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곳 잃은 시위대의 마지막 전투
정미의병 발원, 시위병영터
[서울톡톡] 중구 서소문동 일대는 서울 도심의 대표적인 오피스 타운이다. 굴지의 금융기관과 대기업이 밀집되어 있으며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고층빌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고 있다. 하루 종일 직장인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 이곳에 10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대한제국의 군부대인 시위대가 주둔하였으며, 1907년 한국군과 일본군 간에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진 장소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마도 극소수일 듯싶다. 그 어디를 둘러봐도 부대가 주둔하거나 교전을 치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표석이나 기념물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나마 병영터와 교전터였음을 알려주는 표석 자체도 눈에 잘 띄지 않는 도로변 화단이나 빌딩 구석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시위대(侍衛隊)는 대한제국 시기 황성(皇城)을 수비하던 중앙군이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개화파 정부는 종래의 여러 군영을 군무아문(軍務衙門)에 소속시켜 일원화했다가, 이듬해인 1895년 모두 해산하고 일본식 신식군대인 훈련대로 편성하였다. 훈련대 외에 군부대신의 감독 하에 왕궁 시위를 담당하는 시위대 2개 대대를 별도로 설치하였다. 시위대는 같은 해 명성황후 시해사건 때 일본 편에 선 훈련대와 충돌한 일로 해산되어 훈련대에 편입되었다가 광무 1년(1897) 9월 30일 재조직되었다. 훈련대의 후신으로 조직된 친위대에서 병사를 선발해 5개 중대로 편성하고, 러시아식 신병 훈련을 실시하였다. 1899년 8월 군비 강화책의 일환으로 기병대가 편제되고, 1902년에는 1개 대대가 증설되어 보병 2개 연대, 기병 1개 중대, 포병 1개 중대와 군악대를 합쳐 병력이 5,000여 명에 이르렀다. 한국을 무력으로 점령하여 식민지로 만들려고 획책하는 일본의 입장에서 대한제국의 군사력 강화는 부담스럽고 암적인 존재였다. 결국 1907년 7월 31일 일본은 정미7조약에 따라 정부와 융희황제에게 강요하여 군대 해산령을 내리도록 하였다. 신식 무기를 갖추고 엄격한 훈련을 통해 황성을 지키고 황제를 호위한다는 긍지와 자부심이 높았던 군대가 하루아침에 해산되게 생겼으니 병사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병사만큼이나 원통하고 분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장교들이었다. 특히 시위보병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 참령의 속은 시꺼멓게 타들어 갔다. 명령을 따르자니 병사들 보기가 부끄럽고 불복하자니 국왕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한 그는 밤새 자신의 거취에 대해 번민한다. 해산식은 8월 1일 동대문 인근 훈련원에서 거행될 예정이어서 아침 8시 경 출발하게 되어 있었다. 박승환은 병을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는데, 이때 교관으로 와 있던 일본군 대위가 대대를 정렬시켜 인솔하려는 모습을 보고는 마침내 쌓였던 감정이 폭발하면서 울분을 참을 길 없어 "대한제국만세"를 크게 외친 다음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당일 아침 장병들이 무장해제 된 상태로 출발하려할 즈음 대대장이 자결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격분한 장병들은 너나할 것 없이 무기고를 부수고 탄약과 무기를 탈취해 무장을 하고 병영 주위에 초병을 배치한 뒤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였다. 서소문 일대에서 총성이 울려 퍼지자 인근 2연대의 병사들도 호응하여 무장을 하고 일본군을 향해 사격을 개시하였다. 현 대한상공회의소와 신한은행 건물 앞에서 남대문시장 방향으로 쌍방 간에 교전이 벌어졌다. <최신경성전도>를 보면 현 남대문시장 일대에 일본군 51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한국군과 일본군이 마주보고 있었던 셈이다. 한국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힌 일본군은 9시 30분 보병 제 51연대 전 병력을 투입하는 한편, 숭례문 성벽 위에 기관총을 걸어놓고 무차별 사격을 하였다. 막강한 화력과 숫자의 열세를 이기지 못한 한국군은 결국 교전시작 3시간 만인 11시 40분 경 200여 명이 사상하고 500여 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서소문 병영이 점령당하였다. 하지만 퇴각한 한국군 일부는 서소문 밖 고지 일대를 배경으로 저항을 계속했고, 각지로 흩어져 의병진에 합류함으로써 의병전쟁으로 발전한 1907년 정미의병 발원(發源)의 기초를 놓았다. 정미의병 발원터 표석은 중구 세종대로 9길 42(서소문동 120-23)에 있는 부영빌딩 입구 왼쪽 화단에 있으며, 시위병영터 표석은 중구 서소문로 100(서소문동 58-9) 중앙일보 구관 도로변에 있다. 지하철 2호선 시청역 9번 출구에서 도보 3~5분 거리이다.
■ 정미의병 발원터 표석과 시위병영터 표석 찾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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