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인직 (李人稙, 1862∼1916)
친일문학의 선구자
동양담론을 지지했던 『국민신보』와 반대했던 『대한매일신보』
1904년 러일전쟁시 일본군의 조선어통역관으로 종군
1906년 {국민일보} 주필
1907년 {대한신문} 사장
1908년 원각사
1911년 경학원 사성
호 국초(菊初). 경기 이천(利川) 출생. 일본 도쿄[東京] 정치학교를 수학한 뒤 1906년에 《만세보(萬歲報)》 주필이 되면서 신소설 《혈(血)의 누(淚)》를 동지에 연재, 계속 많은 작품을 썼다. 1908년에는 극장 원각사(圓覺社)를 세워 자작 신소설 《은세계(銀世界)》를 상연하는 등 신극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국권피탈 때 이완용(李完用)을 돕고 다이쇼[大正] 일본왕 즉위식에 헌송문(獻頌文)을 바치는 등 철저한 친일행동을 하기도 했으나 한국에서 처음으로 산문성(散文性)이 짙은 언문일치의 문장으로 신소설을 개척한 공로는 크다.
《혈의 누》 외에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귀(鬼)의 성(聲)》, 그밖에 《치악산(雉岳山)》 《모란봉(牡丹峰)》 등이 있고, 단편으로 《빈선랑(貧鮮郞)의 일미인(日美人)》이 있다. 한국 최초의 신소설가로서 개화사상을 고취하고 갈등과 성격 묘사, 그리고 사실적 문장을 처음으로 구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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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직(李人稙, 1862년 8월 22일(음력 7월 27일) ~ 1916년 11월 1일)은 대한제국 및 일제 강점기의 언론인 겸 소설가로, 호는 국초(菊初), 본관은 한산이며 경기도 이천 출신이다 . 1900년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 정치학교에서 약 3년간 수학했다. 1904년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제국 육군의 통역으로 발탁되었다.1906년에 《국민신보》와 《만세보》 주필을 거쳤다. 그해 소설 《혈의 누》를 썼고 1907년에 《대한신문》 사장이 되었다.
1908년 신극 운동을 벌이던 이인직은 국립극장 협률사를 인수하여 사설극장 원각사(圓覺社)로 바꾼다.1910년 8월 4일에는 일본어를 하지 못했던 이완용 대신 일본에 가서 통감부 외사국장이던 고마츠(小松綠)를 만나 한일합병을 교섭하기도 했다.[1] 이인직이 다리를 놓아 8월 16일 이완용과 조중응(趙重應)이 통감 관저를 방문하고, 8월 22일 병합 조약을 조인하였다.
경학원의 사성(司成)을 지내면서 한일 병합을 뒷받침하는 논리를 유포한 《경학원잡지》 편찬을 담당하는 등, 유교 계열의 대표적인 친일 인물로 활동했다. 또한 다이쇼 천황이 즉위할 때 친일 헌송문을 지어 바쳤다.
1916년 11월 이인직이 죽자, 총독부는 병합 당시의 공로에 대한 상여금으로 450엔의 장례비를 교부하였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고, 2006년 12월 6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도 포함되어 있다.
혈의 누귀의 성은세계치악산경학원혈의 누이완용
1895년 구한국 정부에서 일본에 파견한 제1회 관비유학생들. 이들 가운데 적잖은 친일파가 생겨났다
신소설의 개척자
이인직(1862∼1916)이라는 이름은 아직도 우리 근대문학사의 서장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신소설의
개척자로서 우리는 아직도 {혈(血)의 루(淚)}(1906)를 최초의 신소설로 신주단지처럼 모신다.
그런데 조금만 주의하면 이
작품은 제목부터 일본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일본어에서는 명사와 명사 사이에 꼭 'の'(의)가 끼어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우리식
어법이라면 이 제목은 그냥 '혈루'이거나 '피눈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제목뿐만 아니라 그 문체도 희한하다.
어제아침 이방 피난 때
昨日朝에 此房에서 避難갈 時에는
한자어에 토를 달았는데 그 방식이 일본식의 후리가나이다. 이 번거로운 일본식 문체는 이미 봉건시대부터
한글전용의 전통을 견지하고 있던 우리 소설 문체에 대한 일대 후퇴인 것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 작품의 시각이다.
청일전쟁(1894)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 작가는 청군의 부패를 맹렬히 규탄하면서도 일본군의 만행에는 짐짓 눈감고 고난에 빠진
여주인공 옥련을 일본 군의관으로 하여금 보호하게 함으로써 일본이야말로 조선의 구원자라는 의식을 교묘하게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옥련은 일본에서
다시 조선 청년 구완서에 의해 위기에서 벗어난다. 그런데 이 청년 또한 수상하다. 비스마르크를 흠모하며, 우리나라를 야만으로 은근히 멸시하는 이
민족허무주의자는 일본과 만주를 합하여 대연방을 건설하겠다고 꿈꾸니, 그 꿈은 만주침략(1931)에서 실현되었던 것이다.
이 작품이 발표되었던
1906년에, 조선인으로서 이미 1931년의 사태를 예견하고 있는 구완서는 일본군국주의의 첨병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친일문학
하면 일제 말기만 생각하기 쉽다. 천만의 말씀이다. 친일문학자는 이미 우리 근대문학 초기부터 암약하고 있었으니, 이인직과
최찬식(崔瓚植:1881∼1951)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완용의 비서로 매국협상을 배후에서 주도했던 이인직과, 일진회 총무원 최영년(崔永年)의
아들로 이인직의 뒤를 이어 1910년대에 대표적 친일문학자로 떠오른 최찬식. 우리는 이인직·최찬식을 중심으로 구성된 근대문학사의 서장을 새로이
고쳐 쓰지 않으면 안 된다.
