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이 시작된 곳은?
중앙학교 숙직실, 노백린 집터, 3.1기념관
[서울톡톡] 친구 또는 연인과 나들이차 삼청동을 찾았다가, 발견하게 되는 역사적 건물이 있다. 이름은 고등학교지만, 대학 캠퍼스 마냥 눈에 띄는 모습으로 발걸음을 끄는 중앙고등학교(종로구 계동)다. 눈에 비치는 아름다운 건물에 드라마에도 종종 등장한 곳이지만, 이곳에 담긴 역사적 현장과 의미를 알고 보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바로 대한민국의 독립을 열렬히 주장한 3․1운동의 열사들의 땀과 외침이 담긴 곳이기 때문이다. 먼저 중앙고등학교 정문을 지나 언덕을 올라가면 정면에 돌로 지은 우람한 건물, 학교 설립자인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동상을 품고 있는 본관이 나온다. 3․1운동이 일어난 해가 1919년이니 당시의 건물이겠지 생각하고 안내판을 보니 1934년에 지어진 건물이었다. 1919년에는 이 자리에 중앙학교 교사(校舍)가 있었다. 본관 건물에서 강당 방향으로 화단에 비석과 기념조각이 있어 가보니 '3․1운동 책원지비(策源地碑)'였다. 책원(策源)? 계책, 계획의 근원이 된다는 뜻인데 '3․1운동 책원지비'라 함은 3․1운동 계획의 근원이 되는 장소의 비석이라는 뜻이다. 곧 1919년 당시 중앙학교가 3․1운동 도화선의 근원지라는 것이다. 지금은 3․1기념관으로 명명된 옛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거사를 숙의하였던 것이다. 중앙학교는 1917년 이곳에 학교를 신축, 이전하였는데 원래 이 자리는 독립운동가이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요인이었던 노백린(盧伯麟)의 집터였다. 과연 설립자가 독립운동가의 집터였음을 사전에 인지하고 교사를 지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일제강점기 민족교육의 나아갈 바를 제시한 요람으로써 수많은 민족 지도자를 배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필시 독립운동가의 집터도 큰 역할을 하지 않았겠는가 싶다. 책원비 기념물에서 3․1기념관으로 가는 길목에 집터 표석이 있다. 표석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 등을 역임한 노백린 장군이 1916년 망명할 때까지 거주하던 집터」로 표기되어 있다. 노백린(盧伯麟, 1875~1926)은 황해도 은율 출신으로 호는 계원(桂園)이다. 895년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 게이오(慶應)대학과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00년에 귀국하여 육군 정령이 되었으며, 관립 무관학교 교장을 지냈다. 1907년 한국군대가 강제 해산당하자 낙향하였다가 안창호(安昌浩) 등과 신민회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1916년 미국으로 망명하여 박용만 등과 함께 국민군단을 조직하였고, 3․1운동 뒤에 중국 상해에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무총장과 국무총리에 취임하였다. 1925년 국무총리직을 사임하고 독립군 육성에 헌신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중앙학교는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된 구한말, 신학문을 통한 교육만이 국력을 만회하고 구국하는 길임을 깨달은 우국지사들이 설립한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서 1908년 6월 종로구 소격동에 설립한 기호학교(畿湖學校)가 전신이다. 그 해 12월 화동 138번지에 새 교사를 마련한데 이어, 1910년 10월 중앙학교로 교명을 바꿨다. 1915년 4월 재정난에 빠진 학교를 김성수가 인수한 뒤, 현재의 계동 1번지 언덕에 교사를 신축하고 1917년 12월 이전하였다. 중앙학교 역사에서 가장 기념비적 장소 중의 하나인 3․1기념관은 교내 강당과 예능관 사이에 있으며, 1973년 개교 65주년 기념사업으로 옛 건물을 복원해 놓았다. 지금으로 봐서는 평범한 단층 한옥이 일제강점기 민족독립운동의 거대한 분수령 역할을 한 3․1만세운동의 도화선 장소라니 신기할 따름이다. 학교 숙직실에서 거사를 기획하였다는 사실은 역으로 당시 일제 경찰의 집요하고 치밀한 감시 선상을 교묘하게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장소였다고 판단된다. "설마 숙직실에서 그런 모의를 하겠나. 그것도 시내 요처가 아닌 한갓진 언덕위의 학교에서 말이야"라고 등한시하고 감시가 소홀한 틈을 이용하였을 것이다. 1919년 1월 일본 동경 유학생 송계백이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선배인 중앙학교 교사 현상윤(玄相允)을 찾아와 교장 송진우(宋鎭禹)가 합석한 자리에서 같은 해 2월 8일 동경 한복판에서 유학생들의 독립시위 거사가 있을 예정인바, 이에 대한 계획을 알리고 '2․8독립선언서' 초안을 전달하였다. 그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국내에서도 독립운동 거사의 기운이 이제 바야흐로 무르익을 때가 되었음을 자각하였다. 2월 초 최린(崔麟)․최남선(崔南善)․송진우․현상윤 등이 최린 집에서 회합을 가진 2~3일 뒤에 다시 이곳에 모여 숙의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구체적인 계획은 김성수, 송진우, 현상윤 등 세 사람이 이곳에서 처음 발의했고, 만세운동에 필요한 독립선언문 작성 등 구체적인 방략에 대해서 열띤 토론을 이어 나갔다. 김성수를 비롯한 48인이 주도했으며, 이들 중 33인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1919년 3․1운동 기획의 핵심적인 장소인 중앙학교는 1921년 중앙고등보통학교로 개편된 이후에도 민족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자처하였다. 본관 좌측의 인문학박물관 앞 화단에는 1926년 6․10만세 기념비가 있다. 1926년 4월 26일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별세하자 중앙고보 학생들을 중심으로 격문 3만매를 인쇄하여 각급 학교에 배부하였고, 장례식날인 6월 10일 단성사 앞에서 중앙고보 학생들이 대한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종로구 창덕궁길 164(계동 1)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하철 3호선 안국역 2번 출구 앞에서 종로 01번 마을버스를 타고 중앙고등학교 정문 앞에 내리거나, 2번 출구 앞에서 종로 02번 마을버스를 타고 안국선원에서 내려 오른쪽 골목으로 도보 2분 거리이다.
■ 중앙고등학교 찾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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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사종민(서울역사박물관 조사연구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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