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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朝鮮王陵,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능(陵) - 2. (7) 제7대 세조(世祖) _ 광릉 光陵

草霧 2013. 7. 31. 16:51

 

 

신들의 정원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조선왕릉

 

 

[ 朝鮮王陵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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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제7대 세조(世祖, 1417-1468) _ 광릉 光陵

 

 

 

 

왕릉은 조선 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들의 무덤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선왕릉은 42(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 묘는 64기이다.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120(40, 14, 66) 중 현재 비공개하고 있는 지역은 사적 12곳임(3, 4, 5)입니다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폐위(廢位)된 묘() 2()

황제릉(皇帝陵) 2()

왕릉 35

 

1. 추존이라는 미명으로, 역사세우기

 

추존(追尊)함길도 8

 

2. 왕조, 문을 열다

 

1대 태조 (太祖, 1335-1408) _ 건원릉健元陵, 제릉齊陵, 정릉 貞陵

건원릉建元陵 | 조선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정릉貞陵 |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2대 정종 (定宗, 1357-1419) _ 후릉 厚陵

 

3대 태종 (太宗, 1367-1422) _ 헌릉 獻陵

헌릉獻陵 | 철권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4대 세종 (世宗, 1397-1450) _ 영릉 英陵

영릉英陵 |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5대 문종 (文宗, 1414-1452) _ 현릉 顯陵

현릉顯陵 | 세종의 분신 문종과 현덕왕후

 

6대 단종 (端宗, 1441-1457) _ 장릉莊陵, 사릉思陵

장릉莊陵 | 비운의 왕 단종

사릉思陵 | 가장 슬픈 왕비 정순왕후

 

7대 세조 (世祖, 1417-1468) _ 광릉 光陵

광릉光陵 |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와 정희왕후

 

추존(追尊)왕 덕종 (德宗, 1438-1457) _ 경릉 敬陵

경릉敬陵 | 요절한 덕종과 파란의 소혜왕후

 

8대 예종 (睿宗, 1450-1469) _ 창릉昌陵, 공릉恭陵

창릉昌陵 | 유약한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9대 성종 (成宗, 1457-1494) _ 선릉宣陵, 순릉順陵, 회묘 懷墓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성종과 정현왕후

 

3. 왕조, 산을 넘다

 

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_ 연산군묘 燕山君墓

 

11대 중종(中宗, 1488-1544) _ 정릉靖陵, 온릉溫陵, 희릉禧陵, 태릉 泰陵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온릉溫陵 |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

희릉禧陵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장경왕후

태릉泰陵 | 불교를 사랑한 문정왕후

 

12대 인종 (仁宗, 1515-1545) _ 효릉 孝陵

효릉孝陵 | 독살설과 함께 잠든 인종

 

13대 명종(明宗, 1534-1567) _ 강릉 康陵, 순창원 順昌園

강릉康陵 | 외척의 농단에 휘둘린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

 

14대 선조 (宣祖, 1552-1608) _ 목릉 穆陵, 성묘 成墓, 순강원 順康園

목릉穆陵 | 서자 출신 왕 선조와 의인왕후 그리고 인목왕후

 

4. 조선, 또 다시 위기를 맞다

 

15대 광해군 (光海君, 1575-1641) _ 광해군묘 光海君墓

 

추존(追尊)왕 원종 (元宗, 1580-1619) _ 장릉 章陵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과 인헌왕후

 

5. 왕조, 반석을 다지다

 

16대 인조 (仁祖, 1595-1649) _ 장릉 長陵, 휘릉 徽陵, 소경원 昭慶園, 영회원 永懷園

장릉長陵 | 가장 용렬한 왕 인조와 인렬왕후

휘릉徽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장렬왕후

 

6. 조선, 당쟁에 휩싸이다

 

17대 효종 (孝宗, 1619-1659) _ 영릉 寧陵

영릉寧陵 |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과 인선왕후

 

