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비석, 한자 모르는 일반인 위한 배려
한글비석로
[서울톡톡] 도로 이름을 제정할 때 고려하는 항목 중의 하나가 지역 연고성이다. 옛 지명이라든지 고장을 빛낸 위인 또는 문화유적 등을 참고, 검토하여 이름을 짓곤 한다. 노원구 하계동과 중계동, 상계동에 걸쳐있는 한글비석로는 이 지역의 대표되는 유적을 선정한 사례이다. 한글비석 또는 한글고비라고 부르지만 정확한 명칭은 이윤탁(李允濯) 한글 영비(靈碑)이다. 한글비석로 202(하계동 산 12-2)에 위치하고 있으며, 국내 수많은 조선시대 비석 중 한문이 아닌 한글로 쓰인 희귀한 작품이기에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이러한 연고로 1993년 처음 한글비석길로 명명되었고 현재는 한글비석로로 개칭되었다. 노원구 하계동 182번지 동1로 월계1교 기점부터 하계역, 대진고교 사거리, 양지근린공원 사거리, 삿갓봉 근린공원 사거리, 상계역, 마들역, 노원성당 앞 상계동 661번지 종점까지 중랑천을 서쪽에 두고 하계동·중계동·상계동을 순환하는 왕복 4-8차선의 6km의 간선도로이다. 이 길에는 한글비석 뿐 아니라 병자호란 때 순절한 충숙공(忠肅公)이상길(李尙吉)묘역 등의 유적이 있고, 불암산과 수락산이 인근에 있으며, 도심에서는 찾기가 힘든 근린공원이 곳곳에 산재하고 있어 심신 수양에 안성맞춤인 장소이다. 한글 영비는 조선 중종 때 승문원(承文院 : 외교 문서 담당 관청) 관원을 지낸 이윤탁과 신씨(申氏) 부인을 합장한 묘비이다. 옆면에 무덤과 비석의 훼손을 경계하는 한글이 새겨져 있다. 화강암제 사각 받침돌 위에 직육면체 대리석 비신을 세운 간략한 형태로 비석의 위쪽 모서리를 비스듬히 다듬었다. 건립연대는 비문에 가정(嘉靖)15년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중종 31년(1536)에 세웠으며, 1974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27호로 지정되었다가 2007년 보물 제 1524호로 승격되었다. 비의 높이는 1.4m이며 보호각에 의해 보존되어 있다. 이윤탁은 본관이 성산(星山), 자는 탁지(濯之)로 성종 14년(1483) 사마시에 올랐고, 연산군 7년(1501)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權知 : 임용 대기 중의 견습 관원)에 보임되었으나 그해 12월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부인 신씨는 한성판관을 지낸 신회(申澮)의 딸로 성종 9년(1478) 이윤탁과 결혼하여 3남 2녀를 두었다. 비문에 따르면 신씨 부인이 중종 30년(1535) 73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양주 노원(蘆原) 율이점(栗伊岾)에 무덤을 쓰고, 이듬해인 1536년 봄 가까운 곳에 있던 남편 묘에 합장하여 5월에 비를 세웠다고 한다. 비의 오른쪽 측면에는 한문으로 무덤과 비석을 훼손하지 않도록 힘쓰라는 경구가 새겨져 있고 왼쪽 측면에 한글로 '신령스러운 비이니 거스르는 사람은 재화(災禍)를 입을 것이라. 이는 글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노라'라고 새겨져 있는데 무덤에 대한 철저한 관리를 후손에게 당부하고 있다. 조선시대 내내 잘 보존되어 왔지만 최근 도로 확장공사로 두 차례 옮겨졌다. 이 비석은 세종 25년(1443) 훈민정음 반포 후 90여 년이 지난 후에 세워진 한글 석문(石文)으로는 가장 오래되었으며, 당시의 한글 어법을 잘 보여주고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부모의 묘비를 세우면서 비 옆면에 경계의 글을 적고, 더불어 한자를 모르는 일반인을 위해 한글로 새긴 것은 참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양지근린공원 사거리 방향으로 대진고교 사거리를 지나자마자 길가에 충숙근린공원이 나온다. 이곳은 조선 중기의 문신 충숙공(忠肅公) 이상길(李尙吉, 1556~1637)의 묘역이다. 묘역 입구에 사당인 동천재(東川齋)와 이상길의 영정을 모신 충영각(忠影閣) 등이 있다. 묘역 앞에는 신도비가 있고, 신도비 뒤 선산이 조성되어 있다. 이상길의 본관은 벽진(碧珍), 호는 동천(東川)으로 선조 18년(1585) 문과에 급제하고 호조·병조·예조 좌랑과 예조 정랑을 거쳐 공조판서 벼슬을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의주로 몽진하자 그는 함경도에 가서 수복을 도모하자고 주청하였다. 1597년 왜군이 다시 침입하자 병력을 이끌고 남원에서 싸웠으며,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종묘와 사직의 위패를 모시고 강화도로 들어갔다. 그러나 남한산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여 이듬해 1월 목을 매어 순절하였다. 인조는 그의 충성됨을 교서를 내려 표창하고 정려와 시호를 내렸으며, 좌의정에 추증했다. 생전 동대문 밖 노원에서 거주한 연고로 현재 위치에 묘역이 조성되었으며, 현종 2년(1661)에 세워진 신도비는 대좌 위에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 모양의 개석을 얹은 간략한 형태이다. 비문은 우찬성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글씨는 좌참찬 송준길(宋浚吉)이 썼는데 당시 최고의 지성이 참여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비문의 주인공에 대한 국가 차원의 배려와 성의라 할 수 있다. 내용은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병자호란 등을 겪으면서 선조~인조 때에 올곧은 행동으로 일관했던 그의 행적이 새겨져 있다. 한글비석로 144(하계동 산16-1)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70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글비석로는 지하철 4호선 상계역, 7호선 하계역과 마들역을 이용하면 접근이 용이하고 버스노선은 100, 172번(간선), 1131, 1137, 1138, 1140, 1141, 1142, 1143, 1144, 1161, 1224번(지선), 노원 02, 05, 08, 11번 마을버스가 있다. 충숙공 묘역과 한글영비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하계역 3번 출구 앞에서 1141번 버스를 타고 대진고교 사거리나 서라벌고교 앞에서 하차하면 도보 2분 거리에 있다.
■ 한글비석로 찾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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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종민(서울역사박물관 조사연구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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