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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예속경제화의 첨병 한상룡(韓相龍)

草霧 2013. 9. 12. 18:13

 

 

 

경    제

  • 한상룡 식민지 예속경제화의 첨병
  • 장직상 경북지방 최고의 친일 부호
  • 김갑순 역대 조선총독 열전각을 건축한 공주 갑부
  • 박영철 다채로운 이력의 전천후 친일파
  • 문명기 애국옹(愛國翁) 칭호 받은 친일 광신도
  • 박흥식 반민특위의 구속 1호였던 매판자본가의 전형
  • 김연수 민족자본가의 허상과 친일 예속자본가의 실상
  • 박승직 매판 상인자본가의 전형
  • 현준호 실력양성론자에서 친일파로 변신한 금융자본가
  • 문재철 암태도 소작쟁의 야기한 친일 거대지주

 

 

한상룡(韓相龍, 1880~1947)

 

 

 

식민지 예속경제화의 첨병

 

창씨개명 주창의 <선구자>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지 한 달 후인 4월에 한상룡은 우쓰노미야(宇都宮) 조선군사령관을 용산 관저로 방문하여 <만세소동의 선후책>을 논하고 내선 동화 정책으로 12개조 희망사항을 건의하였다.

 

이 중의 하나는 조선인에게도 일본인과 같은 성씨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건의가 포함되어 있었다.

 

1920년대에 문명기*가 가미가제 특공대를 주창하였던 것과같이 조선인에 의해 일찍이 창씨개명 제도의 시행이 주장되었던 것이다.

 

1940년 2월 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창씨개명이 시행된 것에 대하여 한상룡은 자신의 회고록에 <이제 그 실현을 보게 된 것은 매우 유쾌한 일>이라고적었다.(韓翼敎 編, {韓相龍君を語る}, 185면)

 

그러나 이 해 8월에 창씨개명이 완료된 이후에도 그는 자신의 이러한 주장과는 달리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지 않았다.

 

 1939년 12월 12일경성일보에 실린 춘원 이광수의 창씨 개명 권고 칼럼

 

이는 일제의 신임이 그만큼 두터웠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창씨개명은 일제에 의해 강요된 것이 아니라 조선인 스스로의 자발적 의사에 의해 실시된것이라고 일제가 선전하는 데 좋은 표본이 되었다.

 

박흥식*과 마찬가지로 대외 선전의 유용한 수단으로서 한상룡은 자기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할은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고 평생을 실업계에서 활동하겠다던 그의 평생의 신조와 모순되는 것이었다.

 

 1940년 경성부청 민원국 호적과에 찾아가 창씨개명 등록을 하는 경성부(서울시) 주민들

 

조선과 중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 과정에서 <재계의 첨병> 역할을 수행하였던 시부자와(澁澤榮一)를 본받아 그는 자신이 식민지에서 제2의 시부자와가 되고자 하였다.

 

시부자와가 40여 년 동안을 일본 제일은행의 최고 책임자로서 재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듯이, 한상룡은 한성은행을 기반으로 자신이 조선에서 그와 같이 되고자 원하였지만, 그것은 식민지에서 실현될 수 없는 모순을 지니고 있었다. 이 점은 자신이 평생을 바쳤던 한성은행의 경우를 살펴보더라도 쉽게 드러난다.

 

 

한성은행의 설립과 예속화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사(현재는 철거되었다.)

 

한상룡은 1880년 11월 14일 경성부 수표동에서 규장각 부제학 한관수(韓觀洙)의 3남으로 태어났다.

 

17세 되던 1896년에 관립 외국어학교를다니다가 2년 후인 1898년에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3년 정도 생활하였다.

 

강제 <병합>을 주동하였던 매국노 이완용*, 이윤용이 그의 외숙이었으므로,당시 이들이 군부대신, 외부대신 등의 고위 관직에 있었던 것을 배경으로하여 일본에 체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일본의 명사들과 교제할 기회가 많았고, 귀국한 후에도 일본공사관을 드나들면서 많은 일본인들과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였다.

 

조흥은행 본점그러다가 그는 1903년 12월에 설립된 한성은행의 총무로 부임하면서, 이은행을 실질적으로 경영하게 된다.

