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1392년 7월 17일 태조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세운 다음 1394년 11월 26일 한양으로 천도한 이후 오늘에 이르는 600여년 동안 정치, 경제, 사회, 문화등의 한국 민족사의 중심역할을 하는 수도 서울로서 남쪽 지방과의 육상교통은 반드시 한강을 거쳐 갈 수 밖에 없었으니 한강의 교량은 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변천하게 되었다. 국왕은 선왕의 능에도 참배하고 온천에 가거나 나들이를 하기 위하여 1년에 몇번씩은 한강을 건너야만 했다. 이같이 국왕 행렬이 도강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큰 배 70여척을 가로로 이어 서로 묶은 뒤 그 위에 널판지를 깔아 5, 6필의 기마가 옆으로 서서 자유로이 건널 수 있도록 오늘날의 부잔교와 같은 교량을 세우곤 했다.(도면 1-1 참조) 오늘의 한강대교 자리에 놓여졌던 이 다리는 백성의 배를 일정기간 징발하여 사용했는데 놓는데 한달, 푸는데 한달이 걸리는 등 강변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그 후 수도 서울을 중심으로 한 생활권의 확장과 더불어 교통량이 증가되고 한강을 도강하는 보다 많은 물동량의 수송이 요구되었다. 토목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한강에 최초로 건설된 교량은 경인철도부설공사와 병행한 용산과 노량진간을 연결하는 한강철도교로 1897년 착공하여 1900년에 준공되었다. 이 교량을 시점으로 지금은 26개의 교량이 한강상에 가설되었거나 가설 중에 있다.(표 1-1 참조) 수도 서울의 발전과 인구집중으로 한강상에 많은 교량들이 설치되었으며 토목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시대에 부흥하는 여러형식의 교량이 세워져 시민의 교통 편의를 도모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 형식의 교량건설은 하천경관 향상등에 크게 기여하는 반면 기술 및 시공상의 문제 등으로 최근 성수대교 붕괴사고가 발생되고 당산철교 철거가 확정되었으며광진교는 철거 후 새로운 교량을 설치하고 있는 등 유지관리에 따른 문제가 계속 발생되고 있어 교량 건설과 함께 유지관리 문제도 심각하게 거론되고 있는 실정이다.
출처 : 도시기반시설본부 홈페이지
한강의 본류인 남한강은 강원도 태백시 창죽동 검용소에서 발원한 하천으로서 삼척시 하장면 부근에서 골지천의 이름으로 북류하다가 광동댐을 지나 석병산(1,010m)에서 발원한 임계천과 합류해 서류, 정선군 북면 여량리에서 황병산(1,407m)을 발원지로 한 송천과 만나 조양강이 되어 흐르다가, 오대천과 합류한 후 남류하여 동강이 된다. 동강은 영월읍에서 평창강과 주천강이 합류해 만들어진 서강과 만난 후 흐르다가 충주시에서 달천, 강원도 원주시와 경기도 여주군 부근에서 섬강·청미천과 만난 후 양화천·복하천·흑천 등의 지류를 합친 후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만난다.
총연장 317km, 유역면적 10,834㎢의 하천으로 금강산에서 발원한 금강천이 강원도 철원군 원동면에서 금성천을 합친 후 북한강이라는 이름으로 화천군을 거쳐 남류하다가 소양강과 춘천에서 만난다. 소양강은 인제군 서화면에서 발원한 인제천이 인북천이라는 이름으로 남류하다가 설악산에서 발원한 북천과 인제읍에서 합쳐진 후 홍천군 내면에서 발원한 내린천과 합류되어 춘천으로 흐르는 강을 말한다. 이후 북한강은 경기도 가평군에서 홍천군 서석면에서 발원한 홍천강과 합류한 뒤 서류하다가 외서면 청평리에서 조종천을 합친 후 양평군 양수리에서 남한강과 합류해 한강을 이룬다.
팔당 하류역이란 양수리에서부터 한강이 임진강과 합류되는 지점까지의 구간을 말한다. 이 지역에는 위로부터 왕숙천·성내천·중랑천·탄천·홍제천 ·안양천·곡릉천 등 많은 하천이 한강으로 유입되고 있으며, 경기도 남양주시 ·하남시·구리시와 서울특별시·경기도 고양시 등이 자리하고 있다.
경기 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연장 254.6km, 유역면적 8,117㎢인 임진강은 마식령에서 발원하여 경기도 연천군에서 한탄강과 합류해 흘러내려 오다가 신천 ·문산천과 개성시를 관류하는 설계천을 합류해 큰 강이 되어 김포반도의 북안에서 한강 하류로 유입한다.
선사시대의 한강 한강유역에서 구석기, 신석기시대 유물이 각지에서 발견되고 있으나 강동구 암사동 선사유적지는 신석기 문화를 대표하는 것이며 그들의 식생활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서 토기, 석기 또는 골각기 등이 발견되고 있다. 이들은 구릉이나 야산에서 집중적인 채집활동을 벌였을 것으로 생각되며 원초적인 어로기법인 낚시어법이나 자돌어법이 일찍부터 성행하여 창 또는 작살을 이용하여 물고기를 찔려 잡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돌어법, 낚시어법이 개인적인 단독작업으로서 어획량이 많지 않은데 비해 어망을 이용한 고기잡이는 채집어법과 더불어 집단적 공동작업을 통하여 대량어획을 가능하게 하는 어로기법인데 그러한 증거로서 어망추가 여러 유적에서 다수 발견되고 있다. 그들은 바로 이러한 공동작업에 의한 대량생산을 통하여 잉여생산물을 축척하여 나갔고 그것은 한편으로는 환경에의 적응도를 높여 생존가능을 증대시켰으며, 그에 따라 인구가 증가되고 취락이 팽창하였으며 안정된 정착생활을 통하여 문화가 더욱 발전하게 되었고 이후 청동기시대의 발달된 문화를 거쳐 한강유역에서 고대국가가 발달하게 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고 볼 수 있다.
지리적으로 한반도 중앙의 대부분을 포함하고 있는 한강유역의 청동기시대는 한반도 동북지방(함경 남북도)의 민무늬토기, 구멍무늬토기, 붉은간토기문화, 서북지방(평안남도, 황해도)의 팽이토기문화의 영향을 받아 민무늬토기문화 및 청동기문화가 성립되었으며 이들 양지역의 문화는 자체적인 발전과 혼합을 통해 한강유역의 독특한 청동기문화를 이룩하고 한편으로는 한반도 남부지방으로 문화를 전파시켜 주는 중간 매개지역의 역할도 담당하였다. 한반도에서는 민무늬토기 시대에 이르러 신석기이래의 농경이 더욱 발전된 것으로 보여진다. 유적지 움집터에서 탄화된 쌀, 보리, 수수, 기장이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잡곡농사가 한반도 전역에 일반화되었음은 물론, 벼농사도 서북지방과 남한지역에 상당히 일반화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한강유역의 벼농사는 서북지방 팽이토기 주민의 남하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 남하한 팽이토기인들이 재래의 동북계 민무늬토기인과 접촉 융화하면서 한강유역, 나아가서는 남한지역에까지 벼농사가 일반화 된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시대에 접어들면서 한강유역의 득실이 나라의 흥망성쇠와 지대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그 이유는 한강유역이 반도의 중앙부를 축으로 관류하는 큰 강인 만큼 한반도의 중심무대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군사, 경제, 사회, 외교적 제조건을 구비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이 지역이 삼국쟁패의 주요 과녁이 되었고 한강유역을 점유한 국가는 영토적 확장과 더불어 국가발전의 강력한 터전을 마련한 결과가 되었다. 결국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강유역을 번갈아 지배했던 사실을 전 역사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한강유역을 점유하면 나라가 번영하였고 상실하면 쇠퇴하였다.
송악의 호족 출신인 왕건은 918년 왕이 되어 고려를 건국하고 935년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문종 21년에 한강유역의 중요성이 인식되어 당시 양주(현 서울)를 남경으로 승격시켜 개경 및 서경과 함께 3대요지가 되었다. 이후 고려말 1382년(우왕 8년) 9월에 한양천도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왜군의 창궐, 대명관계의 복잡성등 정치,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고 풍수지리설이 성행하자 도읍이 불길하다 하여 이듬해 2월에 개성으로 돌아왔다. 고려왕조 마지막왕인 공양왕때(1390년 9월) 다시 한양천도를 단행하였으나 한양천도가 있은 후 큰 비바람과 천둥번개가 일어나고, 인축이 동사했으며 신도의 문화부에 큰 범이 뛰어들어 사람을 물어가는 등 불길한 일이 자주 발생하자 1391년 2월에 다시 개성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었다. 이리하여 고려로서의 한양천도 문제는 종말이 맺어지고 그 완전한 실현은 1394년(조선태조 3년) 이성계에 의해 이루어 졌다.
태조 이성계는 즉위후 불과 16일만인 1392년 8월 3일에 도평의사사에게 한양천도를 명하여 태조3년(1394년) 10월 25일(음력) 천도를 실현하였다. 한양천도의 배경은 다음 세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주지하는 바와 같이 풍수지리설에 영향을 받은 바가 컸다는 점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즉 개경의 지덕이 쇠패한 땅이라 망국의 수도를 하루라도 빨리 피하려는 미신적 사상인 음양지리(풍수)적 사상에 영향받아 천도를 서둘렀다는 지적이다. 둘째, 태조 이성계 자신이 왕위획득과 관련되는 행위에 대한 가책과 개성의 왕씨를 중심으로 한 구가세족의 반발에 대처할 필요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정치적 정황은 태조 이성계로 하여금 천도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게 하였다. 셋째, 한강을 끼고 한양의 인문지리적 위치의 중요성을 들 수 있다. 한 왕조가 도읍지를 선택할 때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선 지리적인 위치를 고려하고 있음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한양은 지세가 훌륭하고 군사적인 방위에 있어서 천연의 요새지였다. 이러한 지세의 훌륭함은 일찍이 이중환도 그의 「택리지」에서 한양의 진신인 삼각산이 수려하고 맑기가 나라 안에서는 사산중의 하나라고 예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전근대사회에 있어서 국가재정의 운용을 위한 수입은 거의 농업생산물에 의지하고 있었다. 농업경제가 사회의 기반을 이루고 상태에서는 현물을 조세로 수취하였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세곡의 운송에 큰 관심을 가지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도로망을 포함하여 육상교통 수단이 별로 발달하지 못했던 까닭에 조세는 주로 대량수송이 용이한 조운을 통해 운송되었다. 그러므로 도읍지로서의 위치는 수륙의 교통이 편리한 곳에 있어야 함은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지리적 위치 등을 고려하여 선택한 한강을 끼고 있는 한양은 천도때부터 조운의 발전은 필연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전국의 세곡이 조운을 통하여 한강에 모였고, 한양에 거주하는 지주층이 지방농장에서 거두어 들인 소작도 대부분 선박으로 이곳에 운반되었다. 도성내 일반 생활품도 그 양이 많은 것은 대부분은 선박으로 한강을 통하여 공급되었다. 그리고 조선후기에 이르러 세제개혁과 아울러 대동법이 실시됨에 따라 한강은 더욱 중요성을 더하게 되었으며, 호남을 비롯하여 충청도 등지에서 수납되는 대동미는 조운선을 통하여 한강으로 수송되었다. 따라서 한강은 백관의 녹봉과 국가재원을 충당시켜 보급로가 되었다.
