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기 서울역사박물관 대학원 시전(市廛)에서 광장시장까지 - 서울 사람들의 삶과 함께 한 서울 시장의 역사 -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제3기 서울역사박물관 대학원 “서울의 시장 - 시전(市廛)에서 광장시장까지”를 개최합니다. 이번 교육은 종로 시전(市廛), 칠패시장과 광장시장, 남대문시장 등 조선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서울 사람들의 생활과 함께 해온 전통시장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프로그램입니다. 서울 사람들의 생활과 밀접한 동대문, 청량리, 청계천시장 등 대표적인 서울 시장의 형성 과정과 특징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 교육 진행 - 교육기간 : 2013. 10. 22 ~ 12. 3 매주 화요일 19:00~21:00 (총 7회) - 교육주제 : 서울 사람들과 함께 한 서울 시장의 역사 - 교육장소 : 서울역사박물관 제1학습실 ※ 위 과정을 마치시면 이수증을 발급해 드립니다.(총 7회 중 6회 이상 출석) 순서 | 교육 주제 | 교육 일시 | 강 연 자 | 1 | 서울 시장의 역사 Ⅰ | 10. 22 | 전우용 (한양대 교수) | 2 | 서울 시장의 역사 Ⅱ | 10. 29 | 3 | 청계천과 세운상가 Ⅰ - 형성 배경과 역사 - | 11. 5 | 강우원 (세종사이버대 교수) | 4 | 청계천과 세운상가 Ⅱ - 현황과 미래 - | 11. 12 | 5 | 서울 도심부 시장 Ⅰ - 동대문, 광장, 방상, 중부시장 - | 11. 19 | 김용창 (서울대학교 교수) | 6 | 서울 도심부 시장 Ⅱ - 남대문시장 - | 11. 26 | 7 | 청량리, 경동시장 | 12. 3 | 남기범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
□ 문의처 : 교육대외협력과 02) 724 - 0280
동대문 터줏대감
동대문시장이라고 하면 전에는 광장시장이 있는 종로 4~5가를 이르는 말이었지만 이제는 흥인시장과 동대문 종합시장, 두타 등 대형 쇼핑몰이 들어선 동대문운동장 터 앞 광장까지를 통틀어 의미한다. 그 가운데 1970년생인 동대문 종합시장은 동대문시장과 40여 년 동안 희로애락을 함께한 터줏대감이다. 동대문 종합시장은 의류 재료인 원단부터 의류 부자재, 액세서리 등과 일부 혼수용품을 파는 대규모 전문 시장이다. 국내 시장에서 거래되는 원단의 80%가 이곳을 거쳐간다.
처음 동대문 종합시장이 문을 연 당시에는 9917.4제곱미터 규모의 5~7층짜리 건물 세 동에 빼곡하게 들어간 5000여 개의 상점과 또 그곳에서 일하는 5만여 명이 그 자체로 구경거리였다. 근래 들어 동대문 주변 지역엔 고층 쇼핑몰이 앞다투어 새롭게 생겨났지만 동대문 종합시장엔 아직도 여전히 옛 정서, 옛 풍경 간직한 채 사람 냄새 나는 시장의 모습이 남아 있다.
핸드메이드 천국으로 거듭나다
동대문시장의 터줏대감이었던 동대문 종합시장도 청계천 복원을 계기로 변신을 맞았다. 이전까지만 해도 주로 상인과 디자이너들이 이용하는 전문 시장이라는 이미지가 다소 강했는데 청계천이 복원되고 난 후 일반 소비자들이 발걸음이 좀 더 잦아지면서 새로운 아이템이 절실해진 것이다. 그 일환으로 구슬, 크리스털 등 액세서리 전문 매장이 전략적으로 늘어났다. 특히 동대문 종합시장 5층은 핸드메이드 천국으로 통한다. 로맨틱한 비즈 액세서리, 사랑스러운 퀼트, 각종 코르사주, 수제 인형 등 손으로 만든 모든 것이 모여 있다. 핸드메이드 제품이 큰 인기를 모으면서 일반 소비자들도 많이 찾는다. 쇼핑뿐 아니라 비즈, 퀼트는 간단한 작품을 가르치는 수강 코스까지 갖추고 있으니 관심 있는 사람들은 들러볼 만하다.
100년 역사를 품은 곳
광장시장이 서울의 중심에 자리한 시간은 100년이다. 1905년 일제의 침략으로 잃은 국권을 회복하자는 취지로 광장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시장의 역사가 시작됐다. 시장 개설은 1905년 7월 5일 한성부의 시장 개설 허가로 법원의 등기를 마치면서다.
