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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서울역사문화탐방 프로그램 3회차 10.14(월) - 명동과 남대문 일대

草霧 2013. 10. 8. 11:56

 

 

 

2013년도 하반기 서울역사문화탐방 안내

2013년 서울역사문화탐방 프로그램 3회차 - 명동과 남대문 일대

 

 

서울역사문화탐방 제3회차 교육 [답사] 2013.10.14(월) 
  

주 제 : 종로와 명동의 골목과 길에 숨겨진 서울사람들의 어제와 오늘
 
강 사 : 전우용(한양대학교 연구교수)
 
탐방시간 : 2013. 10. 14(월) 14:00~17:00
 
탐 방 지 : 명동 일대
 

 

서울 숭례문 崇禮門   국보 1호

 

조선시대 서울 도성의 정문으로 ‘남대문’으로도 불린다. 태조 4년(1395)부터 짓기 시작해 태조 7년(1398)에 완성되었으나 지대가 낮아 볼품이 없고 풍수지리설에도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세종 29년(1447)년에 개축하였다. 그 뒤 문루가 기울어 성종 10년(1479)에 다시 개축하였다. 원래 기단 양쪽은 한성의 성벽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1908년 도로를 내면서 헐어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장중한 겉모습과 견실한 내부 구조에서 성문으로서의 당당한 면모가 엿보인다. 또한 전형적인 다포식 건축물로 15세기의 목조건축 수법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2008년 2월 10일 방화로 인한 화재가 발생하여 2층 문루가 소실되고 1층 문루 일부가 불에 탔으며, 현재 복구공사중이다.

“세로로 쓰인 숭례문 현판”

도성 문의 현판은 모두 가로로 쓰여 있지만, 숭례문만은 세로로 쓰여 있다. 이것은 ‘불의 산’이라 일컬어지는 한양 남쪽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관악산의 화기가 강해 경복궁에 화재가 나기 쉬운데, 현판 글씨를 세로로 길게 늘어뜨리면 성문 밑을 막고 누르는 셈이 되어 화기가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숭례문 현판의 글씨를 쓴 사람은 태종의 맏아들 양녕대군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이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봉유설』의 기록에는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서울 성곽 중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ㅇ 숭례문 방화 화재(2008.2.10) -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崇禮門放火事件)은 2008년 2월 10일 ~ 2월 11일 숭례문 건물이 방화로 타 무너진 사건이다. 화재는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전후에 발생하여 다음날인 2008년 2월 11일 오전 0시 40분경 숭례문의 누각 2층 지붕이 붕괴하였고 이어 1층에도 불이 붙어 화재 5시간 만인 오전 1시 55분쯤 석축을 제외한 건물이 붕괴됨. 현재 복구공사로 2012년 12월 공사완료 예정임.

 

 

 

 

 

 

명동

 

70년대초 명동 거리

 

 

조선 시대에 명례동(明禮洞) 또는 명례방이라 불렸으며, 일제 강점기 때 명치정(明治町 메이지초[*])이라는 이름의 상업 중심지로 발전한 것이 시작이다. 명치정1정목(明治町一丁目 메이지초잇초메[*]), 명치정2정목(明治町二丁目 메이지초니초메[*])은 1943년 6월 10일에 설치된 중구의 관할로 편성되었다[1]. 1970년대 이전에는 증권회사가 모여있는 한국 경제의 중심지였다.

 

중화 요리점이 많고 중국인 학교도 있는 등 화교들이 많이 모이지만 차이나타운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지금의 명동은 서울의 주요 관광지 중 하나이다. 명동은 서울에서 일본어가 어느 정도 통용되는 곳이고,[출처 필요] 일본인,중국인 관광객이 늘고 있다.

 

관광특구로 지정된 곳은 명동에 있는 세종호텔옆 도로(삼일대로)에서부터 시작해 퇴계로길을 따라 신세계 백화점을 지나 남대문시장, 프라자호텔, 시청앞, 청계광장, 광통교, 장교빌딩에서 다시 세종호텔까지의 도로내에 있는 872,809.2㎡(26만4천25평) 이곳은 수도서울의 중심지로서 지명도가 매우 높고 교통이 편리하며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지역으로 관광특구로서의 기반여건이 상당히 좋을뿐 아니라 제반여건이 충족되어 있는 관광쇼핑의 명소지역이다.

남대문 시장지역은 우리나라 최고 · 최대의 재래시장 관광 및 쇼핑지역으로 이미 국내외적으로 널리 알려 져 있는 곳이고, 명동지역은 서울의 최대 중심지역으로서 전통적으로 가장 중심가라는 고유의 이미지를 가 지고 있으며, 사업상의 이유만으로도 외국인이 많이 찾는 지역이다. 또한, 중심거리의 주변에 형성된 상가들을 중심으로 최첨단 하이패션 및 고급쇼핑, 문화공간지역으로 자리잡고 있다. 1일 유동인구가 평일 150만명에서 주말 200만명으로 의류 · 제화등 패션매장을 비롯하여 다양한 맛집과 은행 · 증권회사가 자리하고 있어 경제기능 밀집지역이기도 하다. 북창동지역은 롯데호텔을 중심으로 하는 고급 숙박시설들과 각종 음식 및 서비스, 위락 등을 제공하는 업체들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다동ㆍ무교동 지역은 대형빌딩으로 둘러싸여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낙지, 등갈비, 골뱅이 음식거리가 위치하고 있다.

