 연화인욱, 청봉거안, 율봉청고, 용암혜언 스님과 수은강항 선생을 들 수 있다.

 

연화(蓮華)선사는 1650년경 해불암 중수의 공덕이 매우 크며, 백암성 총스님의 모악산 해불암기에 그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연화스님은 서산대사와 양대산맥을 이루었던 부휴선수대사의 고제(高弟)인 벽암각성 스님에게 법을 인가 받았으며, 그 제자로는 구련선하와 구하처열의 두 도인이 있다.

 

청봉(靑峰)선사는 불갑사 중수에도 공덕이 클뿐만 아니라, 서산대사의 5세 법손인 호암대사의 법제자로서 설파, 연담스님과 더불어 선지(禪旨)가 깊기로 이름 높았다. 그 제자 율봉(栗峰)선사는 청봉스님에게 법을 인가 받은 후 금강산 마하연에서 나한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통도사 등지에 주석하면서 선풍을 드날렸다.

 

율봉스님의 제자 용암혜언 스님은 14세때 숙부 손에 이끌려 불갑사에 글을 읽으러 왔다가 청정한 수행 가풍을 보고 문득 출가할 결심이 생겼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7세에 산너머 용천사에서 출가한 후 다시 불갑사로와 청봉, 율봉스님 문하에서 도업을 이루고, 전국을 유람하며 수행한 후 이적을 많이 보였으며, 1812년 불갑사로 돌아와 화엄대법회를 열었고, 1819년 불갑산중에서 좌선수행을 하니 그 따르는 문도가 많았다고 한다. 조선조 말기의 경허선사가 용암스님에게 법맥을 잇고 있으니, 오늘날 이름높은 수월, 혜월, 만공, 한암스님 등이 모두 그 법손이 되는 셈이다.

 

수은강항 선생은 불갑사 중수 권시문을 써서 불갑사의 4창불사를 도왔을 뿐만 아니라, 전일암에서 수행하며 개안(開眼)의 경지를 터득했다고 한다.

 

고려말 각진국사 주석시 공민왕이 사방 삼십리의 토지를 불갑사 사원전으로 하사하여 불량답(佛糧畓)으로 하게 하였으나, 조선초 태종, 세종대의 억불기를 당하여 대부분이 몰수 축소되었다. 그러나 정유재란 병화 이후 150년간에 걸친 위와같은 법당 등의 중창불사와 함께 사원 경제력도 축적되어 갔으니, 영조 23년 당시 불갑사는 본사승려 30여명, 산내암자 승려 80여명에 사찰위전답 285필지 27811속을 소유한 대사찰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불량답 18필지 3743속을 포함한 원위전답 65필지 567속과 효종 9(1658)부터 영조 23(1747)까지 만 90년간에 걸쳐 조성해온 조성위답 220필지 22744속으로 구성되었다. 불갑사 고적기 뒷부분에는 이와같은 내용을 상세히 기록한 불갑사 전장기가 실려있는데 이것은 조선후기 사원전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러나 조선조 말기의 극심한 훼불기를 당하여 불갑사도 온전하지 못하였으니, 1845~1868년경까지 약 20여년 이상 승려들이 수행을 못하고 절이 비어있게 되었으며, 이 시기에 건물들이 많이 무너져 내려서 현재의 규모로 축소된 듯하다.

 

설두대사(雪竇大師)

설두대사(1824~1889)1870(고종7)에 각진국사의 주석도량이 폐허로 변해가는 것을 슬퍼하여 단신으로 백양사에서 불갑사로 내려와 절을 되찾고 중창불사를 시작하여 전각들을 보수하였으며, 고창(무장) 연기사터에 있던 사천왕상을 옮겨 모셔와 불갑사에 봉안하였다.

 

설두대사는 동사열전에서 조선조말기 불문(佛門)의 삼걸 가운데 한분이라고 일컬어 졌으며, 백파문하의 용상으로서,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가 사변만어를 지어 백파스님의 선문수경을 비판하자 설두대사는 선원소류를 저술하여 스승 백파스님을 옹호하고 초의와 김정희를 통박하고 나섬으로서 조선후기 선논쟁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추사 김정희선생이 설두대사에게 준 휘호가 현재 백양사에 있는데 백벽(白璧)이란 제()하에 "백파문인이 종법을 모아 드날릴 것이니 대기대용 이 두글자를 써서 설두상인에게 주노라"라고 되어있다. 추사선생의 예상처럼 설두문하에서는 근세의 뛰어난 용상들이 많이 나왔으니 다륜, 설유, 금화, 학명, 석전(박한영)스님 등이다.

 

설두대사의 비문에 보면 "이 산(모악산)이 작지만 지리산, 조계산과 더불어 정족지세를 이루며, 불갑사가 융성할 때에만 호남의 불법이 흥왕하므로 산이 작다고 경시하지말고 항상 중요시하라고 예부터 전해내려 온다" 고 적혀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백파스님 문하의 뛰어난 세 스님에게 주라고 법호 세계를 써서 주었는데 다륜, 석전, 만암이었다.

 

설두스님 하에서 다륜, 금화를 거쳐 학명스님(1867~1929)이 배출되었으니, 학명스님은 영광출신으로 188620세에 부모가 죽자 무상을 느끼고 행각에 나서서 순창 구암사에 이르러 당대의 강백 설두유형스님이 40여명의 학인들과 강경하는 모습을 보고 감화를 받아 불갑사의 금화스님에게 출가했으며 190034세에 구암사에서 강석을 열고 몇 해 동안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러나 불교의 대의가 생사 해탈에 있음을 깨닫고 학인들을 해산시킨 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참선하여 큰 깨침을 얻었다. 내소사, 월명암, 백양사 운문암 등에 선원을 설립하고 선풍을 진작하였으며, 그 시대 일본의 대선사 종연스님의 법거량에 상대하여 해동 대선사의 기개를 떨쳐 종연스님의 콧대를 납작하게 하였고, 만년에 내장사에 주석하며 반농반선을 주장하고 백장청규사상을 실천에 옮겼다.

 

금화스님은 뛰어난 선승으로서 광무 8년 갑진(1904)에 만세루를 개수(改修)하였으며, 1907년 사천왕 탱화를 조성하고, 순종융희 3년 기유(1909)에 동파스님과 함께 대웅전을 보수하였다. 그리고 영광읍에 불갑사 포교원인 원각사를 설립하고 탱화 5점 등을 조성하였다. 또한 해불암에서 좌선정진 할 때

 

한 겨울에 눈이 많이 와 식량이 떨어지자 신중단 앞에서 "빈도가 박복하여 대중이 굶어 죽게 생겼습니다." 라고 하자 그 다음날 문장에 있는 신도가 쌀 두가마를 지고와서 하는 말이 "젊은 사람 두명이 와서 스님들이 굶어 죽게 생겼다고 말해서 쌀을 지고 왔다."고 하였다 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또한 금화스님은 환송스님과 함께 의병활동도 하였다. 석전 박한영(박한영)스님은 일제시대 후진교육에 힘썼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초대종정을 지내기도 했다.

 

불갑사 대웅전 (보물 830)

백제 침류왕원년(384)인도승 마라난타존자께서 백제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법성포를 거쳐 이곳에 최초로 창건한 사찰로 정유재란시 소실된 후 다시 중건하였으며 정면 3, 측면 2칸 팔작지붕 다포계 건물로 매우 화려한 양식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문살은 삼분합 소슬 빗살문으로 연꽃, 국화꽃, 보리수 나무 무늬를 섬세하게 조각하여 우리 조상들의 예술성이 표현된 건축물이다.

