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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국신민이 된 여성 계몽운동가, 박인덕 (朴仁德)

草霧 2013. 12. 16. 11:55

 

 

 

여성계

 

박인덕 (朴仁德, 창씨명 永河仁德, 1896∼1980)

 

 

황국신민이 된 여성 계몽운동가

 

 

 

박인덕사진1941년 임전대책협의회 위원.
1943년 조선교화단체연합회 부인계몽독려반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박인덕(朴仁德, 일본식 이름: 永河仁德, 1896년 9월 24일 ~ 1980년 4월 3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여성주의 운동가, 교육자, 사상가, 언론인, 작가이며 사회사업가이다. 일제 강점기한국의 계몽운동가로 숙화의숙, 인덕대학인덕공업고등학교의 설립자이다. 처음 이름은 임덕(姙德), 아호는 은봉(銀峰), 명종(鳴鐘)이다. 별명은 '조선의 노라' 였다.

 

 

이화여자대학교 출신으로 김활란 등의 선배격이며 '잘 생기고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주를 갖춘' 인물로서 활자매체에 무척이나 자주 등장하던 여성이었다. 또한 3·1 운동으로 희생된 유관순의 선배이자 그를 지도한 교수였다. YMCA의 기독교활동 외에 여성주의 운동가로도 활동했으며, 이혼과 염문 등으로 기독교 교단에서 배척당하였으나 신흥우를 측근에서 도왔으며, 적극신앙단에도 참여하였다.

 

1941년에는 덕화여숙(德和女塾)을 설립하였으나 1945년초 총독부에 의해 폐쇄되었다. 해방 후 독립촉성중앙회 등에 참여하였다가 미국으로 파견된 후 미국에서 활동하였다. 일제 강점기 후반 친일 의혹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1930년 10월 26일 이혼[1] 하였는데, 박인덕은 한국 역사상 최초로 남편에게 위자료를 주고 이혼한 여성이기도 하다. [2] 가명은 '김인덕'이다.

 

  • 2 상훈 기장
  • 3 저서
  • 4 사상적 측면
  • 5 가족 관계
  • 6 논란과 의혹
  • 7 평가와 비판
  • 8 기타
  • 9 주석
  • 10 참고 자료
  • 11 같이 보기
  • 12 관련 서적
  • 13 외부 고리
  • 이화학당,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3·1운동

     

    우수한 성적으로 이화학당 대학부를 졸업한 뒤로는 이 학교 교사로 임용되었다. 그는 이화학당 중등부와 대학부의 기하, 체육, 음악 담당 교사로 일하다가 독립운동에 참여한다.1919년일본에서 귀국한 나혜석을 만나 만세 시위를 주도할 계획을 세운다. 나혜석일본 경찰의 검거를 피해 귀국, 1919년 3월 3·1 운동에 참여한다. 3·1운동이 터지자 나혜석은 이화학당 기숙사로 박인덕을 찾아왔다.[7] 박인덕은 당시 이화학당 교사였다. 그 방에서 독립운동 방향에 대해 의논한다.[7] 박인덕과 협의한 후 나혜석개성평양으로 다니며 지인을 만나 독립운동을 함께 하기를 권유한다. 3월 5일 아침 이화학당 식당에서 만세운동을 한다.[7]

     

    1919년 4월 3·1 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연행되어 구속영장을 발부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구금되기도 했다. 당시 이화학당에서는 유관순 등 학생들이 3·1 운동에 대거 가담했기 때문에, 이들의 담임 교사인 신준려(申俊勵)와 박인덕이 학생들을 선동한 교사로 지목된 것이다. 죄명은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공판받고자 재판장에 나오자 일본인 재판장 와다나베는 박인덕을 보고 이런 말을 했다한다.'만약 내가 한국인으로 아니면 박인덕이 일본인으로 태어났다면 직업이고 가산이고 아내고 자식이고 다 버리고 구애했을것'이라고 하였다. 공판받고자 재판장에 나오자 일본인 재판장 와다나베는 박인덕을 보고 이런 말을 했다한다.'만약 내가 한국인으로 아니면 박인덕이 일본인으로 태어났다면 직업이고 가산이고 아내고 자식이고 다 버리고 구애했을것'이라고[5] 하기도 했다. 그는 3·1운동 때의 학생선동자로 지목되어 신준려와 함께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중 제자인 유관순(柳寬順)의 고문 치사를 목격하였다. 박인덕이 후일 자신의 회고록(Indeok Park, September Monkey, Harper & Brothers, New York, 1954, p.69)에서, 박인덕은 황에스더, 김마리아, 신줄리아와 함께 네 사람이 "정확하게 1919년 7월 24일 오전 11시에 그 전율할 서대문형무소의 철문을 나왔다"고 술회하고 있다.[8] 그러나 1919년 8월 4일경성지방법원 예심계의 예심종결확정서는 동 8월 4일 면소되고, 출감일이 동 8월 5일이라 하였다.[8]

     

    대한애국부인회 사건

    1910년대 후반 우연히 사교계에서 부호가의 아들인 김운호를 만난다. 이화학당의 선교사들은 박인덕이 학교와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했고 미국 웨슬리언 대학으로 유학을 주선하기도 했으나 그녀는 이를 거절하고 부호인 김운호와의 결혼을 선택한다.[10] 당시 선교사들은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결혼을 말렸으나 그는 1921년 김운호와의 결혼을 감행하였다.

     

    김운호는 13세에 서울 동막에 사는 부호 이씨의 딸과 결혼하여 10여년 이상 결혼생활을 하였다. 박인덕에게 피아노를 사주고, 홍수동에 박인덕과 같이 살 신혼집을 짓는 동안에도 아내 이씨와 한 이불을 덮고 지냈다. 박인덕은 결혼 조건으로 본처인 이씨와의 이혼을 요구했고, 이에 김운호는 이씨와의 이혼한다. 구여성 이씨는 신여성 박인덕에게 부잣집 안방마님 자리를 내주고 동막 친정으로 쫓겨났으며, 친정이 기운 후에는 남의 집 침모가 되어 하루하루를 근근이 연명하였다.[1]

     

    김운호는 첫 부인 이씨와는 이혼하였지만, 기생출신인 첩이 한 명 있었다. 이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박인덕은 결혼을 감행한 자신을 탓하게 된다.

     

    박인덕의 결혼은 시작부터 축복을 받을 수 없었다. 결혼한 지 얼마 후, 박인덕은 어느 음악회의 간청으로 피아노 연주자로 무대에 섰다. 그러나 청중이 야유를 퍼부어 피아노 뚜껑도 열어보지 못한 채 울면서 퇴장했다.[1] 그날 저녁부터 무려 7개월간 박인덕은 두문불출하고 아무와도 만나지 않았다.[1] 이후 동대문 근처의 집을 얻어 생활하였다. 하지만 박인덕이 추구하는 인격을 남편은 갖추지 못했다. 곧 돈에 불편없는 기성 가정의 평범한 아내 이상의 어떤 뭣도 찾아볼수가 없었다.[5] 이에 인습과 남편 그리고 두딸을 집에 두고 옥색 파라솔 하나 바스켓에 꽂고서 홀연히 미국으로 유학길을 떠나버리게 된다.

     

    1921년 5월부터는 회월 박영희 등이 창간한 잡지 《장미촌》의 필진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21년 5월에는 콜넘버스라는 시를 발표하였다.[11] 콜넘버스는 영어로 지은 영작시.[12]였다.1921년 부호인 김운호와 결혼하여 딸 두 명이 태어났으나, 김운호의 사업은 결혼한지 한달만에 기울기 시작해, 1년이 되기도 전에 망해버렸다. 결국 박인호는 다시 직업전선으로 나가 친정어머니 말고도 시어머니와 남편과 두 딸을 부양해야 했다. 학교 두 곳에 출강하고 가정교사까지 해야 할 정도로 가세가 기울었다. 결혼 후 다시 1922년 배화학교 교사로 복직했고, 언론, 사회 활동에도 복귀하였다. 이후 그는 신문, 잡지, 강연 등에도 참여하여 여권 신장과 여성계몽운동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순정효황후의 삼촌인 윤덕영 집안의 가정교사로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1923년 9월 감리교 여자신학교에서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를 조직하는데 참여,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배화학교감리교 여자신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출강하며 영어와 음악을 가르쳤다.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여자신학교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고 있던 박인덕 여사는 오는 20일에 다년간 숙망이었던 미국 유학길에 올라 조지아주 웨슬리언대학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여사는 김운호씨의 부인이요 두 아기의 어머니요, 칠십이 되신 홀어머니의 따님이십니다. 여사가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두 따님, 늙은 어머님을 떠나 얼른 돌아오지 못할 길을 밟게 된 것은 여사의 마음 가운데 "조선 여자 사회를 위해 좀 더 잘 배운 일꾼이 되어보자." 하는 결심이 얼마나 깊은지 능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박인덕 여사는 다음과 같이 포부를 밝혔습니다.

    "미국 유학은 벌써 여러해 전부터 계획했던 것이올시다. 남편은 일본으로 공부를 가게 되었고, 두 어린아이는 시어머니께서 맡아 기르시게 되었습니다. 남편과 어린아이를 떠나가는 것이 매우 섭섭하나 삼사년의 세월이란 금방 지나가리라고 믿고 그때에는 희망과 이상으로 가득 찬 재회가 우리를 맞을 것이라 믿습니다. 나는 오직 기쁜 그 미래를 생각하고 현재의 떠나는 슬픔을 잊으려합니다.[1]"- 동아일보, 1926년 7월 16일

     

    근화회

    이혼 논란

    1931년 귀국 직후 박인덕은 가출, 이혼을 선언한다. 남편의 아내가 되기전에 자녀의 어머니가 되기 전에 사람이 먼저되야겠다며 비오는날 손가방 하나만 들고 가출한 것이다.[5] 이때 김운호는 미국에 있는 동안 박인덕에게 남자가 생겼을 것으로 의심했으나 증거는 없었다. 그리고 자식 양육을 대가로 위자료를 요구했다. 그녀는 이혼 소송과 함께 자녀 양육권 청구 소송을 제기하여 두 딸의 양육권을 획득한다.