 

원래 이 은행은 관료이자 재계의 실력자였던 김종한*이 경영하다가 유명무실한 상태에 있었던 것인데,러시아의 차관 제공 요구를 좌절시키기 위한 일본측의 음모에 의해 고종의 종형인 이재완(李載完)을 내세워 설립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애초에 일제의 침략을 돕는다는 의도에 맞게 재편되었던 이 은행은 시부자와가 경영하는 일본 제일은행을 본따 정관을 만들었으며, 신식 부기와 아울러 출납,예금,장부기입 방식 등에서 <근대적> 방식을 채택하였다. 

 

우리나라최초의 <근대적> 은행제도는 일본의 영향하에서 성립되었다고 말할 수있는데, 이러한 점에서 그것은 일제에 대한 예속성의 단초를 처음부터 배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한성은행의 성장과 발전도 이러한 예속성을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다.

 

한성은행의 초기 운영자금은 전적으로 일본 제일은행에서 조달된 것이었으며,재정고문이었던 메가다(目賀田種太郞)가 식민지 재정정리 작업의 일환으로 실시한 백동화 구입 업무에도 깊숙이 관여하였다.

 

1910년 9월에 한상룡은 한성은행의 전무취체역으로 취임하였다. 취임과 동시에 그는 일제에 로비를하여 <합방유공자>에게 일제가 준 이른바 <은사공채>(恩賜公債)를 한성은행의 자본금으로 흡수하였다. 한성은행이 <조선귀족들의 은행>이라는 세간의 인식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상룡은 주권의 양도를 대가로 한 막대한 액수의 <정치 자금>을 일제의 도움을 얻어 자신의 은행에 예치하는데 성공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한성은행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당시 국내최대 규모의 은행으로 성장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고 광범위한 항일운동이 전개되면서 한성은행은 주요한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은행장 이윤용은 이완용의 형이고 전무는 그 조카인 한상룡이었으며, 주식은 강제 <병합>의<은사>공채로써 충당되었기 때문에 배척의 첫번째 대상으로서의 자리를 면할수 없었던 것이다.

 

은행 인출이 급격히 줄어들었으며 이 때문에 한성은행은 약 2주 간의 지불유예(모라토리엄)를 당하였다. 이러한 위기하에서 일제에 대한 의존성이 더욱 심화되면서 한성은행의 친일 예속성 또한 더욱 강화되어갔다.

 

이러한 예속화의 과정에서 한상룡은 일제의 신임에 힘입어 1923년 1월 사임한 이윤용의 뒤를 이어 한성은행 두취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1923년 관동(關東)대지진의 여파와 연이은 영업 부진, 경영 악화로 한성은행은 1924년 8월 이래 조선총독부에 의해 정리 대상 은행 중의 하나로 지목되었다.

 

식민지에서 자본의 흐름을 일제가 관장하고 있었던 만큼, 사실 한성은행의 영업 부진과 경영 악화는 일제가 의도적으로 방치하거나 조장한 측면도 있었다. 1926년2월 조선총독부는 조선은행 부산지점장이었던 츠츠미(堤永市)를 한성은행의 전무취체역으로 앉힘으로써 한성은행을 직접 장악하려는 의도를 구체화하였다.

 

이에 따라 1928년 3월 조선총독부의 지휘하에 한성은행의정리가 단행됨으로써, 한성은행은 조선식산은행의 지배하에 들어 가게되었다.

 

이와 같이 한성은행은 일제가 강제 <병합>의 대가로 친일파들에게 준 공채금으로 발전의 단초를 마련하였으며, 일제에 대한 예속성을 강화함으로써 치열한 자본 경쟁의 한가운데에서 일정 기간 생존할 수 있었지만 결국은 일제자본에 의해 강탈당하고 말았다.

 

따라서 이 시기 한성은행의 역사는 곧예속적 토착자본의 성장 및 그것의 한계와 좌절의 역사라고 할 수도 있다.

