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구 마을 골목 기행
서대문구 일대는 석기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며 취락을 형성해 온 지역으로 한강유역을 둘러싸고 치열한 영토쟁탈전이 벌어졌던 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의 땅이었으나 A.D 475년에 고구려 영토로 편입되었다가 A.D 553년에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한양군으로, 고려시대에는 12목의 하나인 양주로 개칭되었으며 1396년 조선초 서울의 4대문 가운데 하나인 돈의문, 즉 서대문이 건립됨으로써 지금의 지명을 얻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태조는 한양을 한성부로 개칭하고 5부 52방의 행정구역으로 분류하였으며 서대문구는 서부에 속하여 반송방, 반석방, 상평방, 연희방, 영은방의 일부 지역으로 중국과의 교류시 진입로 역할을 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시 한성부와 경기도 고양군에 각각 분리, 편입되었다가 1943년 區制가 실시되면서 서대문구역소가 경성부내에 설치되었으며, 1945년 10월 6일 서대문구역소를 서대문구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49년 8월 13일 서울특별시 구역확장에 따라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전부를 서대문구로 편입하여 은평출장소를 설치하였다. 1962년 12월 28일 대신동을 신설하고, 1964년 6월 1일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서대문구의 노고산동과 대현동 일부지역이 마포구로 편입되고, 마포구의 아현동 일부지역을 서대문구로 편입하였다. 1973년에는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의 구파발리, 진관내리, 진관외리가 서대문구에 포함되어 진관동을 신설하였고, 마포구의 동교동, 서교동 일부가 서대문구에 편입되고, 서대문구의 성산동, 연희동 일부가 마포구로 편입되었다. 1975년 대규모의 구관할구역 변경에 따라 서대문구 관할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즉, 서대문구 관할의 평창동, 구기동, 부암동, 홍지동, 신영동, 행촌동, 송월동, 홍파동, 평동과 교남동, 교북동, 현저동, 충정로1가의 각 일부가 종로구에 편입되었고, 서소문동, 정동, 순화동, 의주로 2가, 중림동과 의주로1가, 충정로1가, 합동, 충정로3가, 만리동 1,2가의 각 일부는 중구에 편입되었다. 또한 상암동, 성산동과 수색동, 중동, 남가좌동, 연희동 각 일부를 마포구로 넘겨주고 만리동 1, 2가 일부를 용산구에 넘겨 주었으며, 마포구의 동교동 일부를 서대문구에 편입하였다.
1979년 10월 1일 은평구청 신설로 그동안 은평출장소 관내에 속했던 녹번동, 불광동, 갈현동, 구산동, 대조동, 응암동, 역촌동, 신사동, 증산동, 진관내·외동, 구파발동, 수색동의 13개동이 서대문구 관할에서 제외되고 은평출장소는 폐지되었다.
1980년에는 홍은4동을 폐지하였고, 1983년에 홍제1동 일부를 홍제2동으로 편입하였으며, 1989년에는 대현동 일부를 북아현3동으로, 북아현3동 일부를 충정로3가로 편입하였고, 1998년 10월 행정구역 변경으로 현저동이 천연동으로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現) 중앙여고 내에 위치하고 있었던 의령원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원자인 의소(懿昭) 세손 정(정)의 묘소이며 일명 ‘애기능’으로 불려왔다. ‘애기능’이 위치한 고개라 하여 ‘애오개’라 불리다가 ‘애오개’에서 유래한 한자어인 『아현(阿峴)』으로 불리워졌다고 한다. 일제시대 북아현정으로 불리다가 1946년 북아현동으로 바뀌었다. 1964년 대현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완료되어 마포구 아현동과 신촌로 이북지역 대부분이 북아현동에 편입되었다. 1955년에 북아현 1·2·3동으로 나뉘어졌고 2008년 5월에 충정로동과 북아현3동이 통합하여 충현동으로 명칭변경이 되었다.