     

    유학자 계열과 유교적 가치관이 잔존하던 시대라 박인덕에 대한 인신공격과 비난이 거세게 나타났고, 기독교계열에서는 그녀의 이혼을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박인덕이 그간 쌓아 온 명성과 영향력이 적지 않았으므로 그의 이혼은 장안의 화젯거리가 됐 고 찬반양론이 벌어졌다. 당시 박인덕의 이혼은 사회적 이슈가 되어 토론이 벌어졌고 ‘박인덕 여사의 이혼에 대한 사회적 비판 ’이란 제목으로 한 잡지에 실리기도 했다.[17]

     

    “이혼은 불가합니다. …. 간음죄 이외에는 이혼을 불허하게 되어 있습니 다. …. 물론 장래 활동에도 악영향이 있을 것입니다. …. 기성 종교단체 안에 들어와서는 활동할 수가 없게 되겠으므로….[17]”(조선감리교회 총리사 양주삼)

    “당분간은 선두에 나서지 말고 숨어 있어서 근신하는 것이 가하겠고…. 만약 재혼하면 그것은 음행이니까 교회로서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을 것 입니다.[17]”(조선주일학교연합회 회장 김창준)

    “이혼이니 결혼이니 당사자끼리 하는 일을 남이 이렇다 저렇다 시비할 수 없겠지요.[17]”(동아일보사 취재부 기자 이청전)

    “도시 모를 일.[17]”(이화전문학교 교수 이온상)

     

    그러나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혼을 감행한다. 1931년 늦가을 종교계와 여성계는 떠들썩했다. 이화학당 교사를 지내고 여성계몽운동에 앞장서 온 박인덕이 “가정을 떠나 사회로”를 선언하며 이혼을 한 때문이었다.[17] 10월 귀국한 박인덕은 한달만에 이혼을 감행했다. “사랑없는 가 정, 아내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을 따라 한몸을 묻어버릴 수없고, 무지 한 남편을 부양하는 데 일생을 허비할 수도 없으며, 배운 지식과 능력으 로 일생을 사회사업에 바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녀는 남편과 자식을 떠나며 가정을 던지고 나서는 '조선의 현대적 노라'로 일컬어졌다.

     

    이혼의 주체성 확인

    그리고 이혼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의 그의 발언 역시 사회적으로 이슈와 논란거리가 되었다. 더구나 남자가 여자에게 위자료를 주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당시, 그가 남편에게 위자료를 주고 이혼한 것은 당대의 화제가 되었다.

     

    유학 시절 남편이 부치는 편지는 '여자란 남편이나 섬기고 자녀를 잘기르는 것이 본위이니 속히 돌아오라'는데 일관되었다.[5] 그러나 남편 김운호는 그가 보내준 생활비로 새로 첩을 하나 더 들였고, 귀국 후 이 사실을 알게된 박인덕은 이혼을 감행하였다. 주변에서는 그를 만류하였다. 그러나 곧, 이혼이 성립되었고 위자료는 이혼남이 이혼녀에게 주는것이 관례요 상식인데 박인덕은 오히려 자신이 남편에게 위자료를 주어 화제가 되었었다.[5] 이를 두고 '곧 이혼을 요구한 주체가 자신임을 선언한 한국여성사상 획기적인 일[5]'이란 시각도 있다.

    시중의 화제

    3.1 운동 당시 여성들의 시위를 모의한 죄로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박인덕과 나혜석1920년대 초반 결혼도 두드러지게 했다.[19] 한편 1930년대 이혼도 두드러지게 했다.[20] 사회적 존경의 대상이었던 여성들이었기에 더욱 주목을 받았고, 불행해 보이는 개인사는 더욱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이었으며, 많은 여학생들에게 지나치게 자기 주장이 강한 여자의 실패담으로 반면교사가 되었다.[20]

     

    그의 이혼은 사회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혼이 합법적이나 불법적이냐는 논란이 지식인들 사이에서 터져나왔고 윤치호, 이광수 등 소수만이 이혼도 당연한 것이라며 옹호하였다. 또한 1931년 12월 신동아지 12월호에 몽통구리라는 필명으로 "가정에서 사회로:조선이 낳은 현대적 노라"라는 주제의 특집이 실렸고, 1932년 7월에는 잡지제일선 7월호에 "돌아오지 아니하는 어머니 박인덕"이라는 주제의 특집이 실리기도 했다. 한편 성리학 선비와 시골의 보수적 유학자계층, 일부 기독교인들의 비난과 멸시에도 굴하지 않고 그는 계속 기독교신앙, 언론, 칼럼, 강연 활동을 계속하였다.

     

    1935년 삼천리 3월호에 "그리운 이화 칼리지여"라는 주제의 특집을 기고하였다. 한편 1938년에는 삼천리 11월호에 "파란 많은 내 반생"이라는 글일 기고하였다.

     

    이후 덴마크의 실업학교를 본떠서 덕화여숙(德和女塾)을 설립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성들에게 1년간 실업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1941년 덕화여숙을 설립하면서 친일 단체 녹기연맹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1945년 광복 시점까지 약 4년간 친일 행적을 보였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조선임전보국단에 참가하여 연설회와 좌담회에서 전쟁 지원을 연설했고, 《매일신보》, 《신시대》에는 친일 논설을 실었다. 종전 직전 조선언론보국회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명의 도용 여부는 불명확하다. 1941년 8월 28일 경성호텔에서 제1차 위원총회를 개최하고 회명을 임전대책협력회로 고칠 것, 임전대책연설회를 열 것, 채권가두유격대를 조직할 것 등을 결의하고 상무위원으로 김동환, 박인덕, 신태악(辛泰嶽), 신흥우, 임흥순(任興淳) 등 11명을 선정 발표했다.[26] 이 결의에 의해 9월 4일 부민관 대강당에서 임시대책 연설회가 개최되었다. 연사는 김동환, 박인덕, 신태악, 신흥우, 윤치호, 이종린, 최린 등이었다.[26] 이어 박인덕은 채권가두유격대 종로담당의 한사람이 되었다. 1945년조선총독부로부터 반일 사상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덕화여숙이 폐쇄당하였다. 그해 8월 광복을 맞이하였다.

     

    유관순 신격화, 미화 작업

    1948년에는 미국에서 개최된 자유국가여성대회에 대한민국의 대표로 참석하여 한국의 역사와 새로 수립된 대한민국의 현황을 알리고 홍보하며 국제사회의 지지를 구하는 등의 강연 활동을 하였고, 또한 미국의 소리 방송에도 출연하여 대한민국을 소개하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그 뒤 1950년 6.25 전쟁이 터지기 직전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이후 1950년대에는 주로 미국에 주로 머무르면서 강연 활동을 하고, 자전적 영문 소설 《9월의 원숭이(September Monkey)》(1954)를 출판했다. 저서로 이 책의 후편격인 《The Hour of the Tiger》(1965), 《The Cock Still Crows》(1977)과 속담집인 《The Wisdom of the Dragon》(1970)가 있다.

     

    1950년 9월 미국 워싱턴 D.C에서 교육, 장학 재단인 부려재단(Beria in Korea Foundation)을 설립하였다. 1954년 미국 순회강연 도중 켄터키 주의 실업계 학교인 베리야 대학을 견학하고 실업계 학교를 세울 계획을 세운다.

     

    1948년에는 미국에서 개최된 자유국가여성대회에 대한민국의 대표로 참석하여 한국의 역사와 새로 수립된 대한민국의 현황을 알리고 홍보하며 국제사회의 지지를 구하는 등의 강연 활동을 하였고, 또한 미국의 소리 방송에도 출연하여 대한민국을 소개하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그 뒤 1950년 6.25 전쟁이 터지기 직전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이후 1950년대에는 주로 미국에 주로 머무르면서 강연 활동을 하고, 자전적 영문 소설 《9월의 원숭이(September Monkey)》(1954)를 출판했다. 저서로 이 책의 후편격인 《The Hour of the Tiger》(1965), 《The Cock Still Crows》(1977)과 속담집인 《The Wisdom of the Dragon》(1970)가 있다.

     

    1950년 9월 미국 워싱턴 D.C에서 교육, 장학 재단인 부려재단(Beria in Korea Foundation)을 설립하였다. 1954년 미국 순회강연 도중 켄터키 주의 실업계 학교인 베리야 대학을 견학하고 실업계 학교를 세울 계획을 세운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에 선정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서는 교육/학술 부문에 포함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1976년 이화여자대학교 이화기장

  • 《9월의 원숭이(September Monkey)》(1954)
  • 《The Hour of the Tiger》(1965)
  • 《The Cock Still Crows》(1977)
  • 속담집 《The Wisdom of the Dragon》(1970)
  • 아버지 : 박영하(? - 1903년)
  • 어머니 : 김온유
    • 언니 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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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편 : 김운호(1931년 이혼)
    • 딸 : 김혜란(金慧蘭, 미국명은 Iris, 1921년 - 1996년 1월 4일, 교육자)
      • 외손 : 이중희(李重熙, 1948년 - , 사회사업가, 베리아 재단 이사장)
      • 외손 : 이선희(李善熙)
    • 딸 : 김혜련(金慧蓮, 미국명은 Lo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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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 행적 은폐 의혹

    일제 강점기 말기 친일 행적을 숨기기 위해 유관순을 미화, 신화화를 시도했다는 의혹이 있다. '기념사업을 주도한 박인덕이 자신의 일제말 친일행적을 유관순의 신화화를 통해 덮어버리려 했던 것은 아닐까[31]'라는 것이다. 유관순의 존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해방후 박인덕의 주도로 기념사업이 추진되면서부터였다.[31]

     

    유관순이 의도적으로 띄워졌다는 견해도 있다. 유관순 열사가 해방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가 해방 후, 친일 혐의자인 박인덕과 전영택한국잔다르크와 독실한 기독교 신자 등의 이미지를 씌워 인위적 영웅을 만들었다는 의혹도 있다.[32]

    유관순 이용 논란

    유관순 사후 박인덕과 일부 기독교인들이 그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목적 또는 자신들의 친일행위를 덮기 위한 일부 기독교인들에 의해 과도하게 띄워졌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반기독교운동가이자 종교권력감시시민연대 대표인 김상구는 유관순이 사후 선전도구로 이용되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그는 유관순 열사는 박인덕 등 친일 경력자들이 해방 후 자신의 전력을 덮고 개신교 선교 전략에 이용하는 도구로 만들어낸 영웅이라고 주장한다.[33] 서대문형무소의 유관순 기록과 당시 언론 보도 등 구체적인 자료를 일일이 확인해 내린 결론이다.[33] 2011년 반기독교운동가이자 종교권력감시시민연대 대표 김상구는 신간 <믿음이 왜 돈이 되는가>(해피스토리, 2011)에 유관순을 악용한 일부 기독교 세력에 대해 폭로하기도했다. 또 김상구는 '유관순을 친일 전력을 덮어주는 동시에 개신교의 선교 전략에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던 ‘시대의 아이콘’으로 이용했다[34]'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당대의 시각

    박인덕이 이화학당 교사로 재직할 당시 학생들과 찍은 단체사진. 뒷줄 가운데가 박인덕이고 같은줄 오른쪽 끝이 유관순 열사다.

    1931년삼천리지는 그를 '당대를 대표하는 신여성'의 한사람으로 꼽았다. '"재덕과 미모로 이름을 날리던" 박인덕, 허영숙, 김명순 (1896년)김명순, 김원주, 나혜석, 윤심덕을 이 시대를 대표하는 신여성[35]'으로 꼽았다. 얼굴 곱고 음악과 연설 잘하기로 이름 높았지만 결혼과 이혼으로 인해 사회적 파문을 일으키며 기독교 공동체로부터 두 번 추방을 경험했다.[24]

     

    이숙진 성공회대 초빙교수는 2009년 11월 한 포럼에서 "박인덕은 '전문직 여성클럽', '농촌 여성과 아이를 위한 공동체', '숙화의숙' 등을 만들었지만 (결혼과 이혼 때문에) 한국 기독교 공동체에서 존재감이 약한 국외자로 남게 되었다.[24]"며 지나치게 폄하되어 왔다고 지적하였다.

