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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유림의 대표자, 정만조(鄭萬朝)

草霧 2013. 9. 24. 16:26

 

 

 

 

정만조(鄭萬朝, 1858~1936 )

 

 

친일유림의 대표자

 

▲ 진도읍 공설운동장내 불법적으로 조성된  정만조(鄭萬朝) 시비. 

 

1922년 조선사편찬위원회 위원
1929년 경학원 대제학 

1858(철종 9)∼1936. 조선 말기의 학자.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대경(大卿), 호는 무정(茂亭). 서울 출신. 기우(基雨)의 아들이다. 강위(姜瑋)의 문하에서 수학해 문학에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조선 말기의 학자이며 일제 강점기조선총독부에 협조한 대표적인 유교 계열 인물이다.

 

1884년(고종 21) 교섭통상아문(交涉通商衙門)의 주사가 되었다. 1889년에는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예조참의와 승지를 거쳐 1894년에는 내부참의에 이르렀다. 1896년 4월에 이르러 1895년 8월역변(八月逆變)과 10월무옥(十月誣獄)에 관련되어 서주보(徐周輔)·정병조(鄭丙朝)·김경하(金經夏)·이태황(李台璜)·우낙선(禹洛善)·전준기(全晙基)·이범주(李範疇)·홍우덕(洪祐德)·정인흥(鄭寅興) 등과 함께 구금되었다.

 

심판을 받던 중 고종의 특명으로 우낙선과 함께 유배 15년형에 처해져 전라도 진도에 유배되었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순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그 해 12월에 취한 사면으로 관계(官界)에 복귀하였다.

 

곧 규장각부제학이 되고, 헌종·철종 양조의 ≪국조보감 國朝寶鑑≫ 편찬위원이 되었다. 1910년 우리 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탄된 뒤에는 친일적인 경향을 띠어 이왕직전사관(李王職典祀官)과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촉탁, 그리고 조선사편수회의 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26년 경성제국대학의 강사가 되고, 1929년에는 경학원(經學院)의 대제학이 되어 명륜학원(明倫學院)의 총재를 겸임하였다. 이왕가실록(李王家實錄)의 실록편찬위원이 되어 ≪고종실록≫·≪순종실록≫의 편찬사무를 주재하였다. 시문에 남달리 능해 특히 변려문(騈儷文)에 뛰어났으며 글씨도 잘 썼다. 저서로는 ≪무정전고 茂亭全稿≫가 있다.

 

뛰어난 학자에 문장가였던 그를 일본은 철저히 이용했고, 정만조 역시 초년에 그와 뜻을 같이 하던 선비들과는 소원한 사이가 되었다는 일화가 여럿 전해질 정도로 철저한 친일파로 변신했다. 손자의 이름까지도 일본 천황 이름 다이쇼 천황에서 따와 '대갑(大甲)', '정갑(正甲)'으로 지었다는 설이 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동생 정병조도 세 명단에 들어 있다.

 

정병조(鄭丙朝, 1863년 양력 11월 2일 ~ 1945년 양력 6월 10일)

  • 조선총독부 중추원
  • 국민협회
  • 정만조
  • 정인익
  • 경학원
  • 명륜학원
  •  

     

    조선사편찬위원회

     

    경학원 대제학의 벼슬자랑과 위당 정인보의 비웃음

     1929년 정만조는 바라고 바라던 경학원(經學院) 대제학(大提學)이 되었다. 그는 족질(族姪)뻘이 되는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에게 근래에 들어 동래 정씨들이 많은 벼슬을 했지만 대제학은 내가 처음이라고 신나게 자랑을 늘어 놓다가 위당이 그런 대제학은 열 개를 씌워 놓아도 부러울 것이 없다고 핀잔을 주자 시무룩해졌다 한다.

     

    대제학이라는 벼슬은 분명히 조선시대에는 영광된 벼슬자리였다. 그런데 경학원 대제학은 어떤 의미를 띠고 있기에 위당의 비웃음을 샀는가? 개항 이후 성균관은 교육기관으로 침체를 면치 못해 특수교육기관으로 그곳에 경학원(經學院)을 부설로 설치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전통적인 교육과정과 양반 자제들의 입학으로 개화의 분위기에 맞추지 못하고 이름만 유지하였다. 일제는 조선을 완전히 병합한 뒤 성균관을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전면적인 개편을 단행하면서 이름도 경학원으로 바꾸어 부르게 하였다.

     

    그리고 그 관련인사도 친일파로 채웠으며, 또 교육기능을 상실하고 석전(釋奠)의 향사와 재산관리를 맡아 보는 정도였다. 이럴 적에 정만조는 친일유림으로서는 처음으로 부제학에 앉아 일제 식민지 정책에 협조했던 것이다.