 

 

 1940년에 출간된 한상룡 자서전 격의 책인, '창남수장 (暢楠壽章)'에도 이 집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사진도 실려있다

 

재계와 실업계의 식민지적 재편성

가회동 한상룡 저택에서 사이토 하루코(齋藤春子) 총독 부인과 함께 한 한국인 고관 부인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한상룡은 식민지의 경제 제도와 기구들의 설립을 주도하였다. 한성은행의 경력을 바탕으로 재계와 실업계를 식민지적으로 재편성하는 데 중심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1905년 12월에는 조진태,백완혁과 함께 한성수형(手形:어음)조합의 평의원으로, 1906년 5월에는한호(漢湖) 농공은행의 설립위원으로 선임되어 그 설립에 중심적 역할을하였다. 이러한 경력을 바탕으로 1907년 6월에 경성상업회의소(조선인측) 정의원에 선임되었다가 그 직후에 회두(會頭)로까지 추대되었다.

 

1908년9월에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이 발표되면서 33인의 조선인 설립위원 중의1인으로 선임되었다. 조선인 설립위원의 대부분은 <일본어를 모르는 완고한노인들>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한상룡이 실무를 전담하다시피 하였으며, 그 해12월에는 동척의 이사로 선임되면서 동시에 조사부장을 겸임하였다.

 

1909년7월 한국중앙은행 설립에 관한 한일간의 협정이 이루어지면서 한국측설립위원으로 그와 백완혁 2명이 임명되었다. 1910년 5월에는 한국은행 총재,제일은행 경성지점 지배인과 함께 은행집회소 및 수형교환소의 규칙을 제정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그는 한일<합병> 직전에 실업계에서의 <공로>를인정받아 한국 정부로부터 훈3등 팔괘장을 수여받았으며, 합방 후인 1913년5월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 <병합> 기념장을 받았다.

 

합방 이후에도 그는 경제와 산업에 관련된 식민지 정치기구들에 적극적으로참가하였다. 예컨대 1915년에는 조선인과 일본인으로 이분화되어 있었던 상업회의소의 통폐합을 주도하였다.

 

통합 과정에서 한상룡의 역할은 일제를 대신하여 조선인 상공인들의 반발을 무마하는 것이었는데, 통합된 경성 상업회의소의 평의원 겸 상의원(常議員)으로 재직하다가 1924년 1월운수부장, 1925년 12월 부회두를 역임하였다.

 

1915년 10월에는조선중앙농회가 창립되면서 평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921년 9월 조선농회가설립되자 이사가 되었으며 곧이어 부회장으로 추천되었다가 1928년 4월특별회원이 되었다.

 

1930년대 이후 그는 조선소작령의 제정이나 농촌진흥운동에 적극적으로참여하거나, 전시하 물가와 임금, 경제통제 등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밖에도 금융조합연합회나 중앙무진회사의 운영 등에 참가하였다. 이러한금융제도와 기관들의 설립과 운영의 주도권은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었기때문에, 이 경우 그의 역할은 조선인측을 대표하여 형식적으로 참여하여 의견을 개진함으로써 식민지에서 민족문제를 호도하기 위한 일제의 정책에 효율적으로 봉사하는 것이었다.

 

20세기 대한민국의 증권들

 

 왼쪽 : 암울했던 시기의 '동양 척식 주식회사'
1908년 영국의 동인도 회사를 본따 만든 수탈기관이다. 대한제국의 토지와 금융을 착취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대표적인 친일파 중 1명인 민영기(부총재), 한상룡(이사)이 간부로 있었음.

 

동양척식주식회사

 

▲ 가운데 : '조선 식산 은행' / 일본 / 1920년 / 주권
일제기업의 산업개발자금지원을 위해 설립한 특수은행으로 해방 후 1952년 '한국 산업은행' 에 흡수되었다.

 

▲ 오른쪽 : 중일전쟁 국고채권 / 일본 / 1942 / 채권
전비마련을 목적으로 일본에서 발행한 채권. JAPAN 우편국에서 매출을 담당하였다고 적혀 있음.

      

▼ 좌측 : 1942년에 전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일본 권업은행' 이 발행한 '전시 저축채권' 이다. 일부 생각 없는 정부 고위 관계자나 개념 상실한 인간들이 '대동아 전쟁' 이라고 말하고는 하는데, 이는 식민사관을 그대로 반영한 잘못된 표현이다. '아시아-태평양 전쟁' 이 옳은 말.