고마츠의 제자에서 이완용의
비서로
이인직은 1862년 음력 7월 27일 경기도 음죽(陰竹), 오늘날의 이천(利川)에서 부 윤기(胤耆)와 모
전주 이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이후 백부 은기(殷耆)의 양자로 들어갔다.
본은 한산(韓山), 명문에 속하지만 그의 직계 집안은 한미해서
아마도 서계(庶系)가 아닌가 추측된다. 그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5세에 생부를, 11세에 양모 남원 윤씨를, 18세에 생모를 잇따라 여의어
고아와 진배 없었던 것이다. 일찍이 동래 정씨와 결혼하여 슬하에 자녀를 두었다.
그런데 그는 1900년 2월 장년의 나이에 문득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같은 해 9월 도쿄정치학교에 입학하여 이듬해 7월에 졸업하게 되는데, 그는 이 학교에서 앞으로의 매국활동을 위한 중요한
인연을 맺게 된다. 조중응*과 함께 열국(列國)의 정치제도와 국제법 강의를 담당한 고마츠(小松綠)의 제자가 된 것이다.
고마츠는
1906년 통감부의 외사국장으로 조선에 나와 소위 '합방'의 실무자로 활약한 자이고, 이인직의 둘도 없는 친구 조중응은 매국노였다. 조중응은
유생 때에 이미 일본과 내통한 죄를 지어 오랜 유배생활을 하다가 갑오경장 때 관리로 발탁되었으나, 1896년 아관파천으로 일본에 망명하였다.
1906년 특사로 귀국하여 일약 법부대신·농상공부대신에 올라 매국칠적(賣國七賊)의 하나로 드디어 '합방' 후 자작의 칭호까지 얻었으니, 유학생
이인직과 망명객 조중응이 도쿄정치학교를 매개로 결합하였던 것이다.
당시 유학생과 망명객의 교류는 매우 골치거리여서, 대한제국
정부는 1903년 2월 유학생 소환령을 내렸다. 물론 이인직은 이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 그는 미야코(都) 신문사의 견습생으로 일하는 한편
고국의 아내를 버리고 일본 여자와 동거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의 일본인 아내가 우에노(上野)에서 '조선루'라는 한국식 요정을 경영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유학 시절의 이인직은 견습생으로 신문일을 배우면서 망명객 조중응과 함께 고마츠의 제자가 되어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귀국의 기회는 왔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1904년 2월에 일본 육군성으로부터 제1군 사령부 소속 한국어 통역으로 임명되어
종군하게 된다. 제1군은 2월 16일 인천에 상륙, 3월 중순에는 평양으로, 4월 하순에는 압록강 우안(右岸)에 집결하여 5월 1일 강을 건너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5월 11일 봉황성으로 진격하였다. 여기서 이인직은 통역에서 해고된다.
1895년 영화관 개관(표관)
이듬해 그는 조중응과 함께 동아청년회에
가입하였는데, 이 단체는 "지식과 사교에 의해 동아인의 단결을 이루고 동아의 전국면에 문명의 보급을 꾀"한다는 취지에서 보듯이 일본의 지배를
동아시아 전체로 확대하려는 제국주의적 의도를 가진 첨병적 모임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일본, 조선, 만주를 포함한 연방을 건설하겠다고 기염을
토한 {혈의 루}의 남주인공 구완서가 바로 이인직의 분신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인직은 1906년 2월 일진회의 기관지
{국민신보}의 주필이 됨으로써 국내에서 본격적인 친일활동의 발판을 마련한다. 어떤 연줄로 그가 이 신문사에 관계하게 되었는지는 자세하지 않으나,
아마도 이 신문의 창간인 송병준*과 연관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영화 대중화의 상징 단성사
왜냐하면 일본에 망명해 있던 송병준도 이인직처럼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통역으로
귀국하여 일본 군부의 조종 아래 일진회를 통해 맹렬하게 매국활동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4개월 만에 그는 {만세보}의 주필로
자리를 옮긴다. 1906년 2월에 손병희(孫秉熙)의 발의로 창간된 이 신문은 {국민신보}의 대항지였다. 일진회는 원래 일본에 망명해 있던
손병희가 국내의 이용구*를 내세워 벌인 동학의 반정부운동단체였다.
그러나 이용구가 일본 군부의 조종을 받는 송병준과 야합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1906년 망명지 일본에서 귀국한 손병희는 천도교를 창건하고 일진회에 대항하는 사회활동의 일환으로 {만세보}를 창간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인직은 이 신문에 유명한 {혈의 루}를 연재함으로써 일약 문명(文名)을 얻고 이를 발판으로 영향력을 증대하였다.
더구나 이 시기에 도쿄정치학교
시절의 인연은 막강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니, 그의 은사 고마츠는 통감부 외사국장으로 부임하고 친구 조중응도 통감부 촉탁으로 귀국하였던
것이다.
드디어 이인직은 이완용의 후원을 얻어 {만세보}를 인수하여 1907년 7월 {대한신문}을 창간한 후 사장 자리에 앉는다.
이완용 내각의 기관지 역할을 한 이 신문을 통해 그는 본격적인 암약에 들어가게 되니, 친구 조중응은 이 때 법부대신이었다.
