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권상로 (權相老, 창씨명 安東相老, 1879∼1965)
불교계 최고의 친일학승
▲ 친일 학승 권상로(權相老)가 발행한 ‘조선불교월보’
퇴경당 권상로 스님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1943년 {임전의 조선불교} 간행 1953년 동국대 초대총장
권상로(權相老, 일본식 이름: 安東相老, 1879년 양력 2월 28일 ~ 1965년 양력 4월 19일)는 한국의 불교 승려이다. 아호는 퇴경당(退耕堂)이다. 경상북도 문경 출신으로 한학을 공부하다가 18세 때인 1896년에 김룡사에서 출가했다. 그는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으며 무학으로서 뚜렷한 학벌이 없었음에도 불교계에서 소문난 학승(學僧)이었다. 아버지는 권찬영(權贊泳)이다.
유교 국가였던 조선은 불교 승려에 대한 여러가지 탄압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일본의 세력이 진입하면서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 정책을 해제하는 등 상대적으로 불교에 우호적인 정책이 나오게 되었다. 불교계에서는 일본과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찬양하는 친일 문건을 다수 작성했고, 권상로는 자신이 편집자를 맡은 《조선불교월보》와 《불교》에 친일 논설들을 수록하여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무렵부터 친일적인 성향을 보였다.
이후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태평양 전쟁 시기에 시국 강연과 기고 등을 통한 노골적인 친일 행각으로 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예를 들어 그는 《불교시보》에 실린 〈승려 지원병에 대하야〉(1940)에서는 임진왜란 때의 승병 등을 예로 들면서 청년 승려들이 전쟁이 지원병으로 참전해야 한다며 역설했고, 전쟁 승리가 곧 성불이라는 친일 논리의 집대성격인 단행본 《임전의 조선불교》(1943)를 간행했다.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참사를 맡기도 했다.
광복 후에도 불교계의 원로로 활동하면서 1953년 동국대학교 초대 총장을 맡았고 1962년에는 문화훈장을 수여 받았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1906년 4월부터 김룡사 경흥학교(慶興學校)와 성의학교(聖義學校)의 강사를 역임, ▶1909년 12월에 원종(圓宗)의 종무편집부장으로 활동 ▶1911년 12월부터 1년간 문경 대승사(大乘寺)의 주지 ▶1912년 조선불교월보사 사장으로 취임하여 [불교월보]를 6년 동안 발행 ▶1918년 김룡사 지방학림과 상주보광학교의 강사를 역임(∼1922) ▶1923년 불교사 사장으로 취임하여 [불교]지를 발간.(∼1931) ▶1931년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1944) ▶1944년 4월부터 불교총본산인 태고사(太古寺)의 교학편수위원(敎學編修委員)을 역임.(∼1946) ▶1946년 4월 동국대학 교수로, 같은 해 6월에는 학장으로 취임. ▶1953년 2월에 동국대학이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자 초대총장직을 맡았으며, 그해 7월에 정년퇴임과 명예교수. ▶1962년에는 동국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해 대한민국문화훈장을 받았다.
【시문집】<질려원고>(5책)
【역시집】<퇴경역시집(退耕譯詩集)>(동악어문학회.1966)
【한역시조집(漢譯時調集)】<영언만필(永言漫筆)>
【국역당시선집】<이태동잠집(異苔同岑集)>
【수필집】<허환(虛幻)>(조선일보출판부.1936)
【저서】<제금파화상문(祭琴巴和尙文): 문예(文藝)>(불교진흥회.1916) <자비(慈悲)계서(序): 문예(文藝)>(불교진흥회.1916) <조선불교약사(朝鮮佛敎略史)>(신문관.1917) <조선불교의 삼대특색(朝鮮佛敎の三大特色)>(조선불교사.1929) <신라멸후(新羅滅後) 1천년: 신라의 불교문화(佛敎文化)>(조선일보출판부.1935) <종교독본: 불교의 원리>(조선일보출판부.1936) <조선문화문답실(朝鮮文化問答室): 동령승(動鈴僧)의 유래>(조선일보출판부.1936) <생활의 의의(意義)>(장산사.1936) <내가 가진 귀중품, 내가 앗기는 가보(家寶) 공개>: 사리령응기(舍利靈應記)>(조선일보출판부.1936) <부녀자(婦女子)의 근로(勤勞)>(장산사.1939) <조선문학사(朝鮮文學史)>(일반프린트사.1947) <불교독본(佛敎讀本)>(정토문화사.1958) <한국지명연혁고(韓國地名沿革考)>(동국문화사.1961) <선학(禪學)과 선리(禪理)>(경성문화사.1982) <현대불교(現代佛敎)>(보련각.1983) <광명(光明)의 길>(선문출판사.1990) <실록으로 본 사명대사>(이화문화출판사.1995) <한국사찰사전(韓國寺刹事典)>(상하권.이화문화출판사.1994)
【역주서】<은듕경(恩重經)>(조선불교중앙교무원.1925) <석문의범(釋門儀範)>(상하권.공역.卍商會.1935) <이조실록불교초존(李朝實錄佛敎褻存)>(보련각.1976) <삼국유사(三國遺事)>(동서문화사.1978)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공역.동범문화원.1979) <퇴경역시집(退耕譯詩集)>(동악어문학회.1966)
【전서】<톼경당전서(退耕堂全書)>(보련각.1975)
▲운달산 김용사 퇴경당권상로대종사사적비 (退耕堂權相老大宗師事蹟碑)
▲서울 견지동 조계사 상량문이 불교중앙박물관으로 옮겨진다. 조계사는 지난 2003년 대웅전 종도리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상량문과 217점의 장엄물을 불교중앙박물관으로 이관한다고 10일 밝혔다. 모두 4장으로 된 상량문은 당시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였던 권상로(權相老)스님이 지은 것으로 건축 경위와 참여 인물, 건축비를 부담한 30개 본말사와 부담액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 대웅전 상량이 1937년 10월12일(음력 9월 9일) 오후 3시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佛紀二千九百六十四年丁丑九月初九日未時)
불교계 최고의 문필가이자 편집자 1895년 4월 승려의 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되자 이를 주선한 일본승려 사노(佐野前勵)에게 감사장을 준 경력이 있는 최취허(崔就墟)는 {조선불교월보} 창간호(1912. 2. 25)에 '한일합방'을 '일본천황의 성덕'이라 하고, 또한 사찰령의 반포를 '총독의 밝은 정치(明政)'라는 등의 노골적인 친일발언을 하였다.
