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계
박순천 (朴順天, 1898∼1983)
제자를 정신대로 보낸 청기사
1940 황도학회 발기인
1941 이후 조선임전보국단 주최 '결전부인대회'연사
1945 건국부녀동맹 부위원장 선출 이후 각종 여성단체활동에 앞장섬
1946 독립촉성애국부인회 결성, 부회장에 선출 대한부인회 회장으로 6년간 재직
1950 제2대 국회의원
1955 민주당 창당 참여
1956 민주당 최고의원
1967 신민당 전국구 의원
박순천(朴順天, 1898년 음력 9월 10일 ~ 1983년 1월 9일)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교육자이며 대한민국의 여성운동가, 정치인이다. 민주당 창당 후 대표최고위원을 지냈고, 장면, 곽상훈, 정일형, 이철승 등과 함께 민주당 신파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5·16 직후 정치금지를 당하였다가 해제후, 1963년 민주당을 재건하였으나, 뒤에 유신정권에서 국토통일원 고문, 육영수여사 추모기념사업회 이사장, 대통령국정자문위원 등을 지냈다. 본명은 박명련(朴命連)으로 뒤에 순천이라는 예명을 사용하다가 1960년 박순천으로 정식 개명하였다. 1950년 대한부인회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부산과 서울에서 거듭 당선되면서 2, 4, 5, 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72년 유신체제 출범 이후 친유신, 친5공 인사로 변신하여 송건호 등 재야인사들로부터 변절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경상남도 기장군 기장읍 출신.
기장에 여학교인 명정의숙 여학당 설립이 논의되자 조언했다 하며[출처 필요] 경성가정여숙 부교장이자 여성계와 교육계의 저명 인사로서, 태평양 전쟁 시기에 전쟁 지원을 독려하는 친일 활동을 했다. 1940년 친일 단체인 황도학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했고, 1941년부터 조선임전보국단 주최의 강연에 연사로 참여했다. 이러한 경력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교육/학술과 친일단체 부문에 선정되었다.
경성가정여숙 학생이었다가 조선여자근로정신대에 지원했던 김금진의 증언을 근거로, 황신덕과 함께 '제자를 정신대로 보낸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다.[2] 그러나 김금진이 지원해 근무한 정신대는 통상적으로 알려진 일본군 위안부와는 다른 여자 근로 정신대이며, 정신대 지원이 없으면 학교가 폐교된다는 협박 때문에 자발적으로 지원한 것이므로 황신덕과 박순천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도 있다.
1945년 광복 직후 건국부녀동맹에 참가하면서 정치 활동을 시작, 우익 여성 단체인 독립촉성애국부인회 회장(1947), 《부인신문》 사장 등을 지냈다.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종로 갑구) 총선에서 낙선하였다. 같은 해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 감찰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49년 대한부인회 회장, 대한여자청년단 단장 등을 지냈
1949년 8월 20일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고,[4] 1950년 대한부인회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부산과 서울에서 거듭 당선되면서 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후 1954년 5월 제3대 국회의원 총선거는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낙선하였다.
야당 정치인과 민주당 재조직
야당 지도자
1982년 12월 29일 고혈압성 신부전증과 뇌졸중으로 연세대학교 의료원에 입원하였다가 이듬해 1월 9일에 사망했다.
민주당 신파의 지도자였음에도 5·16 군사 정변 이후 군정에 참여하였다 하여 변절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송건호는 박순천과 곽상훈을 박정희 정권 말기에 변절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전국구를 포함해 5선 의원으로 우리의 정치사에서 여성정치인으로는 첫 손에 꼽히는 박순천 여사는 20년 가까운 정치인 생활을 민주당 총재, 민중당 최고위원, 신민당 고문 등을 지내면서 독재권력과 맞서 싸웠다. 그러면서도 대화정치를 지향해 제6대 국회 때 한·일협정과 월남파병문제로 정국이 경색되자 소속의원들의 의원직사퇴서를 들고 국회의장과 담판을 벌이고 박정희 대통령과 영수회담으로 정국을 정상화시키는 등 강인함과 함께유연함을 보여준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다. 민주당의 유세장에서 자유당을 향해 “논두렁 정기라도 타고나야 국회의원을 한다는데 당신들은 고작 거수기(擧手機) 밖에 못한단 말인가”라며 나무랐다고 한다.1969년 정계일선에서 물러나 있을 때는 박정희 대통령이 박 여사를 ‘누님’이라 부르기도 했다는 일화는 친화력을 갖춘 정치인임을 보여주는 일화다. 박순천 여사의 정치적 정점은 1965년 통합 야당인 민중당(民衆黨)의 당수를 지냈던 시절일 것이다. 지금도 박순천이라는 이름 앞에 야당 당수가 붙는 이유다. 민중당은 1965년 5월 당시 제1야당인 민정당(民政黨)과 제2야당인 민주당(民主黨)이 합쳐 창당한 통합야당이다. 박순천 여사는 같은 해 6월에 열린 제1차 전국대의원대회에서 윤보선 후보를 제치고 초대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됐다. 늘 한복차림이었던 그는 ‘백성이 살기 편해야 나라도 번창함은 예나 지금이나 만고의 진리’라 했다. ‘박 할머니’의 유산 같은 이 말씀은 오늘의 정치에도 여전히 귀감으로 남아있다.
강(强)·유(柔)의 리더십
마침내 그는 1965년 통합야당 민중당(民衆黨) 대표최고위원이 됐다. 여성이 제1야당 당수가 된 것은 박순천 여사가 처음이다. YS 와 DJ 모두 그 밑에서 정치 수업을 받은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그에게 ‘여걸’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 사진은 바로 그 여걸 박순천 여사가 1967년 국회본회의장 의석을 돌며 의원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는 모습이다. 아마 당시 유행했던 ‘오리온 드롭푸스’였을 것이다. 한복에 사탕통을 들고, 의석마다 돌면서 한움쿰 사탕을 쥐어주는 모습은 영락없는 손자에게 사탕을 나눠주는 할머니 모습이다. 의석에서 재털이까지 놓고 담배를 피우는 의원들에게 “담배는 해로우니 사탕을 먹으라”고 말하는 것 같다. 박 여사가 이런 자상한 모습을 보인 1967년은 여야 대립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3선 개헌을 위한 개헌선 확보를 위해 6·8 총선에서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이에 야당의 반발은 물론, 학생 시위가 일어나 전국 31개 대학, 163개 고등학교가 휴교됐다. 고등학생까지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나선 것이다. 야당도 무려 6개월간 국회투쟁을 벌였다. 사진은 바로 그 시기 농성하는 의원들을 격려하는 모습이다. 그 힘든 투쟁에서 ‘할머니’가 주는 달콤한 ‘오리온 드롭푸스’ 한 알은 큰 힘이 됐을 것이다.또 이 사탕 한알은 첨예한 여야 갈등을 녹이는 촉매제가 됐을 것이다. 이후 ‘여걸’ 박 여사는 박정희 대통령과 담판을 벌여 정국을 풀었다. 36년이 지난 지금 사진속 정국을 만든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 대통령이 됐다. 그 ‘강력한’ 박정희 대통령도 사진속의 박순천 여사에 대해 사석에서는‘누님’으로 불렀다고 한다. 무서운 장수일 수록 오히려 상대를 예우하는 법이다. 36년전 박순천 여사가 사진에서 보여준 강함과 부드러움이 어우러진 강(强)·유(柔)의 리더십,박근혜 여성 대통령 시대에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무도 나를 시비할 사람이 없다
가정에서는 한 남자의 부인이며 7남매의 어머니로서 여성계에서는 대표적인 지식인 여성으로 정계에서는 치마를 두른 야당 투사로서 기억되고 있는 박순천은 우리 사회에 적잖은 영향을 남긴 인물중의 한 명이기도 하다
" 반생을 오로지 구국 운동에 몸바쳐 온 박순천 여사의 일관된 정치행적은 그 자체가 하나의 애족 헌장이라 할 수 있다 과연 여사의 생애는 참을 위해 민을 위하여 싸워온 나날들이었다. 치마 두른 청기사로서 한결같이 살아온 ...."
등이 박순천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들이다.
그러나 한결같이 참과 민을 위해 살아 왔다고 하는 그녀의 정치행적이 과연 박순천 생애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까?
1971년 월간 다리에 실린 그녀의 글 내가 걸어온 야당 사반세기 제 1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그동안 무슨 일을 당할 때면 어떻게 처신할까? 하고 내심으로는 늘 스스로를 경계해 왔다. 그런데 요즘은 내 전생이 얼마 안 남아서 인지 도시 무서울 게 없고...... 아무도 나를 시비할 사람이 없다. 매스컴 계통의 사람을 내놓고는 두려워할 대상이 따라 일을 것 같지가 않다.