이전까지는 1일장, 격일장, 3일장, 5일장 등 여러 가지 시장 개장 방식이 있었는데 광장시장은 이를 상설화시켰다. 시장 개척에 선구자격인 효시 역할을 한 것이다. 곡물상이나 어물전이 중심이 되었고 토지나 매매업도 성행했다. 그 후 한국전쟁 때 파괴되었다가 피난민들이 생활필수품과 군수품을 거래하면서 다시 시장의 기능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광장시장은 1962년 동대문시장과 광장시장으로 갈라지면서 현대식 건물이 들어섰다. 광장시장이 빈티지 패션의 중심이 된 시초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광장시장은 한복이나 침구 같은 혼수품이 주를 이루고 있다. 대형 쇼핑몰이 자리 잡고 있는 동대문시장은 이제 전국 젊은이들의 쇼핑천국으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수입구제상가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아직도 성업을 이룬다. 연예인이나 코디네이터들도 종종 찾는다. 다른 어디에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아이템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주요 고객도 초기 마니아 성향을 가진 젊은층이 대부분이었으나 최근에는 로드숍과 온라인숍 등 빈티지 시장이 확대되고 세분화되면서 점차 대중적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값이 저렴한 벼룩시장과 저가에 방대한 물량을 보유한 구제시장이 있어 도매상인들뿐만 아니라 직접 빈티지를 구입하려는 고객들이 자주 찾는다.
도시에서 만나는 짭조름한 바다의 맛
동대문시장과 남대문시장 사이, 그리고 을지로 방산시장과는 얼굴을 마주하는 오장동 중부시장. 발 편한 신발 한 켤레면 온 종일 시장들을 돌며 세상 구경, 사람 구경 실컷 할 수 있는 요지에 자리 잡고 있다. 오장동 중부시장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예관동, 을지로에 걸쳐 있을 만큼 그 규모가 크며, 1만 6327제곱미터의 대지에 900여 개의 점포가 오밀조밀 모여 있다.
대부분의 점포는 건어물 전문 시장답게 멸치, 오징어, 노가리, 미역, 김, 굴비, 건채 등 바다에서 나는 것들을 주로 다루며, 그 외에 한과, 견과류, 제수를 다루는 곳도 꽤 있다. 대부분 시중보다 20~30% 저렴하다. 마트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건어물 외에도 근해, 주변 국가에서 잡히는 다양한 어류를 취급하므로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한 곳이다.
중부시장은 새벽 3~4시에 문을 열어 정오까지는 상인들을 상대로 도매하고 오후에는 일반인에게 소매한다. 오후 6시 정도면 대부분 문을 닫기 때문에 여유 있게 돌아보고 싶다면 세 시간 정도 넉넉히 잡고 방문하는 것이 좋다.
가장 오래된 재래시장
요즘에는 주차난과 백화점, 대형 쇼핑센터의 등장으로 찾는 사람이 줄었지만 남대문시장은 하루 50만 명이 찾는 거대한 유통 공간이다. 명절 때만 되면 방송사에서 중계차를 대놓고 명절 분위기를 전하던 단골 시장으로 우리나라 최고, 최대 재래시장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남대문시장은 조선 태종 14년(1414) 새 도읍지인 서울의 남대문 근처에 가게를 지어 상인들에게 빌려준 것이 시초였다. 조선 중기에 들면서 저잣거리로 자리 잡은 남대문시장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독점으로 운영했던 역사도 지니고 있다. 광복 후 상인연합회에서 관리를 해오다 1964년 10월에 이르러 건물주ㆍ땅주인 ㆍ상인들이 공동 출자한 주식회사 형태로 바뀌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역사가 오래된 만큼 그 규모도 대단해 대지 7만2600제곱미터(약 2만2000평), 건평 22만4400제곱미터(약 6만8000평)이다. 취급품도 건축 자재와 가구류를 제외한 의류·식품·청과·잡화 등 모든 업종이 총망라되어 있다. 작은 점포들이 모여 형성된 남대문시장이 오늘날처럼 커질 수 있었던 비결은 점포는 작지만 상품을 직접 만들어 판매하는 독립된 시스템으로 생산자와 소비자가 바로 연결되는 유통 구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남대문시장에서 거래되는 대부분의 제품들은 상인들이 직접 제조·생산하여 판매한다. 매일 밤이면 전국의 상인들이 남대문에 모여든다. 불이 꺼지지 않는 남대문의 밤은 전국 도소매 상인들의 기운에 새벽까지 활기가 넘쳐난다. 아침이 되면 한국적인 재래시장의 매력을 경험해보려는 외국인 관광객들로 다시 생기를 찾는다. 더욱 다양하고 알뜰하게 쇼핑하기 위해 찾는 한국인들과 한국인의 정서를 느껴보고 싶어 찾는 외국인들이 어울리는 곳. 그곳이 바로 남대문시장이다
국내 최대의 한약 재래 시장
