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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정권 청원운동의 주동자, 민원식 (閔元植, 1886-1921)

草霧 2013. 9. 9. 15:23

 

 

 

민원식 (閔元植, 1886-1921) HOM직업적 친일분자

  • 민원식 참정권 청원운동의 주동자
  • 배정자 정계의 요화(妖花)로 불렸던 고급 밀정
  • 선우순 내선일체론의 나팔수
  • 이각종 황국신민화운동의 기수
  • 박석윤 항일무장투쟁 파괴|분열의 선봉장
  • 박춘금 깡패에서 일본 국회의원까지 된 극렬 친일파
  • 현영섭 일본인 이상의 일본인 꿈꾼 몽상가
  • 이영근 황국신민화를 온몸으로 실천한 일본주의자
  • 이종형 독립운동가 체포로 악명 높았던 밀정

      

 민원식 (閔元植, 1886-1921)      

  

 

 참정권 청원운동의 주동자

 

 

나의 오늘이 있음은 전적으로 일본인 덕택

 

 

1886년 7월 출생하여 1921년 2월 16일 도쿄에서 민족청년 양근환(梁槿煥)에게 살해된 민원식은 1920년대 최고의 직업적 친일분자라 할 수 있는 자이다. 그는 원래 평안북도 선천의 비천한 가문 출생으로 어릴 때에는 황해도 해주에서 자랐다.

 

갑오 농민전쟁이 일어났던 8세 때 그 와중에서 양친이 살해되어 민원식은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었다. 사고무친이 된 그는 마치 상가집 개처럼 여러 곳을 방랑하다가 경성에 들어오게 된다. 경성에서 민원식은 청나라 상인 왕춘원(王春元)을 알게 되고 마침내 그를 따라 선양(瀋陽)에 까지 가게 되지만 그곳에 도착한 지 1년 만에 왕춘원이 병사한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으로 다시 돌아와 떠돌이 생활을 하게된다.

 

13세가 되는 해에 민원식은 일본으로 건너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이 당시의 세도가 민영준(閔泳駿)의 아들이라 사칭한다. 그런데 훗날 민원식은 자신이 그 당시 일본에서 이토(伊藤博文), 이노우에(井上馨),소에지마(副島種臣), 도야마(頭山滿) 등의 가문에 출입하면서 명사들과 교제 하였다는 주장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상식에 어긋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일본의 내노라 하는 정치가들이 무슨 할 일이 없어서 조선인 어린애를 상대로 교제를 했겠는가. 일찍부터 앞잡이로서의 싹이보여 보호하고 교육시켰다면 몰라도 말이다.

 

김옥균 등 당시 조선의 친일 정객들과 가깝게 지냈던 도야마가 민원식을 수년간 식객으로 있게 해 준 것도 이런 목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후 민원식은 이러저러한 교제 끝에,후쿠오카(福岡)에서 현(縣)지사 가와지마(河島醇)의 비호와 보살핌으로 마침내 동아어(東亞語)학교 교사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후 20세가 되면서 민원식은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는 특히 글을 잘 쓰고 잘 지어 일본에서 무전여행할  때 글을 팔아 배고픔을 면하였다고 한다.

 

1906년 귀국한 민원식은 오카(岡喜七郞)의 주선으로 정3품 내부 위생국장이 되었다. 이들 일본인의 도움으로 그는 일찍부터 본격적인 반민족 활동을 벌일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당시 미인으로 소문이 높았던 엄채덕(嚴彩德)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그녀는 육군참장 및 중추원 참의를 지낸 엄준원의 딸이자 엄비의 조카였다. 민원식은 항상 나의 오늘이 있음은 전적으로 일본인의 덕택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다 한다.

 

민원식은 1906년 7월 탁지부 주사에 임명되었다가 9월에는 내부 참서관으로 전임하였다. 1907년 3월에는 6품의 승훈랑(承訓郞)이었는데, 한 달 만에 정3품 통정대부로 승품되었고, 이어 같은 달 22일에는 제실 회계 심사위원이 되었다. 4월 25일에는 왕명으로 일본에 건너가 그곳 궁내성 사무를 시찰하고 돌아왔으며, 6월에는 내부 서기관이 되었다. 이처럼 일제의 비호 아래 고속 승진을 계속하던 민원식도 협잡질을 하다 경무청에 연행된 사건이 일어나 결국 파면되고 말았다.

 

관직에서 쫓겨난 그는 이제 정치 협잡꾼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즉, 대한실업장려회라는 친일 단체를 만든 뒤 한일의정서의 조선측 주역이자 친일파의 거두였던 이지용*과 함께 1908년 친일단체인 대한실업협회를 조직,신문 발간을 계획하였다.

 

또한 중추원 찬의 홍승목, 친일 정상배 이규항, 김광희 등과 더불어 1908년 9월 5일 제국실업회를 설립하여, 러일전쟁 직후 상무사가 해산되자 구심점을 잃은 전국의 보부상 중 친일적 성향의 사람들을  규합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합방을 준비하고자 하였다. 제국실업회는 당시 법부대신 조중응이 회장으로 활약한 친일 상업단체인 동아개진교육회(東亞開進敎育會)와 쌍벽을 이루면서 친일 경쟁을 하던 단체였다.

 

통감부 설치 시기부터 합방 직전에 이르는 기간에는 식민지화 정책에 편승한 친일파들에 의해 많은 친일단체들이 설립되고 있었다.