 

조선식산은행, 일본권업은행

 

▲ 중간 : 조선식산은행 채권과 복표
일본이 아시아-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전비마련을 위해 발행한 채권. 매출은 우편국에서 담당했지만 실제로는 강매되었다고 태그가 붙어있음.

 

▲ 우측 상단 : 아시아-태평양 전쟁 할인 국고 채권/ 1942

 

 ▲ 군용수표 / 일본 / 1940 / 수표
군표는 전쟁 지역이나 점령지에서 군대가 사용하는 통화 대용 어음의 일종이다. 군용수표, 군용표라고도 한다.

 

 

총독부 권력과 예속경제 사이에서 브로커로 활약

한상룡의 또 다른 활동 영역으로 들 수 있는 것은 많은 기업과 회사 등의 설립을 주도하고 그 경영에 참여했던 사실일 것이다. 한성은행에서의 지위를바탕으로 1910년대에 그는 실업계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회사나 공장을 설립하려고 계획하던 조선인은, 식민지와 일본의 관계(官界), 정계, 재계등의 영향력있는 많은 사람들과 폭넓은 교제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한상룡을 통할 필요가 있었다. 일본인의 경우에는 식민지에서 민족차별이 엄격하였던 현실을 호도하기 위한 정책적 필요에서, 혹은 조선으로 진출한 일본인의 경우식민지 실정을 잘 몰랐으므로 그 안내를 위한 실제적 동기에서 한상룡을 추천하였다.

 

이러저러한 연고와 필요에 의해 1910년대의 수많은 기업과 공장들이 설립되는 데 그는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다. 1910~20년대에 그는철도, 해운, 무역 등과 아울러 제사, 방직, 직물이나 삼림, 제당과 같은농업원료의 가공 부문 등을 망라하여 무려 30여 개의 회사 설립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다.

 

1930년대에는 조선제련회사나 북선제지, 조선공작회사, 동화산업 등 만주진출과 군수공업 부문에서 다수의 기업들의 설립에 관여하였다. 그러나1930년대에 그는 형식적으로 많은 기업과 회사의 설립 및 운영에 관여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실권을 전혀 가지지 못한 명목상의 지위에 불과한 것이었다.

 

금융계에서 자신의 고유한 기반을 가지지 못했던 사정을 배경으로 이 시기 실업계에서 그의 활동은 전시기에 비해 훨씬 미미했으며,감사역이나 상담역, 취체역 회장 등 실권이 없는 명예직을 차지하는 데 그칠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선에 신설된 사업회사로서 그가 발기인으로참여하지 않은 것이 거의 없다"는 평가는 외형적인 것이고, 식민지 예속 자본가의 실상은 이와 같이 허울에 불과한 것이었다.({朝鮮功勞者銘監},69면)

 

이러한 점에서 그는 이 시기 자본가 계급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지만, 그것은 스스로의 자본을 가지고 경영하는 형태라기보다는 조선으로 진출한 일본인 자본에 의한 회사나 공장의 설립을 안내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으며,이보다 비중은 적었지만 총독부 권력이나 일본 본토에 조선인의 기업 설립을 주선하는 역할을 하였다.

 

 "한상룡의 경력은 반도 재계사(財界史)의축도(縮圖)"({韓相龍君を語る}, 501면)라는 말에서 보듯이 그는 제국주의 권력과 식민지 예속경제 사이에서 일종의 브로커 역할을 했던 정상배였던 것이다. 자신이 직접 자본의 축적 기능을 수행했다기 보다는 그것의 원할한 기능을 보조하고 보장하는 역할을 수행한 기능적 자본가로 분류할 수 있는것이다.

 

 

일제 침략자들의 기념사업으로 분주했던 나날

5081930년대로 들어오면서 그의 친일 행각은 보다 노골화되었다. 전시체제로 이행한 이유도 있었지만, 금융계에서의 그의 기반 자체가 취약했기 때문에 이를 보상하기 위해서는 일제에 더욱 예속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가장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조선에 관련된 주요 일본인들의 동상이나 기념비를 건립하거나 기념사업 등을 한상룡이 주도하였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메가다의동상 건립을 적극 추진하여 1929년 10월 파고다공원에서 제막식을 가졌으며1935년 6월에는 메가다의 전기편찬회 발기인이 되었다.