치악산 / 이인직, 김교제
당시 정계는
친일활동의 주도권을 놓고 이완용파와 일진회가 격렬한 항쟁을 계속했는데, 이인직은 전자에 가담하게 되었던 것이다.
1908년
이후 그는 연극시찰이니 종교적 목적이니 하는 명목으로 일본을 뻔질나게 드나든다. 실제로 그는 천리교(天理敎) 신자였다. 일본 여자와 재혼했던
이인직은 종교마저 일본 신도(神道)의 일파인 천리교에 귀의했으니 참으로 철저한 자다.
그러나 이런 명분보다도 그는 이완용의 밀사로서 일본
정객들과 매국의 막후공작을 위해서 일본 나들이에 나섰던 것이다.
1910년 8월 초순 이완용은, '합방'운동을 맹렬히 전개하고
있던 일진회에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심복 이인직을 고마츠에게 보내 결정적인 비밀접촉에 들어간다. 고마츠는 1910년 무더운 여름밤 이인직의
돌연한 방문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이인직----인용자)는 양미 간에 찬 빛을 띠우며 우선 근본문제부터 말하기 시작하였다.
"일진회가 합방론을 제창하고 또한 일본에서는 병합설이 대단하여졌다는 사정 등을 합쳐보면, 오늘날 무엇인가 대변혁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저희들은 깨달았기 때문에, 최근 저는 이수상(李首相:이완용----인용자)을 만나서 빨리 거취의 각오를 결정하시도록 근고(謹告)해
보았습니다. 2천만 조선 사람과 함께 쓰러질 것인가 6천만 일본인과 함께 나아갈 것인가, 이 두 길밖에 따로 수상의 취할 길은 없습니다. 어느
쪽 길로 나가시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수상은 잠깐 침음하다가 서서히 말씀하시기를, 5적 또는 7적이라고 불릴 정도의 현내각이 와해된다면 현내각
이상의 친일파 내각이 새로 될 수 있을 것인가 참으로 통심할 일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이와 같은 이인직의 말을 듣고서
이것은 참 좋은 문제를 가져온 것이라고 내심 기뻐하였다. 나는 유달리 하하 웃으면서 손수 맥주를 따라서 그에게 권하고 나도 마셨다. 넓은
응접실에는 단 둘뿐 다른 누구도 있지 않았다.(고마츠, {조선병합의 이면}小松錄, 『朝鮮倂合之裏面)
이를 기틀로 협상은 급진전, 마침내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이완용파의 주도 아래 멸망하였던
것이다.
장례도 일본식으로
이처럼 혁혁한 공으로 이인직은 1911년 경학원 사성(司成)으로 임명받는데, 연봉이 900원이었다.
이완용이 2000원, 조중응이 1600원이었던 데 비하면 낮지만 꽤 높은 금액이 아닐 수 없다. 경학원은 일제가 조선 왕조의 정신적 권위인
성균관을 격하하여 설치한 기관으로 전국의 유림을 선무하는 공작을 가장 중요한 임무의 하나로 삼았던 곳이다.
이인직은 이미
1909년 즈음 대동학회(大東學會)에 은밀히 관여한 바 있다. 이 회는 원래 1907년에 '유교를 유지코자 하는 대목적' 아래 조직되었는데,
유교를 빙자한 매국에 앞장 서 왔었다.
헤이그 밀사사건이 나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사죄문을 보내고, 의병을 '철부지의 불장난'으로
매도하고, '우리나라의 위기를 평안으로 전환시킬 유일한 길은 오직 일본과 결합하는 한 가지 일'임을 천명하면서 전국에 22개의 지회를 두어
유림의 친일화를 기도하였던 것이다. 대동학회는 1909년 공자교회로 전환된바, 이인직은 이에 간부로 참여하여 지방조직 건설에 몰두한 바 있었다.
아마도 이 같은 경력이 그를 경학원 사성으로 발탁되게 하였을 것인데, 그의 정력적 친일활동은 맹렬하기 짝이 없다. 전국을 순회하며
유림을 선무하는 한편 1913년에는 {경학원잡지}를 창간하여 유림에 대한 회유와 협박을 더욱 조직적으로 수행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 활동 가운데
절정은 다이쇼(大正)의 즉위 대례식에 헌송문을 지어 바친 일이다.
이처럼 견마지로를 다하던 그도 1916년 11월 21일
신경통으로 총독부 의원에 입원, 나흘 만에 허무하게 이승을 하직하게 되는데, 총독부는 죽기 하루 전 그의 연봉을 1000원으로 특별 인상한다.
당시 신문은 그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조선인으로 태어나 일본인으로 죽은 이인직
학창 시절 국어 시간에 반드시 달달 외워야 하는 내용이 있다. 최초의 서사시는 김동환의 <국경의 밤>, 최초의 자유시는 주요한의 <불놀이> 하는 따위다. 여기에 이인직의 <혈의 누>(血の淚:피 눈물)는 최초의 신소설로 암기해야 했다.
요즘에는 사극 영화 제목으로도 쓰였던 ‘혈의 누’. 그러나 최근 연세대 국문과 설성경 교수는 <혈의 누>보다 8년 앞선 1898년 《한성신보》에 연재된 ‘토소자’의 <엿 장사>를 최초의 신소설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조만간 교과서도 바뀔 처지다.
