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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 주범, 이주회(李周會, 1843∼1895 )

草霧 2013. 9. 4. 16:41

 

 

을미사변 관련자

1895년(고종 32) 10월 8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의 지휘 아래 일본군과 낭인(浪人)들이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한 사건. 일본이 3국간섭으로 랴오둥반도[遼東半島]를 포기하자 국제정세를 파악한 조선정부는 일본세력에서 벗어나고자 급격히 친러적 방향으로 기울었다  

  • 이주회 동학농민군 진압한 명성황후 시해 주범
  • 이두황 이토 히로부미의 총애 받은 친일 무관
  • 우범선 명성황후시해사건의 주동자
  • 이진호 일제식민통치에 앞장 선 친일관료의 전형

 

 

이주회(李周會, 1843∼1895 )

 

동학농민군 진압한 명성황후 시해 주범

 

 

 

1894년 동학농민군 토벌대의 일본군 선봉장으로 활약
1894년 군부협판

 

 

 

성대히 치러진 명성황후 시해주범 추도 법회

1928년 12월 19일, 동경에 있는 소시지(總持寺)라는 절에서 이주회 33주기 추도 법회가 성대히 열리고 있었다. 일본 최대의 우익단체인 흑룡회(黑龍會)의 주관 아래 도야마 미치루(頭山滿),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등 우익들과 명성황후 시해사건 관련자인 미우라 마스지로(三浦松二郞:주범 三浦梧樓의 아들), 자작 아다치 겐조(安達謙藏), 오사키 세이키치(大崎正吉), 호리구미 구마이치(掘口九萬二) 등과 그 외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 미즈노 렌타로(水野練太郞), 스기야마 시게마루(衫山茂丸) 등 내노라하는 조선 침략 관계자들이 대거 참가하고 있었다. 

 

 

 
▲ (큰 사진)용산 서룡사 국사대의 이주회 비석 제막식에 참석한 흑룡회 단원들. (오른쪽 아래)서룡사 국사대에 안장된 이주회의 묘.

 

이 추도식에서는 추도뿐만 아니라 묘비 건립과 유족에 대한 지원 문제를 결의하여 상당한 돈을 모금하기도 하였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에서 조선측 주모자로 지목되어 처형당한 대역죄인 이주회를 일본의 침략자들이 의인, 영웅 혹은 장군으로 표현하면서 성대히 추도식을 치러 주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이주회는 호가 남주(南洲), 자가 풍영(豊榮)으로 1843년 경기도 광주 산성리에서 태어났다. 무과를 거쳐서 오위장(五衛將)에 올랐고,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 함대를 물리치는 데 공로를 세워 대원군의 눈에 들어 그의 심복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그는 그 공로로 얼마 지나지 않아 연일현감(延日縣監, 6품)으로 승진하였고, 그 후 외무위원까지 올랐는데, 이 때 김옥균, 우범선* 등과 친교를 맺었다고 한다.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이주회는 아무 관련이 없으면서도 김옥균과의 친교로 화를 입을까 두려워 일본으로 도망쳤다(1885). 이 때부터 3년간 그는 도쿄 간다(神田) 묘진시(明神祠) 부근에서 와타나베(渡邊)라는 사람의 딸과 동거생활을 하면서, 그가 그린 서화를 여자가 밖에 내다 팔아 근근히 먹고 살았다고 한다.

 

일본 자객도 살리고 역사 왜곡까지 도왔다
명성황후 살해범으로 자백한 조선인 이주회의 실체 드러나

1895년 10월8일 새벽 5시쯤. 경복궁 광화문에서 어둠의 정적을 깨고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작전명 ‘여우 사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조선공사 미우라와 일본 자객 48명은 총성과 함께 일제히 황후의 거처인 건천궁에 난입했다. 이어서 궁녀들의 비명 소리가 들리고 끔찍한 살육이 시작되었다.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는 이렇게 잔인하게 살해된 후 시신은 불에 태워 버려졌다.

이 사건이 발생한 후 일본 자객들은 모두 본국으로 추방되었다. 그리고 3개월 후에 열린 일본 법정은 ‘증거 불충분’을 들어 이들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일국의 국모를 죽인 일본 자객들 중 처벌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일본에서 ‘애국지사’로 칭송받으며 승승장구했다.