한강변에 입주했던 최초의 외국인은 프랑스인 신부들이었는데 1887년 현 원효로4가 1번지의 6,500평의 땅을 구입하여 신학교를 건축하고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한강에 증기선이 최초로 운항한 것은 1888년이었는데, 그 뒤 1890년 독일계와 미국계의 증기선이 취항하게 되었고, 이어 중국인 거상 동순태가 100톤짜리 증기선을 들여와 용산과 인천사이를 취항하기 이르렀다. 1899년 착공한 한강철교공사는 다음해인 1900년에 완공,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철교가 놓여졌다. 그리고 길이 26마일의 서울역에서 인천을 잇는 경인철도가 1900년에 개통되었다. 그리고 한강에 최초의 인도교가 가설된 것은 한일 합방 6년뒤인 1916년이었고, 새 인도교는 1934년에 착공하여 1936년에 완공되었는데 폭 20미터에 길이는 10,005미터였다. 한강에 큰 홍수가 있었던 때는 1912년과 1920년, 1925년의 세차례였다,. 그 가운데 가장 큰 피해를 낸 것은 1925년(을축)대홍수로 7월 15일에서 18일까지 4일간에 걸쳐 400에서 500밀리미터의 높은 강수량을 보였다. 노도와 같은 홍수물은 한강 제방을 무너뜨리고 순식간에 용산, 남대문 앞 까지 일대를 물바다로 만들었다. 현재 올림픽 주경기장이 위치한 잠실동과 신천동은 부리도(浮里島)라 불리는 하중도(河中島)였다. 이 섬은 오랜 세월 동안 흐름이 약간씩 북서류하게 됨으로써 생겨난 섬이다. 1970년 4월, 북쪽 하도를 넓게 하고 남쪽의 하천을 폐쇄함으로서 하중도를 육지화하는 대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대역사는 100만 평이 넘는 공유 수면 매립공사가 주축이었으며 이를 중심으로 그 주변 340만평의 광역 구획정리사업이 동시에 실시되어 1975년에 마무리 되었다. 이개발로 인해 남류하던 흐름이 폐쇄되면서 만들어진 호수가 하적호(河跡湖)인 석촌호수이다.
한강과 임진왜란 선조 25년(1592년) 4월 14일 왜장 소서행장과 가등청정이 이끄는 20만의 대군이 정명가도를 이유로 조선침공을 하였다. 임진왜란 초기에 왜군은 한강을 쉽게 도강하여 북진하였으나, 그 뒤 원호, 변응성등의 남한강 전투승리는 적의 보급로와 진출로를 차단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권율 장군의 행주산성에서의 승전을 계기로 왜적을 퇴각의 궁지로 몰아넣어 관, 의병으로 하여금 각지에서 반격 할 수 있는 실마리를 만들어 주었다. 결국 벽제관 싸움에서 패배하여 전의를 상실한 명과 행주산성에서 패배하여 식량부족과 전쟁에 지친 왜병은 한강상에서 강화회담 후 왜군은 철수하였다.
일제시대의 한강은 침략적 위치로서의 중요성이 높이 평가되었으므로 수로의 기능을 최대한 이용하였다. 한일수호조약에 의하여 원산이 개항되고, 인천항은 1880년 12월에 개항키로 결정한 후 1882년 4월에 개항이 되었다. 개항과 함께 근대적 교통로의 필요성으로 인하여 경인선 철도가설공사는 1990년 7월 5일에 완공되고, 경부선 복선화 계획과 관련하여 제2철교는 1911년 7월에 착수 1912년 9월에 준공되었다. 또한, 만주사변 이후 물자의 수송거리의 단축을 위해 인도교 근처에 한강철교가 1944년에 완공되었다. 한강인도교는 1916년 중앙차도 4.5m, 좌우보도 각 1.6m로 기공하였으나 처음 가설한 인도교는 교통량을 감당할 수 없어 1930년대를 전후해서 급증하는 교통량의 해소방법으로 광진교를 1934년 8월에 착공하여 1936년 10월에 완공하므로서 인도교와 함께 한강을 도보로 건널 수 있는 2번째 다리가 되었다.
한강은 그 길이가 514㎞에 달하는 대하이다. 그런데 한국전쟁사에서 한강선이라고 하는 지역에는 통상 양화교에서 광진교 사이의 24㎞에 이르는 한강변 일대가 포함되어 있다. 이 지역에서 수도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으며, 그 작전의 성패여부에 따라서 전세가 좌우되었던 까닭에 이 지역을 특히 한강선 이라고 일컫고 있는 것이다. 한강선은 대체로 하상폭 1~1.5㎞에 유수폭이 300~1,000m이며, 수심은 2~5m로 도하장비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강을 건널 수가 없다. 따라서 한강선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 수도권 일원에서 가장 큰 천연장애물로서 중요시되고 있다. 한국전쟁당시 한강을 건너는 교통수단은 나루터에서 배를 이용하거나 한강위에 가설된 다리를 통하는 두가지 방법이 있었다. 나루터는 서강 - 율도의 가중리나루와 마포 - 여의도의 마포나루, 서빙고에서 잠원동으로 건너는 서빙고나루와 한남동으로부터 신사리로 가는 한강나루, 그리고 뚝섬에서 압구정동으로 통하는 뚝섬나루 및 광장동 - 천호리의 광나루등 6개소가 전술적인 이용도가 높은 여건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 나루터에는 각각 몇척씩의 작은 부선과 목선이 있었지만, 한국전쟁당시에는 대부분 국군과 서울 시민들이 철수 또는 피난할 때에 이용하여 남쪽 강변에 버려져 있었다. 그러므로 북쪽에서는 많은 병력이 동시에 강을 건너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 한강나루에는 차량을 도하시키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대부대의 도하작전이 가능하였다. 한 강선에 가설된 교량은 한강대교와 광진교의 두 개의 인도교와 경인선(상행 및 하행)의 단선철교, 그리고 경부선의 복선철교 등 모두 다섯 개의 교량이 있어서 강을 건너는 주된 교통수단이 되고 있었다. 이 교량들은 1950년 6월 28일 이른 새벽에 국군 공병부대가 폭파시켰다. 한강 9·28 수복이후 한강대교의 파괴된 경간에 한강가교 설치공사를 착수하여 같은해 10월 19일에 개통식이 거행되어 시민교통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되고 10월 한강가교의 확장과 보도 증설공사가 시공되어 1957년 3월 4일 한강대교 복구공사가 시작되었고 그해 12월 12일에 준공되었다. 결국 한강대교는 한국전쟁 당시 작전목적으로 국군에 의하여 폭파된지 장장 7년 9개월만에 한강을 드나드는 시민들의 교통수단으로 다시금 그 기능을 회복하게 되었다.
한사군과 삼국시대 초기의 한강은 한반도의 중간 허리부분을 띠처럼 둘렀다는 뜻에서 '대수' 라 불렀고, 고구려에서는 '아리수' 라 했으며, 백제는 '욱리하' 라고 했다. 또 신라는 상류를 '이하', 하류를 '왕봉하' 라고 불렀다. 한편 '삼국사기' '신라편' 지리지에는 한강을 '한산하' 또는 '북독' 이라고도 했다. 고려때는 큰 물줄기가 맑고 밝게 뻗어내리는 긴 강이란 뜻으로 '열수' 라고 불렀으며, 모래가 많아 '사평도' 또는 '사리진' 이라고도 불렀다. 한편 한강은 본래 우리말 '한가람'에서 비롯된 말로 '한'은 '크다, 넓다, 길다'는 의미이며, '기람'은 강의 고어로 '크고 넓은 강' 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 수상관광콜택시
▲ 선유도 한강공원
▣ 찾아오시는 길 ① 버 스 - 603,760,5714,7612(공원 정문), 602, 604, 5712, 6712, 6716(카페 아리따움) ② 지하철 - 선유도역(9호선) 2번 출구 ▣ 선유도 안내센터 : 02-3780-0590 ▲ 반포 한강공원
▣ 찾아오시는 길 ① 버 스 - 8340(주말,휴일), 405, 730 ② 지하철 - 고속터미널역(3,7, 9호선) 8-1번 출구(반월초교 방향 직진, 신반포2차 아파트 단지내 통과, 반포 나들목 이용/10분) ▣ 반포 안내센터 : 02-3780-0541
▣ 찾아오시는 길 ① 대중교통 : 지하철 - 월드컵경기장역(6호선) 1번 출구(30분 소요) ② 기 타 : 평화의 공원 연결 브릿지, 중앙연결 브릿지 ▣ 난지 안내센터 : 02-3780-0611
면목동 구석기유적 면목동 구석기유적은 서울의 한강 유역에서 발굴 조사된 유일한 구석기유적이다. 아울러 한탄강의 전곡리 유적과 금강의 공주 석장리 유적과 대비되는 후기 구석기유적으로 서울 지역의 구석기 문 화생활의 실체를 확인해 주고 있다. 위치는 중랑구 면목동의 아차산 서쪽 사면 끝 기슭으로 면목고등학교 인근의 산기슭에 해당된다. 유적의 앞쪽으로 중랑천을 배경으로 한 넓은 들판이 펼쳐 있어 구석기인들의 일시적인 생활거주지로 좋은 여건을 형성하고 있다. 유적은 면목지구 택지 건립을 위한 공사장 에서 1967년 황용훈을 비롯한 경희대박물관 팀에 의해 발굴되었는데, 석기들이 약 30평 정도의 면적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정밀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주택 건설 등 도시개발로 인하여 유적지가 모두 파괴되어 현재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발굴된 석기는 대부분 몸돌석기로 외날찍개·양날찍개·찌르개·긁개·망치돌 등이 있고, 격지석기로 찌르개 옆날긁개·끝날긁개 등이 있다.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 155번지에 있는 빗살무늬토기시대의 대표적 유적지.
