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정원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조선왕릉
[ 朝鮮王陵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능 (陵) - 2
(6) 제6대 단종(端宗, 1441-1457)
_ <장릉莊陵>, <사릉思陵>
왕릉은 조선 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들의 무덤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선왕릉은 42기 (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기, 묘는 64기이다.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園)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墓)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120기(능40, 원14, 묘66) 중 현재 비공개하고 있는 지역은 사적 12곳임(능3, 원4, 묘5)입니다 사후에 왕(王)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기(基) 폐위(廢位)된 묘(墓) 2기(基) 황제릉(皇帝陵) 2기(基) 왕릉 35기
1. 추존이라는 미명으로, 역사세우기
추존(追尊)왕 ‘함길도 8릉’
2. 왕조, 문을 열다
제1대 태조 (太祖, 1335-1408) _ 건원릉健元陵, 제릉齊陵, 정릉 貞陵 건원릉建元陵 | 조선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정릉貞陵 |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제2대 정종 (定宗, 1357-1419) _ 후릉 厚陵
제3대 태종 (太宗, 1367-1422) _ 헌릉 獻陵 헌릉獻陵 | 철권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제4대 세종 (世宗, 1397-1450) _ 영릉 英陵 영릉英陵 |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제5대 문종 (文宗, 1414-1452) _ 현릉 顯陵 현릉顯陵 | 세종의 분신 문종과 현덕왕후
제6대 단종 (端宗, 1441-1457) _ 장릉莊陵, 사릉思陵 장릉莊陵 | 비운의 왕 단종 사릉思陵 | 가장 슬픈 왕비 정순왕후
제7대 세조 (世祖, 1417-1468) _ 광릉 光陵 광릉光陵 |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와 정희왕후
추존(追尊)왕 덕종 (德宗, 1438-1457) _ 경릉 敬陵 경릉敬陵 | 요절한 덕종과 파란의 소혜왕후
제8대 예종 (睿宗, 1450-1469) _ 창릉昌陵, 공릉恭陵 창릉昌陵 | 유약한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제9대 성종 (成宗, 1457-1494) _ 선릉宣陵, 순릉順陵, 회묘 懷墓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성종과 정현왕후
3. 왕조, 산을 넘다
제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_ 연산군묘 燕山君墓
제11대 중종(中宗, 1488-1544) _ 정릉靖陵, 온릉溫陵, 희릉禧陵, 태릉 泰陵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온릉溫陵 |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 희릉禧陵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장경왕후 태릉泰陵 | 불교를 사랑한 문정왕후
제12대 인종 (仁宗, 1515-1545) _ 효릉 孝陵 효릉孝陵 | 독살설과 함께 잠든 인종
제13대 명종(明宗, 1534-1567) _ 강릉 康陵, 순창원 順昌園 강릉康陵 | 외척의 농단에 휘둘린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
제14대 선조 (宣祖, 1552-1608) _ 목릉 穆陵, 성묘 成墓, 순강원 順康園 목릉穆陵 | 서자 출신 왕 선조와 의인왕후 그리고 인목왕후
4. 조선, 또 다시 위기를 맞다
제15대 광해군 (光海君, 1575-1641) _ 광해군묘 光海君墓
추존(追尊)왕 원종 (元宗, 1580-1619) _ 장릉 章陵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과 인헌왕후
5. 왕조, 반석을 다지다
제16대 인조 (仁祖, 1595-1649) _ 장릉 長陵, 휘릉 徽陵, 소경원 昭慶園, 영회원 永懷園 장릉長陵 | 가장 용렬한 왕 인조와 인렬왕후 휘릉徽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장렬왕후
6. 조선, 당쟁에 휩싸이다
제17대 효종 (孝宗, 1619-1659) _ 영릉 寧陵 영릉寧陵 |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과 인선왕후
