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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朝鮮王陵,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능(陵) - 2.(5) 제5대 문종(文宗) _ 현릉 顯陵

草霧 2013. 7. 30. 17:30

 

 

신들의 정원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조선왕릉

 

 

 

[ 朝鮮王陵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 - 2

 

 

(5)

 

5대 문종(文宗, 1414 ~ 1452) _ 현릉 顯陵 

 

파일:Hyeolleung.JPG

 

왕릉은 조선 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들의 무덤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선왕릉은 42(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 묘는 64기이다.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120(40, 14, 66) 중 현재 비공개하고 있는 지역은 사적 12곳임(3, 4, 5)입니다 .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폐위(廢位)된 묘() 2()

황제릉(皇帝陵) 2()

왕릉 35

 

 

 

 

1. 추존이라는 미명으로, 역사세우기

 

추존(追尊)함길도 8

 

2. 왕조, 문을 열다

 

1대 태조 (太祖, 1335-1408) _ 건원릉健元陵, 제릉齊陵, 정릉 貞陵

건원릉建元陵 | 조선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정릉貞陵 |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2대 정종 (定宗, 1357-1419) _ 후릉 厚陵

 

3대 태종 (太宗, 1367-1422) _ 헌릉 獻陵

헌릉獻陵 | 철권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4대 세종 (世宗, 1397-1450) _ 영릉 英陵

영릉英陵 |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5대 문종 (文宗, 1414-1452) _ 현릉 顯陵

현릉顯陵 | 세종의 분신 문종과 현덕왕후

 

6대 단종 (端宗, 1441-1457) _ 장릉莊陵, 사릉思陵

장릉莊陵 | 비운의 왕 단종

사릉思陵 | 가장 슬픈 왕비 정순왕후

 

7대 세조 (世祖, 1417-1468) _ 광릉 光陵

광릉光陵 |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와 정희왕후

 

추존(追尊)왕 덕종 (德宗, 1438-1457) _ 경릉 敬陵

경릉敬陵 | 요절한 덕종과 파란의 소혜왕후

 

8대 예종 (睿宗, 1450-1469) _ 창릉昌陵, 공릉恭陵

창릉昌陵 | 유약한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9대 성종 (成宗, 1457-1494) _ 선릉宣陵, 순릉順陵, 회묘 懷墓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성종과 정현왕후

 

3. 왕조, 산을 넘다

 

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_ 연산군묘 燕山君墓

 

11대 중종(中宗, 1488-1544) _ 정릉靖陵, 온릉溫陵, 희릉禧陵, 태릉 泰陵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온릉溫陵 |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

희릉禧陵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장경왕후

태릉泰陵 | 불교를 사랑한 문정왕후

 

12대 인종 (仁宗, 1515-1545) _ 효릉 孝陵

효릉孝陵 | 독살설과 함께 잠든 인종

 

13대 명종(明宗, 1534-1567) _ 강릉 康陵, 순창원 順昌園

강릉康陵 | 외척의 농단에 휘둘린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

 

14대 선조 (宣祖, 1552-1608) _ 목릉 穆陵, 성묘 成墓, 순강원 順康園

목릉穆陵 | 서자 출신 왕 선조와 의인왕후 그리고 인목왕후

 

4. 조선, 또 다시 위기를 맞다

 

15대 광해군 (光海君, 1575-1641) _ 광해군묘 光海君墓

 

추존(追尊)왕 원종 (元宗, 1580-1619) _ 장릉 章陵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과 인헌왕후

 

5. 왕조, 반석을 다지다

 

16대 인조 (仁祖, 1595-1649) _ 장릉 長陵, 휘릉 徽陵, 소경원 昭慶園, 영회원 永懷園

장릉長陵 | 가장 용렬한 왕 인조와 인렬왕후

휘릉徽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장렬왕후

 

6. 조선, 당쟁에 휩싸이다

 

17대 효종 (孝宗, 1619-1659) _ 영릉 寧陵

영릉寧陵 |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과 인선왕후

 

18대 현종 (顯宗, 1641-1674) _ 숭릉 崇陵

숭릉崇陵 | 외국에서 태어난 왕 현종과 과격한 성품의 명성왕후

 

7. 환국정치로 왕권을 다지다

 

19대 숙종 (肅宗, 1661-1720) _ 명릉明陵, 익릉 翼陵, 대빈묘大嬪墓, 소령원昭寧園

명릉明陵 | 차마폭에 휩싸였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익릉翼陵 | 꽃피우지 못하고 잠든 인경왕후

