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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를 호령하던 풍운아의 마지막 말 `아소정`

草霧 2013. 6. 3.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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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를 호령하던 풍운아의 마지막 말 `아소정`

흥선대원군이 생을 마감한 아소정 터

 

사종민 | 2013.05.02

 

 

우리네 삶에서 며느리와 시어머니는 종종 갈등과 애증이 교차되지만 며느리와 시아버지는 서로 사이가 원만한 편이다. 며느리를 함부로 대한다는 시아버지를 주위에서 찾아보기가 어려운데 조선 고종의 부친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1820~1898)과 며느리인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閔氏, 1851~1895)는 요새 말로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방송국 프로그램에 나올법한 인물들이다.

 

서로 감싸주고 위하기는커녕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모함하고 깎아 내리는 일종의 정적이었다. 노련한 정치가 시아버지와 영특한 지혜와 술수에 능한 며느리의 대결은 승자와 패자도 없이 서로의 파멸을 가져왔을 뿐이다. 결국 시아버지는 정권의 중심에서 축출당해 한양도성 밖 마포 공덕리에 있던 별장에서 인생의 말년을 쓸쓸이 지내게 되었다.

 

대원군은 자신의 일생이 너무나 덧없음을 돌아보고 스스로 조소한다는 뜻에서 거처하는 집의 본채 이름을 아소정(我笑亭)이라 하였다. 곧 '내가 나 자신을 비웃는다'는 뜻을 지닌 정자에서 며느리를 원망하고 무력한 자신을 한탄하며 천하를 호령하던 위세는 간곳없이 늙고 병든 노인의 신세가 되어 생을 마감한다. 공덕리 별장의 모습은 사라진 채 이제 표석으로만 그 위치를 확인하는 정도인데, 그나마 아소정 본 건물은 서대문구 봉원사(奉元寺)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어 불행 중 다행이라 여겨진다.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 별장은 99칸의 대 저택이다. 대원군이 이곳에서 사실상의 연금생활에 들어간 것은 1895년 4월 손자 이준용(李埈鎔)이 고종폐위 음모에 연루되어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를 떠나면서였다. 그에 앞서 대원군은 1894년 7월 고종을 대신하는 섭정이 되어 갑오개혁 정권에 참여하였다가, 그 해 11월 이노우에 일본공사의 축출공작으로 정계은퇴를 선언한 상태였다.

 

운현궁에서 나와 공덕리로 유폐되면서 처음 며칠 동안 그는 본채 문고리를 잡고 통곡하였다고 한다.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하였을까 이를 빗대어 혼자 큰 소리하는 것을 두고 <아소정 호랑이 운다>라는 속담이 생겨날 정도였다. 이런 은둔생활 중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895년 10월 명성황후 시해사건 와중이었다. 황후를 제거할 계획을 세운 일제는 정적인 대원군을 앞세우기로 하고 갖은 회유와 협박으로 반승낙을 얻어 내었다.

 

10월 8일 새벽 공덕리로 일본군 수비대를 보내 대원군을 호위하고 경복궁으로 향하게 하였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황후 시해사건에 들러리를 섰지만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정국이 다시 바뀌자 정가에서 영원히 은퇴한다. 영원한 동반자 부대부인 민씨를 먼저 떠나보냈으며, 그 자신도 1898년 2월 79세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하고 부인이 묻힌 아소정 부지에 함께 안장되었다가, 1908년 경기도 파주로 이장되었다.

 

 이후 이 일대는 대원군의 묘소와 사당이 있다고 해서 국태공원(國太公園)이라 불렸다. 아소정 건물은 해방 후 동도중학교가 들어서면서 1962년 철거되었고, 서대문구 봉원동에 있는 봉원사(奉元寺)에 이전 복원되어 현재 대방(염불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봉원사 대방은 서향으로 앉은 정면 7칸, 측면 5칸의 60여 평 규모로 정면 현판에 '봉원사'가 새겨져 있다. 원래 해방 후 46칸 180여 평 넓이의 염불당으로서 광복기념관이라는 건물이 있었는데, 한국전쟁 때 소실되자 다시 그 자리에 아소정의 본채 건물을 옮겨다 지은 것이다.

 

 대방 내부에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는 현판이 있는데 추사의 스승인 청나라 옹방강(翁方綱)의 글씨이고, '청련시경(靑蓮詩境)' '산호벽수(珊瑚碧樹)'라는 현판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글씨이다. 대원군이 평소 자신의 스승인 추사와 또 추사의 스승인 옹방강의 글씨를 아소정에 함께 걸어 두었는데 봉원사로 이전하면서 같이 묻어서 온 것이다.

 

아소정의 표기에 대해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지도인 <경성부시가강계도>(1914)에는 운현궁 별궁으로 표시되어있고, <경성도>(1924)에는 이준공(李埈公) 별저(別邸)로 나오고 있음을 미루어 1920년대까지 유지되다가 1930년대 이후 서서히 훼손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이 된다.(1936년 도시계획에 의해 공덕리가 경성부로 편입되었고, 뒤이어 조선총독부 소유 국유지화하면서 훼손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1953년에 동도중학교가 들어서면서 교사 확장으로 본격적인 철거가 진행되었다. 이유야 어떻든 아소정 터는 학교 측에서 볼 때 당당한 문화유적의 자취인데 왜 정문 옆 후미진 구석에 슬그머니 표석을 세워놓았는지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마포구 백범로 139(염리동 150)에 위치하고 있는 동도중학교와 서울디자인고등학교 정문을 지나자마자 오른쪽 주차 게이트 옆 담 밑에 아소정 터 표석이 세워져 있다. 지하철 5호선 공덕역 2번 출구로 나와 서강대학교 방향으로 도보 5분 거리이고, 버스 편으로는 110, 163, 604, 740(간선), 7016, 7613(지선), 마포 10번 마을버스를 타고 동도중학교 서울디자인고등학교 앞에서 내리면 바로 정문이 보인다. 봉원사는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4번 출구에서 7024번 버스를 타고 숲속한방랜드 앞에서 하차하여 도보 3분 거리에 있다.

■ 아소정터 표석 찾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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