지하철 1호선 제기역에 내리면 한약 달이는 냄새와 약초 냄새가 진하게 코끝을 자극한다. 국내 최대의 한의약 종합 단지인 서울약령시장이 있기 때문이다. 수삼, 미삼, 약대추, 황기 등 전국의 약재란 약재는 모두 이곳에 모인다. 총기를 더한다는 총명탕에서 빈혈에 좋은 사물탕, 원기 회복을 위한 녹용 등 가족 건강을 생각한 주부들의 발길이 유난히 잦은 이곳은 한의원, 한약 도매상, 탕제원 등 한약 관련 점포만 800여 개가 넘는다. 서울악령시장의 뿌리는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약재를 취급하는 상인들이 전국 각지에서 청량리역을 이용해 모여들기 시작하며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그리하여 자연스레 시장이 형성되었고 지금은 명실상부한 한국 최고의 한약 재래 시장으로 성장했다. 1995년 6월에는 서울시에서 '경동약령시'로 승인받았다. 거래되는 한약제만도 전국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데 특히 유통 단계를 줄여 시중 가격보다 30% 정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한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서울의 재래시장 전국 원단 80%는 동대문시장, 안경 50%는 남대문시장 거쳐가요 시장이라는 말은 우리말로는 ‘저자’라고 합니다. 백제 때 가요인 정읍사(井邑詞)에 ‘져재 녀러신고요’라는 표현을 기억하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시장에 가 계십니까’라는 뜻이지요. 서울에 시장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조선시대입니다. 태종 때 처음으로 시전(市廛)이 종로거리와 남대문로에 자리했습니다. 일명 ‘운종가(雲從街)’로 불리던 시장이지요. 17세기 후반부터 남대문과 동대문 일대에 칠패시장과 이현시장이 생겨나고, 서울 외곽 지역에서도 경강·송파·누원 시장이 생겨났습니다.
개항 이후 서울의 재래시장은 외국인에게 개방되며 청(淸)과 일본의 상인에 의해 입지를 많이 잃었습니다. 이 시기에 칠패시장이 남대문시장으로 재편되었고, 이현시장은 동대문시장으로 바뀌었죠. 이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남대문·동대문 시장이 1호 시장이 되었고 2, 3, 4호 시장이 생겨났습니다. 해방 후에는 분단과 전쟁의 와중에서 부침을 많이 겪었습니다. 당시 남대문·동대문·자유시장 등 30여 개의 재래시장이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다 1960년대 이후 서울의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61년 44개였던 서울의 시장은 79년 334개로 늘어났습니다. 다시 재래시장이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80년 이후 대형 할인점과 수퍼마켓, 편의점 등이 등장하면서 재래시장은 경쟁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서울시는 2002년부터 재래시장 활성화를 위해 아케이드를 설치하거나 주차장을 조성해 주는 ‘시설 현대화 사업’을 진행 중입니다. 2004년부터는 ‘재래시장특별법’을 통해 정부가 재래시장 살리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현재(2011년 8월 31일 기준) 서울시 재래시장은 326개(등록 158개, 인정 85개, 상점가 36개, 무등록 47개)이고, 시장에 종사하는 상인은 12만 4000여 명에 이릅니다.
남대문시장 1414년에 생긴 가장 오래된 시장 남대문시장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시장입니다. 조선 태종 14년(1414년) 새 도읍지인 서울의 남대문 근처에 상점가를 만들어 상인들에게 빌려주면서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조선 중기 이후 저잣거리로 자리 잡았고,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독점으로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63년에는 서울시에서 당시 법에 의해 ‘개설허가 취소 공고’를 발표해 350여 개 점포가 폐쇄 위기에 놓이기도 했습니다. 시장 상인과 시민들의 반대로 위기를 극복한 남대문시장은 1970~80년대에 부흥기를 맞이했습니다. 수입품을 취급하는 ‘도깨비 시장’이 유명했지요. 인천·부산 등에서 올라온 수입품들이 집결되는 C·E동 지하에는 “없는 것이 없다”는 이야기가 있었을 정도입니다.
역사가 오래된 만큼 규모도 큽니다. 대지 7만 2600㎡에 건물 규모도 22만 4400㎡에 이릅니다. 해운대 백사장 전체(7만 2000㎡)보다 큰 셈이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시장 내 점포 수만 해도 1만여 개를 넘고 판매 물품도 이쑤시개부터 의류·액세서리·사무용품 등 모든 물품을 총망라합니다.