 

불갑사 사천왕상 (지방문화재 159)

고창 연기사에 모셔져 있던 것으로서, 연기사가 폐사된 후 1870(고종7)설두대사에 의해 불갑사로 옮겨졌으며 조선중기에 조성되었다고 전해 내려온다. 목조로서는 국내에서 제일 큰 거상으로 균형미가 뛰어나고 섬세하며, 화려한 조각솜씨를 보여준다.

 

참식나무 (천연기념물 112)

잎 뒤에 하얀 솜털이 많아서 백담호(白淡毫)라고도 한다.

인도공주가 인도에 유학왔던 신라 경운스님에게 내세의 인연을 기약하는 정표로 전해주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만세루 (문화재 166)

1644년에 중건되었으며 정면5, 측면4칸의 중층형 문루건물로서, 법회 장소 및 스님들의 여름철 강학(講學)공간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이 건물은 주심포와 익공식의 혼합된 양식을 보여주며 가구에 기교를 부리지 않은 웅건한 미를 간직한 조선시대 건축물이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06호 영광 불갑사 대웅전 삼세불회도(靈光 佛甲寺 大雄殿 三世佛會圖)(가로 329, 세로 298)18세기 중엽경의 작품으로 비단에 채색을 하여 그린 불화로 석가아미타약사의 삼부처를 한 폭에 그린 그림, 307호 영광 불갑사 팔상전 영산회상도(靈光 佛甲寺 八相殿 靈山會上圖)(가로 210, 세로 164) 석가모니가 영축산에서 행한 설법광경을 도설한 것이다. 화기의 기록으로 제작자와 제작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작품으로 1777년에 비현 등 15인의 불화승에 의해 제작, 308호 영광 불갑사 지장시왕도(靈光 佛甲寺地藏十王圖)(가로 225, 세로 230)는 지장을 본존으로 하여 도명존자, 무독귀왕, 시왕, 범천, 제석천, 사자, 판관, 사천왕 등을 배열한 형식을 지니고 있다. 화기의 기록으로 1777년 영산회상도와 함께 제작되었다.

 

주변에 해불암, 수도암, 내산서원, 불갑 저수지주변 공원 등이 있으며 약 16km거리 해안에는 원불교 성지, 돔배 섬 등이 있다. 매년 9월이면 불갑사로 가는 길목에 전국 최대 군락을 이룬다는 상사화(꽃무릇)가 만개한다.

 

 

일본 성리학의 아버지

 

영광 내산서원 (內山書院)

    

 

 

 

조선 중기, 지방기념물제28

조선 중기 문신인 강항(15671618)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강항은 공조좌랑과 형조좌랑에 있던 중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활동하다가 왜적의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압송되었다. 일본에 있으면서 그 나라의 역사, 지리 등을 알아내어 고국으로 보내기도 하면서 일본에는 성리학을 전하였다. 선조 33(1600) 귀국한 후 벼슬을 사양하고 독서와 후진양성에만 전념하였다.

 

이 서원은 인조 13(1635)에 나라에서 용계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고 숙종 28(1702)에 고쳐 세웠다. 일제시대 때에도 고쳐지었는데 그 뒤로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쪽에 교육 공간을 마련하였고 뒤쪽에 제사 공간을 마련한 전학후묘의 배치이다.

 

교육 공간인 강당은 중앙에 마루를 두고 양 옆으로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뒤에 있는 내삼문을 지나면 강항의 위패를 모신 작은 규모의 사당이 있다. 왼쪽 산기슭에는 강항의 묘소가 있다.

 

강항은 일본에 주자학을 전한 이조때의 학자로 자는 태초, 호는 수은으로 강희맹의 5대 손이다. 명종 22년 정묘(1567)에 영광군 불갑면 서봉리에서 출생, 선조 26(1593)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교서관 박사,성균관 전적을 거쳐 형조좌랑에 이르렀다. 성우계의 문하생으로 그의 학문적 계보는 이퇴계의 직계다. 경서와 사기에 능했으며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선조 30년 정유(1597)에 왜군이 고향에 침입하자 이충무공 의 휘하로 들어가고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다가 왜군을 만나 투신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했다. 그의 아들 용과 가족이 모두 잡혀 아들과 딸이 죽고 같이 포로가 된 다른 몇 사람과 일본으로 끌려갔다. 강항은 적국에서 포로의 몸으로 있으면서도 일본의 지도와 견문을 적어 비밀리에 인편으로 국내에 보내 그의 나라 위한 충절을 보여 주었다.

 

또 당시 왜승인 순수좌와 경안은 강항의 높은 학문에 감탄하 여 교제가 깊었으며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특히 순수좌는 후 에 유학자로 전향하여 일본유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강항은 선조 33(1600)에 일본을 떠나 조국에 돌아와 순천교수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나라에 죄가 많다하여 사양하 고 고향에서의 여생을 후진양성으로 마쳤으니 그의 고고한 인 품을 알 수 있다.

 

현 내산서원은 인조 13(1635) 나라에서 용 계사라 사액되었고 숙종 28(1702)에 동사를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사주는 정면 삼간, 측면 이간의 맞배집으로 아담하고 고졸한 규모를 지녔으며 서원은 정면 사간, 측면 삼간, 팔작지붕이다. 회삼문은 근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저서로는 수은 집이 있는데 모두 64책으로 이의 편찬은 그가 떠난지 40 년이 지난 효종 9(1658)에 제자 윤순거에 의해 이뤄졌다. 현 재 한글로 번역된 간양록은 그 저서중 일부로 본시 진 거록이라 한 것을 전한시 중랑장소무를 연유로 해서 편찬시 간양록이라 고쳤다 한다.

 

 

일본 성리학의 아버지, 조선선비 수은(睡隱) 강항(姜沆, 1567 ~ 1618)

본관은 진주. 자는 태초(太初), 호는 수은(睡隱사숙재(私淑齋). 좌찬성 희맹(希孟)5대손이며, 극검(克儉)의 아들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93(선조 26) 전주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정자·박사·전적을 거쳐, 공조·형조 좌랑을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남원에서 이광정(李光庭)의 종사관으로 군량 보급에 힘썼다. 남원이 함락당하자 고향인 영광에서 김상준(金尙寯)과 함께 의병 수백 명을 모집하여 싸웠다. 영광이 함락되자 가족을 거느리고 해로로 탈출하려다 포로가 되어 일본 오쓰 성[大津城]에 유폐되었다.

 

이곳에서 이즈시 사[出石寺]의 승려 요시히토[好仁]와 친교를 맺고 그로부터 일본의 역사·지리·관제 등을 알아내어 우리나라로 보냈다. 1598년 오사카[大阪]를 거쳐 교토[京都]의 후시미 성[伏見城)으로 이송되어, 후지와라[藤原醒窩아카마쓰[赤松廣通] 등과 교유하면서 그들에게 학문적 영향을 주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1600년 풀려나 가족들과 함께 고국에 돌아온 후 1602년 대구교수, 1608년 순천교수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죄인이라 하여 사직했다.

 

그뒤 고향에서 후학 양성에 전념하여, 윤순거(尹舜擧)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인물화와 소나무를 그리는 데도 뛰어났다. 저서에 운제록 雲堤錄·강감회요 綱鑑會要·좌씨정화 左氏精華·간양록 (看羊錄)·문선찬주 文選纂註·수은집등이 있고, 일본 내각문고(內閣文庫)강항휘초 姜沆彙抄가 소장되어 있다. 1882(고종 19) 이조판서·양관대제학이 추증되었으며, 영광 용계사(龍溪祠)에 제향되었다

 

현재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에는 그의 신위를 모신 내산서원(內山書院, 전남도 기념물 제28)이 세워져 있다. 내산서원 입구의 문은 강항의 부인 함평이씨에게 내려진 열녀문이다. 간양록을 남긴 강항, 그는 한일 양국의 우호의 상징으로 다시 부활하고 있다.

