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살았던 사회적배경
그리스 미술 레오나르도나 미켈란젤로의 까다로운 성격에 비해 부드럽고 사교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와 같은 광범위한 지식도 미켈란젤로의 정력도 소유하지 않았으나 뛰어난 대인술로 곧 영향력있는 후원자들의 눈에 띨 수가 있었다. 비록 삼십대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지만 전성기르네상스 거장들 중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았던 라파엘로는 교황 율리우스의 요청대로 로마로 오기 전 다빈치의 많은 작품들을 보았으며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또 다른 그의 스승인 페루지노로부터 전체의 균형을 깨뜨리지 않고 공간의 깊이를 표현한 정돈되고 우아한 그림을 그리는 방법도 터특하였다. 그 결과 그는 레오나르도의 서정성과 미켈란젤로의 극적이며 회화적인 풍요한 화풍을 결합한 견고한 미술을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라파엘로의 감미로운 그림들을 보노라면 우리는 그가 큰 어려움없이 단숨에 그림을 그려낸 것처럼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외견상 단순하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의 작품은 세심한 계획과 엄청난 예술적 지혜의 결과물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라파엘로가 추구했던 것은 르네상스 미술이 줄기차게 찾아왔던 이상적인 아름다움의 완성이었다. 당시 자연의 충실한 재현을 중요시 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도 역시 나름대로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고대 고전시대의 이상미를 구현하려고 했다. 그가 성공한 것은 바로 이런 과정에서 잃기 쉬운 생명감과 성실성을 확보하므로 자신의 그림을 이상화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으로는 성모상의 원형이자 르네상스 고전을 대표하는 <그란두카의 성모>와 고대 그리이스 때 플라톤이 세웠던 아카데미를 재현한 <아테네 학당>, <교황 레오 10세의 초상>, <요정 갈라테아> 등을 비롯하여 시스틴 성당에 그려놓은 일련의 벽화를 들 수 있다. 그 중 <아테나 학당>은 그가 존경해 마지 않았던 선배예술가인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에게 바친 그의 경의를 보여주고 있는데 화면의 중앙부에서 걸어나오고 있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보면 특히 플라톤의 모습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초상을 발견할 수 있다. 처음에는 미켈란젤로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위치에 그려넣으려 했으나 성격에 있어서 철학자이기보다 예술가인 미켈란젤로를 아리스토텔레스와 동일시할 수 없었으므로 그를 앞으로 끌어내려 턱을 괴고 고민하고 있는 철학자의 모습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한편 이 벽화의 오른쪽 가장자리에서 그리스의 천문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 배화교의 창시자인 조로아스터 등에 들러싸인 젊고 잘 생긴 청년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라파엘로 자신의 모습이다. 라파엘로의 승리는 전성기 르네상스의 형식주의로 귀결된다. 결점없는 형식적 완전함은 고통과 번뇌로 가득 찬 미켈란젤로의 작품과 대조적이며 무엇보다 교황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로마에 풍미한 궁정취향을 반영하고 있다. 이상적 형식을 구현한 라파엘로의 작품을 알고 있는 후배들로서는 르네상스가 추구해온 이상미가 그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더 이상 그것을 추구한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전성기 르네상스가 절정에 도달할 즈음 나타난 형태의 기이한 왜곡과 변형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형성된 것이며, 파르미지아니노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마니에리즘의 한 원인을 제공해 준 작가가 라파엘로일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지오르지네>피렌체에 필적하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던 번영의 도시 베네치아의 풍부한 색채로 이루어진 그림을 그린 작가들의 대표격// 지오반니 벨리니의 제자로서 색채와 빛의 화가로 부를 수 있을 만큼 신비로우면서 불가해한 그림을 남겼다.