18대 현종 (顯宗, 1641-1674) _ 숭릉 崇陵

숭릉崇陵 | 외국에서 태어난 왕 현종과 과격한 성품의 명성왕후

 

7. 환국정치로 왕권을 다지다

 

19대 숙종 (肅宗, 1661-1720) _ 명릉明陵, 익릉 翼陵, 대빈묘大嬪墓, 소령원昭寧園

명릉明陵 | 차마폭에 휩싸였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익릉翼陵 | 꽃피우지 못하고 잠든 인경왕후

 

20대 경종 (景宗, 1688-1724) _ 의릉懿陵, 혜릉惠陵

의릉懿陵 | 식물임금 경종과 선의왕후

혜릉惠陵 | 세자빈 신분에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

 

8. 조선, 르네상스를 맞다

 

21대 영조 (英祖, 1694-1776) _ 원릉元陵, 홍릉弘陵, 수경원綏慶園, 수길원 綏吉園

원릉元陵 | 묻히고 싶은 곳에 잠들지 못한 영조와 정순왕후

홍릉弘陵 | 무수리 출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정성왕후

 

추존(追尊)왕 진종(眞宗) _ 영릉永陵

 

추존(追尊)왕 장조(사도세자 莊祖) _ 융릉隆陵, 의령원 懿寧園

융릉隆陵 |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왕후

 

22대 정조(正祖, 1752-1800) _ 건릉健陵, 휘경원徽慶園, 효창원 孝昌園

건릉健陵 | 개혁군주 정조와 효의왕후

 

9. 조선, 세도정치에 휘둘리다

 

23대 순조 (純祖, 1790-1834) _ 인릉仁陵

인릉仁陵 | 순조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지 순원왕후

 

추존(追尊)왕 익종 (翼宗, 문조 文祖) _ 수릉綏陵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24대 헌종 (憲宗, 1827-1849) _ 경릉景陵

경릉景陵 | 풍류를 사랑했던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

 

25대 철종 (哲宗, 1831-1863) _ 예릉睿陵

예릉睿陵 | 강화도령 철종과 철인왕후

 

10. 오백 년 왕조, 문을 닫다

 

26대 고종황제 (高宗, 1852-1919) _ 홍릉洪陵, 영휘원永徽園, 흥원 興園

홍릉洪陵 | 망국에 중심에 서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27대 순종황제 (純宗, 1874-1926) _ 유릉裕陵, 영원英園, 숭인원 崇仁園, 회인원 懷仁園

유릉裕陵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과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

 

 

 

 

 

7대 세조(世祖, 1417-1468) _ 광릉 光陵

 

    Joeseon Sejo01.jpg

 

피를 묻혀 천하를 얻어도 마음은 가시밭길이라

    

광릉 光陵

 

광릉 - 세조  

 

세조(世祖, 1417-1468) 1468,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 尹氏, 1418-1483) 1483, 경기 남양주 197

 

7대 세조(世祖) 광릉 세번째 작은이미지7대 세조(世祖) 광릉 두번째 작은이미지7대 세조(世祖) 광릉 첫번째 작은이미지

 

 

조선세조 광릉광릉은 같은 산줄기에 좌우 언덕을 달리하여 왕과 왕비를 각각 따로 봉안하고 두 능의 중간 지점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우는 형식인 동원이강

 

(同原異岡)릉으로서, 이러한 형태의 능으로는 최초로 조영되었다. 좌측 능선의 봉분이 세조의 능이며 오른쪽의 봉분이 정희왕후의 능이다. 광릉은 다른 왕릉에 비해 간소하게 조영되었다.

