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국민의 의무는 재미다.

서울여대 설립자, 고황경(高凰京)

草霧 2013. 12. 17. 14:24

 

 

 

여성계

 

고황경 (高凰京, 1909∼ 2000)

 

친일파 된 여성 교육선각자들

  

황도정신 선양에 앞장 선 여류 사회학자

 

부산 지방 첫 근대 학교인 한문학교다. 사진 왼쪽 외국인이 윌리엄 베어드(배위량·숭실학교 설립자), 그 앞에 삿갓 쓴 한국인이 서상륜(부산·경남 지방 첫 전도자)이다. 오른쪽 맨 뒷줄 외국인이 아담스이며 그 앞이 고학윤(서울여자대학 설립자인 고황경의 조부)이다. 이상규 교수 제공

 

1937년 애국금차회 간사.
1939년 조선부인문제연구회 간부
1942년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1928 도시샤여자전문대학 영문학과 졸업

1931 도시샤여자전문대학 법학부 졸업

1937 미시간주립대학교 대학원 철학박사

1935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1937 '방송선전협의회' 부인강좌

1942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활동

1945  경기여고 교장

1946  보건후생부 부녀국장

1957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장

1958  대한어머니회 회장(∼1986)

1960  유엔총회 한국대표(∼1963)

1961  서울여대 학장(∼1984)

1961  학술원 회원(사회학)

1963  걸스카우트 단장

1965  대한적십자사 조직위원(∼1975)

1983  순국열사 김마리아기념사업회 회장

1985  서울여자대학 명예학장

1989  서울여자대학교 명예총장

2000년 사망

생활교육이 여자대학교육에 미치는 영향> <소비자보호 운동을 위한 소바자 협동조합의 기능강화 방안에 관한 연구> <구라파기행> <인도기행> <Seasonal Distribution of Girl Devinquents in Detroit>(박사학위논문) <지도자수첩> <뜻있는 삶> <설훈집> <여성과 사회>

 

고황경(高凰京, 1909년 3월 6일 ~ 2000년 11월 2일)은 한국의 사회학자이며 대학교수이다. 아호는 바롬이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 고명우의 딸로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독립 운동가 김마리아는 외가쪽으로 먼 친척이 된다.

 

 

 

고황경의 가정은 4대째 개신교를 믿어온 집안[2] 이었으며, 비교적 여유 있는 환경이었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일본도시샤 여자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했다.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근무하면서 소녀 범죄에 대한 논문으로 미시간 주립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조선총독부조선부인문제연구회에 가담하면서 친일 단체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 단체는 총독부의 정책을 홍보하고 계몽하는 여성 단체였으며 지역별로 순회 연사를 배당했는데, 고황경은 홍승원과 함께 호남 지역 강연을 담당했다. 역시 총독부에서 발족시킨 방송선전협의회의 방송 강좌에도 참가했고, 윤덕영의 부인 김복수가 회장을 맡은 애국금차회 간사와 조선임전보국단 임원으로서 태평양 전쟁 기간 중 연설과 좌담회로 전쟁을 적극 지원했다.

 

광복 후 1945년 경기여고 교장, 1946년 미군정의 보건후생부 부녀국장에 임명되었다. 언니인 고봉경은 이때 미군정 경무국의 초대 여경과장을 지냈다.[3] 한국 전쟁 때 아버지인 고명우와 언니 고봉경은 납북되었다.

 

부산 지방 첫 근대 학교인 한문학교다. 사진 왼쪽 외국인이 윌리엄 베어드(배위량·숭실학교 설립자), 그 앞에 삿갓 쓴 한국인이 서상륜(부산·경남 지방 첫 전도자)이다. 오른쪽 맨 뒷줄 외국인이 아담스이며 그 앞이 고학윤(서울여자대학 설립자인 고황경의 조부)이다. 이상규 교수 제공

 

고황경은 한국 전쟁 이후 몇 년간 영국에 머물면서 활동하다가, 귀국하여1961년 장로교 교단의 오랜 숙원이던 서울여자대학교를 설립해 초대 학장과 명예총장을 맡았다. 대한어머니회 초대 회장, 한국 걸스카우트 연맹 단장, 대한민국학술원 종신회원을 역임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교육/학술과 친일단체 부문에도 선정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독신으로 살면서 제자들에게 많은 애정을 쏟아 존경을 받고 있으며, 서울여대는 고황경의 호를 딴 공동체식 교육 '바롬교육'을 필수 과정으로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 서울여자대학교
  • 조선임전보국단
  • 고황경 - 대한민국학술원
  •  

     

    대한민국어머니헌장, 1966

     

    ■ 박사학위 받고 귀국 직후부터 식민지 사회교육에 가담·협조 

    고명우

     

    고황경은 일제 시기에 일본과 미국의 대학에 유학하였으며 여성으로는 드물게 박사학위를 소지한, 가히 우리나라 최초의 지식인 여성의 대표라 할 만한 인사이다.