제18대 현종 (顯宗, 1641-1674) _ 숭릉 崇陵 숭릉崇陵 | 외국에서 태어난 왕 현종과 과격한 성품의 명성왕후
7. 환국정치로 왕권을 다지다
제19대 숙종 (肅宗, 1661-1720) _ 명릉明陵, 익릉 翼陵, 대빈묘大嬪墓, 소령원昭寧園 명릉明陵 | 차마폭에 휩싸였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익릉翼陵 | 꽃피우지 못하고 잠든 인경왕후
제20대 경종 (景宗, 1688-1724) _ 의릉懿陵, 혜릉惠陵 의릉懿陵 | 식물임금 경종과 선의왕후 혜릉惠陵 | 세자빈 신분에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
8. 조선, 르네상스를 맞다
제21대 영조 (英祖, 1694-1776) _ 원릉元陵, 홍릉弘陵, 수경원綏慶園, 수길원 綏吉園 원릉元陵 | 묻히고 싶은 곳에 잠들지 못한 영조와 정순왕후 홍릉弘陵 | 무수리 출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정성왕후
추존(追尊)왕 진종(眞宗) _ 영릉永陵
추존(追尊)왕 장조(사도세자 莊祖) _ 융릉隆陵, 의령원 懿寧園 융릉隆陵 |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왕후
제22대 정조(正祖, 1752-1800) _ 건릉健陵, 휘경원徽慶園, 효창원 孝昌園 건릉健陵 | 개혁군주 정조와 효의왕후
9. 조선, 세도정치에 휘둘리다
제23대 순조 (純祖, 1790-1834) _ 인릉仁陵 인릉仁陵 | 순조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지 순원왕후
추존(追尊)왕 익종 (翼宗, 문조 文祖) _ 수릉綏陵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제24대 헌종 (憲宗, 1827-1849) _ 경릉景陵 경릉景陵 | 풍류를 사랑했던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
제25대 철종 (哲宗, 1831-1863) _ 예릉睿陵 예릉睿陵 | 강화도령 철종과 철인왕후
10. 오백 년 왕조, 문을 닫다
제26대 고종황제 (高宗, 1852-1919) _ 홍릉洪陵, 영휘원永徽園, 흥원 興園 홍릉洪陵 | 망국에 중심에 서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제27대 순종황제 (純宗, 1874-1926) _ 유릉裕陵, 영원英園, 숭인원 崇仁園, 회인원 懷仁園 유릉裕陵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과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
제6대 단종(端宗, 1441-1457) _ <장릉莊陵>, <사릉思陵>
사고무친 어린 임금 애달픈 곡절은 강물에 녹아 있네
단종(端宗, 1441-1457, 재위 3년), 1698년, 강원 영월 196호
단종(이홍위(李弘暐) : 1441-1457, 재위 3년)의 장릉은 비운의 소년 임금 능답게 많은 우여곡절 끝에 조성되었습니다. 영월로의 유배생활에서 서인(庶人)으로까지 강등되어 사약(賜藥)을 받고 생을 마감한 단종은 영월 야산에 암매장되었던 것을 중종(中宗) 11년[1516년]에 와서야 묘를 찾아 봉분(封墳)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 뒤 240년이 지난 숙종(肅宗) 24년(1698년)에 복위(復位)되어 단종(端宗)으로 묘호(廟號)를 붙이고 종묘(宗廟)에 부묘하고 단릉(單陵)의 형식으로 능호를 장릉(莊陵)이라 했습니다. 추봉된 능의 예를 따라 난간석(欄干石)과 무인석(武人石)은 설치하지 않았고 양식 또한 가장 간단하게 조성되었습니다. 특이한 점은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을 장릉에 배향하기 위해 장릉 밑에 배식단(配食壇)을 설치했습니다.
문종의 외아들로 태어난[세종 23년] 단종은 8세 때에 왕세손(王世孫)에 책봉되고 문종이 승하하자 1452년 12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릅니다. 어린 단종을 보위했던 영의정 황보인(皇甫仁)과 우의정 김종서(金宗瑞)와 함께 성삼문, 박팽년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단종의 숙부였던 수양대군(首陽大君)은 궁중의 역사(力士)였던 한명회(韓明澮)와 함께 자신의 동생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역모를 도모했다는 죄명으로 단종을 보위했던 충신들을 제거하는 일대 거사를 일으킨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사변(事變)을 일으킵니다. 곧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선위(禪位)를 하고 상왕(上王)으로 2년여를 지내다가 사육신(死六臣)들의 단종 복위(復位) 사건이 터지자 세조에 의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강원도 영월(寧越)로 귀양을 가게 됩니다.