 

세조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세조의 유언에 따라 이전까지 석실로 되어 있던 능을 회격(灰隔)으로 바꾸어 부역 인원을 반으로 줄이고 비용을 절감하였다. 또한 봉분 주위에 둘렀던 병풍석을 없애면서 병풍석에 새겼던 십이지신상은 난간의 동자석주에 옮겨 새기는 등의 상설 제도를 개혁하였다. 능하구역에는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르는 참도가 생략되어 있다. 이렇게 간소하게 개혁된 상설제도는 이후의 왕릉 조성에 모범이 되었다.

    

 

세조의 능은 서울로부터 다소 떨어지고 골이 깊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있다. 광릉자리는 원래 다른 이의 묘자리였으나 풍수상 길지라 하여 묘자리의 주인이 세조에게 바쳤다고 전해지며 일부 풍수가들은 세조의 광릉 자리가 좋아 조선 500여 년을 세조의 후손들이 통치하였다고 전하기도 한다. 1468(예종 즉위) 1128일 주엽산 아래 세조를 예장하고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483(성종 14) 330일 정희왕후가 승하하자 같은 해 612일 광릉 동쪽 언덕에 예장하였다.

    

 

능 수호군으로 이속된 광릉 인근 마을 주민

 

   

 

예종실록1469(예종 1) 813일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호조(戶曹)에서 아뢰기를, “일찍이 경기의 광주, 지평, 양근, 가평, 포천, 영평, 양주, 적성, 마전, 삭녕, 장단 등 여러 고을에서 유이(流移)한 백성들을 본 고을로 돌려보낸 뒤에 복호(復戶)하되, 포천현(抱川縣)의 백성은 광릉(光陵)의 수호군(守護軍)으로 이속시키고 경작하는 땅에 대한 공부(貢賦)를 감해 줄 것을 의논하여 아뢰라고 명하셨습니다.

 

    광릉-광릉 홈페이지를 찾아주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청컨대, 제도 관찰사로 하여금 쇄환(刷還)하고 계문(啓聞)하게 한 뒤에 3년 동안 복호하고, 그 전지(田地)는 연한(年限)에 구애하지 말고 도로 주어서 생업에 안정되게 하소서. 포천 백성으로서 지금 광릉의 수호군으로 소속된 자 28인에게는, 청컨대 경작하는 땅의 공부(貢賦)를 감해 주소서. 양주 백성으로서 수호군으로 소속된 자 42인의 공부도 포천의 예()에 따라 견감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울창한 숲이 조성된 산자락에 위치한 광릉의 전경

 

위의 기록처럼 조선시대 왕릉 인근 마을의 사람들에게는 왕릉을 관리하는 책무가 부여되었다.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에 이르는 주민들이 왕릉의 수호군이 되어 매일 조를 짜서 왕릉 주위를 순찰하였다. 왕릉을 둘러싼 산림의 병충해 피해가 심각하면 인근 주민들이 능 부근의 20리 까지 직접 손으로 벌레를 잡아 없앴다. 이들을 총괄 감독하는 것은 종9품 관리인 능참봉이었다.

 

 광릉(세조)20090905-18.JPG

 

조카인 단종(端宗)으로부터 왕위를 넘겨받아 13년 3개월간 왕위에 있었던 세조(世祖)가 1468년 9월 8일 현재의 창경궁인 수강궁(壽康宮)에서 승하하였다. 신병이 있어 예종(睿宗)에게 왕위를 넘겨준 다음 날이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죽은 뒤에 묻힐 자리를 정해 두지는 않았다.

 

파일:세조존영도 2.jpg문종(文宗)의 능지 선정, 장남인 의경세자(懿敬世子)와 빈(仁粹大妃, 昭惠王后)의 능지 선정, 작은 며느리이며 훗날 왕위에 오른 예종의 세자시절 빈이었던 장순왕후(章順王后)의 능지 선정에 깊이 관여를 하였던 왕이었기에 참 의아스럽다. 더욱이 자신이 왕의 임무를 수행중임에도 장남과 둘째 며느리의 무덤 선정 시에는 현장을 직접 둘러보고 능지로 결정을 내릴 만큼 풍수논리를 따르는 왕이었기에 자신이 묻힐 터를 정해둘 만도 했지만 그렇지를 않았다.