     

    1928년 일본 도지샤(同志社)여전 영문과를 졸업하고 다시 1931년 도지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으며 1937년 미국 미시간대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받은 최고 수준의 교육은 민족주의적인 것으로 이어지기보다는 바로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하는 데 이용되었다.

     

    '고황경 그는 일찍이 선각자적 현안으로 나라의 힘을 기르는 것만이 곧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길이라는 신념으로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오히려 친일적인 인사가 되어 돌아왔던 것이다.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그는 이화여전 교수로 재직하게 되나 1937년부터 바로 친일집단에 가담·협조하는 행적을 남기고 있다.

     

    제7대 총독 미나미는 일본의 국체를 인식시킴으로서 신민(臣民)된 자각을 갖게 하는 사회교화 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각종 어용단체를 조직토록 한다. 그 일환으로 1937년 1월 총독부 학무국 알선으로 '조선부인문제연구회'가 조직되었다.

     

    조선부인문제연구회는 총독부의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책'에 호응하여 '가정보국운동으로서의 국민생활의 기본양식'이라는 것을 제정하였다. 전시에 맞게 가정생활을 간소화하자는 것이었는데, 그 내용은 '매월 1일 가정에서 황거요배, 축제일의 국기게양, 총독부의 의례준칙 준수, 혼·상례의 간소화, 누습타파, 근로보국정신의 앙양, 국한그릇 찬하나의 식사 간소화' 등이었다. 

     

    이 단체는 신진 여성을 총망라해 매월 마지막 토요일을 정례 회합일로 정하고 생활개선부와 수양부를 두어 활동하였다. 여기서 고황경은 중요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선부인문제연구회는 단체의 활동을 선전·계몽하기 위해서 11명으로 된 순회강연반을 결성하여 1938년 9월 12일부터 13도를 순회강연하였으며 고황경은 홍승원(洪承嫄)과 함께 전남북을 맡아 강연을 다녔다.

     

    또한 1937년 1월에 총독부 사회교육과가 주동해서 '방송선전협의회'가 발족되었는데 이 역시 '일본 국민으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생활, 즉 내핍과 절약으로 전쟁을 이겨내고 신명을 천황께 기꺼이 바치게 한다는 사회교육을 수행하게 할' 목적으로 수양강좌, 부인강좌, 상식강좌 등의 방송강좌를 실시하였다.

     

    여기서도 고황경은 부인강좌를 맡는 역할을 하였다. '내핍과 절약으로 전쟁을 이기고 천황께 신명을 바치자'고 하고 있으나 당시 조선 여성의 생활은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일하는 노예와 같이' 생활하고 있었다.

     

    가난한 소작농가의 여성들은 모두 농업노동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소작농가는 5할에서 7할에 달하는 고율 소작료를 지불했다. 즉, 여성의 농업노동은 곧 일제의 식량 수탈과 농업노동력 수탈의 근원을 이루고 있었다.

     

    일제는 특히 식량 수탈을 위해 '산미증식계획', '농촌진흥운동'을 실시하면서, 조선의 농촌이 낙후된 원인을 일본과 비교하여 여성들이 외업노동을 기피하기 때문이라고 하여 여성들을 옥외노동, 야외노동에 동원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강구하였다.

     

    이른바 '전가(全家)근로'라는 구호 아래 읍·면부락 단위로 부인회가 조직되고 야외노동단, 공동면작 등으로 여성노동이 최대한 활용되는 등 여성 농업노동에 대한 착취는 극에 달했다. 그래서 '촌여자는 소보다도 힘세며, 소보다도 끈기있다'고 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유년노동이 많은 여성노동자들은 하루에 14시간씩 혹사당하면서도 일본인 남자의 4분의 1도 못되는 임금을 받았으며, 열악한 작업환경과 자유가 없는 기숙사생활은 노예와 다름없는 생활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박사 사회학자 고황경은 비참한 조선여성들의 권익을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오히려 조선 여성들을 더욱 착취하는 데 앞장을 섰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고황경이 미국에서 받은 사회학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는가 회의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말처럼 '나라의 힘을 기르는 것만이 곧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다면 그 교육은 분명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신음하는 조선 동포들에게 침략자들의 횡포를 고발하고 나아가 독립의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철학박사 고황경의 실천은 정반대로 나타났다. 민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족을 배반하는 데로 자신의 학문이 사용되었을 뿐이었다.

     

    그 원인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일본과 미국을 통해 배운 학문 그 자체에 문제가 있었을까, 아니면 강단의 이상과 식민지의 현실이 너무나 동떨어져 끝내는 절망하고 모든 것을 포기했기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일제에 협력하는 길만이 진정 조선 민족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그의 대답이 자뭇 궁금하기만 하다.