 

 

 

 

 

 

 

일본 현지 보고서, 간양록(看羊錄)

 

 

"이국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서리고 어버이 한숨 쉬는 새벽달일세. 마음은 바람 따라 고향으로 가는데 선영 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으리. 피눈물로 한 줄 한 줄 간양록을 적으니 임 그린 뜻 바다 되어 하늘에 닿을세라."

 

1980년도에 방영되었던 인기드라마의 주제곡인 '간양록(看羊錄)'은 가수 조용필이 애절하게 불러 크게 히트했던 대중가요였다. 조용필의 애절한 노래 속에서 기억되고 있는 간양록, 그 간양록이 조선 중기 영광 출신의 유학자 수은(睡隱) 강항(姜沆, 1567~1618)이 정유재란 당시 일본에 포로로 끌려가 고향땅을 그리며 쓴 일기 형식의 기록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강항은 원래 이 책을 '건거록(巾車錄)'이라 했다. '건거'란 죄인이 타는 수레를 뜻하는 말로, 포로가 된 자기는 죄인이라는 뜻에서였다. 효종 7(1656) 책이 간행될 때 제자 윤순거(尹舜擧, 1596~1668)가 강항의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한 의미에서 '간양록'으로 고쳤다. 이는 한()의 소무(蘇武)가 흉노의 포로가 되어 양을 치는 수모를 겪었지만 한나라에 지조를 지켰다는 "부절은 양을 돌보다가 닳아 떨어졌네(符節爲看洋落)"에서 따온 것이다. 일본의 포로가 되었지만 조선에 대한 지조를 결코 저버리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힌다.

 

4년여의 포로 생활을 하면서 쓴 이 책은 적국에서 임금에게 올리는 '적중봉소(賊中封疏)', 일본의 지도를 그린 '왜국팔도육십육주도(倭國八道六十六州圖)', 포로들에게 주는 글인 '고부인격(告浮人檄)', 자기 체험을 기록한 '섭란사적(涉亂事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간양록은 일본에 잡혀간 포로들의 참상을 생생하게 기록했고 그때 느낀 점을 한시로 적기도 했으며, 전란에 대비할 대책까지 기록하고 있는 '오늘날의 일본 현지 보고서'로 포로 문학의 백미가 아닐 수 없다.

 

 

 

영광 신천리의 태절골

 

영광 신천리 삼층석탑 (靈光 新川里 三層石塔)

 

 

 

 

고려시대. 보물 504

고려시대 석탑으로 신천리의 태절골에 자리한다. <동국여지승람>등의 기록에 따르면 이흥사 절터에 있었다고 하는데, 탑 주변에 자기와 기와 조각들이 있어 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탑은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이다. 상하기단의 네 모서리와 각 면 중앙과 탑의 몸돌(옥신석)에 기둥모양을 새겨 넣었다. 탑의 지붕돌(옥개석) 윗면의 경사는 매우 급하며 지붕돌 받침은 4단이다. 상륜부는 노반(머리 장식 받침)과 보주(연꽃 봉우리 모양 장식)로만 구성되어 있어,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상륜부 구성에 비해 매우 간략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의 석탑 양식을 충실히 계승한 고려 초기의 탑으로 추정된다.

 

이흥사(利興寺)의 옛터에 남아있는 3층 석탑이다. 이흥사의 창건시기와 규모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인 18세기경까지 그 맥을 이어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받침돌만 남아있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다른 돌로 조성되었으며, 지붕돌은 두텁고 낙수면은 경사가 급하다. 1995년 탑의 해체, 보수할 때 땅 속에 묻혀있던 아래층 기단을 지상으로 드러내면서 본래의 모습을 찾게 되었다. 고려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기단에 새겨진 가운데기둥의 수가 아래층에 2, 위층에 1개로 되어 있어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양식을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근대기 민족 종교로 창설된 원불교의 발상지

 

 

영광 원불교 영산성지 (圓佛敎靈山聖地)

    

 

 

 

성지가 위치한 백수라는 지명은 백에서 일을 떼어버린 아흔아홉의 묏부리를 뜻한다고 한다. 지명이 말해주듯 백수는 구수산의 많은 산봉우리가 어우러져 이루어진 해안 산간 지역이다. 바닷물이 깊숙이 내륙까지 들어오던 시절에는 구수산 삼면이 물에 잠겨 섬 모양을 이루었다 하며, 간척 사업이 이루어지기 전만 하여도 내륙 10Km까지 배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길룡리는 법성포에서 뱃길로 약 4km 서해의 바닷물이 와탄천을 따라 은선암과 매바위(안암) 밑을 굽이쳐 길룡리로 돌아드는데 이 물줄기가 선진포를 거슬러 위로 십여 리 올라간다. 와탄천은 멀리 대마의 태청산, 묘량면의 정암산 골짜기에서 흐르는 무장천과 영광읍의 수퇴산에서 흐르는 도편천이 합류하여 덕호리를 거쳐 법성 앞바다에 이르는 하천으로 영광에서 제일 큰 하천이다.

 

옛날 길룡리 사람들은 구수산에서 땔나무를 하거나 숯을 구워 와탄천을 내왕하는 조수를 따라 뱃길로 법성포에 내다 팔고 생필품 등을 구입해 오기도 하였다. 육로가 불편한 당시로는 와탄천은 길룡리 사람들에게는 생활의 젖줄이었고 문물의 통로였다.

 

길룡리는 산기슭에 자리 잡은 여러 마을로 이루어진다. 옛날 사찰이 있었다는 데서 연유한 수도암, 무운암 그리고 입석골, 지금은 길룡저수지가 되어 버린 마계촌, 귀룡 모양의 바위가 있다는 용암 마을을 비롯하여 잠실, 구호동, 영촌, 범현동 등의 아홉 마을이 있다.

    

 

 

 

구호동은 아홉 호랑이 노루목의 노루를 보고 달려드는 형국이라고 붙여진 이름이고 범현동은 돛대 모양이라 하여 범현동이라 하였다.

 

길룡리는 생활이 빈궁하고 문화적 혜택이 뒤진 곳이기는 하나 기승한 지세로 인하여 큰 인물이 날 것이라는 전설이 끊이질 않았다. 영광은 또한 백제에 불교가 전래될 때 동진의 마라난타가 해로를 타고 법성에 입항하여 불갑사를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그리고 구수산에는 팔만구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팔만이란 실제의 숫자라기보다는 많음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죽사가 있을 따름이고 전골, 수두암, 무운암, 사리암, 기야암 등의 절 이름이 전해지고 있고 당간 지주를 비롯하여 기와 파편, 주춧돌 등 옛날의 절터임을 말해 주는 흔적들이 여러 곳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절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이처럼 영광의 길룡리는 갖가지 전설과 깊은 불연과 신령한 빛이 어려 있는 땅이다. 원기 59(1974) 330일 중앙교의회 의결에 의해 영산성지사업회가 발족되어 영산성지의 장엄 및 각종 사업을 펼치고 있다.