 

조선시대 27명의 왕 중에서 풍수를 선호했던 왕으로 세종(世宗)과 세조, 그리고 정조(正祖)를 꼽는데 누구도 주저하지를 않는다. 그러나 세 임금이 풍수를 활용하는 방법은 각기 다르다.

 

세조는 능지 선정 시에 수많은 대신과 상지관(相地官)으로 하여금 현장을 다녀오게 한 뒤 궁궐에서 토론을 벌인 후 현장을 본인이 직접 확인하여 그 자리에서 결정을 내린다. 의경세자가 승하하자 19군데의 후보지를 22명의 대신으로 하여금 상지관을 대동하고 현장을 나누어 다녀오게 하였을 정도다. 그런 과정에서 경회루(慶會樓)에서 대신과 상지관과 함께 벌인 주산(主山)에 대한 논쟁은 매우 흥미롭다.

 

 둘째, 능지 선정 시에 다른 사람의 무덤 자리를 선호한다. 의경세자의 무덤인 경릉(敬陵)은 대제학을 지낸 정이(鄭易)의 무덤 자리였으며, 장순왕후의 무덤자리인 공릉(恭陵)은 조선 초기 동북면도순문사를 지낸 강회백(姜淮伯)의 어머니 무덤 자리였다.

 

셋째, 자신이 좋아하는 풍수학인과 싫어하는 풍수학인을 뚜렷하게 차별대우를 하였다. 세종대에 세자빈(顯德王后)이 승하하여 경기도 안산에서 능지를 조성하던 중에 전농시(典農寺)의 노비 목효지(睦孝智)가 자리가 좋지 않아 아들이 죽을 흉지(凶地)라는 상소를 올리자 무덤의 방향을 고쳐 장사를 지낸 일이 있었다. 당시에 세종 임금은 목효지의 용기와 마음을 읽어 풍수공부를 지속적으로 할 수 있도록 천인을 면해주고 양인(良人)의 신분을 주어 풍수학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그런 목효지가 문종의 능지 선정에 또다시 흉지라는 상소를 올리자 왕위를 넘보던 세조의 눈 밖에 나게 되었고, 결국은 왕위에 즉위 하자마자 그를 교수형에 처해 버렸다. 그러나 세조가 좋아했던 풍수학인 안효례(安孝禮)는 당상관(堂上官)에까지 오른다.

 

이와 같은 면이 세조의 사후(死後)인 능지 선정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처음에는 태종(太宗)과 세종의 능지가 있는 서울 내곡동 근처를 살폈으나 이는 외형적인 행동이었고, 결국은 다른 사람의 무덤 자리를 중심으로 능지를 찾아 나선다. 광주(廣州)에 있는 보문각직제학을 지냈으며 후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된 이지직(李之直), 풍양(豊壤)에 있는 영의정을 지낸 정창손의 아버지 정흠지(鄭欽之), 행호군(行護軍) 유견(兪堅)의 무덤 자리를 중심으로 살폈다.

 

여러 대신과 상지관 안효례는 정흠지의 무덤자리가 능지로 적합하다고 하였으나 또 다른 상지관 최호원(崔灝元) 만은 쓸 수 없다고 하였다. 임금이 현지로 나가 살펴본 후 전에 고했던 말과 현장에서의 말이 다른 최호원을 의금부에 가두어 버리고 정흠지의 무덤자리를 능지로 정하니 그 곳이 곧 광릉(光陵)이다. 예종은 6일 만에 최호원을 석방시키는데 이 또한 세조의 유교라고 했다.