     

    그러나 우리를 더욱 실망하게 하는 것은 그가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친일의 대열에 합류했다는 점이다. 물론 당시 이른바 내노라 하는 여류명사들이 이미 변절의 대열에 모여 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역시 별다른 문제의식이나 눈치(?)를 보지 않고서도 이 대열에 쉽게 참가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는 너무나 쉽게 자신의 조국을 버리고 만 것이다.

     

     

    친일행각

    2000년 11월 2일, 또 한 명의 친일파가 진정한 자기반성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 사람은 바로 서울여대 설립자이자 명예총장이며, 김활란과 더불어 우리 나라 근대 여성 운동계의 쌍벽을 이룬 고황경(1909∼2000) 이다. 일제시기에 일본과 미국의 대학에 유학하였으며 한국여성으로는 2번째로 박사학위를 받은 우리나라 최초의 지식인 여성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인사이다.

     

      1909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 도지샤(同志社)여전 영문과를 졸업하고 다시 1931년 도지샤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으며, 1937년 미국 미시간 대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고황경은 일찍이 선각자적 현안으로 나라의 힘을 기르는 것만이 곧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길이라는 신념으로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오히려 친일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그는 이화여전 교수로 재직하게 되나 1937년부터 바로 친일집단에 가담ㆍ협조하는 행적을 남기고 있다. 1937년 1월에 총독부 사회교육과가 주동해서 '방송선전협의회'가 발족되었는데 이 역시 '일본 국민으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생활, 즉 내핍과 절약으로 전쟁을 이겨내고 신명을 천황께 기꺼이 바치게 한다'는 사회교육을 수행하게 할 목적으로 수양 강좌, 부인강좌, 상식 강좌 등의 방송 강좌를 실시하였다. 여기서도 고황경은 부인강좌를 맡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일제가 식량수탈을 위해 '산미증식계획', '농촌진흥운동'을 실시함으로써 낙후된 조선의 농촌상황에서 고황경은 비참한 조선여성들의 권익을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더욱 착취하는 데 앞장섰던 것이다.

     

       침략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일제는 일반 부녀자들까지 총후운동에 대대적으로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1942년 1월 5일 조선임전보국단의 산하기관으로 이른바 총후부인(銃後婦人) 진영을 총망라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가 발족되었는데 고황경은 이 단체의 지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황도정신을 선양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으며, 지원병과 학병을 권유하는데도 앞장섰다.

     

       이러한 친일행적이 있음에도 그는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문화대상 국민포장 동백장을 수상하였고, 학술원 종신회원을 역임하였다. 고황경은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행동하라'를 그가 설립한 서울여대의 교육 이념의 뿌리로 삼았고, 자신의 호 또한 '바롬'으로 지었다.

     

       자신의 제자들에게 바른 생각과 바른 행동으로 사회의 한줄기 맑은 샘물의 역할을 하라고 가르쳐 왔다. 그러나 과연 그가 이런 말들을 교육의 지표로 삼고 제자들에게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지 한 번쯤은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http://www.imhere4u.or.kr

     

     

    조선부인문제연구회(朝鮮婦人問題硏究會)

    7대 총독 미나미는 일본의 국체를 인식시킴으로서 신민(臣民)된 자각을 갖게 하는 사회교화 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각종 어용단체를 조직토록 한다. 그 일환으로 19371월 총독부 학무국 알선으로 <조선부인문제연구회>가 조직되었다

     

    조선부인문제연구회는 총독부의 정책을 홍보하고 계몽하는 여성 단체였으며 지역별로 순회 연사를 배당했는데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책에 호응하여 가정보국운동으로서의 국민생활의 기본양식이라는 것을 제정하였다. “전시에 맞게 가정생활을 간소화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제정된 [가정보국운동으로서의 국민생활의 기본양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의례 : 매월 1일 가정에서 황거요배, 축제일의 국기게양, 총독부 의례준칙의 준수, 혼상례의 간소화 누습(陋習) 타파 : 세찬(歲饌) 기타 증답(贈答), 푸닥거리, 필요 없는 잔치 등의 폐지, 매사의 시간엄수

    근로보국정신의 앙양 : 집안 청소를 통한 근로정신 함양, 주부의 직접 시장 보기, 자녀의 근로정신 함양

    의식주 : 색옷 입기, 환경청소, 국 한 그릇 찬 하나의 식사 간소화 이 단체는 신진 여성을 총망라해 매월 마지막 토요일을 정례 회합일로 정하고 생활개선부와 수양부를 두어 활동하였다

     

    여기서 고황경(高凰京)은 중요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선부인문제연구회는 단체의 활동을 선전·계몽하기 위해서 11명으로 된 순회강연반을 결성하여 1938912일부터 13도를 순회강연하였으며 고황경(高凰京)은 홍승원(洪承嫄)과 함께 전남북을 맡아 강연을다녔다.

