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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도보 역사탐방
제1장 무학 대사를 기념하는 무학교
청계천의 탄생
서울이 조선의 수도로 정해지기 전 청계천은 자연상태의 하천이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서울의 지리적 특성상 상대적으로 지대가 낮은 도성 한가운데로 물길이 모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청계천은 도심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시전행랑과 민가가 밀집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넘치면 가옥이 침수되거나 다리가 유실되고 익사자가 발생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태종때 개천공사가 주로 개천 본류에 대한 정비였다면, 세종은 지천(支川)과 작은 세천(細川)의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종로 남북 쪽으로 늘어선 시전행랑(市廛行廊) 뒤편에 도랑을 파서 물길을 하천 하류에 바로 연결시켰다. 이것은 지천의 물이 한꺼번에 개천 상류로 몰려들어 넘쳐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도심의 홍수를 예방할 수 있었다. 세종때 주목할 만한 사항은 청계천의 성격을 도심의 생활하천으로 규정하였다는 것이다. 서울을 조선의 수도로 정할 때 풍수학상으로 서울 둘러싸고 있는 외수(外水) 한강이 동에서 서로 흐르는 것에 대응하여 도성 한가운데를 흐르는 내수(內水) 청계천이 한강과는 반대로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있다는 점이 상당히 고려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도성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고, 오늘날과 같은 하수도 시설이 없었던 당시로서 청계천에는 온갖 쓰레기와 오물들이 흘러들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청계천의 성격을 두고 풍수학상의 명당수로서 늘 깨끗하게 유지해야한다는 명분론적 주장과 도성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어 더러운 것이 많이 생기므로 이것을 배출할 하천이 있어야 한다는 현실적 주장이 맞서고 있었다. 이 논쟁에서 세종이 후자의 주장을 받아들임으로써 청계천은 생활하천으로 결정되었다. 이로써 청계천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도성에서 배출되는 많은 생활쓰레기를 씻어내는 하수도로서 기능을 함으로써 도성 전체를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세종이후 개천 정비에 가장 큰 힘을 쏟은 임금은 영조이었다. 영조는 자신이 행한 준천을 은근히 중국 고대 하(夏)나라 우(禹) 임금의 치수나 수(隨)나라 양제(煬帝)의 운하정비와 비교하였으며, 탕평(蕩平)·균역(均役)과 함께 자신 80평생 가장 큰 치적으로 내세울 정도였다. 그러나 17·8세기에는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우선 임진(1592년)·병자(1636년) 두 차례의 전란을 겪는 이후 많은 유민(流民)들이 도성으로 몰려들어 서울의 인구가 급증하였다.
준천을 시행하기에 앞서 영조는 수 차례에 걸쳐 그 시행여부를 조정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물어본 다음 1759년(영조 35)년 10월에는 준천을 관리할 기관으로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하였다. 1773년(영조 49) 6월 영조는 다시 한번 개천 정비를 위한 공역을 실시하였다. 1760년 준천을 할 때 물자와 인력이 부족하여 시행하지 못하였던 개천 양안을 석축(石築)을 하는 것이었다.
한편 영조가 개천 준설을 위하여 대역사를 시작한 것은 빈민들을 구제하기 위한 구휼의 목적도 있었다. 따라서 청계천의 성격을 두고 풍수학상의 명당수로서 늘 깨끗하게 유지해야한다는 명분론적 주장과 도성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어 더러운 것이 많이 생기므로 이것을 배출할 하천이 있어야 한다는 현실적 주장이 맞서고 있었다. 이 논쟁에서 세종이 후자의 주장을 받아들임으로써 청계천은 생활하천으로 결정되었다. 이로써 청계천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도성에서 배출되는 많은 생활쓰레기를 씻어내는 하수도로서 기능을 함으로써 도성 전체를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청계천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이전과는 다른 변화를 겪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조선 500년 동안 불리어 오던 '개천'이라는 이름 대신에 '청계천'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청계천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때는 정확하지 않지만, 1914년 일제에 의하여 조선의 하천명칭들이 정리될 때 개정된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신문을 살펴보면 1916년경부터는 '개천'이라는 말은 거의 등장하지 않고, 대신 '청계천'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먼저 마을 이름에서 조선인들이 거주하는 청계천 북쪽은 ' 동(洞)'과 같은 전래의 마을 이름을 사용하였지만,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청계천 남쪽은 '혼마찌(本町, 지금의 명동)'과 같은 일본식 지명을 사용하였다. 도로의 확장, 주요 시설물의 신축 등 도시의 기반시설은 주로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청계천 이남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한 신문에는 "북부(청계천 북쪽)일대에는 아직도 원시시대의 그림자가 그대로 남아 있지마는 본정(本町) 일대는 길에 밥이 떨어져도 주워 먹게 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정작 청계천 자체는 대한제국 이후 약 10여년 동안 방치되었다. 일본은 청계천(淸溪川, 맑은 물이 흐르는 시내)을 이름 값 못하는 '탁계천(濁溪川, 더러운 물이 흐르는 시내)'이라고 비웃었다. 지난 500년 동안 서울사람들의 생활과 함께 흘러온 청계천은 하루아침에 더러운 하수구로 전락하여, 청산의 대상이 되었다. 1918년부터 일본은 청계천과 일부 지천에 대하여 바닥을 준설하고 양안에 석축을 새로 쌓았다.
1920년대이후 일제는 여러차례 청계천 복개계획을 발표하였다. 한편 일본의 청계천 정비로 인하여 청계천에 있던 많은 다리들이 수난을 겪었다.
1930년대 이후 일본은 청계천 정비를 위하여 여러 가지 계획을 발표하였으나 재원부족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일본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에 모든 물자와 인력을 쏟아 부었기 때문에 청계천 준설을 비롯한 서울의 도시정비사업은 거의 방치되었다. 이들은 반은 땅 위에, 반은 물위에 떠 있는 판자집을 짓고 생활하였다. 천변을 따라 어지럽게 형성된 판자촌과 여기에서 쏟아내는 생활하수로 청계천은 더욱 빠르게 오염되어 갔다. 엄청난 양의 하수가 도심 한가운데를 흐르면서 발생하는 악취로 주변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큰 고통을 받았으며, 도시 전체의 이미지도 크게 손상되었다.
진청계천은 1955년 광통교 상류 약 136m를 복개한 것을 시작으로 1958년부터 본격적으로 복개되기 시작하였다. 1958년 5월∼1961년 12월 광교에서 청계6가 동대문운동장까지, 1965년∼1967년 청계 6가에서부터 청계8가 신설동까지, 1970년∼1977년 청계 8가에서부터 신답철교까지 복개되었다. 고가도로도 건설되었다.
변청계천이 복개 이후 약 40년이 지난 오늘날 청계천은 도심산업의 중심지로서 도로 양편으로 공구상, 조명가게, 신발상회, 의류상가, 헌책방, 벼룩시장 등 크고 작은 상가들이 밀집해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오간다. 복개도로와 고가도로에는 하루에도 수십만 대의 차량들이 지나 다닌다.