또한 단종의 실록 역시 처음에는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로 불려지다가 숙종 때 복위되면서 <단종대왕실록(端宗大王實錄)>으로 명칭을 되찾게 됩니다. 결국 권력에 대한 수양대군의 야심으로 단종의 폐위와 사망. 17살의 나이로 한 많은 세상을 마감한 단종에 대한 비애는 그가 유배(流配)되었던 영월의 '청령포(淸冷浦)'나 '금표비(禁標碑)' 등지에서 가슴에 느껴집니다. 또한 영흥리의 '자규루(子規樓)'에서 자규시(子規詩)를 읊조리던 어린 단종의 모습을 회상해 보면 절로 마음이 숙연해질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왕위의 선위(禪位)에서 유배 생활과 사약(賜藥)을 받고 승하할 때까지의 단종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권력의 비애를 다시한번 생각해 봅니다.
장릉(莊陵)은 조선의 6대 단종의 능이며 단릉이다. 추봉된 정릉과 경릉의 예에 따라 난간석과 병풍석, 무석인은 생략되었고, 석물 역시 후대에 만들어져서 왜소하면서도 간단하다. 장명등은 사각옥형(四角屋形)이다. 장릉의 능침에서 바라보는 첩첩의 전경은 아름답고 장엄하다. 능역 안에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을 배향하는 배식단이 있다.
1457년(세조 3) 단종이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둔 뒤 시신은 영월의 동강에 버려졌다. 그러나 충성심 강한 영월 호장 엄흥도가 시신을 거두어 동을지산 기슭에 암매장하였다. 그로부터 59년이 지난 1516년(중종 11) 여러 사람의 증언으로 묘를 찾아 1516년(중종 11) 12월 15일 봉분을 갖추게 되었다. 그 뒤 1580년(선조 13) 상석, 표석, 장명등, 망주석을 세웠으며 1698년(숙종 24) 단종의 신위를 종묘에 모심과 동시에 이곳의 능호를 장릉이라 했다.
육지고도(陸地孤島)의 유배지 청령포,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던 자규루,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한 관풍헌, 무덤이 있는 장릉. 영월은 발길 닿는 곳마다 단종의 한과 넋이 같이한다.
그중 장릉이 3군데나 있는데 '영월의 제6대 단종은 장중할 莊, 파주의 제16대 인조는 긴 長, 김포의 추존 왕인 원종은 글 章'을 써서 같은 장릉이지만 한자가 다르다.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嚴興道, ? ~ ?)
『숙종실록』 1698년(숙종 24) 12월 16일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선유 정현(鄭玄)이 말하기를, “살아 있을 때는 부부가 마땅히 유별하나 죽은 후에는 혼기(魂氣)가 서로 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같은 궤탁에서 제사를 지낸다.”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건대 대왕과 왕비가 비록 따로 장사를 지냈으나 같은 함에 넣어 함께 매장하는 것이 예에 있어서도 당연합니다. 또한 2백 년 간이나 같은 함에 들어 있던 신주판(神主版)을 나누어 양 능에다 매장한다면, 비단 예의 뜻에 어긋남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신리(神理)에 있어서도 또한 부족한 것이 있을 듯합니다. 서울에 있는 구주(舊主)는 이전에 함을 함께 한 것에 따라 사릉(思陵)에 함께 매안하고, 영월에서 받들던 위판도 전에 함을 함께 한 것에 따라 장릉(莊陵)에 매안하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최석정이 또 말하기를, “단종 대왕이 승하하시던 처음에 본군(本郡)의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가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장례 의식을 거행하였기 때문에 육신의 사당에 배향하게 된 것입니다. 향리(鄕吏)는 이미 천인이 아니며 충절 또한 가상하니, 이 전대에 없던 성대한 전례를 추거하는 날을 당하여 마땅히 포증(褒贈)하는 은전이 있어야 할 것이나, 지금 듣건대 자손이 없으니 만약 낭관(郞官)의 직위로써 특별히 포증을 더한다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또한 들었다.” 하고, 이에 해조(該曹)에 명하여 거행하게 하였다. 사릉에 안장된 정순왕후의 부군 단종은 세조에게 사약을 받은 후, 강가에 버려지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으나, 역모죄로 폐서인된 왕의 시신을 거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때 당시 영월군의 호장 엄흥도가 정성을 다하여 이를 수습하고 묻어주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200여 년이 흐른 뒤 단종을 복위하면서 그의 충절을 함께 기리게 되었다.