천연동 동 이름은 동명여자중학교 자리에 있던 정자 천연정(天然亭)에서 유래하였는데, 이 천연정은 무악재를 오가는 관원들을 맞이하고 전송하는 연회장이었다고 한다. 1914년 지역의 구획을 새로 정할 때, 구한말까지 불리워오던 이판동 일부와 석교동 일부를 합하여 만들어졌고, 1975년 교남동 지역 중 의주로 서쪽 대부분이 편입되었다. 법정동으로서 행정동인 천연동·냉천동(冷泉洞)·옥천동(玉川洞)·영천동(靈泉洞)·현저동(峴底洞)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아현동 조선시대에는 성안에서 사람이 죽으면 동쪽의 광희문과 서소문을 통해야만 시체를 나가게 하였는데, 특히 아이 시체는 이 고개를 지나서 묻게 하였다 하여 “아이 시체가 넘는 고개”아는 뜻으로 『아현』 이라 부르던 것이 동명이 되었다고 하나 정확하지는 않다. 일제시대 북아현정으로 불리다가 1946년 북아현동으로 바뀌었다. 1964년 대현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완료되어 마포구 아현동과 신촌로 이북지역 대부분이 북아현동에 편입되었다가 1955년에 1·2·3동으로 나뉘어져 있다가 2008년 5월6일 북아현1·2동이 통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촌동 조선시대에 한성부 북부(西部) 연희방(延禧坊)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연희방 새터말이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연희면에 편입되면서 고양군 신촌리가 되었다가 1936년 1월 경성부의 지역 확장으로 경성부에 편입되어 일본식 지명인 신촌정이 되었다. 1940년 7월 경성부 북부출장소 신촌정, 1943년 6월 경성부 서대문구역소 신촌정, 1945년 10월 구제(區制) 실시로 신설된 서대문구 신촌정이 되었다. 1946년 10월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정(町)을 동(洞)으로 고칠 때 신촌동이 되었다. 연희동 조선 초 양주 땅이었던 이곳은 태조가 신도읍지를 찾고 있을 때 무악재 아래에 위치 북쪽에 나지막한 산봉우리가 있고 동서쪽으로 산맥이 뻗어있는 명당터라하여 하륜 등이 도읍지로 적극 천거했던 지역 으로, 연희동의 동명은 현재 연세대학교가 있는 자리로 추정되는 연희궁터의 이름에서 연유된 것이라 한다. 조선시대에는 정자동, 염동, 궁동, 음월리라 부르던 지역으로 일제 때 경기도에 속하다가 다시 경성부에 속하여 연희정이 되었으며 1946년 연희동으로 개명되었다. 홍제동 홍제동은 중국사신이 드나드는 중요한 육로에 위치한 지역으로 중국사신 및 여행객들이 머물렀던 현재의 국립 여관격인 홍제원이 이 지역에 위치하여 동명이 유래되었으며, 원래는 홍제원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홍제 내리라고 하다가 광복후 홍제동으로 바뀌었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홍제내리에 속하였고, 1936년 경성부로 편입되면서 홍제정으로, 다시 1946년 홍제동으로 바뀌었다. 1950년부터 1970년까지 안산동사무소 관할이었다가, 1970년에 홍제1·2·3동으로 분할되어 행정을 담당하였으며, 1975년에 다시 홍제2동이 2동과 4동으로 분할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홍은동 홍은동이란 이름은 예전의 경기도 은평면 홍제외리 지역이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홍제외리의 ‘홍’자와 은평면의 ‘은’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홍제외리에 속하였고, 1949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홍은동으로 바뀌었다. 1964년 홍은1·2동으로 분할되었고 1970년과 1975년에 홍은3·4동이 새로 생겼다. 1980년에 홍은4동이 폐동되면서 홍은2동에 통합되었다. 남가좌동 가재가 많고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가재울』이라고 하던 것이 한자음으로 가좌리라고 하다가 가좌동이 되었으며, 가재울 남쪽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남가좌리에 속하였고, 1949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편입되면서 남가좌동으로 바뀌었다. 북가좌동 가재가 많고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가재울', 한자음으로 가좌리라고 하다가 가좌동이 되었으며, 동 이름은 가재울 북쪽에 있다는 데서 붙여졌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북부 연희방 가좌동2계(加佐洞二契)로 부르던 지역이었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북가좌리(北加佐里)에 속하였고, 1949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편입되면서 북가좌동이 되었다
서대문 관광코스
제1코스 서대문자연사박물관 → 안산 또는 홍제천 → 서대문독립공원,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신촌, 이대지역 1박2일 코스 서대문자연사박물관 → 홍제천 → 서대문독립공원,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인왕산 또는 영천시장 봉원사 → 연세대, 이화여대(캠퍼스투어) → 신촌 걷고 싶은 거리, 이대 찾고 싶은 거리 박물관투어 이화여대자연사박물관, 이화여대박물관 → 연세대학교 중앙박물관 → 서대문자연사박물관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유형문화재 무악산 봉수대터 | 종별/지정번호 : 서울시기념물 13호 지정년월일 : 1993.09.20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봉원동 산1소유자 : 국공유(산림청)- 변란등을 횃불로 알려 위급함을 전하는 봉화터가 조선시대에 전국적으로 5군데 있었는데 그중에서 2군데가 안산(무악산)정상에 있었다.