     

    민족주의자인 김창숙(金昌淑)과 같은 유림들이 경학원에 발을 끊자, 정만조 등 친일유림들은 성균관의 교육기능을 회복해야 한다는 총독부의 요구에 따라 명륜학원(明倫學院)의 설립을 보았다. 정만조는 대제학으로서 명륜학원 총재도 겸임하면서 조선총독부의 식민정책에 동조했던 것이다. 

     

    이들은 나중에, 예전에는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성을 바꾸는 일에 앞장 서는 사례도 있었고(창씨개명), 공자묘에 머리를 숙이던 것을 그치고 일본 천황에게 참배하는 일도 있었다(신사참배).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책임은 형식상으로 그 최고책임자였던 정만조에게 지어져야 하는 것이다.

     

    ▲ 정만조 캐리커쳐. 백산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그림이며 블로그 '절영도 등대'님이 찍은 사진을 게시해 놓은 것을 펌한 이미지 입니다.  한편 한국문인협회 진도군지부는 진도읍 공설운동장부터 사천리 구간 등산로 주변에 향토시비공원을 조성키로 하고, 지난 3월 정만조(鄭萬朝/1858~1936년)의 시비를 궁도장 입구 임도소공원에 제막한바 있다.

     

    그러면 정만조는 어떤 출신으로 사회활동을 벌였던가? 그는 19세기 세도정치에서 네 임금 아래 영상(領相)을 지낸 정원용(鄭元容)과 당내친(堂內親) 사이이다. 이런 탓으로 그는 벼슬살이에 일찍 입문할 수가 있었다.

     

    더욱이 그는 불우한 개화파 문사인 강위(姜瑋)에게서 시문을 충실히 익혀 문명을 얻었고 글씨도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러니 여늬 양반집 자제출신의 벼슬아치와는 달리 그는 지식인 관리로 꼽혔던 것이다.

     

    그는 관계에 나와 승지, 참의 등의 벼슬을 지냈으나 차츰 반민씨세력에 가담하게 되었다. 이런 정치활동으로 김윤식*, 허진(許璡), 안주선(安周善) 등과 함께 유배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통감부(統監部)가 설치되자, 일제의 친일파 육성책과 같은 음모에 의해 이들은 풀려났고 정만조는 이왕직(李王職)의 직책을 받았다.

     

    이 후부터 그는 친일파로 변신하여 명문의 집안을 욕되게 하였다. 지식인 친일파의 전형 그는 지식인으로 일제에 이용당하였기에 곧 규장각 부제학이 되었고 또 헌종철종대의 국조보감(國朝寶鑑) 편찬위원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그와 가깝게 지내던 이건창(李建昌), 황현(黃玹), 정인보 등과 차츰 소원해지기 시작했고, 그가 중추원 촉탁 등의 일을 맡을 적에는 지조 있는 선비들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1922년 조선총독부에서는 조선의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조선사편찬위원회를 발족시켜 {조선사}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이 사업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위원장을 맡았고, 당시 한국사를 전공한 일인 학자와 조선학자가 망라되어서 여기에 참여했다. 그리하여 그 고문에는 이완용*, 박영효*, 권중현* 등이 추대되었고 기존의 조선총독부 편수과와 중추원 편찬과 그리고 경학원의 대표 인사들이 위원으로 망라되었다.

     

    그런데 정만조는 경학원 부제학의 대표로서 위원으로 위촉받아 참여하였다. 그는 역사학자도 아닌데 왜 위원으로 위촉을 받았던가? 그 까닭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조선의 역사책을 만드는 데서 유림의 대표가 참여했다는 명분을 만들려 했을 것이요, 둘째는 박학하고 문장가(한문)인 그의 명성을 이용하려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정만조는 1차로 1922년에서 1925년까지 위원으로 있다가 일단 해직되었다. 그런 뒤 조선사편찬위원회가 조선사편수회로 개편된 뒤 2년 후인 1927년에 다시 위원으로 피명(被命)되었다. 이 때는 책의 내용이 본격적으로 집필되던 시기여서 그의 한문지식이 필요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만조는 정기적인 고문의 일과 위원의 간담회에 열심히 참석한 것으로 나타나 있으나 같은 위원인 이능화*와는 달리 별로 중요한 의견을 내지 않은 듯하다. 당시 이 관계기록에 의하면, 편찬의 구분에 있어 제1편 삼국이전이라고 표기된 것에 대해 단군조선이 여기에 포함되느냐는 의문을 제기한 정도이다.