     

        

    1930년 YMCA 하기 봉사활동 때의 기념사진, 우로부터 현제명과 하경덕 박사, 고황경 박사(서울여대 총장)의 얼굴도 보인다. 

    방송선전협의회(放送宣傳協議會)

    방송선전협의회는 1937113일 조선총독부 사회교육과가 주동해서 조직한 친일기구로서 당시 제2 방송인 조선어 방송강좌를 통해서 조선 민중에게 황민화를 위한 교육강좌를 주관하고 있었다. 이 강좌는 일본의 국체(國體, 이른바 천황제국가)를 인식시킴으로써 신민된 자각을 갖게 하며, 일본국민으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생활, 즉 내핍과 절약으로 전쟁을 이겨내고 신명을 천황께 바치도록 교육하는 것을 목적으로 수양강좌, 부인강좌, 상식강좌 등의 방송강좌를 실시하였다.

     

    이날 조선호텔에서 제1차 협의회가 개최되었는데, 여기에는 조선총독부 관료, 방송관계자 및 총독부에서 위촉을 받은 강사들이 참여했다. 각 강좌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수양강좌 5: 권상로(權相老) 안인식(安寅植) 주종선(朱鍾宣) 한규복(韓圭復)과 일인 오쿠야마(奧山仙三. 학무국)

     

    부인강좌10:고황경(高凰京) 김분옥(金粉玉) 김현실(金縣實) 김활란(金活蘭) 서은숙(徐恩淑) 송금선(宋今璇) 손정규(孫貞圭) 안수경(安壽敬) 이숙종(李淑鍾) 현헌(玄櫶)

     

    상식강좌 11: 강원수(姜元秀) 김성호(金聖浩) 김영상(金永祥) 김병욱(金秉旭) 박종준(朴鍾濬) 서춘(徐椿) 송문헌(宋文憲) 송찬식(宋璨植) 안동혁(安東爀) 윤태빈(尹泰彬) 이응준(李應俊) 장용진(張庸震)

        

     

    ▲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과 국민들에게 선생소릴 들으며 당시 반민족행위를 하고 있던  스승에 의해  호소당하여 아무것도 모른채 일제 정신대(위안부등)에 끌려갔던 어린 여학생들 .일제에 의해 끌려간 위안부들이 자그마치 10만여명이라는데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몇명이나 되는가? 사진= '민족반역자처단협회 자료'  © 플러스코리아

     

     

    방송선전협의회에서 고황경(高凰京)은 부인강좌를 맡는 역할을 하였다

    '내핍과 절약으로 전쟁을 이기고 천황께 신명을 바치자'고 하고 있으나 당시 조선 여성의 생활은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일하는 노예와 같이' 생활하고 있었다. 가난한 소작농가의 여성들은 모두 농업노동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소작농가는 5할에서 7할에 달하는 고율 소작료를 지불했다. , 여성의 농업노동은 곧 일제의 식량 수탈과 농업노동력 수탈의 근원을 이루고 있었다. 일제는 특히 식량 수탈을 위해 '산미증식계획', '농촌진흥운동'을 실시하면서, 조선의 농촌이 낙후된 원인을 일본과 비교하여 여성들이 외업노동을 기피하기 때문이라고 하여 여성들을 옥외노동, 야외노동에 동원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강구하였다. 이른바 '전가(全家)근로'라는 구호 아래 읍·면부락 단위로 부인회가 조직되고 야외노동단, 공동면작 등으로 여성노동이 최대한 활용되는 등 여성 농업노동에 대한 착취는 극에 달했다. 그래서 '촌여자는 소보다도 힘세며, 소보다도 끈기있다'고 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유년노동이 많은 여성노동자들은 하루에 14시간씩 혹사당하면서도 일본인 남자의 4분의 1도 못되는 임금을 받았으며, 열악한 작업환경과 자유가 없는 기숙사생활은 노예와 다름없는 생활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박사 사회학자 고황경은 비참한 조선여성들의 권익을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오히려 조선 여성들을 더욱 착취하는 데 앞장을 섰던 것이다.

        

     

    전시에 맞게 가정생활을 간소화하는 것이었는데, 이 단체는 신진 여성을 총망라해 매월 마지막 토요일을 회합일로 정하고 생활개선부와 수양부를 두어 활동했다.

     

    1960년 본관 건물 머릿돌 앞에서 기념촬영한 초대이사장 전필순 목사와 초대 학장 고황경 박사. 이듬해 3월에 본관건물이 1차 준공되었고, 학교는 4월 15일에 개교하였다.

