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기자 이세아 | 2013.10.08
[서울톡톡] 18.6km. 조선의 수도 한양을 둘러싼 성곽의 총 길이다. 1395년 태조의 명으로 축조된 한양도성(사적 제10호)은 인왕산, 백악산(북악산), 낙산, 남산을 잇는 성벽이다. 세계 역사상 가장 긴 514년 동안 도성 역할을 해 온 든든한 방벽이었다. 작년 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예비목록에 올라, 수 년 안에 세계유산으로 지정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조선 왕조를 품어 온 성곽을 걸으며 숨은 이야기와 발자취를 찾아나서는 프로그램이 있다기에 동참해 보았다.
백두산, 태백산맥을 타고 흐르던 정기가 마지막으로 머무르는 곳
"지금 여러분이 서 계신 이곳은 한양의 심장이었습니다." 안내를 맡은 박병호 서울 향토문화연구가의 첫 마디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즉위하자마자 개경에서 한양으로 도읍지를 옮겼다. 새 국가에 맞는 새 수도가 필요하기도 했고, 풍수지리상 개경의 기운이 쇠한 탓도 있었다. 곧이어 종묘사직과 경복궁이 완성됐다. 왕이 머무를 집이 생겼으니 울타리가 필요했다. 그렇게 지어진 것이 한양도성이다.
일행들과 함께 쭉 뻗은 창의문로를 따라 걸었다. 고갯길이지만 아주 가파르진 않았고, 바로 옆 도로를 오가는 차들도 적어 한가로웠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고개를 들자 장엄한 산봉우리들이 우뚝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한양의 주산인 백악산이었다.
“풍수지리에서는 백악산이 백두산, 태백산맥을 타고 흐르던 정기가 마지막으로 머무르는 곳이라고 봅니다. 그 아래 명당자리에 조선의 궁궐 경복궁을 지었지요.”
윤동주와 이상을 사로잡은 서촌의 아름다움
계속해서 언덕길을 올랐다. 왼편 난간 밑으로 검붉은 기와지붕들이 줄지어 늘어서 고풍스러웠다.
"지금 옆으로 보이는, 인왕산과 경복궁 사이의 삶터가 서촌입니다. 언덕을 넘어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는 북촌 마을이 있지요."
사대부들의 터전이던 북촌과 달리 서촌은 역관이나 의관 등 조선시대 중인들이 살던 곳이다. 조선의 대표적 세도가 장동김씨 가문이 이 일대에 모여 살았고, 세종과 영조가 태어난 곳도 이 서촌 마을이다.
"아름답네요. 이항복도 여기 계곡에 별장을 짓고 놀았다면서요?" 한 참가자의 질문이었다. "이항복의 호가 '백사'예요. 계곡 이름이 '백사실'인 것으로 보아 이항복의 별장지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직접 보시니까 어때요. 그럴싸하지요?"
지금은 집들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웅장한 바위와 계곡, 꽃나무가 빚어내는 풍취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흥선대원군도 인왕산 자락의 맑은 계곡 근처에 별장 '석파정'을 지어 애용했다고 한다. 1786년 시작된 송석원시사(詩社)는 조선 후기 중인계층 지식인들이 모인 문예사랑방이었다. 송석원이란 모임의 리더 천수경의 옥인동 집 이름이다. 이후 윤동주, 이상, 노천명 등 여러 예술인들의 발자취가 서촌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하지만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유산을 대하는 후손들의 태도에 대한 따끔한 지적도 나왔다.
"서촌 일대가 더욱 알려지면서 소음공해와 환경오염도 심해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진정 교양 있는 시민으로 거듭나는 것이 조상과 자연에 대한 기본 예의겠지요."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언덕'
발길을 다시 돌려 윤동주 시인의 언덕으로 향했다. 윤동주 문학관을 지나 굽이굽이 이어진 나무계단을 올랐다. 탁 트인 언덕 위에 서니 시원한 솔바람이 몸을 감쌌다. 수려한 산자락과 고즈넉한 서촌 일대, 저 멀리 서울의 도심까지 모두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명당이었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과연 윤동주 시인이 올라 마음을 가다듬었을 만한 장소다. 근처 울타리에는 시인의 시구가 새겨져 있었다. 시인의 아픔과 고통, 아름다운 서정을 떠올리며 서울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민요, 판소리, 야외극 …풍성한 문화공연 잔치 열려
언덕 중앙에는 작은 무대가 마련돼 있었다. 모두 자리에 앉자 오늘 투어의 마지막 순서, 문화공연이 시작되었다.
시창을 맡은 김보라 씨가 시 '별 헤는 밤'의 첫 구절을 읊기 시작했다. 맑지만 힘 있는 그녀의 목소리에 큰 박수가 터졌다. 이어 소리꾼 민은경 씨는 인왕산 치마바위에 얽힌 중종과 단경왕후의 슬픈 사랑을 노래했다.
노래가 끝나자마자 '앵콜'을 외치는 관객들의 함성에 즉석에서 사랑가가 뽑아져 나왔다. 극단 하땅세가 준비한 야외극 '호랑이 바위로 쌓아올린 한양도성'이 마지막을 장식했다. 야외극답게 주변의 자연을 배경, 소품 등으로 활용하는 기발함과 참신함이 돋보였다. 쉽고 재미났지만 '자연과 인간 모두 함께 잘 살아가자'는 깊이있는 메시지를 담은, 어른과 아이 모두 즐길 수 있는 작품이었다. 공연이 끝나자 한동안 아낌없는 박수가 쏟아졌다.
두 아이들의 손을 잡고 참가한 어머니의 소감을 물었다. 송미선(강서구) 씨는 최근 이런 기회들이 많아져서 행복하다고 했다. 후발대로 늦게 출발한데다, 애들까지 챙기느라 안내자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고생했지만 아이들이 무척 즐거워해서 좋았단다. 다음 투어 프로그램도 가족과 함께 참여할 계획이다.
안내를 맡았던 박병호 서울 향토문화연구가는 "자격을 취득하고 7년째 서울에 관한 문화역사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쭉 서울에서 살아 왔으니, 이 도시의 이야기가 곧 제 삶의 이야기지요"라고 말했다. 또 극단 하땅세의 권제인 배우는 "이 프로젝트는 새로운 도전이자 즐거움"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한양도성 스토리텔링 투어 프로그램은 10월 한 달간 매주 토요일에 각기 다른 4가지 코스로 운영된다. 문화해설사와 함께 걷는 스토리텔링 투어 신청은 마감됐으나 공연은 누구나 무료로 관람 가능하다. 자세한 내용은 서울스토리 사이트(www.seoulstory.org)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