     

    자유 이혼을 감행하여 '조선의 노라'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36] 그러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 타인의 가정을 파괴했다는 비판도 제기되어 왔다. 박인덕 생존 시에도 세상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1]에 시달려야 했다.

     

    일설에 의하면 박인덕의 결혼이 이광수의 소설 재생의 모델이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20] 재생3.1 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청년 남녀가 출옥한 뒤 어떻게 돈에 팔려가고 돈에 복수하기 위해 타락하여가는가를 그린 소설로, 3.1 운동 세대에 대한 평가 절하, 모독으로 읽히는 소설이다.

     

     

     

     

    신여성 의식을 향상시킨 여성잡지 『부인』·『신여성』

      

    당대의 여성인재’ 박인덕의 이혼사연은 세간의 대대적인 관심을 끌었다. ‘신동아’ 1931년 12월호에 실린 ‘조선이 낳은 현대적 노라 박인덕’과 ‘제일선’ 1932년 7월호에 실린 ‘돌아오지 아니하는 어머니 박인덕’.

    박인덕은 반민족행위를 한 여성명사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1950년대 거의 모든 시기를 미국 등 외국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시기에는 김활란의 선배로서 '잘 생기고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주를 갖춘' 인물로서 활자매체에 무척이나 자주 등장하던 여성이었다.

     

    또한 그녀의 자서전적인 글 {________}(September Monkey)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학생 때는 이화학당 최고의 인재로 명성이 자자했고 졸업 후에는 모교 교사로 일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다’는 죄목으로 투옥되기도 했던 박인덕. 그러나 그는 쏟아지는 세간의 기대와는 달리 부유한 유부남을 이혼시켜 결혼하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입방아에 오른다. 우여곡절 끝에 6년간의 유학을 끝내고 돌아온 후에는, 어렵게 결혼한 남편과 자식을 찾지 않아 다시 한 번 사람들을 어리둥절케 하는데…. 경성 안 호사가들을 자극했던 이 여인의 행보에 숨은 당대 결혼제도의 그늘과 ‘신여성’이라는 이름의 굴레.

     

     

    1919년 2월에 선언된 「대한독립여자선언서」

     

    여성 계몽운동가로서 화려한 활동

    김운호는 박인덕에게 구애하기 위해 동대문 밖 홍수동에 저택을 짓고 다이아몬드 반지와 만원짜리 피아노를 선물했다. 여학생에게 구애하는 남학생의 모습을 그린 학생만화. ‘별건곤’ 1927년 1월호.

    1896년 평남 진남포에서 출생한 그녀는 고등교육을 받은 대부분의 여성들처럼 기독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과부가 된 어머니가 기독교인이 되면서 하나뿐인 딸을 제대로 키우겠다는 신념에서 기독교계인 진남포의 삼성학교에 입학시킨 것이 그녀가 기독교와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박인덕은 선교사의 지원과 장학금으로 1912년 이화학당 중학과를 졸업하였고 1916년에는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하였다.

     

    아직 경성제국대학도 설립되지 않은 시기였으므로 이화학당 대학과는 국내 최고의 전문과정이었고, 학생수도 졸업생도 극히 적어 한 해 졸업생이 한 명도 없었던 적도 있었다.

     

    이런 까닭에 졸업생은 이화학당 내에서만이 아니라 조선 사회의 주목과 기대를 한몸에 받게 마련이었다.

     

    박인덕은 졸업과 함께 이화에서 기하, 체육, 음악을 맡아 가르쳤다. 서글서글한 눈과 이지적인 콧날에 사람을 거느리는 포용성까지도 뛰어났던 그녀는 '노래 잘하는 인덕', '말 잘하는 인덕', '잘 생긴 인덕'으로 이화학당 내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알려져 있어 프라이 당장(堂長)의 총애를 바도 있었다. 

     

    조선여자교육회 순회강연 일정

     

    박인덕은 이 시기에 계몽운동적 차원에서 사회 참여 활동도 했다. 그러다가 3·1 운동 때에는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학생을 선동하였다는 죄목으로 동료교사인 신준려(申俊勵)와 더불어 경찰에 연행되어 4개월 동안 감옥생활을 했다.

     

    그리고 출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그해 11월에 또 다시 대한애국부인회사건으로 투옥되는 고초도 겪었다.

     

    연이은 두 번의 투옥 후에 그녀는 이화학당에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1921년 그녀를 아끼던 아펜젤러(훗날 이화여전 교장이 됨)로부터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제안을 받게 된다.

     

    즉, 미국 오하이오의 웨슬레안대학으로 유학할 수 있도록 주선을 해 주겠다는 것이었다(그의 유학 주선은 이화학당 대학과 5회 졸업생인 김활란*보다 앞섰다). 

     

    그러나 박인덕은 유학이라는 좋은 기회를 포기하고 결혼을 결심했는데, 그 결혼 상대는 김운호(金雲鎬)라는 부호였다. 박인덕이 결혼을 선택하였다는 사실은 당시로서는 주위 사람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다 주었다.

     

    ‘여성’ 1939년 3월호에 실린 박인덕의 글 ‘나의 자서전’.

    당시 이화학당의 선교사들은 자기 학교 출신의 학생들이 독신으로 남아 학교와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녀의 결혼 결심은 이화에서 절대적인 지지자들을 잃어 버리는 계기가 되었다. 결혼 후 박인덕은 1923년 9월 감리교 여자신학교에서 금주·금연운동을 주요 활동으로 하는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를 발족하여 회장으로 활동하는 등 사회 활동을 계속 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그녀의 결혼생활은 파경을 맞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두 딸을 거느리고 배화학교(1921∼1926. 9)와 여자신학교에서 영어와 음악을 가르치다 배화의 교사였던 루비 리(Rubie Lee)의 협조로 1926년 웨슬레안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녀는 그곳 웨슬레안대학에서 사회학 B.A. 학위를 받았고, 컬럼비아대학 사범대에서 교육학 M.A. 학위를 받았다. 미국에서도 그녀는 사회활동을 계속했는데, 민족주의단체인 근화회(槿花會)에서 활동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근화회는 1928년 2월 뉴욕에서 김마리아, 황애덕(黃愛德), 박인덕 등 여자유학생들의 발기로 조직된 것으로 출판이나 순회강연 등을 통해 국내정세를 외국인에게 소개하여 조국광복에 기여하려는 단체였다.

     

    그녀는 미국에서 학생봉사운동에 호응하여 각지의 대학에 나가 강연하고 세계 유세계획을 세워 북아메리카는 물론 유럽 각지에 조선을 소개하는 활동을 벌였으며, 동남아와 중국을 거쳐 1931년 조국에 돌아왔다.

     

    그녀의 귀국을 환영하는 모임이 명월관 본점에서 윤치호*의 사회로 각 방면의 지기 56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는 그에 대한 기대와 지명도를 잘 반영해 준다.

     

     

    귀국 후 그녀는 교사모임으로 조직되었던 망월구락부를 황애덕, 최활란(崔活蘭)과 더불어 1932년 '단정한 직업을 가진 여성'들의 모임인 조선직업부인협회로 개편하여 여성들을 위한 경제학 강연을 여는 등의 활동을 폈다. 한편 그녀는 농촌여성에 대한 계몽활동에도 참가하였다.

     

    그녀의 열성 덕분에 여자사업협회에서는 1933년 농촌부녀를 위한 이동학교를 개설하기도 했다. 그리고 감리교 농촌부녀지도자수양소의 일도 하였다. 1935년에는 {농촌교역지침}을 발간하여 종교활동의 일환으로서 농촌계몽운동을 하였다.

     

    민족주의계열 내에서는 1920년대 후반 이후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이 커져가고 있었는데, 이 영향을 받아 그녀의 농촌에서의 활동은 덴마크식 농촌을 이상으로 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녀가 농촌문제나 농촌여성들의 문제를 보는 시각은 식민지 현실에서 문제의 해결을 찾아나가는 식이 아니라 덴마크의 모델을 따라가려는 식이었다. 따라서 당시 농촌문제의 원인제공자인 일제와 지주소작관계의 문제는 그녀의 관심 밖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활동은 주로 농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파악하고 행해졌으며, 그들의 처지를 개선하는 것에 주요한 관심을 기울였고, 무지로부터의 해방이 생활 개선의 주요 수단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그가 주로 지식인 여성 중심의 여성단체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박인덕이 일제와의 투쟁적 관점을 결여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3·1 운동 때 집단적 행동보다 개인적 행동을 주장했었다는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리고 3·1 운동 전후의 성향은 1920년대 초반에도 별 변화없이 계속 이어져, 금주·금연을 운동의 목표로 내세우게 된다. 이것은 그녀의 민족운동·여성운동의 방향이 실력양성운동, 자유주의적 여권운동에 기반하고 있었다는 것을 잘 설명해준다. 

     

    이처럼 일제에 대해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합법적 공간에서 운동하는 데 익숙했던 그녀의 성향이 훗날 반민족행위로 나아가는 데도 거리끼지 않게 만드는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토산애용부인회가 조선물산 사용을 선전하기 위해 개최한 강연회

     

    녹기연맹 의원으로 덕화의숙 설립하며 급격한 변신

    미국에서 조선 민족의 존재를 알리며 민족주의단체에 참가했던 그가 어떠한 계기로 반민족행위자가 되었는가. 이에 대한 분명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정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리라 추정할 수는 있다.

     

    그가 벌인 여러 가지 활동은 1930년대 중반이 지나면서 일제 관제운동인 농촌진흥운동에 흡수되거나 중단되었다. 게다가 박인덕은 교회나 각종 사회단체들과 관련된 활동을 하였으나 안정된 직업을 가지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1935년경부터는 일제가 기독교에 대해서도 신사참배니 각종시책을 강요하여 강력하게 통제하였다. 이런 가운데 다른 활동가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박인덕 역시 자신의 입장을 결정할 시점을 맞이하였다.

     

    국내의 민족족의계 인물들 대부분이 이미 일제에 대해 투쟁성을 잃어 버린 지 오래였다. 침묵할 것인지, 굴복할 것인지 그것만이 남아 있었다. 일제에 저항하기엔 그녀의 정치적·사회적 입장은 너무나 미약했다.

     

    그녀의 개인적 야망과 왕성한 활동욕은 일제와 타협하여 비록 굴욕적이더라도 자신의 사회적 생명을 이어가는 쪽을 택하였다. 자신과 친분있던 많은 사람들----윤치호, 신흥우(申興雨), 김활란 등----이 이미 친일행각을 벌이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의 반민족행위는 다른 여성명사들과는 다소의 차이를 보인다.

     

    다른 이들이 이미 확보한 지위----교장이나 교사, 종교상의 지위 등----를 유지·강화해 가려는 데 있다면, 상대적으로 부평초같이 지내던 그녀는 자신의 입지를 새롭게 만들어 나가는 데 친일 행위를 이용한 것이었다.

     

    YWCA의 제1회 하령회 기념

     

    박인덕의 친일행각은 덕화여숙(德和女塾)의 설립에서 시작된다.

    덕화여숙은 녹기연맹(綠旗聯盟) 부설 청화여숙(淸和女塾)을 본떠 자매학교로서 만들어졌다. 후대의 기록에 의하면 덴마크의 실업학교를 본보기로 삼은 것이라고 하나, 덕화여숙은 음으로 양으로 녹기연맹의 도움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그가 녹기연맹과 관련을 갖게 된 것은 일본어를 배우게 되면서부터이다.

