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8년 신라는 고구려를 백제에 이어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하였다.이전까지 삼국은 주도권 쟁탈전을 벌였다. 때로는 치열한 전쟁의 모습을, 때로는 화목한 형제처럼 사이좋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한강 유역을 비롯한 중부 지방 일대에는 아직까지도 당시의 그러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7세기에, 동북아시아의 정세는 돌궐-고구려-백제-왜로 이어지는 남북세력과 수(당)-신라의 동서세력이 충돌하는 형세를 이루게 된다. 7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삼국 간의 전쟁은 급박하게 전개되었다. 백제는 성왕때의 원한을 갚고자 끊임없이 신라와 전쟁을 벌였으며 의자왕 시기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하였다.
642년 신라의 요충지였던 대야성과 서부지역 40여성이 함락되면서 신라는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았다. 이에 김춘추는 고구려의 연개소문과 담판을 지어 화친을 도모하려 했으나 오히려 인질로 사로잡혔다 간신히 탈출하였다. 이후 신라는 수나라에 이어 들어선 당과 제휴하는 길을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공격해 함락하였으며, 뒤이어 의자왕이 피신한 웅진성까지 함락해 항복을 받아냈다.
다음해 661년 당나라군은 다시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고구려의 거센 저항에 7개월만에 후퇴하였다. 그러나 665년 연개소문이 사망한 뒤 지배 계층에서 분열이 일어나 결국 668년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이후 백제, 고구려 유민들은 망국을 부흥시키려는 운동을 일으켰다. 복신, 도치, 흑치상치는 백제 왕족 부여풍을 옹립하고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켰으며, 고구려는 검모잠, 안승, 고연무 등이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부흥 운동 역시 나당연합군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후 고구려 부흥 운동은 요동지방에서도 끊임없이 시도되어 발해 건국과도 연결되게 된다.
당은 백제에 웅진도독부를, 고구려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신라를 계림도독부로 지정해 한반도를 장악하려 했다. 이에 신라가 항쟁하여 당의 침입을 물리치면서 비로소 삼국통일을 완성하게 되었다. 나당간의 전쟁은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고 고구려, 백제 유민들도 참여하여 동족간의 의식을 고취시켰다는 의의가 있다.
신라에 의해 이룩된 삼국통일은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오고 삼국이 하나의 민족 공동체를 형성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외세를 끌어들인 점이나 고구려의 영토를 상실한 불완전한 통일이라는 부정적인 측면이 함께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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