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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 시인의 서울살이(30) 새 단장한 마로니에 공원

草霧 2013. 10. 12. 12:20

 

 

 

마지막 만남이 될 줄 그땐 미처 몰랐었다네~

어설픈 시인의 서울살이(30) 새 단장한 마로니에 공원

 

시민기자 이승철 | 2013.10.11

 

마로니에 공원에 들어선 설치미술품

 

 

[서울톡톡] 루 루루루루루루 루 루루루루루루루/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바람이 불고 낙엽이 지듯이/덧없이 사라진 다정한 그 목소리
아~ 청춘도 사랑도 다 마셔버렸네/그 길에 마로니에 잎이 지던 날
루 루루루루루루 루 루루루루루루루/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지금도 귓가에 아련히 맴도는 노래가사다. 1970년대 초 가수 박건이 불러 유행했던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은 당시는 물론 지금도 남다른 감회로 다가오는 추억의 노래다. 박인환의 시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친구의 소개로 같은 또래의 여학생을 만난 것도 이맘때였다. 군에 입대하기 1년 전 가을이었다. 마로니에 공원이 자리 잡고 있는 혜화동은 그때나 지금이나 젊은이들의 사랑과 낭만이 안개처럼 흘렀다. 지금의 마로니에 공원은 당시 서울문리대가 있던 자리다. 그 앞으로는 실개천이 흐르고, 주변엔 젊은이들과 문인들이 즐겨 찾던 학림다방이 있었다.

 

 

그해 가을부터 다음해 6월까지 그녀와의 만남은 항상 설렘이었다. 장소는 가끔 바뀌었지만 그래도 가장 많이 기억에 남아 있는 곳이 바로 혜화동이다. 학림다방과 골목의 선술집, 그리고 도란도란 정답게 걷던 거리와 골목길, 주머니는 항상 가벼웠지만 그래도 행복하기 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다음해 6월말 군에 입대했다. 아쉬운 작별이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몰랐다.

 

 

가끔씩 주고받은 편지는 참으로 정다웠다. 휴가 때 잠깐의 만남도 정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군 입대 후 1년 반쯤 지난 어느 날 날아든 편지 한통엔 영원한 이별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졸업하자마자 부모님의 강권에 못 이겨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군대생활이 갑자기 힘들어졌다. 그리고 몇 개월 후 베트남 전선으로 떠났다.

 

 

군에서 전역하여 다시 찾은 혜화동은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풍경보다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가끔씩 이곳을 찾은 것은 짧았지만 그리운 추억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무렵 박건의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이란 노래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가슴 속, 아니 심장에 딱 꽂히는 노래였다. 몇 년 후 서울문리대는 관악캠퍼스로 이사를 했다. 그 자리에 마로니에 공원이 들어섰다. 옛날의 추억 한 자락도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새단장한 야외무대(좌), 고산 윤선도 생가터와 오우가 비(우)

 

 

지난봄에 잠깐 들른 후 오랜만에 마로니에 공원을 찾았다. 봄과 여름을 지나는 동안 공원은 새 단장을 마친 상태였다. 우선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지하철 출구 앞에 있던 공연안내소가 공원입구로 옮겨진 것이었다. 야외무대도 달라진 모습이었다. 무대는 물론 약간 경사진 객석도 시원하게 싹 달라진 모습이다.

 

 

야외무대 앞과 주변의 변화도 놀라웠다. 우선 눈길이 가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주변은 온통 설치미술품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모양도 색깔도 다양하다. 설치미술품들이 가진 저마다의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아름답고 멋진 풍경이었다. 그 미술품들 사이 한 편에 김상옥열사의 동상이 서있었다. 일제치하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경들과 맞서 싸워 독립의지를 불태웠던 청년 김상옥은 지금도 늠름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공원을 지키고 있었다.

 

 

옛 서울대학교가 있던 자리라는 표지석이 있는 앞에도 진기한 모습의 설치미술품이 자리 잡고 있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그 맞은편에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시인으로 더 유명했던 고산 윤선도가 출생한 곳이라는 집터 표지석이 서있다. 윤선도는 가사문학의 대명사격이었던 송강 정철과 쌍벽을 이루었던 <오우가>, <어부사시사>의 시인이 아니던가.

 

 

"내 벗이 몇이냐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동산에 달 떠오르니 그것이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윤선도의 오우가 앞부분) 고산은 자연을 문학의 소재로 쓴 조선시대 시조작가 가운데 가장 탁월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분이다. 그가 태어난 집터가 지금은 낭만이 가득한 공원이 되었으니 이를 어찌 우연이라고만 할 수 있으랴.

 

 

소시민의 짧은 추억이 가물가물 잊혀져가고 있는 아름답고 낭만이 가득한 공원, 그러나 빼앗긴 조국을 찾으려고 일제에 당당히 맞섰던 열사의 항일정신과, 한 시대를 풍미했던 뛰어난 시인의 흔적은 예나 지금이나 뚜렷했다. 고산 집터 표지석 앞에는 '마로니에 공원'이라 새겨진 공원 표지석이 추억을 떠올리듯 오롯이 자리를 지키고 서있었다.

 

 

 

이승철 시민기자 이승철 시민기자는 시인이다. 스스로 '어설픈 시인'이라며 괴테 흉내도 내보고, 소월 흉내도 내보지만 "나의 시는 항상 어설프다. 불후의 명작을 쓰겠다는 욕심은 처음부터 없었고 그저, 더불어 공감하는 보통 사람들과 같이 숨 쉬고 나누는 것을 만족할 뿐"이라고 한다. 이 어설픈 시인이 서울살이를 하며 보고 느낀 삶의 다양한 모습, 역사와 전통 등을 시인 특유의 문체로 써내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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