 

세조를 같은 해 11월 28일 축시(丑時)에 정남향(子坐午向)으로 장사를 지냈으며, 조선시대 첫 수렴청정을 하였던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성종 14년(1483) 4월 1일 온양(溫陽) 온천에서 요양 중에 승하하자 같은 해 6월 12일 인시(寅時)에 광릉 왼쪽 언덕에 축좌미향(丑坐未向)으로 장사를 지냈다. 이와 같이 같은 국(局)내에 각기 다른 언덕에 능을 조성하는 형식을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라 한다. (선문대 최낙기 교수)

 

 

 

광릉 숲 이야기

 

파일:광릉.JPG 

 

광릉 문화축제

 

1. 광릉 옆 수목원 이야기

조선 7대 임금 세조의 능인 광릉의 주위로는 다양한 생물들이 자생하고 있는 울창한 숲이 형성되어 있다. 이 숲은 산림청의 연구기관에서 꾸준히 관리하다가 1984년 광릉 수목원으로 조성되었으며, 1999년에는 국립 수목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운영하고 있다. 광릉뿐만 아니라 서울과 서울 근교의 조선 왕릉 부근에는 규모의 차이는 있으나 항상 푸른 숲이 조성되어 있어 도심 속의 쉼터로 기능하고 있다. 광릉의 숲은 세조의 유언대로 풀 한 포기 뽑지 못할 정도로 잘 보호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광릉의 숲은 세조의 유언대로 풀 한 포기 뽑지 못할 정도로 잘 보호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2. 산으로 겹겹이 에워싸인 능지

왜 조선 왕릉 부근에는 이렇게 항상 숲이 있을까? 우선 왕릉의 입지를 선정할 때에는 항상 풍수지리상의 길지를 고려하였기 때문이다. 풍수지리적 길지의 요건으로서는 여러 기능을 하는 산자락이 능침의 후면은 물론이고 좌우를 감싸는 지세가 필요하다. 따라서 능역의 대부분이 자연 산림 공간으로 겹겹이 에워싸인 곳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에 더하여 능역에는 다양한 나무를 인공적으로 심어 조경을 하였다. 능침 공간과 제향 공간에는 잔디를 깔아 사초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동선을 따라 진달래 등의 꽃나무를 심고 연못 주변에는 버드나무를 심었다. 특히 봉분의 좌우 및 후면에는 소나무를 심고, 전면의 낮은 지대에는 오리나무를 심는 것이 능침 공간의 전형적인 방식이었다.

 

3. 광릉 조영 당시 심은 진달래와 잣나무

(우472-864)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광릉수목원로 354. 구시외버스터미널(의정부동)에서 광릉내행 버스(21번) 이용하시면 오실 수 있습니다.광릉을 조영할 때, 능 조성의 전 과정에 대한 기록을 엮어 만든 광릉지(光陵志)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금천교를 지나 향로를 따라 좌우에 진달래를 수 백 그루 식재하고 재헌(재실) 북쪽 창문에까지 두견화를 수 백 그루 식재하였다. 또 서 동구 십리의 길에는 수많은 전나무와 측백나무 혹은 잣나무가 있으며 동 동구 5리 정도의 길에는 전나무, 잣나무와 더불어 진달래를 서로 맞대어 심어 놓았다. 또 서쪽 담장 밑에 화훼류를 심어 무성하게 하였다. 위의 기록은 조선 왕릉의 산림이 얼마나 철저히 조성 및 관리되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가야금 타는 왕

 

    Joeseon Sejo01.jpg

 

세조대왕 수양대군(世祖, 이유, 1417-1468, 재위 14)

광릉세조는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1417(태종 17) 929일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하여 학문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무예에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대군 시절, 세종의 명을 받아 불교 서적 번역을 관장하고, 향악의 악보 정리에도 힘을 쏟았으며, 1452(문종 2) 관습도감 도제조에 임명되어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기도 했다.