암사동 선사주거지는 두만강 하류, 대동강 하류, 낙동강 하류와 더불어 우리 나라 신석기문화의 4대 중심지의 하나이며, 인근에는 같은 시기 유적인 하남시 미사리 유적도 있다. 암사동 선사유적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크게 파괴되어 다수의 토기편이 노출되면서 학계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967년 전국대학연합조사단(고려대·경희대·숭실대·전남대)이 처음으로 발굴한 이후, 1971∼1975년 사이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집중적인 발굴과 학술조사를 실시하여 20기에 가까운 수혈주거지(竪穴住居地)가 드러났다. 암사동 유적은 5개 지층(地層)으로 이루어져 제일 바닥층에 수혈주거지가 있는 선사시대 문화층, 그 위에 불모층, 제3층에 빗살무늬토기와 민무늬토기가 섞여 나오는 청동기문화층, 그 위에 백제문화층, 그리고 표토층으로 형성되었다. 그후 1979년 사적으로 지정 보호하기 시작하여 1980년 말에 신석기시대 취락지를 복원, 공원화계획을 추진하였다. 1984년에 서울대박물관의 발굴 결과 25개 주거지가 확인되고, 이미 발굴된 주거지 중 12기를 노출하여 선사취락지 복원작업을 실시하였다. 출토된 토기는 신석기시대의 전형적인 첨저형(尖底形) 빗살무늬토기가 90%를 차지하고 있다. 중간층(제3지층)에서는 빗살무늬토기에서 민무늬토기시대에 걸치는 과도기적 양상을 띠고 있으며, 백제문화층에서는 삿무늬(짚으로 짠 자리 문양)가 있는 호형(壺形) 토기가 주류를 이루며 큰 옹관과 건물의 적심석이 발굴되었다. 또한 암사동 유적에서 발굴된 석기는 돌도끼·돌화살촉·어망추·갈돌(연석) 등이 있으며, 청동기 유물로는 방추차·청동촉·마제석부 등의 석기가 출토되었고, 초기 백제의 유물로는 철제 자귀(도끼)와 철정 등이 출토되었다. 한편 식생활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 탄화(炭火) 도토리가 출토되어 채집경제를 살필 수 있으며, 새뼈·어골문 등으로 수렵과 어로생활이 경제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연대는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 3000∼4000년 무렵의 문화유적이며, 그후 청동기 철기시대로 발전해 간 동일 지역의 문화상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유적이다. 오늘날 이곳에는 암사동유적전시관과 더불어 집터가 복원되어 있다. 전시관에는 신석기시대 움집을 가상 복원하고 당시의 실물 움집터를 볼 수 있게 하였다. 전시관 바닥에는 당시의 실물 움집터 8채와 1개의 저장구덩이가 있으며, 전시관 내 창가에는 암사동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을 비롯하여 우리 나라 신석기 시대의 생활과 문화상을 헤아릴 수 있게 하는 각종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역삼동 청동기유적은 한강 유역에 벼농사가 시작된 뒤의 전형적인 주거지이다. 화재로 인하여 유물이 원위치에 고스란히 보존된 상태에서 발굴 조사되어 당시의 생활모습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이 주거지는 길이 16m, 너비 3m, 깊이 50∼60cm 크기의 장방형 수혈식 주거지이다. 또 수혈 벽을 따라서 직경 10∼15cm, 깊이 10cm 내외의 기둥구멍이 1∼2m 간격으로 나 있었으며 그 중에는 참나무 기둥이 불탄 채 숯기둥으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수혈 중간 부분에서는 기둥구멍이 찾아지지 않으며, 또 화덕자리도 발견되지 않았다. 거주지의 실내면적은 약 12평(약 48㎡)으로 현대의 15∼16평 가옥에 해당되어, 일반 생활인의 가옥으로서는 상당히 큰 집으로 2∼3세대의 연립형으로도 보인다. 그리고 생활도구의 양으로 보아도 15∼16명의 가족이 생활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발굴 유물은 석기로 석부 3점, 석촉 3점, 반월형 석도 1점 등 20여점과 토기로 복원이 가능한 심발형 공렬무문토기와 호형 무문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그 중 반월형 석도는 청동기시대 농경문화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유물이다. 토기는 이 유적을 대표하는 무문토기와 붉은간토기(紅陶)가 발굴되었는데 복원된 기형을 보면 옹형(甕形)과 호형(壺形)의 두 형태이다. 역삼동 주거지의 연대는 기원전 6∼7세기로 추정된다. 가락동 주거지보다는 약간 후대에 속하며, 명일동·수석리·아차산 주거지보다는 이른 시기의 유적이다. 일반적인 무문토기인의 주거지가 지름 6∼7m 규모의 원형 또는 방형 수혈주거지였다. 그런데 그 규모가 큰 역삼동 주거지는 핵가족 단위로 주거생활을 하던 씨족공동체사회가 사회분화가 일어나 가부장적 사회구조가 출현하는 과도기적 주거공간으로 출현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들의 경제생활은 농경이었으며, 양재천의 어로와 인근 야산의 수렵도 가능하였다고 판단된다.
송파구 가락동 송파대로 동쪽 해발 40m 가량의 낮은 구릉 위에서 청동기시대의 주거지가 발굴되었다. 1963년 고려대학교가 1기를, 1976년 잠실지구유적조사단이 5기를 발견하였다. 1963년 발굴된 유적은 장방형의 반움집터인데, 한강변에서 약 2∼2.5km 떨어져 있으며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산마루에 위치하였다. 이곳은 당시 어로생활이나 수렵에는 불편한 위치이므로 주민들은 주로 밭농사나 벼농사에 의한 농업경제에 의존하였다고 볼 수 있다. 유적은 산마루 가까운 능선의 사면을 깎아서 만든 장방형의 반움집터로 길이는 동서 10m, 너비는 남북 7m이며, 깊이는 경사진 지면에 따라 10∼50cm이다. 이것은 본래 경사진 지면을 파서 평면을 만들었던 것으로 기둥구멍은 발견되지 않았다. 유물은 대체로 평면을 이루고 있는 동일층 위에서 출토되었으며, 다양한 석기와 토기가 출토되었다. 출토 유물 중 화분형 토기는 서북한 지역의 팽이형 토기가 남한식으로 변형된 형태로 이것을 '가락식 토기'라는 명칭을 붙여 그 독특한 형태를 구별하고 있다. 가락식 토기는 북한의 전기 청동기문화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남한의 초기 청동기문화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가락식 토기의 바탕 흙은 대개 진흙에 모래를 섞은 것이며, 화도는 낮고 색조는 적갈색 또는 황토색이다. 그리고 한강 이남 중부지방에 분포되어 있는데 이와 비슷한 토기가 역삼동 유적, 여주 흔암리 유적 등에 서도 발견되어 중부지방 가락식 토기의 양상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 발굴된 돌낫의 존재는 역삼동과 흔암리 유적에서 출토된 반달돌칼 등과 더불어 주민들의 농경생활을 엿볼 수 있는 유물이며, 대형 단지토기는 식량저장용이 틀림없다. 이와 같은 가락식 토기와 석기의 특징으로 보아 가락동 청동기유적의 연대는 무문토기의 편년에 따라 대체로 기원전 7세기 전후로 추정된다.
강동구 명일동 유적은 청동기 후기의 주거지로 1961년 암사동 남쪽 해발 42m의 야산 사면에 위치하였다. 한 모서리가 6m 정도의 방형에 가까운 평면의 유적이며, 출토된 유물로서는 돌칼·돌화살촉·평저민무늬토기·숫돌이 있다. 돌칼은 홈이 있는 형식으로 기원전 3세기경의 유물로 추정된다.
송파구 석촌동 주거지 유적은 잠실대교 건너편 한강 연안 충적 모래층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한강개발사업으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이 유적은 3개 문화층으로 형성되었는데, Ⅰ층에서는 조선자기편과 백제토기편이, Ⅱ층에서는 백제토기편이, Ⅲ층에서는 빗살무늬토기편이 출토되었다. 주거지는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출토된 Ⅲ층에 놓여 있었는데, 초기 철기시대 주거지가 무너져 내려 신석기시대 층위에 놓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주거지는 지붕 시설만 밝혀졌으며, 하부구조는 4×3m 정도의 소형 주거지로 판단되고 있다. 『한강의 어제와 오늘 (서울시사편찬위원회 발간, 2001.10.)』 수록내용
풍납리토성 풍납리토성(風納里土城)은 송파구 풍납동 72-1번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규모는 36,701평(121,325㎡)으로 사적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풍납리토성은 백제 초기의 성지 가운데 가장 장대한 규모를 가진 성이다. 서북쪽으로 한강에 직면하고 있고, 강 맞은 편에는 아차산성이 자리잡고 있다. 남쪽으로 성내천을 사이에 두고 2.5km 거리에 몽촌토성이 있으며, 동쪽으로 이성산성이 자리잡고 있다 이 성은 한강변에 위치한 백제 초기의 토성으로서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비정되고 있다. 광주 풍납리토성이란 이름은 1963년 사적으로 지정할 당시 이곳이 경기도 광주군 풍납리였기 때문에 그 명칭을 딴 것이다. 또한 이 성은 사성(蛇城, 배암드리)으로 비정되어 왔는데, 사성은 고구려의 남하에 대비하기 위하여 아차성(阿且城)과 함께 쌓은 성이다. 사성은 언어학적으로 '배암드리'로서 그것이 오늘날 발음인 '바람드리'(風納)로 변화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현재 토성의 자취를 인정할 수 있는 주위는 2,679m 밖에 안되지만, 원래의 형태는 남북으로 길게 타원형을 이루었으며, 주위는 약 4km, 남북 2km, 동서 1km에 이르렀으나, 한강 쪽의 서벽은 1925년의 큰 홍수로 유실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3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으며, 동벽은 거의 같은 간격으로 네군데가 외부로 통하게 되어 있는데, 축성 당시부터의 문 터로 보고 있다. 비교적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북벽의 경우 정상에서 약 2m 내려간 위치에서 1단의 넓은 단을 만들었고 거기서부터는 경사를 줄여서 폭 30m 가량의 기부를 형성하고 있다. 최근에는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성벽과 성 내의 발굴이 진행됨에 따라 백제 초기의 왕성 즉 하남위례성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온조가 '하남의 땅이 북으로 한수(漢水)를 끼고 동으로 고악(高岳)에 거하고 남으로 옥택(沃澤)을 바라보고 서쪽은 대해(大海)로 가로막혔으니 그 천험(天險)의 지리를 얻기 어려운 형세이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신하들의 말을 듣고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했다.'고 하는데, 이 하남위례성의 대상지로서 풍납리토성이 강력하게 부상되고 있다. 특히 1999년 풍납리토성 동쪽 벽을 일부 절단하여 조사한 결과 이 토성이 폭 40m,높이 9∼15m에 이르는 거대한 판축(板築) 토성임을 확인하였다. 이때 나온 나무·목탄의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 결과 이 토성이 기원전 2세기∼기원후 2세기에 만들어진 것임이 판명되었다. 이후 토성 안 지표 밑 4m에서 여(呂)자형의 집터, 말머리뼈, '대부(大夫)'라고 쓰인 토기, 기와, 주춧돌 등 대형 건물에 쓰였을 재료 등 유물과 유적이 잇따라 발굴됨에 따라 '풍납리토성=위례성'이라는 주장이 점차 설득력을 더해가고 있다. 한편 풍납리토성의 축조 방법을 보면 본래 몸체를 흙으로 쌓은 토성이지만, 단면을 보면 돌은 거의 없고 고운 모래 뿐인데 그것을 엷은 층으로 한 층 한 층 다져 쌓아서 올라간 것이다. 