     

    애국금채회(愛國金釵會) 간사로 활약

    사진='사진으로 보는 한국100년' 사이트의 '일제만행' 코너  중 '일본군 위안부'(이하 게재순) 

     

    조선부인문제연구회에서 활약하던 고황경

    (高凰京)<애국금채회愛國金>의 간사를 맡게 됐다. 1937816일 조선중양정보위원회의 권유로 귀족의 처와 중견여류를 망라해서 결성된 이 단체는 한마디로 말해서 금비녀 금가락지를 뽑아 일제의 국방비로 헌납하자는 목적에서 조직된 전쟁협력단체였다.

     

    시국강연·좌담회 등을 통해 '국위선양''필승체제'의 확립을 위한 내선일체로 총력을 결집할 것을 목적으로 한 황국신민화정책은 점차 '애국의 적성赤誠'인 국방헌금 운동으로 발전하였고 이러한 추세를 좇아 탄생한 친일 여성단체가 <애국금차회>였다.

     

    이 단체의 회장은 친일귀족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윤덕영(尹德榮순종의 백부)의 부인 김복수(金福緩)가 회장이었고 고황경(高凰京)은 송금선(宋今璇) 김활란(金活蘭) 등과 함께 간사로 활동했다.

     

    동시에 애국금채회는 '황군원호'를 목적으로 하면서 (1) 황군의 환송연 (2) 총후(銃後)가정의 위문격려 (3) 총후가정의 조문 (4) 일반 조선부인에 대한 황군원호의 강화 및 국방비의 헌납 등을 주요활동으로 사업계획을 정했으며 육군병원 방문, 위문금 전달, 국방헌금, 장병위문을 실시했다.

     

    황도정신 선양에 앞장

    1939910'동양지광' 주최의 '내선일체 좌담회'에 참여했다. 고황경(高凰京)<내선일체좌담회>에 박인덕, 쓰다 세츠코(津田節子:녹기연맹 회장 쓰다 사카에津田榮의 처) 등과 함께 참여하여 부인층의 비상시적 각오와 내선일체에 대해 토론하였다. 19391월에 창간된 동양지광東洋之光'반도 2천만 동포의 심흉에 일본정신을 철하고, 황도정신을 앙양(昻揚)하고, 폐하의 적자로서 황국 일본의 공민이 될 것'을 창간 목적으로 한 잡지였다.

     

    임전대책협의회 臨戰對策協議會

    1941828{삼천리} 사장 김동환(金東煥)은 임전체제(臨戰體制) 하에서 자발적인 황민화운동을 실천하기 위한 방안의 일환으로 우리는 황국신민으로서 일사보국(一死報國)의 성()을 맹서하여 임전대책(臨戰對策)에 전력을 다할 것을 결의하면서 각계 유력자 198명으로 임전대책협의회(臨戰對策協議會)를 결성했다. 이 단체는 이를 위해 첫째, 물자·노무 공출의 철저 강화책, 둘째, 국민생활의 최저 표준화 운동 방책, 셋째 전시봉고의 의용화義勇化 방책 등을 채택했다.

     

    1941년 말 조선에 배당된 국·공채 중 공채 미상환액만 11600만원으로 발표되었으며 이 액수는 호당 곡가로 환산하면 13가마 꼴이었다. 이 살인적 액수를 소화하기 위해 총독부는 단체, 학교, 직장의 장을 동원하였다.

     

    이를 위해 임전대책협의회(臨戰對策協議會)194194일 부민관 대강당에서 <임전대책 연설회>를 마친 후 <채권가두유격대>를 조직하였다. 12개 반으로 편성된 이들 <채권가두유격대>'애국운동은 이론보다 실천에서' 라는 슬로건으로 194197일에는 일제가 전쟁 비용을 조달하려고 발행했던 1원짜리 꼬마채권을 1원짜리 꼬마채권을 소화시키기 위해 "총후봉공은 채권으로부터"라는 구호 아래 채권가두유격대를 조직, 화신 앞 등 서울 시내 11개소에서 행인에게 채권을 강매했다.

     

    1941'채권가두유격대'에서 서대문대로 편성된 고황경(高凰京)은 우체국 앞에서 신흥우, 주요한등과 함께 채권을 판매하였다. 이때 송금선(宋今璇)은 김사연(金思演) 정교원(鄭僑源), 이돈화(李敦化), 박기효(朴基孝)등과 함께 '경성역대원'이 되어 서울역 앞에서 채권 판매에 참여하였다.

