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서양미술사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살았던 사회적배경

草霧 2013. 4. 5. 13:01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살았던 사회적배경

 

 

 

그리스 미술

1) 고졸기 미술
미케네 멸망 후 도리아인이 본토에 정착하고 서해안으로 이오니아인이 모여 살고, 다양한 폴리스를 이루었다. 같은 언어와 종교//서로 경쟁과 전쟁의 역사를 만듦.

코린트 : 부유하고 사치스런 교역의 중심지-화려하고 많은 장식이 특징
스파르타 : 엄격한 군사훈련. 군사적 용맹성
아르고스 : 뛰어난 청동기 기술자 배출
아테네 : 이오니아족의 도시국가//개인적 업적장려, 재능있는 외국인을 끌어들여 우수한 시, 극 예술을 꽃피움.


▶회화 : 신전이나 주거지의 벽을 장식했던 그림들이 모두 없어졌기 때문에 거의 부재하나 도자기위의 그림을 통해 작품들을 짐작할 수 있다. 사회자체가 개인을 중시하므로 개인주의 미술이 발전하고 작품의 통일적 완성을 이룬다. 또 동시에 전사회적인 다양성을 담지하고 있다. 모든 문양이 항아리의 표면에 꼭맞게 넣어져 있다.

흑색상 토기 : 붉은 빛이 도는 진흙에 검정으로 실루엣을 나타낸 그림
백색상 토기 : 흑색상이 축도법을 어렵게 만든다는 깨달음에 검은 바탕에 적색상을 새겨넣는 기법으로 만들어짐

대표적인 작가는 "프시악스"//눈에만 정면성이 남아있다. * 몸의 선을 긋는 방식은 몸뚱이의 구조에 관한 지식과 단축법의 사용의 재능을 보이고 있다.

▶조각 : 이집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청년상(코우로스), 소녀상(꼬레)//한쪽(왼쪽)발을 내고 있는 모습(걷고 있거나 앞으로 전진하는 것은 아니다). 기술적인 것, 비례체계까지 이집트적이다.

기원전 7세기 이후 가끔 만들어지기 시작. 돌로 만들고 채색을 함. 머리털, 크게뜬눈에서 메소포타미아적인 영향도 엿볼 수있다. 개성이 결여되어 있는 육체적 생명력과 완전성의 이상을 나타내는 상이다. (신은 인간에 가깝고 영웅은 신에 가까우니까...)

"아르카익 미소"/재현기술이 뛰어난 실감나는 조상이다. => 대칭(symmetry), 비례(proportion), 조화(harmony)의 원칙정립.

2) 고전기 미술(페리클레스 이후 전후 150년간)
전설적인 조각가 페이디아스(아테나 파르테노스상, 제우스상), 미혼, 폴리클레이토스, 리시포스, 스코파스, 프락시텔레스

균제, 조화, 안정, 비례의 이상미를 구현함으로써 이념과 현상, 내용과 형식의 통일을 이루게 된다. 당시의 예술가들은 결점을 가진 개성있는 개인을 표현하는데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 결과 주제는 이상화된 여성이나 남성으로 가능한한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콘트랍포스트의 정립

3) 헬레니즘 미술
헬레니즘이란 넓은 의미에서 고대 그리스 문화를 창출했던 그리스인들이 자신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했던 '헬레닉'이란 말과 연관되지만, 알렉산더의 사망으로부터 로마가 그리스를 최종적으로 정복했던 시기까지의 그리스 시대를 지칭하는 용어로 통용된다. 즉 알렉산더의 동방원정과 함께 형성된 새로운 문화를 그리스문화로 부르지 않고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들이 동방의 나라에 세운 제국의 이름을 따서 헬레니즘이라 부른 것이다.