요즘 세간에 떠들썩하게 오르내리는 정신대 할머니들의 기막힌 역사적 증언을 들먹이며 이에 관여했던 박순천의 행적을 꼬집어 말하지 않더라도 일제 침략이후 비참하게 일그러져 온 역사 앞에 박순천 처럼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설 사람이 오늘날 이 사회에 몇 명이나 될까?
그녀는 정말 아무도 시비할 사람이 없을 만큼 오로지 구국 운동에 몸바쳐 살아 왔는가?
청산하지 못한 역사 중에서.../민족문제연구소/청년사
({뉴스메이커}, 1992. 6. 5)
일장기 머리띠를 두른 제복의 여학생이 선생님들과 함께 찍은 한 장의 기념 사진'. 이 사진은 1943년 한 여학생이 정신대로 차출되어 가기 전 이를 기념하 기 위해 찍은 것으로 사진속의 교장은 황신덕, 부교장은 박순천이다.
이 사진의 주인공 '김금진 할머니'는 자신이 당시 정신대에 가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설명하고 있다.
"황신덕 교장이 하루는 ㄷ여고, ㅇ여고 같은 다른 학교 학생들도 정신대에 지원하고 있는데 우리 학교에 그런 용기있는 학생이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라며 눈물을 흘렸어요.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교장 선생님이 저렇게 눈물로 호소하는데, 내 한몸 희생해 학교를 구하자는 결심이 솟구치더군요."
그리고는 교장실을 찾아갔고 바로 기념사진 찍고 정신대로 끌려갔다고 했다. 그 후 김금진 할머니는 후지코시의 총알 만드는 군수공장에서 일하다 해방되어 귀국했다.
1970년 어느해 황교장의 병환 소식을 듣고 찾아가 "선생님, 그 때 절 정신대 보내신 것 너무하셨어요. 선생님 가슴 아프라고 하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 때 왜 그렇게 하셨어요"라고 하였더니 선생님께선 "그래. 네 말이 맞다. 나도 그 일을 후회하고 있네"라고 처음으로 사과의 말씀을 하시더군요"라고 증언하고 있다.
일경 도피 생활 중에 얻은 순천댁이라는 가명
박순천은 1898년 9월 19일 경남 동래의 기장이란 해안촌에서 태어났고, 본명은 명련이었다 아버지 박재형과 어머니 김춘열의 무남 독녀로 자라난 그녀의 소녀시절은 그 누구보다도 다복했으며 열 살 때에 기독교에 입교했다.
1917년 부산진 일신여학교를 졸업한 뒤에 마산에 있던 의신여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이던 이갑성과 연결되어 마산 시위를 벌이다가 붙잡혀 일주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이때부터 일경을 피해 도피생활을 계속하게 되었고 그때 순천댁이라는 가명을 사용한 것이 그뒤 박순천으로 세인들의 입에 굳어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19년 가을 일본 여자로 변장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20년 요시오카 여자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갔으나 몇 달을 못 다니고 3.1운동 당시의 보안법 위반 혐의로 다시 붙잡혀 국내로 압송되었다.
그때 마산 감옥에서 1년 6개월간 복역하였다. 출감후 박순천은 항공사에 뜻을 두고 다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3·1운동에 앞서 2·8독립운동을 주도한 조선청년독립단원들(『사진으로 엮은한국독립운동사』, 눈빛, 2005). 앞줄 왼쪽부터 최원순, 두 사람 건너 장영규.가운데 왼쪽부터 최팔용, 윤창석, 김철수, 백관수, 서춘, 김도연, 송계백. 뒷줄왼쪽부터 한 사람 건너 변희용, 강종섭, 이봉수. |
1926년 일본여자대학 사회학부를 졸업하였다 대학 3학년 재학 당시 같은 동경 유학생이던 변희용과 결혼하였다.
대학을 마치고 시집인 경북 고령군으로 돌아와서는 남편과 더불어 야학을 일으키고 12년 동안 농촌 계몽 사업에 이바지했다.
그후 일제의 황민화 운동이 노골화 되면서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전국 방방곡곡에 신사를 짓기 시작할 때에 박순천 일가는 정든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1936년의 일이었다. 고향을 떠나 온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점차 더해가는 일경의 탄압을 피하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장남의 취학을 위해서였다.
서울로 오기 직전까지 박순천의 생활은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궁색한 것도 아니었다. 비타협적인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민족 문제 계급 문제에 대한 치열함은 부족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계몽적이기는 하나 일제에 저항하려는 민족적 성향은 계속 간직하고 있었다.
處女(처녀) 독립투사 朴順天(박순천)
독립투사이자 정치인이었던 海岩(해암) 朴順天(박순천) 여사는 1919년 3·1운동 때 만세시위에 앞장을 섰다가 감옥살이를 하고, 5·16 이후에는 정치정화법에 묶여 칩거를 강요당하는 등 80 평생을 파란만장하게 보낸 분이다. 그녀는 1917년 경상남도 동래군 기장면 대변리에서 한학자 朴在衡(박재형)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독립투쟁의지는 일찍이 유년 시절에 생긴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12살 때, 서당에서 집으로 오다 동네 벽에 붙어 있는 ‘韓日倂合(한일병합)’이라는 벽보와 그 앞에 모인 마을 어른들의 슬픔에 잠긴 얼굴을 보고 어렴풋이 나라가 망했다는 것을 알고, 울면서 집에 들어왔다. 집에 와보니 그 아버지가 통곡을 하면서 태극기를 항아리에 넣어 담장 밑에 묻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보고 더욱 큰 비통함을 느꼈다 한다.
1917년 부산 日新女學校(일신여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곧 마산 義信女學校(의신여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1919년 2월 기미독립선언 33인 중의 한 사람인 李甲成(이갑성) 선생을 만난 그녀는 그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 그것을 복사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3월, 마산 만세시위를 주도했다가 일본 경찰에 붙들렸다. 경찰은 그녀를 단순 가담자로 본 데다, 그녀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가 신원보증을 하자 1주일 뒤 그녀를 석방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의 하숙방에서 그녀가 복사한 독립선언서와 그녀가 만든 태극기가 발견됨으로서 다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지명수배를 받았다. 이를 안 그녀는 기생으로 변장하여 일본으로 도피했으나 이듬해 도쿄에서 체포되어 한국으로 압송되어 와 1년 6개월의 감옥살이를 했다.
그녀는, 일제 말 친일행위를 했다느니, 그것은 적극적으로 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그녀의 독립투쟁은 그런 흠을 지우고도 남는다느니 하는 논란에 휩싸여 있는 모양이다.
필자는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래서 여기서는 위의, 그녀의 사진 한 장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자 한다. 위의 사진은 그녀가 1920년, 죄수로 囹圄(영어)의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찍은 것으로 보인다. 내게만 그렇게 보이는 것일까? 이 사진의, 그녀의 얼굴에서는 죄인의 수치심이나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의 고통, 어두운 그림자 같은 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일제의 조선인 사상범에 대한 가혹행위는 실로 악랄하고 가증스러운 것이었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당시 그들에게 고통을 당한 독립운동가들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독립운동가들을 붙들면 어둡고 숨 막힐 듯 한 지하실로 끌고 가는데 어디선가 고통을 못 이겨 숨이 넘어가는 듯 한 비명소리가 들린다 한다. 곳곳에 각가지 소름끼치는 고문 刑具(형구)들을 늘어놓은 곳을 지나 소위 취조실이라는 곳에 들어가면 벌겋게 충혈된 눈을 한, 夜叉(야차)와 같은 고문 전문가가 나타나는데, 그렇게 되면 웬만큼 담력이 있는 남자도 우선 그 분위기에 반 쯤 넋이 나가게 된다 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분들을 재판정에 끌고 나올 때도 일부러 심리적 위축감과 수치심을 주려고 대쪽(竹片 ․ 죽편)으로 결은 ‘용수’라는 것을 얼굴에 덮어 씌웠다. 조선 사상범을 다루는 日帝(일제)의 경찰 ․ 검찰 ․ 刑吏(형리)에 특히 인간적인 양심을 가진 사람이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3·1운동 당시 맨손으로 만세를 부른 우리 동포를 7000명이나 죽이고 열여섯 살 유관순 의사를 살해하고 그 시신을 토막 낸 인간들이 그들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 역시 그런 고통과 수모를 당했을 것이다. 더구나 스물두 살 앳된 처녀가 그런 모진 고초를 당하고 있을 때 찍은 것이 위의 사진이다. 내게는 아무리 보아도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이 죄수가 입는 옷, 囚衣(수의)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의 표정은 감옥살이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점잖은 연회에 참석 중 잠깐 바람 쐬러 밖에 나온 젊은 여인의 그것처럼 천연하고 평안해 보인다. 참으로 당당하고 의연하지 않은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나는 그것을 그녀의 확고한 신념이 밖으로 넘쳐난 것이라고 보고 싶다. 그녀의 얼굴은, ‘남의 나라를 강탈한 너희가 죄인이지, 나는 아무 잘못을 저지른 것도, 죄를 지은 것도 없다’고 무언으로 항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 장양수
친일행위로의 첫발
서울로 올라온 박순천 일가의 생활은 극도로 어려워져갔다. 뚜렷한 수입이 없던 그녀의 집안에 현실적인 생활고가 닥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박순천은 당시 박정근이 경영하던 금강견구공장의 여공감으로 취직하여 1년 동안 일제하 가장 열악했던 여성 근로 현장에 있기도 했다.