여하튼 이인직은 ‘혈의 누’ 덕분에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문학인으로 알려져 있어 생각보다 이인직의 극악한 친일 행위는 가려져 있기도 하다. 지금도 그이의 고향인 경기 이천 설봉산 자락에 있는 도자기 공원에 가면 이인직을 기리는 문학비가 큼지막하게 서 있기도 하다.
1862년 경기 이천에서 태어난 이인직은 초기 친일파에 속한다. 다섯 살에 친아버지를, 열여덟에 친어머니를 잇따라 여의고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지냈던 이인직에게 1900년 일본 유학은 자신의 불행했던 삶을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 두 번 다시 없을 신분상승의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이 앞에 서서히 열리고 있는 기회는 반대로 대한제국의 멸망을 의미하였다.
일본 유학 시절 이인직의 스승은 고마츠. 고마츠는 1906년 통감부의 외사국장으로 조선에 나와 한일병탄 조약의 실무자로 설친 자이니 이인직의 친일은 어쩌면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1904년 일 본의 대륙 침략에 자신감을 완전히 얻게 되는 러일전쟁 때 이인직은 일본 육군에 배속되어 통역을 담당하면서 친일의 길로 들어선다.
1906년에는 송병준이 주도하는 친일 단체 일진회 기관지 《국민신보》의 주필이 되면서 국내에서 본격적인 친일 활동을 벌인다. 한일합병 당시 일제와 합병을 앞장선 양대 세력이 있었는데, 바로 송병준의 일진회와 이완용이 이끄는 내각이었다. 이인직은 처음에는 송병준 계열의 《국민신보》 주필로 활동하다가 1907년 이완용의 후원으로 이완용 친일 내각의 기관지인 《대한신문》 사장에 취임하면서 이완용 내각과 관계를 맺어 나간다.
1910년 경술국치 이전까지 이완용의 비서로 활동한 이인직은 경술국치 이후에 ‘경학원 사성’이라는 직위를 얻는다. ‘경학원’은 조선 왕조의 정신적 기관인 성균관을 격하하여 유림들을 친일로 전향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이인직이 합방 조약 때 활약상에 견주어 생각보다 낮은 직위인 경학원 사성밖에 오르지 못한 것은 의문점으로 남는데, 아마도 정치적 수완은 조금 약했던 모양이다. 합병 때 이인직은 이완용의 밀사로서 자신의 유학 시절 스승이자 합방 조약의 실무자였던 고마츠와 자주 내통했다고 한다. 송병준 세력을 견제하면서 자기 세력을 중심으로 합방 조약을 체결하려는 이완용으로서는 고마츠의 제자인 이인직의 활용 가치를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뒤에 고마츠는 《조선병합의 이면》이라는 책에서 이완용의 밀명을 받고 자신을 찾아온 이인직과 있었던 일화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한일 합병’에 앞장 선 그이가 꿈 꾼 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대표 작품인 <혈의 누>가 아마도 그 해답이 되지 않을까 싶다. 작품은 청일전쟁 때 청군의 무능과 부패를 비판하면서 여주인공 옥련을 구해 주는 일본군 군의관을 등장시킨다. 이는 조선이 그동안 청나라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현실과 함께 조선을 구해줄 구원자는 바로 일본이라는 암시이기도 하다.
이는 당시 개화 사상을 갖고 있던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의식 구조이다. 즉 조선의 근대화는 덩치만 크고 무능하며 시대에 뒤떨어진 청나라가 아닌 서구의 근대 문물을 빨리 받아들여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 또는 미국, 영국 같은 서구 열강을 통해서 이뤄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 지식인들의 눈과 마음은 이미 자신이 개화를 통해 발전시켜야 할 조선에서 떠나 오히려 그 나라들을 흠모하게 되어 버렸다. 마치 없는 살림에 농사지어 서울로 고생고생하며 유학을 보낸 자식이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오히려 자신의 고향을 도시와 견주면서 천하게 여기는 경향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다시, 주인공 옥련은 일본에서 구완서라는 조선 청년을 만난다. 구완서는 조선을 업신여기면서 자신은 일본과 만주를 합하는 대연방을 건설하겠다고 말한다. 구완서의 꿈은 정확히 26년 뒤인 1932년 일본이 건국한 꼭두각시 국가인 만주국의 출현으로 실현되있다. 이인직이 <혈의 누>에서 말하고 있는 꿈은 본디 자신의 꿈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스승인 고마츠를 비롯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꿈이었을 것이다.
구한말 조선에서 어떠한 희망도 찾지 못한 청년 이인직이 선택한 것은 자신의 새로운 조국 일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제국 일본의 성공을 곧 자신의 성공으로 맞바꾸고자 했던 이인직.
1916년 이인직의 장례식은, 이미 정신마저 완벽한 일본인인 데다 일본 신도의 한 분파인 천리교 신자였으므로 천리교 식으로 치러진다. 문학뿐 아니라 연극 따위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했던 이인직. 그이는 태어날 때는 조선인이었지만 죽을 때는 이미 완벽한 일본인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인직의 소설 <혈의 누>는 바로 자신의 조국이 희망을 주지 못할 때 그 조국을 등지게 되는 과정을 피눈물로 보여 주는 것은 아닐까.