- 하나는 평안도 강계에서 시발 직봉78 간봉22처를 거쳐 안산 "동봉수" (제3봉수로)에서 전해져 남산으로 최종보고 되었고, 다른 하나는 평안도 의주에서 시발 서해안을 따라 직봉 71간봉35처를 거쳐 안산 "서봉수" (제4봉수로)에 전해져 남산으로 전달되었다.
- 현재 2개의 봉수대 중 동봉수대는 서울 정도 600년 기념사업일환으로 남산중앙 봉수대와 연계하여 제3봉수로의 봉화를 올리기 위해 봉수대가 멸실된지 100년만인 1994. 8. 30 서대문 향토사 연구회의 자문을 받아 복원하였다.
- 이 봉수대의 면적은 381㎡, 상부연대(烟臺) 108㎡, 하부연대 307㎡ 봉화연조대의 높이 3.2m로 자연석을 사용·축조하였다. 서봉수대는 동봉수대로 부터 100m떨어진 현 군부대의 통신탑이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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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호거사비(楊鎬去思碑) | 종별/지정번호 : 서울시 유형문화재 91호 지정년월일 : 1993.04.03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남가좌동 50-3소유자 : 명지대학교- 임진왜란 당시 출전한 명나라 장군 양호의 무훈(武勳)을 찬양하기 위하여 선조 31년(1598), 광해군 2년(1610), 영조 40년(1764), 헌종 1년(1835)등 4차례에 걸쳐 건립되었다.
- 그중 헌종 1년에 세워진 비는 대신고등학교 교정에서 발견되었으며 명지대학교 후정에 있는 이 비는 선조∼영조 기간에 건립된 3기중 1기로 추정되며 정확한 연대 및 나머지 2기의 행방에 대해서는 학자들에 의해 연구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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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군신도비(花山君神道碑) | 종별/지정번호 : 서울시 유형문화재 41호 지정년월일 : 1980.6.11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북가좌동 75-122소유자 : 시유- 이 비는 조선 영조 때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도총관(都摠管)이었던 화산군의 행적과 세계 (世系)를 기록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 낙창군(洛昌君)이 영조 3년(1747)에 건립한 높이 약 6m의 화강석비로 속칭 거북비로 통한다.
- 귀부(龜趺), 비신(碑身), 이수등으로 구분하여 만들어졌으며, 조각수법은 조선 중기 이후의 수법을 잘 반영하고 있다.
- 비문(碑文)은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송인명(宋寅明)이 지었고, 글씨는 화산군의 조카 서평군(西平君)이 썼으며, 비석의 위쪽에 쓴 글자는 화산군의 아들 낙창군이 직접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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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각백불(普度閣白佛) | 종별/지정번호 : 서울시 유형문화재 17호 지정년월일 : 1973.06.07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홍은동 8소유자 : 옥천암- 이 석불(石佛)은 높이 10m이상의 거암(巨巖)에 새긴 관음보살좌상(觀音菩薩坐像)이다. 불암(佛岩)으로 일컫는 이 불상의 조성연대는 미상이나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 조선(朝鮮) 태조(太祖)가 서울로 도읍을 정할 때도 이 석불에 기원을 했으며, 고종(高宗)의 어머니 흥선대원군 부인(夫人)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閔氏)도 아드님의 복을 빌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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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월인석보 | 종별/지정번호 : 보물 745호지정년월일 : 1983.05.07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신촌동134 (연세대학교 도서관)소유자 : 연세대학교- 1459년(세조 5)에 세조가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본문으로 하고 자신이 지은『석보상절(釋譜詳節)』을 설명부분으로 하여 합쳐 펴낸 책이다.