또 전등사 주지 김지순(金之淳) 역시 [성은(聖恩)으로 사법인가(寺法認可)]라는 글에서 사찰령 시행을 '천황의 성은'으로, 각 본산법의 인가를 '총독의 공적으로 치하하는' 몰지각하고 반민족적인 발언을 {조선불교월보} 제10호(1912. 11. 15)에 발표하였다.
최취허와 김지순 이 두 사람의 친일행각도 비판받아야 하지만 그들의 친일적인 글을 게재한 {조선불교월보}의 편집 겸 발행인이었던 권상로에게도 상당 부분의 책임이 있다고 하겠다.
발행인이자 사장으로서 편집권을 가진 그가 민족적인 자각의식이 있었다면 이 두 사람의 글을 싣지 않았을 터이지만 권상로가 그들의 친일성향의 글을 게재했다는 것은 그가 '합방' 초부터 친일의식이 다분했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출가 전 향리에서 10년 동안 한학을 공부하고 18세에 출가하여 김룡사 대교과의 이력(履歷)을 마친 뒤 원종(圓宗)의 찬집부장(纂輯部長)으로 중앙무대에서 활동을 시작하여(1909), 그 후 {조선불교월보}(1912. 2∼1913. 8. 통권 19호)와 {불교}지(1924. 7∼1933. 8)의 편집 겸 발행인을 맡았던 유능한 편집인이자 일제 시대 조선불교계가 처음으로 조계종이라는 종명(宗名)을 확립하고 심혈을 기울여 건립한 총본산 태고사 (太古寺: 지금의 조계사)의 상량문을 비롯해 근래 우리나라 불교계 최대의 호한한 문장을 남긴 최대의 문장가였던 권상로(權相老, 창씨명 安東相老).
그가 본격적으로 친일성향을 드러낸 것은 일제가 중국을 침략하면서부터였다. 권상로는 1937년 8월 6일 부민관 대강당에서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에서 주최하여 열린 첫번째 시국인식 친일강연에서 2300여 명의 청중들에게 '선각자로서'라는 제목으로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할 것을 소리 높여 외쳤다.
총독부 시국강연반의 연사가 되어 권상로는 부민관의 첫 친일강연 이후 총독부 시국강연반의 불교측 연사로서 8월 7일 경북지방으로 시국강연 여행을 떠나 1주일 동안 일제의 국체(國體)에 투철하여 중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자고 역설하였다.
그는 경북지방의 친일 강연에서 돌아와 8월 20일에는 총독부의 시국회의에 참석한 뒤 오후에는 용산역으로 나갔다. 전쟁이 시작된 지 두 달도 되지 않아 벌써 일본군의 유골이 속속 조선군사령부가 주둔하고 있던 용산으로 오고 있었다.
권상로는 중앙교무원의 간부 이종욱*, 황금봉 등과 함께 용산역에 도착하는 출전장병 유골 영접차 조기(弔旗)까지 들고 용산역 구내에 출영하여 유골행렬과 함께 계행사(偕行社)에 가서 전사한 일본군의 영전에 독경·분향하였다.
시국인식강연회의 불교측 연사로서 총독부로부터 그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이번에는 함경북도 지방으로 순회강연을 떠났다(1937. 9. 5). 이리하여 함북 고무산 (古茂山)에서 시국강연중이던 권상로는 '불교측에서도 시국 삐라를 제작·배포하고, 시국순회강연을 개최하자'는 내용의 편지를 중앙 교무원으로 보냈다.
친일승려로서의 면목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행동이었다. 권상로가 행한 이 두 번의 시국순회강연은 총독부가 중일전쟁이 발생한 직후인 1937년 7월 15일에 임시지사회의를 소집하여 전쟁과 관련한 시국에 대해 조선민중에게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서 논의하여 총독부 학무국이 결성한 1, 2차 전조선 순회시국강연반의 일원으로서의 친일활동이었던 것이다.
그의 친일 강연은 일반인뿐만 아니라 승려와 불교신도들 대상으로도 행하여졌다. 1938년 7월 20일 법주사와 보은군청이 합동으로 주최한 시국강연회에 연사로 나가 150여 명의 불교신도들에게 '시국과 불교'라는 제목으로 친일 강연을 하였고, 7월 22∼31일에는 법주사 승려들에게 전쟁시국에 대해 강연을 하였다.
그의 친일 강연 행각은 8월 7일부터는 건봉사로 이어졌다. 건봉사와 본말사가 연합하여 주최한 시국인식 순회강연회 연사로 초빙된 권상로는 강원도 고성군 간성(杆城), 양양읍, 고성읍 등지에서 '시국과 불교', '불교의 호국주의' 등의 제목으로 600여 명의 청중에게 시국강연을 하였다.
권상로는 9월 6일에는 경북 영주읍 김룡사 포교당과 각사 연합 시국강연회에 참석하여 영주와 풍기의 심상소학교에서 역시 앞서와 유사한 제목으로 친일강연을 하였다.
그의 시국 강연은 다음 해에도 이어져 1939년 7월 24일 심원사(深源寺)에서 개최한 강연회에 연사로 나가 철원군 신서면 대광리에서 250여 명의 청중들에게 '불교의 시대성'이라는 제목으로 시국강연을 하였다.
▲ 식민지 인민이 황군이 되는 길
승려들에게도 지원병을 권유 1938년 2월 2일 조선인 병력자원화정책의 일환으로 총독부가 '육군특별 지원병제'를 실시하자 중추원 참의 최린*, 관동군 고문 한상룡*, 1급 친일파 박춘금* 등의 친일분자들이 앞 다투어 '내선일체 정신으로 보아서 경하할 일'이니, '조선인으로서의 진로에 일대 광명'이라고 환영하고 나서자, 불교전문학교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친일학승 권상로도 [승려 지원병에 대하야]({불교시보} 제57호, 1940. 4. 1, 1면)라는 글을 발표하여 이에 적극 호응하였다.
그는 이 글에서 "조선에는 징병제가 실시되지 않아 병역의무를 행하고 하는 자가 있으나 그 길을 얻지 못하야 장지(壯志)를 품고 차탄(嗟嘆:슬프게 한탄함)하는 자를 위하여 부득이 지원병 제도가 생기었다"는 해괴한 논리를 펴 그가 정녕 조선 승려인지 의아스러울 지경이었다.