일본 자객들은 어떻게 해서 무죄 판결을 받은 것일까. 명성황후가 살해된 후 조선에서는 이와 관련해 세 명의 조선인이 대역 죄인으로 체포되었다. 일본인에 고용되었던 평민 박선(당시 26세)과 한성부 친위대 부위 윤석우(당시 40세) 그리고 한성부 군부협판 이주회(당시 52세)가 그들이었다. 1895년 11월13일의 대한제국 관보를 보면 고등재판소는 이날 세 명에게 모반죄로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6일 후인 11월19일에 모두 교수형에 처한다. 당시 여러 기록에는 박선과 윤석우는 죽는 순간까지 범행 사실을 부인하고 눈물로 통곡했으나, 이주회는 “내가 황후를 살해했다”라고 끝까지 진범임을 주장했다.

순종대에 이르러 윤석우와 박선은 모반 혐의를 벗고 사면 복권되었다. 둘은 명성황후 사건의 또 다른 희생양이었던 것이다. 결국, 역사의 공식적인 기록에는 명성황후 살해 사건의 진범은 일본 자객이 아니라 ‘조선인’으로 기록되었다. 그가 바로 ‘이주회’였다. 일본 자객들이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던 것도 조선에서 진범이 잡혔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주회는 왜 명성황후를 살해한 진범이라고 자백한 것일까. 그는 누구이며 이 사건에 얼마나 관련되어 있었는지 의문이다. <시사저널>은 명성황후 살해 1백14주년을 앞두고 역사적 진실을 찾기 위해 ‘이주회’라는 인물을 집중 추적했다.

지난 1993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지은 ‘친일파 99인’ 이주회 편(강창일 배재대 교수·현 민주당 의원 지음)을 보면 그는 1843년 경기도 광주 산성리에서 태어났다. 무과를 거쳐 오위장에 올랐고,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를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워 대원군의 심복이 된다. 그리고 연일현감으로 승진했고, 외무위원 벼슬까지 탄탄대로를 걷는다. 이주회는 김옥균, 우범선 등과도 가깝게 지냈다.

1885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이주회는 화를 입을까 두려워 일본으로 도망쳤다. 그는 3년 동안 도쿄에서 머무르며 일본의 극우 세력들과 친교를 맺는다. 그리고 얼마 후에 사면되자 전남 순천 앞바다에 있는 금오도에 정착해 개간 사업을 벌였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면서 이주회는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동학군을 토벌하려 일본 전함 스쿠바가 순천에 들어오자 이주회는 일본군의 선봉장이 된다. 이때의 공로로 함장 구로오카가 이노우에 주한공사에게 천거하고, 다시 박영호 내무대신을 통해 지금의 국방부 차관에 해당하는 군부협판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그리고 1년 후 벌어진 명성황후 살해 사건에 가담한다.

강창일 민주당 의원은 “이주회는 명성황후가 죽어야 나라가 살고 조선과 일본의 협력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던 확신범이었다. 이주회는 또 명성황후 사건에 개입한 조선인들의 총책이었다. 그동안 우리 역사에서 ‘이주회’라는 인물에 대해 숨기다시피 했는데, 이제는 재조명해서 제대로 된 역사를 알려야 한다”라고 말했다.

<시사저널> 취재에 따르면 이주회는 일본 우익 세력이자 폭력 조직인 흑룡회가 보낸 첩자였다. 1885년 갑신정변을 피해 일본으로 도피했을 때 그는 흑룡회 단원이 된다. 흑룡회는 명성황후를 살해한 자객들이 속한 조직이다. 따라서 이주회는 명성황후 살해 사건의 단순 가담자가 아니라 사실상 일본 자객들과 같은 조직원이었던 것이다. 흑룡회는 이주회를 조선 군부에 깊숙이 심어놓기 위해 조선 대신들에게 천거하거나 압력을 넣었고, 군부 협판 자리에 앉히는 데 성공한다. 일본 자객들이 궁궐에 잠입해 명성황후를 살해할 수 있었던 것도 이주회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일본 우익단체, ‘영웅’ 대우에 추도 법회까지
이주회와 흑룡회의 관계는 그가 처형당한 후에 더욱 명확해진다. 1895년 11월19일에 처형된 이주회의 시신은 산속에 버려졌다. 그의 처와 아들(병구, 당시 7세)은 서울을 빠져나왔고, 나중에 아들 병구는 호구지책으로 금강산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한일병합이 되자 송병준의 사위이자 이주회의 부하였던 구연수(총독부 경무관)가 이주회의 처와 아들을 서울로 불러들여 뒤를 봐주었다. 조선총독부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일본에서는 명성황후 살해의 주역인 미우라를 중심으로 우익 단체(흑룡회)가 모금 운동을 전개했다.