그러나 여공감으로서의 그녀의 경험이 여성 운동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놓거나 새로운 자각을 일깨우지는 못했다.
그녀는 가정을 꾸리기 위해 직장 생활을 했을 뿐 비참한 여공들의 생존권 투쟁에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녀가 관심을 가진 여성 계몽이란 당시의 상황에서 가능했던 교육받은 신여성들의 자유주의적 여권론이었지 계급 문제로 인식하지는 못한 것이었다.
1940년 박순천은 어떠한 경로에 의해서였던지 지금의 중앙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인 경성가정의숙의 설립을 위하여 현해탄을 건넜다.
경성가정의숙은 이 왕가의 소유 건물이었기 때문에 동경에서 박순천은 이우공을 만나 여학교 설립의 뜻을 밝히고 그의 집을 빌리는 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경로를 통해 그해 10월 10일 신입생 37명으로 여성 교육을 통한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한 경성가정의숙이 황신덕을 교장으로 하여 설립되었다.
학교가 문을 여는 바로 그때부터 박순천은 해방까지 수년을 교원 또는 부교장 때로는 서무직의 일을 맡아 보며 경성가정의숙과 함께 살았다.
그러나 여성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설립한 경성가정의숙에 참여하면서부터 그 목적과는 반대로 이때부터 박순천의 행적에는 중대한 변호가 생겨났다.
일제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민족을 위해 여성을 위해 구국 운동에 앞장선 사람이 아니라 이 시절부터 친일 행위에 동조하는 인사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명 시절 박순천의 활동은 민족적이었고 높이 평가할 만 했지만 여성 교육자로 유명해지고 나서부터의 활동은 점차 친일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 상담하는 정신대 - 일본 정부는 전쟁이 확산되고 피해가 속출하자 여성정신대까지 동원령을 공포했다. 일제는 “중학교를 보내주겠다”며 11~14세의 어린 여성을 유혹했다. 일부 학교 교장들은 “정신대에 가지 않으면 졸업장을 주지않겠다”며 위협하기도 했다. 정신대는 근로정신대와 위안부로 나뉘었는데,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정신대와 위안부 간의 구별이 모호했다. 공장에서 일하던 근로정신대 여성들에게 위안부 생활을 강요한 경우도 많았다. 일제는 공개적으로 정신대를 모집했으며 신문에 광고를 내기도 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정혜경 연구원(강제연행전공)은 “정신대를 지원한 대부분의 여성들은 위안부와 근로정신대를 구별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각종 친일 단체에 관여하며 시국 강연 연사로...경성의숙의 중책을 맡으면서 박순천의 친일 행적은 총독부 기관지 등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우선 그녀는 1940년 12월 15일 서울 부민관에서 황도 사상의 실천 보급을 목적으로 결성된 황도 학회의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이 조직은 발기인으로 각계 인사 46명이 참가한 한인 일인 통합 조직이었다. 이른바 내선 일체의 완성을 목표로 하였던 이 단체는 첫째 황도 사상의 학습, 둘째 황도 정신의 보급, 셋째 신사참배의 실천과 장려 등을 실천 방책으로 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회원 및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황도강습회 등을 개최하였다. 그녀도 1941년 1월 14일 이후 매일 2시간씩 주 4일 개강으로 대화숙에서 개최하는 황도 강습회에 참가하는 활동 실적을 남겼다.
1936년 일제가 여러 곳에 신사를 지을 때 그것을 피해 고향을 나왔다던 박순천으로서는 실로 엄청난 자기 변신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는 자기 아닌 남들에게까지 신사 참배를 장려하는 강연회를 맡아 앞장서게 되었으니 말이다.
1941년 12월 27일부터는 부민관에서 열린 조선 임전보국단 주최 결전 부인 대회에 연사로 출강하기 시작했다. 조선임전보국단은 1941년 10월 22일 조직된 친일 단체였다. 이 단체는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던 시점에서 전쟁 협력을 목적으로 하였다.
1941년 12월 27일에 결전 부인대회 등을 개최함으로써 군수자재 헌납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42년 2월부터는 산하단체인 임전보국단 부인대 주최로 근로 보국 운동을 전개하면서 부녀층을 광범위하게 동원하여 군복수리 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박순천은 이러한 임전보국단 사업에 적극 참여 1941년 12월 27일 에는 국방가정이라는 제목으로 1942년 1월 24일에는 전황뉴스를 듣고라는 제목으로 방송 강연을 했고 급기야 1942년 1월 5일에 조직된 조선 임전보국단 부인대에는 황신덕과 함께 지도위원으로 참가했다.
이렇게 전쟁이 장기체제에 돌입하면서 부녀자 및 여학생들을 동원하는 친일 단체 활동에 가담했던 당시 박순천의 사상적 경향은 1941년 춘추 7월호에 발표한 시국 논문 조선의 남편과 아버지에게 소함 이라는 글에서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 그녀가 보인 여성에 대한 관심이란 봉건적인 인습을 타파와 금연 금주를 통한 자기 각성을 이룬 남편들이 이루는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가정 생활 속에서 해결될 수 있는 부녀자의 문제나 자녀 교육문제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정상적으로 안정된 사회가 아니라 한국인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한층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그녀는 일제라는 틀 속에서 안주할 수 있는 개인주의적 가정생활의 도덕적 가치만을 내세웠던 것이다.
원래 춘추는 동아일보와 신동아가 발간되자 그 전통을 간접적으로 이었다고 할 수 있게 동아의 가병(佳兵)이던 양재하(梁在厦)의 주재로 창간되어 적극적인 친일은 피한다고 노력했으나 결국은 전쟁 협력 내선일체화 운동의 잡지가 되고 말았다.
제자를 정신대로...
일제는 1941년 태평양 전쟁 반발 이후 전선의 동남아 확대와 더불어 그해 8월 23일 후생성령으로 여성정신근로령을 공포한뒤 12~40세의 배우자가 없는 여성들을 근로 정신대 및 종군 위안부로 징집 군수 공장이나 전선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1943년~1944년 전쟁 말기에 이른 일본의 발악은 학원에도 파고 들어 학생들은 공부보다도 근로봉사를 매일의 일과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학교마다 두 명의 정신대로 보내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만일 정신대원을 보내지 않으면 학교를 폐쇄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경성의숙도 예외일수 없었다.
1943년 3월경 황신덕 교장이 전교생을 모아놓은 조회에서 우리 학교가 문 닫을 위기에 처해 있다 여러분들 중 한 명이라도 정신대에 지원하면 학교가 살수 있을 것이다 라고 간곡히 호소했다. 박순천 부교장도 비슷한 말로 호소했지만 지원 학생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거듭되는 교장의 호소에 따라 내 한몸 희생해서 학교를 구하자 라는 생각으로 교장실의 문을 두드린 학생이 있었으니 이분이 바로 김금진 할머니였다.
김 할머니는 1992년 6월 5일자 뉴스메이커 지와의 인터뷰에서 2학년 재학 당시 18세의 나이로 교장, 부교장 말만 믿고 정신대에 나가게 된 동기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술회를 하고 있다.
해방이 되고 내가 돌아 왔다는 소식을 듣고 국어를 가르쳤던 김일순 선생님이 나를 부르시더군요. 그때 김 선생님은 경성의숙의 후신이 된 중앙여고를 그만 두고 동아일보 기자로 있었는데 내게 그때 네가 정신대 간다 해도 학교에서 못 가게 했어야 했는데 괜한 아이 병신 만들고 ...... 황신덕과 박순천이 참 몹쓸 짓을 했다.
