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는
1908년 10월21일 일제에 의해 '경설감옥'이라는 이름으로 개소되어 1945년 해방까지 한국의 국권을 되찾기 위해 싸운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고, 해방 이후에도 1987년까지 서울구치소로 이용되면서 민주화운동 관련 인사들이 수감되는 등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안고 있는 상징적인 장소이다. 198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면서 과거의 아픔과 그 극복의 역사를 교훈으로 삼고자 1998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개관하여 자유와 평화의 소중함을 알리고 일깨우는 역사의 현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7월 6일 뮤지엄 행복놀이터
○ 기 간 : 2013. 7. 06(토) 10:30 ~ 12:00 (90분 수업)
○ 신청방법 : 이메일 접수 [ sdmprison@naver.com ]
▶ 장현주: <북아트로 만나는 역사> 대표 <한국역사북아트협회>회장 중등 교원 정교사 '북아트로 만나는 조선시대' 저자
○ 기 간 : 2013. 7. 20(토) 10:30 ~ 12:00 (90분 수업)
○ 신청방법 : 이메일 접수 [ sdmprison@naver.com ]
▶ 배상희 선생님 - '미술이 재미있는 이유'저자 - '즐거운 미술생각'저자 - '아이앤아트'저자 ※ 문의 전화 : 02) 360-8585 (박채옥) ※ 첨부되어 있는 신청서 작성 후 메일로 보내주세요 ※ 신청서 내용을 자세히 보시고 예, 아니오 답변에 체크해주세요 ※ 계좌번호는 sms를 통해 발송 되며, 역사관 블로그에서 입금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창의체험학습 '노래로 배우는 독립운동'
▢ 프로그램 접수 - 접수기간 : 2013. 6. 22(토) ~ 마감시까지 * 신청서는 첨부파일에 있습니다. 작성 후 메일 발송하시면 됩니다.
▢ 접수가 완료되신 분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집합장소, 집합시간을 별도로 공지하여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면서 이에 항거하는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 등 국권운동이 전국에서 거세게 일어나자, 일제는 한국민의 저항을 종식시키 조기에 식민지화를 이루고자 한국민을 탄압하였다. 이에 대규모 수용시설이 필요하여 1908년 10월 21일 서대문 현저동에 대규모 근대식 감옥을 신축하였다. 1910년 강제병합 이후 독립운동가들이 늘어나면서 수감인원도 증가하였다. 이에 일제는 마포 공덕동에 새로운 감옥을 신축하여 이를 ‘경성감옥’이라 칭하고, 서대문에 있었던 경성감옥을 서대문감옥으로 변경하였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으로 한국민의 독립선언이 발표되고 전국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으로 수감자가 급격히 증가하자, 일제는 서대문감옥 기존 건물을 대대적으로 신축하여 수용인원 3,000여 명 규모의 대규모 감옥으로 운용하였다. 이후 1923년 감옥제도를 형무제도로 바꾸면서 명칭을 서대문형무소로 변경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여 서대문형무소는 미군정 하에 서울형무소로 명칭이 바뀌어 감옥기능을 그대로 지속하였다. 한편 6·25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의 서울점령과 국군의 서울수복 등으로 서대문형무소의 주인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우익인사가 납북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1961년 형무제도가 교도제도로 바뀌면서 서울형무소의 명칭이 서울교도소로 변경되었다. 이 시기 독재정권 하에서 이에 항거하였던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수감되는 등 우리 현대사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서울교도소의 기능이 미결수감자 수감 위주의 구치소 기능으로 전환됨에 따라 1967년 서울교도소의 명칭이 서울구치소로 바뀌었다. 이후 군부독재정권에 항거하였던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대거 수감되면서 서울구치소는 우리 현대사 격변의 현장이 되었다 서울 도심의 팽창에 따라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서울구치소는 1987년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였다. 이에 따라 이곳을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자 일부 옥사와 사형장 등 원형건물을 보존하여 그 활용하는 방안이 모색되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어 고난을 치렀던 역사의 현장으로 그 가치와 중요성을 인정받아 사형장과 제 10·11·12옥사가 1988년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서대문형무소의 역사적 의의를 밝히고 독립과 민주의 현장으로서 대국민 교육의 장으로 만들고자 1996년부터 서대문구의 주도로 대대적인 성역화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에 옥사 원형 전시와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던 독립운동가들의 각종 자료 및 유물 등 전시공간을 구성하여 1998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재탄생되었다. 서대문형무소 관련 각종 자료 및 유물 등의 전시에 대한 전문성을 인정받아 전문 박물관으로 등록받았다. 대 국민 역사의식 함양과 국가보훈 의식 확산의 현장을 인정받아 국가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2008년부터 일부 훼손된 옥사의 원형 보수 및 정비, 왜곡된 경관 회복, 보안과청사 외형 복원 및 전시물 교체 정비 사업을 실시하여 2010년 11월 완료하였다. 이에 대한민국의 독립과 민주를 상징하는 역사의 현장으로서 기반을 마련하고, 전세계인에게 자유와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명소로 도약하였다.