이인직 씨의 장의
천리교식의 장의
경학원 사성 이인직 씨의 장의는 본월 28일에 고양군 용강면 아현화장장에서 거행하였는데 장의의
제반의식은 동씨의 평일 신앙하던 바 천리교식으로 행하였는데 당일 참회한 회원은 경학원 부제학 박제빈남(朴齊斌男) 이하 경학원 직원 일동과 천리교
신도 다수와 이완용백(伯), 조중응자(子), 유성준* 제씨와 총독부의 다수한 관리가 호종하였으며 씨의 평일 공로를 위로하기 위하야 당국에서는
상여금이라는 명목으로 450원의 금액을 하부하였고 대제학 자작 김윤식 씨는 부제학 자작 이용직(李容稙) 씨를 대리로 명하여 일반직원을 대동하고
제권을 행하였더라.({매일신보}, 1916. 12. 2)
한일합방의 주역들
■ 최원식(인하대 교수·국문학)
신소설가 이인직(李人稙), 친일의 이름으로 한줌의
재가 되다
원각사는 서울 종로구 새문안교회 자리에 있었던 한국 최초의 서양식 사설극장이다. 한국 신극운동의 요람으로 1908년 창설되었으며, 그해 11월 이인직(李人稙)의 신소설 《은세계(銀世界)》를 처음으로 신극화하여 상연하였다. 원각사 건립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이두현(李杜鉉)은 그의 《한국 신극사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1902년까지 국내에는 연극을 전문적으로 상연할 극장이 없었는데 1902년 정부에서 고종(高宗) 등극 40년을 기념하기 위해 칭경예식장(稱慶禮式場)으로 봉상사(奉常寺) 구내(지금의 종로구 새문안교회 자리)에 로마식 극장을 본떠 2,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연회장소를 짓고 지금의 극장 명칭에 해당하는 ‘희대(戱臺)’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이 원각사의 전신이다.
그해 8월부터 칭경예식을 위한 준비로 협률사(協律司)라는 관청을 두어 기녀(妓女)들을 뽑아 연희(演戱)를 교습시켰다. 9월 17일로 예정된 칭경예식이 콜레라의 만연과 영친왕(英親王)의 두진(痘疹)으로 가을로 연기되자 그 동안 가무를 연습했던 사람들은 ‘협률사’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기녀 ·삼패(三牌) ·광대(廣大) 등을 모집하여 희대에서 가무의 공연과 활동사진 상영 등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협률사의 활동에 대한 여론이 좋지 못하여 1906년 고종의 명으로 협률사를 혁파(革罷)하고 건물은 1907년 2월부터 관인구락부(官人俱樂部) 전용건물로 사용하였다.
협률사가 사설단체로 궁내부 관할에서 벗어난 뒤에도 이 건물은 계속 극장으로 사용되었으며 1908년 1월 하순, 관인구락부가 남대문 쪽으로 이전하자 그해 7월 이인직이 이 건물에 원각사를 개설하면서부터 이 건물을 원각사극장이라 부르게 되었고 연극을 상연하는 장소로 고정되었다. 이리하여 궁내부에서 직할하는 국립극장이 된 원각사에서는 처음 2개월 간은 《춘향가》 《심청가》 《화용도(華容道)》 등 판소리를 주로 상연하다가 11월 15일 《은세계》를 상연하였는데 당시 신연극이란 이름 아래 상연된 한국 신연극의 효시였다.
그러나 이 최초의 신연극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여 원각사는 한때 휴연(休演), 1909년 5∼6월에 이인직이 일본 연극계를 시찰하고 돌아와 그곳 연극을 답습한 후 《천인봉(千仞峯)》 등의 새 극본을 상연하려 했으나 실행치 못하고 《춘향가》를 공연하였으며 다시 일본에 다녀와서 《수궁가》를 공연하였다. 그 이후 국민회 본부사무소로 사용되고 1909년 11월에 폐지되었다. 191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혈의 누
1906년 7월 22일부터 10월 10일까지 50회에 걸쳐 <만세보>에 연재한 이인직의 신소설. 단행본으로는 1907년 광학서포에서 발간되었으나 그 내용은 <만세보> 연재분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혈의 누>의 하편으로는 1907년 <제국신문>에 연재한 <혈의 누> 하편과 1913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모란봉>이 있다. <제국신문> 연재분은 옥련모의 미국방문기이며, <매일신문> 연재분은 옥련의 귀국 이야기로, 내용 전개상 <매일신문> 분이 <혈의 누> 하편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1912년에는 동양서원에서 <혈의 누> 상편을 <모란봉>이라는 제목으로 개제한 정정본이 출간되기도 하였다.
이 작품은 청일전쟁을 시발로 하여, 그후 10년간 한국, 일본 및 미국을 무대로 펼쳐지는 옥련 일가의 기구한 운명을 그리면서, 자주독립사상, 신교육사상, 자유결혼관 등 근대적 가치들을 다루고 있다. 고대소설의 문체를 탈피하지 못하였고 구성이나 이야기 전개가 미숙한 점 등 취약점을 보이기도 하지만, 취재의 현실성이나 묘사의 사실성, 새로운 주제의식 등을 통해 근대소설 이행기의 면모를 보여주는 최초의 신소설이라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가 있다.