특히 동벽의 절단 조사 결과 이런 규모의 성곽 축조에 필요한 인력이 수 십만∼수 백만명을 동원할 수 있는 권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백제가 고대국가로 성장한 시기도 기존의 기원후 3세기에서 최대 400년까지 앞당겨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이것은 《삼국사기》 백제본기(百濟本紀) 초기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 토성의 성격 규명은 백제사 뿐만 아니라 한국 고대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전망이다. 1976년부터 1978년까지 정비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되었고, 2000년 5월 문화재위원회에서 풍납리토성 내 경당연립 재건축부지를 사적으로 지정·보존하기로 하고, 서울특별시와 정부에서는 풍납리토성 안의 사유지를 점차 매입하여 정비·복원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내에 위치한 몽촌토성(夢村土城)은 백제 초기의 토성으로서 한성시대 백제 도성의 유력한 후보지의 하나로 추정되고 있으며, 사적 제297호로 지정되어 있다. 1983년부터 성의 규모와 축조 방법·내부 시설물 등을 파악하기 위한 발굴 조사가 연차적으로 실시되었다. 1983년에는 성의 규모 파악을 위한 외곽 발굴이 실시되었고, 1984년에는 서울대·숭실대·한양대·단국대에 의해 4구역으로 나뉘어 성의 축조 방법과 내부 시설물의 확인을 위한 부분적인 발굴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1985년에 전반적인 유구 분포상황 조사와 3개 문 터에 대한 발굴 조사가 행해졌다. 그리고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서울지역 백제고도 민족문화유적 복원계획>에 따라 1985년까지의 조사를 통하여 얻어진 결과를 토대로 몽촌토성을 현상유지 수준에서 복원·정비하였다. 그후에도 몽촌토성의 역사적 성격을 규명하기 위하여 전면적인 발굴 조사가 계속되어, 1987년과 1988년에 토성의 동남지역이 발굴되었다. 몽촌토성은 한강 남안 성내천(城內川)을 끼고 있는 구릉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토성이 자리잡고 있는 구릉은 표고 40∼45m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려 전체적으로 서고동저(西高東低)·북고남저(北高南低)의 지세를 이루며 거의 중앙에서 서-동·북-남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전체를 4구역으로 구분하고 있다. 성 밖은 청량산 남한산성에서 발원하여 동에서 북으로 흘러드는 성내천이 휘감고 있어 자연적으로 참호(塹壕)를 이루고 있는데, 1986년 성이 복원·정비되면서 성 주위에 해자(垓字)가 만들어졌다. 성의 외벽은 구릉 경사면을 깎아내어 급경사와 단을 만들고 두 번째 단에는 목책(木柵)을 설치하였다. 현재 목책은 본성의 서북벽·동벽과 외성 등 3곳에서 확인되었는데, 생토암반층에 큰 나무를 박아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 보조기둥을 세웠다. 목책의 높이는 2m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이 목책은 발굴 조사된 원래의 목책 기둥 자리를 따라 그 위에 추정 복원한 것이다. 토성의 전체적인 형태는 자연 구릉을 이용하여 축조되었기 때문에 일정하지 않으나, 대체적인 윤곽은 남북으로 길쭉한 마름모 형태에 가깝다. 토성의 크기는 남북 최장이 730m 정도, 동서 최장이 540m 정도이며, 전체 성벽의 길이는 정상부를 기준으로 하여 약 2,285m에 달하고, 따로 동북벽에서 270m쯤 뻗어나간 곳에 외성이 있다. 토성 내의 면적은 성벽 정상부를 기준으로 약 21만 6천㎡(64,000평)에 해당하나, 외벽 하단을 기준으로 하면 훨씬 넓어진다.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일정하지 않으나, 대략 11∼38m에 해당하는데 축조 당시에는 지금보다 3∼4m 더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성벽의 네 모서리에는 주변보다 3∼5m 정도 더 높은 토단이 만들어져 있는데 망루와 연락대 같은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83∼1987년까지 네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발굴 조사 결과 거주지 8기, 저장공 22기, 토광묘 2기, 옹관묘 5기, 토광적석묘 5기 등 총 48기의 유구가 조사되었다. 1988년의 발굴에서는 백제시대의 거주지 5기, 저장공 7기, 생활면 유구 1개소, 방형 수혈 유구 1개소, 적석 유구 3개소와 조선시대의 움집터 3곳과 지장건물지 1개소 등이 확인되었다. 몽촌토성의 축조 시기는 출토 유물 중 확실한 연대를 잡을 수 있는 것으로 가장 빠른 것이 서진(西晋, 265∼316)시대의 회유전문도기편(灰釉錢文陶器片)으로서 3세기 말까지 올려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서진 도기 출토 층 밑에서 보다 앞선 백제 유물층이 확인되었기에 그 축조연대는 더 이를 것이다. 또 이 성이 단시간에 걸쳐 일시에 축조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면 성의 축조 시기를 앞당겨 볼 수 있는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고 하겠다. 성의 사용 시기는 성내 주거지나 저장고에서 육조(六朝)시대의 청자편 도자기류와 4∼5세기의 백제 토기가 출토되고 있음을 보면 4∼5세기까지 계속해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 내부나 성벽 위에 축조된 토광묘·옹관묘·토광적석묘 등은 몽초토성의 폐기 후에 만들어진 5세기 중반 이후의 것이다. 이를 종합해 보면 몽촌토성은 늦어도 3세기 말에 축조되어 5세기 중엽에 걸쳐 사용되었으며, 또 그 지리적 위치와 규모·축조방법, 목책 등이나 수많은 철촉·골제찰갑·와당·벼루 등을 고려하면 정치·군사·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거성(居城) 수성(守城)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직까지 지배세력 집단이 거주하였을 와가(瓦家) 구조는 나오지 않았으나, 고식의 와당이나 기와편 그리고 중국제로 보이는 벼루 등의 출토로 미루어 지배층의 주택이나 공공건물 등의 존재를 충분히 상정해 볼 수 있다. 한편 몽촌토성 안(송파구 방이동 88-4)에는 화강암으로 된 충헌김공신도비(忠憲金公神道碑)가 위치해 있다. 1984년 11월 3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되었으며, 규모는 전체 높이 4.06m, 비신의 높이 2.74m, 폭 1.02m이다. 이 비는 조선 숙종 때 박세채(朴世采)의 문인으로 우의정을 역임한 김구(金構, 1649∼1704)의 신도비(神道碑)로서, 영조 19년(1743)에 건립되었다. 비의 북쪽에 있는 그의 무덤은 18세기 전반기의 묘제를 확인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몽촌토성의 북쪽 기슭에는 1992년 몽촌역사관이 건립되어 한강 유역을 포함한 백제문화의 대표적인 유적과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암사동·명일동·역삼동의 선사시대 주거지와 가락동·방이동·석촌동의 고분군, 몽촌토성의 유적 모형과 출토 유물을 전시하여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광진구 광장동 산 16-46번지와 구의동 산 1-2번지에 걸쳐 있는 아차산성(阿且山城)은 아단성(阿旦城)·아차성(阿且城, 峨嵯城)·양진성(楊津城)·광진성(廣津城) 등으로 불리운다. 1973년 사적 제234호로 지정되었다. 또 조선 후기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아차산에는 양진성과 아차산고성이라는 2개의 성곽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양진성은 나루를 방비하기 위한 성곽으로 현존하는 유구나 문헌자료를 통해 볼 때 아차산의 지봉인 광나루 북방 약 100m 높이의 동남면에 위치한 광진성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아차산고성은 《대동여지도》에 보이는 망우리 쪽 아차산에 소재하고 있는 성곽을 아차산고성의 유지로 보고 있다. 아차산성은 석축성으로 기본형태는 테뫼식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산 정상부를 돌아가며 축성한 테뫼식과는 달리 아차산 능선 말단부의 남쪽 지역을 적절히 이용하여 작은 계곡이 포함되도록 함으로써 성 내에 우물과 작은 계곡이 흐르는 포곡형 산성에 가까운 형태이다. 성곽은 아차산 남쪽 봉우리의 해발 205.5m 지점을 북쪽 장대지로 하여 등고선을 따라 축조되었다. 산성 전체의 축성 형태는 약간 길쭉한 부정형의 6각형이며 전체 길이는 1,125m, 내부 면적은 약 25,000평(133,700㎡) 정도이다. 정상부 장대지에서는 서울 시내 전역과 한강변 일대 풍납리토성·몽촌토성·이성산성·남한산성·북한산성·암사동 선사유적 등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그리고 성지 내에서 7개의 건물지로 추정되는 곳이 발견되었다. 한편 장한성의 유구는 본래 뚝도 부근의 한강변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고지를 따라 아차산에 이르고 다시 망우리에 이르는 산줄기를 따라 용마봉에 못 미치는 벼랑바위산에 이르기까지 산마루를 따라 석성 터가 있으며, 구리시 아천동까지 그 유구가 나타난다. 이를 장성 또는 장한성이라 하는 데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 고적조에 '장한성이 한강 위에 있는데 신라 때 여기에 중요한 진영을 두었으며 고구려에 의해 점령당하였다가 군사를 동원하여 수복하고, 장한성가(長漢城歌)를 지어 그 공을 기리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성은 산 정상이나 산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토성이나 석성이 아니고 산 정상을 지나 등선을 따라 일직선 형태로 축조된 성벽으로 하남시 춘궁리에 있는 이성산성과 축성양식이 같은 신라시대의 산성으로 특히 삼국통일 전쟁 수행을 위한 북진기지 가운데서도 군사적 요충으로 추정된다. 이 장한성의 유구는 조선시대 목마장의 담장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일찍이 제기되었다. 즉 지금의 광진구와 중랑구 일대는 둘레 20km에 이르는 살곶이목장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이 목장의 담장은 아차산 능선에서 확인되는 장한성 성벽과 연결되어 있다. 이에 대해 《조선고적조사보고》에서는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증보문헌비고》 등의 살곶이목장에 대한 기록을 언급하면서 목마장 담장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아차산 줄기를 따라 양쪽 평야지대로 뻗은 곳인 중곡동 쪽 중랑천 방향과 그 반대편인 광장동 쪽 아차산 지봉에는 방위 목적을 가진 수많은 보루들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장경호와 같은 고구려 토기가 보루나 보루로 추정되는 유구에서 출토되었다. 그러므로 이들 유구는 목장이나 사냥과 관련된 부속시설이 아니라 최소한 고구려 군대 주둔처로 인정된다. 확인된 보루는 1970년대 후반에 발굴된 구의동 유적지인 현재의 동서울터미널 근처에서부터 광장동으로 하여 아차산으로 올라가 정상을 통과하여 나가다가 북서편으로 휘어지면서 건너편 배봉산까지 이어진다. 