낮에는 한국 재래시장의 매력을 경험해 보기 위해 외국인 관광객들이 찾고 밤에는 전국에서 도·소매상인들이 찾아 불야성을 이룹니다. 시장 안에 그릇 도매상가와 군수품·유명 브랜드 청바지를 판매하는 ‘양키골목’, 가방 전문 상가인 자유상가, 혼수상가, 전국 유통량의 50%를 차지하는 안경 상가, 문구용품 상가, 등산용품 상가 등이 있습니다. 맛집도 빠질 수 없습니다. 남대문시장에서 유명한 메뉴는 갈치조림과 쫄깃하며 부드러운 족발, 꼬리곰탕과 닭곰탕입니다. 재래시장에서만 볼 수 있는 길거리 음식 판매점이 모여 밤이 되면 야시장을 이루기도 합니다.
동대문시장 한때 재산세 납부 1위 의류 전문 시장 동대문 시장은 종로5가의 동대문시장과 종로6가의 동대문종합시장·동대문쇼핑타운을 총칭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종로4가 인근에 배나무가 많아 ‘배오개장’이라고 불렸습니다. 당시 종루 앞과 남대문 밖 칠패시장과 함께 서울의 3대 시장으로 이름을 떨쳤지요. 예전에는 동대문시장과 광장시장이 하나의 상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1970년 동대문종합시장이 문을 열면서 자연스럽게 예지동의 전통시장이 광장시장, 종로5가 시장이 동대문시장으로, 종로6가의 시장이 동대문종합시장으로 구별되게 되었지요.
동대문시장이 얼마나 번영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75년 동대문종합시장은 1분기 재산세 3327만원을 납부해 서울시 전체에서 재산세 납부 1위를 차지했었습니다. 방리방적과 흥국생명이 그 뒤를 이었지요. 80년대에 동대문시장은 전국 최대 규모의 의류 도소매시장으로 커졌고, 의류수출까지 하면서 의류 전문 시장으로 입지를 굳혔습니다. 90년대에는 ‘밤 12시 새벽장’ 시대를 열고 남대문시장과 치열한 주도권 싸움을 벌이기도 했지요. 현재 동대문시장에는 대형 패션몰은 물론이고 원단, 의류 부자재, 혼수용품 등의 도소매 시장이 밀집해 있습니다. 상인들에 따르면 국내에서 거래되는 원단의 80%는 동대문시장을 거쳐 간다고 합니다.
광장시장 먹거리 가득한 국내 첫 상설시장 광장시장은 1900년대 초 종로 일대의 상권을 일본인들이 장악한 뒤 상권을 되찾기 위해 설립한 시장으로 1905년 설립돼 올해로 106년째를 맞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상설시장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재래시장의 깊은 맛이 있는 곳입니다. 청계천의 ‘광교’와 ‘장교’ 사이에 위치해 광장시장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의류 원단으로 유명했지만 지금은 의류 상권이 많이 위축됐고요. 예단과 한복 시장이 명맥을 잇고 있습니다.
광장시장은 젊은이들이 흔히 ‘빈티지’라고 부르는 멋스러운 수입 제품을 구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주로 작은 골목길의 건물 2, 3층에 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가게 규모는 크지 않지만 100여 개의 점포가 입점해 있습니다.
광장시장 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먹거리입니다. 시장 한가운데 줄지어 선 노점에는 시골 장터에서나 볼 수 있는 음식부터 지역 특색을 물씬 풍기는 음식까지 다양합니다. 가격이 저렴하고 양도 많아 대학생부터 인근 직장인, 막걸리를 한잔 하러 오시는 어르신까지 다양한 시민이 찾습니다. 빈대떡은 북2문 쪽이, 족발이나 순대는 남1문 쪽이 맛있다고 합니다. 육회도 빼놓을 수 없지요. 서문 근처에는 명물 ‘마약 김밥’이 있습니다.
평화시장 실향민이 일궈 … 전태일 분신의 현장 평화시장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 온 실향민들이 1954년부터 청계천 일대에서 옷을 만들어 팔며 생겨난 무허가 시장이었습니다. 당시 상인의 60%가량은 북에서 내려온 실향민으로 ‘평화’란 이름에는 실향민의 염원이 들어가 있습니다. 한때 청계천 복개공사로 철거 위협에 놓였으나 62년 건물을 새로 짓고 허가를 받으며 본격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평화시장은 봉제공장들이 들어서 직접 의류를 생산하면서 경쟁력을 높일 수 있었습니다. 70년대에는 평화시장 일대에서 생산된 기성복이 전국 기성복의 70%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평화시장은 전태일 열사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봉제공장에서 혹사당하던 어린 ‘시다’들을 위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외침과 함께 분신했던 현장입니다. 전태일은 2005년 9월 평화시장 앞 청계천 버들다리에 흉상으로 세워졌습니다.