1929년 흑룡회 간부들과 단원들은 대거 서울 용산에 있는 일본 사찰 서룡사 국사대에 모여들었다. 이들은 일본에서 모금한 돈을 가지고 산속에 버려졌던 이주회의 유골을 수습해 이곳에 무덤을 만들고 추도 법회를 열었다.

<시사저널>이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찾아낸 <동아선각지사기전>에는 당시 서룡사 국사대에 이주회의 묘를 안장할 때 일본 흑룡회의 조직원들이 대거 참석한 사진이 실려 있다. 현재 서룡사는 흔적이 없이 사라졌으며, 이주회 묘의 행방도 묘연하다. 이주회가 처형된 후 일본 도쿄에 있는 한 사찰에서는 해마다 흑룡회 주도로 이주회에 대한 추도 법회를 열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이주회는 ‘의인’이자 ‘영웅’이었던 것이다. 현재 일본 최대의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치구미가 흑룡회의 맥을 잇고 있다.

명성황후 살해 사건의 자객 중 한 명인 고바야카 히데오는 ‘민후 조락 사건’이라는 수기를 비밀리에 남겼다. 여기에는 ‘명성황후를 살해한 주범은 조선인’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물론 일본의 관련성을 회피하고 ‘조선의 국모를 죽인 것은 조선인이다’라고 왜곡하기 위한 것이다. 일본에서 이 수기를 발견한 문화재 제자리찾기 사무총장 혜문 스님은 고바야카가 쓴 수기를 번역해 곧 책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일제의 첨병이 되어 동학농민군 진압

 당시 일본에는 중국이나 조선에서 온 많은 정치 망명가나 유학생이 체류하고 있었다. 일본의 대륙침략론자들은 이들 중 이용가치가 있을 만한 자들을 골라 생계를 도와주면서 교류하였다. 이것은 뒷날 친일매국의 인적 연줄로 이어지는데, 이주회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옥균이나 박영효*처럼 거물은 아니지만 현감, 외무위원 등의 관직에까지 올랐고 김옥균과 친교가 있는 정치 망명가였기 때문에, 특히 현양사(玄洋社) 계통의 대륙팽창론자들이 접근하여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주회는 일본으로 도망간 지 3년 만에 사면되었다.

 

사면을 받고 귀국한 그는 자원하여 금오도(金鰲島--전라남도 순천 앞에 있는 섬으로 황금어장이었다고 한다) 도사(都事)로 내려갔지만 유배나 다름없는 생활이었다. 한편, 이주회는 금오도에 형 이제영(李濟榮)과 권속을 데리고 가서 개간사업을 벌였는데, 이 개간사업에 가렴주구를 피해 들어온 순천 지방의 농어민들을 동원하였다.

 

이렇게 개간된 섬은 한때 4부락 600여 호로 번창하였다 한다. 그가 섬에 있을 때인 1892년 가을, 다케다 한시(武田範之--이 다케다란 자는 일본 조동종의 승려이자 우익 낭인으로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관계하였고, '합병' 당시에는 이용구*를 위에서 조종하여 '합방'운동을 획책하였고 이회광*을 매수하여 조선불교를 매국화하는 데 앞장 섰던 자이다)가 조선에 침략의 거점을 마련하고 사업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금오도로 이주회를 찾아왔다. 이 때 이주회는 다케다와 더불어 어선 8척과 일본인 어부 30인을 고용하여 대대적인 고기잡이 사업을 벌였지만 냉동시설이 없어 이듬해 봄에 파산하고 말았다.