조국을 강제로 빼앗고 탄압을 일삼는 일제의 침략전쟁에 나가 목숨을 바치려는 어떤 얼빠진 조선 사람이 있다고 감히 권상로는 이런 억지논리를 함부로 교계신문에 발표했을까? 자기 나라를 위한 애국전쟁에도 목숨이 아까워 몸을 도사리는 예가 없지 않은데, 남의 나라 남의 민족의 침략전쟁에 나가 개죽음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과연 있겠는가.
더구나 권상로는 전쟁을 금기시하는 불교승려로서 다음과 같은 발언이 사실이었을까 하는 의아스런 얘기를 부끄러움 없이 늘어놓았다.
금반 제3회의 모집에는 지원병수가 6만을 초과하게 되고 그 중에는 청년 승려로서 지원하는 자도 있어서 설봉산(雪峰山) 귀주사 (歸州寺 : 함경남도 함주군에 있는 31본사의 하나)를 필두로 하여 오대산 월정사와 내금강 장안사(長安寺)에서 모두 4, 5인씩의 지원자가 있다 하니 그 외의 다른 사찰에도 없지 아니한 듯하다.
혹자는 이에 대하여 불교자로서의 탈선적이 아닌가 하지마는 아니다. 이 역시 불교의 본령(本令) 중의 하나이다.……백제의 도침(道琛)대사는 국망(國亡)함을 분개하야 의병을 일으키어서 복국(復國)을 꾀하였고, 이조의 서산대사와 그 제자 사명(泗溟)대사의 여러 법형제(法兄第)는 판탕(板蕩)을 당하여 장검입공 (仗劍立功)하였고 벽엄(碧嚴)대사는 병자의 난에 항마군(降魔軍)을 조직하고……그 밖에도 남북한 (南北漢)에 치영 (緇營: 승군이 주둔하던 병영)을 두고 승군을 양성하던 것이 아직 어제인 듯하니 금일과 같은 초비상시국을 당하여 의용(義勇)이 있고 지개(志槪)가 있는 청년 승려로서 분연히 일어나서 지원병에 응모하는 것은 불교의 본령을 잊지 아니할 뿐 아니라 더욱이 조선불교의 고유한 색채를 실(失)치 아니한 자이다. ({불교시보} 제57호, 1940. 4. 1, 1면)
조선 승려가 일제의 침략전쟁에 나가 살인을 하는 것이 불교의 본령이라는 주장도 조선의 대표적인 학승의 말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노릇이지만, 임진왜란 시 사명대사가 왜군을 상대로 일으킨 의병을 예로 든 것은 실소를 금할 수 없다.
한때는 조국산하와 동족을 짓밟는 왜군에게 정의의 칼을 들고 항거한 조선 승려가 이제는 형세가 바뀌어 그들의 침략야욕을 위하여 총검을 들고 죄 없는 중국인들을 살상하는 만행에 동참해야 한다고 선두에 서서 부르짖은 권상로의 자가당착적인 행각은 참으로 가소로운 짓거리가 아닐 수 없다.
1940년 5월 25일 권상로는 김태흡*과 함께 양주(楊州)군청이 주최한 시국좌담회에 참여하였고, 10월 10일에는 왕십리 무학(舞鶴)학교에서 1500명의 청중에게 시국강연을 하였으며, 10월 12일에는 홍제정(弘濟町) 향상대(向上臺)에서 3000명의 군중에게, 이틀 뒤인 10월 14일에는 창의(彰義)학교에서 1600명에게, 그 다음 날(10. 15)은 돈암정(敦岩町) 광장에서 1400명에게, 16일에는 만세교 광장에서 1500명의 청중에게 시국인식과 불교에 대해 친일강연을 하였다.
또 그는 총독부의 어용신문 {매일신보}에 [응징성전(膺懲聖戰)과 불교]라는 친일 시사문을 발표하여 일제의 침략전쟁을 '성전'(聖戰)으로 미화하였다.({매일신보}, 1941. 9. 6∼9)
그는 이 글에서 "현하의 성전이 대동양주의에 완항(頑抗) 또는 불용명(不用命)하는 자를 응징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으며, 중일전쟁이 중국 국민당 세력이 너무 커지기 전에 화북과 내몽고를 될수록 많이 뜯어먹자는 목적에서 일본 군부가 일으킨 침략전쟁임에도 불구하고 권상로는 "성전이 토지 등 야욕에 있지 아니하고 은원(恩怨)이 없이 공존공영하자는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는 데 목적이 있다"는 왜곡을 서슴지 않고 있다.
그리고는 이어서 "반야지혜(般若智慧)----대원만 제일의(大圓滿第一義)----를 체득한 자에게는 삼계(三界) 일체 중생을 살해할지라도 이것으로 말미암아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인용하여 이것이 불교의 대승적 견해이며 근본적 교리라고 부연하여 중일전쟁에 지원한 조선 청년과 승려들이 일제(日帝)의 팽창야욕을 충족시키고자 무고한 중국인을 살해해도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폈다.
승려로서, 특히 조선의 대표적인 학승으로서 이렇듯 붓다의 정법(正法)을 일제의 가공할 전쟁과 살상의 명분으로 오용하였다는 것은 정녕 불보살(佛菩薩)과 진실한 불교도로부터 용서받을 수 없는 망동을 한 것이 아닐 수 없다.
▲ 아차산 영화사
국민총력조선연맹의 간부가 되다 중일전쟁이 장기화되고, 미일관계마저 틈이 벌어지자 종래의 전시체제를 한층 엄한 결전체제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일제는 종전의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해체하고 1940년 10월 16일 국민총력조선연맹을 재출발시켰다.
권상로는 이 총력연맹에 안토우(安東相老)라는 창씨명으로 임원인 참사가 되어 일제의 총력전시체제에서 황민화운동에 앞장을 섰다. 총력연맹의 간부가 된 권상로는 그 직책에 부응하기라도 하듯이 그의 친일행각이 한층 극렬해졌다.
1941년 2월 23일부터 6일간 전북도청 주최로 황도불교선양을 위한 도내승려강습회가 전주부 완산정 조선불교연합포교당에서 개최되었을 때 권상로는 총력연맹 참사(參事)와 혜화전문학교 강사의 직함으로 전북도내 각 본 말사 주지와 포교사 50여 명에게 '국민총력운동과 승려의 각오', '시국과 조선불교' 그리고 '불설선생경' (佛說善生經)을 강의하였다. 당시 그는 일본인이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학력이 없다는 이유로 교수에서 강사로 강등되었다.