서울 중앙시장 한때 서울시민 양곡 80% 거래 지하철 신당역 앞 황학동 일대의 서울 중앙시장은 1946년 처음 문을 연 뒤(1962년 시장등록) 한국전쟁을 겪으며 미곡 거래와 축산시장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1970년대에는 서울시민의 양곡 소비량 가운데 80% 이상이 이곳에서 거래될 만큼 번성했습니다. ‘전국의 시장 시세는 중앙시장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말도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중앙시장은 남대문시장, 동대문시장과 더불어 3대 시장으로 불렸습니다.
이후 중앙시장은 대형 백화점과 할인점에 상권을 잃어오다 2004년 재래시장 현대화 사업을 계기로 600여 개의 점포를 갖춘 쇼핑 명소로 도약하고 있습니다. 재래시장과 대로변 의류상권, 가구단지 등이 결합하고 ‘신당창작아케이드’가 재래시장 지하에 자리하면서 쇼핑에 더해 관광까지 가능해진 것입니다. 서울 중앙시장에는 음식점에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는 ‘주방기구 골목’과 ‘보리밥집골목’, 그리고 중고용품을 판매하는 벼룩시장이 유명합니다.
가운데 조선 시대 한양의 사대문 중 하나인 숭례문(남대문)ㆍ흥인지문(동대문) 근처의 남대문시장ㆍ동대문시장이 서울을 대표하는
재래시장이에요.
남대문시장(02-753-2805)은 6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시장이지요. 17세기에
전국에서 거둔 쌀과 베, 무명을 관리하는 관청인 선혜청을 남대문 안쪽에 설치하면서 시장으로 발전했지요. 오늘날 남대문시장은 1만여 개의 가게에
하루 30만 명이 넘게 드나드는 세계적인 재래시장이 되었어요.
'남대문 시장에 없으면 우리나라 어디에도 없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숭례문 카메라 시장, 문구 상가, 꽃 종합 상가 등 다양한 가게가 있어요.
1905년에 세워진
동대문시장(02-2262-0114)은 조선 시대 배오개 시장에서 출발했어요. 그러다 종로 상인들이 광장 주식회사를 세워 동대문시장을
관리하면서부터 근대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어요. 1970년대에는 동대문종합시장이 문을 열면서 의류 전문 시장으로 거듭났지요. 오늘날에는 패션에
관심이 많은 일본과 중국, 동남아시아 관광객들이 특히 많이 찾는답니다.
이 밖에 서울을 대표하는 재래시장에는 각종 한약재가 있는
동대문구 제기동의 경동시장(02-967-8721), 다양한 중고ㆍ관광ㆍ토속 상품 등 재미있는 물건이 많은 동대문구 신설동의
풍물시장(02-2232-3367), 건어물 전문 도매 시장인 중구 오장동의 중부시장(02-2267-5617~9)이 있어요. 동대문 주변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전통재래시장들이 즐비하다. 동대문시장의 시초인 종로 5가의 광장시장, 그리고 그 남쪽 밑으로 홈 베이커리의 천국 방산시장, 전국 최대 건어물 전문시장인 중부시장이 청계 5가와 을지로 5가에 바로 이어져 있다. 광장시장의 동쪽 옆으로는 아시아 최대의 의류시장인 동대문시장이 펼쳐진다. 평화시장으로부터 동쪽으로 동평화, 신평화, 남평화, 청평화 시장과 같은 도매시장이 이어지고, 평화시장의 남쪽으로는 두타 밀리오레와 같은 소매시장들이 줄지어있다. 그리고 동대문 뒤편 동묘역 주변과 황학동에는 벼룩시장이 열리고, 그 뒤편 신설동에는 서울풍물시장이 서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시장들이 그냥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는 것. 그 장소와 이야기 속으로 지금부터 함께 걸어보자. 크게 5개의 코스다.
◈ 코스 1 : 일제로부터 우리 시장을 지킨다 - 우리나라 최초의 상설시장, ‘광장시장’ 일단 광장시장부터 산책을 시작해보자. 광장시장은 무려 110년 전인 1904년 발족한 우리나라 최초의 상설시장이다.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던 당시, 남촌의 남대문시장이 일본 상인들에게 먹힌 전철을 동대문의 시장들이 밟아서는 안 된다면서, 동대문 포목상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시장이다.
포목 의류 원단 장사로 큰돈을 모은 상인들이 그렇게 설립한 광장시장은 1905년 동대문시장이라는 이름으로 한성부의 개설 허가를 받았다.