고전기의 엄격한 비례, 조화와 균제의 원리에 바탕을 둔 단아하고 우아한 아름다움 대신에 격동적이고 극적이며 관능적인 성격이 두드러진 예술이 나타났다. 자연이나 현실의 관찰이 세밀해지고 초상조각의 발달과 함께 충실한 사실묘사를 선호하는가 하면 소재범위도 다른 인종, 노인, 동물, 그 밖의 세속적인 것으로 넓어졌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문화의 중심이 아테네나 스파르타 등의 그리스 본토에서가 아니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소아시아의 페르가몬, 시리아의 안디오키아 등으로 옮겨갔다. 도시국가의 자유로운 시민이 아니라 거대한 제국의 백성이 된 그리스인들이 세운 이 도시들은 그리스 문화를 모범으로 삼았으나 고전기의 그리스와는 완전히 다른 취향으로 그들의 도시를 장식했다. 헬레니즘 제국의 통치자들에게 도리아나 이오니아식의 단아한 건축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었으며, 그들은 보다 호사스럽고 장식이 풍부한 코린트 양식을 선호했다.

에투르리아
▶북이탈리아 포강유역, 중부이탈리아로 진출 토스카나지방과 티베르 강 인접의 움브리아 평야에 걸쳐 정착.

▶로마에 의해 정복되지만 예술적 재능이 있어서 로마인보다 훨씬앞서서 로마의 문화건설에 많은 영향을 줌.

▶이집트인과 같은 내세의 생활에 중점을 둔 문화//사자, 장제에 관심을 가짐(분묘를 그들의 균제, 조화, 안정, 비례의 이상미를 구현으로써 이념과 현상, 내용과 형식의 통일을 이루게 된다. 주택 내부를 모방해서 꾸몄다.) => 분묘의 벽화가 그들의 생활을 가장 잘 나탄어 준다.

▶석관뚜껑에 묘주의 조상을 새기거나 부처(夫妻)의 와상을 조각

▶건축의 특징은 높은단(Podium)위에 신전을 세우고, 현연랑의 깊이가 내연(Cella)과 흡사. 기둥과 지붕은 목재, 박공과 장신은 테라코타//천정과 벽을 화려하게 단청하고, 천장에는 주로 기하학적 문양, 벽화는 장례식장면과 무속 및 운동경기장면을 묘사//아치(Arch)도 있다.

▶전체적으로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으나 그리스의 그것과 같은 이상적인 것 등의 정신적인 내용은 결여된 형식적 모방이었고, 거기에 그들 특유의 신앙, 습속이 결합된다.


로마미술
로마인들이 그리스의 것을 답습하고 예찬했으며, 그리스의 대가들의 이름 만큼 로마의 미술가들이 알려진 바가 없어 그 특징을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 많다.

▶조각<실용적, 현실적>
그리스 원적, 모조작, 그리스개작으로 호화스럽게 개인의 주택을 장식했다. 그러나 로마의 중요조가은 이런 것이 아닌 조상의 초상조각이다. 그리스적 이상미와 닮게 표현하는 면에서는 오히려 퇴보라고 볼수 있으나, 성격이 묘사되는, 심리파악에 의한 모델링이 나타나는 것이 이시기 조각의 특징이다. 이러한 조상의 초상조각은 귀족들의 선조상으로 초기에는 밀랍으로 제작되지만 후대에는 보다 오랜 보존을 위해 대리석으로 기록에 남기려 한다.

그리고, 제정이후에는 아우구스투스상과 같이 전혀 다른 예술적 의도가 보인다.

왕의 신격화 이를 위한 영웅적으로 이상화된 모델링 // 공화정기의 특징이던 세밀한 안면의 묘사는 사라지고 부드럽고 신과같은 초상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프리마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상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트라야누스 황제 기념비
>티투스 개선문의 부조 : 황제들이 스스로의 업적을 과시하기위해 만든 조각이다. 이러한 부조조각에는 배경을 여백과 같이 처리 무한한 원근감을 주고 후경과 전경의 인물처리를 다르게 함으로서 원근감을 살리는 기법이 나타남. => 이러한것들은 그리스 부조와 신화속의 일이지만 이런 전승기념 부조는 일회적 사건의 정확하고 구체적인 세부묘사로 이루어져 있다.(기록으로서의 조각)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 :
>콘스탄티누스 대제 : 눈을 크게 그려 영적인 존재(성스럽게...)


▶회화
조각과 마찬가지로 조상 숭배가 이룩한 초상화의 역할도 컸다.

(밀랍에다 안료를 정착시키는 납화법(encaustic)기법 사용.)

벽화는 <1양식><2양식><3양식><4양식>으로 변화를 경험한다.