    

 

 

 

영산성지에 산재하고 있는 사적으로는 영촌마을에 있는 탄생가, 대종사 대각 이전 가장 많이 사셨던 구호동 집터, 산신령을 만나려고 기도드렸던 마당바위, 한나절이나 서서 입정에 들었던 선진포, 대각을 이룬 노루목 대각지, 최초의 법어를 설한 돛드래미 이씨제각, 최초 교당인 구간도실 터, 9인 제자들의 정성이 깃든 구인 기도봉 등의 사적지가 있으며 현재 원불교 중앙총부 영산사무소와 원불교영산대학, 영산성지고등학교 등이 있다.

 

 

우리고장 최초의 지명(地名), 굴비의 고향 

 

 

영광 법성포 (法聖浦)

 

 

 

 

 

법성포 항구는 그다지 크지 않고 아담하고 작은 포구다. 예전엔 법성포 사람들은 굴비 잡이로 자식들을 키워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법성포 굴비가 잡히질 않아 어민들의 시름이 이만저만이 아니란다. 법성포항은 고려초엽에 개설된 부용창(현 법성항)은 영산창과 함께 전라도 2대 조창의 하나였다. 현재는 1종항으로 수로 준설 및 선착장 조성으로 옛 영화를 재현시킬 계획이다.

 

부둣가에 해풍을 맞고 건조되는 굴비를 보니 군침이 절로 돈다. 영광굴비는 예부터 임금님의 수라상에 올랐던 법성포 생산의 특산품이다. 고려 예종 때 이자겸이 영광으로 귀양 온 후 임금께 진상하면서 “귀양살이 신세이기는 하지만 결코 굴하지 않겠다”는 깊은 의미로 '굴비'라 이름 하였다 한다.

굴비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조기를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굴비는 조기를 소금에 절여서 말린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조기는 몸의 기운을 북돋아주는 효험이 있어서 조기(助氣)라고 썼으며 머릿속에 단단한 뼈가 있어서 석수어(石首魚)라고도 한다. 조기류는 모두 민어과에 속하며 한국 연안에서 잡히는 것은 5속 13종에 달한다고 하지만 영광 법성포 굴비는 신선한 참조기로만 가공하며 산란을 동지나 해역에서부터 추자도와 흑산도 해역을 거쳐 칠산 바다로 외유하는 참조기를 가공 건조한 것을 영광법성포 굴비라 한다. =법성포항구, 백수해안도로 백제불교 최초도래지, 가마미해수욕장, 송이도해수욕장, 불갑산 불갑사, 낙월도, 원불교영산성지 등이 있다.

 

좁은 만구(灣口)에 뻗은 작은 반도의 남안에 자리잡아 북서계절풍을 막을 수 있는 천연의 좋은 항구이다. 고려 성종(成宗) 때 이곳에 조창(漕倉)을 설치하여 영광 -흥덕(興德) 12개 군의 세곡(稅穀)을 받아 저장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조창제도는 계속 실시되었으나 법성포는 항구로서 수심이 얕고 간만의 차가 심하여 선박의 출입이 불편하여 조창제도의 폐지와 함께 쇠퇴하여 오늘날 영광굴비의 어항으로 한 중심지를 이룬다.

 

조기를 통째 말린 굴비는 전남 영광산을 최고로 친다. 얼마나 좋으면 영광굴비가 보통명사처럼 쓰일까. 좋은 굴비는 머리 쪽이 두툼하고 둥글며, 비늘은 가지런해야 한다. 여기에 윤기까지 좌르르 흐르면 최상품이다. 본래 영광군 법성포 칠산 앞바다에는 해마다 곡우 때면 산란을 위해 동중국해에서 회유한 알이 꽉 찬 참조기가 가득하다. 이 참조기 뿐 아니라 이를 염장하는 뛰어난 맛의 소금과 밤낮의 높은 습도차는 명품 굴비를 탄생시키는 최적의 조건이다.

 

영광군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한 것은 고려 시대에 이르러서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영광군조(靈光郡條)를 보면 다음처럼 나온다. 영광군(靈光郡)은 본래 백제(百濟) 무시이군(武尸伊郡)이었는데 무령군(武靈郡)이라 바꾸었고, 고려(高麗)에 들어와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 본조(本朝, 조선 시대)에서도 이를 그대로 따랐다.(本百濟武尸伊郡 新羅改武靈郡 高麗改今名 本朝因之)

 

이 기록으로 보면 영광군은 무시이군 - 무령군 - 영광군으로 그 명칭이 변화했다는 것이 되는데,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오늘날의 영광읍 지역의 변화만을 설명하는 것일 뿐, 영광군 지역의 변화상을 설명하는 데는 부족하다. 곧 오늘날의 영광군이 확정되기까지에는 복잡한 행정상의 구획 있었기 때문이다.

 

영광군은 전라남도의 북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3개 읍과 8개 면으로 이루어진 영광군은 군서면을 제외하고는 모든 읍 면이 인접 시군과 경계를 이루거나 바다와 접해있다. 영광군의 4극지의 경우 동쪽 끝에는 대마면 성산리 가렛재가 있고, 서쪽에는 60여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낙월면의오도리에 속한 횡도가 있으며, 남쪽 끝은 군남면 옥실리이고, 북쪽 끝은 홍농읍 성산리에 속한 혹아도란 섬이다.

 

영광 군내에서 조사된 불교 유적은 다른 군에 비해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각진국사가 주석하여 유명해진 갑사는 조선 후기 불교 유적과 유물로 가득하여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연흥사, 현각사도 빼놓을 수 없으며 많은 불교 유적과 유물들이 있다. 또한 원불교의 교주인 소태산 대종사의 탄생, 구도 대각터가 모여 있는 영산성지도 있다.

 

이외에도 지방유형문화재 제25호인 영광 향교 이외에도 영광군 백수읍 지산리 가지매 마을의 지산사(芝山祠, 가지서원)를 비롯해 17개의 현존하는 사우 등도 있다.

 

 

 

 

불교도래지(佛敎渡來地) ()

백제(百濟)땅에 최초로 불교를 전한 사람은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이며 동진(東晋)에서 서기 384(침류왕(枕流王) 원년(元年))에 도래하였다. 그러나 고구려(高句麗)나 신라(新羅)와는 달리 어떠한 경로(經路)를 통하여 들어왔는지에 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불가(佛家)에서는 법성포(法聖浦) 도래지(渡來地) 로 정착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동진(東晋)에서 백제땅에 불법(佛法)을 전하고저 건너와서 첫발을 내디딘 곳이 우리고장 법성포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이를 충분히 뒷받침 해주는 근거(根據)가 있으니 차례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불갑사(佛甲寺)의 가람명(伽藍名)

불갑사(佛甲寺)의 갑자(甲字)는 첫째라는 뜻을 가진다. 예로부터 한자문화권(漢字文化圈)에 속한 우리나라에서는 으뜸이라는 뜻을 갑자(甲字)를 표기해 왔다. 그러한 의미로 본다면 불갑(佛甲)은 부처의 으뜸이다. 다시 새기면 부처는 불사(佛寺)를 의미하며 으뜸이란 최초라는 뜻과도 통하게 된다. 정리해 보면 이는 최초로 마련된 절이라는 이름이 된다

 