나라도 몰래 말해 줬어야 했는데 내 책임도 크다. 라며 눈물을 글썽거리시더군요. 그 말을 듣고는 나도 여러모로 알아 봤어요.
김 할머니의 이렇게 한맺힌 사연은 50여년이 지난 지금에야 일제하 정신대 진상 규명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겨우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실은 즉 경성의숙에서 정신대에 학생을 보내게 된 경위는 지난 1970년 발행된 중앙여고 30년사에서도 발견 되고있다.
그러나 이미 고인이 된 저명한 우리나라 여성 운동의 지도자요 여성 교육자이며 탁월한 정치 지도자였던 박순천은 말이 없다.
생전에 그 숱한 여성론을 쓰면서 여성 운동에 뜻을 두고 살았으며 정치마저도 여성 운동의 일환으로 시작했다는 박순천이었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일제의 의해 유린된 한국 여성의 역사적 상처를 밝히고 여기에 가담했던 자신의 과거를 참회 했다는 기록을 찾아낼 수 없다.
한 개인에게 평생에 맺힐 한이 될 정신대에 제자를 보낸 덕분에 경성의숙은 폐쇄 당하지도 않았으며 1945년 1월에는 사립학교 규정에 따라 정식으로 중앙여자 상과학교로 인가까지 받게 된다. 박순천은 이렇게 살아 남은 학교의 부교장으로 해방을 맞았다.
1973년 8월 13일 동경 납치사건 직후 와병 중인 자택에서 박순천 여사의 위문을 받고 있다
해방 후 적극적으로 우익 여성 운동에 투신
급박하게 맞은 혼란된 해방 정국 속에서도 일제하부터 조직적인 연계를 맺고 싸워왔던 여성 운동가들은 8월 16일 30여명이 모여 건국부녀동맹 결성준비위원회를 결성함으로써 부녀 운동의 막을 열었다.
여기에서 황신덕, 박순천, 유각경, 허하백 ,박승호 등 5명의 전형 위원이 선출되고 17일 발기 총회가 열림으로써 건국부녀동맹이 결성되었다.
이때 박순천은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는데 이것이 그녀를 오늘날의 박순천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8.15직후부터 각종 여성 단체 활동에 앞서 나서기 시작했다. 당시 건국부녀동맹은 일제하의 경력을 떠나 교육계 종교계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등 가계 각층의 여성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건국부녀동맹 간부들의 개인적 경력을 살펴보면 일제하 근우회에서 활동했던 사람(유영준 황신덕, 조원숙, 김순실, 황애덕, 유각경 ,김선등) 사회주의 여성 활동을 하던 사람 (조원숙 김순실 ,정칠성, 심금옥) 건국동맹에서 활동하던 사람 (여란구 ,전영애, 이각경) 이외에도 일제 말기 친일 경력을 가진 사람들 (허화백, 황신덕, 유각경, 김선, 박순천, 박승호) 까지 가담함으로써 이데올로기와 일제하 경력을 떠나 통일전선의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러나 건국부녀동맹은 바로 그 구성원들의 다양성으로 인해 통일된 노선을 정립하지 못하고 결성된 지 한달 도 못되어 이데올로기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분열되었다.
분열의 시초는 일부 우익 이데올로기를 가진 여성들이 (유각경, 박봉애 ,김선 등) 탈퇴하면서 표면화되기 시작하여 박순천, 황신덕등 나머지 사람들도 1945년 12월 8일 건국부녀동맹을 탈퇴하자 해방 직후 가능했던 통일전선적 여성 운동은 완전히 좌우 이데올로기에 의해 분열되고 말았다.
탈퇴자들은 "건국동맹의 회원들 대부분이 순수한 여성 운동보다는 좌익 계열의 지령을 받아 움직이는 꼭두각시였기 때문에 탈퇴하고 말았다." 라고 그 이유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볼 때 그들은 거의 일제하 친일 경력을 갖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이 해방 후 그들의 생존과 활동 방향에 주요하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건국실천원양성소 제2기 수료
독립촉성 중앙부인단의 결성...
1945년 12월 23일 신탁통치안의 발표로 여성 운동계도 들끓게 되었다. 그 첫 움직임은 1946년 1월 1일 우익 여성들의 반탁 결의 대회로 시작되었다.
반탁 운동을 하면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운동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면서 결성된 우익 여성 단체가 독립촉성 중앙부인단이었다. 1월 9일 YWCA에서 창립대회가 있었고 초대 회장에 황기성 부단장에는 박순천이 당선되었다.
이때부터 박순천은 반탁 운동에 앞장섰다. 반탁 국민 대회에 참가 할뿐 아니라 반탁을 주장하는 부녀 시국 강연회에서 강연을 하기도 했으며 미군정청 앞에서 탁치 절대 반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또한 이때 부터 그녀는 다른 독립촉성 중앙부인단 간부들과 함께 비상국민회 주비회, 기미독립선언기념 전국대회준비위원회, 독립금헌성회 등 우익 진영에서 주도하는 각종 정치 모임에 여성 대표로 참가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반탁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건국부녀동맹에서 탈퇴한 이후 좌익계 여성 운동에 비해 열세를 면치 못하던 우익계 여성 운동은 독립촉성 중앙부인단의 결성과 다시 한국부인회와의 결합으로 1946년 6월 독립촉성 애국 부인회의를 결성함으로써 우익 여성계의 전열을 가다듬게 되었다.
그러나 독립 촉성 애국부인회의 결성은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리기 전 남한의 우익을 통합하여 그 세력을 늘려 보자는 미군정의 노력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구할 수 있다.
좌익의 조직적인 대응에 밀린 미군정으로서는 비록 친일계 인사가 대부분이었지만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우익 여성들의 조직화를 적극 후원했던 것이다.
이후 독립촉성 애국부인회는 미군정의 호응을 받고 이승만 김구를 비롯한 우익정치 진영과 긴밀히 밀착되어 1949년 관제 서울시 애국 부인회와 통합하여 대한 부인회로 개편될 때까지 남한의 대표적인 우익 여성 단체로 활동하게 되었다.
독립촉성 애국부인회에서도 박순천은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 부인회는 1947년까지도 서울과 지방도시 몇몇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중적 기반을 갖지 못했다.
그것은 독립촉성애국부인회의 기관지였던 부인신보 1947년 12월 28일자 실린 여성계 동향에 관한 기사에서 오직 수고하신 분은 대표 몇 분일 뿐이요 일반 책임자들은 그 책임을 이행해 본적이 없다는 구절에서도 엿볼 수 있도록 이러한 독립촉성애국부인회의의 활동은 그 구성원의 성격상 뻔한 이치였다.
즉 당시 독립촉성애국부인회의 주요 간부들의 일반적인 특성을 보면 첫째 일제하에서 여성 운동에 참가했던 인물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대부분 민족해방과는 별도로 개량적인 여성 운동을 주장하던 이들로 결국 일제 말에 이르러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친일행각이 드러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둘째 이들 중 대부분은 기독교 신자라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이들이 견지하는 운동 노선이 일제하부터 내려온 기독교 여성 운동의 특성인 교육 계몽 문화 운동의 노선을 띠게 되는 영향을 미치어 거의 노동자와 농민이 대부분이었던 해방 당시 민중 여성운동 계층의 참여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독립촉성애국부인회에서 움직이고 있던 여성들은 거의 고등 교육을 받은 지식여성이나 중산층 이상의 가정 주부들이었다. 셋째 그들 스스로의 출신 성분 및 계급 성분이 대체로 지주계급이나 부농 출신이 많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부모나 남편들 역시 개화된 지식인으로 해방 후 정부 수립이후에도 어떤 경로로든 고급관리나 고위직을 지낸 이들이 많았다. 박순천의 경우에도 남편 변희용이 성균관 대학 총장을 역임할 정도였다.
넷째 그들은 거의 대다수가 대졸 이상의 인텔리로 주로 일본이나 미국에 유학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구 민주주의나 자유주의에 대한 선망을 갖고 있었고 이러한 사상을 보편적으로 한국 여성들에게 부고하고자 했다.
바로 이러한 점들이 친일 잔재의 척결이 제일의 과제로 부각되던 해방 직후 이들의 활동의 방향성 및 우익 일변도의 행동거취에 가장 중요하게 작용했다.
따라서 해방이후 일본을 대신해 한반도에 진주한 미국에 대한 반미 감정은 전혀 없었으며 미국을 제국주의로 이식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국은 우방이며 조선을 구원해 준 은혜의 나라였다.