청일전쟁의 전화가 평양 일대를 휩쓸고 피난 중 남편과 자식을 잃어버린 한 부인이 정신없이 모란봉을 헤매다 일본 헌병에게 구출된다. 그녀의 남편 김관일은 아내를 잃고 헤매다가 집으로 돌아와 남의 나라 사람들이 남의 땅에서 전쟁을 치르는 현실을 비탄하며 부강하지 못한 나라의 백성으로서 큰일을 이루고자 그길로 미국 유학을 떠난다. 남편과 엇갈려 집으로 돌아온 최씨부인은 남편과 딸을 기다리다 비관하여 대동강에 투신하나 뱃사공에게 구출되어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피란 중 어머니를 잃고 폭탄 파편에 맞아 부상을 입은 옥련은 이노우에라는 일본인 군의관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고, 그의 양녀가 되어 일본에서 성장하게 된다. 이노우에가 전사하자 양모의 구박이 심해지고 결국 가출하게 된 옥련은 무작정 동경행 기차를 타는데, 거기서 우연히 구완서와 마주친다. 조선을 부강하게 만들겠다는 포부를 지니고 미국 유학길에 오른 구완서는 옥련의 사연을 듣고 함께 갈 것을 권유한다. 미국에 간 옥련은 역경을 딛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게 되는데, 이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실리게 되고 이를 본 아버지와 만나게 된다. 옥련과 구완서는 결혼을 약속하고, 평양에 있는 어머니는 죽은 줄만 알았던 딸의 귀국을 애타게 기다린다
국립극장 원각사 (1908년)
은세계
귀(鬼)의 성(聲)
이인직, 李人稙 , 1862(철종 13)∼1916.
신소설 작가·언론인·신극운동가. 혈의 누|귀의 성|모란봉|은세계, 국민신보 주필|대한신문 창간, 호는 국초(菊初). 경기도 이천 출생.
1900년 관비 유학생으로서 일본 동경의 정치학교에 수학하였다. 러일전쟁 때는 일본 육군성 한국어 통역에 임명되어 제1군사령부에 소속되어 종군하였다.
1906년≪국민신보 國民新報≫ 주필, ≪만세보 萬歲報≫ 주필 등을 역임하였고, 1907년≪대한신문 大韓新聞≫을 창간하여 사장이 되었다. 1908년에는 원각사(圓覺社)를 세워 <은세계 銀世界>를 무대에 올려 상연하였다.
또한 신파극을 수용하여 상업적 호응을 얻는 등 신연극운동의 선구자로 활동하였다. 그 뒤 선릉참봉(宣陵參奉)·중추원부찬의(中樞院副贊議) 등을 지냈다. 친일 지식인으로서 일본을 자주 내왕하였다.
경술국치 이전에는 이완용(李完用)의 비서로서 그의 정치적 노선에 동조하여 일본 관원 고마쓰(小松綠)와 내통, 일본 강점에 협력하였다. 국치 이후에는 경학원사성(經學院司成)을 지냈다. 주요 작품으로는 <혈(血)의 누(淚)>(1906)를 비롯하여 <귀(鬼)의 성(聲)>·<치악산 雉岳山>(1908) 상편과 <은세계>·<모란봉 牡丹峰>(1913)·<빈선랑(貧鮮郎)의 일미인(日美人)>(1912) 등이 있다.
특히, <혈의 누>는 첫 장편소설로서 본격적인 신소설의 효시에 해당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청일전쟁부터 10여 년간의 옥련의 삶을 통하여 자주독립, 신교육, 신결혼관, 국제세력의 인식, 봉건성의 탈피 등 새로운 주제를 제시하였으나, 표면적인 주제와 내면적인 형상화간의 괴리가 있는 점이 지적될 수 있다.
바로 후편에 해당하는 <모란봉>은 그러한 주제의식이 후퇴하여 평범한 애정소설에 머무르고 만다. 한편 <귀의 성>·<치악산>은 처첩의 비극·갈등, 고부간의 불화를 통한 봉건적 윤리비판, 가부장제의 모순, 양반과 상민간의 신분갈등, 관료의 학정과 비호를 비판적으로 제시한 계몽소설로서, 참신하지는 않으나 사회비판적 현실반영 장면이나 사건의 세부묘사, 문장의 입말체 등 근대소설적인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은세계>는 관료층의 수탈과 학정에 대한 고발정신, 민요의 풍자적 삽입 등 이야기의 현실성에 있어 적절성을 얻었고, 객관적 관점이 살아난 작품으로 신소설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의 하나로 손꼽힌다. 그밖에 단편 <빈선랑의 일미인>에서도 장편과는 다른 측면에서 객관적 서술 및 뛰어난 단편양식적 인식을 보여준다.
이처럼 문학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인직은 최초의 신소설 작가로서 구소설과 근대소설로 이어지는, 소설의 전통적 연결을 시도하고 확립한 주요 작가이다.
물론, 계몽주의 사상을 기저에 깔고 있으면서 제국주의적 국가관을 암암리에 담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는 많지만, 문장에서 입말체와 묘사체 시도의 효시를 보이며, 객관묘사와 심리묘사의 뛰어난 기량 등, 신소설 최고의 작가로 평가된다.
호는 국초(菊初). 1862년 경기도 음죽 출생. 1900년 관비 유학생으로 도일하여 도쿄정치학교 청강생으로 수학하였으며, 유학 중 일본의 민간 신문 <미야꼬신문(都新聞)>사에서 기자연수를 받았다. 1903년 노일전쟁 중 한어(韓語) 통역에 임명되어 일본군 제1군사령부에 부속, 종군했다. 1906년 <국민신보> 주필, <만세보> 주필로 활동하였다. 1907년 <만세보>가 폐간되자 이를 인수한 <대한신문> 사장으로 취임했다. 이때부터 이완용(李完用)의 비서역을 맡았다. 1911년 7월부터 1915년까지 경학원 사성(司成)을 맡아 전국 유림을 관장하는 한편, 선능 참봉과 중추원 부참의를 역임하였다.