 

1929년 12월에는이토(伊藤博文) 기념회의 조선측 발기인 총대를 맡았다. 1933년 2월에는자신이 가장 존경한다는 시부자와의 기념비 건립을 추진하였다. <도쿄에도 동상이 건립되었는데 조선에도 영구기념으로 무언가 존치하고 싶다는 희망을피력>하고 그의 송덕비 건립을 도쿄에 가서 협의한 다음, 서울로 돌아 와서 경무국장과 내무국장 등을 만나 기념비 건립안을 상의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기념비 건립회를 조직하여 12월 장충단에서 기념비 제막식을가졌는데, 이는 전적으로 한상룡의 발의와 주동에 의한 것이었다.

 

1935년 5월에는 <조선 개화의 은인이자 일한 합병의 공로자>인데라우치(寺內正毅)의 동상 건설회 발기인 및 실행위원으로 위촉되었으며, 그활동을 통하여 총독부 청사의 홀 오른쪽에 그의 동상을 건립하였다. 

 

1936년2월 이른바 2,26 사건으로 사이토(齋藤實)가 사망하자 부민관에서 추도회를 개최하고 그 발기인이 되었으며, 1937년 5월에는 그를 위한 기념사업회 발기인으로 되었다. 1939년 3월에는 이 기념사업회의 이사로 선임되어 활동한결과, 4월에 총독부 청사의 홀 왼쪽에 그의 동상을 건립하였다.

 

1936년7월에는 도고(東鄕茂德) 원수 기념회 회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같은 해12월에는 러일전쟁 당시의 한국주재 일본공사인 하야시 동상제막식이 왜성대(倭城臺) 옛 총독관저에서 있었다. 동상 건립은 일본에서 온 유력자의 성금에 의한 것이었는데, <조선인측에 대해 아무런 통지가 없었던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 그는 나중에 약간의 성금을 내서 명부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1939년 6월에는 시모오카(下岡忠治) 전(前)정무총감 동상건립위원회부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이와 같이 그는 강제 <병합>을 주도하였던 메가다,하야시, 이토 뿐만 아니라 데라우치, 사이토 등의 역대 총독이나시모오카 정무총감 혹은 일본의 도고, 시부자와 등의 동상이나 기념비 등의 설립을 주도하거나 혹은 기념사업회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제국주의자와 식민주의자들의 <업적>을 영구히 보존하고 찬미하였다.

 

 

만주침략 이후의 친일 활약상

 

▲경성방송국 전경. 안에는 조선방송협회 마크     ©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이처럼 일제의 충실한 식민지 지배정책에 충실했던 조선방송협회 임원 중 조선인으로 최고위층인 상임이사에 오른 두 인물이 바로 인촌 김성수의 친동생인 김연수와 이완용의 외조카 한상룡(1880~?)이었다. “KBS는 1927년 경성방송국에서 라디오 방송(호출 부호 JODK)을 송출하기 시작해 해방 후 1948년 국영방송인 서울중앙방송국으로 재출범했다. 1961년 TV 방송을 시작했으며 1973년 한국방송공사로 공영방송 체제를 갖춰 오늘에 이르고 있다.” (KBS 누리집 중에서)

 

일본의 만주침략 이후 한상룡은 군부와 관련된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동 양상을 보였다. 예컨대 1933년 4월에 경성국방의회 발기인으로 참가하였으며 1934년4월에는 조선국방의회 연합회 설립 준비위원 및 감사로 위촉되었다.

 

1934년12월에는 조선국방 비행기 헌납회 고문으로 추대되었으며, 1935년 4월에는 해군협회 조선본부 창립위원을 맡았다. 만주침략이 있은 1937년 7월에 그는 관동군사령부 사무촉탁(칙임관 대우)으로 임명되어, 군사령부를 방문하고 조선실업 구락부 및 한상룡 개인의 명의로 국방헌금을 하였다.

