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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불교계의 친일 단체

草霧 2013. 12. 2. 11:28

 

 

 

現代 佛敎史

 

 

1910년대 불교계의 친일 단체

   

 

 

 

<사진설명>30본산연합사무소에서 개최된 불교진흥회 제1회 정기총회 모습.

 

 

친일파 문제는 많은 시비와 논란이 끊이지 않는 민감한 사안이다. 친일파란 개념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부터 개인의 행적을 판단하는데 있어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해야 하는 복합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친일 단체는 설립 취지와 목적 그리고 구체적인 행위 나아가서 구성원의 성향까지 고려해서 판단할 문제이다.

먼저 친일파의 개념은 일제시대에 일본의 통치노선에 동조하여 식민정책을 찬양하고, 동족을 압박하여 침략전쟁에 참여할 것을 부추긴 반민족 행위를 저질렀던 자를 말한다. 친일 문제를 판단하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개인이나 단체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친일 활동을 하였으며 그 결과 우리 민족에게 어떤 해악을 끼쳤느냐에 있다고 본다.

불교계의 친일 문제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불교계에서 거론되는 최초의 친일 사건은 191010월에 있었던 이회광의 조일불교 연합책동이 아닌가 한다.

1910년대에는 불교계에도 친일단체가 구성되고 구체적인 양상들이 나타난다. 1914년에 불교진흥을 목적으로 승려와 재가 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불교진흥회는 친일 단체로 규정할 수 있다. 불교진흥회는 장기림(張基林김홍조(金弘祚이능화(李能和) 27명에 의해서 발족되었다. 이들은 같은 해 810일 경성부 황금정(黃金町)에 있던 이상화(李常和)이 집에 모여서 발기준비 모임을 가지고 임시 회주로 이회광(李晦光)을 선출하였다. 30본산 주지 29명과 재가신도 다수가 참석하여 19141121일 각황사에서 발기인 대회를 개최하고 이회광(李晦光)을 발기인 대표로 선출하였다.

불교진흥회가 발족하게 된 배경에는 1910년 조일불교 연합책동을 일으켰던 이회광과 강대련 사이의 갈등이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던 것 같다. 이회광은 사찰령이 시행된 이후 1912년에 결성되었던 30본산주지회의원 원장을 지냈으며 당시 불교계의 실세였다. 이 무렵 강대련은 수원 용주사에 주지로 있으면서 자주 총독부를 드나들며 친일 행각을 일삼고 있었는데 여기에 위협을 느낀 이회광이 30본사 주지들과 유력한 재가자들을 규합하여 불교진흥회를 결성하였던 것이다. 강대련은 191530본산연합사무소 초대 위원장을 지냈다. 그는 또 3·1운동 이후 조선 왕족의 여자나 귀족의 여자 그리고 일반 서민의 여자를 일본 승려나 조선 승려와 결혼을 시켜야 한다는 불교기관 확장의견서를 총독부에 제출한 승려로 대표적인 친일 승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지목된다.

불교진흥회의 취지서에 의하면 설립 목적은 위로는 천황의 교화를 보필하고 아래로는 국민들의 복을 도모하고, 불교를 진흥하여 동포들로 하여금 모두 불교에 귀의하게 하고자 하는데 있다고 나타난다. 설립 취지부터 일본에 충성하겠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이들은19141228일에 임시회를 개최하고, 1230일에는 불교진흥회 설립 총회를 개최하였다. 그 총회는 191511일 그리고 19일에도 계속되었는데 이 총회에서 불교진흥회 회주에는 해인사 주지였던 이회광을, 부회장에는 강대련(姜大蓮)을 비롯하여 나머지 여타의 간부진도 선출하고 명단을 당국에 보고하였다. 불교진흥회에 참여한 재가 신도들은 김홍조(金弘祚신우균(申羽均박두영(朴斗榮장지연(張志淵최동식(崔東植김영진(金榮鎭윤태흥(尹泰興이능화(李能和이상화(李常和윤직구(尹稙求양건식(梁建植)이며, 이 외에도 다수의 재가 신도들이 참여하였다.

 

 

 

 

 

불교진흥회는 본부를 경성부 수송동 82번지 각황사에 두고 지방의 각 본산에 지부를 두었다. 그리고 총재 1인과 고문 약간인, 회주 1인과 간사 약간 명을 두었으며, 이무부(理務部인사무부(人事務部재무부를 두어 해당 사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불교진흥회는 불교를 진흥시키기 위해서 전국 30본산의 본말사에서 불교전문과를 졸업한 우수한 30세 이상의 승려를 선발하여 불교진흥회에서 운영하는 포교사 양성소로 보낼 것을 시행세칙에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승려를 위한 포교서와 일반 신도를 위한 포교서를 간행할 것도 아울러 동 세칙에 명시하고 있다.