총독부는 전쟁의 장기화와 확대에 따른 심각한 노동력 부족을 메우기 위해 근로동원과 보국을 결부시키는 정책을 채택하였다. 권상로는 이 방침에 호응해 정무총감 오노(大野綠一郞)의 논설 [국민생활 쇄신과 노력봉사]가 실린 {춘추} 1941년 11월호에서 박인덕*, 신흥우(申興雨), 이종린(李鐘麟), 최린*과 같이 '국민개로운동의 실천요항'을 논의하였다.
▲ 주요 친일명단 120명 중 34명 해방후 훈·포장·표창 서훈 왼쪽부터 김성수, 김활란, 백낙준. 이번 친일인사 1차 명단에 포함된 이들은 해방 이후 각종 명목으로 훈·포장이나 표창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민족문제연구소(이사장 조문기)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위원장 윤경로)는 29일 오전 서울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컨퍼런스홀에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명단' 3090명을 발표했다.
<오마이뉴스>가 이 명단에 나온 주요 인사 120여명의 상훈 내역을 조사한 결과, 훈·포장, 표창 수상자는 확인된 인원만 34명이다. 위암 장지연. '시일야방성대곡'을 지어 항일 언론인으로 추앙받다가 이번 친일파 명단에 포함된 장지연은 일제 당시 활동을 이유로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추서됐다. 민복기 전 대법원장. 경성지법 판사를 역임했던 그는 78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해방직후 반민특위로 압송돼 가는 경성방직 사장을 지난 김연수(앞). 뒤편은 3.1 독립선언에 천도교 신자로 참여한 최린. 이후 김연수(<동아일보> 창업자 김성수의 동생)에게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됐다.
친일인사들에게 수여된 명예는 훈장뿐이 아니다. 그들은 "조국광복을 지향하여 거족적으로 발양된 위대한 3.1정신을 영원히 기념"한다는 취지로 제정된 3.1문화상도 다수 수상했고, 죽어서는 국립묘지에 묻혔다. 대한유화 창업자 이정림씨가 60년 제정한 3.1문화상은 해마다 학술, 예술, 기술 등의 분야에 대해 시상한다. 이중 예술분야 수상자에 친일인사로 거론된 이들이 많은데 이번 1차명단에 포함된 인물만 12명. 그간 이병도·신석호·백낙준·고황경·유진오·유치진 등 친일인사들이 심사위원에 대거 들어있던 것과 관련 있어 보인다.
문학부문의 조연현·백철·모윤숙·최정희 등 4명, 미술분야의 이상범·김경승·김인승·김은호·김인승·박영선·김기창 등 7명, 음악분야의 김성태 등이 그들이다. 1차명단에 들어가진 않았지만 소설가 안수길과 아동문학가 이주홍도 친일논란이 있는 수상자이다. 국립묘지에 안장된 이들에도 친일 인사가 있다. 1차 명단에 오른 백낙준·조진만(국가유공자 묘역), 이종욱(애국지사 묘역), 이응준·이종찬·정일권(장군 묘역) 등이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
그밖에 이선근, 최창식, 김홍량 등 친일행적이 드러났거나 친일논란이 있는 인물까지 고려하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난다. 국립묘지는 아직도 친일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격렬하다 못해 광적인 권상로의 친일논설들
권상로의 친일논설은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매일신보}에 1편, {신불교}에 8편, {불교시보}에 3편 등 도합 12편이 있으며, 따로 19편의 친일논설을 엮은 {임전(臨戰)의 조선불교}라는 단행본이 있다.
이처럼 많은 그의 논설들을 지면의 제한을 받는 이 책에서 그 모두를 자세하게 소개할 수는 없고 그 내용과 어조가 격렬하고 아주 광적인 것만 간략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권상로는 태평양전쟁 발발(1941. 12. 8) 직후인 1942년 1월에 {신불교} 제32집(1942. 1. 1)에 [대동아전쟁과 대승불교]라는 글에서 전쟁의 상대국인 미국과 영국 등을 호되게 비판하고 있다.
그는 안토우(安東相老)라는 창씨명으로 발표한 이 글에서 "미·영의 동양에 대한 야욕은 품어온 지가 오랠 뿐만 아니라……침침한 눈과 음험한 심장은 동양 전부를 몰탄(沒呑)하려는 획책을 가지고 혹은 종교로 혹은 물질로 혹은 채권으로 혹은 무력으로" 동양을 호시탐탐 노려왔다고 매도하면서 "동양의 공영을 위하고 질서의 신건(新建)을 위하여 일억일심(一億日心)으로 최후의 일각까지 불굴불요 결사(決死)의 매진(邁進)"하자고 부르짖고 있다.
그는 8대 조선총독 고이소(小磯國昭)가 부임하자 재빨리 그의 총력전체제에 적극 호응하여 [전시(戰時)의 전책임을 맡으라] ({신불교} 제42집, 1942. 11. 1)고 외치고, 대동아전쟁 1주년에는 전쟁의 발발 시점과 석가모니의 성도일(成道日)을 결부시켜 다음처럼 진리를 왜곡·오도하기도 했다.
보라. 12월 8일, 곧 여래의 성도하시는 성절(聖節)에 성전(聖戰)의 대조(大詔:일왕 쇼와의 선전포고)가 내리시며 그 순간에 대동아의 마왕 파순(波旬)의 궁전인 미·영의 근거지가 함락되었으니 이 어찌 석존의 성도하시던 찰라에 항마(降魔)하심을 실현함이며 12월 25일 곧 크리스마스에 피(彼)의 사수하던 소남도(昭南島)가 함락되었으니 이 어찌 석존의 성도하신 후에 모든 외도의 마멸상(磨滅相)을 실현함이 아니랴.
이것은 절대 인위적으로 일부러 그리한 것이 아니요 자연적으로 그렇게 주합(湊合)된 것인즉, 이 수 점(數點)으로만 보아도 금번 대동아의 성전은 틀림없는 여래의 사명인 것이 분명하다. ({신불교} 제43집, 1942. 12. 1, 8면)
전쟁이 점차 장기화되자 일제는 조직적으로 조선의 각종 물적 자원을 수탈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금속류 회수'였다. 그래서 조선사찰에서 놋그릇, 촛대, 범종, 쇠종 등을 총독부에 헌납하였는데 경성 일대에서만 태고사, 안양사, 봉은사, 수종사(水鐘寺), 사자암(獅子庵) 등에서 범종을 떼어 일제에게 바쳤다.