이인직의 소설은 두 가지 계열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혈의 누>(1906)와 그 속편인 <모란봉>(1913), <은세계>(1908) 등을 묶을 수 있는 신소설의 형태이며, 다른 하나는 <귀의 성>(1906), <치악산>(1908) 등 가부장제에 바탕을 둔 권선징악적 구소설의 연장선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습형 계열의 소설들이다. 이인직의 작품을 통해서 초기 신소설의 대표적인 형태가 주목되는데, <혈의 누>(1906)의 경우, 이인직의 작가의식이라 할 수 있는 청국의 증오와 일본에의 편향성, 구정치인에 대한 비판적 태도, 문명개화를 통한 사회개조 등의 이데올로기가 현실성을 띠면서 수용되는 반면, 후편인 <모란봉>(1913)에 이르면 옥련을 아내로 맞으려는 서일순의 음모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흥미위주로 전개되며 통속화된다. 탐관오리의 학정을 비판하고 신교육의 필요성을 주제로 한 <은세계>(1908)에서도 민요삽입을 통한 현실비판과 풍자의식이 강하게 드러나는 전반부와 외세영합적 순응태도가 주조를 이루는 후반부가 현격히 상반되는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최초의 신소설 작가로서, 한국소설이 근대소설로 전개되는 데 교량적인 역할을 한 공로가 인정되지만, 그의 문학이 보여주는 작품성의 퇴조와 친일적 경향은 신소설의 주제의식의 한계를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혈의 누>는 주인공 김옥련의 여행길을 따라가는 식으로 구축되어 있다. 일청전쟁의 승패를 가른 평양전의 와중에서 부모와 헤어져 위기에 빠졌던 옥련은 일본군 군의의 구원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일본군 군의의 집에서 행복했던 그녀는 다시 위기에 빠지는데, 이때 다시 한국인 유학생 구완서의 도움을 받는다. 그리고 구완서를 따라 미국 유학길에 올라 근대문명을 본격적으로 익히게 된다.
옥련의 이 같은 여로를 통해 <혈의 누>가 드러내고자 한 주제는 분명하다. 근대화만이 한국사회가 나아갈 유일한 길이고 그것을 위해서는 신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 옥련과 구완서의 입을 통해 피력되는 자유연애, 자유결혼의 사상은 이에 비한다면 부차적인 것이다.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옥련의 여로가 외적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수동적인 성격의 것이라는 점이다. 일청전쟁, 정상(井上) 군의, 구완서의 개입에 이끌려 그녀의 여로는 조선-일본-미국으로 이어진다. 이 같은 수동성은 현실에 대한 반성적 탐구와, 작가가 제시하고자 한 새로운 이념에 대한 검토가 전적으로 결여돼 있음을 반영한다. 당대 한?......
이인직의 첫 소설인 <혈의 누>가 ‘청일전쟁’을 ‘일청전쟁’이라 부르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 일본군을 옹호하고 청나라 군사를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태도로 일관되어 서술되었음과 함께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주인공 김옥련이나 약혼자 구완서의 미국 유학이라든가 그들이 내세운 신교육 사상, 문명개화 사상의 피력, 작가가 자주 표면에 큰 얼굴을 내밀어 탐관오리를 매도하는 것 등에 있다.
친일적인 사상, 탐관오리로 표상되는 구정치인에 대한 혐오 사상, 신교육 사상에 대한 긍정이라는 이 세 가지 골격은 그가 당시 한국적 현실을 가장 실리적인 측면에서 파악한 탓이다. 그는 마흔 살까지도 벼슬을 하지 못한 미미한 계층 출신이며, 따라서 구정치인에 대한 증오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거니와, 일본을 청국보다 일층 높이 평가한 것도 사정은 같다. 즉 계층적 뿌리가 약해 권력층에 설 수 없었던 그는 일본과 청국 중 어느 쪽이 실력이 있느냐, 어느 쪽에 기댐이 현실적인가를 편견 없이 자유로운 처지에서 바라볼 수 있었음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적인 감각을 이념의 레벨에서 번역해서 말해질 땐 ‘문명 개화’로 표상되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신문사 주필이 되고 또 사장이 되는 길에 결정적 역할을 했지만, 그가 주필이나 사장이 되어 펴고자 한 원래의 포부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당초 그의 포부란 신문사의 주필이나 사장이 됨으로써 정당정치의 대의사로서 그 당의 정견을 펴는 정치 소설가로 천하를 주름잡는, 저 <가인지기우>나 <설중매>, 또는 <경국미담>의 작가를 본받음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독립협회와 그 연장선에 있던 만민공동회가 이미 보부상에 의해 해체된 지 오래며, 의회정치는커녕 바야흐로 일본 총독정치가 시작된 한국에 있어서는 일본과 같은 정치소설은 생각할 수 없는 여건이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그가 할 수 있는 현실적 선택은 정치 소설의 결여 형태인 <혈의 누>를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청국에의 증오와 일본에의 편향성, 구정치인에 대한 비판적 태도, 문명 개화를 통한 사회개조가 <혈의 누>의 성격을 결정한 것이며, 1906년 지식인의 수준으로 볼 때 이러한 성격은 현실적이라 할 것이다. 이를 두고 사이비 또는 준(準) 정치소설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준 정치소설적 성격도 시기가 지날수록 더욱 흐려져, 1904년 가을에 김관일과 그의 딸 옥련이 귀국함으로써 비롯되는 <혈의 누>의 하편격인 <모란봉>에 이르면, 고대소설의 수준으로 후퇴하고 마는 것이다.