또 한 줄기의 보루는 중곡동 대원고등학교 쪽에서 동북편으로 올라가 용마봉을 통과하여 아차산 정상에서 구리시 아천동과 교문동 쪽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두 열의 보루는 아차산 정상 부근에서 교차한다. 따라서 보루의 연결선상과 관련하여 아차산 장한성의 존재가 주목된다. 아차산 장한성은 입지조건으로 볼 때 서쪽의 뚝섬 방향에서 침입해 오는 적에 대비하여 도성의 운명을 좌우하는 아차산성 일원의 방위에 기여하였을 것이다. 즉 아차산 보루를 연결하는 형식으로 길게 축조된 장한성은 한강 하구를 비롯한 서북방향이 주 방어대상인 아차산 일원의 방어력을 한층 강화시켜 도성의 외곽을 보장하는 기능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행주산성(幸州山城)은 경기도 고양시 행주내동 산 26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강을 사이에 두고 서울특별시 강서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그 둘레가 약 1km, 면적은 48,570평이며, 사적 제56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행주(幸州)는 한양(漢陽)의 외곽지대로 한강을 끼고 있어 예로부터 군사적으로 중요시되었던 곳이다. 행주산성이 위치한 덕양산(德陽山)은 삼국시대부터 토축(土築) 산성이 있었다. 산성은 해발 124.8m의 덕양산의 해발 70∼100m에 이르는 능선을 따라 축조되어 있는 테뫼식(山頂式) 산성으로, 남쪽은 한강이 연하여 있고, 동남쪽으로는 창릉천(昌陵川)이 산성을 돌아 한강으로 흘러들고 있어 자연적인 해자(垓字)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산성의 동남쪽과 남쪽 일대는 자연 경사가 매우 급하여 자연적인 요새로서의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다. 또 산성의 동북방 일대는 넓은 들이 펼쳐져 있고, 덕양산 정상에 올라서면 한강 이남 일대는 물론 멀리 북쪽으로는 고양시(高陽市) 일대가 한눈에 보이며, 사방으로 시야가 막힘이 없어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목을 한눈에 살필 수 있다. 행주산성은 이러한 자연지세를 이용한 천연의 요새지로서, 강안의 돌출된 산봉우리를 택하여 산 정상부를 에워싼 소규모의 내성(內城)과 북쪽으로 전개된 작은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外城)의 이중구조를 하고 있다. 강안의 험한 절벽을 이용하고 동·북·서로 전개된 넓은 평야를 포용하고 있는 것은 삼국시대 초기의 산성 형식과 부합된다. 현재 성벽은 내성의 경우 정상부를 깎아 내어 다듬은 뒤에 둘레 약 250m의 토루(土壘)를 형성하고 있으며, 정상에서 동북쪽 산등성이를 따라 외성의 자취가 남아 있는데, 이 외성은 자연 능선을 이용하여 양쪽에서 석심을 두고 판축(板築)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계곡 쪽의 성벽은 유구(遺構)를 찾을 수 없으나 산 중복을 돌아간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이중식 산성은 삼국시대의 새로운 형식으로서 주목된다. 성 내에서는 삼국시대의 적갈색 연질토기편, 회청색 경질토기편을 비롯하여 어골문(魚骨文)·수지문(手指文)의 기와편도 발견되고 있어 고려시대까지도 간헐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 곳은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幸州大捷)이 있었던 지역으로 권율(權慄) 장군이 왜군을 맞아 크게 이긴 곳이다. 권율은 전라도관찰사 겸 순찰사로서 관군과 명나라 군사가 평양을 수복하고 남진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호응하여 서울을 수복하기 위하여 관군을 이끌고 북으로 올라와 수원(水原) 독산성(禿山城)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이어 권율은 서울에 집결한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서울 주변인 안현(鞍峴)에 진을 치고자 하였으나, 막하 장수들의 의견에 따라 행주산성을 진지로 삼았다. 권율은 행주산성에 목책(木柵)을 세우고, 은밀히 군사를 이곳으로 옮겨 진을 쳤는데, 이 때 산성에 포진한 총병력은 군인과 일반 백성을 합하여도 1만명이 채 못되었다. 이후 권율이 정예병을 뽑아 서울에 보내 전투태세를 갖추자, 왜군은 총대장 우키타(宇喜多秀家)를 비롯하여 본진의 장수들까지 7개 대로 나누어 행주산성으로 진군하니 전 병력은 3만여명이었다. 1593년 2월 12일 새벽 일본군이 총동원되어 행주산성을 포위하고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서로 교대하여 가면서 공격해왔다. 그러나 성 안의 조선군은 산세를 이용하여 화살·창·칼 외에 변이중(邊以中)이 만든 화차(火車), 권율의 지시로 만든 수차석포(水車石砲)라는 특수한 무기로 대처하고 있었다. 한 때 위기상황으로 동요하기도 하였으나, 권율의 독전(督戰)으로 이를 극복하고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어 치열한 싸움에서 조선군이 크게 이겼다. 일본군은 총대장 우키타가 부상을 입고 퇴진하였고, 전사자의 시체 무더기를 사방에서 불태우고 도망갈 정도였다. 이 때 부녀자들까지 동원되어 관민(官民)이 일치단결하여 싸웠으며, 특히 부녀자들은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서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여기에서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 행주대첩으로 인하여 조선군과 명나라 군사가 사기를 회복하고 일어나 점차 적을 남으로 쫓고 정부가 환도(還都)하게 되었으니 그 의의는 실로 크다 하겠다. 그 후에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선조 36년(1603)에 행주대첩비(幸州大捷碑)를 세우고, 헌종 때에 기공사(紀功祠)를 세웠으며, 1963년에는 덕양산정에 새로 대첩비가 건립되었다. 1970년에는 행주산성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 정화작업을 벌여 권율을 모시는 충장사(忠莊祠)를 세우고 정자와 문도 세웠으며, 산책로를 개설하는 등 경역(境域)을 규모 있게 조성하면서, 1845년에 옛 비의 내용을 새로 새겨 세운 행주 기공사 경내의 대첩비를 충장사 옆에 옮겼다. 또한 그 중수기념비(重修記念碑)를 덕양정(德陽亭) 건너편에 세웠다. 1990년 12월에는 고양군에서 산성 동북방에 남아 있는 토성지(土城址)에 대한 복원사업을 추진하면서 시굴조사(試掘調査)를 실시한 바 있다. 이 조사에서 행주산성이 처음 축성된 것은 통일신라시대였음이 확인되었는데, 출토 유물로 보아 7∼8세기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호암산성(虎巖山城)은 금천구 시흥2동 산 93번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리상으로 서울의 남서쪽에 해당된다. 이 곳의 산성 터와 한우물이라 하는 연지 등은 사적 제34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89년 10월과 1990년 3월의 두 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해발 347m의 조그만 봉우리를 최고봉으로 하는 산 정상의 성 내부는 비교적 평탄지형을 이루고 있다. 유적의 동쪽으로 직선거리 약 2km 지점에 해발 629m의 관악산 정상인 연주대가 위치하고, 동남방 1km 지점에 해발 460m의 삼성산 정상이 위치하고 있다. 유적 동북방에 연접하여 이 삼성산의 지봉으로 호랑이가 엎드린 모양을 한 호암산이 보이며, 마을에서는 이를 '범뫼'라고 부른다. 산성의 입지조건으로 볼 때 호암산성은 안양 금천 일대의 평야를 관할하는 요새지로서 서쪽의 해안과 북쪽으로 침입하는 적에 대한 공격과 방비를 위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호암산성의 평면 형태는 남북으로 길쭉한 마름모꼴인데 성벽의 총 연장은 약 1.25km이고 성벽은 표고 325m의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테뫼식 산성이다. 현재 산성 터 내부에서 확인된 유구는 우물 터 2개소와 건물 터 4개소이다. 발굴된 제1우물지(기존의 한우물)는 최근까지 조선시대에 쌓아 올린 석축이 남아 있었는데 그 아래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석축지가 확인되었다. 연못지의 내부 퇴적토에서 백자편을 비롯한 조선시대 유물과 7∼8세기 통일신라시대 유물이 출토되었다. 제2우물지에서는 '仍伐內力只乃末'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 숟가락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산성이 위치한 금천 일대는 백제의 영역이었을 때의 지명은 기록이 없으며,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된 이후 잉벌노현(仍伐奴縣)이 되었다. 이후 신라 경덕왕 때 잉벌노현이 곡양현으로 바뀌었고, 경덕왕 16년(757)에 잉벌노현이 속해 있던 한산주가 한주로 개칭되고 그 영현으로 1소경과 27군 46현의 군현 정비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이 때에 이르러 종래의 토착 지명이 한자풍으로 바뀌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호암산성 내의 우물지에서 나온 유물들을 통해 볼 때 산성 축성의 하한선이 경덕왕 16년이 된다. 그런데 호암산성의 입지조건으로 볼 때 문무왕 12년(672)의 '한산주에 주장성(晝長城)을 쌓았다.'는 기록과 관련하여 주목된다. 주장성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일장산성 즉 신라 때 주장성은 문무왕이 쌓았다.'라고 기록된 오늘날의 남한산성을 가리킨다. 따라서 호암산성은 신라와 당나라간의 전쟁이 임진강과 한강을 경계로 하여 전개될 때 광주의 주장성과 남양만의 해안지대를 이어주는 교량적 요충지를 만들기 위해 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산성 내 축조된 제1우물지의 석축 구조가 문무왕 14년에 만들어진 경주 안압지의 석축 구조와 거의 유사하여, 산성의 축조시기가 문무왕대 신라와 당나라와의 전쟁을 대비한 관방시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석축 구조는 현재 축조 당시의 원형이 남아 있는 남동 모서리의 경우 모두 13단으로 쌓여져 있고 석축의 제일 아래 단은 약 20cm 가량 앞으로 내어 쌓고 위로 가면서 들여 쌓는 방법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안압지의 축조 수법과 동일한 것이다. 이와 같이 출토된 유물·유적과 지리적 입지조건을 바탕으로 문헌기록과 비교 검토한 결과, 호암산성의 축성시기는 문무왕 12년경으로 보고 있다. 신라가 당나라와의 전쟁 때 한강을 넘어 수원 지역으로 내려가는 육로와 남양만으로 침입하는 해로를 가장 효과적으로 방어 공격하기 위해 세워진 요새지였다고 하겠다. 또한 호암산성 발굴에서 통일신라시대 이외에 고려시대의 유물도 많이 출토되었고, 임진왜란 당시 한성 수복을 위해 행주산성과 연합한 전라병사 선거이(宣居怡) 장군이 인솔하는 조선 군사들이 주둔한 곳이기도 하다. 『한강의 어제와 오늘 (서울시사편찬위원회 발간, 2001.10.)』 수록내용