불갑사(佛甲寺) 대웅전(大雄殿)의 용마루 보주

영광군내에서 현재까지도 법등을 이어오고 있는 모악산(母岳山) 불갑사(佛甲寺)를 비롯하여 연흥사(烟興寺), 은선암(隱仙庵)과 같은 유서깊은 고찰(古刹)이 있으며, 79곳에서 절터 혹은 절이 있었으리라고 짐작케하는 불교유적 및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이것을 볼 때, 영광군은 과거부터 불연(佛緣)이 깊은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불교유적(佛敎遺蹟) 및 유물(遺物)만을 가지고 영광군이 백제불교(百濟佛敎)의 초전지역(初傳地域)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근거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유적과 유물은 영광땅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고 그 어느 구석에서라도 영광이 백제불교의 도래지라고 하는 단서를 지니고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불갑사(佛甲寺)의 경우는 그 역사가 워낙 오래되었고 구전(口傳)되어 내려오는 이야기도 있어 考證을 위한 가장 중요한 단서(端緖)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 가운데에서도 불갑사(佛甲寺) 대웅전(大雄殿) 지붕의 용마루 중앙에 장식된 보주형의 장치물은 인도 혹은 백제불교미술의 원형으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여지는 남중국의 불교양식과 관련성이 보이고 있어 고증을 위한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불회사(佛會寺)의 상량문(上樑文) 및 옥천사(玉泉寺) 사적(事蹟)

근년에 들어 나주(羅州) 덕용산(德龍山) 불회사佛會寺(불회사(佛護寺)) 대법당(大法堂) 중건(重建) 상량문(上樑文)이 대웅전(大雄殿) 해체복원시(解體復元時) 발견되었으며, 대양문(大陽門) 중건(重建) 상량문(上樑文) 또한 발견되어 마라난타존자(摩羅難陀尊者)가 불회사(佛會寺)를 초창(初創)했다는 사실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 불회사(佛會寺)의 위치(位置)가 영광(靈光)과 멀지않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마라난타존자의 영광과의 인연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 상량문(上樑文)들이 사창시(四創時)의 것이고, 그것의 기록년대(記錄年代)가 술오년(戌午年)(1789)이며, 더불어 영광(靈光) 혹은 법성포(法聖浦)에 대한 언급이 없어 보다 분명한 기록이 아쉬운 실정이다.

 

호좌남평(湖左南平) 덕용산(德龍山) 불호사(佛護寺) 대법당(大法堂) 상량문(上樑文)에 기록(記錄)된 내용(內容)은 다음과 같다.초창주(初創主) 마라난타존자(摩羅難陀尊者) 백제초조(百濟初祖) 삼한고승(三韓高僧) 교해지의(敎海之義) 용사시해적(龍捨是奚適) 선림지율(禪林之律) 호이사난구(虎離斯難求). 연대즉동진태화원년야(年代卽東晋太和元年也)

 

한편, 대양문(大陽門) 상량문(上樑文)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記錄)이 있다.

백제지초조난타존자시개(百濟之初祖難陀尊者始開)이상의 내용을 보면 마라난타존자가 동진으로부터 백제 땅으로 도래하여 영광과 깊은 인연을 가지고 불교를 전파했다는 사실만큼은 틀림없는 것으로 보여진다. 단지 마라난타존자가 동진에서부터 배를 타고 한반도에 도래할 때, 그 지점이 영광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분명치가 않은 입장이다. 그런데 백암(栢庵) 성총(性聰)스님이 적은호남담양법운산옥천사사적(湖南潭陽法雲山玉泉寺事蹟)을 보면 백제불교 영광도래설에 대한 보다 근거있는 사실을 발견 할 수 있다.

 

백암(栢庵) 성총(性聰)스님이 쓴 성총(性聰) 백암집(栢庵集)권하(卷下)호남담양법운산옥천사사적(湖南潭陽法雲山玉泉寺事蹟)에는 우리나라 불교(佛敎)의 전래(傳來)에 대해서 적은 글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신승순도 내고구려 진함안이년임신 진주부견송지 즉소수림왕시야, 눌지왕시 사문 흑호자 자고구려지 즉신나제십구왕야, 우호승마라난타 자진내마한 진태원구년갑신 즉백제침류왕시야

(有神僧順道 來高句麗 晋咸安二年壬申 秦主符堅送之 卽小獸林王時也, 訥祗王時 沙門 黑胡子 自高句麗至 卽新羅第十九王也, 又胡僧摩羅難陀 自晋內馬韓 晋太元九年甲申 卽百濟枕流王時也)

 

이 글의 내용을 보면 백제불교(百濟佛敎) 도래지(渡來地)를 입증(立證)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단서(端緖)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호승(胡僧) 마라난타존자(摩羅難陀尊者)가 동진(東晋)으로부터 도래(渡來)한 곳이 곧 마한(馬韓)의 땅이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이때가 백제(百濟) 침류왕(枕流王) 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한시대(三韓時代)에 영광(靈光)이 마한(馬韓) 땅이었다는 사실과 구전(口傳)되어 내려오는 백제불교(百濟佛敎) 영광도래설(靈光渡來說)을 종합해 볼 때, 또한 백암(栢庵) 성총(性聰)스님이 불갑사(佛甲寺)에 주석하신 바가 있음을 볼 때, 마라난타존자의 도래지가 영광지역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가능성은 대단히 높은 것으로 보여진다.

 

불 두(佛頭)

지금 법성면(法聖面) 진내리(鎭內里) 925번지 벼랑밑에 가면 난타존자(難陀尊者)가 도래시(渡來時)에 모시고 왔다고 전하고 미륵불(彌勒佛)의 두상부분(頭上部分)이 모셔져 있다. 불가(佛家)에서의 미륵불(彌勒佛)은 두율천(兜率天)에서 전륜성왕(轉輪聖王) 치세(治世)에 하생(下生)하여 성불(成佛)한 부처로서 석가불(釋伽佛)이 제도(濟度)하지 못한 유록(有綠) 중생(衆生)들을 구제한다는 부처이다.

 

문제의 불두(佛頭)는 그 마모도(磨耗度)로 보나 자체의 석질(石質)로 보아도 이러한 사실들이 수긍된다. 이방(異邦)에 오면서 그것도 불교라는 새로운 종교(宗敎)를 전파할 목적으로 오는 성자(聖者)가 공수(空手)로 올리는 없지 않았겠는가. 한국역대 고승전(高僧傳)에서는 그의 인품과 행적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 감동(感動)하여 계이(階異)를 영칙(英則)하고 뜻을 유방(遊方)에 약()하여 일우(一隅)에 불체(不滯)하였으며 백제에 들어온 후에 궁중(宮中)에서 경봉공양(敬奉供養)하니 그의 을 품수(稟受)하여 이 좋아하고 하여 불사(佛事)가 대흥(大興)하였다. 그의 사상과 교리로써 백제인(百濟人)을 교화하였다기 보다는 도승(道僧)으로써 신통변이(神通變異)와 기행(奇行)으로써 교화(敎化) 내지는 포교(布敎)하였다."

 

그렇다고 그가 교리사상(敎理思想)이 없지는 않았을 터인 즉 미개한 국민수준에 맞추어 권선징악이나 인과응보라는 도덕적 기본을 바탕에 깔고 토속신앙으로 길들여진 토착민들에게 무엇인가 새로운 신앙적 우상을 제시하려 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존자는 미륵불(彌勒佛)을 모시고 황해를 건너왔을 것이다. 또 일우에 불체(不滯)라 하였으니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사암(寺庵)을 마련하며 포교하였을 것이다. 우선 백제(百濟)땅으로는 첫발을 법성포(法聖浦)에 상륙하였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존자(尊者)는 언어, 지리 풍습 등을 익히기 위하여 한동안 칩거한 후 불갑사(佛甲寺)와 불회사(佛會寺)를 짓고 입경(入京)하였을 것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직선로(直線路)와 문적(文籍)

중국의 산동반도(山東半島)와 백제의 법성포(法聖浦)(당시(當時)의 지명은 미상(未詳))와는 위도상의 직선거리이기 때문에 중원(中原)땅에서 황해(黃海)를 건너기에는 가장 가까운 지점이었다. 때문에 이전부터 법성포(法聖浦)에는 중국과 직거래하는 수로가 열려 있었다.