 

이 시기 그는 경기도 군사후원연맹 부회장이자 경성 군사후원연맹 고문이었다. 1937년8월에는 애국금차회 발기인회 좌장을 맡아 애국금차회의 창립을 주도하였으며이어서 8월부터 9월에 걸쳐 조선 신궁 참집소(參集所)에서 국위선양,무운장구 기원제를 개최하였다. 동시에 그는 이 시기 시국연구회의 발기인 및 간사의책임을 맡았다.

 

1938년 1월 15일 <조선 2천만 민중의 열성에 응하여> 조선에 육군 특별지원병 제도를 설정한다는 일본 육군성의 발표가 있었다. 이로써일제는 침략전쟁에 조선인 청년을 강제 동원할 수 있는 첫발을 내디뎠다.

 

이듬해인 1939년 10월 조선육군 지원병 훈련소 출신의 전사자 2명에 대한 장례식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한상룡은 "전사자 유가족에게는통석(痛惜)의 아픔이지만 반도인으로 출정하여 전사한 것은 최초이고 그명예는 길이 찬양될 것"이라고 뇌까렸다.

 

1938년 6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준비회의 연맹이사, 7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 경기도연맹 참여로 위촉되었다. 1939년 4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의 규약 개정에 따라 이사 및 평의원이 되었다가, 1940년 10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이 국민총력 조선연맹으로 개칭되면서 이사로서 활동하였다. 

 

이밖에도 그는 1938년 3월에는 경기도 방공위원회 위원을, 같은 해 9월에는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맹지부 평의원 및 조선연합청년단 이사를 역임하였다.

 

1939년 2월에는 경성부 육군지원자 후원회 평의원 및 이사로 추천되었으며,4월에는 조선호국신사 봉찬회(奉贊會) 발기인 및 조선중앙방공위원회임시위원이 되었다.

 

1939년 8월에는 조선방공협회 고문으로 선임되었으며 1940년 5월에는 군사후원회 조선본부 평의원으로 위촉되었다. 1940년 7월에는 재단법인 기계화 국방협회 조선본부 창립위원 및 고문이 되었으며, 종전 막바지인 1945년 1월에는 반도무운현창회(半島武運顯彰會) 위원이었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한 이후 한상룡은 각지를 순례하면서 일제의 침략전쟁을 적극 옹호하고, 강연이나 담화, 방송 등을 통하여 <시국>에 관한선전을 하였다.

 

예컨대 일제의 만주침략 1년 후인 1932년 9월 만주사변 1주년 기념 강연회에서 한상룡은 <시국과 만주>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일본과 지나의 충돌의 날은 결국은 동양 영구의 평화기념일>이 될것이라고 하여 일제의 만주침략을 호도하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경성일보 주최로 부민관에서 열린시국 강연회에서 <시국하 반도인의 임무>라는 연제로 강연하였으며, 이어서 며칠 후에는 중추원 파견의 형식으로 경성공회당과 인천공회당에서 각각 시국강연을 하였다.

 

몇 달 후인 1937년 9월에는 이승우*, 이돈화(李敦化)와함께 함흥 제2보통학교 강당, 흥남보통학교, 신흥군의 보통학교 등지를 순례하면서 공개 시국강연을 하였다. 1938년 10월에는 인천과 안양 등지에서 국민정신총동원 강화에 관한 강연을 하였으며 이어서 같은 달 김해, 통영,안동, 상주, 진주 등지를 순례하면서 시국강연을 하였다.

 

1939년 6월에는 총독부 도서관에서 <시국잡감>(時局雜感)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고,중추원 참의들과 함께 육군지원병훈련소에 가서 지원병들에 대한 격려 강연을하였다. 임전보국단 결단 이전인 1941년 10월에는 각 도를 순회하면서강연하였으며, 1942년 5월에는 징병제 실시를 앞두고 기념 강연을 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조선에 징병제를 실시하려는 일제의 사전 여론 조성작업에 민간인 차원에서 적극 참여하였다. 이 해 10월에도 그는 <광영의 징병제를 앞두고>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1943년에 징병제가 실시되자, 그는 <훌륭한 군인이 되자> 는 글에서 "반도에불타는 애국심과 적성(赤誠)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약진(躍進)반도의 통치사상에 획기적인 징병제도가 실시되었다. 금일 반도청년이 모두 폐하의고굉(股肱)이 되고 국가의 간성이 될 수 있는 날을 맞이하게 된 것은 무상의 영예로서 참으로 홍은(鴻恩)에 대하여 공구감격(恐懼感激)할 뿐"이라고 하여,조선인 청년들을 침략전쟁에 강제적으로 동원하는 데 앞장 섰다.