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폭풍우>에서 풍경은 단순한 배경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주제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사물과 사람을 미리 그려 놓고 나중에 공간 속에 배열한 것이 아니라, 자연, 땅, 나무, 빛, 공기, 구름 그리고 도시 풍경 및 나무들과 인간을 통틀어 하나로서 진정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느 의미에서 이는 거의 원근법의 발명에 맞먹는 새로운 신비로 향해 내딛는 첫걸음이라 할 만하다. 왼편의 목동과 거의 벗은 상태로 아기를 안고 있는 젊은 어머니, 불길한 하늘의 분위기와 멀리 보이는 도시, 그리고 폐허의 흔적은 이 작은 작품을 거의 초현실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내용이 아니라 바로 빛에 의해 투명해진 대기와 영롱한 색채인데 이로부터 회화는 소묘에 채색을 더한 것 이상이 되었다. <티치아노> 베네치아 색채파 화가 <우르비노의 비너스> 후에 올랭피아에 영감을 줌 티치아노는 색채를 다루는 데 뛰어났으며 초상화 작가로 유명했다. 그에 의해 세계를 빛과 색채의 구성이라고 보는 회화양식이 수립될 수 있었으며, 그 전통은 루벤스를 이어 낭만주의와 인상주의에 의해 계승되었다. 매너리즘 기교적, 타성적 스타일 (메마른 형식주의)// 내적 통찰력을 높이 평가한 광법위한 운동의 특별한 형식으로서 인정되고 있다. *매너리즘에 대한 재평가 '정신사로서의 미술사'를 주창했던 막스 드보르작(Max Dvorak)으로 하여금 예술사에서 정신주의적 경향들의 중요성을 평가하도록 하였고, 매너리즘은 그러한 경향들의 승리를 파악할 수 있게 했던 예술적 체험으로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결국 매너리즘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방, 변형, 왜곡은 '정신의 결여'가 아니라 전혀 상이한 새로운 매너리즘 정신에 기인한 것이었다. 즉, 현실을 의도적으로 변형시키는 매너리즘의 주지주의적 경향은 종교적 체험의 심화이자 내면화였으며, 인생을 파악하는 새로운 정신세계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매너리즘을 최초의 근대적 예술양식 즉, 문화적 문제와 직결된 것임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매너리즘의 주관적, 신경질적 긴장은 형식이 삶과의 투쟁에서 무력해지고 예술이 영혼없는 아름다움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의 표현이었다. <롯소 피오렌티노>-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인물들은 심히 동요되고 있으나 얼음과 같은 갑작스럽게 분 찬바람에 응결된 듯 굳어 있다./내적 불안과 환상적 양식 <파르미지아니노> -자회상-어떤 심리적 동요도 보이지 않는다. 스푸마토에 덮여있고 볼록면의 거울에 의해 왜곡되어 있다. -긴목의 마돈나-과거의 그림에서는 볼 수 있는 조화와 안정을 의식적으로 기피하고 있음. 완벽한 조화에 대한 고전적 해결방식을 제시한 전통적인 수법만이 유일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자 했다는 점에서 그의 현대성을 찾을 수 있다. <브론치오>-엘레오노라 디 톨레도와 아들 지오반니 데 메디치-아낌없이 치장한 의상뒤에 굳은 듯 움직이지 않는 인물은 정상적 육체보다 긴목의 마돈나와 더 닮았다. <틴토렛토>베네치아 출신//매너리즘 정신의 선구자 격으로 묘사의 장면이 측량할 수 없는 무한한 우주의 공간으로 확대되고 있다//반 고전적인 면과 우아한면의 두가지성격을 그의 작품 속에 결합시켰다. -최후의 만찬- -빌라도 앞에선 예수- <엘 그레코>베네치아화파의 영향을 받음. -오르가스백작의 매장-은 변형과 불균형, 과장 등을 통해 매우 깊고 섬세하며, 신비로운 내면성을 지닌 지상과 천상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드라마를 보여줌//극단적 축도법으로 상부의 공간이 무한한것같은 환각을 얻기위해... 초상화-엘그레코의 친구이자 시인//약하고도 표현이 풍부한 손, 감성적인 입, 타는듯한 눈을가진 창백한 얼굴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강렬한 정신적 열정을 준다. <코레지오>색과 빛을 사용하여 형태에 균형을 주고, 보는 사람의 시선을 일정한 방향으로 인도하는 새로운 명암법을 제시하였으며, 특히 프톨레마이오스적 천동설에 바탕을 둔 원근법의 과학적 안정성을 화면 속의 모든 물체가 중력의 법칙과 관계없이 허공 중에 붕붕 떠다니는 듯한 벽화를 그렸다. -성모의 승천-프레스코화//환각적 원근법의 걸작 <사볼로> <첼리니> <볼로냐> 북유럽 르네상스 르네상스 운동이 이탈리아에서 성공하고 있을 15세기에도 북유럽 지역은 여전히 고딕 전통을 충실하게 고수하고 있었다. 즉 반 아이크 형제의 위대한 혁신에도 불구하고 미술은 여전히 과학의 문제라기보다 관습과 관례의 문제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승리를 구가하던 수학적 원근법의 이론, 과학적 해부학의 비밀, 로마 유적들에 대한 연구는 북유럽 거장들의 평온한 정신을 동요시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두 세계는 완전히 단절된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얀 반 아이크와 같은 플랑드르 화가들을 통해 확인한 바 있다. 