권상로는 [불상(佛像)의 장행(壯行)]({신불교} 제48집, 1943. 5. 1)이라는 글에서 "대동아의 성전은 유유히 결전기(決戰期)에 임박하였다"고 서두를 뗀 뒤 조선에 진출한 진종(眞宗) 서본원사파의 3000여 신도들이 지성으로 모은 3000여 철제 불상을 헌납했다는 신문보도를 소개하고는 아주 절절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얼마나 감격하며 얼마나 황송하며 얼마나 장쾌하냐. 전승(戰勝)을 위하여 교주의 성상(聖像)까지 내어바친다는 것은 불교가 아니면 없을 것이요 일본이 아니면 없을 것이다. 체적(體積)이 분촌(分寸)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불상까지 출동하셨으니 듣기에 얼마나 감격하며, 중량이 치수(★銖: 아주 가벼운 무게)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불상까지 헌납이라니 보기에 얼마나 황송하며, 국가를 위하여서는 불상까지 응소(應召)하다니 참으로 비할 데 없이 장쾌한 바이다.
불교신도가 대다수인 일본이 오죽 다급하였으면 신앙의 경배대상인 불상까지 회수하여 무기를 만들었을까? 이런 처절하고 안타까운 정경에까지 감격하고 황송해 하고 장쾌하게 여긴 권상로의 친일심리는 광적이라는 표현 외에는 달리 적절한 어휘가 없을 듯하다.
1943년 8월 6일 권상로는 고양군 숭인면 경국사에서 징병제감사기도법요를 근행하고 '국민개병의 보은감사'라는 제목으로 친일강연을 하였다.
권상로는 일본의 패색이 짙어가는 1944년 9월에는 오히려 일제의 전시체제에 더욱 친일의식을 강화하여 결연한 어조로 '결전체제와 조선불교'에 대해서 이렇게 외쳤다. 시국은 날로 긴박하고 결전은 하루가 바쁘다.
기기(器機)로 경제로 사상으로 다방면에 긍(亘)하여 우리는 대사일번(大死一番)의 결심으로 대동아공영권을 실현하지 아니하면 결국은 제국(帝國)의 안위가 염려되는 터인즉 차시를 제(際)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정신이 통일되어야 할 것은 재언을 요할 필요까지도 없다.({신불교} 제64집, 1944. 9. 1, 6∼9면)
그는 이어서 재삼 "죽음으로써 나라에 갚는다는 마음을 철두철미하게 가질 것"을 강조하면서 "적 미·영을 타도하자"고 절규하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열된 그의 친일의식은 위의 글을 발표한 바로 다음 달에도 태평양전쟁을 위해 "용맹정신으로 가행하라, 황은보답이 정히 금일에 있다"고 열렬하게 부르짖었다.
또한 그는 조선"반도 2600만이 메이지 천황의 일시동인(一視同仁)으로 일본의 적자(赤子)가 된 지도 벌써 35년이 되었다"면서 "천황의 황은에 목욕하여 낙토안거"하였으니 "국가유사의 추(秋)를 당하여 진충보국하자"고 역설하고 있다. 권상로의 친일불교 가운데 하일라이트의 하나는 단행본으로 {임전(臨戰)의 조선불교}(만상회, 1943, 문고판, 91면)를 간행한 일일 것이다.
'성불은 전승(戰勝)이다', '계(戒)는 전투훈(戰鬪訓)이다' 등 친일로 윤색된 불교관이며 일본에의 충성을 역설하는 그의 이 책은 다른 친일논설과 함께 근년에 발간된 그의 방대한 유고집 {퇴경당전서}(退耕堂全書) 전10권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한마디 참회의 말과 단 한 번의 포살(참회의 불교식 용어) 행위라도 있었다면 한 인간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그 공과 잘못을 모두 기록하는 것이 전모를 파악하고 역사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후인들은, 특히 어떤 사람을 기리는 사람들은 그 사람의 일면, 흔히 장점이나 업적이라고 여겨지는 부분만을 집대성하는 경우가 우리 주위에는 너무나 많다.
필자는 후학의 한 사람으로서 퇴경당(권상로의 호)의 그 유려한 문장과 호한한 작품의 분량에는 존경을 보내지만 또한 그가 그 뛰어난 능력으로 일제에 적극 협력하여 생애의 많은 시간을 친일학승으로 탕진한 것을 안타깝게 여긴다.
더욱 아쉬운 것은 그가 일제시대의 친일행적에 대한 단 한 번의 포살 행위도 없이 후안무치하게 해방 후 불교대학의 최고위직에 앉은 점과 1962년에는 대통령으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 기우취적도(騎牛吹笛圖)와 고승탄금도(高僧彈琴圖) 불교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그는 젊은 시절에 불화를 그리기도 했다. 퇴경당은 〈자필연보(自筆年報)〉에 20살이 되던 1898년 김룡사의 書記를 그만두고 갑사 대자암(大慈庵)으로 가서 1년 동안 불화 수업을 받았다고 적었다. 당시 김룡사 일대는 하은 응상(霞隱應祥)과 동호 진철(東昊震徹)로 대표되는 사불산파가 활발히 활동하고 있어 퇴경당은 갑사 자은암에 가기 전부터 이들에게 불화를 배웠을 가능성이 높다. 화승(畵僧) 권상로의 면모는 1913년에 제작된 김룡사 대성암 아미타후불탱과 김룡사 삼장탱에서 찾을 수 있다. 화기(畵記)에 의하면, 이 불사에서 퇴경당은 '편수 퇴경상로'(片手退耕相老)라는 화사의 역할만이 아니라 김룡사 주실(籌室)인 동시에 감무(監務)를 맡아, 불화제작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퇴경당이 그린 기우취적도는 소를 타고 귀가하는 목동을 주제로 한 선묵화(禪墨畵)이다. 일반적으로 기우취적도는 소의 등에 앉은 목동이 피리나 대금을 불고, 소는 길을 따라 앞으로 걸어나오는 형식이다. 그러나 퇴경당은 소의 뒷모습과 소 등에 걸터앉아 대금을 부는 목동의 뒤 태를 비스듬히 비껴 그렸다.
오른쪽에는 이 그림과 짝을 이루는 보명대사의 시가 실려 있다.