 

이때 민원식은 또 다른 친일단체인 진보당과 정우회(政友會:1910. 3)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500여 명의 회원을 가진 진보당은 민원식과 문탁이라는 자가 주동이 되어 설립한 것이며, 정우회는 친일파의 총수인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의 후원 아래 김종한*을 총재로 하고 고희준, 민원식, 정응설 등이 역원으로 활동하는 등 친일을 직업으로 일삼던 자들이 총망라된 단체였다.

 

이두 단체는 표면상 모두 국권회복을 주장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친일 여론을 조성하는 한편 합방을 준비하고 훗날 합방이 성립되면 그 지분을 기대하고 있었던, 통감부 휘하의 합법적 친일단체들이었다.

 

동화정책에 편승하여 신일본주의 주창

1920년 일제의 민족 분열 정책의 일환으로 표방된 이른바 문화정책과, 그에 따른 일련의 친일파 육성정책이 전개되자 민원식도 이에 적극 앞장 서게된다. 이때의 대표적인 직업적 친일분자로는 민원식, 선우순*, 유일선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상해 임시정부가 당면필살의 매국적(賣國賊)으로지적하여, 1차 암살대상자 명단에 넣었던 자들이었다.

 

선우순과 유일선은 모두 개신교 지도자로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후 조직적으로 이에 대한 반대 운동을 벌였다. 이 기간 동안 민원식은 윤치호*, 한상룡*, 민영기 등과 교풍회(矯風會)를, 다시 김명준, 윤갑병* 등과 더불어 국민협회를 창립하고 그 기관지 {시사신문}을 발행하면서 총독부의 정치선전을 홍보하고 친일여론을 조성하는 한편 참정운동을 주창하였다.

 

관직에서 쫓겨났다가 합병의 공로로 다시 관직에 오른 그는 1911년 이래 양지,이천,고양 군수를 하다가 3.1 운동 무렵 퇴관하여 중추원 부찬의가되었다. 전국적인 만세 시위운동이 전개되자 당황한 민원식은 {경성일보}와{매일신보} 지상에 소요의 원인과 광구(匡求)의 예안(例案)이라는 장문의 글을 1주일 동안 연재하여 3.1 운동을 매도하고 실력 양성론을 편다.

 

그는3 .1운동은 민족자결의 새 용어를 오해한 데서 일어난 것으로 여겨지는 망동이고 조선 민족은 바로 충량한 일본 민족의 일부로서 국헌을 존중하고 국법을 준수하며 개인 독립의 실력을 양성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어 그는 4월말에 또 다시 다시 소요에 대해라는 글을 {경성일보}에 게재하였다.

 

3.1 운동 이후 사이토 총독은 몸과 마음을 걸고 일을 해 낼 핵심적 친일 인물을 골라 귀족, 양반, 부호, 실업가, 교육가, 종교가 등에 침투시켜 얼마간의 편의와 원조를 주어 친일단체를 만들고자 하였다. 이 기간에 민원식은 사이토 총독의 친일파 양성정책에 적극 협력하고자 무려 19회씩이나 총독을 면회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당시 일본 수상 하라(原敬)의 내지연장주의(內地延長主義)라는 새로운 동화정책에 편승하여 국민정신 발양, 사상선도, 입헌사상 및 민권신장, 자치정신 배양이라는 구호 아래 이른바 신 일본주의를 제창, 국민협회를 중심으로 이에 찬동하는 여론을 조성하였다. 당시 민원식이 주장한 신일본주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한 양국의 병립은 과거의 사실이며, 지금은 합체하여 한 나라가 되었다. 일본은 벌써 예전의 일본이 아니요, 조선의 토지와 인민을 포유(包有)하는 신일본인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일본 민족만으로 된 일본이 아니라, 일선 양민족의 일본이 된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과 자각에 입각하여 일선 민족공존의 대의를 완수하려 할 뿐인 것이다.>

한편 민원식은 {시사신문}을 발행하여 조선병합의 대의를 선전하고 자신의 친일적 행동을 전민족적으로 여론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민원식의 일본에대한 그칠 줄 모르는 충성에도 불구하고, 당시 그의 이른바 신 일본주의 선전 강연장에 강제 동원된 민중들은 그를 일본과 일본인의 앞잡이로 생각하여 비아냥 거리거나 욕설을 퍼붓기 일쑤였고 그를 일본 당사자의 등롱(燈籠)잡이라고 냉소했다.

 

▲ 매일신보 1940년 6월 10일자 광고. 고희준은 국민협회 상의원장을 맡으면서 창씨개명에 앞장섰다.  ⓒ 전갑생

제국실업회

(帝國實業會)는 대한제국 말기에 설립된 보부상 단체이다. 1908년 8월에 민원식의 주도로 창립되었다. 대한실업협회와 동아개진교육회가 합동하여 설립되었다. 이 가운데 대한실업협회는 역시 민원식이 주도하여 1908년 8월에 창립한 경제 단체로, 친일 상업 세력의 정치 세력화를 꾀하고 있었다. 대한제국 말엽의 상업 단체 가운데 대표적인 친일 단체이다

 

정우회(政友會)는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적극적으로 나선 대표적인 친일 단체로 1910년 3월 설립되었다. 이 무렵 병합 조약 체결을 지지하는 많은 친일 단체들이 활동했는데, 이용구일진회이완용국민연설회가 경쟁 관계에서 활동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해 8월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어 목표가 달성되면서 9월 12일에 결사해산령에 따라 해체되었다.