불교진흥회는 30본사 주지들과 유력한 재가 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구성된 까닭에 고승들을 초청하여 법회를 열었다. 19153월에는 김경운(金擎雲) 선사가 수송동 각황사 포교당에서 설법을 하였다고 한다. 김경운 선사는 매주 일요일 11시 경에 각황사에서 설법을 하였다고 한다. 특히 1915418일 법회 시에는 30본산연합회의소 위원장인 강대련을 비롯하여 불교진흥회 간사 한영호(韓榮浩심우택(沈禹澤)의 소개로 실업가 70여 명이 참석하여 설법 이후에 불문에 입교하는 입교식을 거행하였다고 전한다.

일제시대에 실업가들은 총독부 권력과 결탁하지 않고는 기업 활동이 불가능하였으므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친일세력으로 규정하여도 큰 무리가 없다고 본다. 김경운은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조선불교계의 용호(龍虎)와 같은 존재라고 한다. 그는 191010월 이회광이 일본 조동종과 연합책동을 벌였을 때 민족진영에서 연합책동을 분쇄하기 위해서 설립되었던 임제종의 관장(管長)으로 추대된 승려였다. 그런 그가 연로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교통도 불편하였을 당시에 순천에서 멀리 서울까지 설법을 위해서 자주 왕림하였다는 사실은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수행의 정도는 깊었겠지만 현실을 직시하는 안목이 부족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불교진흥회의 회원은 승려에 국한되지 않았으며, 불교를 진흥할 수 있는 유지(有志) 남녀도 참여할 수 있었다. 불교진흥회의 경비는 본회의 설립에 찬동한 각 본산에서 부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수시로 회원들에게 금전을 거두어 경비로 편입시켰다. 불교진흥회는 기관지불교진흥회월보를 발행하였는데 편집 겸 발행인은 이능화(李能和)였다.불교진흥회월보의 발행은 불교진흥회 시행규칙에 본회의 취지를 발표하고 일체의 회중(會中) 업무를 게재 한다는 규정에 따른 것이었다. 회보의 간행은 진흥회 내의 재무부에서 담당하였다. 잡지의 구성은 논설·교리·사전(史傳학술·문예·잡저·소설·회록·관보초(官報抄휘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불교진흥회월보는 단순히 불교진흥회의 기관지의 성격을 넘어서 당시 불교계와 문화계의 상황을 살필 수 있는 불교 교양지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사진설명>불교진흥회의 기관지 '불교진흥회월보' 창간호.

 

 

191615일 총독부 우사미(宇佐美) 내무장관이 30본산연합사무소 위원장 강대련과 승려들을 초청하여 불교진흥회를 신도들에게 맡기라고 지시했다. 이러한 지시에 따라 불교진흥회는 19172월 이완용(李完用조중응(趙重應)권중현(權重顯한창수(韓昌洙) 등 주로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귀족과 재조선 유력 일본인을 중심으로 구성된 불교옹호회(佛敎擁護會)로 전환된다. 불교옹호회의 평의원으로는 일본인 미시마 타로(三島太郞오카모토 게이지로(岡本桂次郞시라이 도모노스케(白井友之助) 등이 참여하고 있다. 미시마는 조선식산은행의 초대 은행장을 지냈고, 시라이는 시라이 증권사 사장을 지낸 인물이다.

불교옹호회에 참여한 일본인들은 주로 경제계의 거물들이었다. 이들은 불교진흥회가 발족한 이래 원만한 발전을 보지 못하였고, 또 그러할 능력이 없으므로 이를 폐지하고 새로이 불교를 옹호하고 신앙적인 수양을 쌓아 불교를 흥성하게 하고 충량한 제국신민이 되기 위해 불교옹호회를 세운다고 천명하였다.

불교진흥회는 승속을 망라한 불교계의 인사들이 참여한 단체였으며 주된 활동은 법회를 통한 교리 전파와 총독부의 시책 홍보에 있었다. 불교옹호회는 친일 거두들과 조선에 살고 있던 일본의 주요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창설된 불교 외호단체였다. 불교옹호회는 창립된 이래 크게 활동한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설립취지문과 구성원들의 성향으로 보아 친일 단체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불교옹호회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고 1922년 불교협성회(佛敎協成會)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고 해산되었다.

1910년대 후반에 불교진흥회와 불교옹호회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경기가 상승할 무렵 불교계의 친일 활동을 위하여 구성되었으나 큰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그 까닭은 불교도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없었기 때문이다. 1910년대 불교계에 조선을 움직이는 거물들을 중심으로 친일 단체가 성립하였다는 사실은 향후 불교계에 친일적 성향이 짙어진다는 것을 암시한다.

 

- 김순석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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