 

 1894년 가을, 동학농민군은 반일투쟁을 기치로 내걸고 다시 봉기하였다. 농민군의 봉기는 이주회에게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동학군을 토벌하기 위해 일본 군함 스쿠바(筑波)가 순천에 들어왔을 때 이주회는 군함에 들어가 해안의 지형을 설명하고 작전 계획을 세우는데 참여하였으며, 나아가 직접 사람들을 끌어모아 자칭 총대장이라 한 뒤 일본군의 선봉장이 되어 '혁혁한 공'을 세운다.

 

이 때의 공로로 함장 구로오카(黑岡帶刀)가 이노우에 주한공사에게 천거하고, 다시 이노우에가 박영효 내무대신에게 압력을 넣어, 이주회는 김홍집 친일내각의 군부협판에 파격적으로 발탁되었다. 1895년 삼국간섭으로 일본 세력이 쇠퇴하고 명성황후를 정점으로 한 민씨세력이 권력의 전면에 재등장하게 되자, 그는 권좌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 때 새로 부임한 미우라 일본공사를 중심으로 한 일본 당국은 '명성황후 제거' 계획을 세우고, 드디어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를 시해하였다. 여기에 이주회는 조선측 주범으로 가담하였는데, 그의 역할은 대원군을 이 사건에 관련시키고 우범선*, 구연수 등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매국노 제1호인 송병준*이 친명성황후 반대원군파임에 반하여 이주회는 친대원군 반명성황후파라는 점에서 친일매국의 구도는 매우 복합적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일본의 침략구도 또한 매우 교묘했다고 할 수 있다. 아뭏든 그는 이 사건으로 체포된 뒤 대역죄인으로 1985년 12월 19일 처형당하였다.

 

그의 시체는 처형 후 산 속에 버려졌고, 그의 처(김씨)와 아들 병구(秉九--당시 7세)는 도망쳐 숨어 살았다. 3년 후 병구는 호구지책으로 금강산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병합'이 되고 나서 송병준의 사위이며 과거 이주회의 부하였던 구연수(총독부 경무관)가 백방으로 그 유족을 수소문하여 모자를 서울로 불러 함께 살게 하였는데, 이들은 구연수의 도움과 총독부에서 도와 주는 비밀 자금으로 생활하였다. 뒤늦게 이러한 사실이 일본에까지 알려지자 미우라를 비롯한 명성황후시해 사건 가담자를 중심으로 이주회 묘지 건설 및 유족구호사업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고, 모금한 돈으로 경기도 광주군에 약 5정보의 땅을 마련하였으며, 용산의 서룡사(瑞龍寺) 내 국토대(國土臺)에 묘지를 만들었던 것이다(1929).

 

 
▲ (왼쪽)대한제국 관보에 실린 이주회 재판 판결문. (오른쪽)모반 혐의를 적용해 ‘교수형’을 선고한 기록이 있다.

 

 이미 이주회는 1892년 금오도에서 다케다를 만났을 때, "조선을 망친 것은 명성황후이기 때문에 조선을 구하고 조선과 일본의 협력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명성황후를 죽여야 한다"고 내뱉었다 한다. 그 정도로 그는 명성황후에 대해 적대적이었고, 따라서 시해 사건에 구체적으로 참여한 확신범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명성황후가 '조선의 개화'에 방해가 되는 요소였다고는 하지만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가면서까지 그런 일에 관련하였다는 것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였다.

 

만일 그가 사형당하지 않고 살아서 다른 관련자들처럼 일제의 보호하에서 권력을 휘둘렀다면 어떤 행위를 했을까? 주체를 갖지 못한 잘못된 의식 속에서 그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개화'니 '근대화'니 하는 논리로 처단했을까를 생각하면, 차라리 일찍 죽은 것이 역사와 민족을 위해서도 다행이라 느낄 뿐이다.