     

    일제가 목조아 오는 가운데 박인덕은 1939년경 일본어를 익혀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1938년 교육령에 의해 교사들은 일본어를 상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학교와 달리 이화학당에서는 일본어 교육이 그리 중시되지 않았으며 박인덕으로서는 미국 유학으로 일본어를 충분히 익힐 기회가 없었다.

     

     

    녹기연맹(綠旗聯盟)의 쓰에(須江愛子)에게서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하여 하시기타(橋北町)의 '국어강습회'를 거쳤다. 이러한 가운데 녹기연맹측은 자기 끄나풀로서 박인덕을, 박인덕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해 줄 수 있는 학교설립의 지원자로서 녹기연맹을 선택한 셈이었다.

     

    1941년 4월 18일 덕화여숙 설립일에 검사정(檢事正) 야마사와(山澤) 및 나가사키(長崎), 구라시게(倉茂) 보도부장, 이화여학교 신도순(辛島純:원이름은 辛鳳祚) 등이 축사를 읽었고, 교사진도 녹기연맹의 쓰다(津田節子), 청화여숙 교사가 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淸田美智子, [덕화여숙을 방문하고], {綠旗}, 1941.6). 이런 점으로 미루어 덕화여숙 자체가 고등여학교를 졸업한 사람에게 1년 과정의 직업교육을 실시하는 것이라고는 하나 자율적인 교육기능을 갖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매일 아침마다 [황국신민의 서사]를 읊고, 청화여숙과 조선신궁에 합동참배하는 일종의 녹기연맹의 부설학교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 즈음하여 그는 나가가와(永河仁德)라고 창씨하고, 같은 해 8월에는 임전대책협의회의 결성에 참가하여 김활란과 더불어 위원이 되어 9월에는 김동환*, 신태악*, 신흥우, 윤치호, 이성환(李晟煥), 이종린(李鐘麟), 최린* 등과 함께 '임전대책 연설회'에서 '승전의 길은 여기에 있다'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미국에서 결성된 대한여자애국단원들

     

    그리고 전쟁비 조달을 위한 채권가두유격대로서 이숙종(李淑鐘), 송금선(宋今璇)과 함께 참가하였다. 그녀가 당시 행하고 다닌 친일행위들은 1941년 12월 20일 {매일신보}에 실린 [정전(征戰)을 뒤에 지키는 맹서]라는 글을 통해 명확히 드러난다.

     

    "대체 왜 영·미하고 싸우게 되나를 잠깐 생각합시다.……중대한 것 중의 하나는 남의 구역에 영·미가 침범을 하는 것입니다.……그것이 우리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대동아에 사는 전민족에게 끼치는 일이니까 우리는 정의를 위하여 굳게 싸우는 것입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공부하고 강연하고 다녔던 미국을 적국으로 돌리고 자신의 조국을 짓밟고 있는 일본 제국주의를 비호하여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을 '정의의 전쟁'으로 미화하였다.

     

     이화학당 100주년기념비 ⓒ프레시안

     

    근대에 들어오면 전쟁시기에 여성정책이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일제도 이 시기에 와서 여성들을 역사의 전면에 부각시키고 여성의 역할이 중요함을 강조하여 여성들을 회유·동원하는 데 광분하였다. 

     

    박인덕은 이러한 일제의 요구에 대해 조선임전보국단의 평의원과 그 부인대의 지도위원로서 1941년 12월 27일 결전부인대회에서 사회를 맡아 "지금은 우리 1500만 여성이 당당한 황국 여성으로서 천황폐하께 충성을 다할 천재일우의 시기입니다.

     

    이에 우리 반도 여성을 대표로 하여 '결전부인보국회'……를 조직"하자고 하였다. 그리고 목 조이듯 궁핍을 강조하였던 당시 가정생활에서의 절약, 간단화를 강조하여 "이때야말로 주부된 우리들이 모든 생활에 간단화하기를 생각하여 시간으로, 물질로, 금전으로 남은 것은 국가에 바치겠다는 이 한 정신을 가지고 생활할 때에 필승은 우리 앞에 오고야 말 것이다"([의식주에 관한 필승의 길], {신시대}, 1943. 4)라며 일제의 수탈과 착취를 합리화하고 군복수리작업 등을 활동으로 삼았다.

     

    그리고 전쟁이 소모전으로 되면서 군인의 충원이 급해지자 일제는 징병제를 계획하고 학병을 끌고 갔다. 이를 위해서 우선적으로 선전대원으로서 각종 관제 단체들을 동원하였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박인덕의 소식을 전하는 1926년 7월16일자 ‘동아일보’ 기사.

    이 때 박인덕은 '새어머니 될 우리의 감격과 포부'를 논제로 한 좌담회에 참석하였고, 학병을 동원하기 위해서 조선교화단체연합회 부인계몽독려반으로 파견되었다.

     

     이외에도 조선언론보국회(1945. 6. 8 조직됨)의 이사를 맡는 등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각종 반민족적 단체나 각종 토론회·강연회의 연사로서, 그리고 사회자로서 맹활약을 하였다.

     

    이러한 친일 행위 중에서도 그는 "(여성인----인용자) 우리는 배우고, 생각하고, 남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대표적 황국신민이 되어서 우리 스스로가 지도자로 되자"({대동아}, 1942.5)고 함으로써 매국적 행위 속에서도 여권신장에 대한 희망을 나타내고 있다.

     

    병천 아우내 만세운동을 주도한 유관순

     

      이는 바로 1920년대의 자유주의 여권론자 대부분의 모습이었다. 일제에 굴복하면서도 여성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고 본 것은 전형적으로 민족문제와 여성문제를 분리시켜 본 예이다.

     

    해방 후 반탁 · 반공연사로 활약

    3.1절을 보내며 류관순열사가 역사적으로 과대평가되었다는데..해방 전에는 미국을 비난하던 입으로 박인덕은 일제가 패망하고 미군이 들어오자 돌변하여 미군정에 밀착되어 미소관계의 냉전이 시작되는 틈 속에서 다시 변신을 꾀하였다.

     

    그러나 8·15 직후에는 반민족행위와 관련되어 우익민족주의자들이 별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1946년 신탁문제를 둘러싸고 우익여성운동도 바람을 타고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반탁운동체가 총집결될 때 여성단체도 독립촉성애국부인회로 결집되었다. 박인덕은 독립촉성애국부인회의의 전국부인대회에서 '민주주의와 여성'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는가 하면 회의의 사회자로 맹활약을 하고 정보부장으로 선임되어 전국적 무대에 재등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미군정청에 의해 제1회 국제부인대회에 남한대표로 미국에 파견되었고 미국에서 반탁여론을 조성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이후 미국에서 저술·강연에 열중하여 {____________}(September Monkey)와 {______________}(寅時:The out of Tiger) 등 자서전적인 책을 썼다. 이 책은 각국어로 번역되어 수만 권이 판매되었고, 이외에도 격언집 {용의 지혜}(The Wisdom of Dragon) 등도 발행하였다.

     

    그 인세와 강연료 등을 기금으로 1961년 이후 인덕실업전문대학 등을 설립하여 인덕학원 이사장이 되었다. 일제하 덕화여숙으로 왜곡되어 나타났던 그의 학교 설립의 포부는 그 후에도 이어져 학교의 이사장이 되었다.

     

    그리고 일제시기 학교 설립자가 되었던 대부분의 인물들이 학교를 그들의 자손에 물려준 것처럼 그 역시 딸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 강정숙(영남대 강사·여성학)

     

    박인덕 朴仁德 1897년 ~

    여성독립운동가·교육가.

    평안남도 용강 출신. 1916년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과 동시에 이화학교와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기하·체육·음악 등을 가르치며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생선동자로 지목되어 동료교사인 신준려(申俊勵)와 함께 붙잡혀 4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 때 제자인 유관순(柳寬順)의 순국을 목격하였다. 출옥한 뒤에 다시 학교로 돌아갔으나 애국부인회 및 적십자사에 참여하여 지하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그 해 12월에 또다시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1922년부터 배화학교 교사로 교육계에 복귀하면서 신문·잡지·강연을 통하여 여권신장과 여성 계몽운동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1926년 미국에 유학하여 조지아 주의 웨슬리안 대학을 거쳐 컬럼비아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졸업 후에 미국의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에 가담하여 미국전역에서 강연회를 개최하였고, 귀국한 뒤에는 덴마크의 실업학교를 본떠서 덕화여숙(德和女塾)을 설립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성들에게 1년간 실업교육을 실시하였다.

     

    8·15광복 후 미국에서 개최된 자유국가여성대회에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하여 우리나라의 실정을 알리는 강연도 하였다. 또한 ‘미국의 소리’ 방송을 통하여 우리나라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1954년 미국순회강연 도중 켄터키 주의 실업학교인 베리아 대학을 견학하고 우리나라에도 그와 같은 학교를 세우겠다고 결심하여 1961년 인덕실업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때의 설립기금 일부는 뉴욕에서 발간된 자서전 『9월의 원숭이』의 수입금에 의하여 충당되었다. 이 학교가 바로 지금의 인덕실업전문대학(지금의 인덕대학)이다.

     

      -1896년 평남 용강 생
      -1916년 이화학당 대학과 졸업 동시에 이화학당 기하 체육 음악 교사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에서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학생을 선동하였다는 죄목으로 붙잡혀 4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름
      -1919년 11월 대한애국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름
      -1922년 배화여고 교사로 교육계에 복귀하면서 신문 잡지 강연을 통해 여권신장과 여성계몽운동을 위하여 활동
      -1923년 9월 감리교 여자신학교에서 금주 금연운동을 주요 활동으로 하는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를 발족하여 회장으로 활동
      -1921~26년 배화여고와 여자신학교에서 영어 음악을 가르침
      -1926년 미국 조지아주의 웨슬레안대학에 유학해 사회학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컬럼비아대학 사범대에서 교육학 문학석사를 받음
      -1928년 2월 뉴욕에서 김마리아, 황애덕(黃愛德) 등과 민족주의 단체인 근화회(槿花會)를 발기하여 활동
      -1935년 '농촌교역지침'을 발간해 농촌계몽운동
      -1941년 덕화여숙(德和女塾) 설립 일에 검사정 야마사와(山澤) 및 나가사키(長崎), 구라시게(倉茂) 보도부장, 이화여학교 신도순(辛島純 : 원 이름은 辛鳳祚) 등이 축사를 읽었고 교사진도 녹기연맹의 쓰다(津田節子), 청화여숙 교사가 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淸田美智子, '덕화여숙을 방문하고' 綠旗 1941.6)
      -1941년 8월 25일 부민관에서 임전대책협의회를 개최하였는데 실천위원으로 선출됨
      -1941년 8월 30일 '나서라 증산 건설(절대적인 국가 요청)'이라는 요지로 담화문 발표
      -1941년 9월 4일 부민관에서 임전대책연설회를 개최하였을 때 '승전의 길은 여기에 있다'는 연제로 강연
      -1941년 임전보국단 준비위원회 준비위원
      -1941년 9월 7일 임전대책강연회를 끝마친 임전대책협의회에서는 '이로써 실천으로!'라는 슬러건을 세우고 채권가두유격대로 나섰는데 박인덕은 윤치호(尹致昊) 등과 함께 종로대에 나섰다
      -1941년 11월 15일 창립된 조선언론보국회 이사로 선출됨
      -1941년 12월 18일 동성상고에서 시국부인 대강연회가 열렸을 때 모윤숙(毛允淑)과 함께 강연
      -1941년 12월 20일 '정전(征戰)을 뒤에서 지키는 맹서'라는 요지로 매일신보에 논문 발표
      -1941년 10월 22일 부민관에서 결성된 조선임전보국단 결전부인대회를 결성하고 오후 6시 강연회 때 사회를 맡아 '우리 1천5백만 여성은 당당한 황국여성으로서의 천황폐하께 충성을 다할 천재일우의 시기입니다' 등의 내용으로 개회사를 함
      -1942년 1월 5일 결성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1942년 2월 15일 영(英) 동양침략의 아성 싱가폴 공략 대강연회에서 '동아여명과 반도여성'이라는 연제로 강연
      -1943년 조선교화단체연합회 부인계몽독려반
      -1945년 6월 8일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1980년 사망