 

문종이 승하하고 나이어린 조카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는 측근인 권람, 한명회 등과 결탁하여 1453(단종 1) 10월 계유정난을 일으켜 조선 7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왕권의 강화를 위하여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하고 전제왕권제에 가까운 육조직계제를 단행했으며, 집현전을 폐지하고 경연을 없앴다. 왕명 출납 기능이 있는 승정원을 강화시키고, 호패법을 복원하였으며, 군제 정비에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세조는 이와 같은 많은 치적을 세워 조선 초기 왕권 확립에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사육신으로 불리는 집현전 학사 출신 관료들이 단종 복위를 계획한 사건이 발각되자 이들을 모두 살해하였을 뿐 아니라 선왕이자 조카인 단종을 유배지에서 죽이는 등 수많은 정적의 피를 보았다.

 

세조계유정난은 1453(단종 1) 단종 보위 세력의 정치 주도에 불만을 품은 수양대군이 일으킨 쿠데타였다. 14531010일 수양대군은 한명회, 권람, 홍달손을 집으로 불러 자신이 직접 반대파 세력인 김종서를 제거할 것임을 알렸다. 그리고는 미리 권람을 시켜 김종서의 집을 엿보게 한 후 향정, 유소, 종 임운과 함께 바로 김종서의 집으로 향하였고, 수양대군의 명을 받은 임운은 철퇴를 내리쳐 김종서를 살해하였다.

 

다음날 새벽, 수양대군은 단종이 있는 시좌소로 가서 환관을 통해 현재의 상황에 대하여 단종에게 형식적인 보고를 하였다. 그리고 궐 안이 좁다는 이유를 내세워 재상들이 시종을 두고 혼자 들어오게 하여 그들을 순서대로 죽이는 방법으로 미리 작성된 살생부에 오른 인물들에 대한 살육을 시작하였다. 수양대군은 이러한 절차를 거쳐 영의정, 이조판서, 병조판서, 내외병마도통사 등을 겸임하며 실제 정권과 군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여가 지난 145562일 단종으로부터 옥새를 건네받고 6117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세조가 가야금을 타자 학이 춤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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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부 표창

조선 초기 결혼 나이는?

역사란 무엇인가, 권력이란 무엇인가

세조, 상원사 계곡에서 문수동자를 만나다

 

 

 

세조는 피부에 종기가 생기고 나중에는 피부에 고름이 생기다가 문둥병으로 이어졌다. 어의들도 치료를 못하자 그는 그 치료를 위해 온천욕을 즐겨 다녔다. 아산의 온양온천 등에 행궁하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병세가 날이 가면 갈수록 더 악화되어 감으로 1468년 세조는 자신의 건강(문둥병)이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음을 깨닫고, 한명회 및 신숙주, 구치관 등을 불러 그들에게 왕세자 해양대군(예종)을 잘 보필해줄 것을 부탁하였으며 9월 7일에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다음 날인 1468년 9월 8일에 문둥병으로 승하하였다.

 

 

피부에 고름이 생기다가 문둥병으로 이어졌는데, 전설에 의하면 단종의 모친인 현덕왕후의 원혼이 세조의 꿈에 나타나 내 아들을 죽인 원수라며 침을 뱉은 이후로 병증이 심해졌다 한다.

 

어의들도 치료를 못하자 그는 그 치료를 위해 온천욕을 즐겨 다녔으며, 아산의 온양온천 등에 행궁하기도 했다. 한번은 오대산 상원사 문수보살상 앞에서 100일 기도를 했다. 기도를 마치고 몸이 가려워 혼자 목욕을 하는데, 지나가는 동자승이 있어서 등을 밀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네가 나가서 행여나 사람을 만나더라도 상감 옥체에 손을 대고 흉한 종기를 씻어드렸다는 얘기를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더니 동자승이 미소를 지으며 "잘 알겠습니다. 상감께서도 후일에 누구를 보시던지 오대산에 가서 '문수동자'를 친견했다는 말씀을 하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하는 말과 함께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현재 오대산 상원사 문수전에는 세조가 보았다는 목조 '문수동자상'이 있다.