+-<1양식> 회화와는 무관한 단순한 채색석고 벽면

+-<2양식> 방의 경계가 뒤로 물러난 듯이 보이거나 아니면 그것이 완전히 제거된 듯이 +-+보이도록그리는 것 (환영주의)

| +-<3양식> 벽의 평평하고 한정적인 특성을 강조하고 미묘하고 복잡한 세부를 즐기며, 합 | | 리적, 논리적 외양을 거부

| +-<4양식>다시 환영주의로 회귀한 것

+--▶프레스코, 모자이크로된 이러한 회화양식은 감각적, 신비적, 일상적 주제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건축

-그리스의 주식을 변화,발전시킨 것 : 이오니아식과 크린트 식이 주두를 짜맞춘 콤포지트식

-에트루리아건축에 유래한 것 : 토스카나식 주두

-아치형식과 궁륭을 채용

-교차 궁륭과 돔 채용

기념비적 건축 + 실용적 건축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

단순화와 양식화의 경향, 공간적 깊이나 원근법의 포기, 인체의 비례나 기능을 무시한 비자연적 취급을 특징으로 한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크리스트교 공인후 크리스트교는 종교적 지위에 걸맞는 건축과 미수을 가져야 했다. 그러나 회화는 조악했고 그나마도 전하는 것이 없다. // 중세유럽의 미술은 모두 기독교 미술이지만 초기기독교 미술이라 하면 이탈리아나 지중해 서쪽지역의 미술을 지칭하는 것이다.(새로운 양식× 새로운 도상 O)

당시의 것을 추측할 수 있는 것이 지하묘소이자 예배당인 카타콤이다.

>카타콤 : 이 세상에서의 행복보다는 내세와 구세주에 관심이 집중된 그래서 닮게 그리는 것보다 그리스도의 힘과 영광을 표현하기 위한 회화였다. 그 결과 자세가 경직되고, 약간 평평한 면에 부착된 듯한 느낌을 준다. 초기 그리스도교 화가들이 갑작스럽게 이와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상징, 다시 말해 그 어떤 다른 존재세계에 속하는 것,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나타내는 형태 또는 기호를 사용함으로서 그것을 표현한 것이다.

>'성 피에트로 에 미첼리노'의 카타콤 천장화

▶바실리카 양식 : 그리스 로마의 종교와 달리 예배를 보기위해 설교를 할 수 있는 곳과 실내에 사람들이 모일수 있는곳이 필요했던 크리스트교는 로마건축의 일부를 차용 바실리카양식이라는 건축양식을 만든다.



*제실은 언제나 반원형으로 돌출도고, 반원상의 지붕을 덮었다. 이 반원모양은 신의 자리로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모자이크와 채색사본(모자이크는 바실리카식 교회의 제실 반원형 벽면을 장식하는데 효과적이었다.)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예술형식

모자이크는 색유리를 불에 구은것 // 대리석파편과는 달리 색도의 농담표현은 약하지만 강렬한 색채를 띠고 있었고 반짝임이 좋음.

채색사본은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기원이 어떻게 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성서의 의미전달을 위한 것 그러나 로마의 전통이 노르만 앵글로 등의 영향과 함께 남아 있다.


▶비잔틴 양식(5∼15세기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동방 정교회 사회에 발전한 그리스도교 미술) 미술건축에서 더욱 나타나는데 바실리카 양식에 더욱 의미를 추구 (반원에서)돔양식과 (그리스)십자가양식이 생김. cf)로마 십자가는 한 쪽이 길다.

ex) 소피아 대성당


▶서방초기 중세

암흑시대 ->게르만의 침입

게르만들의 전통(동물문양을 마구장식등에 사용. 마구 엉켜있는 문양) ->채색사본에 그 영향이 바로 나타난다.