 

20대 경종 (景宗, 1688-1724) _ 의릉懿陵, 혜릉惠陵

의릉懿陵 | 식물임금 경종과 선의왕후

혜릉惠陵 | 세자빈 신분에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

 

8. 조선, 르네상스를 맞다

 

21대 영조 (英祖, 1694-1776) _ 원릉元陵, 홍릉弘陵, 수경원綏慶園, 수길원 綏吉園

원릉元陵 | 묻히고 싶은 곳에 잠들지 못한 영조와 정순왕후

홍릉弘陵 | 무수리 출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정성왕후

 

추존(追尊)왕 진종(眞宗) _ 영릉永陵

 

추존(追尊)왕 장조(사도세자 莊祖) _ 융릉隆陵, 의령원 懿寧園

융릉隆陵 |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왕후

 

22대 정조(正祖, 1752-1800) _ 건릉健陵, 휘경원徽慶園, 효창원 孝昌園

건릉健陵 | 개혁군주 정조와 효의왕후

 

9. 조선, 세도정치에 휘둘리다

 

23대 순조 (純祖, 1790-1834) _ 인릉仁陵

인릉仁陵 | 순조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지 순원왕후

 

추존(追尊)왕 익종 (翼宗, 문조 文祖) _ 수릉綏陵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24대 헌종 (憲宗, 1827-1849) _ 경릉景陵

경릉景陵 | 풍류를 사랑했던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

 

25대 철종 (哲宗, 1831-1863) _ 예릉睿陵

예릉睿陵 | 강화도령 철종과 철인왕후

 

10. 오백 년 왕조, 문을 닫다

 

26대 고종황제 (高宗, 1852-1919) _ 홍릉洪陵, 영휘원永徽園, 흥원 興園

홍릉洪陵 | 망국에 중심에 서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27대 순종황제 (純宗, 1874-1926) _ 유릉裕陵, 영원英園, 숭인원 崇仁園, 회인원 懷仁園

유릉裕陵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과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

 

 

 

5대 문종(文宗, 1414 ~ 1452) _ 현릉 顯陵

 

   

 

효심은 지극하나 병약하여 대사를 그르치다

 

현릉 顯陵

 

관련사진 

 

현릉(현덕왕후)20090905-21.JPG

 

문종(文宗, 1414 ~ 1452), 현덕왕후 1452, 경기 구리 193, 동구릉(東九陵)

 

5대 문종(文宗) 현릉 첫번째 작은이미지5대 문종(文宗) 현릉 두번째 작은이미지5대 문종(文宗) 현릉 세번째 작은이미지

 

 

 

 

동구릉 목록 현릉에는 5대 문종과 그의 비 현덕왕후가 잠들어 있다. 이렇게 왕과 왕비를 한 능에 묻는 경우에는 다양한 양식이 존재한다. 현릉의 예처럼, 같은 능의 이름 아래 있지만, 왕과 왕비의 능을 각각 다른 언덕 위에 따로 만든 능을 동원이강릉이라고 한다. 정자각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 위의 언덕에 있는 능이 문종의 능이고, 오른쪽 언덕의 능이 현덕왕후의 능이다. 홍살문을 비롯하여 정자각, 비각 등을 하나씩만 만들어놓아 이 능이 동원이강임을 나타내고 있다.

 

현릉의 능제는 국조오례의의 본이 된 세종대왕의 예전 능의 제도를 따랐다. 병풍석에서는 이전 왕릉에 있던 방울과 방패 무늬가 사라졌고 구름무늬가 도드라진다. 고석도 4개로 줄었다. 제일 아랫단에는 장검을 두 손으로 짚고 서 있는 무석인이 있는데 머리와 눈, 코가 매우 크게 표현되었다. 문석인도 튀어나온 눈과 양쪽으로 깊이 새겨진 콧수염이 이국적이다. 신도비는 임금의 치적이 국사에 실리기 때문에 굳이 사대부처럼 신도비를 세울 필요가 없다는 의논에 의해서 이때부터 건립하지 않았다.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217-145대 문종은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인 1452(단종 즉위) 5월에 경복궁 정전에서 승하하였다. 건원릉의 남동쪽에 현릉을 조성하였다. 능지를 정할 때에는 수양대군, 왕보인, 김종서, 정인지 등의 대신을 비롯하여 풍수학랑관이 현지를 답사하고 정하였다. 그의 비인 현덕왕후 권씨는 문종이 승하하기 11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1441(세종 23) 단종을 낳고 병이 위독해져 24세의 나이로 문종보다 먼저 승하하였는데, 안산의 소릉에 장사지냈다.

