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제 4회차(10월21일) 서울역사문화탐방
[ 특 강 ]
2013년 서울역사문화탐방 프로그램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서울역사문화탐방 제4차 교육과정[특강]이 2013.10.21(월) 시작되오니 교육생들은 내용 및 주의사항을 확인하시고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강 사 : 이순우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일 시 : 2013. 10. 21(월) 14:00~17:00
장 소 : 서울역사박물관 1층 교육실
※ 강의가 14:00부터 시작되오니 교육생은 13:50까지 오셔서 등록 후 입장 바랍니다.
서울도성 송월동~행촌동 구간의 경계구역에 대한 설명
▲ 성 밖에서 보면 예로부터 월암(月巖)이라고 불렀던 구역의 꼭대기에 해당하고, 성 안에서 보면 경희궁의 고지대에 해당하는 곳이 지금의 서울기상관측소 자리이다.
1932년 이후 경성측후소 자리였다가 해방 이후 국립중앙관상대, 중앙기상대, 기상청의 시절을 거쳤음은 익히 아는 바이다.
그런데 이곳은 으레 '송월동 1번지'라 부른다. 하지만 지적도면을 살펴보면 저 언덕 위에 지은 측후소 건물 자체만 하더라도 동쪽 편 절반 이상은 '신문로 2가 1번지' 구역에 걸쳐 있다.
이를 테면 서울성벽이 바로 이 건물을 가로지르는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이다. 기상관측소의 남쪽 성벽은 이미 복원공사가 완료된 상태이나, 성벽은 바로 그 지점에서 끊어져 있다.
지도상에 녹색경계선으로 표시한 구역의 아래쪽이 경희궁이다.
▲ 서울기상관측소를 지나는 서울성벽은 사직동 방면으로 다시 언덕을 타고 내려가는 형상을 그리고 있으나 이 지역은 주택지 안에 포함되어 있고, 더구나 성벽길을 따라가는 보행도로마저 없는 상태라서 성벽을 따라돌자면 도리없이 그 아래쪽 송월근린공원과 홍난파 가옥 옆의 길(점선으로 표시한 행로)을 따라 가는 수밖에 없다.
홍파동 구세군영천영문의 바로 뒤쪽에 가서야 빌라촌의 주차장 안쪽에 남아 있는 성벽의 흔적을 제법 확인할 수 있지만, 어쨌건 이 구역을 벗어나 '지식경제부 사직사'와 '양의문교회' 언저리까지 나가야만 다시 서울도성을 접할 수 있다.
보행로와 성벽 터가 다시 만나는 지점에 있는 삼거리에 서면 사직동 방면으로 내려서는 길목에 해묵은 선교사 사택을 만날 수 있는데, 이것이 남감리회 선교부 자리(사직동 311번지 구역)이다.
그곳에서 능선길처럼 남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사직동 방면으로 연결되는 자동차길도 나온다. 이곳에서는 먼발치로나마 경희궁 관사구역의 끝자락에 해당하는 축구회관(경희궁의 북쪽문인 무덕문 언저리) 방향의 전망도 감상할 만하다.
그런데 위의 지도에 표시해두었듯이 축구회관 전망이 보이는 능선길은 흡사 사직동이라 착각하기 십상이지만, 실상은 "신문로 2가 1번지 구역"에 해당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경희궁의 최북단지점에 바로 그곳까지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빌딩에 막혀 토막길로 남은 사직단 행차로의 흔적을 찾아서
[사직단 행차로]
사직로 8길(서울지방경찰청 앞길) 및 새문안로5가길(벽산광화문시대 후면~로얄빌딩 경유)
지금은 사직단을 왕래하는 사람이라면 대개 경복궁 앞쪽으로 해서 사직터널 방면으로 가는 행로를 택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길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만약 이러한 길을 따라 사직단 답사경로를 잡았다면 그만큼 역사탐방로의 의미는 낮아진다고 볼 수 있다.
예전에는 사진단으로 진입하는 통행로라고 하면 사직단 대문 앞에서 남동 방향으로 길게 뻗어있는 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 길을 따라 가면 지금의 종교교회(琮橋敎會, 도렴동 32번지) 앞쪽에 백운동물길을 가로지르는 종침교(琮沈橋; 또는 송첨교(松?橋)라고도 함)이 있는데, 이곳을 지나 상대적으로 좁은 길을 통과하여 광화문 육조앞길로 가는 방법이 있고, 그게 아니라면 종침교에 못 미쳐 남쪽으로 길을 돌려 좀 더 넓은 야주개(夜照峴, 또는 夜珠峴, 夜晝峴, 夜晝介로도 표시)로 지나는 방법도 자주 이용되었다.