또한 프랑스의 푸케(Jean Fouquet; 1420-1480?)는 젊은 시절 이탈리아를 방문하였고 1447년에는 로마로 가서 교항의 초상을 그리기도 했다. 로지에 반 더 바이덴 역시 로마를 방문한 적 있으며, 그들은 로마에서 새로운 미술에 대해 경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후기고딕' 성향을 포기하지 않았던 알프스 북쪽의 미술가들은 1500년대를 전후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어섬으로써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탈리아를 제외한 다른 유럽 지역에서 일어난 르네상스적 경향을 통상 북유럽 르네상스로 분류하는데, 이들 지역으로 파급된 르네상스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대체적인 경향은 다소 우울해 보이는 차분하고 냉정한 빛깔, 공간미를 배제한 꽉 찬 구성, 상징이나 알레고리로 가득찬 신비감, 판화의 대중적 보급과 발전등을 들 수 있다. <그뤼네발트>세익스피어 만큼 신비스러운 존재인 그뤼네발트는 후기 고딕양식의 원근법을 구사하여 완강하고 단단한 인물상을 그려냈다. 또한 그는 중세 미술의 목적인 설교를 위한 그림을 지향 <이젠하임 제단화>는 중세적이면서 초인간적인 스타일로 표현된 <그리스도의 책형>과 그 패널 안쪽의 생명을 지닌 것처럼 느껴지는 율동감의 <수태고지>, <합주하는 천사>, <성모자>, <부활>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그리스도의 책형>을 보면 인물상의 크기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그뤼네발트가 르네상스 이래로 발전되어 온 근대 미술의 법칙을 거부하고 인물들의 중요성에 따라서 그 크기를 변화시켰던 중세와 원시 시대의 원칙들로 의도적으로 되돌아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을 이탈리아에서 그려진 그리스도의 책형과 비교해보면 뒤틀리고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고딕 조각작품을 보는 것처럼 야만적으로 비쳐질지 모르지만 육체의 고통 앞에 몸부림치면서도 구원의 단발마를 터뜨렸던 예수의 인간적 고뇌와 상처를 정직하게 그려내고자 했던 작가의 리얼리즘을 확인할 수 있다. <뒤러>뒤러는 헝가리에서 이주하여 번창하던 도시 뉘른베르크에 정착하였던 금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여준 화가로서 뉘른베르크에 있던 볼게무트의 공방에서 수업하였고, 당시 독일에서 명성이 있던 숀가우어에게 배우기 위해 그의 공방으로 찾아갔으나 숀가우어는 이미 사망한 뒤였으므로 그의 형제들과 함께 지내다가 학문과 서적 교역의 중심지였던 스위스의 바젤로 가서 목판 삽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선진문화를 흠므하였던 그는 25세때 알프스산맥을 넘어 북부이탈리아를 방문하였는데, 그는 이탈리아의 회화양식 뿐 아니라 미술가의 개념, 지위까지도 북부에 전하고자 하였다. 베네치아에서 돌아온 다음 그의 그림은 소용돌이 치는 필세와 몸부림으로 가득 찬 환상적인 장면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판화 속 인물들은 만테냐의 판화에서 배운 것이고, 자화상 등의 얼굴도 완벽한 균형의 이론에 의해서 구성했다. 고전 미술이 부여했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인체의 표현에도 관심을 쏟은 뒤러는 무엇이 인체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인가를 알기 위해 인체의 비율에 대한 연구에 전념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인체의 올바른 균형과 조화를 찾기 위해 인체를 과도하게 길게, 또는 넓게 그려 인체를 왜곡하기도 하였다. 뒤러는 어떤 예술가보다 끈기있고 충실하게 자연을 묘사하였는데, 이는 성경의 이야기를 더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종교개혁운동의 진원지인 뉘른베르크 출신으로서 마틴 루터의 신봉자이기도 했던 뒤러는 새롭고 위대한 프로테스탄트 예술을 창조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종교계 지도자에게로부터는 우상숭배의 위험등의 이유로 환영받지 못했다. 뒤러의 <네사도>는 독일 르네상스 회화를 대표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모습을 그려온 뒤러는 20대의 젊은 모습에서 세계로 향한 탐구열에 불타는 인문학자풍으로 삼십대로 막 들어설 무렵인 1500년에 제작한 <자화상>에서는 정면을 향한 엄숙한 자세와 그리스도를 닮은 이상화된 용모를 통해 통상적인 자화상의 영역을 초월한 경지를 보여주었다. 판화가로서도 잘 알려진 뒤러는 독일의 목판화 기법에 이탈리아 동판기술을 도입하여 섬세하고 꼼꼼한 선묘가 돋보이는 명확한 표현을 하였다. 특히 인체에 있어서 이탈리아 거장들의 업적이었던 근육이나 동물들의 움직임에서 비롯되는 근육이완과 함께 배경에서도 섬세한 끝마무리를 통해 화면의 완결성을 추구했다. 