   

이후 단종의 복위 사건에 의해 1457(세조 3) 추폐되었다가 1512(중종 7) 복위되어 그 다음해 봄, 문종이 묻혀 있는 현릉의 왼쪽 산줄기 언덕에 천장하였다. 사후 72년 만에 왕의 곁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렇게 하여 동원이강릉을 조성한 후에는 정자각을 두 능의 중간 지점으로 이건하였다. 이 때 양릉 사이에 소나무가 빽빽하게 있었는데, 능역을 시작하자 저절로 말라 죽어 두 능 사이를 가리지 않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동구릉-동구릉 홈페이지를 찾아주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1452년 5월 14일 경복궁 강녕전(康寧殿)에서 문종(文宗)이 승하하니 즉위한지 2년 2개월 만이고, 그때 단종(端宗)의 나이 11살이었다. 어린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과 안평대군(安平大君)으로 하여금 조부인 세종의 무덤이 있던 서울 서초구 내곡동 영릉(英陵) 남쪽에 아버지인 문종의 능지(陵地)를 정하게 하였다.

 

능지를 둘러본 수양대군이 “산 모양과 물길이 좋다.”고 하여 그 곳을 능지로 정하였는데, 전농시(典農寺)의 종인 목효지(睦孝智)가 “내룡(來龍)은 나는 듯한 봉우리에 거꾸러지는 가지이고, 주인은 약하고 객은 강하고, 물길은 등져 흐르고, 혈(穴)은 굽었으니 좋은 자리가 아니다.”는 상소문을 올리면서 아울러 두 곳의 후보지도 추천을 한다.

 

하지만 수양대군은 목효지가 신분 상승을 위해 하는 짓이라며 묵살하고 고집을 부려 그 곳을 능지로 결정이 되도록 하였다. 그러나 광중(壙中)을 2m 70Cm정도 파내려가니 물이 솟아 나왔다. 이때 공조판서 정인지(鄭麟趾)는 다른 곳에 능지를 정하려 하지 않고 조금 비켜서 능지를 정하려 하니 수양대군이 억지로 영릉 서쪽에 능지를 정하여 파내려가니 이번에는 큰 돌이 나왔다.

 

하는 수 없이 건원릉의 왼쪽 산줄기에 능지를 정하였는데, 수양대군은 광중의 깊이를 영조척(營造尺)이 아닌 주척(周尺)을 사용하자고 제안을 하여 단종이 수용을 하였으나, 승정원의 요청으로 다시 영조척으로 10척(약 3m)을 파도록 결정하였다. 주척으로 10척이면 약 2m정도 이므로 1.5배의 차이가 난다. 이것은 다시 광중에서 돌이나 물이 나올까봐 수양대군이 잔머리를 쓴 것이다. 승정원에서는 풍수고전을 인용하여 “빗물이 스며들지 않으며, 찬 기운을 막을 수 있고, 도굴을 당할 우려가 없다.”고 깊게 매장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1시 방향에서 13시 방향을 바라보게 능을 조성(癸坐丁向)하여 같은 해 9월 1일에 문종을 장사를 지냈으니 그 곳이 현릉(顯陵)이다.

 

 

11년 전인 세종 23년(1441) 7월 24일 당시에 세자빈이었던 현덕빈(顯德嬪)이 단종을 낳은 다음 날 산후병으로 승하하였다. 세종은 우부승지 강석덕(姜碩德)에게 “빈에게는 장성한 아들이 없으니 진실로 불쌍하다. 경이 마땅히 가서 여러 가지 일을 잘 보살펴서 후회가 없도록 하라.”고 당부를 할 정도로 세자빈을 장사지내는데 정성을 다하였다.