세종 23년(1441) 7월 23일 임금은 “신(神)과 사람이 다 같이 기뻐할 바이요,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기뻐할 것이다. 오늘 새벽 이전에 저지른 대역모반죄(大逆謀反罪), 부모를 죽였거나 때리고 욕한 죄, 남편을 죽인 죄, 노비가 상전을 죽인 죄, 독약이나 저주로 죽인 죄, 강도를 범한 죄 외에는 이유를 불문하고 모두 용서하라!”며 사면령을 내렸다. 왕실에 왕세손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단종(端宗)은 이와 같이 임금과 신하 그리고 온 백성의 축복 속에 태어났다.
하지만 다음 날 단종의 어머니인 세자 빈 권(權)씨가 산후병으로 갑자기 승하하여 경기도 안산에서 장지(葬地)를 조성하는 중에 “내룡(來龍)이 길로 10여 군데가 끊어진데다가 묘의 방향이 잘못되어 낳은 아이가 녹아버리고, 가족 모두가 절멸(絶滅)하고, 사내와 어른을 죽일 자리다.”는 노비 목효지(睦孝智)가 올린 상소문 한 장이 파문을 일으키지만 묘의 방향만을 바꾼 뒤 장사를 지냈다.
11년 후인 1452년에 문종(文宗)이 지병으로 승하하자 뒤를 이어 태어 난지 채 11년도 되지 않은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 당시에 수렴청정 제도가 없었던 터라 어린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의지를 하게 되었고, 결국은 왕위를 넘보던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일으킨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안평대군(安平大君)과 김종서(金宗瑞)는 제거 당하고, 단종은 1455년 윤6월 11일에 왕위를 빼앗기고 말았다.
세조 3년(1457) 6월 21일에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寧越) 청령포(淸令浦)로 유배되었다가 그해 10월 24일에 관풍헌(觀風軒)에서 사약(賜藥)을 받고 사사(賜死)되었다. 그 누구도 장사를 지낼 엄두를 내지 못해 단종의 시신이 동강을 떠다니자 고을 아전 엄흥도(嚴興道)가 관(棺)을 준비하여 시신을 수습 영월 엄씨 선산인 동을지산(冬乙只山)에 장사(辛坐乙向)를 지냈다. 그 후 자신과 가족은 충북 괴산군 등에 숨어 살았다. 결국 목효지의 상소문 내용과 같은 결과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단종이 승하한지 241년 후인 숙종 24년(1698) 11월 6일에서야 시호(諡號)를 대왕(大王)으로, 묘호(廟號)를 단종으로, 능호(陵號)는 장릉(莊陵)으로 추상되었으며, 단종 비 송(宋)씨는 시호를 정순(貞順)으로 능호는 사릉(思陵)으로 추상되었다.
한편 단종과 헤어진 정순왕후 송씨는 남편의 유배지인 영월을 바라볼 수 있는 사대문 밖 동쪽에 기거하면서 흰옷과 채소 반찬으로 평생을 지내다가 중종 16년(1521) 6월 4일에 82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정순왕후는 후사를 해평부원군 정미수(鄭眉壽)에게 부탁을 하였는데 정미수는 단종의 누나인 경혜공주(敬惠公主)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정미수는 외숙모인 정순왕후를 경기도 남양주 진접읍 사능리에 있는 자신들의 선산에 안장(癸坐丁向)하고 제사를 지내왔다.