가령, 『승정원일기』 고종 13년(1876) 윤5월 20일(경진) 기사에 수록된 내용에 따르면, 이 당시 “경복궁 향오문(嚮五門)~사정문~근정문~흥례문~광화문~송교(松橋)~야조헌 병문(夜照軒 屛門)~내수사 앞길~사직 신문(神門)”의 순서로 사직단에 행차한 기록이 있고, 한참 나중의 일이지만 순종황제의 경우에도 1908년 11월 18일 사직단에 동가(動駕)할 당시 “태묘전문(太廟前門)~어교(御橋)~철교(鐵橋; 철물교)~종로(鍾路)~황토현(黃土峴)~송교(松橋; 송기교?)~야조현(夜照峴)~내수사전로(內需司前路)~승전교(承傳橋; 承傳色橋)~사직(社稷)의 행차로를 이용한 것으로 드러난다.
이것 말고도 『영조실록』 영조 10년(1734년) 1월 4일(신사) 기사에는 “임금이 사직단에서 제사를 지내고 나서 지금부터 여러 집사(執事)들은 사직단으로 올라올 때에는 정로(正路)를 경유하고 내려갈 때에는 협로(夾路)를 경유하는 것을 영구히 항식(恒式)으로 정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이제부터 기곡제를 지내기 위해 동가(動駕)할 때에 백관(百官)은 야주가(夜珠街)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보행(步行)으로 따르고, 회가(回駕)할 때에는 종침교(琮琛橋)에 이르러 말을 탈 것이며 시위(侍衛)하는 장사(將士)들은 하마(下馬)하지 말 것을 영구히 항식으로 정하도록 명하였다”는 구절이 수록되어 있다.
이와 아울러 『정조실록』 정조 5년(1781) 1월 7일(경진) 기사에도 “하교하기를, 고사(古事)에 사직단(社稷壇)에 친히 제향을 올릴 때에는 시위(侍衛) 및 시신(侍臣), 승사(承史)는 종침교(鍾沈橋)로 말을 타고 가도록 기재(記載)되어 있다.
이렇게 한 연후에야 분답(紛畓)스러운 폐단을 없앨 수 있으니, 환궁(還宮)할 때부터는 구례(舊例)를 회복하여 거행하도록 하라”는 내용이 남아 있으므로 록되어 있다.
그나마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러한 행차로의 흔적은 - 사직단 앞에서 서울경찰청을 지나 정부서울청사로 이어지는 길은 크게 확장되어 남아 있는 반면 - 특히, 내수동과 당주동 경유 노선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 『대한제국 관보』 1907년 11월 16일자(호외)에 수록된 순종황제 사직단 행차로의 경유노선이다.
▲ 옛 사직단행차로를 지도상에 표시해보면 위의 표시와 같다.
정식 행차로는 황토현 방면에서 송기교(송교)를 지나 야주개로 접어든 다음 종침교 좌측 내수사 앞길로 해서 사직단으로 접어드는 행로였다. 이때 수행하는 이들은 야주개에 말을 내려야 했고, 나올 때는 종침교에서 다시 말을 탈 수 있도록 했던 모양이다.
종침교 방향은 상대적으로 길이 좁아 임금의 행차로로 직접 사용되지는 않았던 것 같고, 그대신 수행원들의 분잡한 상태를 피하기 위해 이쪽으로 빠져나오는 행로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 1933년에 제작된 『경성시가도』에 옛 사직단 행차로의 행로를 표시해 본 것이다.
대체로 옛 길은 그대로 남아 있는 모습이 확인되지만, 1920년대 후반 이후 황토현 신교~종침교~금청교 구간의 백운동물길이 복개된 상태였으므로 그쪽이 오히려 주된 통행로로 서서히 변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 경희궁 쪽에서 멀리 경복궁 일대의 전만을 담아낸 사진에서도 사직단 행차로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왼쪽 동그라미 표시구역이 지금의 서울지방경찰청 자리인 어의궁 터(내자동 201번지)이고, 오른쪽으로 화살표가 갈라진 지점이 곧 종침교(琮琛橋, 琮沈橋)이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곧장 나아가면 지금의 세종로, 즉 옛 육조앞길이 나오고 이곳을 가로질러 중학천의 중학교(中學橋)를 건너 안국동 쪽이나 창덕궁 쪽으로 이동할 수 있다.
종침교에서 남쪽으로 길을 잡으면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후면에 해당하는 야주개, 즉 당주동 구역을 지나 황토현네거리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
▲ 일제강점기의 항공사진에 나타난 내자동, 내수동 일대의 전경이다.
사진의 중심에서 오른쪽 아래로 기울어져 흘러내리는 흰선은 종침교 주변의 복개하천이고, 그 왼쪽으로 나란히 흘러내린 듯 배치되어 있는 검은 선은 옛 사직단 행차로(내수동 및 당주동 경유구역)의 일부이다.