이것은 그들에 의해 추진되던 단정수립 운동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났다. 또한 그 당시 주요한 과제였던 토지 문제나 친일파 처단 문제에 대해서도 강령이나 선언문뿐 아니라 그 외 다른 지면을 통해 언급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바로 일제 말기 친일로 전락했던 여류 명사들이 해방이후 우익 여성운동의 주역으로 등장한테서 그 연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단정 수립 운동에 매진
1947년 5월 제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정국은 미국과 이승만의 의도대로 남한만의 단독 선거 실시를 통한 단독 정부 수립의 길로 가고 있었다 이에 여성 단체들의 관심 및 활동도 단정 수립과 관련된 문제로 집중되었다.
이에 여성 단체들의 관심 및 활동도 단정 수립과 관련된 문제로 집중되었다 독립촉성 애국부인회를 비롯한 우익 여성단체가 총망라하여 결집한 전국 여성단체 총연맹 은 단선 및 단정에 적극적인 참여를 표방하였다. 총선거 촉구 강연회 개최 선거법에 대한 상세한 해설 강연을 하거나 라디오 방송을 하는 등 선거 참여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특히 박순천, 김활란, 박승호를 비롯한 18명의 우익 여성 지도자들은 처음으로 여성에게 주어진 선거권의 적극 활용이라는 표면상의 이유로 직접 총선거에 입후보까지 하였으니 이것은 남한의 단독 정부 수립을 지지하고 분단을 기정 사실화 하는 행동이었다.
특히 모윤숙은 당시 유엔 한국위원단 대표 메논 박사를 이화장으로 납치(?) 하는가 하면 박순천,박승호 등 여성 대표들은 거의 매일 같이 대화를 나누면서 메논을 위시한 유엔 대표들을 주무르며 이 박사의 의도대로 단정 수립을 추진하도록 일을 꾸미는 데 적극 동조하였다.
이렇게 매일 같이 접촉하면서 얻게 된 박순천과 메논과의 친분의 정도가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 것은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모윤숙과 박순천이 피살되었다는 와전된 소식이 메논에게 전해졌을 때 선뜻 그가 이들의 가족을 돕겠다고 하는 연락을 보내왔었다는 일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드디어 여성 정치가로 성공했으나...
5.10 선거에 입후보하여 입법기구를 통한 여성의 지위향상을 도모했던 박순천을 비롯하여 18명의 여류 인사들의 꿈은 모두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좌절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노선을 적극 지지한 덕분에 이들은 8월 15일 이후 정부 조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박순천은 초대 감찰위원이 되었으며 1949년에는 국민회 중앙총본부 부위원장과 대한여자청년단 단장을 역임했으며 1948년 부인신문을 창간 사장으로 5년 동안 활약했다.
특히 정부 수립 이후 여성운동의 독립적인 지위를 향유하면서 이후 한국여성 단체의 관제적 성격을 결정짓는데 압도적인 영향력을 미쳤던 대한부인회 회장에 부임해서 6년 동안 재직하였다.
1950년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바로 이 대한 부인회 소속으로 종로 갑구에서 출마 드디어 2대 국회의원이 되어 정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국회위원의 신분으로 그녀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게 되었는데 90일 가까운 나날을 본인의 표현대로 적 치하에 있으면서 바로 그 적의 보호를 받았으며 그의 가족과 더불어 무사할 수 있었다. 서울 수복이후 국회에서 논의된 부역자 문제에서도 국회의원이라는 신분 때문에 흐지부지 되었다.
그러나 적극적인 부역활동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해도 어쩌면 민이 부여해 준 신분 때문에 살아 남고 부역에서도 면죄 받을 수 있었을 90일의 기간동안 타의에 의해 부역할 수 밖에 없었던 서울 시민들을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녀는 당시 피난하지 않은 이유를 한 가닥 양심에 비추며 서울 출신의 국회의원인 내가 유권자들을 그냥 버려 두고 피난을 떠날 수는 없었다 라고 말한바 있다.
그러했다던 그녀가 바로 그녀 자신과 함께 살아 남아 살기 위해 몸부림 쳤던 부역자 처리 문제에서 보여준 관대함이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래 동영상은 <空秋>가 휴대폰으로 촬영한 사진을 DVD로 영상화 한 것임
역사가 남겨 놓은 미완의 해답
그후 박순천은 서로 다른 정치적 신념으로 인하여 믿고 따르던 이승만과 결별 자유당 정권과 투쟁하면서 1955년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거쳐 1956년 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된 이래 계속 야당 국회의원의 자리를 지켜왔다.
제 4,5,6대 국회의원 제 3공화국 시기에 민주당 총재를 역임했으며 1965년에는 통합 야당인 민중당의 당수가 되었다. 1967년 다시 통합야당인 신민당의 전국구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했고 정계를 은퇴한 뒤 경기도 안양 근명학교 이사장을 지내는 등 여성 교육에 관여하면서 국정자문위원 등을 역임하고 1983년 세상을 떠났다.
쉬지 않고 달려온 역경의 세월이었다. 이 글은 박순천 스스로 던진 문제 즉 시비의 문제로 시작했었다. 이 글이 그녀에 대한 시비를 문제 삼으려 한 것이 아님을 명백히 밝혀 둔다.
일제하에 저지른 친일행위와 해방 후 정부 수립기의 반민족 행위 때문에 자유당 정권 이후 야당 국회의원으로서 한국 정치의 민주화에 기여해온 그녀의 공헌 그리고 현재 남아 있는 모든 기억과 행적들이 거짓으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생전에 고인은 빼앗긴 조국을 두동강이 난 조국을 지키기 위해 왜곡된 역사 속에서 걸어왔던 자신의 삶을 역사 앞에 진솔하게 참회 해본 적이 없다.
▲박순천 여사가 1967년 국회본회의장 의석을 돌며 의원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는 모습이다. 아마 당시 유행했던 '오리온 드롭푸스'였을 것이다
박순천의 기억 속에 일제하는 3.1운동만이 해방 정국은 반공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시비에 당당할 수 있단 말인가. 역사는 결단코 호락호락 넘어가는 일이 없다는 것을 그 속에서 진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다.
■ 오유석(이화여대 사회학과)
박순천(朴順天, 1898∼1983. 여성정치가, 별칭 : 박명련(朴命蓮) )
본관은 밀양(密陽). 본명은 명련(命蓮). 이름 순천(順天)은
독립운동 때 딴 별명. 경상남도 동래출신. 아버지 재형(在衡)과 어머니 김춘열(金春烈)의 무남독녀이다.10세에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 정치인으로 2·4·5·6·7대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야당지도자로 활약했다. 1917년 부산진 일신여학교를 졸업, 마산 의신여학교(義信女學校)교사로 재직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33인의
한 사람인 이갑성(李甲成)과 연결되어 마산시위를 벌이다가 붙잡혀 1주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으나 도피생활을 계속하였다.
이때
‘순천댁(順天宅)’이라는 별칭을 사용, 그뒤 ‘박순천’으로 세인의 입에 굳어졌다. 그해 가을 기녀(妓女)로 가장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1920년
동경 요시오카여자의학전문학교(吉岡女子醫學專門學校)에 들어갔으나 몇 달을 못 다니고 3·1운동 때의 〈보안법〉 위반혐의로 다시 붙잡혀 국내로
압송되어 마산감옥에서 1년 6개월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다시 일본에 유학, 1926년 니혼여자대학(日本女子大學)사회학부를 졸업하고
28세에 동경유학생이던 변희용(卞熙瑢)과 결혼하였다.
경상북도 고령 촌가에 살며 농촌계몽운동에 전념하다가, 1939년 서울에 올라와
조선공예주식회사 금강전구공장 여공감(女工監)으로 근로현장에 있기도 하였다. 1937년에는 황신덕(黃信德)과 경성가정여숙(京城家庭女塾)을
세워 부교장으로 일했는데, 이 학교가 오늘날의 중앙여자중고등학교(中央女子中高等學校)로 발전하였다.
8·15광복 직후
건국부녀동맹(建國婦女同盟)을 조직, 모스크바3상회의의 결정에 불복하는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앞장섰으며, 1947년부터는
독립촉성애국부인회(獨立促成愛國婦人會)부회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학교법인 추계학원(秋溪學園)이사를 역임하였다.1948년 《부인신문
婦人新聞》을 창간, 사장으로 5년 동안 활약하였다.