독립문(獨立門 : 사적 제32호) 1895년 2월(고종 32년)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徐載弼) 박사가 조직한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사대주의의 상징인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우리나라가 중국·일본·러시아와 그 밖의 서구열강과 같은 자주독립국임을 국내외에 선포하기 위해 독립문을 건립하기로 하고, 1896년 7월부터 최초로 전 국민적인 모금운동을 전개한 성금으로 공사를 시작하였다.
독립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프랑스의 개선문을 모델로 삼았고 높이 14.28m로 45㎝×30㎝ 규격의 백색화강암 1,850여 개로 세워졌다. 중앙에는 아치형의 홍예문 모양으로 되어 있고,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이화(李花)무늬가 방패모양을 한 문양판에 새겨져 있다.
설계는 서재필의 구상아래 독일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도와 세부설계도를 작성하였고, 공사감독은 조선인 심의석(沈宜碩)이 맡았으며, 일은 중국인 노무자를 고용하였다.
독립문은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32호로 지정되었다. 원래는 현재의 위치에서 동남쪽으로 약 70m 떨어진 독립문 네거리 중간지점에 있었는데, 성산대로를 개설하면서 1979년 12월 31일에 현재 위치로 옮겨 복원하고 옛 자리에는 ‘독립문지’라고 새긴 표지판을 묻어 놓았다. 영은문주초(英恩門住礎; 사적 제33호)1407년(태종 7년)에 서대문 밖에 모화루를 세워 명나라의 사신을 영접하는 곳으로 1430년(세종12년)에 모화관(慕華館)으로 이름을 바꾸고, 그 앞에 홍살문을 세웠으나, 1536년 (중종 31년)에 김안로(金安老)의 건의로 홍살문을 대신해 청기와를 입혀 연조문(延詔門)이라고 하였다.
1539년(중종 34년)에 명나라 사신 설정총(薛廷寵)이 '영은문(迎恩門)'으로 고쳐 사용하였으며, 그 뒤 360년 동안 사대주의의 상징물로 남아 있다가 1895년 2월(고종 32년) 김홍집(金弘集)내각 때에 주춧돌 2기를 남기고 철거하였다.
주춧돌은 4각의 민흘림 장초석의 화강석으로 4변에 모를 죽여 8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33호로 지정되었다.
영은문 주초는 1934년에 원래의 위치에서 남쪽으로 옮겨져 독립문 앞에 세워졌으며, 1979년에 성산대로 공사 때문에 독립문과 함께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겼다. 독립관(獨立館)이 건물은 조선시대 중국 사신들에게 영접연과 전송연을 베풀던 ‘모화관(慕華館)’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1894년 갑오경장 뒤에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가 1897년 5월에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건물을 고치게 되고, 황태자(순종)는 '독립관'이라고 쓴 현판을 하사하였으며, 독립협회의 사무실 겸 집회소로 사용하였다.
독립관은 개화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던 곳이다. 자주독립·민족문화 선양·이권양여 반대·자유언론 신장·신교육 진흥·산업개발 등을 주제로 1898년 말까지 매주 토론회가 개최되었으며, 자주·민권·자강사상과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시민대중을 계몽하는 집회장으로 사용하다가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되었다.