세월의 두께가 쌓여서 지금도 광장시장의 특화 품목이 바로 포목, 직물, 의류 원단이다. 광장시장 2층과 3층의 포목 원단 점포들을 거닐면서 시간 여행을 떠나보시길. 그런데 지금 광장시장은 1층 시장 통로에 펼쳐진 먹을거리 가게와 좌판들로 더 유명해지는 분위기다. 여기 먹을거리로 특히 유명한 것이 빈대떡과 회. 빈대떡집 좌판에서 어른 두 명이 한 장에 2천원하는 빈대떡 크기 고기 완자 3장을 시켜먹으면 맛있게 배를 불릴 수 있다. 횟집도 광장시장에 꽤 모여 있는데, 2인 해물 모듬회가 2만원. 이거 먹으러 오는 외국인들로 늘 북적인다.
육회도 빼놓을 수 없는데, 먹음직스런 육회 한 접시가 1만2천원. 저녁 무렵이면 이 먹을거리 좌판이 늘어선 긴 통로는 발 디딜 틈 없이 인파로 메워진다. 젊은 사람들도 굉장히 많다. 남녀노소가 같이 일행이 아니어도 등을 기대고 어깨를 맞대고 웃고 떠들며 먹는데, 이처럼 사람냄새 나는 곳이 없다.
잠깐 타임머신을 타고 30~40여년 전 서울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분위기가 복고적인만큼 가격도 착하고 서울의 다른 곳보다 더디 오른다. 너 댓 명이 모여 1만 원씩만 모으면 시장 안의 가게 3~4곳을 순례하며 푸짐하게 먹고 마시면서 재밌게 회포를 풀 수 있다.
◈ 코스 2 : 예쁜 용기와 소품, 초콜릿과 홈베이커리의 천국, ‘방산시장’ 광장시장만 보고 나오면 섭하다. 남쪽으로 도열해 있는 방산시장과 중부시장도 함께 걸어야 제맛인데, 종로 5가에서 남쪽으로 청계천만 건너면 청계 5가에 방산시장이 바로 나온다. 방산시장은 여성분들은 잘 아는 우리나라 유일의 홈 베이커리의 천국이다. 예쁜 포장 관련 소품들 그리고 세련된 용기들, 그리고 초콜릿과 베이커리 용품이 펼쳐져 있다.
시장은 일반 재래시장 같은 모습이지만, 가게 안을 들어가보면 가정용 팬시 용품 단지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한번 가보면 진열된 물건 중 적어도 한두개씩은 ‘아 이거 여기에 있었구나’라는 게 꼭 생긴다. 그런 몇가지 예쁜 용기와 소품만으로도 부엌 분위기는 레벨업되기 마련. 가격도 저렴하니, 꼭 한번 가보시길 추천한다. 방산시장은 저녁 7시가 넘으면 대부분 문을 닫는다는 점, 특히 일요일은 쉰다는 점에 유의하자!
◈ 코스 3 : 전국 최대의 전통 건어물 전문시장, ‘중부시장’ 그리고 방산시장에서 남쪽으로 을지로 길만 건너면 중부시장이 나온다. 바로 마주보고 있다고 보면 된다. 전통건어물도매시장. 전국 최대의 건어물 전문시장. 중부시장에서 구할 수 없는 건어물은 우리나라 어디에도 없다고 보면 된다.
건어물 시장이니 비린 냄새가 나지 않으면서도 즉석 먹을거리는 한가득이다. 이 시장 골목을 걸으면서 쥐포나 오징어포, 홍합 말린 것 등을, 시식용으로 빼놓은 것이든 아니면 그냥 흥정하면서 한두개 빼먹는 식이든 살짝살짝 집어먹는 맛이 아주 일품이다. 그리고는 문어 다리 하나를 2천원에 사서 가위로 가게에서 잘라 봉지에 담아서 집에 오는 길에 하나하나 꺼내서 씹어 먹으면 천국이 따로 없다.
밤 10시부터 새벽 6시까지는 도매시장이 서고, 오전부터 저녁 6시까지 소매시장으로 바뀐다. 일요일은 쉰다.
◈ 코스 4 : 아시아 최대의 의류시장, ‘동대문시장’ 동대문시장은 그 자체로 굉장히 방대하다. 그 시초로서의 광장시장과 평화, 청평화, 동평화시장 등의 전통도매상권, 그리고 Apm과 디오트 같은 신흥도매상권, 두타와 밀리오레 등의 신흥소매상권 전체를 아우르고 낙산 창신동을 배후기지로 삼는 아시아최대 의류산업단지를 일컫는 말이 바로 동대문시장이다. 3만여 점포가 밀집해 하루 20~30만명의 손님을 맞는다. 이 동대문시장 쇼핑은 한번쯤 해보셨을 터라 따로 설명이 필요하지 않지만, 딱 한가지만 팁을 드리고 넘어가겠다.