정부수립 후에는 감찰위원이 되고, 1949년 국민회(國民會) 중앙총본부 부위원장과 대한여자청년단(大韓女子靑年團)단장을 역임하였는데, 특히 대한부인회총본부(大韓婦人會總本部)회장에 부임해서는 6년간을 재직하였다.
1950년에는 대한부인회 소속으로 서울 종로 갑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 제2대국회의원이 되었다. 자유당정권과 투쟁하면서
1955년 민주당 창당에 참여, 중앙위원회 부의장을 거쳐, 1956년 민주당 최고위원으로 선출된 이래 네 차례나 연임하였다.
한편
1958년 제4대, 1960년 제5대, 1963년 제6대 국회의원으로 거듭 당선되어 여권신장과 민권수호에 앞장섰으며, 제3공화국 때는 민주당
총재를 역임하였고, 1965년에는 통합야당인 민중당(民衆黨)의 당수가 되었으나, 한일회담 비준반대를 위한 의원직총사퇴의 극한투쟁결정에서 강경파인
윤보선(尹潽善)이 탈당하자, 제5대대통령선거에 대비하여 유진오(兪鎭午)에게 당수직을 물려주었다.
1967년 다시 통합야당이 된
신민당(新民黨)의 전국구로 국회에 진출, 5선의원을 기록하였다. 고령으로 정계를 은퇴한 뒤 1972년 경기도 안양
근명학교(槿明學校)이사장으로 여성교육에 여생을 바치면서, 국토통일원 고문, 육영수여사추모기념사업회 이사장, 국정자문위원 등을 역임하고 85세에
죽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인 1943년 3월경 경성의숙의 학생들을 모아 놓고 정신대로 나갈 것을 종용한 것 등의 친일행적이 최근에 밝혀져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1983년 1월 9일 뇌일혈로 사망,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본명은 명연(命連). 본관은 밀양(密陽).
◎1898년 음력 9월 10일 경남 기장군 기장읍 대변리에서 한학자인 박재형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10세에 기독교에 입교
◎1917년 동래 일신여학교(동래여자고등학교의 전신) 졸업,마산의신여학교(義信女學校) 교사로 재직
졸업 후 마산 최초의 여학교였던의신 여학교 교사로 부임, 성경 채플담당 교사와, 생리학 겸 동물학 교사가 되었다. 당시 일인교사는 24원의 월급을 받고 그는 12원의 월급을 받아 일본인 교사와의 차별대우에 항의, 싸우기도 했다
◎1919년 2월 마산 의신학교 교사로 재직 중 박순천 朴順天은 이갑성과 마산 만세시위를 주도
◎1919년 3월 1일 3·1 운동이 각지에서 발생하자, 박순천도 만세운동에 참가.
◎1919년 3월 5일 일본헌병대에 체포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신마산에 있는 일본헌병대로 끌려가 조사를받게 되었다
◎1919년 3월 12일 마산시위를 벌이다가 붙잡혀 1주일만에 보석으로 풀려남
◎1919년 가을 기녀(妓女)로 가장하여 일본으로 도피
◎1920년 동경 요시오카여자의학전문학교(吉岡女子醫學專門學校)에 들어갔으나 체포됨
◎1920년 4월 국내로 압송
◎1921년 8월 마산형무소로 이감되어 1년 4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출감
◎1926년 니혼여자대학(日本女子大學) 사회학부를 졸업
◎1926년12월 24일 동경유학생이던 변희용(卞熙瑢)과 결혼
◎1937년에는 황신덕과 가정여숙(家政女塾:지금의 중앙여자중고등학교)을 설립
◎1940년 12월 친일 단체인 황도학회(皇道學會)에 발기인으로 참가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주최의 강연에 연사로 참여
◎1945년 8·15광복 직후 건국부녀동맹에 참가하면서 정치 활동을 시작
◎1947년 우익 여성 단체인 대한독립촉성애국부인회 회장,
◎1947년 『부인신문(婦人新聞)』을 창간, 사장으로 5년 동안 활약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종로 갑구) 총선에서 낙선
◎1949년 국민회(國民會) 중앙총본부 부위원장과 대한여자청년단(大韓女子靑年團) 단장을 역임대한부인회총본부 회장에 부임(6년간을 재직)
◎1949년 8월 20일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
◎1950년 대한부인회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
◎1954년 5월 제3대 국회의원 총선거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낙선
◎1956∼1960년 4대, 5대, 6대 국회의원
◎1960년 7월 대통령 선거(1표)
◎1964년 민중당 대표최고위원,
◎1965년 다시 민주당을 재건하고 민주당 총재
◎1972년 5선의원을 끝으로 정계에서 은퇴
◎1972년 안양 근명학교 이사장
◎1983년 1월 9일
■ 주요 참고문헌
이형기,「박순천론」,『인물계』,1959.2.
임종국,<실록 친일파>,돌베개,1991.
박순천,「정치운동과 여성운동」,『신세계』,1956.2.
특별취재,「내가 걸어온 야당 사반세기」,『다리』,1971.9∼12.
해암(海岩) 박순천(朴順天)
한국 첫 여성 야당 대표 여성정치 시대 열다
해암(海岩) 박순천(朴順天)은 3·1운동에
참여해 1년6개월의 옥고를 치른 독립투사이자 광복 후 5선 의원에 한국 최초의 여성 제1야당 당수를 지낸 정치인이다. ‘박할머니’라는 애칭에
걸맞게 거친 정치풍토에서도 ‘여성으로서의 품격’을 지켜온 특이한 카리스마가 곧 박순천이 지닌 인간적 매력이다.
“‘박할머니’는 대학교수의 부인이요, 3남3녀의 어머니다. 그는 앉고 서는 것 하나하나에 여성으로서의 품위가 몸에 배었고 큼직한 수첩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가정의 식단이며 영감의 약, 아들 딸의 담임선생 이름까지 적을 만큼 자상한 사람이다. 그가 신익희·조병옥·장면 등과 허물없이 어울렸던 것은 바로 그의 굽힘 없는 정의감과 함께 관용·눈물 등 여성다운 품성을 향수처럼 지니고 다녔기 때문이다.”(김진배 정치평론가)
아울러 그의 지도자관 역시 민주주의 정치인으로서의 충분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한 가지 장점을 갖고 있어요. 그 좋은 점들을 한데 모아서 쓸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지도자가 할 일이에요. 특히 최고지도자는 장수 중의 장수라야 해요. 한나라 고조 유방처럼 말이지. 우리나라에서 이런 사람 누구꼬?”
그는 정치하는 사람은 첫째는 애국심이 남달라야 하고, 둘째는 깨끗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따르고 믿겠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가정보다는 나라를 생각하는 데 시간과 정력을 쏟았고, 민주당 최고위원과 당수를 지냈지만 50㎡(15평)짜리 국민주택에서 여생을 보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같은 박씨라 해서 ‘누님, 누님’ 하고 부르고, 육영수기념사업회 책임을 맡기도 했지만 그것을 돈이나 권세로 연결시키지는 않았다. 흐트러짐 없는 고결한 품성을 끝내 지켜낸 정치지도자이다.
박순천의 올곧은 인생과 함께한 그의 남편 일파(一波) 변희용(卞熙瑢) 역시 그와 걸맞은 민족지도자로 추앙받는다. 박순천의 아호는 낭군의 아호와 짜맞춘 ‘커플 아호’이니 천생연분의 한 쌍이었던 셈이다. 일파 역시 도쿄 유학시절 3·1운동의 전초적 역할을 한 2·8선언을 주도하였으며, 4·19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교수시국선언에 앞장섰다. 일파는 최남선이 창간한 시대일보를 비롯하여 대중시보 등의 편집인과, 민족주의자의 집결체인 신간회 지부장을 맡기도 하였으며, 성균관대학 총장·사학총장협의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박순천은 1898년 9월 10일(음력) 경남 동래군 기장면 대변리에서 시골 한학자 박재형(朴在衡)과 김춘열(金春烈) 사이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명련(命連)으로, 손이 귀한 집안의 딸이 명줄이 길게 이어지기를 바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해암의 부모는 기독교신자로 개화파였다. 해암은 열 살 때 장로교회에서 세례를 받는다. 그의 부모는 여성교육이 부재하였던 당시에 여자아이를 받지 않는 한문서당에 보내기 위해 박순천에게 남장을 시켰을 만큼 교육에 남다른 열의를 갖고 있었다. 박순천은 12살 때 서당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담벼락에 붙은 방을 보고 한·일병합 소식을 알게 된다.