- 초간본 10권(1, 2 , 7, 8, 9, 10, 13, 14, 17, 18권) 8책과 중간본 2권 (21,22권) 3책이 보물 제 745호로 지정되었으며 2권(11, 12권) 2책이 보물 제935호로 제정되었다.
- 월인석보(月印釋譜)는 한글 창제 직후에 간행된 산문 자료로서 국어국문학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 이 책은 세종과 세조, 2대에 걸쳐 임금이 짓고 편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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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철화운룡문호(白磁鐵畵雲龍文壺) | 종별/지정번호 : 보물 645호지정년월일 : 1978.12.07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대현동 11-1 (이화여대박물관)소유자 : 이화여자대학교- 입은 약간 안쪽으로 기울어지면서 얕게 직립하였고, 몸통은 어깨가 팽창되고 밑으로 급히 좁아져서 당당한 느낌을 준다.
- 입 아래위에서 선을 돌리고 그 사이에 당초문(唐草文:덩굴무늬)을, 그리고 어깨에는 장식적인 연판문대를 돌렸다.
- 몸체는 전면에 걸쳐 용 한 마리와 구름무늬로 채워쳤고, 굽 위에는 상하의 구획선을 친 사이에 삼각형 무늬가 있는데, 뇌문(雷文:사각형의 소용돌이 모양으로 된 무늬)의 변형으로 보인다.
- 그 위에는 거치문(据齒文:톱니모양)같은 무늬가 있는데, 이것도 앙련문(仰蓮文:꽃부리가 위로 향한 연꽃무늬)이 약식화된 것으로 생각된다.
- 유약은 유백색으로 투명도는 낮으나 문양의 필치가 활달하고 철사안료의 발색도 또렷하여 문양과 기형이 조화로운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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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청화송죽인물문호(白磁靑畵松竹人物問壺) | 종별/지정번호 : 보물 644호지정년월일 : 1978.12.07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대현동 11-1 (이화여대박물관)소유자 : 이화여자대학교- 목은 얕게 직립하고 어깨가 팽창되어 긴장감이 느껴지는 형태이다.
- 밑은 좁게 빠지다가 굽에서 나팔모양으로 퍼졌는데, 이는 얕게 수직으로 내려가는 굽을 단 초기 청화백자에서 흔이 보이는 형태이다. 바닥에는 넓은 횡선을 한 줄 그린 다음 그 밑에 구름을 그렸고, 굽에도 횡선 한줄을 그렸다.
- 몸에는 전체에 걸쳐 마주보는 위치에 소나무 한 그루와 대나무 몇그루를 그렸고, 소나무 밑에는 책상에 팔을 괴고 앉은 인물을, 대나무 밑에는 웃어른을 모시고 서 있는 동자의 인물 입상을 각각 그렸다.
- 백자유약은 청백색으로 고루 녹았고, 청화의 색은 연하고 아름다우며, 필치는 회화적이어서 화원의 그림임이 분명하다.
- 바닥에 균열이 있고 입 가장자리에 약간의 보수 흔적이 있으나 보기 드문 초기의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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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편(城石片) | 종별/지정번호 : 보물 642호지정년월일 : 1978.12.07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대현동 11-1 (이화여대박물관)소유자 : 이화여자대학교- 일명 고성석각(故城石刻) 또는 성벽석각(城壁石刻)이라 불리우는 이 성석의 파편크기는 가로36cm, 세로18cm, 두께 9cm이며, 명문은 7행 27자로 자경 약 3cm이다.
- 이 성석(城石)은 고구려 평양성(平壤城) 축성 당시에 각자 글자를 새긴 성석의 하나로, 비교적 평평한 자연석 면에 가공 없이 그 위에 그대로 글자를 새긴 것이다.