 

고종(高宗) 33(1896)에 규장각(奎章閣)에서 발간한 법성진지(法聖鎭誌)의 고적조(古蹟條)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신라통사 어강남시 등주어비지 진지서 대통치하 설치관사"

"(新羅通使 於江南時 登舟於比地 鎭之西 待通峙下 設置官舍)"

 

여기에서 말하는 신라는 통일신라이고 대통치(待通峙)라는 법성포 서방에 위치한 지명은 통사(通使)를 기다리는 고개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미 삼국시대부터 중국과 연결되는 해상로(海上路)가 개설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명(地名) 녹기설(綠記說)

특정한 역사적 사실을 연구분석함에 있어서 확실한 문헌이나 고증할 만한 자료마저 미흡할 때에는 당해지역의 지명과 연관지어 풀어나가는 연구방법이다. 이제 우리도 마라난타(摩羅難陀)의 법성포 상륙을 고증함에 있어서 완전한 자료가 없으니 이러한 학설에 의존하는 것이다.

 

첫째 상륙지점이라고 믿는 법성포(法聖浦)의 지명들이 장구한 시간적 간격이나 역사적 변화에도 구애받음이 없이 하나같이 불록적(佛綠的) 색채가 농후하다는 것이다. 조창(漕倉)의 단원(單元)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법성포에는 고려(高麗) 성종(成宗) 11(1992)에 조창(漕倉)이 건치되었는데 이때 조정에서는 부용포(芙蓉浦)라는 새로운 지명을 내렸고 여말(麗末)에 일시 문을 닫았던 조창(漕倉)을 복창(復倉)하면서 조선조(朝鮮朝)는 다시 법성포(法聖浦)라는 새로운 지명을 내렸는데 모두가 불연(佛緣) 깊은 이름들이다.

 

먼저 아무포(阿無浦)를 살펴보면 언제부터 불리운 지명인지는 알수가 없으나 새로운 지명 부용포(芙蓉浦)에 밀려 뒤안길로 사라진 시대는 서기 992년의 일이다. 여하간 이 아무(阿無)라는 염불(念佛)의 의미는 귀명무량수불(歸命無量壽佛) 귀명무량광불(歸命無量光佛)이니 즉 아미타불(阿彌陀佛)에 돌아가 구원을 바란다는 말이다. 이 아무포(阿無浦)라는 지명이 서기 384년 난타존자(難陀尊者)의 도래를 기점으로 하였다면 그 이름은 장장 600년이나 계속되었을 것이다.

 

다음 부용포(芙蓉浦)인데 이 지명은 고려(高麗) 성종(成宗)이 조창(漕倉)을 건치하며서부터 조선건국후(朝鮮建國後) 복창(復倉)이 되는 시기까지 400년간 불리운 이름으로서 이 역시 불교적 색채가 깊은 지명이다. 부용(芙蓉)이란 연화(蓮花)의 별칭으로서 연꽃은 본래 불교(佛敎)에서 신성(神聖)과 순결(純潔)의 표상(表象)인 것이다. 불상(佛像)은 연화좌(蓮花坐) 위에 봉안되며 불교의 모든 행사에는 의례 연화등(蓮花燈)이 등장한다.

 

또 승려의 가사(袈裟)를 연화의(蓮花衣)라 하며 극락정토(極樂淨土)를 연화국(蓮花國)이라고도 한다. 끝으로 법성포(法聖浦)는 현재까지 약 600년 동안 불리우는 지명인데 역시 전기한 양지명(兩地名) 더불어 불연(佛緣) 깊은 지명임에는 틀림이 없다.

원래 불가(佛家)에서는 불(), (), ()을 삼보(三寶)라고 하는데 불()은 부처요, ()은 불경(佛經)이며, ()은 성인(聖人)을 이른다. 그렇다면 법성(法聖)이라는 말의 어원(語源)은 법()을 가지고 성자(聖者)가 도래한 곳이라는 의미로 집약된다. 이제 영광이라는 지명의 불연성(佛緣性)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또 승려의 가사(袈裟)를 연화의(蓮花衣)라 하며 극락정토(極樂淨土)를 연화국(蓮花國)이라고도 한다. 끝으로 법성포(法聖浦)는 현재까지 약 600년 동안 불리우는 지명인데 역시 전기한 양지명(兩地名) 더불어 불연(佛緣) 깊은 지명임에는 틀림이 없다.

 

원래 불가(佛家)에서는 불(), (), ()을 삼보(三寶)라고 하는데 불()은 부처요, ()은 불경(佛經)이며, ()은 성인(聖人)을 이른다. 그렇다면 법성(法聖)이라는 말의 어원(語源)은 법()을 가지고 성자(聖者)가 도래한 곳이라는 의미로 집약된다. 이제 영광이라는 지명의 불연성(佛緣性)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영광(靈光)을 자의대로 풀면 신령(神靈)스러운 빛이라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영광(靈光)이라는 단어가 쓰인 예를 고사에서 찾아보면 불가(佛家)에 먼저 나온다. 한국력대고승전(韓國歷代高僧傳)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실려 있으며 그 설화중에 영광(靈光)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레 나오고 있다. 여말(麗末)의 고승(高僧) 뇌옹화상(瀨翁和尙)13506월에 중국의 정자선사(淨慈禪寺)에 이르렀을 때 그 절의 몽당노숙(蒙堂老宿)이 묻기를 "그대의 나라에도 선법(禪法)이 있는가"하니 게()(불시(佛詩))로 답하되 " 일출부상국 강남해악홍 막간동여별 영광선고통(日出扶桑國 江南海嶽紅 莫間同與別 靈光宣古通)"(해가 부상국에서 떠 강남해악에 붉었으니 같고 다른 것은 묻지마오, 영광은 옛에 뻗쳐 통하였도다.)

 

또 승려의 가사(袈裟)를 연화의(蓮花衣)라 하며 극락정토(極樂淨土)를 연화국(蓮花國)이라고도 한다. 끝으로 법성포(法聖浦)는 현재까지 약 600년 동안 불리우는 지명인데 역시 전기한 양지명(兩地名) 더불어 불연(佛緣) 깊은 지명임에는 틀림이 없다.

 

원래 불가(佛家)에서는 불(), (), ()을 삼보(三寶)라고 하는데 불()은 부처요, ()은 불경(佛經)이며, ()은 성인(聖人)을 이른다. 그렇다면 법성(法聖)이라는 말의 어원(語源)은 법()을 가지고 성자(聖者)가 도래한 곳이라는 의미로 집약된다. 이제 영광이라는 지명의 불연성(佛緣性)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영광(靈光)을 자의대로 풀면 신령(神靈)스러운 빛이라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영광(靈光)이라는 단어가 쓰인 예를 고사에서 찾아보면 불가(佛家)에 먼저 나온다. 한국력대고승전(韓國歷代高僧傳)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실려 있으며 그 설화중에 영광(靈光)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레 나오고 있다. 여말(麗末)의 고승(高僧) 뇌옹화상(瀨翁和尙)13506월에 중국의 정자선사(淨慈禪寺)에 이르렀을 때 그 절의 몽당노숙(蒙堂老宿)이 묻기를 "그대의 나라에도 선법(禪法)이 있는가"하니 게()(불시(佛詩))로 답하되 " 일출부상국 강남해악홍 막간동여별 영광선고통(日出扶桑國 江南海嶽紅 莫間同與別 靈光宣古通)"(해가 부상국에서 떠 강남해악에 붉었으니 같고 다른 것은 묻지마오, 영광은 옛에 뻗쳐 통하였도다.)