  • 근처에 남대문시장이 있으며, 명동성당이 유명하다.
  • 일본식 복도형 목조주택을 개조한 한정식당 수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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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남대문시장

    남대문 시장은 6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재래시장이다. 하루 이용객이 40만 명이 넘으며 다양한 품목을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는 쇼핑관광명소로 해외 관광객의 필수 방문코스이다.

     

    2. 숭례문(남대문)

    대한민국 국보 제1호인 숭례문은 조선시대 서울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이다. 남쪽에 있다고 해서 흔히 남대문이라고 불린다. 2008년 화재로 소실되어 복원공사 중이다. 세밀한 원형 복원사업을 거쳐 2013년 완공될 예정이다.

     

    3. 화폐금융박물관

    국내외 진귀한 화폐 9,000여 점과 화폐 제조과정 화폐와 경제와의 관계 등 학생과 시민을 위한 학습과 문화공간으로 개방되고 있다.

     

    4. 중앙우체국

    1884년 11월 18일 설치한 한국 최초의 우편행정 관청인 우정총국이 서울중앙우체국의 시초이다. 1884년 갑신정변으로 우정총국의 업무가 중단되었다가 1895년 지금의 종로구 세종로에 한성우체사가 설치되어 업무를 재개하였다. 1905년 7월 1일 경성우편국으로 명칭이 바뀌며 현재의 위치(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1가 21-1번지)로 이전하였고, 1939년 10월 1일 경성중앙우편국으로, 1949년 8월 13일 서울중앙우체국으로 명칭이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5. 명동거리

     

    6. 명동성당

    명동성당은 한국 천주교의 상징이자 심장부이며 국내 유일의 순수한 고딕양식 건물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벽돌조 교회당이기도 한 명동성당은 1892년 (고종29년) 에 착공, 1898년 (광무2년)에 준공됐다. 명동성당 터는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전래된 직후부터 천주교 신도들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던 곳이다. 1980년대에는 민주화 운동에 관련된 수배자나 시위대가 공권력을 피해 명동성당으로 모여들어 민주화 운동의 성지로 불리기도 했다.

     

     

     

     

    한국의 유행은 서울에서, 서울의 유행은 명동에서하루 유동 인구 200만. 가장 땅값이 비싼 곳.100년 전 명동은. 어떤 변천과정을 거쳤을까.

     

    명동의 역사.

    서울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 북촌, 종로 일대. 명동은 중심지와 가깝지만 떨어진 곳. 조선시대 명동은 명래방. 명동과 충무로 일대. 명동은 명래방에서 따온 말. 명동 성당이 있는 언덕은 중고개, 남쪽 충무로는 진고개, 북쪽 을지로는 구리개. 중고개는 임진왜란때 서울에 주둔한 명나라 장수 양호가 남대문의 종을 언덕으로 옮겨단 곳에서 유래. 진고개는 땅이 질어서. 구리개는 흙빗이 구릿빗이라 붙은 이름. 남촌 일대. 조선 후기엔 신분/직역에 따라 사는 곳이 제한 받음. 동네 이름도 다르다. 안국/가회동은 북촌, 안동 김싸, 여흥 민씨, 반남 박씨  등의 세도가명동은 남촌이라 권력에 거리가 있거나, 무인이 살았다. 남촌은 북촌에 비해 낙후되었다. 양반 세도가가 주로 북촌에 있다. 남촌은 남산 아래. 남산의 ?쪽 경사면, 진고개라는 명칭에서 모듯 땅이 질었다. 나막신 신고 다녔다.

     

    낙후된 주거지역이 상업지역으로 바뀐 계기.

    1882년 임오군란. 청나라 군인, 상인, 일본인이 남촌에 자리잡게 된다. 명동과 충무로에 지역적 특성과 관련 있다. 북촌은 관청도 많고, 권문세도가의 주거. 공간이 좁다. 자연스럽게 명동 일대에 들어오게 된다. 중국 대사관, 화교도 남아 있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나라 군인과 상인이 자리 잡은 것과 관련 있다.  지금은 남/북촌 모두 구시가지지만. 청나라는 상인 지원. 청상의 점포 늘어남.  일본 공사관은 서대문 밖에 있다. 임오군란으로 불타고 남산에 신축. 기술자와 노동자가 들어오면서. 1885년 일본인의 서울 거주 합법화 된다. 어느 순간 4대문 안으로 들어온다. 1895년 청일 전쟁 승리하면서 청나라 상인 귀국, 일본인이 접수하게 된다. 한국 강점 초기 통치 기관은 명동 충무로 인근에 들어온다. 일본인 거주 증가, 번화해짐. 명동은 신시가지가 되어 서울시내의 긴자역할을 함. 조선의 빠리. 얼마나 화려했을까.. 서울의 지명을 일본식으로 바꾼다. 1914년 충무로를 혼마찌. 명동은 메이지마찌. 마찌는 시가지.  충무로와 명동 부근에는 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은행, 조선식산은행, 경성우체국 같은 공공 시설물. 백화점, 대형상가, 유흥시설이 자리 잡음. 당연히 사람이 늘어나고 번화가가 된다.