'푸른 버드나무 그늘 옛 시냇가에/ 놓고 거둠 이제는 자연스러워/ 해 저무는 푸른 하늘, 향기로운 풀밭에서/ 목동은 돌아가네, 고삐도 없이'(普明禪師頌曰 綠楊陰下古溪邊 放去收來得自然 日暮碧雲芳草地 牧童歸去不須牽 退耕戱). 기우취적은 자연과 하나 된 목가적인 서정을 표현한 화제(畵題)로 일반회화에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퇴경당의 기우취적은 선의 궁극적인 이상과 깨달음을 형상화한 십우도(十牛圖)의 한 장면으로 해석된다. 즉 송대 곽암 사원(廓庵師遠)선사의 십우도 중 여섯 번째 이야기인 '기우귀가'(騎牛歸家)이다. 기우귀가는 소[진리]를 찾은 목동이 소와 하나되어-그림에서 소는 목동에게 길들여졌다는 의미로 흰 소로 표현된다-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이다.
'소 타고 한가로이 집으로 돌아가나니/ 피리 소리 소리 저녁 노을 보내고 / 一拍一歌 뜻 무한하니 /知音이면 하필 입을 열어 말하랴'(騎牛 麗欲還家 羌笛聲聲送晩霞 一拍一歌無限意 知音何必鼓唇牙) 기우귀가에 실린 게송은 진리를 찾은 목동의 한가로운 귀가길을 읊고 있다. 기우취적도 역시 고즈넉한 저녁 귀가길에 울려 퍼지는 젓대의 운율에 어울리게 소는 느긋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그가 진정한 승려, 참다운 구도자였다면 한국불교를 위해 광복 후에 은인자중하고 제불제조(諸佛諸祖)와 이 땅의 불자들에게 진실한 참회를 하였더라면 한국의 불교가 이토록 소란하고 황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 임혜봉 (불교사연구가)
퇴경(退耕) 권상로(權相老.1879.2.28∼1965.4.19) 1879(고종 16)∼1965. 승려이자 불교학자. 호는 퇴경(退耕). 경상북도 문경군 산북면 석봉리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찬영(贊泳)이다. 조선불교약사|조선불교사|삼국유강역강, 문경 대승사 주지|불교조계종원로회 원장|불교사상사 사장
불교학자ㆍ승려. 경북 문경 출생. 금룡사(金龍寺) 불교전문강원 수학. 명예철학박사(동국대.1962). 1908년 사립 경흥학교(慶興學校) 강사, 1921년 조선불교월보사 사장, 1931년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 1947년 동국대학 교수, 1953년 동국대학교 초대 총장 등 역임. 대통령문화훈장(1962) 수상.
불교학자ㆍ승려. 호 퇴경(退耕). 경북 예천(醴泉) 출생. 어려서 한학(漢學)을 배우고, 1896년(건양 1) 문경 금룡사(金龍寺)의 서진(瑞眞)을 스승으로 승려가 된 후, 금룡사 불교전문강원(佛敎專門講院)에서 불교학을 연구했고, 사집과(四集科)ㆍ사교과(四敎科)ㆍ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하였다. 그 후 경흥학교(慶興學校)ㆍ성의학교(聖義學校) 등 불교 계통의 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09년(융희 3) 불교 원종종무원(佛敎圓宗宗務院)의 찬집부장(纂輯部長)이 되고, 1911년 [조선불교월보(朝鮮佛敎月報)] 사장으로 1년간 재임하였다.
1918년부터 수년간 다시 교편생활을 하다가 1923년 불교사(佛敎社)의 사장에 취임했고, 1944년 불교총본산 교학편수위원(佛敎總本山敎學編修委員)이 되고, 광복 후 동국대학(東國大學)의 교수ㆍ학장을 거쳐, 1952년에는 동국대학 초대 총장이 되었다. 1962년 동국대학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이 해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았으며, 이를 전후하여 국사편찬위원ㆍ중앙불교연구원장ㆍ대한불교조계종 원로원장(佛敎曹溪宗元老院長), 현대불교ㆍ불교사상(佛敎思想) 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죽은 후 대종사(大宗師)의 법계(法階)에 올랐다.
7세부터 서당에서 10년간 한학을 배웠으며, 1896년 4월에 문경 김룡사(金龍寺)에서 서진(瑞眞)을 은사로 삼아 중이 되었다. 그 뒤 10년 동안 김룡사 불교전문강원에서 불교학을 연구하여 사집과(四集科)· 사교과(四敎科)· 대교과(大敎科)를 이수하였으며, 1903년 5월에 김룡사에서 선사 영안(永安)의 인가를 받고 강석(講席)을 열었다.
1906년 4월부터 김룡사 경흥학교(慶興學校)와 성의학교(聖義學校)의 강사를 역임하다가 1909년 12월에 원종(圓宗)의 종무편집부장으로 활동하였고, 1911년 12월부터 1년간 문경 대승사(大乘寺)의 주지로 있었다.
1912년에 조선불교월보사 사장으로 취임하여 《불교월보》를 6년 동안 발행하다가, 1918년부터 1922년까지 김룡사 지방학림과 상주보광학교의 강사를 역임하였다. 1923년부터 1931년까지 다시 불교사 사장으로 취임하여 《불교》지를 발간하였으며, 1931년부터 1944년까지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1944년 4월부터 1946년 8월까지는 불교총본산인 태고사(太古寺)의 교학편수위원(敎學編修委員)을 역임하였고, 1946년 4월 동국대학 교수로, 같은해 6월에는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1953년 2월에 동국대학이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자 초대총장직을 맡았으며, 그해 7월에 정년퇴임과 동시에 명예교수가 되었다. 1962년에는 동국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해 대한민국문화훈장을 받았다. 죽은 뒤 조계종에서는 대종사(大宗師)의 법계를 주었다.
일생을 한국불교학의 정립과 불교사상 발굴선양에 전념하면서 교육계·언론계 등 여러 분야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 역임하였던 명예직으로는 한국박사학위논문심사위원, 국어심의회 위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불교포교사시험 검정위원, 불교법계고시위원회 위원장, 불교법규 위원, 불교성전 편찬위원, 문교부국정교과서 교사위원(校査委員), 대한고서간행회 국역위원, 대한종교신도연맹 고문, 신라가야문화연구소 위원, 우리말팔만대장경편수위원회 위원장, 중앙불교연구원 원장,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불교조계종원로회 원장, 현대불교사 사장, 불교사상사 사장 등이다.