독립관의 원래 위치는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350m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으나, 현재 위치에 한식 목조건물로 복원하여 순국선열들의 위패(位牌) 봉안과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다. 순국선열추념탑순국선열추념탑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가 순국하신 애국선열들을 추념하기 위하여 건립된 것이다.
3·1독립선언기념탑3·1독립선언기념탑은 1963년 8월 15일에 재건국민운동본부에서 주관하여 온 국민의 성금을 모금하여 3·1독립만세운동의 현장이었던 탑골공원에 세웠다.
관람시간• 여름철 (3월 ~ 10월) : 09:30 ~ 18:00 • 겨울철 (11월 ~ 2월) : 09:30 ~ 17:00 • 관람 소요 시간은 1시간 ~ 1시간 30분 내외입니다. • 휴관일 :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다음날 휴관), 매년 1월 1일, 설ㆍ추석 당일
입장료
* 군인인 경우 병장 이하의 제복착용자(전투 경찰, 의무경찰 포함)에 한함. 관람 동선전시관 -> 중앙사 -> 12옥사 -> 11옥사 -> 공작사 -> 한센병사 -> 순국선열추모비 -> 사형장과 시구문 -> 유관순 지하옥사 -> 담장과 망루 -> 취사장[유구전시-뮤지엄샵]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사이버전시관 서대문형무소 역사실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10월 21일 일제에 의해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으로 개소되어 1945년 해방까지 한국의 국권을 되찾기 위해 싸운 의병, 계몽운동가 및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고, 해방 이후에도 1987년까지 서울구치소로 이용되면서 민주화 운동 관련 인사들이 수감되는 등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안고 있는 상징적인 장소이다.
• 형무소역사실 전경
• 1930년대 서대문형무소 전경
• 1987년 서울구치소 전경
민족저항실Ⅰ 우리나라는 오랜 역사를 이어오면서 많은 외침을 당하였고, 그때마다 의병이 일어나 외적과 맞서 싸워왔다. 특히 외세의 침탈로 국권이 위태로웠던 조선 말기에는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 일제의 침략군에 저항했다.
• 민족저항실1
• 의병장
• 대한제국의 군인들
• 105인 사건으로 피체되는 애국지사
•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
민족저항실Ⅱ
독립운동가 수형 기록표(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고초를 겪었던 애국지사들은 현재 수형기록표가 남아 있는 것만 5천여 명에 이르며, 그밖에도 알려진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알려져 있지 않은 애국지사들도 수없이 많을 것이다. 이곳은 수형기록표 속 5천여 명의 애국지사들을 기억하고, 기억되지 못한 이름 모를 애국지사들의 희생을 기리는 곳이다.
• 추모공간 전경
• 수형기록표
민족저항실Ⅲ
3.1독립만세운동 이후 애국지사들은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국내외에서 여러 단체들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곳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비밀결사, 사회주의운동 조선어학회, 성서조선 등의 여러 독립운동을 통해 갖은 탄압과 고초를 겪으면서도 광복을 쟁취한 선열들의 독립에 대한 염원에 대하여 알아볼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 민족저항실 전경 • 대한민국임시정부 • 비밀결사(공명단, 의열단) • 간도공산당 • 수양동우회, 성서조선 지하고문실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애국지사들은 일제의 잔혹한 고문에 신음해야 했다. 일제는 비인간적인 고문을 자행했고, 고문의 후유증으로 옥중에서 순국하거나 불구가 된 애국지사들도 많았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는 이러한 고문의 모습을 일부나마 재현하여 일제의 잔혹한 실상과 애국지사들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 있다.
• 지하고문실 전경
• 취조실
• 고문실
• 그림자 영상 체험
• 벽관
중앙사 서대문형무소는 조선총독의 관리 하에 있는 기구였다. 형무소장은 총독의 명령을 받았고 형무소의 설치나 폐지도 총독의 권한에 속하였다. 중앙사에서는 형무소 조직기구와 감시도구 그리고 재소자들의 하루 일과 등 전반적인 형무소 생활에 대하여 알아 볼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되었다.