그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과학적인 원근법과 아름다운 인체에 대한 완벽한 표현을 가능하게 했던 해부학들이었다. 또, <멜랑꼴리아>, <4인의 사도>, <네 기질>등에서 보이는 함축적인 상징성은 북방 르네상스의 기질을 보이며 신비감을 자아낸다. <한스 홀바인>한스 홀바인은 영국에서 궁정화가로 활동했는데, 그는 북부 유럽의 세부표현과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위대성과 견실성을 교묘하게 조화시킨 초상화를 그렸다. <헨리8세>는 의상이나 보석이 정밀하게 그려져 있으며 인물의 성격까지도 잘 드러나 있다. 홀바인의 대표작인 <대사들>은 명예와 인생의 허무를 상징하는 소품들과 함께 두 명의 인물 앞에 형태를 알 수 없는 왜곡된(anamorphose) 물체를 그려놓았는데 비스듬한 위치에서 이 물체를 보면 해골의 모습이 나타난다고 한다. <피터 브뤼겔>플랑드르 최대의 풍속화가. 이탈리아 매너리즘의 우주적 세계관이 브뤼겔에게 간접적으로 계승되었으나, 엘 그레코의 정신주의와는 관계없는 범신론적 자연주의의 세계를 보여주는 작품을 남겼다. <알트도르프> 근대 풍경화의 개척자로 분류할 수 있는데 그는 숲과 산 속을 누비고 다니며 폴풍우에 시달린 나무와 바위의 형태를 연구하기도 했다. 그가 남긴 수채화와 동판화, 유화 몇 점에는 아무런 이야기도, 인물도 남아 있지 않고 오직 작가가 느끼는 풍경만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회화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지금까지 주제를 부각시키는 배경으로만 도입되었던 풍경이 독립된 장르로 확립될 수 있는 징후가 그의 작품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북유럽 특유의 고딕적 전통과 불안이 깃들여 있어 훗날 낭만주의 시대에 활동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의 을씨년스러우면서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신비로운 풍경화의 전조를 보여준다. 그가 남긴 작품 중에서 <이소스의 전투>는 알렉산더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 사이에 벌어진 역사적 전투장면을 그린 것으로서 치밀하며 집요한 표현에 있어서 플랑드르 화가 얀 반 아이크에 필적하는 작품임에 분명하다. 바로크 이탈리아, 플랑드르, 스페인의 바로크 <카라밧죠>본명은 미켈란젤로 아메리기(Michelangelo Amerighi)이며, 열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지고 있다. 그의 냉철한 관찰과 묘사에 바탕을 둔 대담하고 가식없는 자연주의가 그의 주문자였던 고위성직자들의 취향을 충족시켜주지는 못했다. 그들은 카라밧지오가 '위대성', '고귀함'을 결여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사례로 카라밧지오가 교회로부터 주문을 받아 납품했던 <복음서를 저술하고 있는 성 마태>가 거부되자 교회의 요구에 맞춰 같은 주제의 그림을 제작해야 했던 것을 들 수 있다. 카라밧지오의 이러한 사례는 중세 이후 자신의 예술적 특성으로 인해 실패했고 훗날 예술가로서의 명성을 안겨준 바로 그 특성 때문에 동시대인들로부터 반감을 샀던 최초의 예술가였음을 알려준다. 옆의 작품은 카라밧지오의 <그리스도의 매장>으로서 빛을 이용한 극적 효과의 연출과 함께 그의 자연주의적 제작방법을 보여준다. <안니발레 카랏치>매너리즘의 난해하고 복잡한 상징주의를 간단하고 명백한 알레고리로 바꿔놓은 카라치 형제들의 업적으로 볼 때 일체의 '근대적' 교회예술의 역사가 이들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십자가 위의 후광, 백합, 두개골, 사랑, 희열, 고뇌 등이 그려진 근대의 성화는 바로 이들 형제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베르니니>조각가의 아들로 태어난 베르니니는 어린 시절부터 조각가로서의 수업을 받으며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바로크 조각의 특징인 무대장식과도 같은 현란한 미술은 주로 베르니니에 의해 창안된 것으로서 그것을 <성 테레사의 환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성 테레사는 16세기의 수녀로서 그녀가 본 신비스러운 환영을 글로 쓴 유명한 책을 남겼다. 그 책에서 그녀는 천상의 환희를 느낀 순간을 이야기하면서 주님의 한 천사가 황금으로 된 뜨거운 화살로 자기 심장을 꿰뚫자 아픔과 함께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희열로 충만됨을 느꼈다고 적고 있다. 