- ‘정치소설의 결여 형태로서의 신소설: 이인직의 경우’, 김윤식, <한국문학대표작선집20 : 혈의 누 외>,문학사상사, 1995
국초 이인직과 춘원 이광수 - 새로운 문학의 길을 가다
한정주 한국사천자문
菊稙血淚 光洙無情 (국직혈루 광수무정)
국초 이인직은 혈의 누를, 춘원 이광수는 무정을 썼다.
菊(국화 국) 稙(올벼 직) 血(피 혈) 淚(눈물 루) 光(빛 광) 洙(물가 수) 無(없을 무) 情(뜻 정)
1).새로운 소설이 등장하다 - 혈의 누(血淚)
『혈의 누(血淚)』는 국초(菊初) 이인직(李人稙)이 1906년 일간 신문인 《만세보(萬歲報)》에 연재한 작품입니다. 피눈물이라는 뜻을 지닌 『혈의 누』의 스토리를 이인직은 모두 3단계로 나누어 집필하고 진행시켰습니다. 청일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부모와 헤어진 여주인공 옥련의 성장 이야기가 『혈의 누』 상편에 해당한다면, 1907년 《제국신문(帝國新聞)》에 연재된 『혈의 누』 하편은 옥련의 미국 방문 이야기를 담고 있고, 1913년 《매일신보(每日新報)》에 연재한 『혈의 누』의 속편 격인 『모란봉』은 옥련의 귀국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혈의 누』는 연재와 동시에 세상 사람들의 큰 주목과 관심을 끌어 모았습니다. 설화나 전설 혹은 민담이나 우화를 기반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고대소설이나 설화문학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형식의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인직은 1907년에 단행본 『혈의 누』를 출간하면서, 이 이야기책이 이전 시대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소설임을 당당하게 밝혔습니다. 즉, 『혈의 누』를 신소설(新小說)로 소개했습니다. 이때부터 이인직과 같은 개화파 지식인들이 창작한 새로운 형태의 이야기를 일컬어 '신소설(新小說)'이라고 부르는 일이 보편화되었고, 『혈의 누』는 최초의 신소설이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혈의 누』로부터 시작된 신소설은 여러 측면에서 이전의 고대소설이나 설화문학과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먼저 고대소설은 문장이나 언어 배열에 일정한 규칙을 부여한 운문(韻文)이나 상투적인 한문체를 사용했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과 거리가 있는 부자연스런 문장이나 문체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반면 신소설은 말과 문장을 일치시키는 산문(散文)을 사용했고, 상황이나 사건에 대해서도 상투적 묘사보다는 구체적이고 현실감 있게 표현했습니다. 또한 고대소설이나 설화문학이 권선징악의 메시지를 강조한 반면 신소설은 개화파 지식인들이 추구한 계몽사상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신소설에는 문명개화·근대화한 지식인·자유연애·자유결혼 등이 주제나 소재로 자주 등장하고 즐겨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역사 최초의 신소설이라는 영예를 얻은 『혈의 누』에는 안타깝게도, 우리보다 앞서 근대화에 성공한 외세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조선의 후진성을 벗고, 조선 백성의 미개함을 깨우칠 수 없다는 개화파 지식인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이인직은 자신의 신소설에서 일본과 미국의 근대화 모델과 선진 문물을 통해 조선 사회를 들여다보면서, 조선은 계몽의 대상인 반면 일본과 미국은 동경의 대상으로 설정해 놓았습니다. 훗날 이인직은 일본이 우리의 주권을 빼앗을 때 이완용을 돕고, 다이쇼(大正) 천황의 즉위식에 헌송문을 바치는 등 친일 앞잡이 노릇을 했습니다. 이와 같은 행동의 배경에는 일찍이 그가 『혈의 누』에서 보여준 일그러진 문명관, 즉 문명 세계인 일본과 미국에 대한 동경과 미개하고 후진적인 조선에 대한 부끄러움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여하튼 이인직은 『혈의 누』 이후 『귀(鬼)의 성(聲)』, 『치악산(雉岳山)』 등의 신소설을 계속 발표하면서, 이광수(李光洙)의 등장으로 본격적인 근대 소설이 시작되기 전까지 고대 소설(혹은 설화문학)과 근대 소설을 잇는 가교 역할을 했습니다.
이인직씨 드러보소. 연희('연극'을 의미함) 개량한다 하고 일본까지 건너가서 여러 달을 유전타가 근일에야 나왔다니 무슨 연희 배워왔나. 연희 개량 고사하고 동서분주 출몰하는 공의 형상 볼작시면 연희보다 재미있네. 공의 일도 가탄하다."
대한매일신보 1909년 5월 20일자 '시사평론' 난에 실린 글이다. '시사평론'의 글들은 모두 '아무개씨 드러보소'로 시작하여 '가련하다' '가증하다' '딱하도다' 등으로 끝나는데 평론이라기보다 '가십(gossip·가벼운 읽을거리)'에 가까웠다. 당대 최고의 신소설 작가로 인기를 누리던 이인직에 대해 대한매일신보가 "가히 탄식할 만하다"고 조롱한 데는 까닭이 있었다.
2).근대 소설의 첫 장을 열다 - 무정(無情)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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