이곳은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가들이 실제 수감되었던 곳으로 옥사의 구조와 간수의 근무모습을 살펴보고 직접 감방 안에 들어가 수감체험을 할 수 있다. 또한 독립운동가들의 의사소통 방법인 타벽통보법을 전시하고 있다.
• 11~12옥사전경
일제강점기 각 형무소에서는 재소자들의 노동력을 동원하여 형무소, 군부대, 관공서 등지에 필요한 물품을 만들어 공급하던 공장이 있었다. 이곳에서 재소자들은 강제노역과 인권유린에 시달려야 했으며, 1930년대 후반 이후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군수물품을 만들어 공급하기도 하였다.
• 김광섭 - 나의 옥창일기 간수가 대(臺)위에서 쏜살같이 23번! 무얼 생각해? 나는 대답 대신에 고개를 푹 숙이고 일을 시작한다. 궤짝만한 상(床)에 붙인 유리 위에 도안을 놓고 조개껍질에 그려놓은 선을 따라 톱질해서는 반지(半紙)위에 붙인다. 이것이 초보자인 내가 종일 하는 일이다.
• 김구 - 백범일지 아침저녁 쇠사슬로 허리를 마주 매고 축항공사장에 출역을 한다. 흙지게를 등에 지고 10여길 높은 사다리를 밟고 오르내린다. 불과 반일에 어깨가 붓고 등창이 나고 발이 부어서 운신을 못하게 된다. 그러나 면할 도리는 없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경내에는 옥사이외에 몇 몇 건물들이 남아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들은 198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할 때 역사성과 보존가치를 고려해 남겨진 것으로 그 기능과 의미에 대해 알아 볼 수 있다.
한센병사 제13옥사(공작사)는 1923년에 지어진 건물로 병의 전염을 막기 위해 한센병에 걸린 수감자들을 강제로 격리 수감시키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건물 내부 전면에 복도가 있고, 그 후면에 작은 옥방 2개와 큰 옥방 1개가 병렬로 배치되어 있다. 오른쪽 중앙 하단에 난방을 위한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사형장 이 건물은 일제가 1923년에 지은 목조건물로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하여 전국에 투옥된 애국지사들이 사형당한 장소이다. 자주독립의 한을 품은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애국선열들의 넋이 서려있는 사형장은 사전 제324호로 지정되었다. 사형장 주변에는 높이 5m의 벽돌담이 쌓여 있고 내부에는 개폐식 마루판 위에 교수형에 사용한 교수줄이 내려져 있다. 입구 쪽에는 사형집행 때 배석자들이 앉았던 긴 의자가 보존되어 있다.
유관순지하감옥
일제는 1916년 여사(女舍) 지하에 독방을 설치하고 비중 있는 여성 애국지사들을 수용하여 가혹한 신문(訊問)과 고문을 하는 장소로 사용했다. 그 뒤 1934년경 옥사를 고쳐 지으면서 지하감옥을 매립하였으나 학계와 독립운동 단체들의 건의로 1992년에 독립공원을 조성할 때 발굴·복원하였다.
• 지하감옥 내부
망루와 담장 망루는 재소자들의 탈옥을 막고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 설치된 시설물로 총 6개 중 현재는 정문과 배면담장 2 곳에만 남아 있다. 망루의 8면에는 감시창이 설치되어 있고 정문의 망루는 1923년에 뒤쪽의 망루는 1930년에 설치한 것이다.
추모비 이 추모비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침략에 항거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신 애국선열들과 일제의 고문으로 옥중 순국하신 선열들의 넋을 기리고자 이름을 새겨 넣었다.
• 추모비
취사장 취사장은 형무소내 재소자 및 간수들의 식사를 담당하였던 공간이다. 현재 이곳은 교육장, 유구전시실, 뮤지업샵, 사무실이 위치하고 있으며, 일제강점기 취사장 유구 및 관련사진자료를 볼 수 있다.
• 취사장 전경
이달의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들의 공훈을 선양하고 계승하기 위해 국가보훈처에서 선정한 이달의 독립운동가 기획전시를 매월 개최하고 있습니다.
주요 현충시설주요 박물관 및 기념관관련기관 및 단체자료검색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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