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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기행 ② 북아현동

草霧 2013. 6. 25.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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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좁은 길 따라 흐르는 삶의 흔적

골목길 기행 ② 북아현동

 

시민리포터 채경민 | 2013.06.20

 

버스를 타고 서대문구 아현동 부근을 지나던 길이었다. 언덕 너머 달동네처럼 보이는 허름한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서울 시내에 아직도 저런 곳들이 있다니 직접 현장을 보고 기록을 남겨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토요일 아침, 친구 녀석과의 약속도 미룬 채 카메라를 메고 그곳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북아현동 골목이다.

[서울톡톡] 지하철 2호선 아현역 2번 출구를 빠져나오면 충현동 방면으로 뻗은 언덕진 길과 만난다. 길의 이름은 '북아현로'. 좌측으로 길게 공사장 가림막이 쳐져 있고, 중장비들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알고 보니 뉴타운으로 지정된 일부 구역의 기초 공사가 활발하게 진행 중인 상황. 다행히 북아현로 우측에 위치한 2구역은 재개발을 놓고 진통을 겪고 있어 옛 골목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오른쪽으로 뻗은 능안길을 따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능안길의 첫 느낌은 산뜻했다. 곳곳에 아파트와 연립 주택이 있고, 차들의 통행도 비교적 쉬운 편이었다. 하지만 계단 몇 개를 오르고 언덕길을 200여 미터 남짓 오르자 완전히 다른 풍경이 나타났다. 높은 축대 너머로 낡은 지붕이 덮인 집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었고, 집들 사이로는 다시 수많은 골목길이 마치 미로처럼 펼쳐져 있었다. 흡사 모세혈관과도 닮은 이 골목들 사이를 구석구석 살펴보는 것이 이번 여행의 포인트다.

 

 

미로 같은 비좁은 골목길

마을 정자에 앉아 있는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낯선 이의 방문이 달갑지 않았는지, 아니면 부동산 업자라고 생각했는지 '이런 달동네에 뭣 하러 왔느냐'는 퉁명스런 답변이 되돌아왔다. 뉴타운 지구로 지정된 이후 개발에 찬성하는 주민들과 반대하는 주민들 사이에 오랜 시간 갈등이 지속되어 온 영향인 듯 싶었다.

 

원래 북아현동은 대학교수나 정부 관리들이 살던 부촌(富村)이 있던 곳이었다. 서대문 안산 자락 바로 아래 충현동과 인접한 금화장길 부근에는 마당이 딸린 관사 주택들이 많았고, 고위 관료들이 주민의 대다수를 이뤘다. 지금도 그 모습을 간직한 채 '부촌'으로 인식되고 있어 실제로 이곳만을 둘러보았다면 북아현동의 '달동네'는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하지만 지대가 높은 곳들의 상황은 극명하게 다르다. 1940년대부터 도시로 몰려들기 시작한 사람들, 그리고 한국 전쟁 직후 수많은 피난민들이 모여 판잣집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정부의 양성화 조치 이후 개보수가 이루어지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췄지만, 비좁은 골목길과 다닥다닥 붙은 집들의 구조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이삿짐조차 옮기기 쉽지 않은 곳들이 많지만 대학로와 가깝고 교통이 좋은 편이라 수십 년 동안 이곳을 떠나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사실은 가진 돈이 없어서 이곳으로 이사를 왔는데, 그러고 보니 50년을 살았어. 가구 하나 들여놓기 힘든 좁은 집인데도 여기서 5남매를 키우고 산 걸 보면 나도 신기해. 젊었을 땐 여기서 산다는 게 참 싫었는데 이제는 정(情)이 들어서..." 올해 80살이 되었다는 어르신 한분이 옛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좁은 골목길을 둘러보다 흥미로운 장소를 발견했다. 골목길 옆으로 붙어있는 아랫집 지붕이 바로 그것. 취객들이 남의 집 지붕에 올라가 한참을 헤매고, 집 주인은 갑자기 들려온 이 발자국 소리에 집이 무너지는 줄 알고 난리가 났었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북아현동 골목길은 영화 속에도 등장했다. 지난 2007년 개봉한 영화 <추격자>에서 주인공(하정우 역)이 전직 형사 엄중호(김윤석 역)를 발견하고는 도망치던 장면이 바로 이 골목길에서 촬영되었다. 미로처럼 연결되는 크고 작은 골목길과 골목과 골목을 이어주는 수 많은 계단들이 복잡성을 더하며 긴장감을 고조시키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영화 속 음침한 골목길 분위기는 실제와 많이 다르다. 골고루 볕이 잘 드는 까닭에 밝고 따뜻하다. 집집마다 내걸어 놓은 빨래와 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민 붉은 빛깔의 장미는 삶의 여유를 더하는 듯 평화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요즘은 찾아보기 힘든 칠 벗겨진 녹슨 방범창은 그 자체가 훌륭한 엔틱 소품이다. 멀리 보이는 푸른빛의 안산과 열려진 창문 사이로 새어나오는 라디오 소리는 묘한 어울림을 이루며 서정적이며 목가적인 느낌을 선물한다.

 

 

개발의 그늘, 사라져 가는 골목

북아현동은 재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다. 소박한 정취를 자랑하던 한옥집들은 대부분 사라졌고 이제는 아파트를 짓기 위해 자재를 나르는 공사 차량들의 움직임만 분주하다. 개발을 앞두고 빈집들이 많다는 추계예술대학교 부근의 북아현 1-3구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곳곳에 개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내건 현수막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주민 대부분이 이주를 마쳤고, 70여 가구만이 남아 외로운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폐허처럼 변해버린 집과 집, 골목길 사이 사이에는 을씨년스런 분위기가 감돌았다.

 

"뭣 하러 찍는 거요?" 나이든 아저씨 한 분이 퉁명스럽게 다가왔다. 개발에 반대해 이주를 미루고 있다는 그분은 자신이 살던 곳이 사라지는 것도 싫지만, 낯선 이방인들이 자꾸 찾아오는 것은 더더욱 성가시다고 했다. "그저 젊은 분들 눈에는 그냥 신기한 풍경일지 몰라도 여기서 평생을 산 나는 집을 빼앗긴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지 않소. 주민들 사이만 나빠졌다니까...개발이 이런 거야." 높아진 목소리엔 사라지는 동네에 대한 아쉬움이 깊게 묻어났다.

 

아저씨의 말이 머릿속에서 쉽사리 떠나지 않았다. 주인 잃은 빈집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수십 년 동안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었을 공간들은 이제 머릿 속 아득한 추억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사라지는 골목길을 볼때마다 고민이 많아진다. 비좁은 골목을 부수고 고층 건물을 짓는 개발도 물론 필요하지만, 이제는 도시의 상징과 역사성을 주목한 '보존형 개발'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비싼 돈을 들여 유럽의 어느 비좁은 골목길을 찾아 가는 것처럼, 삶의 흔적과 지혜를 느낄 수 있는 역사적인 공간들이 우리 주위에도 좀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어느새 길어진 그림자만큼이나 복잡해진 머릿 속,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여행을 마쳤다.

 

채경민 리포터는 기자·PD 생활을 거쳐 현재도 방송 관련 일을 계속 하고 있다.
도시화로 인해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골목길, 그 길에 담긴 우리 이웃들의 따뜻한 삶을
기록하기 위해 그가 카메라를 들었다. 골목길에 오면 늘 마음이 편해진다는
채경민 리포터, 우리가 살았던 삶의 흔적이 덧없이 사라지기 전에 그와 함께
마음이 편해지는 골목길 기행을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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