청계천복원추진본부 출범과 조직구성 2002년 7월 2일 청계천복원 추진본부는 이명박 시장 취임과 동시에 업무를 시작하였고 지속적으로 정원을 보강하면서 사업에 있어서 본부의 역활을 강화하여 추진체계를 공고히 해 나가려 노력했다. 2003년 7월 1일 청계천복원공사 착공 이후 청계천복원추진본부는 세운상가를 비롯한 주변재개발 추진 등 새로운 업무수요에 대비하여 복원사업을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업무를 조정하였다. 2004년 1월에는 서울특별시 행정기구 설치조례시행규칙상 임시 조직인 공사 3담당관의 업무를 명확히 규정하고 건설안전본부의 복원공사국을 청계천 복원추진본부에 편입시킴으로써 청계천복원사업의 효율적 추진과 전문성을 확보하고, 복원계획담당관의 팀 명칭을 업무 특성에 맞게 변경하고자 업무를 조정하게 된다. 청계천복원지원연구단 출범과 조직구성 청계천복원지원연구단은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의 한시조직으로서 산, 관, 학 연과 연계하여 청계천복원사업을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한 기초자료 및 기본구상을 제공하는 관련 연구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발족되었다. 연구단은 2002년 7월 1일 발족하여 2006년 6월 30일까지 연구를 수행하였다. <청계천복원지원연구단 조직도> - 주요과업내용 -
주요활동 ① 토론회 개최 및 참석 청계천복원지원연구단은 다양한 토론회를 개최 및 참석(국가안보정책 연구소 청계천복원 관련 찬반토론, 안민포럼 토론회, 서울의 미래를 여는 청계천복원 세미나, 청계천복원 국제 심포지엄 등)함으로써 청계천복원의 타당성을 알리는데 주력했다. ② 전문가 세미나 및 간담회 개최 청계천복원지원연구단은 한 달에 한두 번씩 전문가 세미나 및 간담회를 개최(대기오염과 인체위해서, 청계천복원사업관련 공정관리계획, 환경요서의 경제적 가치즉청)해 부족한 부문의 자문을 구했다. ③ 홍보활동 청계천복원지원연구단은 다양한 연구와 함께 청계천복원사업을 올바르게 국내외에 알리기 위해 학술연구결과에 기초한 다양한 홍보 활동을 진행하였다. 다양한 활동 ① 세미나 (원주 토지문화관) 2002년 10월 25일 ~26일, 강원도 원주시 토지문화관에서 열렸으며, 청계천복원 시민위원회 위원 444명과 기자 9명 및 관계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의 미래를 여는 청계천복원 세미나'라는 주제로 진행되었다. 국제심포지엄 모습 (서울사랑 제 3호에서 인용) ② 국제심포지엄 (프레스센터) 2002년 11월 25일 시민위원회, 서울시 UNEP한국위원회가 함께 주최하고 시정연이 주관하여 외국의 유사사례에 대한 비교연구의 기회를 갖고 복원사업 홍보 및 시민참여 분위기 조성의 계기로 삼고자 '도시하천의 복원과 지속가능한 도시발전 전략'이라는 주제로 '청계천 복원 국제 심포지엄(International Symposium on Cheonggyecheon Restoration)'을 개최하였다. ③ 공청회 개최 2003년 2월 20일, 서울시공무원교육원 대강당에서는 시의원과 시민위원, 시민, 상인대표, 시민단체 등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청계천복원사업 공청회가 열렸다. 청계천복원사업 공청회 ④ 하천현장 시찰 (대구 신천 및 제주 산지천) 2003년 3월 7~8일, 시민위 위원 16명과 공무원 7명은 하천복원 우수사례지역인 대구 신천과 제주도 산지천을 시찰하였다. ⑤ 워크숍 개최 (시정개발연구원) 2003년 5월 27일, 시민위원회 위원 30명, 상인 단체 8명, 시민단체 2명 등이 참여하여 시정개발 연구원에서 워크숍을 개최하였다. ⑥ 워크숍 개최 (속초 시공무원 수련원) 2003년 7월 11일~12일, 속초 서울시 공무원 수련원에서는 시민위 위원, 시정연 연구위원, 관계공무원 등 이 참여한 워크숍이 개최되었다. ⑦ 1차 설명회 개최 (기본설계) 2003년 7월 29일, 시민위원회 48명, 시 공무원, 설계업체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기본설계 설명회가 개최되었다. 설명회는 복원사업 추진경위 설명, 기본설계 설명, 토론 및 질의 응답, 분과위별 토론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⑧ 2차 설명회 개최 (실시설계) 2004년 2월 24일, 시민위 위원 33명이 참석한 가운데 실시설계설명회가 개최되고 설명회는 복원공사 실시설계 내용 설명 후 시민위원들의 질의 답변, 토론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역사문화에 대한 이해당사자별 의견
청계천 역사문화 복원 광통교
수표교 오간수문
도보관광1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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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약속을 정확하게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20분 이상 지체시 취소될 수 있습니다. )
주변관광안내 청계천으로 인해 서울시는 인간 중심의 환경도시로써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365일 다양한 행사와 공연이 펼쳐지는 청계광장을 중심으로 다양한 조형물과 주변 관광지를 연계시키는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관광코스입니다.
디지털 상징조명탑
□ 목 표 : 청계천의 개념을 내포한 상징물로 청계천 전체를 아우르는 디지털 조명탑으로 상징화
디지털 캔버스
디지털 가든
□ 목 표 : IT산업의 모태이자 조명의 거리인 청계천의 특성을 고려한 시설운영
산의 도시, 물의 도시, 서울에는 다리 또한 많았다. 옛 서울지도를 살펴보면 물길과 도로가 만나는 곳곳에 다리가 표시되어 있다. 비교적 다리가 풍부하게 표시된 「수선총도」에는 약 190여개의 다리가 표시되어 있다. 이 중에서 명칭과 위치가 확인되는 것만 약 80개 정도이며, 1760년 영조 임금의 준천당시에 청계천 본류에는 모전교, 광통교, 장통교, 수표교, 하량교, 효경교, 마전교, 오간수문, 영도교 등 9개의 다리가 있었다. ② 광통교 : 광통교는 육조거리-운종가-숭례문으로 이어지는 도성 안 중심통로였으며, 주변에 시전이 위치 하고 있어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다리였다. 1958년 청계천 복개와 함께 도로 밑에 묻혔다. ③ 장통교 : 중부 장통방에 있었으므로 장통교라고 하였다. 현재 장교동 한화빌딩 앞에 위치하였다. 장통교는 청계천 본류와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만나는 지점에 있었다. ⑥ 효경교 : 부근에 소경이 많이 살았다 하여 '맹교(盲橋)', '소경다리'라고도 불렀다. 현재 세운상가 옆 아세아 전자상가 동편에 있었다.