숙종 24년에 정순왕후의 무덤이 사릉으로 추상되자 능 가까이에 있던 정씨 일가의 무덤을 옮기는 일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대신들이 “정순왕후가 혈손이 아님에도 후사를 맡겼었고, 무덤 또한 그 선산에 의탁하였던 은의와 정리 또한 중요하니 그 대로 두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상언하자 숙종은 이를 받아들여 정씨 일가의 무덤을 그대로 두도록 하였다. 그래서 여느 능과는 달리 사릉의 주변에는 개인 무덤들이 있다.
사릉은 용이 가로로 달리다가 방향을 90도로 바꾸어 만든 횡룡입수(橫龍入首)이며, 횡룡입수의 증험인 귀성(鬼星)과 안산(案山)의 일직선상에 능침이 조성되어 있어 질서 정연하면서 좌우 균형이 이루어진 능이다. 마치 이 무덤의 주인이 자신의 중심성과 굳은 의지, 정의로움을 표현하고 있는 듯 하여 보기에 참 아름답다.
장릉은 어린용이 산속에서 기어 나오면서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피는 듯, 자신의 위세를 자랑하지 않고 몸을 낮추어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보호하려는 듯 겸손한 맛을 풍기는 자리로 단종 임금의 성정에 딱 맞는 것 같아 더없이 편안해 보인다. (선문대 최낙기 교수)
단종의 장릉 이야기
1.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소년 왕 단종 영월 읍내에서 제천으로 가다 보면 동을지산 기슭에 조선 6대 임금이자 사릉에 잠든 정순왕후의 부군인 단종의 능인 장릉이 자리하고 있다. 단종은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서 1441년(세종 23) 7월 탄생했다. 8세의 어린 나이에 왕세손으로 책봉되었고, 부왕과 어머니가 모두 일찍 승하한 상태에서 1452년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어린 세자가 걱정된 문종은 눈을 감기 전 김종서 등에게 단종을 옆에서 잘 보필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김종서와 집현전 학사 출신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도 어린 왕을 보좌하였다.
2. 야심찬 왕의 삼촌 수양대군 문종에게는 17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그 중 수양대군은 야망이 크고 수완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권람과 한명회 등의 모사가를 비롯하여 30여 명의 무인을 포섭하고 기회를 엿보다가, 단종의 측근을 제거하기 시작하면서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김종서, 영의정 황보인, 병조판서 조극관 등의 중신을 제거하고 정권은 영의정의 자리에 오른 수양대군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3. 유배지에서 숨을 거둔 단종 계유정난이 일어난 다음 해인 1454년(단종 2)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어 수강궁에서 머물게 되었다. 그로부터 다시 2년 후인 1456년(세조 2) 단종 복위 사건이 일어나자 이에 연루된 수많은 중신들이 처형되었고, 이와 함께 단종 역시 영월로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았다.
4. 세상을 떠난 뒤 추봉된 단종 단종이 숨을 거두자 충성심 강했던 영월 호장 엄흥도가 시신을 거둬 암매장하였다. 엄흥도 가족이 자취를 감춘 1516년(중종 11)이 되어서야 단종의 능을 찾으라는 왕명이 내려져 수소문 끝에 이를 찾고, 봉분을 갖추게 되었다. 1580년(선조 13) 상석, 표석, 망주석, 장명등 등을 갖추어 어느 정도의 상설을 갖추게 되었다. 1698년(숙종 24) 묘호를 단종이라고 하여 종묘에 부묘하고, 능호를 장릉이라고 하였다.