     

    물론 이들 기록이 상세한 질의응답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으나 그가 별로 의견을 내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하겠다. 그리고 이능화나 최남선*, 신석호, 이병도와는 달리 집필에는 참여치 않았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조선사} 편수에는 피동적으로 참여했고 일제의 역사왜곡에 있어서는 위의 인사들보다 책임이 덜한 듯하다.

     

    그러나 정만조는 또 하나의 역사왜곡 작업에 참여하였다. 곧 {고종실록}(高宗實錄)과 {순종실록}(純宗實錄)의 편찬에 감수위원으로 참여한 것이다. 일제는 {조선사}의 편수와 함께 전통적인 {조선왕조실록}의 편찬방식에 따라 고종순종의 실록편찬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들 실록에는 일제의 침략정책과 관련된 내용들이 거의 대부분인데도 일제의 침략정책 사실을 누락하고 일제가 이른바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기록을 중심으로 엮었던 것이다. 그가 비록 감수위원이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권한이 없는 허수아비노릇만 하였던 것이다.

     

    미지근한 친일파의 길 정만조는 문사이면서도 그 꼿꼿한 기질을 보여 주지 않았다. 아마도 고생을 모르던 양반집 자제가 정치적 사건에 몰려 진도에 유배되어 12년을 지낸 악몽에 진저리가 났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문사로서 여규형(呂圭亨)과 함께 친일파라는 오명을 남겼다.

     

    또 그의 아우 정병조(鄭丙朝)는 그보다 더 노골적으로 친일행각을 벌였고 동래 정씨 문중산판까지 팔아먹은 일로 문중의 비난을 더 세차게 받아야 했다. 곧 형제 친일파라는 불명예를 낳았던 것이다.

     

    정만조는 일제에 협조한 탓으로 재산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고, 80세에 가까운 장수를 누리고 살았다. 그렇다고 해서 손자들의 이름을 지을 때 일왕의 이름인 다이쇼(大正)를 각각 따 대갑(大甲), 정갑(正甲)으로까지 지을 필요가 있었을까.

     

    그가 죽었을 적에 두 가지 상반된 평가가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친일행각 때문이었다. 후배 친일파인 안인식(安寅植)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다음과 같은 만사를 썼다. 많은 선비 왕국에 났으나 남다른 재주 온 나라에 떨쳤네 문장은 해내를 울렸고 칭송의 이름 짝하리 없네 또 다음과 같이 뒤를 이었다.

     

     

    늦게 성균관에 들었는데 70의 나이에 무엇을 구하리 우리 유학이 날로 죄상해 엄숙히 자기 조심으로 여겼네 분명히 정만조는 이처럼 청장년시절에는 전국에 문명을 날렸고, 이런 명망 덕분에(?) 일제에 이용당하면서 비난을 한몸에 받기도 하고, 자기 회환에 빠지기도 한 것이 아닌가?

     

    강위(姜瑋)의 제자 중에 그만이 친일파라는 오명과 함께 선비로서 성균관을 유린했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운림산방, 소치 허유 "은파유필"

     진도 삼성사(유배지)의 정만조의 "茂亭恩泉" 

     

    일제 때 정만조(鄭萬朝)가 주창한 청계천 역류계획의 주요 논지

     

    이경재, <서울정도육백년, 제3권 생선 민어드렁 사려> (서울신문사, 1993)(49~51쪽)

    [청계천] ...... 그런데 태종시대와 세종시대에 개천에 관한 재미있는 의견이 두 가지 나왔다. 그 하나는 태종 때에 나온 용산, 남대문간의 운하를 뚫자는 얘기이다. 조선시대의 용산은 마포, 서강 등과 더불어 중요한 항구의 하나였으며 전국 각지의 선박이 들어와 양곡, 목재, 해산물, 기타 전국의 산물이 여기서 양륙되었다. 그런데 도선 안에 대대적인 개천공사가 있는 다음해인 태종 13년(1413)에 일부 중신들간에 이 용산까지 들어온 대소 선박을 숭례문 앞까지 연장시켜 거기서 물자를 양륙하게 되면 아주 편리해질 것이니 용산에서 숭례문까지 운하를 굴착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태종 자신은 백성을 괴롭힌다는 생각에서 노력동원을 꺼려 이것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또 하나의 재미있는 주장은 1920년대 후반에 경학원 대제학을 역임하고 이왕직 편찬실장을 하던 정만조(鄭萬朝)라는 분이 제창한 주장이다. 황톳마루를 제치고 운하를 만들어 지금의 청계천을 서쪽으로 흐르게 하자는 것이다.

