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친아`에 담긴 사회 심리문화평론가 하재근의 ‘컬처 톡’ 14
[서울톡톡] '엄친아'라는 신조어는 이제 거의 일상어가 됐을 정도로 널리 사용된다. 언론 기사의 제목으로도 많이 나와서 그 뜻을 모르는 국민이 별로 없을 것이다. '엄마 친구 아들' 혹은 '엄마 친구 딸'이라는 뜻으로, 엄마가 아이를 야단칠 때 '내 친구 아이는 공부도 잘 하고 착하고 부모 말도 잘 듣는데 넌 왜 이 모양이냐'라고 한 데서 비롯됐다. 그래서 뭐든지 잘 하고 완벽한 환상의 존재, 모두의 부러움을 사는 존재를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다.
'엄친아' 정의에 대한 변천사... 그런데 이 뜻이 점점 바뀐다. 먼저, 외모가 첨가됐다. 공부도 잘 하고 뛰어난 외모까지 가진 사람에게 엄친아, 엄친딸이라고 하게 된 것이다. 엄친아라는 말의 원래 유래를 생각해보면 외모는 이 속에 끼어들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세상에 자기 자식을 야단치면서 '넌 얼굴이 왜 그 모양이냐'라고 하는 부모는 없기 때문이다. 외모는 부모에게 물려받는 것이다. 자식 외모는 부모 책임이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 외모를 탓하는 건 누워서 침 뱉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엄친아라는 말 속에 외모가 들어갈 수가 없지만 들어가고 말았다. 대신에 착한 성격이 사라졌다. 굳이 도덕성이 훌륭하지 않아도 성적과 외모만 뛰어나면 엄친아라고 일컫게 된 것이다. 외모지상주의가 워낙 강해지면서 덕성을 밀어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엔 꼭 성적이 뛰어나지 않아도 일류대를 가기만 하면 엄친아라고 하게 됐다. 예체능이든, 특기생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일류대만 가면 되는 것이다. 엄친아는 완벽한 환상의 존재인데, 학벌사회인 한국에서 환상의 존재란 결국 학벌 간판이 우수한 사람이기 때문에 일류대 스펙이 엄친아의 조건이 됐다. 그 다음엔 꼭 국내 일류대가 아니더라도 해외유학만 다녀왔으면 엄친 아라고 하게 됐다. 특히 미국 대학이다. 미국 대학의 학벌이 국내 학벌을 뛰어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그런데 엄친아의 원래 유래로 보면 이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왜 해외유학을 못 갔느냐'고 야단치긴 힘들다. 왜냐하면 해외유학은 부모의 돈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시 누워서 침 뱉기다. 하지만 해외 간판의 위력이 워낙 강력하기 때문에 유학이 엄친아의 조건이 됐다.
차라리 '아들 친구 엄마, 딸 친구 아빠'라고 해야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젠 아이 본인의 덕성 중에 아무 것도 필요 없게 됐다. 오로지 부모의 돈, 부모의 지위만 중요하다. 요즘엔 부모가 대기업 임원 이상이거나, 교수, 법조인, 의사면 엄친아라고 기사화된다. 배우 공현주의 남자친구는 재벌 외손자라서 엄친아이고, 가수 박형식은 아버지가 대기업 임원이라서, 가수 수호는 식비로 80만 원까지 쓰는 부유한 가정환경에 아버지가 교수라서 엄친아라고 보도됐다. 70년대 포크 가수 한대수는 아버지가 핵물리학자이고 10살 때 뉴욕 유학을 갔기 때문에 이제 와서 엄친아라고 언론이 인증해줬다.
'엄친아'라는 단어만 남고 그 뜻은 180도 바뀐 것이다. 원래의 엄친아는 부모가 자식의 품성을 문제 삼는 것이었는데, 지금의 엄친아는 자식이 부모의 재산과 스펙을 문제 삼는 것으로 바뀌었다. 자식타박에서 부모타박으로 바뀐 셈이다. 이렇게 뜻이 바뀌는 동안 아무도 이것에 제동 걸지 않았다. 일반 대중부터 언론에 이르기까지 다들 너무나 당연하게, 완벽한 존재는 바로 부잣집 자식이라고 공감했기 때문이다.
이젠 '엄마 친구 아들'이 아니라 '아들 친구 엄마, 딸 친구 아빠'라고 해야 더 의미가 잘 통한다. 물론 애초의 의미도 여전히 통용되긴 한다. 엄친아라는 단어의 뜻을 두고 자식타박과 부모타박 사이에 힘싸움이 전개되는 것이다. 하지만 점점 새로 바뀐 뜻이 힘을 얻는다. 이건 젊은이들 사이에서, 본인이 아무리 스펙을 쌓아봐야 좋은 집에서 태어난 아이를 당할 수 없다는 절망이 퍼져간다는 뜻이다. 동시에 자신을 상위 1% 엄친아로 낳아주지 못한 부모에 대한 불만도 일각에서 생겨나고 있다는 뜻이다. 엄친아의 변천사를 분석하면, 우리 사회가 점점 흉흉해진다는 한탄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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