저술은 편저 및 번역서를 합해서 31종에 달한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조선불교약사 朝鮮佛敎略史》와 《조선불교사》·《삼국유사역강 三國遺事譯講》을 들 수 있으며, 사료를 집대성하여 편찬한 《고려사불교초존 高麗史佛敎鈔存》·《이조실록불교초존 李朝實錄佛敎鈔存》·《한국불교사료 韓國佛敎史料》·《한국사찰전서 韓國寺刹全書》·《한국지명연혁고 韓國地名沿革考》 등은 현재 후학들의 연구에 중요한 지침서가 되고 있다. 대표적인 논문으로는 〈능엄요초 楞嚴要抄〉·〈팔관회참고 八關會參考〉·〈자학관규 字學管窺〉 등 총 18편에 이른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 참고문헌 {朝鮮佛敎月報} {佛敎時報} 權相老, {臨戰의 朝鮮佛敎}, 卍商會, 1943. {退耕堂全書} 韓國佛敎史料(權相老, 寶蓮閣, 1979). 〈李鍾益〉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02g3200a 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9482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MIhw&articleno=8626304 『한국불교사료』(권상로, 보련각, 1979) 『친일파 99인』(반민족문제연구소, 1993) http://www.shinjongwoo.co.kr/name/ga/gweon/dksehd/dks219.html 반민족문제연구소 (1995) 〈권상로 : 불교계 최고의 친일학승 (임혜봉)〉, 《친일파 99인 (3)》. 서울: 돌베개. 임혜봉 (2005). 〈권상로 : 승려들에게 지원병 입대를 권유한 학승〉, 《친일 승려 108인》. 서울: 청년사. 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mulim1672&folder=12&list_id=8146876&page=9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inist9&logNo=10059841016 http://blog.daum.net/sinnange/5198085 http://blog.daum.net/wdlyc/6430942 http://blog.daum.net/kimcs5/1023 http://blog.daum.net/k3392101/2226 http://cafe.sayclub.com/cb_board.nwz?tbtype=&act=read&clubsrl=22290&bsrl=5&page=2&aseq=196909211 다시쓰는 근현대 불교사 1 http://blog.daum.net/ideology/16198116
권상로의 심원사·표충사 편액
철원 심원사 명 주 전…예서체 필획 진중한 글씨
밀양 표충사 고 령 정…꾸밈없어 보는 눈 편해
김룡사(金龍寺) 불교전문강원을 마치고, 원종(圓宗) 종무편집부장, 문경 대승사(大乘寺) 주지, 조선불교월보사 사장, 불교사 사장,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 불교조계종원로회 원장, 동국대학교 초대총장 등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퇴경은 일생을 한국불교학의 정립과 불교사상의 선양에 전념하였던 근대의 고승이며, 조선불교사 등 30여종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책을 펴낸 위대한 불교학자였다.
퇴경은 7세부터 10여 년 간 서당에서 한학을 배워 서법에 구애받지 않고 각 체에 능했으며, 학자다운 고박(古朴)한 글씨를 썼다. 현재 사찰에 남아 있는 편액으로는 서울 화계사 <삼각산제일선원>, 철원 심원사 <명주전>, 밀양 표충사 <예제문>, <고령정>, 문경 대승사 <사불산대승사>, 영주 희방사 <희방사> 등이 대표적이다.
철원 심원사 <명주전> 편액에는 ‘임인자자일 팔십사세 사문 퇴경 상로(壬寅自恣日 八十四歲 沙門 退耕 相老)’라는 관지와 ‘퇴경 권상로인(退耕, 權相老印)’이라는 방인 2과가 있다. 명주전은 명부전, 지장전, 시왕전의 이칭으로 지장보살이 명주(明珠)를 들고 있기 때문에 붙인 전각의 명칭이다. 이 편액은 1962년 자자일, 즉 하안거가 끝나는 마지막 날인 7월 보름에 쓴 것이다. 편액의 글씨는 질박(質朴)한 필획의 예서로 진중(鎭重)한 서미(書味)를 지녔다.
밀양 표충사 <고령정> 편액은 변죽 없는 통판에 음양각으로 글씨를 새긴 것으로, 액판 좌측에 ‘퇴경(退耕)’이라는 관지만 있다. 이 편액은 현재 박물관 내에 전시되어 있는데, 1839년(헌종 5)에 시작된 표충사의 이전과 관련된 편액으로, 표충사가 옛 영정사(靈井寺) 터로 옮겨온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편액의 글씨는 꾸미지 않은 고박(古朴)함에 의연한 문기(文氣)가 어려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글씨이다. 안병인<대한불교진흥원>
‘만해의 후예’들이 꼭 알아야 할 친일승려 권상로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
3월 초 한승조 망언을 계기로 고려대를 비롯해 연세대 이화여대 서울대 중앙대 등에서 설립자 또는 총장 등 학내 친일인사 명단을 발표하면서 여론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비단 대학 내의 친일문제가 위에서 언급한 대학들만의 문제는 아닐 텐데 아직 이 대학들의 뒤를 잇는 대학들이 없어 아쉽다.
성신여대 이숙종, 상명대 배상명, 서울여대 고황경, 덕성여대 송금선, 추계예대 황신덕, 서울예대 유치진, 인덕대 박인덕, 동덕여대 조동식, 성균관대 이선근 등에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왜 아직 언급이 없을까.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대학은 입으로는 ‘진리’ ‘자유’ ‘정의’를 외치지만 정작 친일문제에 대해서는 ‘진리’ ‘자유’ ‘정의’ 따윈 통하지 않는 공간인 모양이다.
한편 교육자인 동시에 불교 승려이면서도 교육자로서의 지조는 물론 종교인으로서의 신념마저 팽개친 대표적인 친일 승려로 해방 후 동국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낸 권상로(權相老 창씨명 ‘안도우 소로’ 1879-1965)에 대해서 불교신도들에게 소개하면서 이 시대의 화두인 역사 청산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자.
1896년 그의 나이 18세에 출가한 권상로는 1909년 불교 관련 잡지 <원종(圓宗)> 찬집부장(오늘 날의 편집부장)을 시작으로 1912년 <조선불교월보> 발행인, 1924년 '조선불교중앙교무원' 기관지인 <불교> 발행인 등으로 활동하면서 당대 불교계 최고의 문필가이자 언론인으로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불교계의 육당과 춘원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조선의 ‘3대 천재’라는 추앙을 받았던 육당과 춘원이 친일의 길을 걸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권상로 역시 결국 친일 승려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최남선 이광수와 권상로의 차이점이라면 최남선 이광수가 식민지 초기는 일정하게나마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후에 친일로 변절했다고 한다면 권상로는 어떠한 저항도 없이 친일로 초지일관했다는 것이다.