     

    서울은 옛부터 물고장이었다.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숭례문 밖 곳곳에 연호가 있었으며 제1차 성내 개천공사를 한 기록을 봐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수백 년 동안 한강의 토사퇴적으로 이루어진 둑도나 살고지평의 높이에다 청계천을 동류케 함으로써 큰 비가 올 때마다 성내에 물이 고여 피해를 입고 있으니, 황톳마루를 제치고 봉래동 방면으로 운하를 만들고 둗도에서 한강수를 도입시켜 저지대인 용산 쪽으로 상류케 함이 현재 경성부에서 시공중에 있는 전면복개공사보다 용이하고 비용이 절감될 것이다.

     

    또 고려 때의 도선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명당지설을 따른다 하더라도 좌청룡, 우백호의 안산, 즉 남산을 바라보는 사이에 입수라는 명당의 조건이 현재의 청계천은 동쪽으로 흐르고 있으니 이는 입수가 아니라 출수가 되어, 그들이 예언한 36국 내조는커녕 역대로 외세의 억압과 침략만 받아오지 않았는가. 그러니 운하를 만들어 청계천을 서쪽으로 흐르게 한다면 명당조건 또한 갖추어질 것이다. 재미있는 의견이긴 하나 지금 청계천은 그대로 복개되어 여전히 동쪽으로 흐르고 잇다.

     

    이경재, <서울정도육백년, 제4권 역사의 사건현장> (서울신문사, 1993)(12~15쪽)

    [청계천의 역류와 광교]

    지금은 복개돼서 보이지 않지만 청계천의 물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즉 동대문 옆의 수구문을 통해서 흘러나가고 있는데 이것을 거꾸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가게 하자는 얘기가 나온 일이 있다. 참으로 희한한 발상이다. 이 얘기는 지금으로부터 60여년 전에 이왕직 편찬실작을 지낸 정만조(鄭萬朝)라는 분이 제창을 한 것인데, 그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주장이 없던 것은 아니다.

     

    청계천은 그 당시는 개천이라고 해서 태종이 한양천도 이후에 자연하천을 넒히고 도랑을 파고 인공적으로 물이 흘러가게 만든 열개(開)자 내천(川)자 개천이었는데 이 공사를 힘겹게 하고 도 이 개천으로 말미암아 장안에 홍수가 지고 하니까 어떤 사람이 이런 의견을 내놓았다고 한다. 즉, 용산과 숭례문 사이에 운하를 뚫고 또 청계천 개천을 이쪽으로 연결해서 물이 한강으로 흘러나가도록 하자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용산은 마포, 서강 등과 함게 중요한 항구의 하나였다. 그래서 전국 각지의 선박들이 들어와서, 양곡, 목재, 해산물, 기타 전국의 산물이 여기서 육지로 올려졌다. 도성 안에 대대적인 개천공사를 한 다음해인 태종 13년에 일부 중신들간에 이 용산까지 들어온 대소 선박을 숭례문 앞까지 연장시켜 거기서 물자를 양륙하면 아주 편리해질 것이니 용산에서 숭례문까지 운하를 굴착하자는 것이었다.

     

    태종 때의 대신들이 수에즈 운하가 어디 있는지 또 그것을 본 일도 없을 텐데 이런 착상이 나오다니 정말 아이디어상감인데, 이것은 결국 탁상공론에 그치고 말았다. 태종 자신은 백성을 괴롭힌다는 생각에서 노력동원을 꺼려서 이것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발상이 5백년 후에 또 나타났다. 정만조라는 사람은 경학원(지금의 성균관) 대제학을 지낸 분인데 여러 가지 역사적인 사료에 대해서 상당히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다. 서울은 옛날부터 물고장이라고 했다. 한성, 한양 하는 한나라 한(漢)자부터가 삼수변에 쓰는 것만을 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만 해도 남대문 밖 여러 군데에 연못이 있었던 것을 봐도 물고장이란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청계천은 물고장 답지 않는 흐름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양주변의 지리를 살펴보면, 수백년 동안 한강의 토사가 쌓이고 쌓여서 뚝섬이라든가 살꽂이평 같은 데는 지대가 높아졌는데 청계천의 물길을 동쪽으로 흐르게 하면 물길이 동쪽에서 막혀 큰비가 올 때마다 성내에 물이 고여 피해를 입고 있으니, 황톳마루를 제치고 봉래동 방면으로 운하를 만들고 둑도에서 한강수를 도입해서 저지대인 용산 쪽으로 흐르게 하자는 것이다. 그때 마침 경성부, 즉 일제시대의 서울시청에서 계획하고 있는 청계천 복개보다는 훨씬 경비도 덜 들고 효과적이라고 주장을 했다.