전통사회에서 다리는 단순히 물을 건너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서울사람들의 생활문화 속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땅한 공공장소가 없었던 시절, 다리는 약속과 모임의 장소였고, 길 가던 사람들이 쉬어 가는 쉼터이기도 하였다. 다리가 있음으로 인하여 동네 이름이 생겨나기도 하였으며, 반대로 부근 동네 이름을 따서 다리에 붙이기도 하였다. 다리에서 여러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놀이가 생겨났으며, 웃음과 지혜가 담겨있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청계천의 옛 다리들은 도성의 다른 곳에 놓여 있던 다리보다 비교적 크고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다.
광통교는 경복궁-육조거리-운종가-(광통교)-숭례문 등 도성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중심통로에 위치하고 있었다. 임금이 능행(陵幸)을 하거나 성밖으로 행차할 때 이 광통교를 건너다녔으며, 중국에서 사신들이 오고 갈 때도 가까이에 있는 돈의문을 이용하지 않고 빙둘러 숭례문을 통과하여 이 광통교를 건너 궁궐로 들어갔다. 따라서 광통교는 어가행렬이나 사신행렬이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도성 안에서 가장 큰 다리였다.(길이 12m, 폭 15m) 광통교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조선 초 도성건설 때로 처음에는 흙으로 만들어진 토교(土橋)였다. 그러던 것이 1410년(태종 10) 8월 큰비가 와서 다리가 떠내려가고 사람이 물에 빠져 죽는 피해가 발생하자 옛 정릉(貞陵)의 무덤 돌을 사용하여 석교(石橋)로 만들었다.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繼妃)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으로 원래 오늘날 중구 정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광통교를 이 정릉의 무덤 돌을 가져다가 만든 데는 역사적으로 깊은 사연이 있었다. 즉 태조 이성계의 셋째 아들 이방원과 신덕왕후 강씨의 깊은 원한관계가 상당히 작용하였다. 1392년(태조 1년) 계비 강씨는 정도전 등의 도움으로 이방원을 물리치고 자신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에 옹립하였다. 이 일로 계비 강씨는 이방원의 깊은 원한을 싸게 되었다. 그러나 계비 강씨는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채 1396년(태조 5) 3월 세상을 떠남으로써, 세자가 된 아들 방석 또한 1398년 (태조 7) 정도전 등과 함께 이방원 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였다(1차 왕자의 난). 한편계비 강씨를 무척 총애하였던 태조 이성계는 강씨가 죽자 자주 찾을 수 있는 가까운 중부 취현방(聚賢坊, 지금의 중구 정동일대)북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고 정릉이라고 이름하였다. 태조는 이 능을 조성할 때 특별히 제주목사 여의손(呂義孫)으로 하여금 일류석공을 동원하여 당대 최고 수준의 석물(石物)을 조성하도록 하였으며, 완성된 이후에도 수 차례 행차하여 강씨에 대한 그리움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1408년(태종 8)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다음 해인 1409년(태종 9) 옛 제왕(帝王)의 능묘가 모두 도성 밖에 있는데, 정릉만 도성 안에 있는것은 적당하지 못하다고 하여 지금의 성북동 정릉인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1410년 큰비가 내려 흙다리인 광통교가 유실되자, 이 정릉의 옛 터에 남아 있던 돌을 사용 하여 석교를 만들게 되었다.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강씨의 무덤돌로 다리를 만들어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밟고 지나가도록 함으로써 강씨에게 맺힌 분한 마음을 토로했다고 한다. 그러나 광통교는 조선왕조 500여년 동안 어가행렬과 사신행렬이 지나다니는 도성 제일의 다리로서 영광을 누렸으니 태종의 의도대로 된 것만은 아닌 듯하다. 아무튼 현재 중구 남대문로 광교네거리 중심부에서 동북쪽 지하에 남아 있는 유적을 보면 옛 광통교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다. 특히 남북 양측 교대에는 정릉의 부재로 사용되었던 신장석(神將石), 구름문양과 당초문양이 새겨진 무덤돌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태조가 정릉을 조성할 때 얼마나 공을 들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광통교가 훼손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 이다. 1900년 초 서울에 전차노선이 건설되면서 먼저 광통교 동편에 전차길이 놓였다. 또 1918년 이전 다리를 확장할 때 양편을 철근 콘크리트로 보강하였는데, 이때 다리의 난간석이 원래 위치에서 확장된 다리 양편으로 옮겨졌다. 1923년에는 청계천에 암거공사를 하면서 정릉의 신장석으로 이루어진 광통교 북측 교대 한가운데에 콘크리트로 된 큰 하수 관을 박았으며, 남쪽 교대에도 역시 하수배출을 위한 토관을 박았다. 1954년 청계천 복개때 서쪽 난간석이 사라 지게 되고, 1958년 청계천복개공사가 시작되면서 동쪽 난간석이 사라졌다. 현재 창덕궁에 광통교의 난간석 일부가 남아 있는데, 하나의 높이가 약 150cm 정도 되는 것으로 볼 때 광통교가 매우 큰 다리였음을 알 수 있다.
수표교는 광통교와 함께 도성에서 가장 유명한 다리였다. 그리고 1441년(세종 23)에 다리 옆에 개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서 수표(水標)를 세운 이후부터는 수표교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주변에 있는 마을은 수표동 (水標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수표는 하천수위를 과학적, 계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기구로 측우기와 함께 세종 때 만들어진 대표적인 과학 기기의 하나이다. 수표는 청계 천의 마전교 서쪽과 한강변에 세워졌는데, 처음에는 물 속에 돌을 놓고 그 위에 구멍을 파서 나무로 만든 기둥을 세웠다. 나무기둥에는 눈금을 새겨 수위를 알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나무로 만든 수표는 쉽게 망가져 15세기 성종 때 돌기둥으로 교체하였다. 돌기둥 양면에는 1척에서 10척 까지 눈금을 새겼으며, 다시 3·6·9척에는 ○표를 파서 각각 갈수(渴水)·평수(平水)·대수(大水)를 헤아리는 표지로 삼았다. 즉 6척 안팎의 물이 흐르면 보통의 수위였으며, 9척 이상이 되면 위험 수위로 개천의 범람을 미리 헤아릴 수 있도록 하였다. 개천은 건천(乾川)으로 평상시에는 물이 조금 밖에 흐르지 않았으나 도성 안에서 흐르는 모든 지천의 물이 개천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에 비가 조금만 와도 물이 범람 할 정도로 유량의 변화가 매우 심하였다. 수표에 표시된 1척은 대략 20.3cm 정도로 9척의 경우 수위가 183cm 정도이나 비가 올 때 개천 물이 이 정도까지 차 오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수표는 성종 때 돌기둥으로 교체된 이후 1760년 경진년 개천을 준설할 때 보수되었으며, 순조 때 개천을 준설할 때 새로 만들어 세웠다. 지금 남아 있는 수표는 바로 이때 만들어 진 것이다. 수표교 역시 세월이 지나면서 수 차례 보수되었다. 다리 한쪽 귀틀석에 '무자금영개조 (戊子禁營改造)’,‘정해개조(丁亥改造)'라고 새겨져 있는데,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무자년과 정해년에 각각 다리를 보수했다는 내용이다. 또한 당초 수표교에는 난간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표교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면 1890년경에는 다리 위에 돌난간이 없었다가 18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지금과 같은 돌난간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마도 도성의 인구가 늘어나고 더불어 수표교를 건너다니는 사람들의 수도 늘어나면서 사람이 떨어지는 사고가 자주 발생하자 다리에 난간을 추가로 설치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수표교는 광통교와 함께 청계천에 있던 가장 유명한 다리로 다리밟기, 연날리기 등이 행해지던 대표적인 민속놀이 공간이었으며, 사람의 통행이 많았던 만큼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전해진다. 특히 수표교에는 숙종과 장희빈의 만남에 관한 이야 기가 남아있다. 조선시대수표교 는 남부 훈도방(薰陶坊)에 있는 영희전(永禧殿, 지금 중구 저동 2가)으로 가는 통로이기도 하였다. 영희전은 임금의 영정을 봉안하는 곳으로 설, 한식, 단오, 추석, 동지, 섣달 그믐날 등 명절이 되면 임금이 이곳을 전배(展拜)하였다. 따라서 명절 때 임금의 어가행렬이 이 다리를 지날 때면 다리 주위에 구경꾼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렸다고 한다. 어느 날 숙종이 영희전을 전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수표교를 건너다가 부근 여염집에서 문밖으로 왕의 행차를 지켜보던 아리따운 아가씨를 보고 마음에 들어 궁궐로 불러 들였는데, 그가 바로 장희빈이었다고 한다.