   

순조의 어머니 수빈 박씨가 잠든 휘경원의 전경.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 尹氏, 1418-1483)

관련사진정희왕후는 판중추원사 윤번의 딸로 1418(태종 18)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났다. 1428(세종 10) 수양대군과 혼인하여 낙랑부대부인에 봉해졌으며, 세조가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남편인 세조가 먼저 승하한 뒤 그녀의 둘째 아들인 예종이 즉위하였는데, 선천적으로 병약하였던지라 재위 12개월만에 예종 역시 승하하였다. 당시 선왕이 누구로 하여금 뒤를 잇게 할 것인가를 정하지 않고 승하하게 되면, 그 권한은 대비에게 주어졌다.

 

정희왕후는 이 권한을 통해, 젊은 나이에 요절한 자신의 첫째 아들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자산군을 왕으로 지목하여 대통을 잇게 했다. 그리고는 예종대의 섭정을 이어 7년이라는 기간 동안 수렴청정을 행하게 되었다. 이는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이었다. 1483(성종 14) 33066세의 나이로 온양행궁에서 승하하여 같은 해 612일 광릉 동쪽 언덕에 예장되었다.

 

 포토 보기조선 선조 때의 이조판서 이기가 쓴 글들을 모은 문집송와잡설(松窩雜說)에는 정희왕후 윤씨가 수양대군의 부인이 된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왕실의 혼사를 알아보던 중, 궁궐의 감찰 상궁과 보모상궁이 윤씨 집안에 수양대군에게 적합한 배후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갔는데, 사실 이때 후보자는 정희왕후의 언니였다고 한다.

 

그런데 궁중에서 사람이 나왔다는 말에 정희왕후가 어머니 이씨 뒤에 숨어서 어른들 이야기를 듣다가 감찰상궁의 눈에 띄고 만 것이다. 언니보다 정희왕후의 자태가 더 비범하다고 대궐에 알려지면서 그녀는 언니 대신 왕실에서 가례를 올리고 낙랑부대부인으로 봉해졌다.

 

그 후 그녀는 계유정난 당시 사전 정보가 누설되어 수양대군이 거사를 망설이자 손수 갑옷을 입혀 그에게 용병을 결행하게 할 만큼 결단력이 강한 여장부였다. 1468년 그의 아들 예종이 19세에 왕위에 오르자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을 하고, 이후 손자 성종이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기도 하였다.

 

 

 

 

 

 

 

 

현황(現況)

    

    

 

 

조선조 王室世系表 [ 27, 517, 1392 - 1910 ]

 

 

 

 

() 13()

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익종(翼宗) 수릉(綏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장조(莊祖) 융릉(隆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

진종(眞宗) 영릉(永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원종(元宗) 장릉(章陵 : 사적 제202) : 경기 김포시 김포읍(金浦邑) 풍무동(豊舞洞)

덕종(德宗) 경릉(敬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폐위(廢位)된 묘() 2()

15대 광해군(第十五代 光海君) 광해군묘(光海君墓 : 사적 제363)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0대 연산군(第十代 燕山君)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 : 서울 도봉구(道峰區) 방학동

황제릉(皇帝陵) 2()

27대 순종(第二十七代 純宗) 유릉(裕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26대 고종(第二十六代 高宗) 홍릉(洪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南楊州)

왕릉 35

25대 철종(第二十五代 哲宗) 예릉(睿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4대 헌종(第二十四代 憲宗) 경릉(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23대 순조(第二十三代 純祖) 인릉(仁陵 : 사적 제194) : 서울 서초구(瑞草區) 내곡동(內谷洞)