베르니니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이 순간으로서 우리는 성녀가 구름을 타고 황금빛 햇살의 형태로 위로부터 쏟아지는 빛줄기를 향해서 하늘로 올라가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에로스의 형상으로 표현된 천사가 공손하게 그녀 곁으로 다가고 있으며, 성녀는 기절한 채 황홀감에 젖어 있는데 마치 그녀가 허공 중에 떠있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베르니니의 작품에서 특징적인 열렬한 환희와 신비로운 황홀경은 고전적인 방식으로 인정되어 온 품위있는 옷주름으로 흘러내리게 하지 않고 흥분과 움직임의 효과를 보다 강조하기 위해서 옷자락이 몸부림치듯 휘날리게 표현한 것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 밖에도 베르니니의 대표작으로는 로마의 보르게제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다윗>, <포르세포네를 강탈하는 하데스>, <아폴로와 다프네> 등을 비롯하여 교황 우르바누스8세의 후원을 받아 제작한 바티칸 성당의 교황무덤조각과 원형 열주 위의 조각들, 안젤로 다리 위의 조각 등을 들 수 있다. <피터 파울 루벤스>루벤스는 고급관리의 아들이었고, 어린 나이에 이미 최상의 교육을 받았으며 궁정에 나가 사회인으로서 교육을 마무리 지은 사람이었다. 17세기 바로크의 가장 전형적 특색의 회화를 완성한 화가로 명성을 얻은 루벤스는 그의 예술적 재능 못지 않게 조직가로서 그의 재능이 큰 역할을 했다. 루벤스는 푸생과 클로드 로랭보다는 한 세대 위였고, 화려한 궁정적 바로크를 추구한 귀도 레니와는 비슷한 연배였다. 그는 이십대 초반에 로마, 제노바, 만토바 등에서 고전주의의 명작들을 연구했지만 기질적으로 플랑드르 사람이었다. 즉, 다채로운 사물의 표면에 대한 관심은 그로 하여금 화가의 임무는 자기 주위의 세계를 그리는 것이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그림으로써 보는 사람들에게 사물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작품에 특징적인 밝고 풍만한 육체, 풍부한 색채와 장대한 구성의 조화, 생동감있은 표정, 현실감과 고대의 정취는 그를 당대 최대작가로 부상시켜 놓은 근거이기도 했다. 그는 인물화뿐만 아니라 종교화, 신화화, 초상, 역사, 풍속, 풍경의 표현에 능하였으며, 프랑스 왕정과 결혼한 메디치 집안의 카테리나를 위해 제작한 연작은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옆의 작품은 헤라(유노), 아테나(미네르바), 아프로디테(베누스)가 트로이의 왕자인 파리스에게 미의 여신으로 선택받는 장면을 그려놓은 것으로서 루벤스의 관능적이면서 감각적인 화풍이 화려한 색채 아래 구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방패는 아테나, 에로스(큐피도)는 아프로디테, 공작은 헤라를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황금사과를 든 파리스 뒤에는 전령의 신 헤르메스(메르쿠르)가 제우스가 미의 여신의 선택권을 파리스에게 위임했음을 알리고 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루벤스가 스페인을 여행하던 도중 만난 스페인의 젊은 화가였던 벨라스케스는 마드리드의 필립4세의 궁전화가였는데 로마를 가 본 적은 없었으나 모방자들의 작품을 통해 카라밧지오의 자연주의를 이해하고 있었다. 루벤스의 충고로 거장들의 그림을 연구하기 위해 휴가를 얻어 로마여행을 다녀온 벨라스케스는 그후 줄곧 스페인의 궁정화가로서 활동했다. 벨라스케스는 대범한 터치로 시각적인 인상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사실적인 기법을 동원해 왕족의 초상화를 제작하는 한편 왕실에 소속된 곡예사는 물론 평범한 사람들의 집단 초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의 대표작으로 <시녀들>이 있다. 그의 작품은 15세기의 플랑드르 화가 얀 반 아이크가 그린 <아르놀피니의 약혼>처럼 사진과도 같은 현실의 재현이란 특징을 보여준다. 특히 부모를 만나기 위해 시종들을 데리고 벨라스케스의 작업실로 찾아온 귀여운 마가리타 공주를 주인공으로 그린 이 작품은 작업실에서 모델이 된 국왕부처의 모습이 거울 속에 반영되고 있어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과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켰으며, 미셀 푸코의『말과 사물』의 한 장을 이 작품의 해석으로 할애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반 다이크> <프란스 할스>젊은 시절 성공하여 부와 명예를 누린 렘브란트가 잇달은 가족의 죽음과 사업의 실패로 쓸쓸한 노년을 보낸 것처럼 네덜란드의 자본주의 체제 아래 성공하였으나 노년엔 가난으로 고통받다 결국 양로원에서 비참하게 최후를 마친 화가였다. 그의 독창적 화풍은 즉흥적이면서 활달한 붓질에서 발견할 수 있는 호방에서 잘 드러나고 있는데 이러한 경향은 붓질을 노출하지 않고 표면 위에 차곡차곡 쌓아올린 네덜란드 회화의 전통을 벗어난 것이었다. <렘브란트>네덜란드의 라이덴에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렘브란트는 부친의 뜻에 따라 라이덴대학으로 진학하였으나 화가가 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암스텔담의 피터 라스트만의 제자가 되었다. 초상화가로 명성을 얻은 그는 정물화를 제외한 모든 소재의 표현에 탁월하였으며, 특히 빛을 표현한 강한 명암 대비로 극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독자적 구성과 독특한 명암, 깊은 정신미를 통해 독자적 예술 세계를 형성하였다. 