청계천은 도성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동쪽으로 흘러 중량천과 합류한 다음 한강으로 흘러 들어갔다. 따라서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남쪽 성벽 아래에 개천 물이 도성 밖으로 잘 빠져나갈 수 있도록 수문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오간수문이었다. 오간수문 조금 남쪽에는 이간수문(二間水門)라고 하는 수문이 있었는데, 이것은 남산 남소문동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성밖으로 빠져나가도록 하기 위하여 만든 수문 이었다. 오간 또는 이간이라고 하는 것은 수문의 수를 말하는 것이다. 오간수문은 크기가 5척이나 되었으며, 각 수문마다 쇠창살로 만든 철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것은 물이 잘 빠져나가도록 함과 동시에 외부에서 이 수문을 통해 함부로 사람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명종 때의 의적(義賊)으로 알려진 임꺽정이 이 오간수문을 통하여 달아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오간수문은 외부사람들이 도성을 몰래 드나들 때 이용하던 주요 통로가 되었던 모양이다. 따라서 오간수문의 기능을 회복하는 일은 개천 준설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영조가 이 오간수문에 행차하여 개천바닥을 처내는 일꾼들의 모습을 그린 「준천도」(1760년)를 보면 다섯 개의 수문과 수문마다 설치된 철문, 그리고 수문 앞에 놓여 다리의 모습이 선명하다. 또 주변에 심어 놓은 버드나무도 무성하게 우거져 있다. 버드나무가 우거진 오간수문은 이후 도성 안에서 이름난 봄 놀이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오늘날사람들은 '오간수문'이라는 이름 대신 '오간수교' 또는 '오간수다리' 라고 부르고 있는데, 사실 이것은 맞지 않다. 오간수문을 오간수교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일제에 의해 오간수문이 헐리고 콘크리트로 된 근대식 다리가 놓인 다음부터였다. 1921년 6월 동대문에서 광희문간 전차 노선이 신설되면서 오간수교 위에 전차가 다릴 수 있는 철교가 놓이게 되었다. 1926년 6월 오간수교는 다시 한번 확장되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장례행렬이 장지인 유릉(裕陵,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갈 때 이 오간수교를 건너가게 되었다. 따라서 장례행렬이 건널 수 있도록 두 간 반(약 4.5m)이던 다리를 네 간 반(약 8.2m)로 확장하였다.
가산은 자연적으로 생긴 산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산으로 조산(造山)이라고도 한다. 가산을 만드는 이유는 자연경관을 일상 생활공간 주변에 가까이 두고 즐기고자 하는 옛 사람들의 바램에서 비롯되었으며, 궁궐이나 도성 안에 큰 연못이나 하천을 조성할 때 파낸 흙이 쌓여 인공 산인 가산이 되기도 하였다. 경복궁 교태전 뒷산인 아미산(峨嵋山)이나 경회루 연못 가운데 있는 섬이 그 예이다. 또 풍수학적으로는 땅의 기운이 허한 곳에 지기(地氣)를 북돋우기 위하여 가산을 만들기도 하였다. 1398년에 종묘 앞쪽의 지세가 허하다고 하여서 흙으로 산을 쌓은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청계천 주변에는 오간수문 안쪽에 가산이 있었는데, 하나는 개천 북쪽에, 하나는 개천 남쪽에 가산이 있었다. 이 가산은 1760년 영조 때 개천을 준설하면서 하천바닥에서 파낸 흙을 한 곳에 모아 놓은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1760년 2월 개천 준설을 할 때 개천바닥과 양 제방이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토사가 하천바닥에 쌓여 있었다. 그러나 하천바닥에서 파낸 토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하여 특별한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유척기의 지적에 따라 영조는 개천에서 준설한 수백만 석의 토사를 오간수문 부근 양안으로 옮겨서 쌓았도록 하였다. 이 때 만들어진 가산은 물론 난지도처럼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당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산으로서는 상당히 컸다. 1770년 이후 발행된 고지도를 보면 오간수문 안쪽 개천 양편에 가산(假山) 또는 조산(造山)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산은 청계천변에 살고 있는 거지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가산은 특별히 기초를 다져서 쌓은 것이 아니라 그냥 흙은 한 곳에 모아 놓은 곳에 불과하였으므로 비가 오면 조금씩 깎여 내려가기도 하였고, 반대로 개천을 준설할 때마다 토사가 다시 쌓이기를 반복하여 완만한 언덕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가산에 나무와 화초를 심게 되었는데, 1914년에 서울의 지명을 새로 정할 때 가산에 심어놓은 꽃향기가 좋아서 이 곳을 방산동(芳山洞)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가산 역시 인구가 늘어나고, 근대적인 도시시설이 들어서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북쪽의 가산은 광무(光武) 2년(1898)에 그 자리에 전차 차고가 들어서면서 대부분 훼손되었으며, 남쪽 가산은 1918년경에 현 국립의료원 자리에 조선약학교(朝鮮藥學校)가 들어서고, 1921년에는 그 서편에 경성사범학교(京城師範學校)가 들어서면서 모두 헐렸으며, 그 흙은 종로의 도로 정비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현재 남쪽 가산터는 청계천 6가 평화시장 뒷골목에서 국립의료원을 거쳐 방산동 일대이고, 북쪽 가산터는 동대문종합상가가 들어서 있는 곳이다.