     

     

     

     봉건의 굴레 벗어난 교육사업가 박인덕               

    1931년 늦가을 종교계와 여성계는 떠들썩했다. 이화학당 교사를 지내고 여성계몽운동에 앞장서 온 박인덕이 “가정을 떠나 사회로”를 선언하며 이혼을 한 때문이었다. 서른다섯살의 지식인 여성이 공개적으로 가정을 박차고 나온 것이다.

                                                     

    박인덕은 당시 종교계와 여성계의 떠오르는 별이었다. 이화학당을 나온 박인덕은 모교의 교사로 있으면서 3·1만세운동 때는 학생선동자로 지목 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감 뒤에는 교육을 통한 애국심 고취, 강연과 문필활동을 통한 여성계몽 및 여권신장에 앞장섰다. 미국해 유학하여 웨슬리언대와 컬럼비아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지식인 여성으로 서 당당한 경력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박인덕 은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곧 부잣집 아들 김운호와 결혼하여 딸 둘을 낳았 다. 남편이 파산하자 박인덕은 가정교사로 혹은 학교 교사로 생활을 꾸려 야 했다. 서울 아현동 그의 집에서는 남자의 매질 소리와 여자의 비명이 흘러나오곤 했다. 결국 박인덕은 어린 딸들을 남겨둔 채 미국 유학을 떠 난다. 미국에서 그는 스스로 학비를 벌어 공부하는 한편 두고온 아이들에 게 생활비를 부쳐주었다.

                                                

    1931년 10월 귀국한 박인덕은 한달만에 이혼을 감행했다. “사랑없는 가 정, 아내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을 따라 한몸을 묻어버릴 수없고, 무지 한 남편을 부양하는 데 일생을 허비할 수도 없으며, 배운 지식과 능력으 로 일생을 사회사업에 바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박인덕이 그간 쌓아 온 명성과 영향력이 적지 않았으므로 그의 이혼은 장안의 화젯거리가 됐 고 찬반양론이 벌어졌다. 당시 ‘박인덕 여사의 이혼에 대한 사회적 비판 ’이란 제목으로 한 잡지에 실린 지상토론을 보자.

    “이혼은 불가합니다. …. 간음죄 이외에는 이혼을 불허하게 되어 있습니 다. …. 물론 장래 활동에도 악영향이 있을 것입니다. …. 기성 종교단체 안에 들어와서는 활동할 수가 없게 되겠으므로….”(조선감리교회 총리사 양주삼)

                                                                

    “당분간은 선두에 나서지 말고 숨어 있어서 근신하는 것이 가하겠고…. 만약 재혼하면 그것은 음행이니까 교회로서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을 것 입니다.”(조선주일학교연합회 회장 김창준)

                              

    “이혼이니 결혼이니 당사자끼리 하는 일을 남이 이렇다 저렇다 시비할 수 없겠지요.”(동아일보사 이청전)

                                      

    “도시 모를 일.”(이화전문학교 이온상)

                                 

    지상토론은 박인덕을 가리켜 ‘조선의 현대적 노라’라 하면서 “그의 앞 길에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가?”라고 의문부호로 끝난다.

             

    당시 신여성이라 불린, 신학문을 교육받은 여성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는 남편이나 가족과의 불화, 이혼같은 아픔을 겪어야 했다. ‘삼종지도에 충 실한 현모양처’라는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사회활 동에 적극 뛰어들고자 한 이들이 걸어야 했던 가시밭길이었다. 그런 뜻에 서 박인덕보다 두살 아래로 역시 이화학당, 웨슬리언대, 컬럼비아대를 거 쳐 이화전문 교장이 된 김활란이 평생 독신으로 지낸 사실은 음미해볼 여 지가 있다. 여자에게 결혼과 일은 정녕 잡기 힘든 두마리 토끼인가.

        

    이혼 뒤 박인덕은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다. 국내에서는 교육사업, 특히 실업교육에 힘을 기울여 인덕실업학교를 세우고 1980년 세상을 떴다.

       

    박은봉/역사연구가  ©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11일 제 174호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羅蕙錫)

     

    진흙 속에서 피어 불꽃같이 지다

     

    영관을 쓴 여류들

    내가 처음 나혜석에 관심을 갖은 것은 1974년이었다. 이구열(李龜烈)의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동화출판공사, 1974)라는 책을 봤기 때문이다. 또한 <나혜석 전>을 본 것은 1974년 6월 경이었다. 퇴계로 극동 사옥 부근 ‘아름화랑’에서 그녀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었다

     

    (1974.6.15-22). 팸플릿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었다. “한국이 처음 낳은 여류 서양화가이며 현대 여성의 선각자인 정월 나혜석 여사…”15개의 작품이 전시되었는데 그중 ‘풍경 서울’이 제일 관심이 갔던 기억이 있다. 금년 정초 동료 교수 한 분이 유명을 달리했다. 얼마 전에는 그의 49제가 예산 수덕사에서 열려 새벽길을 달려갔다. 그 교수의 누님이 수덕사의 이월송(李月松) 스님이셨기에 그 일을 그곳에서 주관한 것이다.

     

    나는 수덕사에서 많은 연을 느끼고 있었다. 그 공간에는 일엽(一葉) 스님도 있었다. 마침 때맞춰서랄까 월송 스님은 <일엽선문(一葉禪文)>이란 아름다운 책을 펴냈다. 나도 행으로 그 책을 하나 받아 들게 되었다. 일엽 스님과 수덕사 그리고 나혜석, 김활란 등 기라성 같은 여류의 이름들이 그 속에 열거되고 있었다. 김팔봉(金八峰)은 1920년대 우리 나라의 신여성은 20여 명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중 세 명이 여기 있었다.

     

    나는 수덕사를 빠져 나오는 길에 나혜석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보게 되었다. 일엽 스님은 ‘진흙 속에 핀 꽃 나혜석을 말한다’라는 글로 나혜석을 그린 바 있어 수덕사의 어딘가에 나혜석이 담겨 있을 것만 같았다.

     

    나혜석(1896-1948)과 일엽(1896-1971), 그리고 윤심덕(1897-1926)은 여류들이다. 나혜석과 일엽은 동년배이고 윤심덕은 한 살 밑이다. 그들은 1900년대 초 혜성과 같이 이 땅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 앞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었다.

     

    나혜석(羅蕙錫)은 1896년 4월 28일 경기도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新豊里) 291번지에서 태어났다. 현재의 신풍동 45-1, 45-4, 45-5, 49번지 일대이다. 나주 나씨 나기정(羅基貞)의 큰 대문의 오랜 기와집에서였다. 어머니 최시의(崔是議)의 2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이름은 나명순(羅明順)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1909년에는 시흥 군수를 그리고 1912년에는 용인 군수로 있었다.

     

    큰 오빠 나홍석(羅弘錫)의 집은 수원면 남창리 55번지였다. 그녀는 그곳에 자주 드나들었다. 큰오빠는 1909년 이미 와세다 대학을 졸업했는데 그로부터 신교육에 접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화가의 길로 나가다

    1913년 3월 17세가 되던 해 그녀는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여학교 시절부터 그녀는 그림을 그리고 있어 오빠가 후원했다.

     

    작은오빠 나경석(羅景錫, 1890-1959)은 1910년 일본에 건너 가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를 거쳐 1914년 7월 동경고등공업학교 응용화학과를 졸업했다. 현재의 동경공업대학이다. 경석이 추천한 학교가 도쿄에 있는 ‘여자미술학교’였다. 한국근대사 연구가 가미야 니지(神谷丹路)에 의하면 이 학교는 1900년 설립 인가된 학교로, 1913년 당시는 혼고(本鄕) 기구사카(菊坂)에 있었다. 1930년 ‘여자미술전문학교’로 이름이 바뀐다.‘전문’자가 추가된 것이다. 그리고 1949년부터는 4년제 ‘여자미술대학’이 되었다. 현재의 학교 위치는 가나가와 현(神奈川縣) 오다큐(小田急)의 사가미오노(相模大野)이다.

     

    그녀는 유화과에 들어갔는데 이는 오늘의 서양화과였다. 먼저 선과(選科)에 들어가 1년을 지낸 후 사범과에 입학했다. 선과는 외지인을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코스였다. 그녀의 지도교수는 고바야시 만고(小林万吾, 1870-1947)였다. 고바야시는 동경미술학교 출신으로 후에 동경미술학교 교수가 되는 이름 있는 화가였다. 인명 사전에 등장할 정도이다.

     

    6년간의 도쿄 생활

    정월이 도쿄에 유학할 때 국내에서 그녀는 큰 관심거리였다. <매일신보>(1914.4.7)에는 ‘동경 학교의 조선 규수(閨秀)’라는 보도기사가 실릴 정도였다.

     

    작은오빠 덕으로 그녀는 비교적 유복한 유학생활을 한다. 그녀는 하숙집 주인 딸과도 친하게 지내며 동경에 살고 있는 청년 화가 사토우 야타(佐藤彌太)와 만나기도 한다. ‘머리가 덥수룩하고 키가 짤막한 청년’이라고 했다. 그 일본 청년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학교 기숙사까지 쫓아 다녔고, 그녀에게 죽자 살자고 피스톨을 내밀 정도였다고 한다. “당신더러 일본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조선 사람이 되겠어요.” 그가 쓴 글이 <시라카바(白樺)> 잡지에 ‘R子에게’라는 제목으로 실리기도 했다. 그 즈음 그녀는 오모리(大森)에서 자취 생활을 했다. 학교는 성선(省線)으로 통학했다.

     

    1915년 4월 그녀는 주도적으로 재동경 여학생의 모임인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를 조직했다. 전영택과 이광수가 고문이었다. 1917년 6월에는 기관지 <여자계(女子界)>를 창간하고,정월은 허영숙과 함께 편집위원이 된다. 허영숙은 나중에 이광수의 부인이 되는데 그녀 역시 나혜석의 오빠 나경석에 의해 도쿄 유학을 하게 됐던 것이다. 정월은 동경 유학생 동인지인 <학지광>에 글을 쓰기도 한다.

