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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기 문신이자 순국지사인 민영환 집터

草霧 2013. 6. 3.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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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위해 바친 목숨, 우린 기억하는지....

조선말기 문신이자 순국지사인 민영환 집터

 

사종민 | 2013.04.18

 

 

[온라인뉴스 서울톡톡] 슬프다. 나라와 민족의 치욕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경쟁 속에서 멸망하리라. 삶을 원하는 자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자 살아갈 수 있으니 이는 여러분이 잘 알 것이다. 나 영환은 죽음으로써 황은(皇恩)을 갚고 이천만 동포에게 사과하노라 영환은 죽어도 황천에서 동포들을 돕고저 하니 우리 동포형제들이 천만 배 분려(奮勵)하여 뜻을 굳게 갖고 학문에 힘쓰며 합심 협력하여 우리의 자주독립을 회복한다면 나는 지하에서 기꺼이 웃으련다. 오호라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우리 대한제국 동포에게 마지막으로 고별하노라. [1905년 11월 4일 민영환(閔泳煥) 유서(遺書) 중에서]

 

대의명분(大義名分)과 솔선수범(率先垂範)은 서로 연관되는 숙어는 아니지만 예의와 의리를 중요시하면서 모든 것을 가진 자에게 대중이 바라는 도덕적 개념의 잣대로 종종 요구된다. 예나 지금이나 특권층, 즉 권세가나 부호층의 일거수일투족은 대중에게 때로는 위화감을 주기도 하고 조롱과 가십거리로 전락하기도 하지만 누구나 공감할 정도로 앞장서서 모범을 보인다면 일약 국민 영웅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구한말 민영환은 대의명분과 솔선수범을 아낌없이 이 땅의 백성들에게 펼치고 떠난 우국지사이다. 학문이나 집안, 심지어 재력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는 명문가의 후예가 암울한 조국의 현실을 목도하면서 숨거나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공개적으로 부당함을 성토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 애국선열이었다. 그의 넋과 혼이 스며있는 집터는 이제 온데간데없고 평소 모습을 새긴 동상 하나만이 옛 터를 쓸쓸이 굽어보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할 따름이다.

 

조선 말기의 문신이며 순국지사인 민영환은 1861년 7월 서울 종로구 견지동에서 선혜청 당상 민겸호(閔謙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여흥(驪麗)이고, 호는 계정(桂庭)이다. 고종 15년(187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대사성·이조참판·병조와 형조판서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으며, 1896년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였다. 이듬해 영국과 독일 등 유럽 6개국 특명전권공사로 나갔다옴으로써, 서구 신문물에 일찍 눈을 떠 정치제도의 개혁과 민권신장 등을 건의하였다.

 

보수파였던 부친 민겸호(閔謙鎬)와는 달리 독립협회의 자주자강운동을 적극 지지한 개화파 위정자였다. 시정개혁을 시도하다가 파직되기도 하였으며, 다시 참정대신 등을 지내며 친일적 대신들과 대립하여 일본의 내정간섭을 성토하다가 시종무관장으로 밀려났다. 1904년 러일전쟁으로 말미암아 한일의정서가 발효되자 고급관료였지만 앞장서서 부당함을 격렬하게 성토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이 강제 체결되어 외교권이 박탈되자 조병세(趙秉世)와 함께 백관을 거느리고 을사늑약에 서명한 5적을 처형할 것과 늑약의 파기를 상소하였으나 조병세의 체포로 무산되었고, 곧이어 2차 상소를 전개하였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격분한 그는 죽음으로써 국가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결심하였다. 당시 선비들은 나라가 망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당연한 덕목으로 여겼기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국민을 깨우쳐 조국의 자주독립을 다시 찾아주기를 소원하여 그 내용을 유서로 작성하였으며, 1905년 11월 30일 새벽 전동 이완식의 집(현 공평빌딩 앞)에서 칼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경고 대한민국 이천만 동포'라는 제목의 국민에게 보내는 유서와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 고종에게 보내는 유소(遺疏) 등 3통을 남겼는데, 일본인의 감정을 생각한 정부가 유소는 묵살했다. 원통한 마음으로 분사(憤死)하였지만 그의 대의(大義)는 동포에게 자주독립의 필요성을 일깨웠고, 나아가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이 일어나게 하는데 큰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순절 후 광무황제(光武皇帝 : 고종)는 금척대훈장(金尺大勳章)을 내리고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주었으며,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대신에 추증되었다.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애국심과 국권회복운동에 끼친 공훈을 높이 받들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957년 공의 위업을 기린 동상을 안국동 로터리에 세웠으나, 도로확장으로 율곡로 돈화문 입구인 와룡동 1번지로 옮겨졌고, 다시 2003년 종로거리 3․1절 재현행사를 계기로 우정총국 건물 뒤편 현 위치로 이전되었다. 집터는 조계사 경내 불교중앙박물관 일대에 해당되는데 이제 터를 확인할 수 있는 증표는 조계사 정문 앞 도로에 있는 표석 밖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동상마저도 이리저리 정처 없이 표류하다가 집터가 바라다 보이는 후미진 구석에 자리 잡고 있으니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의 삶을 산 민영환 공에게 죄송스러운 마음 그지없다.

 

종로구 우정국로 59(견지동 39-7)에 위치하고 있으며, 민영환 동상의 관리자는 종로구청이다. 지하철 1호선 종각역 2번 출구로 나와 조계사 방향으로 도보 3분, 지하철 3호선 안국역 6번 출구로 나와 조계사 방향으로 도보 2분 거리에 있다. 시내버스로는 109, 151, 162, 172, 606, 1022, 8000번이 있다.

 

■ 민영환 집터 찾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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