     

    또 고려 때 도선(道詵)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명당설을 따른다 하더라도 좌청룡, 우백호의 안산, 즉 남산을 바라보며 입수라는 명당의 조건에 있어서 청계천이 동쪽으로 흐르고 있으니 이것은 입수가 아니고 출수가 되니, 그 사람들이 예언한 대로 36개국 내조는커녕 역대로 외세의 침략만 받아오지 않았는가. 그러니 운하를 만들어 청게천을 서쪽으로 흐르게 해야 된다고 정만조씨는 주장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현이 안 되고 청계천은 복개가 됐으나 여전히 동쪽으로 흐르고 있다.

     

    주윤(朱潤), "한양 도읍을 관류하는 청계천과 교량에 대한 고찰", <향토서울> 제44호 (서울시사편찬위원회, 1987년 3월) (61~64쪽 부분)

     

    1. 청계천 역류화 구상(淸溪川 逆流化 構想)

    지금 전면 복개되어 보이지 않는 청계천을 논(論)한다는 자체가 쓸모없을지 모르나 필자는 기어코 이 기록을 남겨놓아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필자의 은사 정만조(鄭萬朝, 1859~1932) 선생이 일제 때의 청게천 전면복개계획을 반대하고 운하계획(運河計劃)을 내세운 유지(遺志)에 따라 그의 제자들이 광복 후 역대 시장(市長)에게 이를 건의한 내용을 비롯하여 수도서울의 숨결이 담겨져 있는 청계천을 이대로 암거(暗渠) 속에 덮어 후손들로 하여금 영원히 망각(忘却)케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우리 서울은 옛부터 주위 40리의 산과 언덕으로 둘러싸인 분지(盆地)인데 이 안의 대소하천(大小河川)이 청계천에 합류되어 도심(都心)을 가로질러 한강으로 흘러들어간다. 흐르는 방향이 동(東)에서 서(西)로 흐르는 한강과는 달리 서(西)에서 동(東)으로 역류(逆流)하므로서, 옛부터 홍수(洪水)로 인한 피해가 있을 때마다 또는 평시(平時)의 투예물(投穢物)로 인한 취기(臭氣)가 있을 때마다 왈가왈부(曰可曰否)의 시비꺼리가 되어 왔다.

     

    그래서 이태조(李太祖)의 한양정도(漢陽定都) 당시의 '천거(川渠)' '개천(開川)'공사가 당초부터 잘못되었다는 말로부터, 전면복개되어 그 위에 고가도로가 가설되고 연변(沿邊)에 고층빌딜이 날로 늘어가고 있는 현재에도 암거(暗渠) 속의 메탄을 우려하며 경계하는 소리가 들려 아직까지도 그 여운(餘韻)이 개운치가 않다. 그러면 과거 선인들의 청계천에 대한 소견(所見)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우선 고(故) 정만조 선생이 주장한 지론을 기록해 보기로 한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창덕궁 돈화문을 들어서서 궁중 금천교(禁川橋)를 건너면 바로 우측(右側)에 붉은 색으로 단청된 이왕직(李王職) 청사가 있었다. 지금은 모두 헐려 화단으로 바뀌어졌지만, 그 청사 2층에 '편찬실(編纂室)'이 있어서 한말 최후의 경학원 대제학(經學院 大提學)을 지낸 바 있는 정만조 선생이 실장(室長)으로 있었고 당시의 한학자 도는 이왕가(李王家) 친척들로 구성된 편찬원 약 30명과 일본인 사학자(史學者) 오다 세이고(小田省吾)가 촉탁(囑託)으로 근무하고 있어서 매일 규장각 장서(奎章閣 藏書)를 손질하고 있었다.

     

    당시 필자는 정선생으로부터 한학을 배우던 소년시절이었는데 일주일에 두번씩 그 편찬실에 출입하였다. 그러던 어느 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21 여지고(與地考) 9에 기록된 '개천(開川, 청계천 구명)을 주제로 선생게서 매우 흥분된 어조(語調)로 편찬원들에게 훈계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 중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문헌비고(文獻備考)의 천명(川名) '개천(開川)'

    '청계천'이란 이름은 일본인이 내거(來居)하기 시작한 통감부 초기(統監府 初期)에 생긴 것이고, 고려(高麗) 때부터 '한양천(漢陽川)' 또는 '경도천(京都川)'이라 불러왔는데 이 문헌비고(文獻備考)에는 아직까지도 '개천(開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본시(本是) '개천(開川)'은 인공(人工)으로 물고랑(川渠)를 넓히는 공사이름이지 그 하천(河川)의 고유(固有)의 이름이 될 수 없다. 마치 길을 넓힌 것을 신작로(新作路)라 하는 것과 같다. ...... (중략)