“저녁 때에 서당으로부터 귀가 도중 주막집 담에 붙은 네 글자의 벽보를 보았다. 이 벽보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수심에 싸여 있었고 그중에는 한숨 짓는 어른들도 있었다. 나는 그 사람들 틈에 끼여 덧없이 울기만 하였다. 합병이 무엇인지 명확히 터득하지는 못하였으나 우리나라를 일본에 빼앗긴다는 뜻만은 알았고…. 그때의 충격은 60평생 잊혀지지 않으며 오늘날까지의 나의 반항적 생애도 그때 받은 충격의 발동일 것이라고 생각한다.”(‘내가 걸어온 길, 내가 걸어갈 길’ 박순천)
귀가한 박순천은 읍내에 나갔다가 상투를 잘리고 돌아온 부친과, 이를 본 모친이 통곡하며 태극기를 항아리에 담아 담장 밑에 파묻어 감추는 것을 보면서 대한제국의 멸망을 체감한다. 이후 부친은 박순천을 집에서 50리 떨어진 부산의 일신여학교에 입학시킨다. 이 학교는 호주인 선교사가 운영하고 있었다. 박순천의 회고담이다.
“그때의 학교는 합병 직후라 일정에 대한 반감이 극심하였으며 따라서 선생님들도 학문보다 사상을 지도하는 동지들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학생들을 이끌어 주었으며, 학생들은 부단히 일본어 과목의 수업을 거부하며 일본말을 사용하는 동배를 배척하는 등으로 배일사상이 강렬했던 것이다.”(‘내가 걸어온 길, 내가 걸어갈 길’)
박순천은 일본어를 가르치는 일본인
여선생을 골탕 먹이기 위해 교실 문 앞에 초를 칠해 놓거나 일본 천황의 초상화를 긁어 울상을 만들어 놓는 등의 위험한 장난으로 반일감정을
표출한다.
1917년 일신여학교를 졸업한 박순천은 마산의 의신여학교에 부임하여 성경과 생물을 가르친다. 막 졸업하고 부임한, 학생보다 불과 몇 살 위의 여선생이 학생들을 지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박순천은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 학생들을 체벌하는 대신 스스로에게 매질을 하여 이들을 감동시킨다
“여학생들이 하도 말을 안 듣길래
하루는 회초리를 해오라고 일렀다. 학생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히죽히죽 웃으면서 회초리를 해왔다. 나는 내 옷소매를 걷고는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내 팔을 힘껏 내리쳤다. 학생들은 ‘와’ 하며 소리 내며 웃었다. 그러나 두 번 세 번 내리치고 매가 부러지기 시작하자 학생들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더니 책상에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후부터는 학생들이 내 말을 잘 듣게 되었고 또 서로 마음이 트이기
시작했다.”(‘나의 이력서’ 한국일보)
또 한국인 교사의 봉급이 일인 교사의
절반밖에 안되는 사실에 대해 학생들이 차별철폐운동에 나서 집단으로 등교를 거부했다. 이것이 일주일을 넘기자 박순천은 학생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등교를 설득한다. 1919년 박순천은 거족적인 3·1운동에 동참함으로써 마침내 본격적인 독립운동가로 활동하게 된다.
“기미만세사건이 일어나기 얼마 전,
그러니까 2월 어느날 마산 의신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나에게 남자 손님이 한 분 찾아왔어요. 그분은 나에게 동경유학생들이 앞서 일으켰던
2·8독립선언과 3·1만세운동 거사계획을 설명해주고 협조를 당부한 후 ‘며칠 후 독립선언문을 내려보내 줄 테니 프린트해서 뿌려달라’는 말을
남기고 총총히 사라졌어요. 그분이 지정해준 날 저녁 7시, 옛 마산역에 나가 서 있으려니까 그가 말한 대로 키가 큰 의전학생이 개찰구로
걸어나오면서 모자에 손을 얹는 것이 보였습니다. 학교 뒷산 공동묘지로 가서 무덤 뒤에 숨어가지고 그 학생이 등 뒤에서 꺼내준 독립선언문을
받았지요. 종이가 땀으로 젖어 있더군요.”(‘여류정치의 미 박순천’ 백성남)
박순천을 찾아왔던 사람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청년대표로 참여한 이갑성이었다. 박순천은 중앙에서 밀파된 배동석으로부터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을 전달받아 복사하고 태극기를
만드는 등 3·1운동에 직접 관여하며 마산의 만세운동을 주도한다. 박순천은 시위 도중 체포되나 한석진 목사, 이승규 장로 등의 신원보증으로
일주일 만에 풀려난다. 그러나 하숙방 천장에 숨겨둔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등이 발각되어 지명수배되고, 도피 중에 열린 궐석재판에서 징역 1년이
선고된다. 이는 여성이었던 박순천에게는 무거운 처벌이었다.
박순천은 만세 거사에 참가했던 심정을
“그때 나는 잔다르크를 본뜨려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일본 헌병들이 칼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는 저 칼에 내 목이 떨어지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생각했었다”(‘나의 이력서’)고 회고했다.
일주일 만에 풀려난 박순천은 남장을
하고 칠원에 사는 최용구(의신학교 제자 최봉선의 오빠)의 집으로 몸을 숨기는데 동네에 ‘만세꾼’이 숨어들어왔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다. 이
말에 당황한 최용구의 부인은 박순천을 가리켜 “전라도 순천으로 시집을 보냈는데 소박을 맞고 돌아온 동생”이라고 둘러댄다. 이때부터 ‘순천댁’이
명련(박순천의 본명)을 대신하는 ‘순천’이 이름이 되어버렸으며 호적상으로도 민주당 때 아예 정정한다.
이후 박순천은 일본 유학을 결심하여
이미 도쿄에서 공부하고 있는 황신덕·한소제와 함께 현해탄을 건너 요시오카(吉岡)의전에 입학한다. 그러나 첫 번째 유학은 부모가 송금한 봉투의
주소지 추적으로 탄로나게 되면서 마산으로 압송되어 1년6개월간 수감생활을 한다.
형기를 마친 박순천은 1921년 다시
유학길에 오른다. 광복군의 비행사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체력을 키우기 위해 니카이도(二階堂)체육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건강이 나빠져 중도 포기한다.
다시 일본여자대학 사회학부에 입학하여 학업을 마칠 무렵인 1925년 12월 24일 서울 무교동 태인관에서 항일운동의 동지이자 유학생인 변희용과
혼담이 있은 지 6년 만에 결혼식을 올린다.
이후 부부는 암울한 시대에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시가가 있는 경북 고령으로 귀향해 농촌계몽운동을 벌인다. 박순천은 야학을 개설해 규모 있는 살림을 위해 가계부를 적어야 한다고 타이르고 글과 산술을 가르친다. 이곳에서 13년을 지내다가 자녀 교육문제와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일제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1938년 서울로 이사한다. 박순천은 경성방직·금강전구 등의 여자직공감을 맡았다. 한편 황신덕·박승호 등과 학교설립을 추진, 1940년 10월에 경성가정여숙(현 중앙여고)을 개교하고 부교장의 직책을 맡는다. 당시 제자였던 박이순(86)씨의 회고이다.
어머니 이야기를 하고 있는 차남 변영호씨.
“저는 4기 졸업생으로 서대문
부근 지금의 강북삼성병원 자리에서 배웠지요. 선생님은 다정다감하시면서도 리더십이 강해 우리는 그분을 ‘아버지’라고 불렀지요. 평생을 자식처럼
위해 주셔서 저는 그분이 해주셨던 상복을 입고 임종도 지켜보았습니다.”
일제 말 폐교의 위기를 면하기 위해
박순천은 ‘국방가정’ ‘전황뉴스를 듣고’라는 제목의 강연도 하여 광복 후 ‘일제협력’이란 빌미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박순천은 정부수립 후
항일투쟁의 공적을 인정받아 정인보가 지휘하는 감찰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한다. 광복 직후 건국부녀동맹을 조직하여 반탁운동에 앞장서며
독립촉성애국부인회 부회장으로 활동한다.