- 원래 오경석이 입수 보관하였던 것을 아들인 오세창이 계승 소장했으며, 현재는 이화여대박물관에서 인수 소장하고 있다.
- 성석의 현재 상태는 간지와 본문 사이의‘월일’부분이 없어졌기 때문에 크게 두 조각이 났으며, 전체 아홉 조각으로 균열되어 있는 것을 석고(石膏)로 고착시켜 놓았다.
- 그 내용은‘기유년(己酉年) 5월21일 이곳으로부터 아래쪽 동쪽을 향하여 12리(里) 구간을 물성소형 배□백두(物省小兄 俳□白頭)가 구축한다.’라고 풀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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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계첩(耆社契帖) | 종별/지정번호 : 보물 638호지정년월일 : 1978.12.07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대현동 11-1 (이화여대박물관)소유자 : 이화여자대학교- 이 기사계첩(耆社契帖)은 현재 전해 오는 계회첩 가운데 가장 시대가 올라가는 것으로서 주목되는 자료이다.
- 숙종(肅宗) 45년(1719)에 있었던 계회(契會)를 기념하기 위해 당시 참석했던 나이 많은 신하들의 제안으로 1719년 4월 17, 18일 양일에 있었던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것인데, 개개의 진영제작(眞影製作)이 오래 걸려 다음해인 1720년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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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주봉업사 정우5년명반자(竹州奉業寺 貞祐五年銘飯子) | 종별/지정번호 : 보물 576호지정년월일 : 1973.12.31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신촌동 134 (연세대학교박물관)소유자 : 연세대학교-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봉업사에서 출토된 고려시대의 청동제 대형반자이다. 반자를 금고 즉 쇠북이라고도 한다.
- 사찰에서 공양시간을 알릴 때 반자를 쳤다고 한다. 반자는 양면이 아니라 한 면만 있다. 연세대학교 소장 봉업사지 반자는 표면지름이62.5cm, 측면 너비는 12.9cm로 고려시대의 다른 반자들의 표면지름이 40cm 정도인 점과 비교하면 큰 편이다.
- 반자의 표면에는 큰 두 개의 동심원이 있고, 이 원들의 안팎에 문양을 장식하였다. 중심에는 9개의 씨방(또는 화심)이 있는 3중의 8엽 꽃이 있으며, 작은 동심원 바깥에는 연판문(蓮瓣紋)이 장식되었다.
- 큰 동심원 바깥면에는 구름무늬로 장식하였다. 문양들은 동심원을 이루는 굵은 선들을 제외하면 모두 얕고 가느다란 편이다. 반자의 측면에는 대개 음각으로 제작년대, 사찰의 이름, 축원문 등을 기록한다.
- 봉업사지 반자에는 1행47자의 명문이 음각되어 있으며 고려 고종4년(1217년)에 제작되어 봉업사에 속하였던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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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투각돈(靑磁透刻墩) | 종별/지정번호 : 보물 416호지정년월일 : 1965.01.01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대현동 11-1 (이화여대박물관)소유자 : 이화여자대학교- 8.15이후 경기도 개성시 고려동에서 출토된 일괄 유물로서 장식의장으로 나누면 두가지 종류가 있다. A형은 몸체에 큰 쌍조호형(雙條弧形)을 세로로 어긋나게 맞춰 엮어놓은 형상으로 된 투각문을 주문으로 삼았으며 이 주문대 (主文帶)의 상단에는 당초문대(唐草文帶)를 움푹 들어가게 하고 하단에는 국화문대(菊花文帶)를 앞면에서 뒷면까지 완전히 파서 모양을 냈다.
- 굽다리에는 거칠고 단단한 복판연화문(複瓣蓮華文)을 음각하고 천부 (川部)에 는 연화문(蓮花文)을 음각했다. B형은 몸체에 큰 타원형의 쌍조환형(雙條環形)을 세로로 어긋나게 맞춰 엮어 놓은 형상을 음각했다.
- 이 주문대의 상단에는 당초문을 음각하고 하단에는 4면에 안상 하나씩을 투각했으며, 굽다리에는 A형과 같은 종류의 연판문(蓮瓣文), 천부 또한 A형과 같은 연화문 음각이 장식되었다.