 

명성황후 살해범 ‘이주회’의 정체
 

일본 폭력단체 흑룡회가 조선 군부에 심은 첩자
1895년 10월8일 새벽 5시쯤. 경복궁 광화문에서 어둠의 정적을 깨고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작전명 ‘여우 사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조선공사 미우라와 일본 자객 48명은 총성과 함께 일제히 황후의 거처인 건천궁에 난입했다. 이어서 궁녀들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끔찍한 살육이 시작되었다.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는 이렇게 잔인하게 살해된 후 시신은 불에 태워 버려졌다. 

한성순보사 앞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는 일본 자객들. 오른쪽은 일본 쿠시다 신사에 있는 명성황후를 살해한 칼 

 

이 사건이 발생한 후 일본 자객들은 모두 본국으로 추방되었다. 그리고 3개월 후에 열린 일본 법정은 ‘증거 불충분’을 들어 이들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일국의 국모를 죽인 일본 자객들 중 처벌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일본에서 ‘애국지사’로 칭송받으며 승승장구했다. 

 

일본 자객들은 어떻게 해서 무죄판결을 받은 것일까. 명성황후가 살해된 후 조선에서는 이와 관련해 세 명의 조선인이 대역 죄인으로 체포되었다. 일본인에 고용되었던 평민 박선(당시 26세)과 한성부 친위대 부위 윤석우(당시 40세) 그리고 한성부 군부협판 이주회(당시 52세)가 그들이었다.

1895년 11월13일의 대한제국 관보를 보면 고등재판소는 이날 세 명에게 모반죄로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6일 후인 11월19일에 모두 교수형에 처한다. 당시 여러 기록에는 박선과 윤석우는 죽는 순간까지 범행사실을 부인하고 눈물로 통곡했으나 이주회는 “내가 황후를 살해했다”라고 끝까지 진범임을 주장했다. 

 

 

대한제국 관보에 실린 이주회 재판 판결문, 모반 혐의를 적용해 교수형을 선고했다.

 

 

순종 대에 이르러 윤석우와 박선은 모반 혐의를 벗고 사면 복권되었다. 둘은 명성황후 사건의 또 다른 희생양이었던 것이다. 결국, 역사의 공식적인 기록에는 명성황후 살해사건의 진범은 일본 자객이 아니라 ‘조선인’으로 기록되었다. 그가 바로 ‘이주회’였다. 일본 자객들이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던 것도 조선에서 진범이 잡혔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주회는 왜 명성황후를 살해한 진범이라고 자백한 것일까. 그는 누구이며 이 사건에 얼마나 관련되어 있었는지 의문이다. <시사저널>은 명성황후 살해 1백14주년을 앞두고 역사적 진실을 찾기 위해 ‘이주회’라는 인물을 집중 추적했다. 

지난 1993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지은 ‘친일파 99인’ 이주회 편(강창일 배제대 교수?현 민주당 의원 지음)을 보면 그는 1843년 경기도 광주 산성리에서 태어났다. 무과를 거쳐 오위장에 올랐고,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를 물리치는 데 공로를 세워 대원군의 심복이 된다. 그리고 연일현감으로 승진하였고, 외무위원 벼슬까지 탄탄대로를 걷는다. 이주회는 김옥균, 우범선 등과도 가깝게 지냈다. 

1885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이주회는 화를 입을까 두려워 일본으로 도망쳤다. 그는 3년 동안 도쿄에서 머물며 일본의 극우세력들과 친교를 맺는다. 그리고 얼마 후에 사면되자 전남 순천 앞바다에 있는 금오도에 정착해 개간사업을 벌였다. 그가 섬에 있을 때인 1892년 일본 우익 낭인이던 다케다 한시가 금오도로 이주회를 찾아왔다. 조선 침략의 거점을 마련하고 사업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면서 이주회는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동학군을 토벌하기 위해 일본 전함 스쿠바가 순천에 들어오자 이주회는 일본군의 선봉장이 된다. 이때의 공로로 함장 구로오카가 이노우에 주한공사에게 천거하고, 다시 박영호 내무대신을 통해 지금의 국방부 차관에 해당하는 군부협판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그리고 1년 후에 벌어진 명성황후 살해사건에 가담한다. 