 

장지를 경기도 안산에 정하여 능지를 조성할 즈음에 목효지가 “내룡이 얕고 약하며, 길로 끊어진 곳이 10곳이나 되어 이곳에 장사를 지내면 낳은 아이가 녹아버린다.”는 상소문을 올린다. 세종은 안평대군을 비롯한 대신들로 하여금 현지에 가서 목효지의 상소문을 확인하도록 지시를 하자 대신들은 “다른 문제는 없으나 묘의 방향인 계좌정향은 풍수고전에서 꺼리니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변경을 하자.”고 보고를 하자 이를 승낙하여 현덕빈을 같은 해 9월 21일에 장사를 지내니 이곳이 소릉(昭陵)이었다.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문종의 즉위로 추존된 현덕왕후를 폐하고 소릉을 바닷가로 이장을 하여 버렸다. 성종(成宗) 대에 추복을 추진하였지만 이루지 못하고, 중종 8년(1513) 3월 12일에 추복을 하고, 우의정 송일(宋軼)을 총호사로 임명하여 남편인 문종의 무덤 왼쪽 옆 인좌신향(寅坐申向)으로 같은 해 4월 18일에 천장(遷葬)을 하였다. 소릉의 능호는 없애고 문종의 무덤과 함께 현릉이라고 능호를 정하였다.

 

문종의 무덤이었던 현릉의 터를 정할 때 수양대군의 주도로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현릉은 아쉽게도 청룡이 능을 감싸지 못하고 밖으로 돌아 나가는 지형임에도 정하게 된 것이다. 단종실록을 보면 당시에 대신 누구도 수양대군의 눈치만 보았지 옳은 말을 하지 못했음이 기록되어 있어 간접적으로 입증된다. 현덕왕후 무덤 좌측 부근에서는 함몰이 되기도 하여 그다지 아름다운 능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그 청룡 끝에는 헌종(憲宗)의 아버지인 추존 문조(文祖)의 무덤인 수릉(綏陵)이 조성되어 있다. (선문대 최낙기 교수)

 

 

29년간의 왕세자, 왕 노릇은 23개월

 

문종(文宗, 1414 ~ 1452) 

조선의 5대 왕인 문종은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맏아들이다. 1421(세종 3) 8세의 어린 나이에 세자로 책봉되었고, 1450(세종 32) 3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이는 조선이 건국된 이래 적장승계의 원칙에 따라 등극한 최초의 임금이었다. 문종의 나이 29세에 세종이 병들자 부왕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기 시작하였다. 섭정기간 동안 그는 문무 관리를 고르게 등용하게 하고 언로를 자유롭게 열어 민정파악에 힘쓰는 등 나라의 안정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문종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고, 말이 적으며, 효도하고, 우애하고, 공손하고, 검소하고, 학문을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문종은 천문과 성리학, 글씨와 시문 등 각 방면에도 통달했다. 문종이 왕위에 오른 1450년에는 동국병감(東國兵鑑)이 출간되었고, 그 뒤로 매해 고려사(高麗史),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등이 편찬되었다. 한편 병제(兵制)를 정비하여 3군의 12사를 5사로 줄인 반면, 병력을 증대시키고 각 병종을 5사에 배분하였다. 그러나 종친세력의 압력 등으로 인해 왕권은 위축되었으며, 문종 자신 역시 몸이 약하여 재위 24개월 만에 병사하였고 곧 어린 세자 단종이 즉위하게 되었다.

 

조선 전기의 문신인 성현의 수필집용재총화(?齋叢話)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실려 있다. 문종이 동궁으로 있을 때 귤을 나무 소반에 담아서 집현전에 보낸 일이 있었다. 집현전의 학사들이 귤을 다 먹자 문종은 즉석에서 시를 짓고 이를 소반 위에 썼다.

 

 

향나무의 향기는 코에만 향기롭고 / 기름진 고기는 입에만 달구나 /

가장 사랑스런 동정의 귤은 / 코에도 향기롭고 입에도 달구나.

 

이를 본 집현전 학사들이 그 유려한 글씨와 문장에 감탄하여 이를 다투어 베끼고자 하였다. 하지만 대궐에서 빨리 소반을 돌려보내라고 성화를 하는 통에 다 베껴 쓰지 못한 집현전 학자들이 소반을 붙들고 차마 놓지 못하였다고 한다.