     

    채권가두유격대

    194197일 임전대책협의회(臨戰對策協議會)에서는 이로써 실천으로!”라는 슬로건을 세우고 동회원 70여명을 총동원하여 채권가두 유격으로 나섰다. 70여명을 시내 11개 장소로 배치시켜 '총후봉공은 채권으로부터'라고 외치며 추태를 연출했는데 송금선(宋今璇)은 정교원(鄭僑源), 이돈화(李敦化), 박기효(朴基孝), 김사연(金思演), 김사연의 부녀 손홍원(孫弘遠)과 함께 경성 역대로 나서서 가두 판매했다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부인대

    침략전쟁이 장기화함에 따라 일제는 일반 부녀자들까지 총후운동에 대대적으로 동원하기 시작했다. 임전보국단은 1941124일 임전보국단 전선대회를 열고, 전시하 사상통일의 구체적 방침과 군수자재 헌납운동을 결의한 뒤 부민관에서 '미영타도 대강연회'를 열었다.

     

    194215일 조선임전보국단의 산하기관으로 이른바 총후부인 진영을 총망라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가 발족됐는데 간사장 임효정(林孝貞임순남林順男)을 비롯하여 당시 내노라 하는 친일여성들이 대거 참여하였는데, 고황경(高凰京)은 송금선(宋今璇) 김활란(金活蘭), 박마리아(朴瑪利亞) 등과 함께 지도위원으로 활동했다.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는 194223일부터 근로봉사운동을 전개, 그해 12월경까지 군복수리작업을 벌였다. 즉 근로보국이란 명목 하에 조선 여성을 동원한 강제적으로 여성 노동력을 징발했던 것이다.

     

    학병 지원 독려

    1943년부터는 지원병과 학병을 권유하는데도 앞장섰다. 이러한 활동의 일환으로 매일신보 194385일자에 '징병감사와 우리의 각오, 건군정신에 투철'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이 영광이야말로 과거 34년 동안 역대 총독과 위정자 여러분이 일시동인의 성지를 받들어 반도 동포로 하여금 명실상부한 황국신민을 만들려고 심혈을 기울여 분투한 결정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한 무한한 감사를... 굉대 무변하옵신 성은에 오로지 공황, 감격할 뿐입니다. ......성은을 무엇으로 보답하올까. '나라를 위하여 한 마음이 되어서 힘 다하여라. 임금님의 군사로 나서는 젊은이들' 젊은이들아, 그 집 안 사람들아, 임금을 위하여 참마음 하나로 일어서라 하노라."

     

    해방이 되자 고황경은 다른 친일 여류명사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자기반성 없이 분단 조국의 교육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 일본은 여자 정신대 근무령을 1944년에 공포 하고 12세~40세 미만 한국 여성들을 체포 하여 전선으로 보내 졌다, 당시 일본군 정신대에 끌려간 한국  여성은 약 10만명 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들중 몇 명이 살아 났을까? 사진속의 한여성이 임신이 되어 고통을 호소 하고 있지만 왼쪽 군인은 총을 들고 웃고 있어 어딘가 분위기가 이상한 느낌을 준다 , 왼쪽 여성은 매우 심각하게 임신 여성을 묵시 하고 있다 (1944년).  ©플러스코리아

     

     

     

    경성자매원 졸업사진                      
    1941년 경성자매학원 졸업사진. 경성자매학원은 초대 학장 고황경 박사와 언니 고봉경 선생과 함께 1937년에 동교동(당시 東橋町)에 사재를 털어 세운 어린이 교육시설이다. 앞줄 오른쪽 끝의 두 사내아이가 입고 있는, 단추 네 개가 달린 흰 옷은 실은 노란색 옷으로 고황경 박사 자매가 벗고 다니는 어린이들을 위해 직접 지은 옷이다

     

    ■ 애국금차회 간사로 활약

     

    수렁에 한번 내디딘 발은 빠져 나올 줄 모르고 계속 들어가기만 하였다. 조선부인문제연구회에서 활약하던 고황경은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의 간사 자리까지 맡게 된 것이다.

     

    1937년 8월 16일 조선 중앙 정보위원회의 권유로 귀족의 처와 중견여류를 망라해서 결성된 이 단체는 한마디로 말해서 여자들의 금비녀·금가락지를 뽑아 일제의 국방비로 헌납하자는 전쟁협력단체였다.

     

    서울여대는 우리나라에서 공동체교육을 대학교육에 처음으로 도입한 학교이다. 일종의 대안 대학이다. 초대 학장 고황경 박사의 뜻에 따라 농업인구가 80%이던 시절에 농촌 여성리더를 육성해내는 데 목표를 두고 설립되었다. 농촌이 개혁되어야 대한민국이 개혁된다는 취지에서였다. 학생들은 24시간 캠퍼스에서 생활하며, 잠자고 일어나는 시간을 엄격히 지켰고, 아침마다 함께 경건회를 가졌다. 수업이 끝난 뒤 저녁식사를 하고 나면 함께 저녁 프로그램도 가졌다. 전인교육의 현장이었고, 공동체 속에서 ‘나’와 ‘우리’의 정체성을 배우고 조화로운 인성을 갖춘 여성지도자로 성장해 갔다.