일반인들이 보통 옷을 사러 들르는 동대문의 소매시장에서는 트렌디한 옷들을 비싸지 않게 구입할 수 있긴 하지만, 기대하는 것처럼 헐한 가격에 옷을 사긴 힘들다. 그래서 잘 활용해야 하는 것이 바로, 청평화, 동평화, 혹은 유어스, 디오트, 팀204, 퀸스스퀘어 등의 도매시장이다. 동대문 도매시장에서는 좋은 품질의 트렌디한 옷을 소매 매장의 반값에도 살 수 있다.
단, 도매시장은 기본적으로 낱장 판매를 하지 않기 때문에 한 아이템을 사려면 최소한 두 가지 이상의 색깔이나 사이즈를 구매해야 한다. 취향이 비슷한 친구와 함께 가서 둘이 하나씩 나눠 입거나 밀린 옷을 두세벌 사는 쇼핑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도매시장이다 보니 결제와 피팅 서비스에 제약이 좀 많다. 현금결제만 가능하니 가시기 전에는 꼭 현금 인출해 가시고, 피팅룸이 없어서 상품을 입어볼 수 없다는 점에도 유의해야 한다. 그리고 한번 구매한 상품은 반품, 교환, 환불이 불가능하니 신중하게 구매해야 한다는 점도 기억하자.
도매시장들은 보통 저녁 8시부터 영업을 시작해서 새벽 6시경에 문을 닫는다. 한마디로 일반 백화점이 문 닫는 시간에 문을 열고 영업하는 셈인데, 오히려 보통 6~7시쯤 퇴근하는 직장인들에겐 의외로 좋은 쇼핑시간이 아닐 수 없다. 밤 11시~1시 사이는 사람이 너무 많아 정신이 없으니 8시 반쯤 가서 11시에 쇼핑을 마치면 최적의 여건에서 쇼핑을 할 수 있다. 보통 토요일밤에서 일요일 새벽까지는 휴무니까 참고하시길.
◈ 코스 5 : 없는 거 빼고 다 있는 추억의 벼룩시장, ‘동묘 벼룩시장과 서울 풍물시장’ 동대문 주변 황학동과 동묘 그리고 신설동은 벼룩시장의 메카. 벼룩시장이란 말은 사고 파는 제품이 구제 즉 쓰던 중고품이라 벼룩이 나온다는 뜻도 있고, 물건을 파는 이들이 허가받지 않은 노점상들이라 단속 때마다 벼룩처럼 한번에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는 성격을 뜻하기도 한다. 지금 이곳의 벼룩시장은 두가지 의미가 다 있다고 보면 된다. 노점상들이 중고품을 가지고 나와서 파는 시장이라는 것. 이는 도깨비시장으로도 불리고 도떼기시장으로도 불렸다.
동대문 뒤편 청계천변에 펼쳐졌던 황학동 벼룩시장은 서민들의 중고 물품 장터로 30여년전부터 서울의 명물이었다. ‘탱크만 빼고 완전 무장이 가능하다’는 등의 말도 나온 곳이었다. 그러나 2004년 청계천 복원 사업으로 청계고가도로가 헐리고 청계천 주변 정리가 이뤄지면서 황학동 벼룩시장은 동대문운동장으로 밀려났다. 청계천변에 있었던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손님들의 발길은 이어졌었다.
그러나 2006년 ‘디자인 서울’ 사업의 일환으로 동대문디자인플라자 DDP 설립이 추진되면서, 상인들은 동대문운동장으로 쫓겨온 지 4년 만에 또다시 짐을 싸야 했고, 그렇게 밀려난 곳이 신설동에 있는 서울 풍물시장이다. 풍물시장에 가 보면 시간이 멈춘 듯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다. 추억어린 물건들이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켜켜이 쌓여 있어서 아이들의 호기심을, 중년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보물창고이자 서민장터다. LP판, 꼬질꼬질 헌옷, 고가구와 골동품들 속에서 보물찾기하듯 물건 건지는 재미 쏠쏠하다
그리고 지금, 동묘 옆에는 다시 세월을 비껴간 모습으로 길거리 벼룩시장이 생겨났다. 주말 동묘 벼룩시장에 가보면 뜻밖의 규모에 놀라게 되는데, 동묘 담장을 따라 줄지어선 좌판이 끝이 보이질 않을 정도로 길게 이어져있고, 주변 골목들마다 빼곡히 구제가게와 골동품 좌판이 펼쳐져 있다. 동묘 벼룩시장의 초입에 들어서면 경쟁하듯 “무조건 천 원~” 이라고 외치며 손님을 이끄는 주인, 그리고 천 원짜리를 주고 받으며 가격을 흥정하는 손님으로 왁자지껄한 시장의 풍경이 거리를 가득 메운다.