종교화, 신화화, 초상화, 풍속화, 풍경화에 능하였는데 물감을 두껍게 발라 그 자체가 빛나는 화면을 만들어 내는 유화 기법의 새로운 면을 보였으며. 에칭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 렘브란트의 경향은 카라밧지오의 영향을 반영하는 전기와 인간심리의 심층을 비추는 깊이있는 초상을 추구한 후기로 나눠진다. 특히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여 내면에 잠재된 심리상태의 미묘한 변화과정을 추적한 많은 자화상을 남겼다. 옆의 작품은 렘브란트가 그린 <십자가를 들어올림>과 <십자가에서 내림>인데 루벤스가 그린 <십자가에서 내림>과 비교해 보면 이 두 작가의 표현의 차이를 알 수 있다. 그의 대표작의 하나인 <야간순찰>은 <툴프박사의 해부학 강의에서 보여준 렘브란트의 예술적 성과를 바로크로 발전시키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으로써 빛의 대조에 의한 원근의 표현이 돋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이 너무도 개성적이고 파격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이후 초상화 주문이 감소했을 뿐만 아니라, 시청에 걸기 위해 잘려지는 불운을 당했으며, 1970년대에는 한 정신병자에 의해 파손되기도 했다. 렘브란트는 화가로서 뿐만 아니라 에칭에서도 명암대비의 극적 효과를 통해 자신의 예술성을 발휘하였으나, 50대로 접어들자마자 파산선고를 받아야 했던 그는 비극적인 말년을 보내었던 대표적인 작가이기도 하다 <야곱 반 로이스달> <헤다> <얀 스테엔> <베르메르>17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네덜란드 화가로서 주로 가정의 조용한 실내에 있는 인물을 그렸다. 당시 풍속을 파악할 수 있는 그의 작품은 일상적 행동의 주인공을 안정된 빛 속에서 마치 정물처럼 표현한 것으로써 그는 빛의 반사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하얀점을 하일라이트로 찍는 독자적인 기법을 창안하였으나 할스처럼 격심한 생활고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진다 베르사유 시대 <니콜라 푸생>프랑스 출신인 니콜라 푸생은 르네상스 고전주의를 흠모하여 평생을 이탈리아에서 지내다시피 했다. 그는 로마를 제2의 고향으로 삼고 거기에서 살며 작품을 제작했는데 순수하고 장엄했던 고대 도시들의 정경을 묘사하기 위해 정열적으로 고전시대의 조각상들을 연구했으며, <아르카디아에 나도 있었다>란 작품은 이러하 노력의 결과로 탄생한 작품이었다. <루이 르 냉> 로코코 미술 <앙트완 와토> <시메옹 샤르댕> <윌리엄 호가스> <토마스 게인즈보로> 신고전주의 태동 르네상스 시기에 이미 고전은 motive가 되었었지만 바로크의 눈속임(tropme l'oeil)과 로코코의 파상성으로의 타락은 고전적 요소들을 사라지게 했고 루이15세에 이르러 "로코코에 대한 실증" 을 느끼게 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헤르콜라네움(Herculaneum)'과 '폼페이'의 발굴은 고전적 취미를 부추겼으며, 새로이 비약하는 시민계급의 '진보적 이성주의'와 '도덕주의' 그리고 나폴레옹시대의 '영웅주의'의 시대분위기와 맞아떨어지며 고전주의는 부활하게된다. 신고전주의, 혹은 유사고전주의라는 조롱조의 표칭에도 불구하고 고전주의는 조각에서는 '카노바', '우동'에 의해, 회화(역사화와 초상화)에서는 다비드와 앵그르에 의해 구현되고, 빙켈만이 "미술의 본질은 '고귀한 단순성과 조용한 위대함'"이라고 역설한 <그리스 작품들의 모방에 관해서>에 의해 힘을 받앗다. 결과 로코코적 양식은 사라졌으며 곡선은 직선으로, 감가적으로 조직된 표면은 매끈한 조각적 형태로, 파스텔풍은 명확한 윤곽선이 있는 강한 색으로 대체되었고 이라한 고전적 양식은 "true style" "correct style", "Risorgimeuto(재생)"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었다. (前 다비드의 고전주의 화가와 작품) ∙R.멩스[파르낫소스]-빌라 알바니의 천정 프레스코 :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발굴의 드로잉에 영감을 얻음. 바로크적 눈속임과 깊은 환각적 공간을 거부했다. 푸생을 연상시키는 조각된 부조처럼 인물들을 회화평면에 평평하게 그렸다. ∙벤자민 웨스트[게르마니쿠스의 유해와 함께 브룬디시움에 상륙하는 아그립피아] : 빙켈만개열의 개념을 따랐음이 잘 나타나다. 다비드후기작처럼 box-like의 깊이를 단축시킨 배경, 카라박지오적 광선이 나타난다.//이후에 벤자민의 [울프장군의 죽음]은 고전주의의 완성기. [창백한 말위의 죽음의 신]은 낭만주의의 효시가 된다. [퀘벡주에서의 울프장군의 죽음]1770 : 울프장군이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처럼 묘사된 영웅주의. 인물의 움직임은 고귀하고 진지하며 표정은 용감스럽다. 앞에 있는 인디언은 미대륙이라는 현장을 보여주고 있고, 주변사람들은 지옷토의 그리스도의 애도와 유사한 모습으로 서있다. ∙존 싱글턴 코플리 [왓슨과 상어]1778 : 상어는 악, 우상기의 창을 든 남자는 선을 상징하는듯하고, 습격당하는 젊은이는 나신(고전적)이다. 