     

    (2) 황토현(黃土峴, 황토마루)을 제치고 '운하(運河)'를 만들어 서향상류(西向常流)케 할 것

    서울은 옛부터 한수(漢水) '한(漢)'자의 이름이 붙어 왔다. 이것은 수향(水鄕, 물고장)이란 듯이다. 태조(太祖)의 정도(定都) 때만 하더라도 분지내(盆地內) 곳곳에 역대 홍수로 퇴적 조성(堆積 造成)된 크고 자근 구릉(丘陵)이 여러 개 있었고 그 밑은 거의 물고랑이었다. 남대문(숭례문) 조영(造營) 때에 성문외 곳곳에 연호(沿湖)가 있었다는 기록과 정도(定都) 제1차로 성내천거공사를 한 기록이 이를 말한다.

     

    그리고 수천년(數千年) 동안 한강(漢江)의 토사퇴적(土砂堆積)으로 이루어진 뚝도(纛島)나 전곶평(箭串坪)의 높이에다 청계천을 동류(東流)케 함으로서 큰 비가 올 때마다 성내(城內)에 물이 고여 피해를 입고 있으니, 황토현(黃土峴, 황토마루)를 제치고 봉래동 방면(蓬來洞 方面)으로 운하(運河)를 만들고, 뚝도(纛島)에서 한강수(漢江水)를 도입(導入)시켜 저지대(低地帶)인 용산(龍山)쪽으로 상류(常流)하게 함이 현재 경성부(京城府)에서 시공중(施工中)에 있는 전면 복개공사(全面 覆蓋工事)보다 용이하고 비용이 절감될 것이다.

     

    (3) 청계천은 '역류(逆流)'라는 주장

    한양(漢陽)에 관한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을 처음으로 내세운 고려(高麗) 때의 도선(道詵)을 비롯한 승려(僧侶)나 술사(術士)들의 '명당지설(明堂之說)'을 따른다 하더라도, 그들이 말하는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에 안산(案山, 남산)'을 바라보는 사이의 '입수(入水)라 하는 명당조건(明堂條件)이, 현재의 청계천은 입수(入水)가 아니라 출수(出水)가 되어, 그들이 예언한 '삼십육국내조(三十六國來朝)'는커녕 역대(歷代)로 외세(外勢)의 억압과 침략만을 받아오지 않았는가. 그래서 운하(運河)를 만들어 서류(西流)하게 하면 그들이 말하는 명당조건(明堂條件)이 갖추어질 것이다.

     

    이상 고정만조선생(故鄭萬朝先生)의 청계천에 관한 지론(持論)과 제창(提唱)은 당시 독일유학(獨逸留學)에서 귀국(歸國)한 윤치형(尹治衡), 김필수(金弼洙) 등에 의해서 불란서 파리의 세느강처럼 청계천을 미화(美化)시키자는데까지 비화(飛化)되어 한대 경성부(京城府)의 전면복개계획(全面覆蓋計劃)을 반대하는 소리가 높았다.

     

    뿐만 아니라 1945년 광복이 되자 이미 청장년(靑壯年)이 된 정선생(鄭先生)의 제자(弟子)들이 미군정청(美軍政廳)과 서울시장(市長) 이범승(李範昇)을 찾아가서 청계천 운하계획(運河計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 건의는 광복된 감격에 곁들인 꿈같은 일종의 동경(憧憬)에 지나지 않고, 당시 서울시로서는 이 건의가 엄두도 못낼 계획이었다. 참고로 건의문 내용(建議文 內容)을 요약(要約)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왕십리(往十里)에서 전관평(箭串坪)과 뚝도(纛島)에 이르는 하천(河川)은 역대홍수(歷代洪水)에 하상(河床)이 토사퇴적(土砂堆積)으로 높아져 성내(城內)의 배수(排水)가 원활(圓滑)하지 못하여 수해(水害)를 면(免)치 못하였다. 이 원인(原因)을 성벽하(城壁下)의 '오간수문(五間水門)'에 있다 하여, 1907년 한성부 토목국(漢城府 土木局, 局長 劉猛)에서 도민(都民)의 반대여론(反對與論)에도 불구하고 '오간수문(五間水門)'을 파훼(破毁)하였다. 하나 평균(平均) 3년마다 다가오는 대우홍수(大雨洪水)는 청계천의 수일(水溢)으로 성내(城內)의 피해(被害)는 여전(如前)하였다. 이것은 청계천 하류(下流)의 하상(河床)과 상류지점(上流地點)인 황토현(黃土峴)의 높이가 팽팽(均)한데에 원인(原因)이 있으니, 소광통교(小廣通橋)에서 다동(茶洞)-남대문로(南大門路)-봉래동(蓬來洞)-원정(元町, 元曉路)으로 운하(運河)를 개설(開設)하고, 뚝도방면(纛島方面)에서 한강수(漢江水)를 도입(導入), 저지대(低地帶)로 서향상류(西向常流)하게 하고, 청계천 연변(沿邊)을 시민(市民)의 공원(公園)으로 미화(美化)시켜, 소유람선(小遊覽船)이 도심(都心)을 왕래(往來)할 수 있도록 이에 건의(建議)한다."