황학동 벼룩시장처럼 이곳에서도 골동품과 잡동사니를 주로 팔았지만, 요즘에는 골동품보다는 인근 동대문에 사는 서민들을 대상으로 한 옷과 신발, 가방 등 구제물건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그러다보니 동묘 벼룩시장은 이제 동묘 구제시장으로 더 유명세를 얻고 있다.
동묘 벼룩시장에서 파는 구제 의류들은 대부분 수출을 목적으로 무역회사 창고에 쌓아두었거나 고물상에 판 옷들 중에서 입을만한 것들을 골라 가지고 온 것들인데, 그만큼 쓸 만한 헌 옷들이기 때문에 저렴한 가격으로 재판매되는 것. 구제 벼룩시장에서는 티셔츠 한 장에 천 원은 기본, 가죽과 무스탕이라도 채 3만원을 넘지 않아서, 잘 고르면 만 원 한 장으로 옷 열 벌도 살 수 있다. 단, 평일이 아닌 토요일과 일요일에 가야 한다는 점에 유의! ◈ 동대문 주변이 재래시장의 메카가 된 이유 동대문 일대에 이런 재래시장들이 펼쳐진 데에는 역사적인 맥락이 있다. 조선시대 서울한양도성 안에서 동대문 일대는 지대가 특히 낮고 청계천과 인접한 청계천 범람습지로, 수해가 잦은 지역이었다. 거주지로서는 상대적으로 좋지 않은지라 동촌 내에 낙산 주변과 땅이 넓은 습지에는 당시 문관에 비해 경시되던 무관과 하급병사들이, 청계천변에는 가난한 백성들이 자리를 잡게 됐다. 또 청계천 바닥이 높아지면 바닥 흙을 파냈는데, 이때 파낸 토사와 오물을 쌓아 만든 가산들이 이 일대에 자리잡아서 가난한 민중과 거지들의 토굴이 생겨난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배경들이 동대문 일대에 서민적이고 민중적인 성격을 만들어냈다.
특히 임진왜란 후에는 재정 부족으로 군인들의 급료를 지급하지 못하게 되자 이 지역에 사는 군인 및 하급병사들에게 군포(군인 옷감)와 가산을 파는 상업 활동이 허용됐다. 그러면서 만들어진 것이 동촌 배오개 일대(예지동, 인의동, 종로 5,6가)에 배오개시장이라는 사상난전이었다. 군포 등 포목 옷감 등을 중심으로 생겨났던 당시 이 일대의 시장이 바로 지금, 아시아 최대 의류시장인 동대문시장의 시초가 됐다. 포목, 직물, 의류 원단은 지금도 광장시장의 핵심 품목이자 동대문시장 전체를 지배하는 품목이다. 그리고 이곳에 있던 사상난전의 흐름은 이 지역의 서민 민중적인 성격과 맞물리면서 다양한 길거리 시장들을 낳았는데, 이것이 해방 후 동대문 주변의 다양한 재래시장과 청계천변 서민들의 벼룩시장으로 이어진 것이다.
아까 소개한 방산시장에서 방산이라는 말도, 청계천 바닥을 퍼내서 쌓아 생긴 가산에 악취가 많이 나자 그곳에 꽃을 싶어서 꽃언덕을 만들어놨으니, 그것을 일컬어 꽃다울 방자에 뫼산자, 芳山이라고 했고, 여기에 생긴 시장이 방산시장이다.
그리고 동대문에서 동편으로 더 가면 왕십리 주변 마장동을 만나는데, 단일육류시장으로 세계최대규모를 자랑하는 마장동 축산물시장, 모르는 분이 없을 것이다. 4천여개 매장이 입점해서 한우가 아닌 국내산 육우를 싸게 파는 곳, 어른 4명이 배불리 구워 먹고 12만원 정도 나오는 곳. 이 시장의 장소가 갖는 역사성도 매우 깊다. 도성의 동쪽 내사산인 낙산에서 동쪽 외사산인 아차산까지는 넓은 들이 펼쳐져 있었고, 조선은 이 땅을 목장으로 만들었다. 그것이 지금의 지명에도 담겨 있는데, 말목장이라는 듯의 마장동, 목장 맞은편이라는 뜻의 면목동, 목장 안 넓은 들판이란 뜻의 장안평, 암말을 기르던 동네라는 뜻의 자양동이 그 예다.
바로 이렇게 말 목장이 있던 곳에 1960년대 도축장이 들어서면서 우시장이 만들어지고 지금의 축산 전문시장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양마장 → 도축장 → 우시장 → 고기 도매상 변신 → 마장동 축산물시장으로 발전해 온 역사의 궤적이자 장소를 지배하는 시간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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