마찬가지로 뒤의 흑인은 미국을 상징한다. ∙자크 루이 다비드[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 호라티우스 형제는 로마의 개국자이다. 프랑스 혁명 5년전에 그려진 이그림은 다가올 혁명의 정신을 예고한 작품이라 평가받고 있으며 혁명전야의 정신적 풍토를 반영한 작품으로 발표당시 열광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소크라테스의 죽음]1784 : 위와 마찬가지로 혁명전야의 정신을 반영한 작품. 독배를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소크라테스의 자기 희생정신이 새시대를 맞이하려는 당시의 프랑스의 정신적 풍조를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스승의 죽음을 슬퍼하는 제자는 12명이 그려져 예수의 제자 12인을 유의적으로 표현 죽음을 숭고화시키고 있고, 한쪽으로 비춰지는 극적인 조명이 극적 효과를 준다. 소크라테스의 침상 앞에 앉은 플라톤은 엔디미온(18,19세기 유행하던 무덤앞 조각으로 죽음을 상징)과 같은 형상으로 앉아있다. //이성신앙의 창시자=소크라테스≒예수. 죽음을 앞두고 슬퍼하는 제자들≒12제자// [마라의 죽음]혁명동지의 죽음이라는 역사적 현실을 직시하는 다비드의 새로운 면모가 보이는 작품. 불필요한 소재를 극도로 생략한 화면은 간결하면서 극적이며 진실감과 긴장감이 흐른다. 영웅인물화의 수작 [뤽상부르 정원의 풍경]1794년 로베스삐에르의 실각으로 투옥된후에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고그린 풍경화억제된 색조이기는 하나, 자연의 미묘한 변화와 그 변화에 따른 광선의 효과 포착은 뤽상부르의 한적함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작가의 심정을 여과없이 표출한다. 풍경화의 모태가 되는 자연주의적 성향의 범례다. [사비나의 여인들]사비나의 여인 약탈이라는 로마의 건국전설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동족상잔의 혁명의 비극을 염두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비드의 그림의 커다란 변화가 보이는 작품인데, 그리의 원천으로 되돌아 가려한다는 그의 말에 일목요연하게 이 변화는 나타난다.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미완성인 작품이었는데 오히려 필촉을 제거하지않음이 주는 생동감이 작품을 더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게 하고 있다. [나폴레옹의 대관식]세밀한 연구의 바탕에서 이루어진 대작이다. 집단초상화와도 같은 인물 묘출의 정확함과 호화로운 질감의 생생함, 그리고 장엄한 실내의 분위기가 완벽하게 일치를 이루어 역사적 기록화의 거대한 기념비적인 작품이 됨. ∙ 쟝 오귀스트 도미니끄 앵그르 : 다비드가 브뤼셀로 망명한 후 실질적으로 신고전주의를 영도한 화가. 다비드의 신고전주의가 '혁명적, 남성적'양식이라면, 앵그르의 그것은 '부르주아적, 여성적'양식이라고 할 수있다. 유연한 선의 율동을 바탕으로한 이상적인 형태미의 형상화에 있으며, 그것을 그는 특히 여체의 순수한 아름다움에서 찾으려 했다. ※앵그르 활동 시기중에 사진기가 발명된다. 사진기의 발명은 회화에 있어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던 역사화와 인물화의 영역, 즉 기록화의 영역을 사진이 뺏아가게 하는데 그러한 이유 뿐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초상화가는 앵그르가 마지막이 되게 된다. 아래의 배르탱의 초상화가 대표적인 예가 되겠지만 초상화가 단순히 닮게 그리는 것이 아닌 성격과 품성을 담는 다는 의미에서 그의 초상화를 위한 많은 데생들이 많은 것을 시사하지만 후에 그의 제자들은 카메라와의 기술경쟁이라는 쓸모없는 소모전에 보다 많은 노력을 들이게 된다. [배르탱의 초상]배르탱은 당시 '논쟁신문'을 발행하던 혁명기의 영향력있는 거물이었다.철저히 사실주의에 입각한 초상이면서 동시에 모델의 신분과 그 사회적 배경을 강하게 표출시켜 하나의 전형적인 남성상을 그려내고 있다. 포우즈에 고심하였던 흔적이 스케치들로 전해진다. ※기타, 리비엘양의 초상, 르블랑 부인의 초상, 도송빌 백작 부인의 초상, 등이 유명 [호메로스 예찬] [발팽송의 욕녀]우아하고 후루눈 듯한 선의 아름다움, 이상화한 여성미와 그 관능성을 추구한 '여성적' 신고전주의. 작품의 전체구도는 매우 강렬하면서도 정연하고 나부는 등을 동리고 앉은 포즈로 다루어지는데 포즈가 엮어내는 선과 형태는 철저히 계산된 것이다. [오달리스크]해부학적 진실을 양식적 아름다움과 곡선을 위해 포기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정상인 보다 척추뼈가 2개 더 있는 여체는 등에서 엉덩이로 이어지는 유연한 선을 만들어 율동적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제목에서 보여주듯 이국적 주제의 사용과 파충류를 연상시키는 여체로 인해 논란을 불러 일으킨 작품 [샘]여체의 전형화된 앵그르적 신고전주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 이 젊은 여성상은 고대의 여신상을 방불케한다. 그리스의 고전기의 정형화된 이상미의 여성? [터어키 욕탕]앵그르가 여태껏 다뤄온 갖가지 포우즈가 다 동원된작품. 