     

    그녀는 기독교 신자로 1917년 12월 동경 고치마치 구(麴町區) 이이다 정(飯田町) 조선연합교회 교회당에서 세례를 받는다. 이미 10월 17일에는 조선교회당 내에서 열린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 임시 총회에서 총무로 선출된 바가 있다.그는 당시 도쿄에서 발행되던 <세이토(청도, 靑 )>라는 잡지에 빠져든다. 1911년 창간되어 1916년까지 간행된 여성해방 운동을 주창하던 잡지였다. 그럴 즈음 그녀는 최승구(崔承九, 1892-1917)와 사랑에 빠진다. 최승구는 보성전문학교를 거쳐 1910년 일본으로 건너 가 게이오 대학 예과에 들어간다. 시인이기도 했던 그는 <학지광>의 인쇄인을 맡아 했다. 당시 편집 겸 발행인은 신익희였다. 최승구는 나혜석의 아버지가 군수를 지낸 바 있는 시흥 출신이었다. 또한 오빠의 친구이기도 했다. 도쿄 재일본 한국 YMCA의 일을 보던 최승만(崔承萬, 1897-?)이 그 동생이다.

     

    최승구는 이미 조혼해 부인까지 있었으나 정월과 약혼을 한다. 그녀가 동경 유학, 4년째 되는 21세 때였다. 그녀는 최승구 외에도 이광수, 염상섭 등과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첫 사랑 최승구는 1917년 폐병으로 죽는다.

     

    이광수(1892-1950)는 작은오빠 경석의 친구였는데 이광수는 경석보다는 2살 어렸고 정월보다는 4살 위였다. 이광수는 후에 부인이 되는 허영숙에게 여러 통의 편지를 보내는데 그중 1918년 편지에 나경석과 나혜석에 관한 글이 나온다.

     

    미래의 남자와 만남, 교토에서

    그녀는 교토(京都)로 간다. 그녀의 미래를 결정할 한 남자를 만나기 위해서이다. 교토 인구 50만 시절이었다. 바로 청구(靑邱) 김우영(金雨英, 1886-?)이었다. 그는 경상남도 동래읍 복천동(福泉洞) 태생으로 우여곡절 끝에 오카야마(岡山) 6고(高)를 거쳐 교토 제국대학 정경학부 법률과 학생이 된다.

     

    청구는 길전정(吉田町) 청년회관 기숙사로 그녀를 안내한다. 그녀는 교토의 물 맑은 풍광에 도취된다. 사랑까지 곁들여 그녀는 행복을 느낀다. 청구는 나혜석보다 10살 연상이었다. 비교적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 그는 고향에 처가 있고 딸을 하나 두고 있는 유부남이었는데 처는 그가 입학하던 해인 1916년 봄에 죽었다. 청구는 교토 조선유학생친목회 간사 역할을 하기도 했다. 청구를 한창 만날 즈음 정월은 도쿄 히가시 오쿠보(東大久保)에서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동경제대 청년회 웅변대회에 연사로 온 길에 그녀의 자취집을 찾는다. 그들은 오쿠보 전차 정거장에서 가까운 수풀로 가서 함께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1918년 3월 그녀는 여자미술학교를 졸업한다. 그녀의 학창시절 습작이나 그림들은 하나도 알려진 것이 없다. 그녀의 여자미술학교 후배로는 백남순(白南舜)이 있다. 1923년에 입학했으나 입학 1년 후 중퇴, 파리로 간다.

     

    할 일 많은 귀국행

    1918년 4월 그녀는 5년간의 도쿄 생활을 끝내고 귀국한다. 그녀는 오빠의 집인 익선동(益善洞) 126번지로 들어가고 정신여학교의 선생이 된다. 1919년에는 운니동(雲泥洞) 37번지 집에서 그림을 그린다.

     

    3·l운동이 터지자 그녀는 이화학당 기숙사로 박인덕을 찾아간다. 박인덕은 당시 이 학교 선생이었다. 그 방에서 독립운동 방향에 대해 의논한다. 개성과 평양으로 다니며 지인을 만나 독립운동을 함께 하기를 권유한다. 3월 5일 아침 이화학당 식당에서 만세운동을 한다. 이 사건으로 3월 18일 체포되어 경성지방 검사국으로 넘겨진다. 서대문 감옥에서 5개월여 옥고를 치른다. 그는 그후로도 의열단의 뒤를 봐주기도 한다.

     

    귀국한 김우영은 1918년 8월 경성에서 변호사 등록을 한다. 사무실은 인사동 2층 양옥으로 추정된다. 결혼식은 1920년 4월 26일 정동예배당에서 하고, 신혼은 숭이동(崇二洞)에서 시작한다. 숭이동은 지금의 혜화동이다. 결혼하던 해 장녀를 얻는다. 청구는 1920년 12월, 정신여학교 3·1운동 주동자 김마리아, 황애시덕 등의 재판에서 변호사를 맡는다. 이는 나혜석의 권유 때문이었다.

     

    정신여학교 선생은 1920년 봄 그만 둔다. 그 즈음 김일엽과 만난다. 그녀가 목판화로 그린 <김일엽의 하루>는 이때 그려진 것이다.

     

    그녀는 1921년 3월 서양화 개인전을 연다. 매일신보와 경성일보 후원이었다. 경성일보사 내에 있는 내청각(來靑閣)이라는 음식점에서였다. 화랑이 있을 리 없을 때였다. 내청각은 모임 장소로 많이 쓰여졌다. 전시회에 무려 7천명의 관객이 모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매우 대중적 공간이었던 것 같다. 우리 나라 여류 최초의 유화 개인전이었고 고희동 이래 두 번째였다.

     

    개인전을 끝낸 그녀는 1921년 9월 남편을 따라 만주 안동현으로 간다. 압록강 바로 건너편이다. 김우영이 일본 외무성 관리가 되어 안동현 부영사로 부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단동(丹東)시이다. 그때 그녀는 이미 두 아이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5년을 보내며 만주 일대를 여행하기도 한다. 이 즈음 많은 그림을 그리는데 그 그림은 거의 다 건축화였다. 건물을 화면 가득히 채우는 그런 그림들이다. 만주 봉천 풍경이 그런 유였다. 그녀가 건축의 미에 매료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유럽 여행에서도 거리 풍경, 건축물들을 주로 그린다. 기하학적 건축, 고궁의 재현에서 그 특기를 보이고 있다.

     

    1927년 6월 32세의 정월은 남편의 임기가 끝나자 벽지 근무자에게 주는 혜택으로 함께 유럽 여행길에 오른다. 하얼빈에서 출발 파리까지 간다. 1929년 2월까지 20개월에 걸친 여행이었다. 남편은 새로운 임지인 독일 베를린으로 가고, 그녀는 혼자 1년을 파리에서 지낸다. 파리의 솰레 부부의 집에 과객으로 머물렀다. 약 8개월의 파리 생활이었다. 그 때 그녀는 최린(崔麟, 1878-?)과 염문을 뿌린다. 턱없는 루머가 떠돌아 다녔다.

     

    틀 밖의 여인

    그리고 1930년 11월 35세의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이혼 당한다. 11년간 살고 이혼한 것이다. 그녀는 1929년 3월 세계 일주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다. 풍광이 명미한 동래 자택으로 돌아 온 것이다. 짐 두 짝에는 포스터와 그림엽서, 레코드와 화구(畵具)뿐이었다. 임신 8개월의 몸이었다. 남편과 떨어져 어렵게 1년을 그곳에서 보내게 되며 살 집을 직접 짓기도 한다. 1933년 2월 그녀는 서울 수송동 46번지 15호 목조 2층 건물에 여자미술학사(女子美術學舍)를 개설한다. 그녀가 졸업한 여자미술학교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 1934년 정초 그녀는 도쿄에를 간다. 아마 그림 재료를 사러 간 것으로 보인다. 그 때 18년 전 그를 따르던 사토우를 우연히 화구점 앞에서 만난다. 그때까지 그 화가는 미혼으로 남아 있었다. 3월에는 고향 수원으로 간다. 서호 성 밖에 작업실을 마련한다. 수원 용주사 포교당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한다. 1935년 10월에는 진고개에 있는 조선관에서 대규모 전시회를 갖는다.

     

    그녀는 1937년 수덕사를 찾는다. 일엽 스님이 있는 견성암(見性庵)에 묶는다. 일엽 스님 표현대로라면, “그렇게도 잘났다던 나혜석! 미의 화신으로 남자들의 환영에 둘러 싸였던 나혜석!, 최초의 여류화가로 여류 사회를 그렇게 빛냈던 나혜석!”이 그녀를 찾았다. 그것도 나락에 떨어지는 모습으로-. 수덕사의 주지였던 고승(高僧) 만공(滿空)은 그녀에게 고근(古根)이라는 불명을 지어 준다. 수덕사 앞 수덕여관에서 장기 체류한다. 수덕여관은 이응로(1904-1989) 화백이 한때를 지내던 여관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1938년 8월 <삼천리>의 ‘해인사의 풍광’을 끝으로 그녀의 화업(畵業)은 끝났다. 아마 그녀는 그의 말대로 ‘떨리는 두 손에 화필과 팔레트를 들고 암흑을 향하여 갔으리라.’1943년판 <조선인명록>을 보면 이혼한 전 남편 김우영은 충청남도 참여관 겸 산업부장이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토제대를 나온 덕분에 그는 총독부 사무관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친일파였다. 김우영은 당시 대전부 대흥정(大興町) 관사에서 살았다. 이때의 전화번호부는 723번이었다. 그들은 이혼할 때 4남매를 두고 있었는데 그들도 아버지와 함께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 학교도 대전에서 다녔다.

     

    장녀 이름은 김나열(金羅悅)로 지었는데 신혼 초 희열의 결정체였다. 남편의 성과 자신의 성을 합친 것이다. 아들 이름은 파리에서 나아 김건(金建)이라 한다. 그후 김우영은 전라남도로 옮겨 국장에 앉아 있다가 중추원 참의까지 오른다(일본, 종성회, 최석의, ‘조선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 나혜석’, 1996.4.6). 김나열은 어머니가 병들었을 때 개성의 한 여학교 선생으로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나혜석은 1939년 수덕사를 나와 김우영을 찾아갔으나 박대당하고 내쳐졌다 한다. 이것이 가족간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김우영은 1953년 회고록을 쓰고 있다. 그러나 그후의 행적은 모른다.

     

    1941년 시국은 나쁜 방향으로 치닫고 있었다. 정상인도 살기 힘든 시대였다. 함묵증(緘默症)에 빠져 있던 그녀는 1944년 10월 22일 인왕산 부근 청운양로원에 최고근(崔古根)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1945년 해방 무렵에는 해관(海觀) 오긍선(吳兢善, 1878-1963)이 운영하는 안양에 있는 기독보육원 농장에 있었으나 그후 행방불명되었다.