5. 충절의 고장 영월 어린 나이에 정치사의 희생양이 된 단종의 한은 수백 년만에 풀린 셈이 되었다. 영월에는 단종이 비참하게 최후를 맞았을 때 이곳의 많은 사람들이 충절을 지켰다 하여 ‘충절의 고장’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영월읍 중심지에서 서남쪽으로 4km 떨어진 곳에는 단종의 유배지였던 청령포가 있으며, 단종복위를 모의하다 죽음을 당한 사육신과 대의에 따라 절개를 지킨 충신의 위패를 모신 창절사 등의 유적지가 있다.
승천하지 못한 용
단종(端宗, 1441-1457) 단종은 문종과 현덕왕후의 아들이다. 10세 때 인 1450년(세종 32) 세종이 죽고 아버지인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문종이 재위한 지 2년 3개월 만에 승하하자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그의 어머니 현덕왕후는 단종의 출산 후유증으로 출산 후 3일 만에 승하하였다. 단종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으나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권을 찬탈하였다. 단종은 왕위를 내놓고 상왕으로 물러났으나 단종 복위 사건 등으로 말미암아 서인으로 강봉되었고, 1457년(세조 3) 6월 유배지인 영월에서 사사되었다. 청령포에 떠도는 외로운 고혼
여인의 철천지한 푸른 솔에 시퍼렇게 살아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 1440-1521), 1698년, 경기 남양주 209호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 : 1440-1521)의 사릉(思陵)은 한 많은 비운의 왕비 송씨의 불우한 일생을 대변하듯이 다소 초라하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단종의 장릉이 멀리 강원도 영월에 위치해 있지만 사릉은 경기도 남양주에 승하 당시(중종 16년) 부인의 신분으로 강등되어 궁궐에서 쫓겨난 상태이었기에 부인의 묘로 초라하게 조성되었다가 숙종 24년(1698년) 단종 복위와 함께 정순왕후로 추복(追復)되어 단릉(單陵)의 형식으로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명명하였습니다. 역시 추봉된 능이었기에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欄干石) 없이 봉분만 조성하고 석양(石羊)과 석호(石虎)도 한 쌍씩만 주위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사릉(思陵)은 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능이며 단릉 형식이다. 처음에는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가 출가한 해주 정씨 묘역이었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에 민간 신분의 묘로 조성되었다. 그 후 중종 때 대군 부인의 예로 복위되고, 숙종 때(1698년) 왕후의 능으로 추봉되었기 때문에 다른 능에 비하여 단출하면서 간소하다. 능침의 규모는 매우 작고, 병풍석 난간석을 설치하지 않았으며, 문석인과 석마만이 자리 잡고 있다. 양석과 호석도 한 쌍 씩으로 간소화되어 있다.
사릉의 정자각은 맞배지붕으로 되었으며 배위가 짧기 때문에 전체 건물의 모습이 정(丁)자형 보다는 정사각형의 느낌을 준다. 정자각으로 연결되는 신도 및 어도가 동계와 연결되지 않고 끊어져있다. 사릉은 문화재청이 관할하는 궁과 능에 필요한 나무를 기르는 양묘사업소 묘포장이 있어서 많은 전통 수종의 식물들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정순왕후는 1521년(중종 16) 6월 4일 소생 없이 승하하였다. 중종은 단종부터 7대에 걸친 왕대를 산 정순왕후를 대군부인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정순왕후는 후사가 없었으므로 경기도 양주 남쪽 군장리에 있는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의 시가인 해주 정씨의 가족 묘역에 안장하고 제사를 지내주었다.
1698년(숙종 24) 11월 6일 숙종에 의해 노산군이 단종대왕으로 복위되자 부인도 정순왕후로 복위되었으며, 신위는 창경궁에 모셔져 있다가 종묘에 안치되었다. 평생 단종을 생각하며 일생을 보냈다 하여 능호를 사릉(思陵)이라고 붙였다. 그 후 1986년부터 사릉이 일반에 공개되었다.