 

종전의 막바지인 1945년 5월에 그는 <천년의 운명이 판정될 흥망의 결전은 금후>라는제목으로 담화를 발표하였다.

 

 

경제침탈에 빌붙은 정상배로 독보적 입지 구축 

이와 같이 한상룡은 금세기 초반 일본 제국주의 침략기에서 시작하여  식민지자본주의가 확립되기까지 40여 년 동안 재계와 실업계를 대표한 중심인물이었다.

 

시부자와를 비롯한 일본 재계의 실력자들은 식민 침략의 필요에서 한상룡에 대하여 일종의 후견인 역할을 하였으며, 조선총독부의 총독이나 고위 관료, 조선군사령관 등의 <신임>을 바탕으로 그는 서울과 도쿄를 오가면서 권력과 밀착한 정상배로서의 독보적 입지를 40여 년에 걸쳐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친일 예속성을 기반으로 그는 한성은행을 자신이 맡아 경영하였으며 조선에 수많은 기업과 회사, 공장들을 설립하였다. 만일에친일이라는 <오명>을 그에게서 잠정적으로 거두어 들인다면, 그는 이 시기 가장 활발하게 근대화를 추진한 대표적인 인물로 우리에게 기억될 수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활동과 생애에 내재한 동기이다.

 

일생일업을 신조로 그가 한성은행을 경영하고 수많은 기업과 회사들의 설립에 관여한 근본 동기는 무엇인가? 식민지 자본가 계급의 의사를 집약하고 안내하는 역할이 가지는 대의와 공공의 명분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혹시라도 민족적 근거를 갖는 경제 발전의 전망이나 혹은 자립적 민족경제의 구상에 대한 최소한도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오산이다.

 

그의 모든 활동은 식민 지배체제를 강화함으로써 동족인 조선 민중을 수탈하고, 일제 자본의 지속적인 이익을 보장하며 제국주의 전쟁과 침략을 방조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1930년대 이후 일제의 대륙 침략에 편승하여 <만주에서 조선인의 권익 균점>을 주장하였던것(南北滿洲を視察して, {韓相龍君を語る}, 576~596면) 정도를제외하고는 그의 모든 활동들에서 민족과 국가에 대한 인식은 전혀 찾아 볼수 없으며, 그에게 민족과 국가가 있다면 그것은 조선이 아니라 일본 민족이고 일본 제국이었다.

 

 

 

한상룡 식대로 표현하자면 근대화의 달성은 일본에 대한 철저한 예속과 굴종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었으며, 이는 민족성의 완전한 배제와 말살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맹목적인 근대화 지상주의로 발전할 수 있는 소지를 다분히 가지고 있었다. 

 

 

백인제 가옥이 아니라 한상룡 가옥이다

 

상룡은 식민지기 조선 재계의 거두였다. 동양척식주식회사, 한성은행,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 조선신탁주식회사 등의 금융업에서 활약하면서 각종 은행과 회사 300여개에 관여하여 당시 ‘조선의 시부사와 에이이치’라고 불렸다.

 

한성은행을 기반으로 식민지라는 상황과 각종 정치적 역학관계 속에서 식민지 조선 재계의 최대 포식자였으며 일제의 무단 통치에 극렬하게 가담하여 귀족 작위까지 받은 최악의 친일파 중 한 명이다.

 

이완용의 조카사위로 아마도 을사오적 다음으로 을사육적이 있다면 바로 한상룡 이었을 정도로 식민지 조선 경제의 최대 악덕 자본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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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재력을 알게 해주는 증거가 현재 북촌에 남아있는데 언제부터인지 이 가옥이 악질 친일파 한상룡 가옥에서 백인제 가옥으로 둔갑 해버렸다.