▲ 옛 사직단 행차로 가운데 내수동과 당주동 경유구역은 사진에서 보듯이 토막난 뒷골목형태의 길로만 남아 있다. (북쪽을 향해 저 너머 용비어천가/벽산광화문시대를 바라본 모습이다.)
▲ 위의 사진에서 동일한 방향으로 좀 더 앞으로 나아가 담아낸 앵글이다. (길의 끝쪽은 건물 때문에 막혀있는 도로구조로 되어 있다.)
▲ 자투리 길로 남은 옛 사직단 행차로에서 남쪽을 향해 담아낸 모습이다.
길끝에 서 있는 빌딩은 당주동 로얄빌딩이다. 이 건물로 인해 도로는 완전히 막혀 있다못해 짧은 도로가 그나마 끊어지고 말았다.
이 건물의 남측에 있는 변호사회관 역시 옛 사직단 행차로 위에 건립된 상태이고, 그 남쪽에 서 있는 당주빌딩 앞에 가서야 겨우 토막길처럼 남은 사직단 행차로의 흔적을 간신히 확인할 수 있다.
▲ 벽산광화문시대의 북측 출입구가 바로 사진단 행차로(당주동 방향)의 분기점에 해당하는 지점이다.
▲ 행로표시 중 네모 박스구간이 곧 사직단 행차로 중 잔존구간에 해당한다.
사직단(社稷壇) 대문의 현판이 걸린 시기는 1962년 내지 1963년
▲ 지난 2004년에 담아낸 사직단 대문의 모습이다. (최근 문화재지정명칭의 변경고시로 사직단 정문은 '사직단 대문'으로 바뀌었다. 참고로 1962년 문화재보호법 제정 이전 시기에는 일제 때의 용어들 그대로 답습하여 '사직단 표문(表門)'이라는 명칭으로 불렀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은 대문의 서쪽으로 담장이 연결된 구조로 고쳐진 상태이다.
▲ 이곳을 들를 따마다 이 편액을 쳐다보곤 하지만 '아쉽게도' 이 글씨는 누구의 것인지 제대로 알려진 바 없다. 이 또한 나에게는 풀어야할 한 가지 숙제로 남은 셈이다.
▲ 문화재위원회회의록 제1분과 제19차회의(1962년 12월 20일자)에 보면 사직단 정문을 뒤로 옮기면서 '사직단'이라고 쓴 현판을 붙이라는 결정이 내려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이 편액은 대략 1963년초쯤에 처음 달린 것이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 사진자료로 확인가능한 사직단 대문의 원래 모습이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형태를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 자체가 뒤로 옮겨진 것은 물론이고 돌계단과 석축, 살대문 등으로 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판문으로 바뀌어 있다.
사직단(社稷壇) 대문의 2차 이전 시기는 1973년
▲ 지난 1962년 사직터널 쪽으로 길을 낼 때 사직단 정문(사직단 대문)이 양쪽으로 길부터 내고 이를 치워달라는 식의 요청이 있어 그 바람에 뒤로 물러나게 된 사실은 제법 알려지고 있으나, 알고본즉 그 이후에도 또 한번의 이전공사가 더 있었던 모양이다. [사직터널은 1967년 5월 30일에 준공됨]
▲ 위의 신문기사(『경향신문』 1973년 9월 25일자)에 나와 있듯이 "사직단 정문 앞에는 인도가 없어 통행인들이 차도로 다녀 사고의 위험이 많다"는 이유로 재차 이전공사가 벌어졌던 상황이었다.
지난 2005년에 발간된 『사직단정문실측조사보고서』 (문화재청)에도 1962년 이전사실만 서술되어 있을 뿐 그 이후의 2차 이전사실에 대해서는 별도 표기된 부분이 나타나 있지 않다.
▲ 1973년도 '문화재위원회회의록' 제1분과 제1차회의(1973년 3워 19일자) 자료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지정문화재 현상변경] 서울 사직단 정문 이건 : 원안대로 시의결정하되 공사감독은 문화재관리국에서 직접하고 완전 해체하여 이전건립토록한다"는 간략한 내용만 정리되어 있다.
『고고미술』 제7권 제8호(통권 73호, 1966년 8월)
문화재위원회 제1분과위원회 제3차 회의록(1966.7.12)
2. 서울 사직단 정문 이설건 ... 전년(前年)에 이건된 사실여부를 조사할 것
『고고미술』 제7권 제9호(통권 74호, 1966년 9월)
문화재위원회 제1분과위원회 제6차 회의록(1966.9.2)
2. 사직단정문(보물 177호) ... 현위치에서 보존토록 한다. (현장조사 맹인재전문위원)
▲ 1969년에 발행된 자료에 수록된 '사직단 정문'(원래 자리에서 14미터 뒤로 후퇴)의 모습이다. 새로 단 '사직단 편액'이 눈에 띄고, 문살이 없는 판문으로 바뀐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정리 : 이순우, 2013.3.21, http://cafe.daum.net/distor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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