정순왕후와 영도교 이야기
1. 단종과 정순왕후가 영영 이별한 다리 복개된 청계천에는 영도교라는 다리가 있다. 언제 세워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영도교의 이름에는 정순왕후와 단종의 일화가 얽혀 있다. 1458년(세조 4)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귀양갈 때 그의 비 정순왕후가 이 다리까지 따라왔으나, 더 이상 따라가지 못하고 다리 위에서 이별을 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단종과 정순왕후가 이 다리에서 이별한 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하여 영영 이별한 곳, ‘영 이별 다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영이별교, 영영 건넌 다리 등으로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 말이 후세에 와서 ‘영원히 건너가신 다리’라는 의미로 영도교라 불리게 된 것이다. 훗날 영미교(永尾橋)라고도 불렸는데, 이 역시 영이별교의 음이 전해 내려오면서 변해 붙여진 이름인 것으로 추정된다.
2. 도성과 왕십리를 연결하던 다리 영도교는 처음에는 왕심평대교(旺尋坪大橋)라고 하여, 서울 흥인지문을 거쳐 왕십리, 뚝섬, 광나루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건너야 하는 다리였기 때문에 통행량이 많았다. 성종 때 영도사(永導寺 : 지금의 안암동 개운사)의 승역을 동원해 돌다리를 놓은 뒤, 성종이 직접 영도교라는 어필을 내렸는데, 영도교는 이때 붙은 이름이다. 이후 조선시대 말까지 영도교는 서울 외곽의 주요 다리 역할을 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다리를 부수어 궁궐의 석재로 써서 없어졌다.
3. 새롭게 들어선 청계천 영도교 대신 같은 자리에 나무다리를 놓았지만, 큰물이 질 때마다 떠내려가 옆의 청계천 바닥에 돌을 놓고 내를 건넜다고 한다. 뒤에 콘크리트로 신식 다리가 놓이기도 했지만, 1950년대 말부터 추진된 청계천 복개공사로 없어졌다. 지금은 영도교의 이름과 위치만 확인할 수 있을 뿐, 다리의 구조나 형태 등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현재 있는 영도교는 2005년 말에 끝난 청계천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새롭게 세운 것이다.
정순왕후여, 이제 한을 푸소서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 1440-1521) 여산송씨(礪山宋氏)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인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의 딸로 태어난 정순왕후는 1453년(단종 1년)에 왕비로 책봉되었습니다. 1457년(세조 3년) 사육신(死六臣) 사건으로 부인(夫人)으로 강등되어 열 여덟 어린 나이에 홀로되어 82세(1521년, 중종 16년)로 승하할 때까지 한 많은 일생을 보내야했습니다. 궁궐에서 추방된 후 여막에서 동냥으로 끼니를 이었고, 염색업으로 여생을 보내면서도 세조(世祖)의 도움을 끝까지 거부하는 청빈한 생활을 했습니다.
정순왕후는 판돈녕부사 송현수의 딸로, 1440년(세종 22)에 태어났다. 1453년(단종 1) 14세의 나이에 타고난 성품과 검소의 미덕을 인정받아 간택되었고, 그 다음해에 어린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당시는 단종의 숙부였던 수양대군이 영의정의 자리에 앉아 조정을 좌지우지하던 때였으므로, 단종과 정순왕후 부부는 스스로 아무런 일도 결정할 수 없었다. 결국 1455년(단종 3) 6월 11일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어 수강궁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457년(세조 3) 사육신의 주동으로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던 사건이 발각되자,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유배되고, 정순왕후는 부인으로 강봉되었다. 궁궐을 나온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의 동망봉 기슭에 초가집을 짓고 시녀들이 해오는 동냥으로 끼니를 잇다가, 염색업을 하며 평생을 살았다. 1521년(중종 16) 6월 4일을 일기로 장장 7대 왕대에 걸친 삶을 마감하였으니 이 때, 춘추 82세였다.