     

    산금량이 군수체제하에서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총독부는 '조선산금령'을 공포하고, '금의 사용제한에 관한 건'을 제정하여 국방의 목적 이외에는 금을 사용할 수 없도록 하여, 장신구 제조 금지는 물론 민간이 소유하고 있는 금제품과 장신구까지도 극성스럽게 긁어 모았다. 그리고 '우리도 국민의 한 사람이다.

     

    우리가 애용하는 금비녀야말로 이 초비상시에 국가를 위해 바치치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결의하게 하면서 금비녀·금가락지를 뽑아갔다. 또한 금반지를 아끼는 여자를 '비국민'으로 매도하면서 손가락을 자르라고 폭언까지 하였으며 심지어는 촌부의 구리 가락지까지 동원하였다.

     

    ▲ 사진 아래 왼쪽, 일장기를 머리에 두른 여학생은 중앙여고의 전신인 경성우숙 2학년 김금진양이며, 바로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이 이 학교 교장 황신덕이다 . 사진 오른쪽은 일제종군위안부로 끌려가  있는 당시 위안소의 위안부 모습    ©플러스코리아

     

    동시에 애국금차회는 '황군원호'를 목적으로 하면서 황군의 '환·송영, 총후가정의 위문격려, 총후가정의 조문, 일반 조선부인에 대한 황군원호의 강화 및 국방비의 헌납 등을 사업계획으로 정하였으며 육군병원 방문, 위문금 전달, 국방헌금, 장병위문을 실시하였다.

     

    1939년 9월 10일 고황경은 {동양지광}이 주최한 '내선일체좌담회'에 박인덕*, 쓰다(津田節子:녹기연맹 회장 津田榮의 처) 등과 함께 참여하여 부인층의 비상시적 각오와 내선일체에 대해 토론하였다.

     

     

    1939년 1월에 창간된 {동양지광}은 '반도 2천만 동포의 심흉에 일본정신을 철하고, 황도정신을 앙양하고, 폐하의 적자로서 황국 일본의 공민이 될 것'을 창간의 목적으로 하고 있는 잡지였다.

     

    1941년 말 조선에 배당된 국·공채 중 공채 미상환액만 11억 600만 원으로 발표되었으며 이 액수는 호당 곡가로 환산하면 13가마 꼴이었다. 이 살인적 액수를 소화하기 위해 총독부는 단체, 학교, 직장의 장을 동원하였다. 

     

    이를 위해 임전대책협의회는 1941년 '임전대책 연설회'를 마친 후 '채권가두유격대'를 조직하였다. 12개 반으로 편성된 이들 '채권가두유격대'는 '애국운동은 이론보다 실천에서' 라는 슬로건으로 1원짜리 꼬마채권을 가판했는데 서대문대로 편성된 고황경은 우체국 앞에서 신흥우, 주요한* 등과 함께 채권을 판매하였다.

     

    침략전쟁이 장기화함에 따라 일제는 일반 부녀자들까지 총후운동에 대대적으로 동원하기 시작했다. 1942년 1월 5일 조선임전보국단의 산하기관으로 이른바 총후부인(銃後婦人) 진영을 총망라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가 발족되었는데 고황경은 이 단체의 지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황도정신을 선양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으며, 1943년부터는 지원병과 학병을 권유하는 데도 앞장 섰다.

     

    이러한 활동의 일환으로 {매일신보} 1943년 8월 5일자에 그는 [징병감사와 우리의 각오, 건군정신에 투철]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쓴다.

     

    이 영광이야말로 과거 34년 동안 역대 총독과 위정자 여러분이 일시동인의 성지를 받들어 반도 동포로 하여금 명실상부한 황국신민을 만들려고 심혈을 기울여 분투한 결정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한 무한한 감사를……굉대 무변하옵신 성은에 오로지 공황(恐惶)·감격할 뿐입니다.……성은을 무엇으로 보답하올까. '나라를 위하여 한마음이 되어서 힘 다하여라. 임금님의 군사로 나서는 젊은이들' 젊은이들아, 그 집안 사람들아, 임금을 위하여 참마음 하나로 일어서라 하노라.

     

    해방이 되자 고황경은 다른 친일 여류명사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자기반성 없이 분단 조국의 교육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1945년 경기여고 교장을 거쳐 1946∼48년에는 미군정청에서 보건후생부 부녀국장을 역임하고, 다시 1949∼50년 미국의 프린스턴대학에서 연구활동을 하다가 귀국해서는 이화여대 사회학과에 재직하였다.

     

    그리고 1960∼63년에는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참석하였으며, 1958∼86년 대한어머니회 회장, 1961∼84년 서울여대 학장, 1963년 걸스카우트 단장, 서울여대 명예총장, 학술원 종신회원을 역임하였으며, 대한민국 문화대상 국민포장 동백장, 5·16 민족상을 수상하였다.