 

국민협회(國民協會)는 일제 강점기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조종으로 설립된 사회 단체이다. 고아 출신으로 일본에서 자라면서 직업적인 친일 인물이 된 민원식이 주도하여 기존 협성구락부를 확대해 설립했다. 설립일은 1920년 1월 18일이며 민원식이 주창하던 신일본주의를 기치로 내세웠다. 신일본주의는 한 나라가 된 일본조선이 혼연일가가 되어 공존을 이루자는 내용이다. 일제는 국민협회에 자금 지원을 하는 동시에, 1921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이 개편될 때 국민협회 회원들을 참의로 발탁하는 특혜를 주었다. 1924년 당시 국민협회 회장이던 김명준을 비롯해 정병조, 김갑순, 한영원, 이병학, 박봉주, 신석우 등이 국민협회와 관련된 중추원 간부들로 보고되었다.

 

▲ 1932년 5월 12일자 매일신보 기사. 그가 몸담고 있는 국민협회에서 '애국기'를 헌납하기도 했다. ⓒ 전갑생

 

 

일제가 사주한 참정권 청원운동의 속셈

 

3.1 운동 직후 일본 정부와 총독부 측의 일관된 공식적 입장은 일시동인주의(一視同仁主義)와 내지연장주의에 입각한 참정권 부여론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이 무렵 민원식은 일본 국회에 참정권 청원서를 제출한다.

 

신일본주의에서 출발한 참정권 운동은 일본 국회에 조선인 지역대표를 보내자는 것으로 일본당국의 주선으로 민원식은 제42의회(1920. 1), 제43의회(1920. 7),제44의회(1921. 2) 등 세 차례에 걸쳐 일본 중의원에 참정권 청원서를제출한다. 물론 그 목적은 조선인 본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병합과 동화를 기정사실화하고 독립과 자치를 부정하고 참정권에 대한 환상을 가지게 함으로써 조선 민중을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에 충량하게 적응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1920년 1월 국민협회 회장 민원식은 참정권 청원운동을 위해 도쿄로 가서105명의 연서로 청원서를 중의원 의장에게 제출하였다. 그는 계속 도쿄에 머무르면서 청원서를 인쇄하여 귀족원과 중의원에 배부하는 등의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민원식을 대표로 하여 전개된 이른바 참정권 청원운동의취지를 살펴보자.

 

<민심구치(民心救治)의 근본방책은 조선인이 일본 국민이라는 자각을 환기시키는 데 있다고 통절하게 생각합니다.참정권 부여는 혹 시기상조라고 논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 이유로 조선인의 생활정도 및 지식정도, 교육보급및 그 정도, 국비부담 능력, 병역의무의 유무 등이 그것과 관련되어있습니다.우리들은 참정권 부여는 조선인 동화의 근본의(根本義)가 되는동시에 민심을 구치하는 긴요한 대책으로서, 조선에 중의원 의원 선거법을시행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그것에 의해 조선 민족의 앞길에 광명을 주고 그것을 갈고 닦아 건실한 일본 국민이 되어 국운 융창(隆昌)의 자(資)로,더불어 일본 국민이 되는 행운을 얻게 될 것입니다.>

 

즉, 이제 조선은 일본의 영토가 되었고 조선인은 일본 국민이 되어야 한다는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조선인의 동화를 위해서는 일본의 일부분으로서의 참정권을 누리는 것이 마땅하며 따라서 이를 허용해 달라는 것이었다.

 

더불어 일찌감치 조선인에게도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징병령을 시행할 것을 주장한다. 이것은 조선인에게 참정권이라는 광명을 줌으로써 3.1 운동으로 고양된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희석시키고자 하는 일제의 고도의 식민지 지배 기술에일조하는 것이었다. 한편 제3차 청원서는 3226명의 연서와 오오카(大岡有造) 외 16명의 의원의소개로 중의원에 전달되었다.

 

<참정권은 제국헌법이 인정한 국민의 당연한 권리로서 조선이 일본의 영토가되고 조선인은 일본의 신민이 된 이상 그것의 향유를 요구하는 것은 필연의 결과로서 조금도 괴이한 일이 아닙니다.지금 조선의 현상은 혹은 독립을 절규하고 혹은 자치를 주장하여 표면적으로는 자못 혼돈스럽지만 이것은 본시 다수 조선인의 참뜻이 아니요, 어떠한 사람도 마음 속으로 독립의 가능성을 믿는 자는 없고, 자치 같은 것은 책상 위의 공론에 불과합니다. 오직 참정권의 요구가 가장 진면목이 되는 것으로, 전조선인 열망의 소리로서우리들 청원자만의 희망은 아닙니다. 2천만 인으로서 그것에 반대할 이유는없습니다.우리들은 지금에 미쳐 병합의 사실을 운위하는 것은 이익이없다는 것을 압니다.이때에 정부의 방침을 선시(宣示)하여 조선인의 전도에광명을 던지는 것입니다.>

 

이들 일파의 참정권 청원운동이란 독립에 대한 의지를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독립운동에 대한 열망은 극소수의 견해로 돌리고 참정권 운동이었으며,일제통치 정책의 수용만이 전조선인의 열망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민원식 사후 1년이 되는 해에 국민협회 회원이 1만여 명의 연서로 일본내각에 건백서(建白書)를 제출한 일이 있었다.