 

속빈 강정 왕릉

동역이강

석양, 석호는 왕릉 내시다

국조오례의는 공염불

풍수왕릉이 절실했다

단종왕릉에 무인석이 없는 이유

옹비어천가와 세조

세조가 명당으로 판정한 서오릉

왕릉이 발복해야 왕들이 산다

병풍석의 정체

망주석이 무엇인지 몰라도 망주석을 열심히 세우는 한국인

왕릉의 실추

날벼락 맞은 역사

주체성 있는 강한 나라를 꿈꾼 왕

유학 규범에 충실했던 삶

처복 없는 임금님

병마와 싸우며 국방강화에 노력하다

29년간의 왕세자, 왕 노릇은 23개월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 權氏, 1418 ~ 1441)

 

 

현덕왕후는 1418(태종 18) 화산부원군 권전의 딸로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났다. 1431(세종 13) 14세의 나이로 세자궁에 궁녀로 들어가 세자의 후궁이 되고, 이어 내명부의 종3품 품계인 양원을 하사받았다. 1437(세종 19) 세자빈인 순빈 봉씨가 폐위되자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며, 1441(세종 23) 723일 단종을 낳았다. 그러나 산후병으로 그 다음날 동궁의 자선당에서 승하하였다.

 

현덕왕후는 정숙한 덕과 온순한 용모로 동궁에 뽑혀 들어와 세자빈의 자리에 오르고, 단아한 성품과 효행으로 세종과 소헌왕후의 총애를 받았으나 젊은 나이에 일찍 숨을 거둔 비운의 왕비이다. 그러나 그녀의 사후는 생애보다 더욱 비극적이었다. 경기도 안산군에 안장된 후 문종이 즉위하자 능호를 소릉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1457년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는 사건에 현덕왕후의 어머니 최씨와 동생 권자신이 연루되어 처형되면서 폐위되어 종묘에서 신주가 철거되고, 소릉은 파헤쳐져 바닷가에 장사지내는 수난을 당했다. 그 뒤 영남 유생들을 중심으로 소릉 복위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다. 1513(중종 8) 소세양이 현덕왕후의 복위를 재차 건의하자, 종묘의 문종 신위만이 홀로 제사를 받는 것이 민망하다는 명분 아래 복위되어 같은 해 421일 지금의 자리로 천장하게 되었다.

 

원래 현덕왕후는 안산의 소릉에 장사지냈는데, 수양대군계유정난으로 단종을 내쫓고 집권한 이후, 세조 3년 1457년 의경세자(덕종으로 추존됨)의 죽음으로 추폐되었다가 중종 7년 1512년 복위되어 그 다음해 봄, 1513년 문종이 묻혀 있는 현릉의 왼쪽 산줄기 언덕으로 사후 72년 만에 옮겨져 왕의 곁으로 돌아왔다.

 

문종은 동궁으로 있던 1427(세종 9) 14세의 나이로 김오문의 딸과 혼인을 했다. 그러나 희빈 김씨는 문종의 사랑을 얻기 위해 은밀한 술법을 동원하다가 시아버지인 세종에 의해 쫓김을 당하였다. 두 번 째 세자빈인 순빈 봉씨는 성품이 괄괄하고 기가 센 여인이었는데, 문종과의 갈등이 잦았고, 동성애 시비에까지 휘말려 다시 폐위 당하였다.

 

결국 문종은 순빈과 헤어진지 두 달 만에 현덕왕후 권씨를 세 번째 세자빈으로 맞이하였다. 여기에는 세종이 권근의 후손이자 아들을 낳을 가능성이 높았던 그녀를 지명한 입김이 크게 작용하였다. 권씨는 세종의 예상대로 아들을 낳았으나, 그 다음날 죽게 되었고, 후계 구도가 복잡해지는 것을 이유로, 문종은 다시는 세자빈을 간택할 수 없었다. 단명한 현덕왕후 권씨가 문종의 마지막 부인이었던 것이다.

 

 JTBC <인수대비>에서 인수대비 역을 맡은 채시라(왼쪽)와 그의 아역인 티아라 함은정

 

 

 

 

현황(現況)

 

    

 

 

조선조 王室世系表 [ 27, 517, 1392 - 1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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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익종(翼宗) 수릉(綏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장조(莊祖) 융릉(隆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

진종(眞宗) 영릉(永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원종(元宗) 장릉(章陵 : 사적 제202) : 경기 김포시 김포읍(金浦邑) 풍무동(豊舞洞)

덕종(德宗) 경릉(敬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폐위(廢位)된 묘() 2()

15대 광해군(第十五代 光海君) 광해군묘(光海君墓 : 사적 제363)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0대 연산군(第十代 燕山君)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 : 서울 도봉구(道峰區) 방학동

황제릉(皇帝陵) 2()

27대 순종(第二十七代 純宗) 유릉(裕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26대 고종(第二十六代 高宗) 홍릉(洪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南楊州)