청계천은 도성 주변의 산과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들이 모여 도성 한가운데를 동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도심하천이었다. 청계천은 하천 조성과정이나 도시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는 지리적인 위치 상 조선왕조 500년 동안, 근대 100년 동안의 서울의 역사문화, 서울사람들의 일상생활에 많은 영향을 주게된 것은 필연적이었다. 도심하천으로서 청계천이 자연스럽게 가지게 된 기능은 하수도로서의 기능이었다. 청계천은 조선시대 역대 임금들이 왕정(王政)을 펼친 정치적인 공간이었다. 조선후기에는 제21대 영조는 개천을 준설하고 정비하는 대대적인 역사를 일으켰다. 스스로 자신이 80평생 동안 한 3가지 일 중의 하나가 준천이라고 말할 정도로 개천의 준설과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후 개천 준설작업은 영조의 준천을 표준으로 지속적으로 시행되었다. 1958년부터 본격적으로 복개되기 사작한 청계천은 1970년을 전후하여 완전히 사라지고 지금과 같은 복개도로와 고가도로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청계천은 서울사람들을 위한 공공의 놀이터였다. 명절 때마다 다리밟기, 연날리기, 연등행사, 편싸움(양쪽으로 편을 나누어 돌을 던지는 놀이, 石戰) 등 민속놀이가 펼쳐지는 장소였으며, 다리를 중심으로 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해학의 공간이었다.
다리밟기는 정월 대보름이 되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마을에 있는 다리 위를 왔다갔다하면서 걷는 놀이로 '답교(踏橋)놀이’라고도 한다. 정월 대보름날 다리밟기를 하는 것은 '교(橋)'가 우리 나라 말로는 '다리(脚)'로 발음되므로 이렇게 하면 1년 동안 다리에 병이 생기지 않는다고 속설이 있기 때문었다. 따라서 1년을 상징하는 열두 다리를 밟기도 하였다고 한다. 원래 다리밟기는 중국 당(唐)나라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에서 시작된 것은 고려시대부터 였다. 조선후기 학자 이수광(李邈光)이 지은 『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보름날 밤 답교놀이는 고려조로부터 시작하였는데, 태평스러운 때에는 이 다리밟기가 매우 성하여 남녀가 줄을 이어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관원들이 이를 금해서 체포까지 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도서울에서는 다리밟기가 광통교, 수표교 등 청계천에 놓여 있는 다리를 중심으로 매우 성행하였다. 정월 대보름날 밤이 되면 도성 안 남녀 모든 사람들이 저녁 종소리를 들으려고 먼저 종루(鐘樓)로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종소리를 들은 다음 청계천을 비롯한 도성 곳곳에 있는 다리로 흩어져 열두 다리를 차례로 밟았다. 이 열두 다리는 대체로 대광통교, 소광통교, 수표교, 장통교, 효경교, 태평교, 모전교, 송기교, 혜정교, 철물교, 동대문 안의 첫 다리(初橋), 두 다리(二橋) 등이었다. 조선 정조 때 안조환(安肇煥)이 지은「만언사(萬言詞)」에는 다리밟기를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춘정월(春正月) 십오야(十五夜) 상원(上元)야 밝은 달에 / 장안시상(長安市上) 열두다리 다리마다 바람불어 옥호금준(玉壺金樽)은 다리다리 배반(杯盤)이요 / 적성가곡(積聲歌曲)은 다리다리 풍류(風流)로다 웃다리 아래다리 석은다리 헛다리 철물(鐵物)다리 판자(板子)다리 두다리 돌아들어 / 중촌(中村)을 올라 광교(廣橋)다리 굽은다리 수표(水標)다리 다리밟기는 남녀노소,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이 함께 즐겼던 명절놀이였던 만큼 정월 대보름날이면 다리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북새통을 이루었다. 또 부녀자들은 14·15일을 피하여 16일 밤에 행하였다. 결국 다리밟기는 정월 대보름 하루 동안의 행사가 아니라 3일 동안 계속될 정도로 크게 성행하였던 것이다.
연날리기는 다리밟기와 함께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청계천에서 행해진 대표적인 민속놀이이다. 연(鳶)이란 이름은 새(鳥) 이름, 즉 연(鳶, 솔개)의 음을 따서 붙인 것으로 하늘 높이 나는 솔개처럼 종이로 만든 연도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나는데서 붙여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연날리기는 세계 곳곳에서 즐겨왔으며, 놀이뿐만 아니라 전쟁 또는 통신의 수단으로 이용되어왔다. 우리 나라의 경우 삼국시대 신라의 장수 김유신이 반란군을 토벌할 때 연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김유신이 큰 연을 만들어 밤에 남몰래 불을 붙여 공중에 높이 띄우고 전날 떨러진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으니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선전하였다고 한다. 외국의 경우 특이할 만한 것은 1752년 미국의 벤자민 프랭클린(Franklin Benjamin)이 연(鳶)을 이용한 실험을 통하여 번개와 전기의 방전현상이 동일한 것이라는 가설을 증명하고, 이것을 이용하여 피뢰침을 발명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연날리기가 널리 일반사람들에게 보급된 때는 조선시대 영조 무렵부터라고 한다. 무엇보다도 하천 바닥이 동서로 뚫려 있어서 바람이 잘 통하였다. 지금은 하천도 덮여 있고, 많은 고층빌딩들이 들어서 바람이 잘 통하지 않지만, 사실 청계천은 물이 흐르는 물길이었을 뿐만아니라 바람이 드나드는 바람길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청계천에 놓인 다리 위에서 연을 날리면 자연스럽게 동풍이나 서풍을 이용하여 연을 하늘 높이 날릴 수 있었던 것이다. 연날리기는 다른 우리의 전통민속놀이와 마찬가지로 현대 문명에 밀려 점차 사라져갔다. 청계천 역시 주변에 높은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더 이상 연날리기 장소로서 적절하지 못하게 된데다가 하천이 복개되어 바람길이 막히고, 다리가 사라지면서 연날리기도 함께 사라졌다.