강창일 민주당 의원은 “이주회는 명성황후가 죽여야 나라가 살고 조선과 일본의 협력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던 확신범이었다. 이주회는 또 명성황후 사건에 개입한 조선인들의 총책이었다. 그동안 우리 역사에서 ‘이주회’란 인물에 대해 숨기다시피 했는데 이제는 재조명해서 제대로 된 역사를 알려야 한다”라고 말했다. 

 

<시사저널> 취재에 따르면 이주회는 일본 우익세력이자 폭력조직인 흑룡회가 보낸 첩자였다. 1885년 갑신정변을 피해 일본으로 도피했을 때 그는 흑룡회의 단원이 된다. 흑룡회는 명성황후를 살해한 자객들이 속한 조직이다. 따라서 이주회는 명성황후 살해사건의 단순 가담자가 아니라 사실상 일본 자객들과 같은 조직원이었던 것이다.

흑룡회는 이주회를 조선 군부에 깊숙이 심어놓기 위해 조선 대신들에게 천거하거나 압력을 넣었고 군부 협판 자리에 앉히는데 성공한다. 일본 자객들이 궁궐에 잠입해 명성황후를 살해할 수 있었던 것도 이주회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주회와 흑룡회의 관계는 그가 처형당한 후에 더욱 명확해진다. 1895년 11월 19일에 처형된 이주회의 시신은 산속에 버려진다. 그의 처와 아들(병구, 당시 7세)는 서울을 빠져나왔고, 나중에 아들 병구는 호구지책으로 금강산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한일병합이 되자 송병준의 사위이자 이주회의 부하였던 구연수(총독부 경무관)가 이주회 처와 아들을 서울로 불러들여 뒤를 봐준다. 조선총독부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일본에서는 명성황후 살해의 주역인 미우라를 중심으로 우익단체(흑룡회)가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 

 

용산 서룡사 국사대의 이주회 비석 제막식에 참석한 흑룡회 단원들, 아래는 이주회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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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성황후 킬러 이두황 묘 발견, 잘먹고잘살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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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 서룡사 국사대의 이주회 비석 제막식에 참석한 흑룡회 단원들, 아래는 이주회 묘

    1929년 흑룡회 간부들과 단원들은 대거 서울 용산에 있는 일본 사찰 서룡사 국사대에 모인다. 일본에서 모금한 돈을 가지고 산속에 버려졌던 이주회의 유골을 수습해 이곳에 거대하게 무덤을 만들고 추도 법회를 열었다.

    <시사저널>이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찾아낸 <동아선각지사기전>에는 당시 서룡사 국사대에 이주회의 묘를 안장할 때 일본 흑룡회의 조직원들이 대거 참여한 사진이 실려 있다. 현재 서룡사는 흔적이 없이 사라졌으며 이주회 묘의 행방도 묘연하다. 


    이주회가 처형된 후 일본 도쿄에 있는 한 사찰에서는 해마다 흑룡회 주도로 이주회의 추도법회를 열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이주회는 ‘의인’이자 ‘영웅’이었던 것이다. 현재 일본 최대의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치구미가 흑룡회의 맥을 잇고 있다. 


    명성황후 살해사건의 자객 중 한명인 고바야카 히데오는 ‘민후조락사건’이라는 수기를 비밀리에 남겼다. 여기에는 ‘명성황후를 살해한 주범은 조선인’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물론 일본의 관련성을 회피하고 ‘조선의 국모를 죽인 것은 조선인이다’라고 왜곡하기 위한 것이다.


    일본에서 이 수기를 발견한 문화재제자리찾기 사무총장 혜문스님은 고바야키가 쓴 수기를 번역해 곧 책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명성황후의 죽음을 둘러싼 가려진 진실을 이제는 제대로 알릴 때이다.

     

    정락인 기자 freedom@sisapress.com

          

     

    “ 조선왕실의 사슴목장 금오도 ”

     

                                                                                                         소설가 : 김 용 필

     

     

    남해안의 중심인 여수시 동남쪽에 자리한 남면은 42.4km2 면적에 1800세대 40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섬 지역이다. 금오도는 '거무섬'이라고 부르던 섬으로 섬 삼림이 울창하여 검게 보였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게 된 것을 음이 비슷한 한자로 음차(音差)하면서 '금오도(金鼇島)'가 되었다.