22대 정조(第二十二代 正祖) 건릉(健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홍릉(弘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원릉(元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혜릉(惠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의릉(懿陵 : 사적 제204) : 서울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대빈묘(大嬪墓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익릉(翼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명릉(明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18대 현종(第十八代 顯宗) 숭릉(崇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7대 효종(第十七代 孝宗) 영릉(寧陵 : 사적 제195) : 경기 여주시(驪州市) 능서면(陵西面)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휘릉(徽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장릉(長陵 : 사적 제203) : 경기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성묘(成墓 : 사적 제365)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목릉(穆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3대 명종(第十三代 明宗) 강릉(康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2대 인종(第十二代 仁宗) 효릉(孝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희릉(禧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온릉(溫陵 : 사적 제210) : 경기(京畿)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정릉(靖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三成洞) 테헤란로

9대 성종(第九代 成宗) 회묘(懷墓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순릉(順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선릉(宣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Teheran)

8대 예종(第八代 睿宗) 공릉(恭陵 : 사적 제205)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조리읍(條里邑)

8대 예종(第八代 睿宗) 창릉(昌陵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7대 세조(第七代 世祖) 광릉(光陵 : 사적 제197)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와 포천군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사릉(思陵 : 사적 제209)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읍(眞乾邑)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장릉(莊陵 : 사적 제196) : 강원(江原)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5대 문종(第五代 文宗) 현릉(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4대 세종(第四代 世宗)

3대 태종(第三代 太宗)

2대 정종(第二代 定宗)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정릉(貞陵 : 사적 제208) : 서울 성북구 정릉2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제릉(齊陵) :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 판문군(板門郡) 상도리(上道里)

1대 태조(第一代 太祖) 건원릉(健元陵 : 사적 제193)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조선왕릉(朝鮮王陵)의 계보

 

 

 

 

 

 

 

 

목조-덕릉 효공왕후 이씨-안릉

익조-지릉 정숙왕후 최씨-숙릉 , 손씨

도조-의릉 경순왕후 박씨-순릉, 조씨

환조-정릉 의혜왕후 최씨-화릉, 이씨, 정빈 김씨

태조-건원릉 신의왕후 한씨-제릉 신덕왕후 강씨-정릉

정종-후릉 정안왕후 김씨-후릉

태종-헌릉 원경왕후 민씨-헌릉

세종-영릉 소헌왕후 심씨-영릉

문종-현릉 현덕왕후 권씨-현릉

단종-장릉 정순왕후 송씨-사릉

세조-광릉 정희왕후 윤씨-광릉

예종-창릉 장순왕후 한씨-공릉 안순왕후 한씨-창릉

성종-선릉 공혜왕후 한씨-순릉 폐비 윤씨-회묘 정현왕후 윤씨-선릉

연산군-연산군묘 폐비 신씨-연산군묘

중종-정릉 단경왕후 신씨-온릉 장경왕후 윤씨-희릉 문정왕후 윤씨-태릉

인종-효릉 인성왕후 박씨-효릉

명종-강릉 인순왕후 심씨-강릉

선조-목릉 의인왕후 박씨-목릉 인목왕후 김씨-목릉

광해군-광해군묘 폐비유씨-광해군묘

인조-장릉 인렬왕후 한씨-장릉 장렬왕후 조씨-휘릉

효종-영릉 인선왕후 장씨-영릉

현종-숭릉 명성왕후 김씨-숭릉

숙종-명릉 인경왕후 김씨-익릉 인현왕후 민씨-명릉 인원왕후 김씨-명릉

경종-의릉 단의왕후 심씨-혜릉 선의왕후 어씨-의릉

영조-원릉 정성왕후 서씨-홍릉 정순왕후 김씨-원릉

정조-건릉 효의왕후 김씨-건릉

순조-인릉 순원왕후 김씨-인릉

헌종-경릉 효현왕후 김씨-경릉 효정왕후 홍씨-경릉

철종-예릉 철인왕후 김씨-예릉

고종-홍릉 명성황후 민씨-홍릉

순종-유릉 순명효황후 민씨-유릉 순정효황후 윤씨-유릉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