     

    이 건의서(建議書)에 연명날인(連名捺印)한 사람은 김웅수(金雄洙, 積善洞 出生, 日大卒, 農場經營), 심효섭(沈孝燮, 仁寺洞 出生, 城大卒, 博物書館 主人), 권영대(權寧大, 體府洞 出生, 早大卒, 地主), 노성석(盧聖錫, 仁事洞 出生, 城大卒, 博文書館 主人), 한상준(韓相駿, 雲泥洞 出生, 日本中大卒, 印刷業), 주윤(朱潤, 宮井洞 出生, 法大卒, 當時 公務員)으로서 모두 고정만조선생(故鄭萬朝先生)의 제자(弟子)들이었다.

     

    [해설] 위의 자료를 살펴보면 결국 이경재 선생의 <서울정도육백년> (2003) 시리즈에 수록된 것은 <향토서울> 제44호에서 소개된 주윤 선생의 글을 그대로 차용한 것으로 봐도 무방하고, 다만 "청계천의 서류(西流)를 주창했던 정만조(鄭萬朝)의 논지는 이미 <매일신보> 1914년 10월 24일자에 수록된 이왕직 차관 '코미야 미호마츠(小宮三保松)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그 자신의 '독창적'인 주장이었는지의 여부는 따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즉, 정만조의 주창을 코미야 차관이 먼저 신문을 통해 공표한 것인지, 아니면 코미야의 아이디어를 정만조가 더 심화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므로, 이 부분을 좀 더 가려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물론 정만조의 경륜과 이력에 비추어 보건대, 코미야와 거의 동시대에 교분이 많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청계천 역류계획에 대한 아이디어나 사료 등은 정만조에 의해 제공되었을 가능성은 매무 높다고 하겠다.

     

    정리 : 2006.1.7, 이순우, http://cafe.daum.net/distorted)

     

    진도 유배시절, 무정 정만조이 의제 허백련에게 학문의 기초를 가르쳤다. 의재(毅齋)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지조있고 꼬장꼬장한 20세기 최후의 선비, 정인보

     

                       

    정인보(鄭寅普)는 1893년 지금의 회현동 일대인 장흥방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인 동해 정씨는 조선에서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명문가였다. 그의 증조부 정원용(鄭元容)은 고종 때까지 30년 동안 정승을 지낸 인물이었으니 그의 가문이 누린 영화는 실로 대단했다. 그러나 정인보의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작은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 그의 아버지인 정은조 혼자 모든 책임을 떠맡아야 했고, 가세는 기울기 시작하여 정인보의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도와야만 했다. 정인보의 집안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전답이 적지 않게 남아있었지만, 서간도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모두 팔아서 송금한 이후에는 셋방에 얹혀서 살림을 꾸려나갔다.

     

    그러한 와중에도 정인보는 학문에 정진하여 강화학파의 이건방(李建芳)에게 수학하였다. 강화학파는 양명학 계통이었는데, 실학을 강조하는 정인보의 사상은 여기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또한 상해를 왕래하면서 홍명희(洪命熹), 이광수(李光洙), 박은식(朴殷植) 등 당대의 명사들에게 가르침을 받기도 하였다. 1922년 연희전문학교의 강사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국학에 매진하기 시작한다.


    “내친구육당이이제죽었구나”
    그는 뛰어난 학식과 재주로 금방 유명인사가 되었기에 일제의 유혹이 끊이질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인보는 끝끝내 그들에게 협력하지 않았다.


    한번은 그의 아저씨뻘 되는 정만조(鄭萬朝)가 일제가 성균관을 개편하여 만든 경학원의 대제학이 되어 만나는 사람마다 늘 자랑을 하고 다녔다.
    “동래 정씨에서 대제학이 된 것은 내가 둘째이다.”

    이를 들은 정인보는 아저씨뻘 되는 이에게 면박을 주었다.
    “나는 그런 대제학 열 개 주어도 안 합니다.”