     

     

     

     

                                                                         ■ 장하진(충남대 교수·사회학)

     

     

     '어머니' 일깨우는 대한어머니회 창설

    서울여자대학 설립

     

     

    ■ 참고문헌

    고황경, [징병 감사와 우리의 각오, 건군(建軍)정신에 투철], {매일신보}, 1943. 8. 5.

    「역사적 사건과 신앙인물」(신문영, 『미래한국신문』, 2004.3.23) 

    친일파 99인 ②,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284-288p), 장하진(충남대 교수. 사회학)
    친일파 99인 ③,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부록2. 주요 인명록, 270p)
    친일파 죄상기, 김학민 정운현 엮음, (민족정기의 심판: 35, 53p, 친일파 군상 : 391, 443, 445p)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년 3월 1일). 〈고황경 : 황도정신 선양에 앞장 선 여성 사회학자 (장하진)〉, 《친일파 99인 2》.

    신문영. “[역사적 사건과 신앙인물⑦] 故 고황경 서울여대 설립자”, 《미래한국신문》, 2004년

     “친일파 된 여성 교육선각자들 - <자료입수> 김활란 등 선각 여성 5인의 친일행적”, 《프레시안》, 2002년

     

     

    일제치하 친일단체 및 여성명사의 활동내용  

     

       

     

    단체 활동시기

           

    목적 활동내용

    조선부인연구회(1937.1)

    김활란(이화여전 교장)

    송금선(덕성여자실업학교장)

    고황경( 서울여대 총장)

    서은숙(이화보육 학감)

    이숙종(성신가정여학교장)

    주제: 가정 보국운동으로서의 국민생활의 기본양식

    애국금차회 (1937.8.20)

    회장: 김복원(윤덕영 )

    고황경, 김복인, 김화순, 김활란, 유각경, 차사백, 주경애, 홍승원

    전쟁협력을 위한 국방비 헌납

    창립식날 금비녀 11, 금반지 3, 금귀걸이 2, 은비녀 1, 헌금 889(당시 쌀한가마 18) 즉석에서 모금하였는데 그림이 화가 김은호 의해 <금차헌납>이라는 그림으로 그려져 미나미총독에게 증정됨.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1938.6.22)

    김활란

     

    59개의 단체와 56명의 개인이 참여한 친일어용단체로 김활란이 개인자격으로 참가하였다.

    조선문인협회 문예대강연 (1940.1 ~ 2)

    최정희, 모윤숙

    작품낭독, 자화상,

    문사(文士)부대 지원병(1940.12)

    최정희

    진실로 이기라

    임전대책협렵회(1941)

    박인덕, 김활란, 모윤숙, 고황경, 최정희, 이숙종, 송금선

    강연: 승전의 길은 여기에 있다

    조선교화단체연합회(조선총독부 학무국연성과 ) 1941. 9

    고황경, 손정규, 허하백, 홍승원, 송금선, 김활란, 모윤숙

    부인궐기촉구강연 戰國 인식과 징병 징용제 취지 선전 순회강연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대원 간사 (1942. 1.5)

    고황경, 김활란, 박마리아, 배상명, 유각경, 이숙종, 임영신, 차사백(중앙보육학교 교사), 황신덕, 노천명, 모윤숙, 허하백, 최정희, 박봉애, 임효정, 최희경, 김선, 박순천(경성가정의숙교사), 박승호(경성가정의숙교사), 박은혜, 박인덕, 배상명, 서은숙, 송금선, 손정규, 임숙재, 최이권, 홍승원

    친일세력 총망라

    전시체제하의 황민화 운동의 사상통일

    시국강연회 활동

    임전보국단결전 부인대회 강연

    (사회: 박인덕)

    1941. 12

    임효정, 최정희, 김활란, 임숙재, 허하백, 모윤숙, 박순천

    미몽에서 깨자

    국군의 어머니

    여성의 무장

    가정의 신질서

    총후 여성의 각오

    여자도 전사다

    국방가정

    임전보국단 주최 방송

    (1941~1942)

    서은혜, 허하백, 임숙재, 송금선, 박순천, 임영신(중앙보육학교 )

    전시와 모성의 결의

    폐품의 전시동원

    대전과 일본 부도(婦道)’

    생활전에도 이기자

    전황뉴스를 듣고

    가정생활에도 결전

    체제를 바란다

    싱가폴 공략 대강연회

    1942. 2

    박인덕, 김활란

    동아여맹과 반도여성

    대동아건설과 우리준비

    국민시 구극歐劇 대회

    1942. 120

    모윤숙, 노천명

     

    국민총력조선연맹

    1941. 10. 16

    고황경(참사), 김활란(평의원 참사), 손정규(참사)임숙재(총무부 기획), 송금선(연성부 연성의원), 이숙종(연성부 연성의원), 황신덕(후생부 후생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