 

이들은 조선 참정권 요구건백서에서 선거법 시행 칙령을 반포하라고 주장하며 운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것도 1924년 이후에는 유야무야되었다. 이때 일본 정부도 현재의 조선에게 참정권을 부여할 의사가 없다고 잘라 말하고 있는데, 이 단계에 가서는 전과 같은 애드벌룬마저 거두어 버리게 된 것이었다. 실제로 일제는 조선인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1945년 식민지 상태에서 해방될 때까지 끝내 조선 민족에게 참정권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양근환 선생의 피체(被逮) 상황을 보도한 기사(<동아일보> 1921년 3월 4일자). "형사 9명의 경호중에 양근환 동경착(東京着)"이라는 제목으로 선생이 나가사키에서 붙잡혀 도쿄로 끌려온 상황과 당시 선생의 모습이 실려있다.

양근환 선생의 피체(被逮) 상황을 보도한 기사(<동아일보> 1921년 3월 4일자). "형사 9명의 경호중에 양근환 동경착
(東京着)"이라는 제목으로 선생이 나가사키에서 붙잡혀 도쿄로 끌려온 상황과 당시 선생의 모습이 실려있다.

 

 

민족청년 양근환의 민원식 처단

 

민원식은 제3차 청원서를 내기 위해 일보으로 갔다가, 1921년 2월 16일숙소인 도쿄 스테이션호텔에서 민족 청년 양근환의 칼에 살해당한다. 제3차청원서는 그의 그칠 줄 모르는 친일활동의 유작이자 결산이 된 셈이다.

 

1921년 초 민원식은 그의 친일 취지에 찬동하는 자들과 더불어 참정권청원서를 제출하고자 도쿄에 머물고 있었다. 양근환은 그곳 {중앙신보}에서그 사실을 알고 분개하여 그를 처단할 결심을 하고, 2월 16일 비수를 품고 그가 머물고 있는 호텔로 갔다. 양근환은 자신을 이기령(李基寧)이라고 거짓으로 소개하면서 민원식에게 조선의 현상에 관한 견해를 물었는데, 그는 친일 정객답게 오히려 평온하다고 대답하였다.

 

양근환이 말하기를 금일 온나라가 들끓고 있는데 어찌 평온타 하리오? 우리 나라를 속이는 자는 당신이다. 당신은 우리 조선인이 아니다. 이에 민원식은 상하이에서 운동하는 자는 모두 폭도이다. 그 무리가 어찌 족히 독립을 이루겠는가?라면서 당시 중국 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투사들을 심하게 매도하였다.

 

이에 양근환이 그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말하기를 상하이의 동포를 폭도라 하는데 말이 되는가? 민원식이 벼루집을 던지려고 하자 양근환이 크게 노하여 격투하였고, 검을 뽑아 그 배를 찌르고 도주, 상하이로 도피하려 하였다. 

 

그러나 양근환은 24일 나가사키 항으로 가서 하치야마루(八幡丸)를 타려는 순간에 체포되었는데 조금도 초조한 기색이없이 당당하였다고 한다. 한편 도쿄제국대학 병원으로 긴급히 옮겨진 민원식은 다음날 아침 사망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일제는 민원식 살해사건을 빌미로 당시 일본내에서 소위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지목받고 있었던 김성범, 신원정, 이인종, 김태용,신현성과 천도교 도쿄지부장 방정환, 박달성 등을 체포하였다. 5월 2일(음력)법정에서 신문을 받을 때 홀연히 젊은 여자 한 명이 방청석에서 크게 소리높여 말하기를 양씨 같은 사람이 어찌 유죄판결을 받을 수 있겠는가? 심히불가하다.

 

이에 나는 당연히 반대한다 하였다. 법관 기무라(木村)가 묻기를생명과 재산의 안전이 합병 후와 합병 전이 어떠한가? 양근환이 말하기를 물론 합병 전이 났다. 다시 묻기를 그것은 감정이 아닌가? 양근환이그것은 사실이다. 어찌 감정인가?라 하면서 일제의 침략상을 규탄했다고한다. 양근환은 이 사건으로 무기형을 받았는데 이때 그의 나이 28세였다.

 

 

양근환 선생의 공판이 열린 재판장의 광경과 이를 참관하기 위해 온 일본인 아내의 모습(<동아일보> 1921년 6월 11일자).

양근환 선생의 공판이 열린 재판장의 광경과 이를 참관하기 위해 온 일본인 아내의 모습(<동아일보> 1921년 6월 11일자).

 

사후 추도와 친일파 보호정책

민원식의 척살 소식은 식민지 조선 민중에게는 커다란 희열이 되었지만,반면에 친일파와 일제 당국자들은 동료를 잃은 슬픔과 혹시나 자신들에게도 그와 같은 일이 닥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민원식이라는 한 비열한 친일 정객의 비극적인 말로는 이들의 극진한 대접을 통해 사후 다시한 번 지상(紙上)에 부각된다.

 

이보다 앞서 민원식이 위독하다는 보고가 일본 국왕에게 도달되었는데 일왕은 특지로서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충량하였던 그를 정5위 훈4등에 서하고 중추원 찬의를 수여하였다. 또한 순종은 어사를 도쿄로 보내 위문하고,사망 소식을 접하자 다시 어사를 파견하여 향화료(香華料)를 내렸다.