정순왕후는 15세에 왕비가 되었다가 18세에 단종과 이별하고, 부인으로 강등되어 평생을 혼자 살아가야했던 불운한 인물로, 그녀의 비극에 얽힌 여러 일화가 전해진다. 단종은 1457년(세조 3)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도, 복위사건으로 인해 영월로 유배당하고, 결국 유배지에서 억울한 죽음을 맞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정순왕후는 아침저녁으로 산봉우리에 올라 단종의 유배지인 동쪽을 향해 통곡을 했는데, 곡소리가 산 아랫마을까지 들렸으며 온 마을 여인들이 땅을 한 번 치고 가슴을 한 번 치는 동정곡을 했다고 전한다. 그 뒤부터 이 봉우리는 왕비가 동쪽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 하여 동망봉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편, 『한경지략』에 의하면 영도교 부근 부녀자들만 드나드는 금남의 채소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왕비를 동정한 부녀자들이 끼니 때 마다 왕비에게 채소를 가져다주다가 궁에서 말리자 왕비가 거처하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시장을 열어 주변을 혼잡하게 하고, 계속해서 몰래 왕비에게 채소를 전해주려는 여인들의 꾀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진다.
21대 영조(英祖)의 계비(繼妃)도 정순왕후(貞純王后)입니다.
현황(現況)
조선조 王室世系表 [ 27대, 517년, 1392 - 1910 ]
원(園) 13기(基) 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호)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호)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호)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사후에 왕(王)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기(基) 익종(翼宗) 一 수릉(綏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장조(莊祖) 一 융릉(隆陵 : 사적 제206호) : 경기 화성시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 진종(眞宗) 一 영릉(永陵 : 사적 제205호)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원종(元宗) 一 장릉(章陵 : 사적 제202호) : 경기 김포시 김포읍(金浦邑) 풍무동(豊舞洞) 덕종(德宗) 一 경릉(敬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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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 35기 제25대 철종(第二十五代 哲宗) 一 예릉(睿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24대 헌종(第二十四代 憲宗) 一 경릉(景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제23대 순조(第二十三代 純祖) 一 인릉(仁陵 : 사적 제194호) : 서울 서초구(瑞草區) 내곡동(內谷洞) 제22대 정조(第二十二代 正祖) 一 건릉(健陵 : 사적 제206호) : 경기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제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二 홍릉(弘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一 원릉(元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二 혜릉(惠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一 의릉(懿陵 : 사적 제204호) : 서울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三 대빈묘(大嬪墓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二 익릉(翼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一 명릉(明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제18대 현종(第十八代 顯宗) 一 숭릉(崇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7대 효종(第十七代 孝宗) 一 영릉(寧陵 : 사적 제195호) : 경기 여주시(驪州市) 능서면(陵西面) 제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二 휘릉(徽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一 장릉(長陵 : 사적 제203호) : 경기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제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二 성묘(成墓 : 사적 제365호)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제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一 목릉(穆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3대 명종(第十三代 明宗) 一 강릉(康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2대 인종(第十二代 仁宗) 一 효릉(孝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洞)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四 태릉(泰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四 태릉(泰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三 희릉(禧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二 온릉(溫陵 : 사적 제210호) : 경기(京畿)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一 정릉(靖陵 : 사적 제199호) : 서울 강남구 삼성동(三成洞) 테헤란로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三 회묘(懷墓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二 순릉(順陵 : 사적 제205호)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一 선릉(宣陵 : 사적 제199호)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Teheran路) 제8대 예종(第八代 睿宗) 二 공릉(恭陵 : 사적 제205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조리읍(條里邑) 제8대 예종(第八代 睿宗) 一 창릉(昌陵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7대 세조(第七代 世祖) 一 광릉(光陵 : 사적 제197호)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와 포천군 제6대 단종(第六代 端宗) 二 사릉(思陵 : 사적 제209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읍(眞乾邑) 제6대 단종(第六代 端宗) 一 장릉(莊陵 : 사적 제196호) : 강원(江原)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제5대 문종(第五代 文宗) 一 현릉(顯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4대 세종(第四代 世宗) 제3대 태종(第三代 太宗) 제2대 정종(第二代 定宗)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三 정릉(貞陵 : 사적 제208호) : 서울 성북구 정릉2동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二 제릉(齊陵) :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 판문군(板門郡) 상도리(上道里)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一 건원릉(健元陵 : 사적 제193호)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조선왕릉(朝鮮王陵)의 계보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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