왕릉 35

25대 철종(第二十五代 哲宗) 예릉(睿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4대 헌종(第二十四代 憲宗) 경릉(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23대 순조(第二十三代 純祖) 인릉(仁陵 : 사적 제194) : 서울 서초구(瑞草區) 내곡동(內谷洞)

22대 정조(第二十二代 正祖) 건릉(健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홍릉(弘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원릉(元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혜릉(惠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의릉(懿陵 : 사적 제204) : 서울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대빈묘(大嬪墓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익릉(翼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명릉(明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18대 현종(第十八代 顯宗) 숭릉(崇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7대 효종(第十七代 孝宗) 영릉(寧陵 : 사적 제195) : 경기 여주시(驪州市) 능서면(陵西面)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휘릉(徽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장릉(長陵 : 사적 제203) : 경기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성묘(成墓 : 사적 제365)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목릉(穆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3대 명종(第十三代 明宗) 강릉(康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2대 인종(第十二代 仁宗) 효릉(孝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희릉(禧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온릉(溫陵 : 사적 제210) : 경기(京畿)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정릉(靖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三成洞) 테헤란로

9대 성종(第九代 成宗) 회묘(懷墓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순릉(順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선릉(宣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Teheran)

8대 예종(第八代 睿宗) 공릉(恭陵 : 사적 제205)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조리읍(條里邑)

8대 예종(第八代 睿宗) 창릉(昌陵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7대 세조(第七代 世祖) 광릉(光陵 : 사적 제197)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와 포천군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사릉(思陵 : 사적 제209)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읍(眞乾邑)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장릉(莊陵 : 사적 제196) : 강원(江原)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5대 문종(第五代 文宗) 현릉(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4대 세종(第四代 世宗)

3대 태종(第三代 太宗)

2대 정종(第二代 定宗)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정릉(貞陵 : 사적 제208) : 서울 성북구 정릉2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제릉(齊陵) :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 판문군(板門郡) 상도리(上道里)

1대 태조(第一代 太祖) 건원릉(健元陵 : 사적 제193)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조선왕릉(朝鮮王陵)의 계보

 

    

 

목조-덕릉 효공왕후 이씨-안릉

익조-지릉 정숙왕후 최씨-숙릉 , 손씨

도조-의릉 경순왕후 박씨-순릉, 조씨

환조-정릉 의혜왕후 최씨-화릉, 이씨, 정빈 김씨

태조-건원릉 신의왕후 한씨-제릉 신덕왕후 강씨-정릉

정종-후릉 정안왕후 김씨-후릉

태종-헌릉 원경왕후 민씨-헌릉

세종-영릉 소헌왕후 심씨-영릉

문종-현릉 현덕왕후 권씨-현릉

단종-장릉 정순왕후 송씨-사릉

세조-광릉 정희왕후 윤씨-광릉

예종-창릉 장순왕후 한씨-공릉 안순왕후 한씨-창릉

성종-선릉 공혜왕후 한씨-순릉 폐비 윤씨-회묘 정현왕후 윤씨-선릉

연산군-연산군묘 폐비 신씨-연산군묘

중종-정릉 단경왕후 신씨-온릉 장경왕후 윤씨-희릉 문정왕후 윤씨-태릉

인종-효릉 인성왕후 박씨-효릉

명종-강릉 인순왕후 심씨-강릉

선조-목릉 의인왕후 박씨-목릉 인목왕후 김씨-목릉

광해군-광해군묘 폐비유씨-광해군묘

인조-장릉 인렬왕후 한씨-장릉 장렬왕후 조씨-휘릉

효종-영릉 인선왕후 장씨-영릉

현종-숭릉 명성왕후 김씨-숭릉

숙종-명릉 인경왕후 김씨-익릉 인현왕후 민씨-명릉 인원왕후 김씨-명릉

경종-의릉 단의왕후 심씨-혜릉 선의왕후 어씨-의릉

영조-원릉 정성왕후 서씨-홍릉 정순왕후 김씨-원릉

정조-건릉 효의왕후 김씨-건릉

순조-인릉 순원왕후 김씨-인릉

헌종-경릉 효현왕후 김씨-경릉 효정왕후 홍씨-경릉

철종-예릉 철인왕후 김씨-예릉

고종-홍릉 명성황후 민씨-홍릉

순종-유릉 순명효황후 민씨-유릉 순정효황후 윤씨-유릉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