- 유약은 회청색이며 전면에 고르지 못하게 씌워져서 빛깔의 짙고 옅음이 눈에 띄며, 굽 가장자리 부분중 유약이 벗겨진 철색을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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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지은니묘법연화경제7(紺紙銀泥妙法蓮華經濟七) | 종별/지정번호 : 보물 352호지정년월일 : 1963.01.02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대현동 11-1 (이화여대박물관)소유자 : 이화여자대학교- 고려사본(高麗사본)의 영본 1책(零本 1책)이다. 표지와 내용이 완전하며 접본식사경(摺本式 寫經)의 형태를 모두 갖추었고 글씨도 당시의 사경의 서풍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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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부도(石造浮屠) | 종별/지정번호 : 보물 351호지정년월일 : 1963.01.21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대현동 11-1 (이화여대박물관)소유자 : 이화여자대학교- 이 부도의 원래 소재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경기도 양평군 보리사터로 추정된다. 1913년에 원위치에서 옮겨져 개인이 소유하고 있다가 이화여자대학교로 옮겨진 것이다.
- 경복궁 내의 보물 361호 보리사 대경대사(大鏡大師) 현기탑비(玄機塔碑)와 같이 대경대사의 부도로 추정된다. 대경대사는 나말여초(羅末麗初)의 고승으로 고려 태조 12년(929)에 입적(入寂)하였다.
- 그후 탑과 비석은 태조 22년(939)에 조성되었는데 부도도 그때 조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 부도는 높이 2.7㎝의 화강암으로 된 8각원당형으로 만든 지대석 위에 각면에 사자가 새겨진 하대석이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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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순화 4년명호(靑磁淳化四年銘壺) | 종별/지정번호 : 보물 237호지정년월일 : 1963.01.21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대현동 11-1 (이화여대박물관)소유자 : 이화여자대학교- 고려시대의 청자항아리로 높이35.2cm, 입지름20cm, 밑지름6.8cm이다.
- 항아리의 굽밑에『순화사년 계사태묘제일실향기장최길회조-淳化四年 癸巳太廟第一室享器匠崔吉會造』라는 음각명문이 새겨져 있다.
- 따라서 이것이 고려 태조를 위한 태묘(太廟:사당)의 제1실 향기(享器:제사지낼때 쓰는 그릇)였으며, 도공 최길회의 작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이 항아리의 유색은 담록조의 황갈색계이며, 전면에 세밀한 갈라짐이 있고 태토(胎土: 질그릇의 밑감으로 쓰는 흙)는 회백색의 자질에 가깝다.
- 이항아리는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청자기술이 아직 정착되지 못했던 고려초기 청자 제작 기술을 보여주는 확실한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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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조선 백자 철화포도문호 | 종별/지정번호 : 국보 107호 지정년월일 : 1963. 1. 21.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대현동 11-1 (이화여대박물관)소유자 : 이화여자대학교- 18세기 전반의 백자항아리로 높이53.3cm, 입지름19.4cm, 밑지름18.6cm, 배지름 43.3cm이다. 입부분은 알맞은 높이로 곧게 올라서며 목아래로 완만하게 내려가다가 어깨부분에서 둥글게 팽창되어 있다.
- 몸체아래로 내려가면서 홀쭉해져 전체적으로 대담하고 당당함을 느끼게 한다. 빙렬이 거의 없이 담청(淡靑)을 띤 백색으로 형태가 무늬와 함께 품격을 높이고 있다.
- 몸체 윗부분의 앞과 뒤에는 철사안료를 써서 포도넝쿨을 그렸는데 포도송이가 매달려 있는 것이 매우 세심하고 기품이 있어 한폭의 정제된 포도화(葡淘畵)를 보는 듯 하다.
- 특히 포도그림 자체에서 느낄 수 있는 사실성과 철사안료를 사용하여 농담과 강약을 적절히 구사한 고도의 회화적 표현이 매우 돋보이는 조선백자 항아리 가운데 빼어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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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성지 독립문 독립문 | - 1898년 6월 자주독립의 상징물 건립을 위하여 독립협회의 주관으로 이루어졌으며 기금은 협회의 모금한 돈으로 충당되었다.