에로티시즘이 세계가 아니라, 일종의 추상화된 여성의 관능성. 서로 복잡한 상호관계를 설정하면서, 선과 형태의 일대 아라베스크를 펼쳐보인다. ∙ 앙트완 장 그로 : 다비드를 능가하는 기상넘치는 영웅적 초상화를 그렸다. 다비드는 그로가 자신의 대를 잇기를 원했고, 그로또한 다비드를 존경했지만 바로크로 전향했고, 엄격하게 통제된 신고전주의의 감정억제를 벗어나고자 했다. [아르콜전장의 나풀래옹]드라마틱한 박력이 넘치는 그림 낭만주의의 태동 이성중심, 엄격성의 고전주의는 프랑스 혁명의 자유, 개성의 해방을 포용할 수 없는 양식이며, 따라서 새로운 양식상의 변화를 요구하게 된다. 보다 '자연스럽게'를 외치면서 강력한 열기로 고전주의에 도전한 낭만주의는 자연으로 대변되는 모든것을 추종했고, 이는 실제로는 정서, 감성 그 자체를 숭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예술가를 둘러싼 경제적 환경의 변화와도 그 궤적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는데 고정돤 후원자와 수익보다 시장에 의한 작품의 수급은 경제적으로 예술가를 불안정하게 하긴 했지만 보다 많은 자유를 그들에게 보장해 주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그들은 루카치식으로 표현하자면 이성의 지배로부터 예술의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신고전주의예술이 이성과 동일시 혹은 이성중심을 변호하는 도구로서의 예술이었다면, 낭만주의 예술은 감정과 동일시된다.이 낭만주의적 사조는 그것이 담지하고 있는 주관주의적 성격과 개인의 자율성에 대한 인식 때문에 18,19세기 예술가들의 생에 대한 태도 및 예술표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낭만주의의 시효 ∙벤자민 웨스트 [창백한 말 위의 죽음의 신] : E. Burke 의 '숭고와 미의 개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고찰'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 끔찍한 숭고미, 오히려 아름다움에 반대되는듯한 것을 표현했다. 우르르 몰려오는 의인화된 죽음의 신에 다항하여 투쟁하는 한가족이 주제인 이 그림은 시기상으로 낭만주의 흐름에 40여년 앞서지만 후에 'Burke'의 개념을 따른 낭만주의 초기화가들과 같은 위치에서 파악해야 할 것이다. ∙W.블레이크 [천지창조주] / 스텁스 [말을 덮치는 사자] / 퓨슬리 [악몽] / 카즌즈 [잉크얼룩에 이한 풍경화] ∙ 테오도르 제리코 : 프랑스 낭만주의 회화의 선구자. 낭만주의에 가장 어울리는 소재로 여겨진 말과 기병, 이국적 풍경을 많이 그렸으며, 메뒤즈호의 뗏목은 프랑스에서의 낭만주의회화의 분화구로 간주된다. 한편으로는 사실주의를 앞질러 구현하기도 한다. 낙마로 33세에 요절. [근위 기병 사관]낭만주의에 있어서 안성맞춤의 테마. 전쟁의 박진감넘치는 기병의 동작과 군마의 약동감이 생동감을 자아낸다. [메뒤즈호의 뗏목]대표작. 미켈란젤로의 영향이 눈에 보이는 인체처리와 화면의 구성은 피라미드형의 고전적 도형이다. 당시의 시사적 논란거리를 소재로 해서 비판적으로 담아내어 사실주의의 요소또한 담고있다. [살인광과 광녀]/Fou Assassin/La Folle/ 인간의 본성에 대한 관심과 이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을 볼 수 있는 작품. 제리코는 인간성 그 자체에 대해 신랄한 고발을 하고 있는 듯하며, 그와 같은 인간 고발이 역설적으로 이 화가의 삶에 대한 정열적인 애착을 반증해주고 있다. 낭만파이자 사실파로서의 면모가 보이는 작품 [에프손 경마] 그가 즐기는 말을 소재로한 작품이며 날렵한 생명감과 투명한 채색법 등이 낭만파적 요소를 옅보게 한다. 후대에 이 그림의 말이 달리는 모습이 잘못됐음이 지적되기도 했다. ∙ 외젠 들라크르와 : 낭만파회화를 완성시킨 거장.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상] 이른바 영광의 3일이라고 불리는 7월 27, 28, 29일의 프랑스 혁명을 담은 그림이다. 3색기를 높이처들고 왼손에는 총을 들고 가슴을 드러내고 지상에 굳건히 서잇는 여인은 그림속 장면에 실재하는지 환상인지 알 수 없도록 배치되어 있다. 부상자의 눈은 그녀를 향하고 있으나 진두 지휘하는 듯한 그녀의 몸동작과는 달리 군중들의 시선은 그녀에 모여있지 않다. 다분히 우의적 존재인것이다. [키오스 섬의 학살] 들라크르와의 대표작. 프랑스 낭만주의의 도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작품. 앤그르의 [루이13세의 맹세]와 같은 해에 살롱에 걸려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당연 비난은 맹렬했다. 1822년 그리스 독립선언이라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그리스인에 대한 학살을 담은 그림이다. 격렬한 동세와 착잡하게 얽히는 곡선, 일찌기 볼 수 없었던 색채가 나타난다. [이교도 파샤의 싸움] 낭만주의에 나타나는 이국적 정취가 잘 나타나는 작품. ∙프란시스 고야 [카를로스 4세의 가족] [옷을입은/벗은 마호] [거인] [1808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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