 

 

 

한편 하라 수상, 사이토 총독, 미즈노 정무총감 등 조야의 유력자들이 화환을보내왔다. 사망소식이 경성에 전해지자 엄준원, 엄채덕, 민영대 등 가족과 친일파들은 앞을 다투어 그날 밤 일본으로 향하였다.

 

민원식의 유해는 19일 부산에 도착하였는데 사사키(佐佐木) 경남도지사를 시작으로 이곳의 관민들이 영구를 맞이하였다. 총독부 관리를 대표해서 마스나가(松永) 외사과장도 참석했다. 이날 밤 유해는 남대문역에 도착하였고 국민협회 관계자 및 이완용을 필두로 조선 귀족 일동 등 일본의 은혜를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였다.

 

 24일 아침 서대문통, 태평통, 황금정을거쳐 훈련원 광장에서 민원식의 노제가 열렸다. 이때 하라 수상,쇼우지(床次) 내상, 국민당헌정회 경신구락부 관계자 외에 여러 명사가 헌사를 보내 조문을 대독, 그의 생전 활동을 찬양하고 미화하는 데 분주하였다.

 

이 자리에는 후작 이완용 외에 1천여 명이 참석하였다. 장지는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안암리로 정해졌다. 한편 지방에서도 요란스러운 추도회가 개최되었다. 24일 평양과 함흥에서는 도지사의 주도로 추도회가 열렸고, 광주에서도 관민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추도회가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일본 정계에서도 민원식이 사망하자마자 이틀 후인 2월 18일 중의원 의원 요코야마(橫山勝太郞) 등 32명의 의원이 민원식 객사에 관한질문주의서(質問主意書)를 의장에게 제출한다. 이들은 민원식은 온건한 친일주의의 신사로서 소위 완미(頑迷)한 불령선인이 동군 등의 신변에 위협을 가하였다.

 

본의원 등은 과격한 불령선인에 대한 엄중한 취체를 할 필요가있는 동시에 일한합병의 취지를 헤아리고 일선공존의 목적을 위해 노력하는 친일주의의 인사에 대해 주도 면밀한 보호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정부의 공식적인 의견을 물었다.

 

이에 3월 8일 내각 총리대신 하라(原敬)가 답변을 통해 이에 동감한다고 하였다. 다시 3월 9일 중의원 회의에서 요코야마는민원식의 신일본주의와 친일파로서의 업적을 설명하는 한편 향후 박해받고있는 친일파들을 보호할 것을 바라는 의미의 연설을 하였다.

 

다시 3월 17일의 연석회의에서 민원식 문제를 거론, 그는 조선에서 다수의 친일파를 대표하는인물이므로 고별식으로서 총리대신과 내무대신도 민원식의 사체 앞에 서서 꽃을 바치고 참열(參列)하라고 하였고, 이에 의원들의 박수를 받았다. 제국주의 국가 입법기관으로서의 속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총독 사이토는 민원식의 무덤을 무려 1천 수백만 엔이라는 거액을 들여손질해 주었다 한다. 일본인에게는 민원식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가가다시 한 번 확인된다.

 

해방 직후 양근환 선생(왼쪽)이 김구(가운데)·박열(오른쪽)과 함께 찍은 사진.

해방 직후 양근환 선생(왼쪽)이 김구(가운데)·박열(오른쪽)과 함께 찍은 사진.

 

 

 

 

 

 

양근환(梁槿煥, 1894.5.9~1950.9.15)

“나는 학문도 정식 교육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론으로 일본인에게는 지지 않는다. 일본 사람은 조선 사람 중에는 조선독립을 찬성하는 사람도 있고 불찬성하는 사람도 있는 줄로 생각하지마는, 어찌 그럴 리가 있으랴. 조국의 독립은 누구든지 희망하는 것이다. 헌병 제도가 변하여 순사 제도가 되고 무단정치가 문화정치가 되는 것은, 결국 별 차이 없는 것이다. 조선독립을 일본 사람도 자기 일같이 생각하여 주기를 바란다.”

- 1921년 민원식 척살에 성공한 뒤 도쿄로 압송되는 도중 경관에게 남긴 말 -
 

의협심 강한 청년, 타국에서 고학하며 독립운동을 준비하다

양근환(梁槿煥, 1894.5.9~1950.9.15) 선생은 1894년 5월 9일 황해도 연백군 은천면 연남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얼굴이 둥글고 성격이 대담하며 강경하였다고 한다. 또한 어려서부터 용맹하고 무슨 일이든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성격이 있었다. 일제가 조선을 무력 침탈한 이후, 소년이었던 선생은 항상 조국의 독립을 절실히 염원하였다. 선생은 천도교인이었다고 하는데, 평소 일제의 조선강점을 지지하거나, 독립을 주장하지 않으면 매우 격분했다고 한다.

 

선생은 18세에 백천 읍내에 설립된 사립 동명학교(東明學校)를 졸업하고 20세가 되던 1914년, 서울에 올라와 공업전습소(工業傳習所)를 다녔다. 서울에 머물러 있는 동안 선생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더욱 강한 불만을 품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생은 고향집에 내려간 후 각처를 떠돌며 방랑하였다. 그러던 중 조선보병대에 입교하였는데, 재학 시절 일본인과 말다툼을 하다가 큰 싸움을 벌인 일이 있었다. 이 일로 몇 사람을 상하게 하여 경찰서에 체포되었다가 50일간 구류를 살기도 하였다. 
 