     

    1923년 한국 최초의 다방이 명동에 등장.

    성림, 엘리자, 백림, 프린스 등의 다방이 등장. 식당도 증가. 일식직인 에도가와, 서양 식당 등장. 전통문화보다 수입문화가 반드시 우수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수입 문화의 첨단지가 되었다. 상업, 문화, 소비에서 조선의 중심지.

     

    해방 후 한국 전쟁 겪는다.

    서울 도심이 폭격받아 폐허로 변했다. 6.25때 명동과 충무로는 많은 피해를 입는다. 일제 강점기 식민지시설이 많아 대형 건축물이 많았고, 집중 포화를 받았다. 용산과 명동/충무로는 가장 피해가 큰 지역 중 하나. 전쟁 직후 폐허 지역에 사람들이 살고자하는 의지. 다방의 역할이 커진다. 빈곤과 전쟁의 피해가 있어도, 다방은 문화공간이면서 사무실이었고, 직업 소개소였다. 사람이 만나는 장소가 되었다. 명동엔 달러 환전상이 많았다. 박완서의 그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나에, 박수근 화백과 1920년대부터 명동은 금융의 중심가. 경성주식현물거래시장, 경성은행지폐소가 명동에 세워지며 증권사와 사채업자가 명동에 포진. 해방 후 미군이 들어오며 명동인근 반도호텔에 미군정사령부 들어서고 신세계 백화점에 미군 PX 들어와 미군 물품이 나오고 달러 환전상이 생겼다. 이곳에 물건도 팔고 환전상도 있고, 현재도 환전상 일부가 남아 있다. 암달러상이라 했다.

     

    남대문 시장에 미군 물품 거래가 된 이유

    60년대. 명동의 다방. 양장점, 미용실이 등장. 명동 다방은 전쟁 이전부터 문학과 예술에 대해 논한 사람이 모여들었다. 문화 예쑬의 공간. 5-~60년대 배우가 옷 맞추는 양장점, 미용실. 첨단의 패션, 미용의 유행 생산지.한양 양장. 양장사 등장. 양장점의 전성시대. 송옥, 노라노,아리사, 엘ㄹ자, 일레지, 모드모아젤 등.앙드레김과 같은 존재. 당시 양장은 첨단어였지만, 지금 양장은 낡은 느낌이다.

     

    쎄시봉 열풍. 통기타 음악의 진원지. 명동이었다.

    70~80년대 명동. 70년대 서울 인구 500만. 강북에만 있던 서울이 여의도, 강남으로 이동. 명동에 영향을 준다. 강남 개발은 명동의 위기. 여의도, 강남으로 서울의 중심 이동. 60년대 명동 재개발, 지가 상승, 다방은 떠나게 된다. 예술인도 갈 길을 잃고 흩어진다.

     

    문화예술 기관도 이동. 예술인이 명동을 떠난다.

    1971년 국립극장이 장충동으로, 76년 남산 ,KBS가 여의도로 이전. 빠리의 몽마르뜨. 예술인이 땅의 가격을 올렸고, 예술의 거리로 변했는데, 우리는 예술인이 지가르 올려고 비싸진 지가를 견디지 못해 가난한 예술인이 떠난다.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명동의 라이브 다방과 비어홀. 새로운 새대 문화, 청년 문화의 태동하던 곳.

    세시봉, 오비스 캐빈 같은 음악 다방과 비어홀 생기며 명동은 활기를 띄게 된다. 요즘은 외국인의 쇼핑 특구. 외국인의 거리에서 외국인의 거리로 돌아간 느낌. 명동의 역사적 의의. 명동은 살아 있다. 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맛있는 음식, 최첨단의 유행을 쫓아 온다.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 명동은 살아 있고, 살리는 사람이 필요하다.

     

     

     

     

     


    집결장소 : 남대문시장 앞 광장

     

     

     

     


    집결일시 : 2013. 10. 14(월) 13:50
     
    준 비 물 : 신분증, 필기도구, 음료수

     
    무선수신기 수량은 교육생 수로 제한되어 있어, 청강생에게는 충분한 양이 지급되지 않습니다. (등록마감 시간인 14:00에 교육생용 수신기 잔여분을 청강생에게 제공), 무선수신기 제공 및 탐방지 입장료면제와 관련하여 사전 연락없는 청강생의 참여는 불허합니다. 집결지 이외에서의 합류는 불가하오니, 반드시 명시된 집결지로 14:00 까지 늦지 않도록
    참석 하시기 바랍니다. 사전 연락없이 무단 결석의 경우, 차후 동일프로그램 참여에 제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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