다리밟기, 연날리기와 함께 청계천에서 행해지던 민속놀이로 연등놀이와 편싸움이 있었다. 연등놀이는 부처님 오신날을 봉축하는 행사로 고려의 풍습이 그대로 남아있었던 조선초기에는 정월 대보름날과 4월 초파일 두 차례나 열렸다. 그러나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제하는 정책을 펴는 조선왕조에서 연등행사를 여는 것은 국가의 기본이념과 모순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와 정책과는 달리 조선시대에 불교는 신앙으로서 궁중은 물론 일반 백성들의 일상생활에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비록 정월 대보름날 연등행사는 사라졌지만 4월 초파일 연등행사는 계속 되었다.『열양세시기』에 의하면 인가와 시장가는 물론 관청가까지도 등대〔燈竿〕를 세우고 등을 매달았다고 한다. 조선말기 박주대(朴周大,1836∼1912)가 지은「성시전도(城市全圖)」라는 시에는 연등놀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4월이면 개천에서 연등놀이가 펼쳐지는데 제각기 만든 연등은 온갖 재주를 자랑하네 하늘 높이 바지랑대에 연꽃등이 매달리고
바람 타고 꼬리치며 잉어가 올라가네
다리밟기, 연날리기, 편싸움 등 다른 민속놀이들이 근대화 과정에서 사라진 것과 달리 연등놀이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해마다 4월 초파일이면 등대 대신 가로수와 전기를 이용하여 연등을 밝히고, 현대식으로 개량된 다양한 연등행사가 펼쳐지고 있다. 편싸움은 한자로는 '돌싸움',‘석전(石戰)’또는‘편전(便戰)’이라고 하였는데, 주로 단오날 이루어졌다. 사람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서로 돌팔매질을 하여 승부를 겨루던 놀이였다. 역사적으로 고구려에서는 석전이 하나의 국가적 연중행사로서 국왕의 참석 하에 행하여졌으며, 고려 때에는 석투반(石投班), 석투군(石投軍)을 별도로 설치하여 석전을 장려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석전은 단순한 놀이의 차원을 넘어 전쟁에 대비하여 연무(鍊武)의 큰 뜻을 가지는 전투적 놀이, 또는 실전에 대비한 연습 놀이로 행해졌다. 1436년(세종 18) 북쪽 변방의 경우 석전군을 편성하여 야인(野人)을 방어하도록 하였으며, 1508년(중종 3) 삼포왜변 때에는 안동과 김해의 석전선수 수백 명을 모집하여 왜인을 쳐서 격파하고 실전상의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청계천 다리 위가 연날리기 장소로 적합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조선후기 홍석모(洪錫謨, 1781∼1850)가 지은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서울에서 석전은 성밖의 만리현(萬里峴, 지금의 중구 만리동)에서 주로 행해졌는데, 성안의 아이들도 이를 모방하여 종루 부근과 개천변의 비파정(琵琶亭), 즉 지금의 종로구 관수동 부근에서 편싸움을 하였다고 한다.
청계천은, 우리 전통무예인 택견이 성행하였던 장소이기도 하다. 택견은 주로 손과 발을 자유롭게 이용하여 상대방을 쓰러뜨려 승부를 내는 맨손 무예이다. 태권도가 발차기나 손을 이용하여 직선적인 동작을 위주로 한다면, 택견은 동작이 질박하면서도 섬세하며, 부드러운 곡선의 몸놀림으로 자연스럽게 공격과 방어가 이루어진다. 움찔거리는 다리의 움직임에서 가공할만한 속도가 배어 나오고 능청거리는 허리의 움직임의 탄력에서는 위력적인 힘이 뿜어 나온다. 이런 면에서 택견은 전형적인 외유내강(外柔內剛)의 무예라고 할 수 있다. 택견의 역사는 멀리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 무용총과 삼실총에 그려진 벽화에 택견의 견주기나 품밟기와 유사한 동작이 그려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택견을 수박(手搏) 또는 수박희(手搏戱)라고 하여 무인들의 무예로 성행하였다. 「고려사」에 의하면 무인정권 때 이의민, 두경승 등은 수박을 잘하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이의민과 두경승이 수박으로 힘겨루기를 했는데, 이의민이 수박으로 기둥을 치니 서까래가 들썩하였으며, 두경승이 손으로 벽을 치자 손자국에 깊게 파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택견은 1798년에 편찬된 「재물보(才物譜)」에 '탁견(托肩)'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구한말에 편찬된 「해동죽지(海東竹枝)」에는 '탁견희(托肩戱)'로 표현되어 있고, "옛 풍속에 다리를 걸거나 발로 차서 상대를 쓰러뜨리는 기술로 내기를 하곤 했는데, 폐해가 심하여 관에서 이 다리 짓을 금하니 이 같은 유희가 없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어 택견이 조선시대에도 성행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 서울에서는 결련(結連) 택견이라고 하여 마을끼리 편을 갈라 승부를 결정하였다고 한다. 윗대패와 아랫패, 그리고 구리개패가 그 대표적인 택견패이다. 윗대패는 도성 안에 거주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었으며, 아랫대는 도성 밖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윗대(上村이라고 도함)는 광통교 위쪽에서 인왕산 아래에 이르는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이곳에는 경아전(京衙前)이나 액예(掖隸)라고 하는 대전별감이나 무예별감들이 많이 거주하였다. 아랫대(下村이라고도 함)는 청계천 효경교 이하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주로 흥인지문, 광희문, 영도교 부근이 택견이 행해진 대표적인 장소이다. 아랫대에서 택견이 성행하게 된 것은 훈련원을 비롯한 군영(軍營)들이 이곳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군인들에게 있어서 무예의 단련은 군사훈련의 기본이자 일상생활의 한 부분이었다. 이곳에 거주하는 하급군인들은 평상시에 훈련과 생활의 한 부분으로 택견을 연마함으로써 이곳에서 택견은 자연 성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택견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거의 사라질 뻔하였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택견을 지켜온 사람이 송덕기(1896∼1987), 신한승(1928∼1987)씨 등이었다. 송씨는 윗대 택견의 전승자이고, 신씨는 왕십리에 기반을 둔 아랫대 택견의 전승자였다고 한다. 이들의 노력으로 택견은 1983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점차 생활체육으로 대중화되어가고 있다.