     

     

    1. 금오도 여천(汝泉)은 조선 왕실의 목축지 였다.

        바다의 호수, 여수의 금오열도 해역은 대한민국의 나폴리다. 비단 해역 금오도의 여천(汝泉)은 조선 왕실의 목축장이었다. 여천(汝泉)은 처녀의 가슴 같은 쌍봉 사이로 흐르는 맑은샘이란 뜻인데 바로 그곳 금오도 여천에 사슴목장이었다. 왕실 목축지는 보통 땐 민간이 말을 사육했다가 국가 재난 시 공납하여 군마로 쓰기 위한 제도이다. 여수의 금호열도의 대부분의 섬들은 왕실 목축지로 선포된 곳이다. 주로 말과 소를 목축하였다. 특히 금오도 대부산 자락은 고종황제의 사슴 목축지로 선정되어 관포사를 제외한 어떤 사람도 금오도 대부산 출입이 통제된 봉금의 산이었다.

     

    왕실에서 사슴을 종축하려고 했던 것은 녹용을 얻기 위함인데 금오도 목축장은 명성황후가 특별히 관리하던 곳이었다. 그런데 일본의 압력으로 전국적으로 봉금의 땅이 풀리기 시작하였다.

     

    이런 틈을 타서 약삭빠르게 금오도를 점령한 사람이 있었다. 갑신정변의 주도 김옥균의 측근인 이주회가 금오도에 몰래 도망 와서 금오도 개간사업을 벌이고 일본의 수산업자를 끌어들여 대 항만을 건설하면서 수산업을 독점 하려다가 명성황후의 반대로 사업이 실패 하고 말았다. 이에 이주회는 명성황후를 독살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후 고종황제는 금오도 목축지 대부산을 봉산에서 해금시켜 자유롭게 살게 하였다.

     

    2. 금오도와 이주회, 그리고 명성황후의 악연

       여수 금오도는 명성황후의 시해범 이주회가 숨어살던 곳이다. 즉 명성황후와 친일파 이주회간의 악연이 서린 곳이다.

     

    이주회(李周會 1843∼1895 ) 이주회와 명성황후는 악연은 국난을 촉발하였다. 경기도 광주와 여주 출신인 사람 사이에는 문벌을 놓고 두 집안이 갈등하였다. 그 갈등의 악연은 끝내 비극을 만들었다. 이주회가 친일파 대두로 설치던 때 그를 권력에서 몰아낸 것은 명성황후였다. 그런 연유로 그는 명성황후를 죽이려고 모의했던 것이다.

     

    일본의 대륙 침략론자들은 중국이나 조선에서 온 많은 정치 망명가나 유학생 이용하였다. 가치가 있을 만한 자들을 골라 생계를 도와주면서 친일매국의 인적자원으로 활용하였다. 이주회도 그중의 한사람이었다. 현감, 외무위원 등의 관직에까지 올랐고 김옥균과 친교가 있는 정치 망명가였기 때문에 대륙팽창론자들의 호감을 샀고 그들과 친교를 맺었다.

     

    이주회가 갑신정변의 화를 피해 금오도로 피신 와서 봉산의 땅에 대대적인 개간 사업과 어장 사업을 벌였다. 이때 명성황후는 금오도에서 사슴목장을 경영하면서 이주회의 재기를 방해하였다.

     

    3. 황금어장 금오도를 남해안 최고 수산물 집산지로 만들려고 하였다.

    이주회는 일본으로 도망간 지 3년 만에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입지가 곤란해지자 전라남도 여수 금오도(金鰲島)로 내려와서 유배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였다. 그는 국법을 어기고 금오도를 대대적으로 개간하여 자신의 아성을 만들려고 하였다. 이 개간 사업을 위해 순천 여수지방의 농어민들을 대거 불러들였고 이들은 땅을 나누어준다는 말에 꿈을 안고 개간에 적극 동참하였다. 무인도에 개간 사업은 잘 되어 인부들이 4개의 부락에 600여 호의 집 만들고 살 정도로 번창하였다.