 

한상룡은 1906년 4월 재동으로 이사한 후 가옥 12채를 사들여 1913년 7월부터 이 집에서 산다.

 

신축건물은 조선 주택으로는 보기 드물게 일부가 2층으로 되어 있고, 일본식 방도 마련했다. 대지 907평에 건평은 110평으로, 경성 시가지를 내려다볼 수 있는 자리였다.

 

들리는 말로는 백두산의 목재를 가져왔다고 하지만, 당시 일제에 의해 경복궁이 철거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한상룡의 재력과 권력이라면 좋은 목재였던 경복궁의 목재를 가져다가 자기 집을 짓는데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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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완공한 그 해 10월 17일, 일본 천황이 신에게 곡식을 바치는 날인 ‘간나메사이(신상제)’를 맞아 데라우치 총독, 야마가타 정무총감, 고다마 총무국장, 후지타 부관, 이윤용 남작, 이완용 백작, 송병준 자작, 조중응 자작, 고영희 자작, 박제순 자작, 문영휘 자작, 한창수 남작, 그 밖의 실업가, 가까운 친척들을 새 집으로 초대하여 오찬을 함께하고 하루를 즐겁게 보냈다.

 

당시 데라우치 백작을 필두로 내빈의 휘호를 받았는데, 그 기념화첩은 지금도 가보로 간직하고 있단다. 개인의 집을 완공하는데 총독이 방문을 해서 휘호를 내렸다는 의미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또 1918년 5월27일, 하세가와 총독, 야마가타 정무총감, 기타 고관대작을 오게 해서 즐겁게 놀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후 이 집은 최선익의 민족 자본진영에 넘어갔고, 1944년 인제대 백병원 설립자인 백인제 박사가 사들이고, 그가 6.25전쟁 중 납북된 이후에는 후손들이 관리했다.

 

 문제는 친일파 한상룡 가옥이 1977년 서울시 민속자료 22호로 지정될 때 정확한 사료를 조사하지 않고 이후에 거주한 “백인제” 선생 가옥으로만 알려진 것이다. 즉 백인제 선생이 거주한 기간은 불과 몇 년인데 어째서 이 집이 한상룡 가옥이 아닌 “백인제 가옥” 인가. 친일파의 집을 문화재 이름으로 지정하기 곤란하다고 건축주의 이름을 바꾸는 것은 엄연한 역사왜곡이다.

 

 

- 박승직 : 박승직상점 주인(1925년 주식회사로 개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 방의석 : 함흥택시 사장, 공흥(共興)주식회사 사장, 북청전등(電燈) 사장, 북청금융조합장, 고사기관총 1대 헌납, 함남도회 의원, 중추원 참의
- 백완혁 : 한성농공은행 이사, 동양척식회사 설립위원 겸 특별위원, 대정실업친목회 발기인, 금융제도조사위원회 위원
- 예종석 : 조선지(紙)주식회사 사장, 조선제사주식회사 대표, 대정실업친목회 회장, 조선지원병제도제정축하회 발기인, 경성부회 의원
- 조진태 : 한성은행 감사, 동양척식회사 설립위원 및 감사, 조선식산은행 설립위원 및 상담역, 조선일보 초대 사장, 중추원 참의
- 최창학 : 삼성금광 사장, 매일신보 상무취체역,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국방헌금
- 한상룡 : 한성은행 두취(은행장), 국방헌금, 경성군사후원연맹 고문, 조선국방비행기헌납회 고문, 중추원 참의
- 현준호 : 호남은행 대표, 중추원 참의,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학병 권유 참가

 

 

 

                                     ■ 김경일(덕성여대 사회학과 교수) 

 

 

참고문헌 

한상룡, {內地及臺灣視察記}, 日韓印刷株式會社, 1916. 

佐佐木太平, {朝鮮の人物と事業}, 경성신문사, 1930. 

韓翼敎 편, {韓相龍君を語る}, 韓相龍還曆記念會, 1941. 

嶋元權, {朝鮮財界の人人}, 경성일보사, 1941. 

大島淸 加藤俊彦 大內力, {人物 日本資本主義}(제3권, {明治初期の企業家}),동경대학 출판회,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