① 서민들을 지식에 눈 뜨게 한곳, 청계천 | ② 아낙들의 쉼터 청계천 ① 서민들을 지식에 눈뜨게 한곳, 청계천 조선시대 광통교를 중심으로 한 청계천 주변과 정릉동(지금의 중구 정동),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로) 앞에는 책사(冊肆), 서화사(書畵肆) 등 서적과 그림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즐비하였다. 광통교를 중심으로 한 청계천 주변 지역에서는 방각본(坊刻本)이라고 하여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서적의 간행이 활발하게 이루어 졌다. 방각본은 주로 민간이나 상인들에 의하여 간행되었으며, 주변에 있는 서사나 서화사를 통하여 유통되었다. 예를 들면 민속학자 고 송석하(宋錫夏, 1904∼1948) 선생이 소장하였던 「고사촬요(攷事撮要)」 라고 하는 책 끝에는 만력(萬曆) 4년(1576) 7월이라는 시기와 함께 "수표교 아래 북변에 살고 있는 하한수(河漢水) 집에서 판각하였으니 살 사람은 찾아 오라"고 하는 광고까지 낼 정도로 활발하였다. 방각본을 간행하는 곳은 종이를 생산하는 자하문 밖의 조지서(造紙署) 부근과 남대문밖의 자암(紫巖), 야동(冶洞), 성균관 근처의 송동(宋洞)에도 있었지만, 주로 청계천 주변지역에 밀집해 있었다. 무교(武橋), 유동(由洞), 미동(美洞), 합동(蛤洞), 광교(廣橋), 동현(銅峴), 모교(毛橋), 효경교(孝經橋) 등이 그 대표적인 지역이었다. 여기에 서 간행된 서적의 종류를 보면, 「천자문」,「동몽선습」, 「명심보감」, 「통감절요」, 「옥편」,「운서」 등 기초 학습서와 「숙향전」, 「심청전」, 「금방울전」 등 한글소설들로 주로 서당과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한 일반 서민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한편 서울 저자거리 곳곳에서는 방각본 소설책을 읽어주는 전기수(傳奇, 기이한 이야기를 전해주 는 노인이라는 뜻)라고 불리는 이야기꾼들이 있었다. 전기수는 동대문에서 종루 사이를 6일간격으로 오르내리면서 청중에 둘러 싸여 매일 소설을 구연(口演)하였다. 그가 소설을 읽다가 아주 긴박한 대목에서 읽기를 뚝 그치면 청중은 다음 부분이 궁금하여 다투어 돈을 던졌다고 한다. 일반 서민을 위한 방각본의 간행과 유통, 전기수와 같은 전문 이야기꾼의 등장은 그 동안 양반 사대부들 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지식의 일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시전 상업의 중심지로서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였던 청계천 주변지역은 바로 그 중심에 있었다. 지식대중화의 중심지로서 청계천의 명맥은 조선말기와 근대로 이어졌다.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식 인쇄소인 박문국(博文局)이 청계천 주변인 을지로 2가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회동서관(東書館)과 광문회(光文會)와 같은 서점들이 광통교 주변에는 자리하고 있었다. 조선광문회는 청계천 본류와 남산동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만나는 곡교(曲橋) 부근에 위치하였다. 1910년 일제는 조선을 강점한 후 해마다 진귀한 서적과 국보급 문화재를 반출하였다. 이에 충격을 받은 최남선(崔南善), 현채 (玄采)·박은식(朴殷植) 등은 조선광문회를 조직하고 우리 고전의 보존과 간행, 보급운동에 힘씀으로써 국학의 계승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② 아낙들의 쉼터 청계천
역사적으로 청계천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미 중에 하나는 도심 속의 생활하수도였다는 점이다. 조선왕조 초기 청계천의 성격을 두고 풍수학상의 명당수(明堂水)이냐, 아니면 생활하천이냐 하는 논란이 있었지만, 도심 한 가운데를 흐르는 청계천은 이미 태생적으로 생활하천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서울은 청계천이 있음으로 해서 조선왕조 500년 동안, 그리고 근대 100년 동안 도시로서 기능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지금도 역시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청계천을 통해서 서울 곳곳에 깨끗한 생명수가 전달되었으며, 서울 곳곳에 있는 더러운 쓰레기 와 하수들이 청계천을 통해서 씻겨 내려감으로써 도시 전체가 깨끗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지금도 도심 곳곳에서 흘러들어 오는 오수들이 청계천 지하의 하수관을 통하여 흐르고 있다. 청계천은 서울이라는 생명체가 소화시킨 일상의 찌꺼기들을 흘러보내는 자연이 준 훌륭한 배설기관이었다. 청계천이 생활하천이 되어야 한다고 한 어효첨(魚孝瞻)의 주장은 이러한 현상이 당시에 벌써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고, 나아가 세종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었다. 생활하천으로서 청계천의 모습은 깨끗하기보다는 더러운 것이 당연하였다. 오늘날과 같은 쓰레기장이 없었던 당시, 인분을 비롯하여 도성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쏟아내는 생활쓰레기는 모두 개천 바닥에 버려졌다. 심지어는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개천 바닥에 그냥 버리기도 하였다. 더욱이 청계천에는 항상 물이 가득 흐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비가 오지 않은 때에는 거의 물이 흐르지 않은 건천(乾川)이었기 때문에 버려진 쓰레기들은 그대로 쌓였 으며, 그로 인하여 심한 악취가 났다.
청계천에 있던 쓰레기와 냄새가 깨끗하게 씻겨 내려가는 때는 비가 올 때였다. 주변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은 모두 청계천으로 모여들었으므로 강물은 금새 불어났으며, 하천 바닥에 쌓여 있던 더러운 쓰레기들이 깨끗하게 씻겨 내려갔다. 큰비가 와서 더러운 쓰레기들이 씻겨 내려가고 맑은 물이 흐를 때면 청계천은 또 다른 모습으로 서울 사람들에게 찾아 왔다. 청계천은 아낙네들의 빨래터로, 아이들의 물놀이 장소로 서울사람들에게 좋은 휴식처가 되었다. 맑은 물이 흐를 때 청계천은 마치 공중 빨래터와 같았다. 아낙네들은 묵혀두었던 빨랫감과 빨래를 삶을 가마솥을 이고 지고 개울가로 몰려들었다. 넓적한 돌을 찾아 빨래판을 마련하고 그 위에 빨래를 얹고 힘차게 문지르거나 방망이로 내리쳤다. 다한 빨래는 바로 주변의 적당한 자리를 찾아 따사로운 햇볕에 말렸다. 빨래 방망이 소리, 하얗게 펼쳐진 빨래들, 아낙네들의 이야기 소리, 엄마 치맛자락을 잡고 빨래터에 따라 나온 아이들의 물장난 등으로 청계천은 흡사 유원지와 같았다.