선생의 종형 되는 양진환(梁鎭煥)은 “원래 그가 성격이 급하고 항상 협기(俠氣: 호방하고 의협심이 강한기상)가 많았으며,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어 한문으로 소학과 맹자를 읽고 스스로 동명학교와 공업전습소를 졸업하였다.”고 전하였다. 또한 선생이 보병대에 들어간 이유는 체육을 배우기 위함으로, “운동에 특히 취미를 가졌고, 읽는 서적은 대개 정치에 관한 서적이었다.”고 한다. 이로 보아 선생은 어릴 적부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의협심이 강한 편이었고, 이를 위해 운동과 정치이론에 전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19년 3ㆍ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곧 고향에 내려가 만세 시위운동에 열렬히 참여했다. 하지만 일제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더 이상 국내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할 수 없게 되자, 그 해 9월 제국의 심장부인 일본 도쿄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선생은 곧 그곳에서 니혼(日本)대학 정치경제과(政治經濟科)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고향에 노부모와 형제들이 많은 관계로 늘 학자금이 부족하였다. 그러다 보니 낮에 국수장사와 인삼 행상을 해야 했고, 밤에는 인력거를 끌거나 신문 배달, 또는 철공장에 나가 일하는 등 힘겨운 고학생의 길을 걸어야 했다. 결국 선생은 가난으로 인해 더 이상의 학업을 포기하고 말았다.

 

노동과 고학을 병행하던 선생은 일본 여성 석정승자(石井勝子)와 혼인하여 딸 둘을 낳았다. 네 식구는 도쿄 시내인 우입구(牛込區) 조도전(早稻田) 학권정(鶴卷町) 65번지에 있는 조선물산상회 이은종(李殷宗)의 집에 함께 기거하였다. 도쿄에서 함께 공부하던 선생의 친구는 선생이 어렵게 노동하여 번 돈을 주위의 고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때때로 그들을 집으로 데려가 밥을 먹이는 일이 많았다고 했다. 또 항상 나라의 독립에 보탬이 되는 더 큰 일을 하기 위해 상해로 가려 하였으나, 부인과 두 자식이 있어 고민하였다고 증언했다.

 

한국 여성정치의 대모인 박순천(朴順天, 1898~1983) 여사의 회고에 의하면, 선생은 여러 번 당시 유학생이던 그녀의 뒤를 밟았다고 한다. 한번은 그가 하숙집까지 따라와 편지를 던지고 갔는데, 펴보니 ‘나는 상해서 온 독립군 테러단이다.’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또 한 번은 하숙집에 나타나 중국 옷을 한 벌 얻어 달라고 부탁했으나 구해주지 못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보면 당시 선생은 사전에 어떤 결심이 되어 있었고, 또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타국에서 고학하며 어렵게 가족을 부양하던 선생이 왜 도쿄 한복판에서 동족인 민원식(閔元植, 1887~1921) 을 처단해야 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국민협회(國民協會)가 어떤 단체이며, 그 협회장 민원식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민족반역행위에 앞장선 국민협회와 협회장 민원식

일제는 1919년 3ㆍ1운동으로 드러난 조선 민족의 뜨거운 독립열망을 무력으로 진압하였지만, 식민지 통치방식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즉, 독립운동의 열기를 무마시키기 위해 종래의 무단통치 대신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해야 했던 것이다. <동아일보>와 <개벽> 등 일간신문과 잡지의 발행을 허가하고, 집회ㆍ결사의 금지를 다소 완화하여 청년회를 비롯한 일부 임의단체의 설립도 허용하였다. 이로써 2년 만에 약 7천여 개의 사회단체가 창설되기에 이르렀다.

 

조선총독부의 이러한 조치는 식민지 통치질서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조선인들에게 일부 제한된 자유와 자치권을 줌으로써 사상동향을 파악하고 민심의 악화를 막고자 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문화정치를 통해 일제가 의도하는 것은 바로 친일세력의 육성을 통한 민족분열책이었다. 일제는 친일반동 단체인 국민협회를 서울에, 대동동지회를 평양에 각각 두었고, 일간 <시사신문>을 국민협회 기관으로 허가하였다. 또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 동포들의 노동운동이 활발해지자, 친일분자 박춘금으로 하여금 조선인상조회(후에 상애회)를 조직하게 하고 이를 통해 동족인 조선인들을 탄압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재일 유학생 중 학비 조달에 궁색한 이들에게 학비를 보조한다는 미끼로 친일세력으로 회유, 육성하는 공작을 시행하였다.

 

이러한 친일세력 육성에 가장 앞장선 단체가 바로 국민협회였다. 협회의 회장인 민원식은 일찍이 정치 협잡꾼으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었다. 그는 경기도 고양군수를 역임한 후, 총독부의 지도 아래 국민협회의 간판을 내걸고 그 회장에 취임하였다. 이 단체는 조선총독부의 후원을 받아 <시사신문>을 발간하여 내선일체론을 주장하며 조선인 참정권(參政權) 운동에 나섰다. 즉, 일본 의회의 중의원 의원선거법을 조선에도 실시하여 조선인도 일본 국정에 참여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조선인도 일본인과 똑같이 일본 국민 가운데 포함시킨다는 의미에서 그는 자기의 주장을 신일본주의라고 했다.

