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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 시인의 서울살이 (28) 청백리 류관 이야기

草霧 2013. 9. 30. 11:32

 

 

청백리 `류관`과 함께 떠나는 우산각골 여행

어설픈 시인의 서울살이 (28) 청백리 류관 이야기

 

시민기자 이승철 | 2013.09.27

 

[서울톡톡] '선초삼청(鮮初三淸)'이라는 말이 있다. 조선 초기의 청백리 3인방인 황희와 맹사성, 그리고 류관을 일컫는 이름이다. 그런데 황희나 맹사성은 너무 유명하여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지만 류관이라는 이름은 조금 낯설다. 그러나 류관은 황희와 맹사성의 유명세에 밀려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들과 비교했을 때 결코 뒤지지 않는 청백리였다고 전한다. 오죽했으면 그가 살던 초가집을 '우산각(雨傘閣)'이라 하고, 그가 살았던 지금의 창신동, 숭인동, 신설동 일대를 우산각골이라 불렀을까.

 

류관(1346-1433)은 1371년(고려 공민왕 20)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의 개국원종공신에 책봉되었다. 태조와 태종, 그리고 세종임금을 모시며 대사성, 형조전서, 대사헌 등을 지냈다. 태종원년에는 강직한 성품으로 불교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 후에 간관을 탄핵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어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

 

사면 후에는 예문관대제학으로 다시 등용되어 춘추관지사를 겸하며 '태조실록' 편찬과 '고려사' 개찬작업에 참여했다. 1426년에 우의정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황희, 맹사성과 더불어 세종대의 대표적인 청백리로 꼽혔다. 류관은 1433년에 세상을 떠나 지금의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에 묻혔다. 호는 하정(夏亭)이다.

 

서거정의 필원잡기에 의하면 하정 류관은 우의정까지 지냈지만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나라에서 받은 녹봉은 마을의 개울을 건너는 다리를 놓거나 길을 넓히는 일, 가난한 백성들의 식량을 사주는 일, 동네 어린이들의 먹과 붓 값으로 모두 써버렸다.

 

비우당

 

그가 살던 허술한 초가집 우산각 터엔 훗날인 광해군 시절 류관의 6대 외손이며 실학의 선구자였던 지봉 이수광이 집을 짓고 거주했다. 그 곳에서 '지봉유설'을 집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수광은 6대조 외할아버지인 청백리 하정 류관의 뜻을 기려 역시 3칸짜리 초가집인 '비우당(庇雨堂)'을 지었다. '비우당'은 '비를 파할만한 집'이란 뜻이라고 한다. 지금의 비우당은 일제강점기에 모두 훼손되어 사라진 것을 1996년 복원한 것이다.

 

자주동샘 표지석(좌)과 샘 옆 바위에 새겨진 각자(우)

 

비우당 뒤편은 커다란 바위벽이 가로막고 있는데, 그 밑에는 비운의 단종왕비 정순왕후의 슬픈 전설이 깃들어 있는 '자주동샘'이라는 샘터가 남아있다. 관비 신분이었던 정순왕후는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떠난 후 생계를 잇기 위해 제용감에서 심부름하던 시녀의 염색을 도왔다. 제용감은 각종 옷감의 채색, 염색, 직조 등을 관리하던 곳이며, 정순왕후는 이곳 자주동샘에서 지치라는 식물뿌리를 이용해 비단에 자줏물을 들이는 염색을 도왔다는 것이다.

 

근처인 숭인동에는 단종임금을 그리며 날마다 바위봉우리에 올라 영월 쪽을 바라보았다는 동망봉이 있다. 그 뒤쪽 아래에는 정순왕후가 평생을 보낸 정업원 옛터가 비석과 비각만 남은 채 비구니들의 사찰 청룡사 한편에 초라하게 남아 있다.

 

류관을 기려 지은 도로 이름, 하정로

 

그 옛날 우산각골이라 불렸던 창신동과 숭인동, 그리고 보문동과 신설동 일대에는 청백리 류관과 그의 6대 외손인 지봉 이수광과 관련된 거리와 공원, 그리고 다리가 산재해 있다. 청계7가에서 창신동, 보문동 보문역을 잇는 왕복 2~4차로 도로 이름은 이수광의 호를 따서 지봉로다. 그리고 지하철 1호선 신설동역 4번 출구 동편 동대문 등기소에서 2호선 8, 9번 출구 동편을 지나 청계천 비우당교에 이르는 왕복 2차선 도로는 류관을 기려 이름이 하정로다.

 

류관이 살았던 초가집 이름에서 따온 '우산각어린이공원'(좌)과 이수광을 기려 세운 '비우당교'(우)

 

하정로에서 곧바로 오른쪽 작은 골목길로 접어들면 동대문도서관에 이른다. 도서관 바로 앞에 있는 작은 공원은 청백리 류관이 살았던 초가집 이름에서 따와 '우산각어린이공원'이다. 우산각 공원에서 약 5분 정도 걸어 내려오면 청계천에 이른다. 이곳 청계천을 가로지르는 아치형 다리가 바로 지봉 이수광이 살았던 비우당을 기려 세운 '비우당교'다.

 

조선시대 우산각골은 청백리의 청렴한 삶과 시대를 앞서갔던 실학의 선구자, 그리고 비운의 슬픔을 안고 살았던 정순왕후의 애환이 깃들어 있는 유서 깊은 지역이다. 낙산공원과 성곽길을 둘러보고, 정상에서 동쪽 능선길을 따라 내려가며 비우당과 자주동샘, 청룡사와 정업원 옛터, 동망봉에 올랐다가 남쪽인 신설동으로 내려와 우산각어린이공원과 비우당교를 둘러보면 우리 역사를 돌이켜 볼 수 있는 멋진 산책코스가 될 것이다.

 

 

이승철 시민기자

이승 철 시민기자는 시인이다. 스스로 '어설픈 시인'이라며 괴테 흉내도 내보고, 소월 흉내도 내보지만 "나의 시는 항상 어설프다. 불후의 명작을 쓰겠다는 욕심 은 처음부터 없었고 그저, 더불어 공감하는 보통 사람들과 같이 숨 쉬고 나누는 것을 만족할 뿐"이라고 한다. 이 어설픈 시인이 서울살이를 하며 보고 느낀 삶의 다양한 모습, 역사와 전통 등을 시인 특유의 문체로 써내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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