     

    오긍선은 1919년 서울 서대문 옥천동(玉川洞) 3천 평의 대지 위에 경성보육원을 설립한다. 세브란스 의전 교장 시절인 1936년경에는 넘쳐나는 고아들로 비좁아져 이를 경기도 안양읍 관악산 밑에 전야(田野) 8만평을 사들여 옮긴다. 따라서 이름도 자연히 안양기독보육원이 되었다. 우리 나라 최대의 고아원이었다. 유치원과 보통학교도 만들어져 있었다. 원래 이곳은 일제 때 일본인의 목장 즉, 마쓰모토 목장(松本牧場)이 있던 자리였다.

     

    오긍선은 1916년 4월부터 1917년 5월까지 동경제대 의학부에서 연구생활을 한 바 있다. 이 시기 나혜석과 오긍선의 도쿄 생활은 겹쳐진다. 이 인연으로 후에 오긍선이 갈곳 없는 나혜석을 보호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나혜석은 1948년 12월 10일 오후 8시 30분, 용산구 원효로에 있던 시립 자제원(慈濟院)에서 행려병자로 사망한다. 현재의 서울시립 남부병원이다. 그리고 1949년 3월 4일자 관보에 주소불명의 행려 사망자로 실린다. 사후 그녀의 묘지마저 불분명하다. 화성군 봉담면 어디 있다고만 알려져 오고 있다.

     

    “사남매 아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 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후일, 외교관이 되어 파리 오거든 네 에미의 묘를 찾아 꽃 한송이 꽂아다오.”

     

    죽음은 비록 비극적이었으나 그녀의 살아온 ‘행로(幸路)’는 선각자의 행복의 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글 사진/김정동(목원대 건축학과, 교수), 재일교민 시사 정보지 [아리랑] 제공

     

     

    유관순의 역사가 숨쉬는 곳 이화학당

    <장규식의 서울역사산책> 정동 일대 역사공간④

                            

                                                 

                       설립당시의 이화학당, 1900년 완공된 이화학당 메인홀, 유관순이 빨래하던 우물, 이화 교정의 유관순기념관  ⓒ프레시안

     이화학당-한국 여성 신교육의 발상지
      손탁호텔 터에서 남동쪽으로 난 이화여고 교정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본관 건물 옆으로 1986년 창립 100주년을 맞아 세운 ‘한국 여성 신교육의 발상지’라는 기념비가 나온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여학교 이화학당이 처음 문을 연 자리이다. 지금의 이화여고·외고 교정은 과거 서울 도성의 경계였던 언덕 능선 동·서편을 모두 아우르고 있지만, 처음의 교사는 언덕 남동편, 도성 안쪽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동문 안쪽의 심손기념관과 그 맞은편 프라이 홀이 있었던 주차장 자리는 1910년대에 새로 매입한 땅들이니까, 100주년 기념비가 서 있는 본관 일대야말로 이화학당의 발상지인 셈이다. 한편 1918년에는 고등과와 보통과를 이화학당에서 분리하여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와 이화여자보통학교로 독립시켰다. 대학과와 예과 또한 1925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개편되어, 1935년 보육학교와 함께 신촌에 새로 마련한 캠퍼스로 이전하였다. 이처럼 각급 교육기관들이 독립된 학제를 가지고 운영되면서, ‘이화학당’이라는 명칭은 1928년 정식으로 폐기되기에 이른다. 

     ‘유관순 신화’와 역사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비 아래쪽 쉼터에는, 3.1운동 당시 메인홀 기숙사에 기거하던 ‘유관순 열사가 빨래하던 우물’이 팻말과 함께 남아있다. 유관순(柳寬順, 1902-1920)은 3.1운동의 상징으로, 이화여고가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인물이다. 유관순은 1916년 4월 공주 영명학교를 거쳐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편입하면서 이화학당과 첫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고등과에 입학한 이듬 해인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 만세시위와 3월 5일 남대문 학생 연합시위에 참여한 다음, 고향인 충남 천안군 동면 용두리(지령리)로 내려가 4월 1일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에 앞장섰다. 이 일로 유관순은 일제 관헌에 체포되어 공주감옥을 거쳐 서대문 감옥으로 이송되었는데,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부르다 일제의 혹독한 고문에 못이겨 1920년 10월 12일 열 아홉 살의 꽃다운 삶을 마감하였다. 이화여고에서는 그 넋을 기리기 위해 유관순기념관을 세우고, 기념관 2층에 열사의 호적․재판기록․수형기록표․명예졸업장 등을 전시하고 있다. 그런데 유관순은 정작 3.1운동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이름 없이 민족의 제단에 몸 바친 수많은 꽃다운 넋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었다. 그러한 그녀의 존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해방후 박인덕의 주도로 기념사업이 추진되면서부터였다. 일제에 의해 토막 살해당했다는 등의 ‘유관순 신화’가 만들어진 것도 아마 이 때였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신화와 역사를 변별할 필요를 느낀다. 역사상의 유관순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3.1운동의 상징이 될만한 인물이다. 그런데 왜 거기에 굳이 신화적 요소들을 채색 가미한 것일까? 혹시 기념사업을 주도한 박인덕이 자신의 일제말 친일행적을 유관순의 신화화를 통해 덮어버리려 했던 것은 아닐까? 박인덕은 당시 이화학당의 교사로서, 정동교회의 손정도 목사와 함께 어린 나이의 유관순에게 애국애족의 신앙을 불어넣어 준 인물로 손꼽힌다.  해방후 유관순 기념영화가 나왔을 때 조병옥이 그것을 보고 노발대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 아우내장터 만세시위의 지도자는 지령리교회(현 매봉교회)의 두 기둥이었던 조병옥의 아버지 조인원과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이었다. 그리고 유관순은 그 선봉이었다. 그런데 기념영화에서는 유관순의 설득으로 그 모든 거사가 이루어진 것처럼 그려놓았으니, 조병옥이 화를 낼만도 했을 것이다. /장규식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일제강점기 기독신여성 3인 삶·신앙 비교 눈길

    서양화가 나혜석(1896∼1948), 계몽운동가 박인덕(1897∼1980), 교육가 김활란(1899∼1970)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1920년대 자연애 옹호론과 자유연애 비판론 속에서 불꽃처럼 살다간 기독교 신여성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기독교적 성장 배경, 종교적 회심을 통한 여성 주체 의식의 형성, 유교적 가부장주의가 상대적으로 약한 가족 배경, 해외 유학 경험, 교육 사업 열망 등의 공통점을 갖고 있다.

    김활란은 이화학당 재학 시절 철야기도를 하다가 회심했으며, 박인덕은 어린 시절부터 신앙생활을 했지만
    결혼 직후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나혜석은 자전적 소설 ‘경희’ 통해 기독교인임을 자랑스럽게 고백했다. 하지만 성, 사랑, 결혼에 대한 이들의 태도는 매우 달랐다.

    이숙진 성공회대 초빙교수가 지난 7일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학술심포지엄에서 이들 기독교 신여성 3인의 삶을 조명했다.

    김활란은 자유연애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당시 기독교 성
    윤리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열린 사고와 태도를 취하면서 독신의 길을 선택했다. 이 교수는 “‘윤치호 일기’를 보면 (김활란이) 기독교 남성 엘리트들의 파벌 싸움에서 성적 추문의 당사자로 지목 당해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면서 “그러나 그의 삶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늘 불리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평가했다. 한국 여성을 대표하는 지도자가 됐고, ‘최초 여박사’ ‘최초 여교장’ ‘최초 여총장’ ‘최초 세계여학사회장’ 등 상징 아이콘이 됐다는 설명이다.

    반면 박인덕은 결혼과
    이혼을 주체적으로 결정했다. 이 교수는 “김활란의 선배 박인덕은 이화학당 시절부터 얼굴 곱고 음악과 연설 잘하기로 이름 높았지만 결혼과 이혼으로 인해 사회적 파문을 일으키며 기독교 공동체로부터 두 번 추방을 경험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박인덕은 ‘전문직 여성클럽’ ‘농촌 여성과 아이를 위한 공동체’ ‘숙화의숙’ 등을 만들었지만 한국 기독교 공동체에서 존재감이 약한 국외자였다”고 말했다.

    한편 행려병자로 최후를 맞이한 나혜석은 가부장적
    윤리 경계를 넘나들었다. 이광수와의 연애 사건 , 김우영과의 결혼, 이혼 고백장 발표, 고소 등 그의 굴곡 있는 삶은 흥밋거리로 회자되거나 가부장적 윤리를 희롱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이 교수는 “기존 도덕과 정조 관념 해체 시도는 그를 급진적 여성해방론자로 몰고, 더 이상 기독교인으로 머물지 못하게 했다”고 지적했다.


    함태경 기자 zhuanjia@kmib.co.kr

     

     

    ■ 참고문헌

    淸田美智子, [덕화여숙을 방문하고], {綠旗}, 1941.6.
    박인덕, [정전(征戰)을 뒤에 지키는 맹서], {매일신보} 1941.12.20.
    박인덕, [의식주에 관한 필승의 길], {신시대}, 1943.4.

    『이화80년사(梨花80年史)』(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67)

    September Monkey(Pakh, I. D., New York, Harper & Brothers, 1954)

  • Park In-deok, September Monkey(New York, Harper & Brothers, 1954)
  • 이화여자대학교, 《이화 80년사》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67)
  • 박용옥, 《한국여성독립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연구소, 1992)
  •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 - 1943》 (김상태 편역, 역사비평사, 2001)
  • 박인덕, 《구월 원숭이》 (창미, 2007)
  • 김욱동, 강용흘:그의 삶과 문학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4)
  • 김욱동, 김은국:그의 삶과 문학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7)
  • 루스 실로, 《유태식 육아법》 (박인덕 옮김, 언어문화사, 1980)
  • [이규태 역사에세이] 가출신여성 이야기 조선일보 1999.11.25
  • 한국감리교인물사전 박인덕 편. 기독교대한감리회. 2008년 4월 13일에 확인.
  •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년 3월 1일). 〈박인덕 : 황국신민이 된 여성 계몽운동가 (강정숙)〉, 《친일파 99인 2》.
  •  “친일파 된 여성 교육선각자들 - <자료입수> 김활란 등 선각 여성 5인의 친일행적”, 《프레시안》, 2002년 3월
  • 김경일, 〈식민지 시기 신여성의 미국 체험과 문화 수용 : 김마리아, 박인덕, 허정숙을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논총 제11호 (2006년 12월호)》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어문학연구소, 2006) 45~91 pp.
  • 강정숙, 〈박인덕:황국신민이 된 여성 계몽운동가〉, 반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 99인 (2)》
  • 구완서, 〈박인덕의 생애와 사상〉, 대학복음화학회, 《대학과 복음 제13집》 (대학복음화학회, 2008) 7pp~36pp
  • 우미영, 〈서양 체험을 통한 신여성의 자기 구성 방식: 나혜석·박인덕·허정숙의 서양 여행기를 중심으로〉, 한국여성문학학회, 《여성문학연구 12호》, (한국여성문학학회, 2004)
  • 전봉관, 《경성기담》 (살림, 2008)
  • 권명아, 《역사적 파시즘》 (도서출판 책세상, 2005)
  •  朝鮮新文學思潮史(白鐵, 首善社 1948)
    ≪참고문헌≫ 韓國近代詩史(金容稷, 學硏社 1986)
    ≪참고문헌≫ 한국근대시지의 전개(김학동, 西江人文論叢 제1호, 1992)

     

     

     

     

     서울에서의 여성만세운동

     1) 이화학당
      우리나라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에는 3·1운동 당시 대학과·중등과·유치사범과·고등과가 같은 교정 안에 있었고, 또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이 많았다. 이화학당에서는 국운이 기울던 1905년이래 채플시간에 교사 학생이 모두 진실 된 마음으로 독립을 기원하는 구국기도회를 가졌다. 또한 대학과가 있었던 고로 대학과를 졸업한 신마실라(申麻實羅)·박인덕(朴仁德)·신준려(申俊勵)·김활란(金活蘭)·황애덕(黃愛德) 등은 남다른 사명감을 갖고 외부의 김마리아·나혜석 등과 더불어 학교 지하실에 자주 모여 구국을 위한 비밀 회합을 가졌었다. 동경에 유학하고 있던 황애덕·김마리아 등이 1차대전 뒤의 세계 정세의 놀라운 변화를 예의 통찰하고 파리 평화회의에 한국 여성 대표를 파견하고자 하였다. 그 대표의 임무를 맡았던 이가 신마실라였다. 기금까지 마련했으나 그것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처럼 이화학당 대학과 졸업생을 중심으로 3·1운동의 선도적 활약이 전개된 바가 있었다.