 

 

신일본주의는 일제가 식민통치를 위해 일관되게 내세운 내지연장주의와 내선일치, 혹은 동화정책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그것은 조선인으로 하여금 독립운동이나 민족사상, 조선어까지 완전히 포기하게 하고, 오로지 충실한 일본 신민이 되라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 사람으로서 그러한 운동을 제창한다거나 거기에 가담하는 것은 곧 민족반역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민원식은 애초 민씨 일족이 아니라, 평안도 출신의 나가(羅哥)였다고 한다. 그가 20대 무렵 서울로 상경해 보니, 민씨 집안이 유력하였음으로 민원식으로 개명하여 행세하였다. 이처럼 그는 타고난 처세술과 친일 매국행각으로 일본인들의 마음을 사 마침내 총독부 군수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다.

 

문화정책을 표방한 조선총독부의 정책 또한 민원식과 같은 정치협잡배를 거둬들이고 양육하는 방향으로 굳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일제는 조선 독립을 절대 부정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조선 자치론을 주장하는 것조차 일본 국책에 대한 반역으로 취급했다. 이와 같이 당시 일본 정치권의 조선 문제에 관한 인식은 매우 무책임ㆍ무성의 일변도였고, 총독정치 역시 동화정책 일변도로 나아갔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하에서 선생의 민원식 척살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민원식을 처단하고 상해행을 꿈꾸다
양근환 선생의 피체(被逮) 상황을 보도한 기사(<동아일보> 1921년 3월 4일자). "형사 9명의 경호중에 양근환 동경착(東京着)"이라는 제목으로 선생이 나가사키에서 붙잡혀 도쿄로 끌려온 상황과 당시 선생의 모습이 실려있다. 양근환 선생의 피체(被逮) 상황을 보도한 기사(<동아일보> 1921년 3월 4일자). "형사 9명의 경호중에 양근환 동경착(東京着)"이라는 제목으로 선생이 나가사키에서 붙잡혀 도쿄로 끌려온 상황과 당시 선생의 모습이 실려있다.

선생은 민원식이 서울에 국민협회를 만들고 그 회장이 되어 참정권 운동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분개하였다. 선생이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민원식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찬의(副贊議)의 관직을 갖고 한ㆍ일 양 민족의 보전과 동화를 고취하는데 전력하였다. 더구나 그는 조선민족에게 충실한 황국신민이 될 것을 강요하며 서울에 국민협회를 조직하고 스스로 독립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쳐 왔다. 그는 평소 조선에서도 중의원 의원선거법을 시행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 참정권 청원서에 서명한 이가 1만여 명에 이르렀다. 특히 그는 도쿄에 체류하면서 새로 정당을 조직해, 이를 발판으로 대대적인 친일 매국활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선생은 민원식과 같은 친일인사들이 참정권 청원운동을 벌인다는 것은 민족적 치욕이며, 이런 자의 소행을 그대로 방치해 두면 장차 친일파가 더욱 창궐하여 독립운동에 큰 방해가 될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리하여 단연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한 후, 비수를 품고 민원식이 체재한다는 도쿄역 호텔 제14호실로 찾아갔다. 1921년 음력 2월 16일 한낮이었다. 선생은 자신을 ‘이기령’이란 이름의 유학생으로 속이고 면담을 요청하여 민원식과 쉽게 대면할 수 있었다.

 

선생은 우선 민원식의 경계감을 풀기 위해 도쿄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 말하고, 유학생동우회에서 환영회를 열고자 하니 왕림하여 고견을 들려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리고 “요즘 국내 사정이 어떠한지요?”라고 물었다. 이에 민원식이 국내는 현재 아주 평온하다며 거만하게 대답하였다. 이에 선생은 지금 3천만 조선인 모두 궐기하여 독립을 요구하고 있는 터에 무슨 소리냐면서 “그대와 같은 자야말로 민족을 배반하는 자이다.”라고 호되게 질타하였다. 그러자 민원식은 독립운동자들을 모두 ‘불량 폭도’라고 매도하면서 오히려 반발하였다. 이에 격분한 선생이 언쟁을 벌이려 하자, 민원식은 벌써 벼루(硯)를 들어 그를 치려 하였다. 선생은 격분을 참을 수 없어서 품었던 비수를 뽑아 민원식의 배를 깊숙이 찔렀다. 민원식은 앞으로 거꾸러지면서 즉사하고 말았다. 면담을 시작한 지 20분도 채 안된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선생은 거사 후, 용하게도 몸을 피하여 호텔을 무사히 빠져 나왔다. 선생은 그날 밤 집에 돌아가지 않고 다음날 아침에서야 귀가하였다. 선생은 꽃 두 묶음을 사서 들어와 어린 두 딸에게 나눠주고, 양복으로 옷을 갈아입은 후 부인에게 잠시 친구 집에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당시 신문 보도에 의하면, 선생은 집을 나선 후 엄중한 경계망을 뚫고 곧장 나가사키(長崎)로 내려갔다. 나가사키 항구에는 상해로 떠나는 일본 객선 팔번환(八幡丸)이 2월 24일 오후 4시에 출발할 예정이었다. 선생은 이곳에서 하루 밤을 묵었는데, 저녁에도 태연하게 시내를 구경하고 돌아다녔다.