- 중국사신을 맞이했던 영은문 자리에 한국인 기사 심의석에 의해 중국인 노동자를 고용하여 45*30㎝ 크기의 화강암 1,850개로 높이 14.28m, 넓이11.48m로 프랑스 개선문을 모방하여 만들었다. 1979년 성산대로 건설에 따라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게 되었다.
- 사적 : 제 32호지정(1963. 1.21)
- 위치 : 서대문구 현저동 941번지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4번 출구 도보5분
- 관람료 : 무료
- 휴관일 : 연중무휴
- 연락처 : 02-330-1410
| 독립관 독립관 | - 이 건물은 조선시대에 중국 사신들에게 영접연과 전송연을 배풀던 '모화관'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 1894년 갑오경장 뒤에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가 1897년 5월에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건물을 고치게 되고, 황태자(순종)는 '독립관'이라고 쓴 현판을 하사하였으며, 독립협회의 사무실 겸 집회소로 사용하다가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되었다.
- 독립관의 원래 위치는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350m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으나, 현재의 위치(독립문공원내 현저동 101번지)에 목조건물로 복원하여 순국선열들의 위패 봉안과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다.
|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이곳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의주로 247(현저동 101번지)에 위치한 서대문 형무소는 대한제국 말에 일제의 강압으로 감옥이 지어져 80여년 동안 우리 근현대사 격동기의 수난과 민족의 한이 서려 있는 역사의 현장이자 우리 민족의 항일 독립운동에 대한 일제의 대표적인 탄압기관 이였습니다.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 1908년 10월 21일에 경성감옥이란 이름으로 문을 연 뒤 일제에게 우리의 국권이 빼앗기자 이에 항거하는 민족 독립운동이 전국에세 거세게 일어나고 일제는 수많은 우리의 애국지사들을 체포한 뒤 투옥하였다. 수용인원이 증가하자 그들은 마포 공덕동에 또 다른 감옥을 지었고, 이 때문에 1912년 9월 3일에 서대문감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 1908년- 1908년 10월 21일에 경성감옥이란 이름으로 문을 연 뒤 일제에게 우리의 국권이 빼앗기자 이에 항거하는 민족 독립운동이 전국에세 거세게 일어나고 일제는 수많은 우리의 애국지사들을 체포한 뒤 투옥하였다. 수용인원이 증가하자 그들은 마포 공덕동에 또 다른 감옥을 지었고, 이 때문에 1912년 9월 3일에 서대문감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23년- 1923년 5월 5일에 '서대문형무소'로 그 이름이 다시 바뀌어 1945년 8월 15일에 광복을 맞기까지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투옥되어 고문을 받으며 처형되거나 옥사했던 악명 높은 곳이다. 1945년 11월 21일에 서울형무소로 바뀌고, 1961년 12월 23일에 서울교도소로, 1967년 7월 7일에 서울구치소로 바뀐 뒤 1987년 11월 15일에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가기까지 이름의 변화만큼이나 많은 민족 수난의 역사를 간직한 채 1992년 8월 15일에 '서대문독립공원'으로 개원하였다.
1987년- 1987년에 경기도 의왕시로 옮길 때 옥사는 모두 15개 동이었으나, 현재는 역사성과 보존가치를 고려해 옥사 7개동과 사형장 보안과 청사를 원형대로 보존하였다. 그중에서 옥사 3개동 (제 10,11,12옥사)과 사형장은 1988년 2월 20일에 사적 제 324호로 지정되었다.
1995년- 서대문구에서는 1995년부터 서대문독립공원 사적지에 대한 성역화사업을 시작하였다. 조국 독립을 위해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투옥되어 모진 고문과 탄압을 받고 순국하신 애국선열들의 넋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 정신을 일깨워 주는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삼기 위해 새롭게 단장하여 1998년 11월5일에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개관하였다.