봉은사 봉은사(奉恩寺)는 강남구 삼성동 73번지 수도산(修道山) 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에 속한 서울의 대표적 사찰이다. 봉은사의 원래 명칭은 견성사(見性寺)였다. 따라서 이 사찰의 연혁은 견성사로부터 확인해야 하나, 현재로서는 자료의 부족 등으로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최근에 새롭게 발견된 《봉은사본말사지(奉恩寺本末寺誌)》 등의 자료를 참조하여 볼 때 고려시대에 봉은사의 전신(前身)인 견성사가 창건된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견성사는 본래는 현 위치에서 서남쪽으로 1km 쯤 떨어진 선릉(宣陵)의 동쪽에 있었다. 연산군 4년(1498)에 정현왕후(貞顯王后)가 선릉의 원찰(願刹)로 견성사를 중창(重創)하고 봉은사라 사찰명을 바꾸면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절의 실질적인 역사가 전개된다고 하겠다. 그러나 봉은사가 명실상부하게 조선 최대의 명찰(名刹)이 된 것은 명종 3년(1548)에 보우대사(普雨大師)가 주지로 부임한 이래, 당시 섭정(攝政)을 맡고 있던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적극적인 옹호를 배경으로 하면서부터이다. 즉 명종 6년에는 보우대사가 판사(判事)가 되어 부활된 선종(禪宗)의 승과(僧科)를 보게 하면서 봉은사를 선종수사(禪宗首寺)로 지정하였다. 명종 7년(1552)에는 봉은사 맞은편에 있는 지금의 삼성동 무역센터와 한국종합전시관 자리에서 선종 승과고시가 대규모로 치루어져 이 뒤부터 이 곳을 '중의 벌' 또 는 '승과평(僧科坪)'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불교의 명맥을 유지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이어 명종 17년(1562)에 보우대사가 지금의 위치인 수도산으로 절을 옮겨 세웠다. 보우대사 이후 봉은사에서는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과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 등 덕 높은 승려들을 많이 배출하기도 했다. 그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대전란 때 불타버린 것을 인조 15년(1637)에 중건하였고, 영조 33년(1757)에는 조정의 하사금을 받아 절을 중수하였다. 정조 14년(1790)에는 전국 사찰의 승풍(僧風)과 규율을 감독하는 5규정소(五糾正所)의 하나가 되어 경기도와 강원도의 사찰 일부를 관할하게 되었고, 순조 24년(1824)에 다시 한번 중수하였다. 철종 6년(1855)에는 화엄경을 판각하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경판(經板)을 완성하였고 판전(板殿)을 지어 안치하였다. 1911년에 제정 공포된 <사찰령(寺刹令)>에 의한 30본사(本寺) 중 갑찰(甲刹) 대본사(大本寺)가 되어 서울과 경기 일원의 80여 사찰을 관장하게 되었다. 1925년 을축년(乙丑年) 대홍수 때는 한강이 범람하여 인근 주민 1천여명이 강물에 빠지자, 나청호화상(羅晴湖和尙)이 중심이 되어 708명을 구제하였는데, 이를 기리는 시와 글·그림을 모아 《불괴비첩(不壞碑帖)》을 편찬하기도 하였고, 1929년에 도움을 받은 주민들이 절 앞에 수해구제공적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이후 1939년에 불탄 것을 1941년에 다시 중건하였다. 광복 후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의 직할사찰이 되었다. 1972년에는 동국역경원(東國譯經院)의 역장(譯場)이 설치되어, 이곳에서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을 한글화하는 역경사(譯經士)들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대웅전은 정면 3칸의 건물이었던 것을 1982년에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중창하였는데, 팔작지붕이며 그 현판 글씨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필체이다. 이 대웅전 안에는 범종(梵鍾) 2구가 놓여 있는데, 조선시대 범종을 대표할 만한 우수한 작품이다. 선불당(選佛堂)은 대웅전 한단 아래 왼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대중을 위한 일종의 선방(禪房)으로 독특한 구조를 가진 건물로 크게 주목받고 있다. 정면 8칸 측면 3칸의 단층 목조 기와집으로 초익공(初翼工) 양식을 이루며 처마는 겹처마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나 전·후·좌·우 네 곳에 작은 합각(合閣)을 형성하였다. 이 전각은 비록 연대가 오래지 않고 다소 변형되었으나 서울 시내에 이만한 크기의 거창한 선불당은 그 유례가 없으며, 19세기의 귀중한 목조건물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동빙고(東氷庫)가 있던 달맞이봉 서쪽 기슭 옥수동 395번지에 두뭇개 승방인 미타사(彌陀寺)가 있다. 오늘날 미타사는 888년 신라 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데, 1943년에 편찬된 ≪종남산미타사약지(終南山彌陀寺略誌)≫에 의하면 19세기 초반에 이곳에 무량수전을 처음 지은 사실이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이와는 달리 미타사는 고려말 조선초부터 종남산 동쪽 기슭 현 금호동에 있었는데, 이 부근에 있던 왕실 경영의 메주가마를 자하문 밖으로 옮김에 따라 이곳에 도적이 들끓었으므로 지금의 자리로 절을 옮겨 종남산 미타사로 하였다고 한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이곳에는 신라·고려 이래로 조그만 암자들이 있었는데 절 뒤의 산봉우리가 100명의 과부가 나타날 상이라는 풍수설에 따라 비구니 사찰을 확장할 적절한 곳이라 여기고 조선 중기에 암자들을 합쳐 미타사라 했다고도 한다. 여기서 종남산은 남산 줄기의 끝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이 절에는 이승만전대통령이 자주 다녔다고 한다.
약사사(藥師寺)는 고려 말기에 창건된 사찰로 강서구 개화동 322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경내에 있는 3층석탑과 석불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9·40호로 지정되어 있다. 약사사는 행주산성이 마주 보이는 곳에 동쪽을 바라보는 형태로 지어졌다. 이 절이 위치하고 있는 개화산(開花山)의 봉수는 동쪽은 서울 목멱산(남산) 제5봉, 서쪽은 김포현 북성산과 연락되며, 약사사의 위치를 개화산 봉수대 아래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국방과도 관련된 곳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약사사 3층석탑은 고려 말기인 13세기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탑의 재질은 화강암이고 높이는 4m이다. 탑의 맨 꼭대기를 장식하는 구조물인 상륜부는 모두 없어졌고 전체적으로 보아 비교적 가늘고 긴 느낌을 주는 탑이다. 탑을 지탱하고 있는 제일 아래 부분인 기단부는 한 장의 넓적한 널돌로 된 지대석(地臺石) 위에 네 개의 각기 다른 돌을 돌려서 맞추어 놓은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 바로 위에 놓여 있는 탑신석의 돌 네 모퉁이에는 기둥 모양의 우주(隅柱)가 조각되어 있다. 목조 건축물의 지붕과 같은 옥개석은 기울기가 비교적 완만한 편이고, 옥개석 아래 부분에 새겨진 층급 받침은 5단∼6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탑은 고려 후기의 시대적 배경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작품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고려 중기 이후의 탑파 건축 변천과정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약사사 석불은 머리에 둥근 돌갓을 쓰고 서 있는 보살상이다. 이 석불입상은 모양새가 관음보살상으로 보여지며, 예로부터 이 돌부처가 들어 앉았던 집을 미륵당이라 하였듯이 미륵불로도 불리고 있다. 이 불상이 위치한 절이 약사암(藥師庵)으로 불려왔으나 이것만으로 이 불상을 약사불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발견 당시에는 현재의 약사전 바로 옆의 미륵당 건물 속에 있었다. 아래 쪽 일부가 땅 속에 묻힌 채 세워 져 있던 것을 1974년에 건물을 철거하면서 함께 원래의 위치에서 3m 가량 앞으로 이동되어 완전히 노출된 채 새로이 불상 아래 부분에 넓은 기단을 만들어 그 위에 올려 놓았다. 머리 위에 얹혀 있는 돌갓 밑 부분에는 수많은 글자가 새겨져 있어 특히 주목을 끌고 있으나 판독할 수가 없다. 연대는 대체로 약사사 3층석탑이 만들어진 것과 같은 고려 말기로 추정되며, 이런 유형의 석불상을 이해하는데 하나의 기준작품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한강의 어제와 오늘 (서울시사편찬위원회 발간, 2001.10.)』 수록내용
서울에서 지방으로 이동하기 위해서 모든 주민들은 한강을 건너야 하기 때문에 배를 이용해야만 하였다. 오늘날은 다리가 건설되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반드시 배를 통해서만 이동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한강의 여러 곳에 나루가 생겨나게 되었다. 당시 나루를 설치한 근본적인 목적은 사람의 왕래를 위한 교통로, 물자의 운반을 위한 수송로, 국가의 안녕과 질서를 위한 초소로서의 기능에 있다. 조선시대 때 주요 간선도로가 통과해야 하는 한강에는 일찍부터 광나루(廣津), 삼밭나루(三田渡), 서빙고나루(西氷庫津), 동작나루(銅雀津), 노들나루(露梁津), 삼개나루(麻浦津), 서강나루(西江津), 양화나루(楊花津) 등이 있었다. 특히 광나루·삼밭나루·동작나루·노들나루·양화나루는 한강의 5대 나루로 손꼽혀 일찍부터 각종 물품과 사람들의 집합장소로서 유명하였다. 이들 나루의 도선장인 나루터를 오가며 사람과 물자를 건네 주는 나룻배는 한강 양쪽의 통로를 이어주는 최대의 편의시설이자 유일한 교통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강의 나룻배는 1970년대 이후 강 위에 많은 다리가 개통됨에 따라 점차 그 자취를 감추어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 갔다. 그러나 한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오늘날 많은 다리들이 가설되면서 나루가 사라졌지만 가설된 다리의 위치가 대부분 조선시대 나루가 있었던 곳이라는 점이다. 즉 광나루에는 광진교와 천호대교가, 삼밭나루에는 잠실대교가, 뚝섬나루에는 영동대교가, 두모포에는 동호대교가, 입석포에는 성수대교가, 한강나루에는 한남대교가, 서빙고나루에는 반포대교가, 동작나루에는 동작대교가, 흑석진에는 한강대교가, 노량진에는 한강철교가, 용산진에는 원효대교가, 마포나루에는 마포대교가, 서강나루에는 서강대교가, 양화나루에는 양화대교와 성산대교가, 공암나루에는 행주대교가 각각 가설되어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는 과거와 현재 모두가 한강의 지리적 잇점과 남북을 연결하는 교통로의 역할이 가장 많은 곳에 다리와 나루를 설치하였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한강의 어제와 오늘 (서울시사편찬위원회 발간, 2001.10.)』 수록내용