 

다음날 오후 2시경, 선생은 상해로 가는 팔번환(八幡丸) 3등 여객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전날 선생을 수상하게 여겨 검문을 했던 수상경찰서 순사가 뒤늦게 선생의 인상서(人相書: 범죄를 체포하기 위해 외모의 특징을 적어 돌리는 글)를 보고 뒤쫓아와 체포하고 말았다. 2시간만 버텼다면 상해로 도망하였을 것이었다. 체포된 후에도 선생은 매우 태연자약하게 행동하면서 조금도 겁내는 기색이 없었다고 한다. 선생은 각 신문사에서 나온 사진기자단 앞에서 여유 있는 포즈를 취하였고, 곧 도쿄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았다.

 

 

선생은 호송하는 경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기염을 토하였다고 한다.
“나는 학문도 정식 교육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론으로 일본인에게는 지지 않는다. 일본 사람은 조선 사람 중에는 조선독립을 찬성하는 사람도 있고 불찬성하는 사람도 있는 줄로 생각하지마는, 어찌 그럴 리가 있으랴. 조국의 독립은 누구든지 희망하는 것이다. 헌병 제도가 변하여 순사 제도가 되고 무단정치가 문화정치가 되는 것은, 결국 별 차이 없는 것이다. 조선독립을 일본 사람도 자기 일같이 생각하여 주기를 바란다.”

 

민원식 척살 사건으로 인해 천도교 도쿄 전교실장(傳敎室長) 방정환ㆍ박달성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연루 혐의를 받아 검속되었다. 박순천 또한 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곧 선생의 단독 범행임이 드러나 모두 방면되었다.
 

당당한 법정투쟁과 그 이후
1921년 음력 5월 2일 도쿄지방법원에서 선생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다. 공판정에는 한인 유학생들과 일본인 신문기자 등이 운집하여 초만원을 이루었다. 선생은 당당한 기세로 입정하여 조금도 후회하거나 굴함이 없이 자기 소행에 관하여 옳은 일을 하였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재판장이 총독 정치 밑에서 조선 사람의 생명과 재산 보호가 합병 이전과 비교하여 어떠하냐고 묻자, 선생은 우리 동포의 생명과 재산이 일본의 압제 아래에서 아무런 보장도 받지 못하고 있으며, 3천만 민족은 조국의 독립 회복을 절규하며 극도의 치안부재의 상태에 있다고 실정을 폭로하였다. 이에 검사는 사형을 구형하였고, 변호사는 상해치사의 일례이므로 가벼운 형을 줄 것을 주장했다. 이 변호사는 당시 일본 법조인 중 제1인자였으며, 귀족원 의원을 지낸 바 있어 105인사건과 3ㆍ1운동의 대표 33인 공판에도 변론한 유지였다.
 

선생의 공판 도중 방청석에서 젊은 일본 여성이 뛰쳐나와 “의로운 사람 양근환을 죽이는 것은 일본의 수치다. 유죄 판결에 절대 반대한다.”며 항의하여 밖으로 쫓겨나는 일도 벌어졌다. 이에 재판소 측은 더욱 경계를 엄중히 하여 장내에 순사를 배치하고 방청석에는 수효를 제한하여 입장케 했으며, 나머지 다수의 군중을 모두 몰아낸 후 심문을 개시하였다.

 

결국 일본 재판부는 최종 언도 공판에서 살의를 품고한 행동임에 틀림없다 하여 유죄로 판정하고 무기 징역을 선고했다. 사형 대신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음에도 선생은 별로 기쁜 기색도 없이 시종일관 태연자약했다. 이후 선생은 감옥으로 호송되어 12년이라는 긴 수형생활에 들어갔다.

 

무기징역의 판결 선고를 받은 1921년, 당시 선생의 나이는 28세였다. 이후 선생은 일본 각지 형무소를 전전하다가 12년이 지난 1933년이 되어서야 석방되었다. 하지만 이미 40세의 장년이 되어 몸과 마음이 고단하고 피폐한 상태였다. 고향에 돌아왔으나, 국사범으로서의 감시와 통제 아래 꼼짝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결국 선생은 고단한 삶을 달래며 지내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의 기쁨은 누구보다 컸지만, 몸과 마음은 이미 쇠진하여 재기할 기력을 찾지 못하였다. 해방 후 에는 ‘혁신탐정사’를 조직하여 반공투쟁에 앞장서기도 했으나, 설상가상으로 남북한 이념대립의 와중에 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만나 서울 종로구 중학동 자택에서 북한군에 납치되어 1950년 9월 15일 경기도 파주에서 처형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조재곤(국민대 국사학과 박사과정)

 

 

참고문헌

帝國實業會, {帝國實業會商務細則附則}, 1908. 9. 5.

細井肇, {現代漢城の風雲と名士}, 日韓書房, 1910.

朝鮮總督府, 噫 閔元植氏, {朝鮮}, 1921. 3.

{帝國議會衆議院議事速記錄}.

朝鮮參政權要求建白書, {時事評論} 1, 1922. 4.

韓國史料硏究所, 大正 九年 六月 朝鮮人 槪況, {朝鮮統治史料 7, 1971.}

 

     

직업적 친일분자

  • 민원식 참정권 청원운동의 주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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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우순 내선일체론의 나팔수
  • 이각종 황국신민화운동의 기수
  • 박석윤 항일무장투쟁 파괴|분열의 선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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