     


              3·1운동 당시는 학생 지휘를 맡은 박희도의 지시에 의하여 전교생이 참가할 만세 준비를 하였다. 즉 2월 28일 이문회(以文會) 정기 모임에서 3월 1일 전교생이 소복하고 대한문 앞에 나아가 망곡을 하고 만세 시위를 하도록 계획했다. 그러나 3월 1일 당일 이를 눈치챈 학교 당국의 제지로 말미암아 15명 정도만 담을 넘어 경동으로 밀려든 만세 대열에 휩싸여 만세 시위를 하다가 체포되었다.

     


              학생 중심의 서울의 만세시위는 3월 5일에 행하여졌는데 이화 학생들도 학교 몰래 여기에 참가하여 신진심(申眞心)·유정선(劉貞善)·노예달(盧禮達)·김독실(金篤實)이 검거되어 종로 경찰서에서 취조를 마치고 서대문 감옥으로 넘어갔다. 박인덕·신준례 양인도 학생을 선동한 주모자로 몰려 검거 투옥되었다.

    2) 정신여학교
      정신여학교는 북장로교에서 경영하는 여학교로 북쪽 지방 학생들이 많이 있었다. 교사와 학생들이 모두 열렬한 애국투사들이었다. 임시정부를 적극 후원하고 항일 독립전쟁 준비를 위해 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대한적십자 경성지부를 조직하여 왜경을 놀라게 활약을 한 중심세력이 바로 정신의 여성들이었다.

     
              정신에서는 채계복(蔡桂福 3년)이 이성완(李誠完 4년)과 함께 중앙 학교 학생대표인 장기욱(張基郁)으로부터 선언문 한 장을 2월 28일에 받아다가 기숙생들에게 전하였으나 3월 1일 만세시위에는 참가치 못하였다. 채계복과 장기욱은 약혼한 사이였다.

     
              정신학교 여학생이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한 것은 3월 5일 학생 중심의 만세시위에서였다. 3월 5일의 시위를 알리는 쪽지는 3년생 이아주(李娥珠애주(愛主))가 학교 담 밑에서 주위 기숙생들에게 몰래 전하여 주고 자신도 함께 참여키로 하였다. 3월 5일 아침 일찍 30여명의 기숙생들이 교직원이 출근하기 전에 학교를 빠져나가 목적지인 남대문역 앞으로 갔다. 수천명의 남녀 학생이 구름처럼 모여 있었다. 정신학교 학생들은 남대문을 지나 시내로 들어오면서 대한문 앞에서 만세를 소리 높이 불렀다. 몰려오는 경찰에게 이아주·임충실(林忠實)·박남인(朴南仁)·김경순(金慶淳) 등이 검거 투옥되었다.


              한편 이성완은 장선희(張善禧)·오현주(吳玄洲) 등과 혈성단(血誠團)을 조직하여 투옥인사와 그 가족들의 뒷바라지를 하였다.

    3)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경성여고보(京城女高普)는 1908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관립 여학교로 설립한 관립한성고등여학교의 후신이다. 경성여고보는 사립 여성 교육기관에 비하여 교육적 수준은 높았으나, 정신교육면에 있어서는 소위 황국신민(皇國臣民) 정신이라는 식민지 정신을 불어넣는 교육을 강행하고 있었으므로 여학생들은 이러한 일제 교육에 더 깊은 저항을 느끼고 있었다. 앞에서도 논급하였듯이 한국의 역사정신을 말살시키는 역사 시간에 항변적 질문을 던지고 한국인을 추하게 표현하는 일인 교사에게 무서운 증오심을 갖고 있었다. 이것이 곧 꺼질 수 없는 한국 여성의 민족정신이었으며, 그들은 이러한 민족정신을 확인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은연중 희망했었다. 학생들간에 비밀 서클이 조직되고 기도와 토론을 계속하였던 것은 바로 그러한 상황을 잘 말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1919년 3·1독립 만세 시위에서 서울의 수많은 여학교 중 전교 학생이 모두 참여한 학교는 경성여고보 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국을 기원하는 비밀 서클 회원은 3·1운동 직전까지 2년간에 걸쳐 42인으로 확대되었으나 그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들의 우국적인 충정심의 깊이를 능히 헤아릴 수가 있다. 그리고 이 서클의 주도적 위치에 있던 최은희(崔恩喜)는 목사 박희도의 지도 편달을 받던 여학생이었던 고로 박희도는 최은희에게 2월 28일에 독립선언서를 주고 민족적 거사에 경성여고보 학생을 동원토록 하였다.


              최은희는 비밀 서클 회원인 최정숙(崔貞淑)·김숙자(金淑姿)·김일조(金日祚) 등과 의논하여 이들이 주동이 되어 교내에서 동지를 규합하고 만세시위에 참여할 준비를 하였다. 최은희에 의하면 기숙사생들은 3월 1일 학교 문이 굳게 잠겨 기숙사생들이 빗장을 부수고 파고다 공원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거리의 만세 시위에서도 너무 격렬하여 경성여고보생들의 데모 광경이 매일신보에 게재되었다고 하며 시위 학생 32명이 연행되었고, 학교 당국에서는 임시 휴교 조처를 하였다.


              경성여고보는 관립학교였던 만큼 개교에 특히 신경을 썼다. 교장은 학부형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5월 1일 개교를 하였고, 학생 처벌 문제까지 처리하는 강행군을 하였다. 학생 이선경(李善卿)과 그와 평소 가까이 지낸 김백순(金白順)등 7명에 대한 퇴학을 결정하여 명하였다. 이선경은 학생들에게 항일정신을 고취하였을 뿐 아니라 수원에서 혈성단 이라는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여 활약하였는데 그는 상해로 건너가다가 일경에게 피체 되었던 적극적인 항일투사였다.


              경성여고보는 당시의 민족적 감정이나 저항으로는 도저히 개학할 수 없는 시기에 개교를 하였던 까닭에 귀향 학생들은 저항의 뜻으로, 또한 나라 없이 학교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생각으로 상경치를 않았다.


              또한 신입생 모집에 있어서도 응시 여학생 수가 예년에 비하여 크게 떨어져 학생 모집을 여러 차례 해야 할 정도였다.

    4)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진명여학교에는 3월 2일 오전 11시경에 졸업생이며 구국운동에 늘 앞장선 나혜석이 재학생 이정희(李正熙)에게 독립선언문 한 장을 전하고 오후 1시에 기숙생 전부를 데리고 종로에 나와 만세시위에 참가하려고 한 데서 시작되었다. 이날은 일요일이므로 학교에는 기숙사생밖에 없었다. 이정희는 정희로(鄭嬉魯)·김영숙(金英淑)·최관실(崔寬實)과 의논하고 기숙사 각 방을 돈 결과 모두 이에 찬성하여 기숙사생 30여명은 인산일(因山日)을 위해 준비한 상복을 입고 몰래 학교 담을 넘어 경복궁 앞으로 시위 행진을 해갔다. 여기서 경찰의 저지와 뒤따라온 교장·교사의 만류로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했다.


              3월 4일 기숙사생 23명이 다시 담을 넘어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가 경무대 청사 앞길에서 12명이 체포되고 교내에 남은 3명과 함께 15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가 방면되었다.
      3월 5일 시위에도 몇 명의 학생이 참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5)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숙명에도 2월 28일에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의 독립선언의 연락이 갔으나 이날의 시위에는 제대로 참여하지 못하고 3월 5일의 남대문역 앞 학생 중심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만세시위의 중간연락 등의 책임을 맡은 학생은 이은혜(異恩惠)·조경민(趙敬玟)·임종호(任鍾豪) 등이었다.

    6) 배화여학당
      배화의 학생대표인 4년생 김정애(金貞愛)·김해라(金海羅)·최은심은 독립의 날이 오는 그 날을 위해 기도하고 비밀 토론을 하였다. 김정애는 이화학당에서 등사된 선언문을 갖다 놓고 거사의 날을 기다렸다. 2월 28일 밤에 김정애와 그의 친구들은 여염집 부인으로 변장하고 이 대문 저 대문에 선언서를 넣었다. 임무를 마치고 학교에 오니 교문이 굳게 잠겨져 있고 이날 오후부터 경찰에서 주동학생 색출작업을 하므로 주동 학생들은 몸을 피하였다.


              배화의 여학생들은 3·1만세 시위의 기회를 제대로 잡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였다. 그런데 3·1만세 운동 일주년이 되는 1920년 3월 1일 배화의 딸들은 마침내 대한독립 만세를 하늘 높이 외칠 수 있었다. 즉 이날 해돋을 무렵 학생 두명이 학교 뒷산으로 빨래 대야를 가지고 올라가 빨래를 너는 체하면서 기숙사생들을 필운대 언덕 위로 올라오게 하였다. 한 학생이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독립 만세’를 선창하였다. 이를 따라 모든 학생들이 그 감격의 만세 소리를 높이 높이 외쳤다. 그들은 다시 교정으로 내려와서도 계속 만세를 불렀다. 종로서 형사대가 급습하였고 24명의 학생이 종로서로 연행되었고 교장 스미드는 일제의 압력으로 사퇴를 하였다.


              그리고 이해 4월 5일에 24명은 각각 다음 형량이 과해지고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이수희(李壽喜)·김경화(金敬和) ; 각각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 손영희(孫永喜)·한수자(韓壽子)·이신천(李信天)·안희경(安喜敬)·안옥자(安玉子)·윤경옥(尹敬玉)·박하경(朴夏卿)·문상옥(文相玉)·김성재(金成才)·김의순(金義順)·이용녀(李龍女)·소은숙(邵恩淑)·박신삼(朴信三)·지은원(地恩源)·소은명(昭恩明)·최란씨(崔蘭氏)·박양순(朴良順)·박경자(朴景子)·성혜자(成惠子)·왕종순(王宗順)·이남규(李南圭)·김마리아 ; 각각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