1911년 7월 일제는 사찰령을 제정하여 조선의 불교계를 완전히 장악하고 나선다. 사찰령의 주요 내용을 보면 사찰의 병합·이전·폐사는 물론 명칭 변경까지도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하며 불교 내부의 규율에 대해서도 일일이 총독부의 허가를 받도록 해 사찰의 자주권을 말살하였고 더욱이 사찰의 재산권마저도 통제하여 그야말로 총독부가 불교계의 목줄을 한손에 거머쥐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권상로는 이듬해인 1912년 2월 <조선불교월보>를 창간하면서 창간호에 한일합방조약을 일러 ‘일본 천황의 성덕’이라 하고, 사찰령 반포를 ‘총독의 밝은 정치’라고 쓴 친일 승려 최취허의 글을 게재하면서 잡지의 성격은 물론 자신의 속내도 여실히 드러내었다.
1925년에는 남산에 조성한 조신신궁 진좌대제에 참석했고, 같은 해 10월에는 도쿄에서 열린 대동아불교대회에 조선 불교 대표로 참석하였다. 권상로는 대부분의 친일파들과 마찬가지로 1937년 중일전쟁 발발이후 더욱 노골적인 친일활동을 전개한다. 즉 그동안 문필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친일에서 이제는 거리로 나아가 직접 일제의 침략 정책을 선전하기에 이른다.
1937년 8월 경성 부민관에서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주최로 열린 시국 강연에서 그는 “선각자로서”라는 제목으로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할 것을 역설한데 이어 총독부 시국 강연반의 불교 측 연사로 지방 순회를 다니게 된다. 즉 ‘문필에서 연설로’ ‘지역에서 전국으로’ 그의 친일 활동은 점입가경의 국면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던 것이다.
급기야 1940년에는 승려들에게까지 일본군에 지원할 것을 권유하여 미물이라도 살생을 피해야 한다는 불교계의 계율을 여지없이 깨뜨리기도 하였다. 이는 곧 우상 숭배를 금하는 기독교의 제1의 계율을 어기면 신사참배를 감행한 친일 목사에 비유할 수 있는 행위일 것이다.
권상로의 친일은 어찌 보면 총독부의 주도면밀한 식민지 지배정책이 낳은 전형적인 결과물이다. 즉 총독부는 1911년 사찰령과 강경책을 펴면서도 주요 승려들에게는 파격적인 후원과 배려를 베푸는 유화책을 적절히 사용하였다. 즉 채찍과 함께 당근도 필요에 따라 제공했던 것이다.
그 예로 1917년 8월 31일부터 9월 24일까지 당시 <조선불교총보> 기자였던 권상로는 총독부가 후원한 일본 불교 시찰단 10명이 소속되어 당시 일본 총리대신은 물론 천황 다이쇼(大正)까지 ‘배알’하는 파격적인 대접을 받고 돌아온다. 이때의 경험을 그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37회에 걸쳐 연재하기도 하였는데 아마도 이것이 그의 친일행적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권상로가 문필가에서 교육자로 전환하는 시기는 <불교> 사장에서 물러난 직후인 1931년 6월 '중앙불교전문학교'(지금의 동국대학교) 강사로 채용되면서 부터이다. 그는 교육계로 자리를 옮겨서도 여전히 친일을 멈추지 않았는데, 그 대표적인 활동이 총독부의 '심전개발운동'에 대한 호응이었다. ‘심전개발운동’이란 1935년 6대 총독 우가키가 추진한 이 운동은 심전(心田) 즉 조선인의 ‘마음의 밭’을 개발하여 일본인의 정책에 순응하도록 한다는 운동이었다.
‘심전개발운동’은 조선인이 일본의 식민지통치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하면서 설령 일본의 억압과 착취에 적극적으로 반항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이는 “미개한 조선인의 불평불만”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심전개발운동'은 식민통치의 부당함에 대한 인식 자체를 억제하자는 것이었다. 이 때 권상로는 단행본 <심전과 신앙>을 발간하여 열성적으로 이에 대해서 선전하는데 앞장섰다.
해방 후인 1946년 4월 권상로는 동국대학 교수로 다시 등장하여 1952년 6월 학장, 1953년 2월 종합대학으로 승격된 동국대학교의 초대 총장에 취임하였고 퇴임 후인 1962년 4월에는 동국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고 그 해 8월에는 문화훈장을 받았다. 전국적으로 대학가를 중심으로 굴욕적 한일협정 반대 운동이 한창이던 1965년 4월 권상로는 87세의 나이로 운명하기까지 그는 자신의 친일에 대해 한마디 반성과 사죄를 한 바가 없다.
일제시대 조선의 지식인들의 경우 일반적으로 초기에는 민족적 의분으로 한때나마 항일운동에 가담한 전력이 대부분인데 반해 권상로는 어떠한 저항의 흔적도 없이 총독부의 식민지 지배정책 시나리오대로 ‘만들어진’ 친일승려이다.
조선불교 중앙교무원 기관지 <불교>의 초대 발행인으로 1924년 7월 취임해 1931년 5월까지 활동한 권상로의 후임이 바로 만해 한용운이었다는 아이러니한 사실은 접어두더라도, 혹시나 대부분의 동국대 학생들은 그를 한국전쟁 와중에서도 동국대학교를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킨 공로자로 기억하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이 앞선다.
만해 한용운의 항일민족정신을 자랑으로 삼으며 오늘도 동국대학 안에 ‘만해 광장’을 지나는 많은 동국대 학생들과 수 많은 이 땅의 불교신도들이 영욕의 교육자이자 불교 승려인 권상로의 친일에 대해서도 곱씹어 보는 계기가 마련되길 기대해 본다.
|
'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 > 국민의 의무는 재미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황국신민의 서사 입안한 김대우(金大羽, 1900∼1976) (0) | 2013.12.03 |
---|---|
신사참배 앞장 선 친일 거물 목사, 김길창 (金吉昌) (0) | 2013.12.03 |
1910년대 불교계의 친일 단체 (0) | 2013.12.02 |
친일불교인사 선정 논란 (0) | 2013.12.02 |
교육부, 한국사교과서 7종에 41건 수정명령, 교학사·금성 8건씩으로 최다 (0) | 2013.1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