1948년에는 부인신문을 창간하여
사장으로 5년간 언론활동을 한다. 소설가 임옥인·최태웅·이무영, 시인 모윤숙·구상 등 쟁쟁한 필진이 참여했다. 박순천이 신문사 사장으로 맛본
성취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상이 있는 애기’라는 소아과
상담란을 두고 육아문제도 다루었다. 오늘날의 신문들이 가정이나 여성, 또는 자녀문제를 많이 다루는 것을 보면 당시의 부인신문의 편집이 한발
앞서가고 있었던 면도 엿보인다.… 그러나 처음부터 충분한 자본도 없이 시작한 신문사는 심한 경영난에 봉착하게 된다. 봉급을 제때 못 주는 것이
예삿일로 벌어지고, 두루마리의 신문용지를 가득 싣고 가는 다른 신문사의 트럭을 보면 훔치고 싶은 심정이라고 박순천은 절박한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다.”(‘한국언론인물사화’ 대한언론인회)
박순천은 1950년 대한부인회
소속으로 서울 종로갑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된다. 박순천은 6·25전쟁 때 서울에 남아 ‘대한의용군결사대’를 조직하나 서울에 남아
있었다는 이유로 부역자 명단에 오른다. 서울에 남았던 21명의 국회의원 가운데 특히 선무방송에 동원되었던 3명에 대한 징계가 집중 논의됐다.
분개한 그는 발언을 신청해 이렇게 주장했다.
“국민과 국가의 재산을 하룻밤 사이에
공산도당에게 넘겨주고 도망갔다가 이제 돌아온 사람들이 시민들과 더불어 끝까지 남아있던 사람에게 용서할 사람,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라고 구분하겠다
하니 차라리 방송한 3명뿐 아니라 21명을 모두 한꺼번에 징계하라.”(‘나의 이력서’)
1951년 1·4후퇴로 부산에 내려온
자유당정권은 장기집권을 꾀하면서 거리에서는 연일 ‘백골단’ ‘땃벌레’ 등의 테러단이 동원되는 등 살벌한 시위행렬이 이어졌다. 공포 분위기 속에서
국회의원을 강제 동원하듯 몰아 넣고 이른바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키자 박순천은 이에 결연히 반대한다. 이어 발표된 ‘대한부인회 회원은 모두 자유당에
입당하라’는 대통령의 담화에 반기를 들고 이승만 노선을 떠난다.
박순천은 야당의원들의 모임인
호국동지회에 합류하여 1955년 9월의 민주당 창당대회에서 당고문과 중앙위 부의장으로 선임되며 이듬해 조병옥·장면 등과 최고위원으로 선출된 이래
네 차례나 연임한다. 4·19혁명으로 민주당 정권이 수립된 후 장면 총리는 박순천에게 문교장관으로 입각하라고 요청하나 끝내 사양한다. 그는
민주당 신파에 속했지만 신파나 구파가 아니라 민주당파라는 자신의 주장대로 행동한다.
5·16군사정변을 맞아 허탈해진 박순천은 정치규제가 풀리자 민주당 재건에 앞장선다. 1963년 초 매서운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박순천은 서울 무교동 네거리에 있던 한 사무실에서 구 민주당 간부이던 홍익표와 나란히 서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는다.
5·16군사정변으로 정권이 무너진 뒤 2년 반이나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가 처음 맞는 기자회견이었다. 기자들은 “국민이 준 정권도 유지하지 못한 주제에 무슨 낯으로 나와 정당을 만들겠다는 것이냐”고 비아냥거렸다. 박순천이 답한다.
“그렇습니다. 민주당은 죄인이요,
저는 상주올시다. 우리가 잘못해서 국민들이 피로써 세워준 정권을 망치고 말았습니다. 다른 야당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이름을 갈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3년 전에 도둑맞은 그 간판을 걸고서 국민의 심판을 받자는 것입니다. 우리 민주당이 정말 잘못했으면 매를 때릴 것이요, 이제라도
정신 차려서 박정희 군사정권과 한번 싸워보라 한다면 젖 먹던 힘까지 내어 싸워나갈 것입니다.”(‘광복 50년 한국을 바꾼 100인’ 월간중앙
1995년 신년호 부록)
1964년 박순천은 민주당 최고위원이 된다. 그후 통합야당인 민중당의 최고위원이 되는데 여성이 제1야당의 당수가 되기는 건국 이래 처음이었다. 1965년 한·일협정 때는 당소속의원들의 사퇴서를 의장에게 제출하면서 반대의사를 관철시키려 힘쓴다. 항상 정곡을 찌르는 말로 반독재투쟁에 앞장서나 결코 남성화되지 않은 단정하고 다감한 여성이었다.
박순천은 1983년 1월 9일 서울 화곡동 자택에서
별세하며 부군 일파와 함께 서울 수유리 4·19혁명 유공자 묘역에 합장돼 있다.
박순천은 일파와 사이에 3남3녀를
두었다. 장남 광호(작고·전 삼신기공업 대표)씨는 최미성(작고)씨와 결혼하여 2남2녀를 두었다. 광호씨의 장남 선업(58·사업)씨는
전진영(56)씨와 결혼하였으며, 차남 선민(55·포철연구소 근무)씨는 이문수(54)씨와 결혼했다. 광호씨의 장녀는 선희(56)씨이고, 차녀
선주(52)씨는 박우상(54·건축업)씨와 결혼했다.
박순천의 차남
영호(74·재미사업가)씨는 이화영(72)씨와 결혼하여 장남 선국(41)씨와 장녀 선아(46), 차녀 선영씨를 두었다. 박순천의 3남
준호(작고·전 서울전자 사장)씨는 이길연(70)씨와 결혼하여 장남 선욱(47·한라위니아 감독), 차남 선용(47·전주 증산초교 아이스하키
감독), 3남 선흥(44·사업), 4남 선진(42·재미사업가)씨를 두었다. 박순천의 장녀 금호(작고·전 근명여고 재단이사장)씨는
손창익(작고·주택공사 근무)씨와 결혼하여 2남1녀를 두었다.
장남 손승재(66·현대건설 근무)씨는 사공명옥(66·전 근명여중 교장)씨와 결혼하였으며, 차남 손인재(63·재미사업)씨는 지영숙(57)씨와, 장녀 숙재(60)씨는 송영직(61)씨와 결혼했다. 박순천의 차녀 은호씨는 이광직(작고·외과의사)씨와 결혼하였으며, 3녀 인호(재미)씨는 장태진(작고·전 UCSD대학 교수)씨와 결혼했다. (2011.11.14. 주간조선 / 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근대편) 저자. 사진 이수완 전 홍익대 교수)
내가 본 해암 박순천
고교시절(김해여고)에 선생님으로부터 ‘너희들은 커서 박순천 여사 같은 인물이 돼라’는 가르침을 받을 때부터 줄곧 그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어 2007년 ‘박순천 연구’로 박사학위(국민대 대학원)를 받았다. 해암 선생은 반독재 민주화의 투쟁성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도덕성, 특히 공평무사한 공정성이 주는 카리스마와 적극적인 당내활동으로 민주당 최고위원이 될 수 있었다.
당내의 신파로 분류되고 있으나 본인은 당파를 부인하고, 당파의 이해보다는 대의의 실현을 위해 신파와 구파 간의 갈등해소에 앞장섰다. 자기 자신의 이익이나 당파의 이익보다도 민주적인 당과 국가를 중시하는 도덕성을 보여주었다. 해암 선생은 목적가치로서의 민주주의와 행동양식가치로서의 민주주의를 동시에 구현하는, 절차민주주의에도 투철한 의회민주주의자였음을 알 수 있다.
전 임 (종로구 갑)이윤영 (종로구 을)이인 | 제2대 국회의원(서울 종로구 갑) 1950년 5월 31일 - 1954년 5월 30일 대한부인회 (종로구 을)오화영 | 후 임 (종로구 갑)윤보선 (종로구 을)김두한 |
전 임 (부산시 갑)김지태 (부산시 을)전진한 (부산시 병)정기원 (부산시 정)김동욱 (부산시 무)이영언 | 제4대 국회의원(부산 동구 을) 1958년 5월 31일 - 1960년 7월 28일 민주당 (동구 을)오위영 | 후 임 (부산시 동구 갑)박순천 (부산시 동구 을)이종린 |
전 임 (부산시 동구 갑)박순천 (부산시 동구 을)오위영 | 제5대 국회의원(부산 동구 을) 1960년 5월 31일 - 1961년 7월 28일 민주당 (동구 을)이종린 | 후 임 이종순 |
전 임 신상초 | 제6대 국회의원(서울 마포구) 1963년 12월 17일 - 1967년 6월 30일 민주당 | 후 임 김홍일 |
전 임 장면 | 제7대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 대표 1963년 7월 18일 - 1965년 5월 11일 | 후 임 윤보선 |
전 임 윤보선 | 제9대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 대표 1965년 5월 30일 - 1967년 2월 11일 | 후 임 유진오 |
신민당 제7대 국회의원 비례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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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7월 1일 ~ 1971년 6월 30일 |
¹등록 무효 ²사망 †승계 |
'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 > 국민의 의무는 재미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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