상업활동의 중심지로서, 유흥가로서 청계천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왈자(曰子) 들이었다. 왈자란 기술직 중인, 경아전(京衙前, 각사 서리, 대가의 겸종), 액예(掖隸, 대전별감, 무예별감), 군교(軍校, 포교 등 하급군인), 시전상인 등을 총칭하는 말이다. 이들은 상업이 번창한 서울 도심 부에서 술집과 기방을 주름잡던 중간계층이었다. 그리고 기방에서 이들을 상대하는 기생 또한 청계천에서 활동 하고 있는 주요 구성원이었다. 왈자들은 직업에 따라 각각 거주지역을 달리하였다. 상류에서부터 지역별로 거주 하고 있는 청계천 사람들을 살펴보면 우선 광통교를 중심으로 상류 '우대'에는 각 관아에 소속된 서리 등 경아전들이 거주하였으며, 장통교, 수표교 어름의 중촌에는 중인들이, 효경교 아래 아래대에는 군교(軍校)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우대, 즉 상촌(上村)에 살고 있는 경아전의 대표적인 부류는 서리(胥吏)들이었다. 이들은 육조, 한성부, 비변사, 선혜청, 내수사 등 관아에 소속되어 문서의 처리, 등사(謄寫), 업무연락을 맡거나, 고급관리나 종친의 심부름을 하였다. 이들은 해당 관아의 실무담당자로서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고 실용서를 편찬하기도 하였으며, 나아가 시문(詩文)을 익혀 양반사대부 계층과 교유하기도 하였다. 또한 직임(職任)을 이용하여 권력과 부를 누렸으며, 한편으로는 협객(俠客)이 되어 시전 상인들과 함께, 술집과 기방, 도박장 등 유흥가를 휩쓸고 다녔다. 광통교 부근의 다동·상사동은 상업활동의 중심지로서 시전의 상인들이 살았다. 오늘날 청계천이 도심산업의 중심지로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도 청계천 주변은 상업과 수공업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청계천 주변에 상인들이 많이 거주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상인들은 사람들이 통행하는 거리 쪽 으로는 점포를 내고, 그 뒤쪽에는 자신들이 거주하는 살림집을 마련하였다. 상인들 또한 조선후기 상권의 독점, 중국·왜와의 중개무역을 통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하였으며, 이러한 부를 바탕으로 권세 있는 양반들과 어울리며, 매우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시전상인들은 서린동과 다동(茶洞) 일대와 상사동(想思洞, 지금의 청진동과 종로 1가 사이) 일대에 특히 많이 거주하였다. 시전 상인들은 신분상으로도 다른 지방의 상인들과는 달리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원래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조선시대의 신분체계로 볼 때 상인은 가장 아래에 있었다. 그러나 서울에 살고 있는 시정상인만은 경아전과 같은 중인의 지위에 있었으며, 실제 상업적인 부를 기반으로 경아전이 되기도 하였다. 상업과 수공업의 중심지로서 물품의 거래가 활발하고,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였던 청계천 지역은 자연 도성내의 대표적인 유흥가가 되었다. 특히 조선후기 서울은 상공업의 발달에 따라 소비적 유흥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주사(酒肆, 술집)와 기방(妓房)이 번창하고 도박 따위가 성행했던 것이다. 길거리 곳곳에는 주막 깃발이 펄럭이고, 술과 매음을 영업종목으로 하는 색주가(色酒家)가 성업 중이었다. 속칭 '군칠(君七)이집'이라 불리는 한 술집은 평양의 냉면, 개성의 산적 따위를 팔았고, 밤에는 주등(酒燈)을 켜놓고 영업을 하였다고 한다. 다동, 상사동 지역은 지금의 청진동과 서린동(남)이 기방촌(妓房村)의 중심지였다. 이곳에 색주가(色酒家)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상인들을 중심으로 한 소비층이 두텁게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통교, 수표교 어름은 중촌(中村)이라고 하여 중인(中人)들이 거주하였다. 조선시대 중인이란 경아전(京衙前)·역관(譯官)·의관(醫官)·천문학관(天文學官)·화원(畵員)·사자관(寫字官) 등 기술직 관료들로 요즈음으로 말하면 외교관, 의사, 천문학자, 화가 등 전문직업인이었다. 중인들 중에서도 청계천 주변 중촌에는 특히 역관(譯官)과 의관(醫官)이 많이 살고 있었다. 역관은 승문원(承文院)이나 사역원(司譯院)에 소속되어 중국, 왜, 여진 등과의 외교에서 외교문서의 작성, 통역을 담당하는 실무담당자로서 외교관계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였다. 역관들은 중국 사행을 통하여 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하였다. 따라서 역관출신 중에는 거부가 많았다. 한 예로 조선 숙종 때 역관 변승업(卞承業)의 경우 역관 무역을 통해서 축척한 부를 바탕으로 고리대금업을 했는데, 대출총액이 50여만 냥이나 되었다고 한다. 변승업은 다방골(茶房洞)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에는 한때 '다방골 변부자'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고 한다. 의관은 내의원, 전의감, 혜민서 등에 소속되어 병자의 치료와 의약의 제조를 담당하였다. 특히 내의원 이나 전의감에 소속되어 임금을 비롯한 왕족, 고급관료를 치료하는 의관의 경우 지위가 상당히 높았다. 의관들은 의료서비스와 도성 내 약재 판매의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부유한 편이었다. 지금의 을지로 입구인 구리개〔銅峴〕에는 약재를 판매하는 약종상이 밀집해 있었다. 지방에서 도성으로 들어오는 약재는 반드시 구리개에서 매매되었는데, 이 일대의 약재의 독점적 판매권을 가진 것이 바로 의관들이었다. 관이나 의관들 중에서는 해당 분야의 전문지식은 물론 학문적인 교양을 바탕으로 양반들과 직접 교유하기도 하였으며, 근대화과정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역관 오경석(吳慶錫)과 의원 유홍기(劉鴻基, 大致)가 대표적인 예로 이들은 김옥균, 유길준 등 북촌의 양반자제들을 불러 서구의 선진 문물을 소개하고 문호개방의 필요성을 교육하는 등 개화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효경교(지금의 청계 4가 아세아전자상가(구 아세아 극장)) 아래 도성 동남쪽과 왕십리 일대는 '아래대', '하촌(下村)' 이라고 하였는데, 이곳에는 군교(軍校)라고 하는 하급 군인들이 많이 거주하였다. 이곳에는 훈련원, 금위영, 어영청, 총융청 등 치안과 수도방위를 담당하고 있는 군영(軍營)들이 많이 위치하고 있었다. 조선후기 하급 군인들은 직업군인으로 일정한 급료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후기 만성적인 재정부족으로 군인들에게 급료를 지급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이들에게 상업과 수공업을 허락하였는데, 군인들은 이곳에서 채소를 재배하였다. 이것은 일종의 근교농업으로서 자가 소비의 목적이 아닌 도성 내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채소를 판매하기 위한 상업적 영농이었다. 훈련원 근처는 배추의 지배지로 유명하여 여기서 나는 배추는 '훈련원 배추'란 이름으로 불리었다. 또한 성밖의 왕십리는 무와 미나리의 재배지로 유명하여 '왕십리 미나리장수'란 말도 생겨났다. 하급군인들의 수공업 역시 활발하였는데, 특히 훈련도감 소속 공장의 일부는 근무 이외의 시간에 각종 수공업제품을 제작 판매하여 수공업과 상업으로 진출하였다.
□ 운영기간 : 3월 ~ 12월[매주 수~토 일몰 후 운영 (18:40~22:00] □ 위 치 : 청계천 두물다리 아래(청계 9가) □ 사 용 료 : 무료(꽃다발 등은 개인적으로 준비) □ 신청방법 : 청혼의 벽 홈페이지(http://propose.sisul.or.kr)
시민과 함께하는 청계천 수상패션쇼 참가자 모집 안내
서울시설공단이 주최하는 청계천 수상패션쇼에서 2013년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수상패션쇼 참가자를 모집합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청계천 수상패션쇼 개요] 청계천에서 시민들이 직접 패션을 뽐내는 자리를 만듦으로써 시민참여형 문화를 유도하고, 청계천에 아마추어리즘이 흐르도록 할 이번 프로그램에 패션에 관심이 많은 시민 여러분들의 뜨거운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판잣집 테마존
2013년 청계천 생태교실
○청계천 생태탐방(위해생물제거작전) ○4주간의 청계천 생태체험!
청계천 공공자전거 대여안내 □ 대여소 : 청계천 하류 마장2교 부근(생태학습장 위쪽), MTB자전거 50대
▶ 각 명칭을 클릭하시면 지도상의 위치 및 상세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1구역 청계광장 ~오간수교
07.06 - 07.07[청계광장] 충북 남부권관광협의회 거리홍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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