 

우리고장 최초의 지명(地名)

한강유역에 부여족(扶餘族)이 백제를 세운 것은 BC 18년의 일이다. 그러나 정작 국가의 기틀이 잡히기 시작한 것은 8대 고이왕(古爾王)때 부터였고 우리고장이 속해 있는 마한(馬韓)의 중남부 지방까지 행정적으로 정리된 것은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때이다. 이때에 우리고장에 붙여진 이름이 무시이(武尸伊)이고 이것이 기록상에 나타나 있는 우리고장 최초의 지명인 셈이다.

 

본래 지명이란 지형이나 지세 등 자연조건에 다라 명명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 지방의 역사적 배경이나 지역주민의 정치적 세력에 의하여 붙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고장 최조의 지명이 무시이(武尸伊)는 통상적인 유형에 속한다. 그렇다면 무시이(武尸伊)라는 이 한자표기는 과연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또 읽기는 어떻게 읽는 것이 정확할까, 여간 난해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의 말고 글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많이 달라지는데 하물며 남의 글을 빌려쓴 이 무시이(武尸伊)라는 지명의 발음과 의미를 밝혀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계(斯界)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에는 지명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소리()만으로 쓴 것이 아니라 뜻()으로도 쓴 흔적이 많다. 그와 같은 연구결과를 토대로 하여 무시이(武尸伊)를 읽으면 ""이라고 읽어야 한다. 당시 지명의 한자표기에서 이자(伊字)는 발음하지 않는 어조사(語助辭)로 하였고 시자는 리을로 쓴 흔적이 많으므로 무자(武字)를 소리나는 대로 발음할 경우 무시이(武尸伊)""이 되는데 이는 이 고장이 지니고 있는 자연조건에도 부합된다. 과연 이 고장의 물의 고장이었다.

 

지금도 홍농(弘農), 법성(法聖), 백수(白岫), 염산(鹽山) 등은 등을 끼고 있지만 옛날에는 군남(郡南), 군서(郡西), 대마(大馬)에도 바닷물이 드나들었고 그 뿐 아니라 영광읍(靈光邑)에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으므로 배들이 출입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이를 실증하는 좋은 예가 물무산의 존재이다. 수퇴산(水退山)이라도 하는 이산은 교촌리(校村里)의 남동방(南東方)에 위치한 으로서 山名이 예시하듯이 물을 매어 놓은 곳 다시 말해서 물이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도록 끝지은 산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이와 같이 이 고장은 간탁(干拓)이 없던 옛날에는 흡사 물속에 들어앉은 듯한 지형을 하고 있었으니 선인들이 지명을 ""이라고 하였음도 무리는 아니다. 시자(尸字)를 리을로 발음한(리을 받침으로 쓰인) ()는 신라향가중(新羅鄕歌中)에서도 흔히 찾아 볼 수가 있다. 예시하면 곡옥시(哭屋尸)"" 환어시(還於尸)"", 회어시(廻於尸)"", 도시(道尸)"", 숙시(宿尸)""이라고 이독학(吏讀學)에서는 해독한다.

 

백제(百濟)의 지리적(地理的) 환경(環境)과 문화의 특색

기원전 반세기 경까지도 한반도에 들어와 살던 종족(예맥(濊貊) 퉁그스족)들은 부족사회의 형태에서 소유권의 한계나 지배권의 확대를 의식하지 않은 채 그저 평화스럽게 살아갔다. 그러나 점차 인구가 증가하고 인지가 발달함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지배권이 성립되면서 영토의 한계라고 하는 커다란 문제가 제기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은 자연발생적 요구에 따라 평온하던 부족사회에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분이 생기게 되고 이러한 지배체제는 국가라고 하는 강력한 권력집단을 등장하게 하였다. 이렇듯 내부적으로 결속, 제도화한 국가라고 하는 대단위 집단은 외부적으로는 영토의 한계를 분명히 하거나, 혹은 그것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을 야기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한반도(韓半島)에 맨먼저 국가를 세운 것은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신라이다. 20년후(年後)BC 37에는 졸본부여(卒本扶餘)에서 고주몽(高朱蒙)이 고구려를 건국하였는데 우리고장이 속한 백제(百濟)는 그보다 19년 늦은 BC 18년에야 탄생하였다. 고주몽(高朱蒙)의 아들인 온조(溫祚)가 마한(馬韓)의 일부족국(一部族國)인 백제(百濟) 지금의 광주지방(廣州地方)에다 나라를 세워 국호를 백제라 하였으나 마한(馬韓)의 옛 영토를 완전히 회복하고 명실공히 국가권을 체계화한 것은 13대 근초고왕대(近肖古王代)의 일이다.

 

그러나 백제는 그가 지닌 두가지의 자연조건 때문에 북방의 고구려와 동방의 신라에게 끊임없이 시달림을 받아야만 하였다. 첫째 조건은 양국의 중간에 위치하였다는 것이요, 둘째는 가장 비옥한 한강을 차지하고있다는 것이다. 이때는 이미 농경(農耕)을 생활의 기본으로 하는지라 광활하고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물이 흐르는 강이 영토분쟁의 표적이 되기에 충분했다.

예나 지금이나 한수류역(漢水流域)은 한반도 최대의 평야이며 젖줄이다. 여기에 또 한가지 백제가 숙명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은 당시 한반도에 성립한 국가는 3개였기 때문에 중간에 위치한 백제는 , 어느 한 나라의 침공을 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중 대표적인 사례들만 들어도 西紀 371년경 고구려는 백제의 한강유역을 공략하기 위하여 중국의 전진(前秦)과 남방(南方)의 신라를 동맹국(同盟國)으로 함에 백제(百濟)는 그에 대처하기 위하여 중원(中原)의 동진(東晋)과 바다 건너 일본과 연합하였고 서기(西紀) 397(17아신왕(阿辛王) 6)에는 고구려(高句麗)의 광개토왕(廣開土王)에 의해 임진강(臨津江) 유역(流域)을 빼앗겼다.

 

475(개로왕(蓋鹵王)21)에는 수도인 남한산성(南漢山城)이 고구려군(高句麗軍)에게 함락을 당하였고 22문주왕대(文周王代)에는 고구려의 침공에 밀려 도읍을 태진(態津)(공주(公州))으로 옮겼다가 26성왕대(聖王代)에 다시 부여(扶餘)로 천도(遷都)하는 비운을 맞기도 하였다.

 

551(성왕(聖王) 29)에는 실지회복(失地回復)을 꾀하고자 신라와 동맹을 맺었으나 그들의 배신으로 한간유역을 잃는 아픔도 맞보았다. 백제는 배신한 신라는 보복하고자 고구려에 손을 뻗었으나 신라의 女王 선덕(善德)은 나당련합(羅唐聯合)으로 대적(對敵)하였다.

 

소정방(蘇定方)과 김유신(金庾信)의 연합군에 비참한 최후를 고한 계백(階伯)의 백제는 망국(亡國)의 한()을 씹어야만 하였다. 반면 승기(勝機)를 잡은 신라(新羅)는 고구려(高句麗)마저 병합함으로써 성공(成功)을 거두었다.