[무악 봉수대] - 무악봉수대는 원래 상봉 2개의 봉우리에 동봉수, 서봉수가 설치되어 있어서 동봉대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육로 봉화를, 서봉대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해로 봉화를 남산봉수대로 최종 보고되었는데, 봉수대가 멸실된지 100년만인 1994년에 동봉수대만 복원되어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산봉원사] - 봉원사는 신라 진덕여왕 3년(889년)에 도선국사가 연희궁터(현재 연세대 주변) 어느 집에 「반야사」라는 절을 만들었으나 왜란 등으로 소실되었으나 영조때 찬즙대사와 증암선사가 현 위치로 이전, 중건하면서 새로운 절이라 하여「새절」이라하였다. 정조때 에는 전국 승려들의 기틀을 잡는 기관이기도 하였는 데 절 입구에는 400년 수령 느티나무 2그루와 100년생 1그루가 있고, 몽고에 끌려간 남편을 상봉시켜주었다는 부침바위가 있으며, 또한 이조 중기에 만들어진 범종과 정교한 건축물로 유명한 대웅전, 큰방 건물인 염불당(念佛堂 )은 흥선대원군의 공덕리(현재 마포구 염리동) 별장인 아소정(我笑亭) 건물을 옮겨 지은 것으로 대원군의 손때가 묻은 큰방은 한말 풍운을 대변해 주는 건물이 있는 절이기도 하다.
안산자락길 2013년 자연생태 프로그램 운영 안내 운영개요 • 운영기간 : 2013. 3월 ~ 12월 접수방법 • 개인 : 서울의 공원 홈페이지(http://parks.seoul.go.kr) - 전월 20일부터 선착순 접수 • 단체 : 일정, 인원 등 전화상담 후 접수 (푸른도시과 ☎ 330-1706, 안산공원관리사무소 ☎ 3140-8383)
프로그램 일정 프로그램명 | 운영기간 | 운영시간 | 운영장소 | 운영대상 | 비고 | 숲길여행 | 함께 가는 숲길여행 | 3월~11월 | 월 ~ 금 10:00~12:00 | 안산, 백련산 (희망지역 선택) | 단체 15~60명 | | 백련산 숲길여행 | 토, 일 10:00~12:00 | 백련산 | 누구나 15명 | | 안산 숲길여행 | 토, 일 10:00~12:00 | 안산 | 누구나 15명 | | 이야기가 있는 자락길 여행 | 3월~11월 | 셋째주(토,일) 10:00~12:00 | 안산 | 누구나 15명 | | 우드버닝 | 3월~12월 | 둘,넷째주(목) 15:00~17:00 | 생태교육장 | 성인 10명 | 재료비 5,000원 | 양서류 관찰교실 | 4월~6월 | 매주(화) 10:00~12:00 | 백련산 | 유아 단체 15~30명 | | 4월~5월 | 매주(화) 15:00~17:00 | 안산 | 초등 1~3학년 15명 | | 서대문 숲학교 | 4월~11월 | 셋째주(수) 15:00~17:00 | 안산, 백련산 | 초등 1~3학년 15명 | | 원예교실 | 4월~11월 | 첫째주(토) 10:00~12:00 | 안산, 생태교육장 | 가족 10팀 | 재료비 5,000원 | 꽃누르미 교실 | 4월~11월 | 셋째주(목) 10:00~12:00 | 생태교육장 | 성인 10명 | 재료비 5,000원 | 백련산 동화마을 | 5월~6월, 9월~10월 | 매주(수) 10:00~12:00 | 백련산 | 유아 단체 15~30명 | | 천연염색 교실 | 5월~6월, 9월~10월 | 매주(월) 10:00~12:00 | 생태교육장 앞 마당 | 유아 단체 15~30명 | | 5월, 9월 | 매주(월) 15:00~17:00 | 초등 1~3학년 15명 | | 홍제천 물길 탐사대 | 7월~8월 | 매주(화,금) 10:00~12:00 | 홍제천 일대 | 초등 1~6학년 15명 | | 방과후 자연학교 | 신청 학교별 운영시간 편성 | 안산, 백련산 생태교육장 | 중학교 단체 15명 | |
- 셋째주 주말 안산 숲길여행은 "이야기가 있는 자락길 여행" 으로 운영됩니다. - 우드버닝, 원예교실, 꽃누르미교실은 작품당 참가비 5,000원(유료)입니다. - 운영일정 및 내용은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으며, 공휴일에는 운영하지 않습니다. 서대문옛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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