    또 정만조의 동생인 중추원(일제의 총독자문기구) 참의 정병조(鄭丙朝)가 동래에 있는 시조묘의 부지를 일제에 국립공원으로 팔려고 공작을 꾸며 문중회의에서 통과된 적이 있었다. 정인보는 문중 어른들을 찾아 설득에 나섰다.


    “일본은 나라를 뺏어간 것도 모자라 이제 우리의 조상들의 무덤까지 앗아가려 하는데 어찌 이를 허락할 수 있습니까? 절대로 안 됩니다.”


    1940년에 들어 일제가 마지막 발악을 준비하면서 수많은 지식인들을 회유하고 협박하자 많은 사람들이 친일파로 돌아섰다. 특히 그의 절친한 친구인 최남선(崔南善)이 노골적으로 친일행각을 벌이자 정인보는 매우 실망한 채 상복을 입고 최남선의 집을 찾아갔다.


    “내 친구 육당(최남선의 호)이 이제 죽었구나!”
    이렇게 외치면서 그의 집 앞에서 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최남선이 반성하는 듯 찾아오자 이를 축하하며 설렁탕을 사서 대접하였다.

     

    그러나 그 후 최남선의 친일행각은 계속되었고, 하루는 최남선이 정인보의 집에 들렀으나 정인보가 그를 깨끗이 무시하였다.
    “혼을 판 학자에게는 냉수 한 그릇도 아까운 법일세.”

    정인보는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글을 써주곤 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 인사에게는 절대 글을 써주지 않았다. 한번은 부탁하러 온 사람이 꿀 한 병을 사와서 놓고 가자 대문간에 매달아놓고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 후에 부탁한 사람이 비문을 찾으러 오자 그는 매달려있는 꿀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네 꿀은 저기 걸려 있네. 가져가게.”

    결국 일제가 패망하고 해방이 되었을 때, 그는 절대 변절하지 않았던 지조를 인정받아 남조선민주의원을 맡기도 했고, 전조선문필가협회장에 추대되기도 했다. 또한 1948년 8월에는 대한민국 건국과 동시에 감찰위원장의 직위를 맡기도 하였다. 그의 강직함을 나라 전체가 인정한 것이었다.


    반면 일제시대 친일 행각을 벌였던 최남선이 반민특위에서 조사를 받는 등 고초를 겪고 있을 때 정인보는 그를 변호해주었다.
    “내가 일제 헌병에 쫓겨 그의 집에 숨어들었는데, 육당이 마다하거나 고발하지 않고 나를 기꺼이 숨겨주었던 적이 있소이다.”

    비록 변절했지만 최남선도 그의 친구였기에 그를 기꺼이 변호해준 것이다. 그러나 변호는 해주었어도 끝내 그와는 상종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인보는 민족이 수난을 겪던 일제시대에 총이 아닌 문필을 무기로 삼아 민족의 부흥을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다. 그는 한문학, 국문학, 국사학 등 국학의 전반적인 면에서 광범위한 연구를 거듭했고, 특히 실학에 주목하여 그들의 저작을 수집하고 간행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를 통해 그는 일제가 이 땅의 역사를 식민사관으로 물들이는 것을 저지하고 민족의 혼을 되살리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 회갑도 되기 전인 6.25 때 납북되어 바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일제시대에는 지식인들이 민족주의 우파를 표방하며 자치제, 참정권 요구 등 일제와 타협적 노선을 걷기도 하고 야합하기도 하는 것이 일반적인 학계의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비타협적으로 일제에 항거하였고 민족의 지식인으로의 지조를 지켰다.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를 그는 삶을 통해 보여주었다.

    ▲ 조선의 마지막 유배자인 무정 정만조 선생이 머물렀던 행랑채 ⓒ 조종안    

                                                                    

        ■   이이화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 참고 문헌

    鄭萬朝, 茂亭遺稿.(책?, 논문?) 朝鮮史偏修會, {朝鮮史偏修事業槪要}.
    國史編纂委員會刊, {日帝侵略下 韓國三十六年史}, 探求堂.

    『고종실록(高宗實錄)』

  • 『순종실록(純宗實錄)』
  • 『고종기사(高宗紀事)』
  • 『고종시대사』 2∼6(국사편찬위원회, 1968∼1972)
  • 『일제침략하 한국삼십육년사』 1∼11(국사편찬위원회, 1966∼1976)
  • http://www.shinjongwoo.co.kr/name/ja/jaf/ehdfo/eh-25.html
  •  

     

    학술

    • 정만조 친일유림의 대표자
    • 어윤적 유림 친일파의 앞잡이
    • 이능화 민족사 왜곡과 식민사학 확립의 주도자
    • 최남선 반민특위 법정에 선 독립선언서 기초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