제천정 제천정(濟川亭)은 조선시대 한강변에 위치했던 왕실(王室) 소유의 정자로,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와 함께 사랑을 받았던 대표적인 정자이다. 제천정은 보광동 강가 언덕 즉 한남대교 북쪽 어귀에서 서쪽으로 바라보이는 용산구 한남동 537번지 일대에 있었다. 세조 2년(1456)에 세웠으며, 세조로부터 명종 18년(1563)에 이르기까지 한강변 정자 가운데서 왕이 가장 자주 찾은 곳이었다. 이 곳은 경도십영(京都十詠)에도 있듯이 '제천완월(濟川翫月)'이라 하여 달 구경의 경치가 좋은 곳으로 꼽혔던 곳으로 광희문(光熙門)을 나와 남도지방으로 내려가는 길목 나루터 옆에 있었기 때문에 왕이 선릉(宣陵)이나 정릉(靖陵)에 친히 제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러 쉬기도 하였으며, 또 한 중국사신이 오면 으례 이 정자에 초청하여 풍류를 즐기게 하였다. 성종은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세상을 떠난 뒤 이 제천정에 자주 나와 정자의 규모가 작고 좁다 하여 이를 크게 고쳐 짓기도 하였다. 또한 명종 13년(1558)에는 임금이 이 정자에 올라 수전(水戰)을 관람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인조 2년(1624) 이괄(李适)의 난으로 왕이 왕대비와 함께 종묘와 사직단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공주(公州) 로 피난갈 때, 밤에 한강을 건너면서 이 제천정에 불을 질러 그 불빛에 의지하여 강을 건넜다는 것으로 미루어 이 때 불타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58년에 발행된 《서울명소고적》에 의하면 이 정자 건물은 청일전쟁 때까지도 남아 있었으며, 그후 왕실로부터 미국인 언더우드(H. G. Underwood)에게 불하하였는데, 뒤에 어느 틈에 없어졌는지 그 자리마저 황량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망원정(望遠亭)은 양화나루(楊花津) 서쪽 언덕인 마포구 망원동 137, 207-1번지 일대에 있었다. 태종의 아들이자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1486)의 별장으로 세종 6년(1424)에 건립되었다. 이 정자는 처음에는 희우정(喜雨亭)이라 하였는데, 세종 7년(1425) 왕이 농사 형편을 살피러 이 곳에 거둥하였다가 새 정자에 올랐을 때 때마침 기다리던 비가 내려 온 들판을 흡족하게 적시므로 왕이 매우 기뻐하여 정자의 이름을 희우정이라 붙인 것이라 한다. 효령대군은 이러한 왕의 행차와 명명(命名)에 깊이 감사하여 부제학(副提學) 신장(申檣)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고, 변계량(卞季良)에게 기문(記文)을 짓게 하였다. 변계량의 기문과 망원정의 주변 풍광을 노래한 시들에 의하면 정자가 사치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으며, 강변에 매우 가깝게 있고 누각 형식의 건물로 둘레에 난간이 돌려져 있었으며, 주위에는 소나무와 버드나무가 울창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작가 미상의 희우정 그림을 보면 강가 절벽 암반 위에 덤벙주초석을 놓고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건물로서, 마루 둘레에는 난간을 돌리고 팔작지붕을 한 모습이다. 세종 27년(1445) 왕이 이 곳에 거둥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천(李?)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대포를 발사하며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을 하게 하고, 세자와 대군 등이 희우정 서쪽 봉우리에 올라 관람하였다. 따라서 이 부근은 경치 좋은 명소로서만이 아니라 수륙군(水陸軍)의 훈련장으로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종 15년(1484)에는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1488)이 정자를 고쳐 짓고 이름을 망원정이라 하였다. 이는 이 정자에 오르면 연희평(延禧坪)의 넓은 들판을 건너 도성 서북쪽의 산악지대를 바라볼 수도 있고, 또 동남쪽으로 한강을 끼고 벌려 있는 산야의 먼 경치를 잘 바라볼 수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성종은 세종 때의 예에 의하여 매년 봄 가을 이 곳에 나와 농사 형편을 시찰하고 또 수전 연습을 관람하였으며 문인 명사들과 시주(詩酒)를 즐기기도 하였다. 그후 연산군 12년(1506)에는 연산군의 향락행위를 위하여 한강 명소인 망원정을 크게 확장할 것을 명하였다. 이 때 지붕은 초가로 하고 건물은 천여명이 앉을 만큼 크게 짓게 하며, 정자 위에서 바라다 보이는 건물은 모두 철거하도록 하였으며, 정자의 이름도 수려정(秀麗亭)으로 고치게 하였다. 그러나 이해 9월 중종반정으로 모든 공사는 중지되고 철거됨에 따라 망원정도 다시 옛 모습으로 명사들이 즐기는 명소가 되었다. 이 곳은 경치가 매우 좋아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던 연회장으로도 사용되었으며 잠두봉(蠶頭峰)과 가깝기 때문에 잠두봉을 찾는 길에 이 곳에 들르는 사신도 있었다. 그러나 망원정은 1925년 을축년(乙丑年) 대홍수 때에 유실되어 마포구 망원동 동명에서만 그 자취를 찾을 수 있었다. 그후 서울시에서는 1986년에 한강변 문화유적 복원계획의 일환으로 문헌 고증과 현지 발굴조사를 통해 망원정을 복원하기로 결정하였다. 망원정 복원공사는 1988년 6월 20일부터 1989년 10월 20일까지 시행되었으며, 원래 위치에서 약간 벗어나 합정동 457-1번지에 대지 341.5평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2층 팔작기와집 누각으로 복원되었다. 그리고 1990년에 망원정 터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9호로 지정 보전하고 있다.
압구정(狎鷗亭)은 강남구 압구정동 산 310번지 일대인 동호대교 옆 현대아파트 11동 뒤편에 있었으며, 세조 때의 권신인 상당부원군 한명회(韓明澮, 1415∼1487)의 별장이었다. 명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예겸(倪謙)이 지은 '압구정'이란 정자의 이름은 한명회의 생활과는 다르게 부귀공명 다 버리고 강가에서 해오라기와 벗하여 지낸다는 뜻을 지니고 있어 이 곳을 지나가는 문인·유지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하였다 한다. 이 정자는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곳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는데, 압구정의 배 띄우기는 경도승경(京都勝景) 중의 하나였다. 그 후 한명회는 관직을 사퇴하고 이 곳에서 여생을 지내려 하니 성종 7년(1476)에는 왕이 압구정시(狎鷗亭詩)를 친제하여 하사하였고 조정 문신들도 차운(次韻)하니 그 시가 수백편이나 되었다 한다. 정자의 모습은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압구정도(狎鷗亭圖)〉에 높은 언덕 위에 정자가 있는데 마루 둘레에 난간을 돌리고 팔작지붕을 한 형태로 그려져 있어, 소박한 일반적인 정자와는 달리 비교적 규모도 크고 주위 경치와 어울려 화려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9세기 말에는 박영효(朴泳孝, 1861∼1939)의 소유가 되었으나, 갑신정변으로 박영효가 국적(國賊)으로 일체의 재산이 몰수될 때 이 정자도 헐렸다. 이후 1970년대 영동개발에 따라 현대아파트가 들어서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동네이름으로 남게 되었으며, 근래에 표석을 설치하여 압구정 터임을 밝혀 놓았다.
천일정(天一亭)은 남산 줄기가 동남쪽으로 뻗어나가 한강에 닿는 강안, 용산구 한남동 459번지에 있었다. 고려시대의 절 터였던 이곳에 조선 성종 때의 문신 김국광(金國光, 1415∼1480)이 처음으로 정자를 지었으며,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소유를 거쳐, 한때 민영휘(閔泳徽, 1852∼1935)의 소유이기도 하였다. 정자의 이름은 당나라 왕발(王勃)의 〈등왕각(藤王閣)〉 서문에 있는'추수공장천일색(秋水共長天一色)'의 시구를 취하여 이름하였다 한다. 3,000㎡나 되는 넓은 터전에 동쪽으로 아늑한 안채가 있고 정남향으로 조금 높은 터에 청원당(淸遠堂)이란 현판이 걸린 중사랑이 있었으며, 그 아래 조금 낮은 터에 강을 내려다보고 바깥 사랑채 격인 천일정이 자리잡고 있었다. 한강변 높은 곳에 축대를 쌓고 _?자형 평면으로 배치하였으며, 앞쪽으로 돌출된 누의 아래로는 사각 장초석을 세웠고 팔작지붕을 하였었다. 멀리 강 건너 압구정이 바라보이던 곳으로 1950년 6·25전쟁 때 폭격 맞아 없어졌고 지금은 그 부근에 한남대교가 놓여 있다.
용양봉저정(龍?鳳?亭)은 동작구 본동 10-30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 후기의 누정(樓亭)으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었다. 정조는 효심이 지극한 군주로 비명에 간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추모하는 일에 정성을 다 하였다. 사도세자의 원묘(園墓)는 처음에는 영우원(永祐園)이라 하여 지금 서울시립대학교 뒷산인 배봉산(拜峰山)에 있었는데 그 규모가 작고 초라하였다. 이를 가슴 아파하던 정조가 1789년 11월에 화산(華山, 수원)으로 옮긴 후 현륭원(顯隆園)이라 하고, 해마다 친히 참배하였다. 정조가 수원 에 갈 때마다 노들강(한강)에 배다리(舟橋)를 설치하고 건넜는데, 시간이 걸렸으므로 강을 건넌 후에 잠시 어가(御駕)를 머물게 하고 쉴 자리가 필요하여 작은 언덕에 행궁(行宮)으로 이 누정을 지었던 것이다. 당시의 모습은 이신(爾信)의 그림 <노량진주교(鷺梁津舟橋)>와 <행궁도(行宮圖)>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이 누정은 정조 13년(1789)에 건립을 시작하여 2년 후에 완공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원래 이 집 터는 노저(露渚) 이양원(李陽元, 1533∼1592)의 집 터였다고 한다. 용양봉저정이란 이름은 '용이 뛰놀고 봉(鳳)이 높이 나른다'는 뜻으로, 이 곳이 국왕이 잠시 머무는 행궁 구실을 하였으므로 곧 국왕 행차가 성대함을 뜻하는 것이다. 또 이 곳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점심을 들었기 때문에 일명 '주정소(晝停所)'라 부르기도 하였다. 또 이 누정은 매우 크고 화려하여 여기서 내려다보면 강 언덕의 푸른 수림(樹林) 아래로 한강의 맑은 물결이 내려다보이고, 저 멀리 눈을 돌리면 남산 북악 사이로 서울 장안의 풍경이 그림같이 펼쳐져 있으므로 전망도 매우 좋은 곳이다. 수고롭게 강을 건너 이 곳에서 간단한 연석(宴席)을 마련하고 서늘한 바람, 맑은 공기를 곁들여 술을 한잔 든다는 것 또한 흥취 있는 일이었다. 정조는 이른 아침 일찍 용양봉저정에 올라 이와 같은 정경의 일면을 읊은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이 행궁에 정문(正門)과 누정 등 두 세 채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종 때 유길준(兪吉濬)에게 하사된 후 전전하다가 1930년 일본인 이케다(池田)의 손에 들어가 건물 일부를 철거하고 부근 5,300여평에 온천·욕장·운동장·식당 등을 둔 오락장으로 삼고 이름도 '용봉정(龍鳳亭)'으로 고쳐 부르는 수난을 당했다. 광복 후 이를 국유(國有)로 환원하여, 오락시설을 철거하고 원래의 이름으로 고쳤다. 현존하는 건물은 2단의 나즈막한 기단 위에 사각기둥을 세웠으며, 건평 10평에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층 팔작지붕이다. 중앙부는 온돌방으로 꾸미고 사방에는 띠살 분합(分閤)을 달았으며, 방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퇴칸을 설치하여 마루를 꾸몄다. 정면 중앙 3칸은 개방되어 디딤돌을 통해 마루로 올라가게 되었고, 둘레에는 난간을 돌렸다. 네모 기둥머리에는 초익공(初翼工)을 결구(結構)하고, 이중량(二重樑)을 둔 5량구조(五樑構造) 겹처마집으로 간결하면서도 격식을 갖춘 특수기능의 건물이다.