 

이상에서 개설한 바와 같이 백제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요 치욕(恥辱)의 역사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중첩(重疊)되는 전란(戰亂)의 와중에서도 백제인들은 그들만의 독창적인 문화와 예술을 꾸준히 발전시켜 나갔다. 이때 백제는 동진(東晋)이나 일본과 동맹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문화적으로 교량적 역할도 하였다. 대륙(大陸)의 선진문화를 도입하는 한편 후진 일본에도 전수하였다.

 

일본의 사기(史記)에 따르더라도 백제의 박사중(博士中)에는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처럼 학문에 능한 박사외(博士外)에도 의박(醫博), 와박(瓦博) 등이 있었다고 하니 고도의 기술과 다양한 전문교육이 있었던 것이다.

 

백제는 일찌부터 낙랑문화(樂浪文化)의 영향을 받아 한학(漢學)을 발전시켰고 침류왕(枕流王) 원년(元年)에는 동보(東普)에서 불교라고 하는 종교까지 들여와 백제문화의 기조를 이루게 된다. 이 불교는 비단 종교라고 하는 본래(本來)의 정신적 문화에 국한하지 않고 그로 인한 조각, 건축, 미술 등 다양한 예술문화를 꽃피우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당시 백제인들의 기예(技藝)는 타이국(他二國) 보다 높이 평가되었기 때문에 신라에서도 거대한 불사(佛事)에는 백제의 장인(匠人)들을 초빙하였다. 그 예로서, 황룡사(皇龍寺) 구층탑(九層塔)에는 아비지(阿非知), 불국사(佛國寺) 석가탑(釋迦塔)에는 아사달(阿斯達)이 참여한 것은 흔히 아는 바이다.

 

그 뿐 아니라 당시의 삼국중 와당(瓦當)이나 석등(石燈)에 새겨진 문양(紋樣) 등도 백제의 작품들이 유독 빼어난다는 것이 후학(後學)들의 평이다. 고구려의 그것은 너무 지나치게 힘찬 것 만을 표현하고 있으며 신라는 반대로 선()이 너무 약하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나 백제의 예술품은 온화하고 정교하였기 때문에 이웃 고구려와 신라의 예술에 크게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멀리 日本의 문화전방에 까지 절대적 영향을 끼쳤다.

    

 

 

 

조운제도와 부용창

조운제도는 영광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일찍이 조창이 건치됨으로써 우리고장이 역사적으로 각광을받게 되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기 때문이다. 고려 조정은 성종 11(서기 992)에 한수이남에 12개소의 조창을 설치하였는데 그때 우리고장에도 부용창이라는 조창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국가재정의 중추기관인 조창이 우리고장에 세워짐으로써 일찍이 영광이라는 지명이 우리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고장에는 수군의 진보도 설치되었으니 실로 이 고장이 우리나라에 끼친영향은 큰 것이다. 조운이란 국가에서 조세로 징수한 곡물, 포백 등을 수로로 운송하는 제도로서, 일명 조전이라고도 하였다.

 

교통수단이 미개하던 중세에는 모든 물화의 운송이 육로보다는 수로를 이용함이 편리했다. 특히 농경위주의 당시의 사정으로는 나라의 재정수입도 토지에다 과하는 곡물세입이 주종을 이루었다. 이와 같이 전국 각지에서 징수된 세곡을 중앙으로 취합하는 데는 수로이상의 방법이 없었다. 이러한 제도는 중앙집권적 지배체제가 강화·정비 되어가던 성종대에 이르러 확립되었다.

 

이와 같이 곡물을 수합 보관하기 위해 수로 연변의 창고를 조창이라고 부르거니와, 이때 성종이 개경 이북에는 이를 두지 아니한것은 그 지역은 농지가 부족한 산간지대라는 것 이외에도 항시 북방의 오랑캐와 대치하고 있는 군사적 요충권이었기로 그 지방의 세곡은 이를 군화미에 충당하기 위함이다.

 

여하간 법성포에는 900여 년간 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조창이 있으므로 해서 국가에 공헌한 바도 크지만 반면으로는 대소 전란시마다 공격 목표가 되었으니 그때마다 주민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은 엄청나게 컷으리라 예상된다.

 

물론 우리 고장 영광도 고려의 통일국가형성으로 인하여 고려의 영토로 되었으니 44연간(892 ~ 936)의 후백제 시기에는 줄곧 후백제에 속하였다.왕건이 태봉국 궁예의 명에 의해 나주까지 진격하였을 때에도 우리고장은 여전히 후백제의 영토로 남아있었다. 견훤에게 있어 광주는 전략상의 요충지었기 때문에 그가 신임하는 인물을 성주로 삼아 사수케 하였다. 광주의 서북방에 위치한 영광은 광주에서 전주로 가는 통로였기로 견휜은 이 중요한 전략상의 요지를 확보하기 위하여는 필히 영광을 자기 지배하에 두지 않으면 아니되었다. 지금의 장성이 당시에는 영광에 속하였다. 이 때문에 고려의 입장에서 보면 영광지방은 끝까지 저항하던 지역이다. 왕건은 건국후 제도와 질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도 그와 같이 크게 저항하던 지역에 대하여는 차별대우할 수 밖에 없었다.

 

 

영광 법성포 백제불교 최초도래지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 마라난타사 (摩羅難陀寺)

 

 

 

서기384년 인도승 마라난타가 중국 동진을 거처 백제에 불교를 전하면서 최초로 발을 디딘곳이다. 영광 불갑면의 불갑사를 보고선 서북쪽 포구로 달려 법성포에 다다렀다. 우리에겐 서해바다의 조기를 염장한 굴비로 이름나 '영광굴비'가 있게한 법성포 포구다.

 

백제 침류왕 원년인 서기 384년에 인도스님 마라난타 존자께서 남중국의 동진을 거쳐 이곳 법성포에 이르러 부처님의 법을 전한 것으로부터 백제불교는 시작된다. 당시의 포구 이름은 알수 없으나 마라나타 존자 스님에 의하여 백제 불교가 전래하면서 아미타 정토 신앙이 시작되고 포구 이름도 나무아미타불을 상징하는 '아무포'로 개명되었다가 이후 고려 초에는 극락세계 연화대를 상징하여 연꽃과 같다하여 '부용포'로 다시 개명되어 불리우다가 고려 중 후렵부터 이곳으로 법을 가진 성인이 들어와 백제에 불교를 전하였다 하여 법성포(法聖浦)로 불리우게 되었다. 현재는 백제불교최초도래지 기념관이자 불갑사에서 관리하는 마라난타사로 운영되고 있다.

 

'굴비의 고장' 영광 법성포다. 법성포는 백제시대 불교가 처음 들어왔던 포구다. 침류왕 원년, 서기 384년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 존자에 의해서다. 법성면 진내리 좌우두마을이 그곳이다. 법성포(法聖浦)의 지명도 여기서 유래됐다. '성인이 불법을 들여온 성스러운 포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마라난타가 백제에 처음 지은 절도 불갑사다. 절 이름에 부처 불(), 첫째 갑()을 쓴다. 이렇게 영광과 불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법성포는 옛날 호남의 곡식을 모아 한양으로 올려 보냈던 포구다. 고려시대 조창이 설치됐다. 조선시대엔 호남 제1의 조창으로 번창했다. 옛말에 "아들을 낳아 원님을 보내려면 옥당골로 보내라"는 말이 나온 것도 이런 이유다. 옥당골은 영광을 가리킨다. 바로 앞 칠산바다는 조기가 지나는 길목이었다. 사람의 원기를 돕는다는 조기(助氣). 고려 인종 때 이자겸이 이곳으로 귀양왔다가 맛을 보고 반해 임금에 진상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임금에 대한 충성과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일화로 '굴비'란 이름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