     

    금오도 남면 개간사업은 친형 이제영에 의해 성공적으로 추진되어 신천지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1892년 가을, 다케다 한시( 명성황후 시해 주도)가 이주회를 찾아왔다. 그는 금오도를 한국제일의 수산업 기지로 만들자는 제의를 하였다. 다케다 한시는 이주회에게 막대한 사업 자금을 댔다. 원양어선 10여척과 일본인 어부 30명을 데리고 와서 대대적인 수산업을 벌였다. 당시 금오도는 남해안 최고 삼치 황금어장이었다.

     

    그는 안도에 남해안 수산물이 집산할 항만을 건설하였다. 이주회는 개간사업을 형에게 양도하고 새로운 어장 사업에 뛰어들었다. 운 좋게 어장 사업은 번창하였다. 그러나 엄청난 고기를 잡아 일본으로 운송했지만 너무 많이 잡혀서 처치 곤란이었다. 냉동 시설이 없어 고기를 썩히는 판이었다. 그렇게 썩은 고기는 개간농장의 거름으로 사용했다. 그는 여수에 남선 제빙공장을 건설하여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어획량이 너무 많은데 비해 판로가 없어 그만 그 이듬해 봄에 파산하고 말았다.

     

    4. 명성황후를 시해한 주범 이주회

       마침내 그는 친일 내각의 힘을 업고 다시 궁으로 들어왔다. 1895년 외국의 간섭으로 일본 세력이 쇠퇴하고 명성황후를 정점으로 한 민씨 세력이 권력의 전면에 재등장하게 되자, 그는 권좌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 때 새로 부임한 미우라 일본공사를 중심으로 한 일본 당국은 '명성황후 제거' 계획을 세우고, 드디어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를 시해하였다.

     

    이때 이주회는 조선측 주범으로 가담하였는데, 그의 역할은 대원군을 이 사건에 관련시키고 우범선 구연수 등을 끌어들였다. 그런데 매국노 제1호인 송병준은 친 명성황후, 반대원군파였고 이주회는 친 대원군 반 명성황후파 였다. 이렇게 친일매국의 구도는 매우 복잡하였다. 그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주범으로 체포되어 대역죄인으로 1895년 12월 19일 처형당하였다.

     

    그의 시체는 처형 후 산 속에 버려졌고, 그의 처와 아들 병구(당시 7세)는 도망쳐 금강산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5. 동학농민군 토벌대의 일본군 선봉장으로 활약한 이주회

       사업에 망한 이주회는 여수 순천 땅을 배회하고 있었다. 이때 동학농민 운동이 일어난다. 일제에 항거하는 동학농민 군이 봉기하였다. 1894년 가을, 동학농민군의 봉기는 이주회에게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는 동학농민군을 막기 위한 사군 단체를 만들어 동학군과 대적하였다. 마침 동학군 섬멸을 위하여 순천에 정박한 일본 군함 스쿠바로 로 들어가서 함장을 만나 동학군 진압군이 되게 해달라고 종용했다. 그는 해안의 지형을 설명하고 작전 계획을 세우는데 참여하였고 나아가 직접 사병을 모아 자칭 동학군 토벌의 총대장이라 하고 일본군의 선봉장이 되어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때의 공로로 함장 구로오카가 이노우에 주한공사에게 천거하였고, 다시 이노우에가 박영효 내무대신에게 압력을 가하여 이주회는 김홍집 친일 내각의 군부협판에 파격적으로 발탁되었다. 한일 병합후 이주회의 부하였던 구연수(송병국의 사위. 총독부 경무관)가 그의 모자를 찾아 서울로 불러들였다.

     

      1929년엔 미우라가 이주회 묘지 건설 및 유족구호사업을 전개하여 경기도 광주군 용산 서룡사 에 그를 묻었다.

                                

     

     ■강창일(배재대 교수·한국사)

     

    참고문헌

    武田範之, [記李豊榮事].
    黑龍會 編, {東亞先覺志士記傳}(上), 原書房, 1981.

    ≪참고문헌≫ 高宗實錄
    ≪참고문헌≫ 大韓季年史
    ≪참고문헌≫ 梅泉野錄
    ≪참고문헌≫ 日本外交史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