낙천정(樂天亭)은 조선 태종이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고 머물던 정자로, 광진구 자양동 446번지 현대아파트 단지 내에 있다. 이곳은 원래 화양동에서 동남쪽으로 한강변을 끼고 거슬러 올라간 곳 언덕 위였다. 이 곳 언덕은 모양이 시루를 엎어 놓은 것 같다고 하여 시리미(甑山) 또는 대산(臺山)이라 하였으며, 후에 발산(鉢山)이라 하였다. 대산은 표고 42.8m 밖에 안되었으나 한강이 발 아래 감돌아 흐르고 강 속에 처져 섬을 이루고 있는 잠실동·신천동과 그 건너 남한산성이 병풍 같이 벌려 섰고, 남쪽에 청계산·관악산, 그리고 서쪽에는 남산이 한 눈에 들어 오는 승지(勝地)였다. 태종은 그 18년(1418) 왕위를 아들 세종에게 양위한 후 그해 9월 이 곳에 이궁(離宮)과 그에 딸린 정자를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인 세종 1년(1419) 2월 낙성하고, 좌의정 박은(朴?)에게 명하여 정자의 이름을 짓게 하니 《주역(周易)》 계사편의 '낙천지명고불우(樂天知命故不憂)'의 구절을 따서 '낙천(樂天)'이라 이름하였다. 또한 의정부 제조 변계량(卞季良)에게 <낙천정기(樂天亭記)>를 짓게 하고 한성부윤 권홍(權弘)으로 하여금 이를 쓰게 하여 9월 4일 판각하여 정자에 달았다. 태종은 낙천정에 행차하여 종종 중요한 정무를 친히 듣고 결정하기도 하고, 종친간의 화목을 다짐하기도 하였다. 즉 세종 1년 이 곳에서 세종과 함께 왜구에 대비하기 위하여 삼판선(三板船)을 꾸미게 하였고, 이해 6월 체찰사 이종무(李從茂) 등이 삼도 수군을 거느리고 대마도(對馬島)를 쳐서 평정하고 돌아오니, 그들을 위하여 환영연을 성대히 베풀고 상을 주었다. 세종 2년 정월부터 상왕(태종)과 대비인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가 아예 이 곳으로 옮겨 거처하게 되므로 왕은 수시로 나가 양전(兩殿)에 문안한 후 유숙하고 돌아옴은 물론 왕비 또한 때때로 낙천정에 나가 문안드렸다. 4월에는 중국사신을 접대하였더니 사신이 감탄하여 하늘이 마련해 준 선경이라 칭송하였다 하며, 때때로 상왕은 왕과 함께 이 곳에서 매사냥을 즐겼다 한다. 세종 3년 5월에는 오위진(五衛陣)이라는 군사훈련을 사열한 일도 있다. 그리고 도성과의 왕래 편의를 위해 살곶이다리(箭串橋)를 축조하게 하였다. 세종 4년(1422) 5월 상왕이 승하한 후 세종은 이 정자를 둘째 딸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하사하여 부마인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과 함께 아름다운 풍물을 즐기게 하였다. 성종 3년(1472)에는 양잠을 장려하기 위한 잠실오 이용되었다. 정자가 퇴락하여 없어진 후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 터는 도시개발로 인해 강변도로와 주택지가 되어 있었는데, 1987년에 서울시에서 한강변 문화유적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그 자취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1991년에는 옛 대산 기슭 부분 자양동 673번지에 새로이 정면 3칸, 측면 2칸, 주심포 팔작지붕의 정자를 건립하여 그 자취를 알리고 있다.
화양정(華陽亭)은 광진구 화양동 110번지 32·34호에 있던 정자이다. 이 일대는 태조가 한양으로 도성을 정할 당시 말을 먹이는 목장이었는데, 세종 14년(1432)에 낙천정 북쪽 언덕에 정자를 세웠다. 정자의 이름은 동지중추원사 유사눌(柳思訥)이 《주서(周書)》 가운데 '말을 화산 양지에 돌려보낸 다(歸馬于華山之陽)'란 뜻을 취하여 '화양(華陽)'이라 하였다. 남쪽으로 한강의 흐름이 보이고 북쪽으로는 삼각산·도봉산·수락산·용마봉이 한 눈에 들어오는 국립목장 살곶이벌(箭串坪) 언덕 위에 있는 이 정자에서 세종은 방목한 말들이 떼지어 노는 광경을 즐겼다고 한다. 한편 이 정자는 일명 '회행정(回行亭)'이라고 한다. 그 연유는 단종과 명성왕후와 관련이 있다. 세조 3년(1457) 6월 21일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다음날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영월로 귀양갈 때 이 화양정에서 전송하였는데 "화양정, 화양정"하고 중얼거리며 이 길이 부디 다시 되돌아 올 수 있는 회행길이 되었으면 하고 떠났으나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이에 사람들이 슬퍼하며 그 원혼이나마 돌아오기를 비는 마음에서 화양정을 회행정으로 부르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고종 19년(1882)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나 명성왕후가 변복(變服)을 하고 창덕궁 뒷문으로 나와 장호원으로 피해갈 때 광나루까지 가던 도중 이 곳 화양정에서 잠시 쉬어갔다고 한다. 뒷날 명성왕후가 창덕궁으로 환궁하게 되자 사람들이 '정말 화양정이 회행정이 되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화양정은 그 규모가 매우 웅장하였다고 한다. 사각정(四角亭)으로서 기둥 둘레가 한아름이 넘었으며 그 내부가 100여칸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화양정은 1911년 7월 21일 낙뢰(落雷)로 무너지고, 지금 이곳에는 서울시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된 650년이 넘는 고목을 비롯한 7그루의 느티나무 고목만 서 있다. 1987년에 서울시에서 표석(標石)을 설치하여 그 자취를 알리고 있다.
2010-01-08 효사정(孝思亭)은 화장산 동쪽 지맥의 끝인 동작구 흑석동 141-2번지 한강변 남쪽 언덕에 있던 조선 초기의 정자로, 1993년에 복원되어 자리하고 있다. 이 정자는 조선 세종 때 한성부윤과 우의정 을 지낸 노한(1376∼1443)의 별장이었다고 한다. 노한이 이곳에서 모친의 묘살이를 극진히 하여 마치고 그대로 눌러 살았다. 그러면서 정자를 짓고 때때로 올라 풍광을 바라보며 오래도록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정을 품었다. 노한과 동서간이던 강석덕(姜碩德)이 정자의 이름을 지어달라는 청을 받고, 주변의 뛰어난 경치에서 이름짓기 보다 그 효성을 생각해서 '효사정'이라 지었다고 한다.
심원정(心遠亭)은 용산구 원효로4가 87번지에 있던 정자인데, 임진왜란 때 왜군과 명나라 군이 화전(和戰)을 위한 교섭을 벌였던 장소이다. 임진왜란 당시 전쟁이 일어난 지 1개월도 못되어 수도 한성이 함락되었던 전세는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조선 관군의 수습,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 명나라 군의 원군(援軍) 등으로 점차 조·명 연합군 측이 우세해졌다. 특히 행주대첩(幸州大捷)으로 자신을 얻은 조선군이 한성을 향해 일대 반격 내지 소탕전을 전개하려고 할 무렵, 왜군은 평양 전투에서 패배하여 남산 산록을 중심으로 이 곳 용산 일대에 모두 후퇴 결집하고 있었다. 왜군들은 모두 이 곳으로 쫓겨 들어와 무기와 식량 부족이 심각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한성을 탈출해야 한다는 절박한 사정에 놓여 있었고, 명나라는 전쟁을 더 이상 끌면서 확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행주대첩 이후 자력(自力)으로 한성을 탈환할 것을 도모하고 있던 조선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 초기부터 일기 시작했던 화의론(和議論)이 대두되었다. 사실상의 작전권을 장악하고 있던 명군은 왜군 측의 화의에 대한 요구를 구실 삼아 조선 측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화의를 진행시켰다. 이러한 화의에 대한 명나라와 왜군의 강화회담이 한강 특히 용산강(龍山江)과 이 곳 심원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 강화회담의 진행으로 용산강 일대를 차지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육상의 적을 섬멸하려던 우리 군의 작전계획은 차질을 빚었으나, 이 곳 심원정과 용산강 일대는 임진왜란 전쟁사에 있어서 한 전환점을 이룬 전적지(戰蹟址)로서의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그후 이 곳은 고종 때에는 영의정 조두순(趙斗淳)의 별장이 되기도 하였으며, 현재는 정자는 없고 '왜명강화지처(倭明講和之處)'라고 음각(陰刻)된 비(碑)가 남아 있다. 또 강화를 체결한 후 기념식수한 것이라 전해지고 있는 천연기념물 제6호로 지정된 백송(白松)과 느티나무 고목이 있어 옛 역사의 현장을 느끼게 한다. 『한강의 어제와 오늘 (서울시사편찬위원회 발간, 2001.10.)』 수록내용
송파산대놀이 송파산대놀이는 1973년 11월 11일 중요무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었다. 송파는 지금의 송파동이 아니고 한강변 언덕 위에 있던 구(舊)송파진(송파나루)을 말한다. 이곳은 1925년 대홍수가 나기 전까지만 해도 객주집이 270호나 되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장터였다. 이곳에 약 200년 전 송파산대놀이가 창설되어 중간에 잠시 쇠퇴하였다가 1900년 초 다시 부활되어 활기를 띠었다. 정월대보름 ·단오 ·추석 등의 명절에 연중행사로 놀아 왔는데 단오에는 1주일씩 계속되기도 하였다. 음악반주에 맞추어 춤이 주가 되고 몸짓과 대사가 따르는 탈놀음으로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의 한 분파이다. 놀이 내용은 길놀이, 고사, 첫째마당(상좌춤), 둘째마당(옴중 ·먹중), 셋째마당(연잎과 눈끔적이), 넷째마당(팔먹중:북놀이·곤장놀이ㅋ·침놀이), 다섯째마당(노장:파계승놀이 ·신장수놀이 ·취발이놀이), 여섯째마당(샌님:의막사령놀이 ·미얄할미놀이 ·포도부장놀이), 일곱째마당(신할아비와 신할미)으로 이루어진다. 주제는 승려의 타락, 가족관계의 갈등 등이다. 이 놀이는 탈만도 33종류나 되는데 대부분 바가지로 만든다.
여의도 물빛무대는 서울시의 도시 경쟁력 강화를 위한 한강르네상스 1단계 사업의 일환으로 마련된 세계 최초 개폐식 수상무대이다. 물속에서 피어오르는 공기방울을 형상화하여 설계되었으며 여의도 한강공원 내 수상에 위치하고 있다. 홈페이지 http://www.floating-stage.com
공원별포토존
광나루 자전거 공원
|
'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 > 밥 먹고 도시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왕릉[朝鮮王陵,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능(陵) - 2.(5) 제5대 문종(文宗) _ 현릉 顯陵 (0) | 2013.07.30 |
---|---|
청계천 100배 즐기기 <청계천 도보 역사탐방> (0) | 2013.07.30 |
서울시가 추천하는 “ 한강 역사 여행 8대 코스” (0) | 2013.07.30 |
청계천 22개 다리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서 (0) | 2013.07.30 |
조선왕릉[朝鮮王陵,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능(陵) - 2.(4) 제4대 세종(世宗) _ 영릉 英陵 (0) | 2013.07.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