로마네스크 미술
개념 : 로마네스크(Romanesque)란 말은 '로마와 같은'이란 뜻으로 고대 로마 건축이 북방의 야만적인 민족에 의해 타락, 변질된 것이라는 경멸적인 의미에서 19세기에 고안된 용어로서 11세기 후반과 12세기 유럽의 전형적인 건물들이 두꺼운 벽과 아치가 있는 고대 로마의 석조건축과 닮았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중세미술에 대한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로마네스크 건축기술의 독창성이 인정받으면서 건축 뿐만 아니라 조각, 회화에 있어서 독자적 형태와 색채의 원리도 규명되었다. 로마네스크 미술은 중세미술의 영감이라 할 수 있는 야만적 전통이 11, 12세기에 전형화된 것으로서 다양한 지역적 특성 때문에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특징을 지닌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형성배경 : 로마네스크 양식이 형성되기 전 서유럽의 정세를 보면, 768년 샤를마뉴(Charlemagne, 742~814)가 프랑크의 왕이 되면서 카롤링거 왕조의 시대가 열렸는데 세속적 권력을 가진 것에 불과했던 메로빙 왕조와 비교해 볼 때 카로링왕조는 제정일치체제를 지향하여 기독교 교회의 비호자 역할을 자임함에 따라 중세 속의 문예부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특히 샤를마뉴는 그리스·로마의 고대문화의 부흥에 관심을 가져 궁정양식이 새롭게 부활했다. 그러나 834년 카롤링거 왕조의 몰락을 예고하는 베르덩 조약과 870년의 메르센 조약 이후 동서프랑크로 분리되고 이와 함께 국제 무역이 쇠퇴하면서 지방주의가 부상하였다. 이런 사회환경의 변화가 장원제도(莊園制度)에 근거를 둔 토지경제를 출현시켰고, 궁정 대신 수도원의 주도하에 교회가 점차 사회·문화의 중심지로 부각하였다. 수도원은 이미 샤를마뉴 시대에 문화의 중심으로 떠올랐는데, 수도원에 대한 샤를마뉴의 지원은 야만적인 이교도를 개종시키고 하나의 학문적 전통을 발전시키려는 복합적 목표를 가진 것이었으며, 프랑크의 수도였던 아헨의 궁정양식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또한 의도적으로 로마제국의 양식을 부활시키려고 했었다. 936년 오토에 의한 신성로마제국의 수립과 함께 그 역시 로마양식을 표방했지만, 지역적 특징의 분화는 더욱 현격해졌다. 당시 교회는 중세 유럽에서 단 하나의 통일된 사회제도였으며 특히 수도원은 유일한 문화의 중심지였다. 또한 기적을 일으키는 유물이 강조됨에 따라 성지순례가 발달하며 순례행렬의 주요 교차지점에 로마네스크 건축이 발달하였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특징

- 봉건제도가 낳은 교회미술인 로마네스크는 기본적으로 승려계급의 예술임과 동시에 귀족계급의 예술로서 단순하고 양식화된 기하학 형식으로 되돌아가려는 의지를 반영

- 로마네스크 교회는 그 자체로 완결된, 그 이상 아무 것도 구할 바 없는 안정된 공간 구현

- 비교적 넓고 상징적이며 간소한 내부는 감상자의 눈을 끌어 그 내부에 머물게 하고 감상자에게 수동적 태도를 갖도록 만드는 육중함을 특징으로 함 -신의 성채(城砦)로서의 교회

- 로마네스크 예술의 종교적 성격은 궁정사회, 도시당국, 국가의 중앙권력 등이 붕괴한 결과 실질적으로 교회가 유일한 고객이 되었다는 사정에서 예술품은 미적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예배, 제물, 헌납'의 연장. 즉 로마네스크 미술은 내면적인 비전의 논리를 기준으로 한 법칙을 따른 영적인 표현에 집중

건축 : 궁륭(Vault)을 사용한 교회건축은 지상의 요새처럼 두꺼운 벽체로 구성.

회화 : 건축의 육중함 때문에 생긴 많은 벽면을 프로스코로 장식. 특히 로마네스크의 성모상은 인간적인 모든 것을 초월한 천상의 여왕으로 표현되고 있다. 또한 로마네스크의 초상화는 공식적인 기념이나 전시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고, 필사본 성서의 헌사(獻辭)에 해당하는 그림이나 교회의 묘비조각에서도 이런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조각 : 로마네스크 조각은 원칙적으로 건축에 종속된 것으로써 특히 건물의 정면 출입문 윗부분에 형성된 삼각형의 벽면공간인 팀파늄(Tympanum)에 반자연주의적이며 신비적인 종교적 내용을 다룬 <최후의 심판> 등을 새긴 부조가 중요작품인데 이 부조에 표현된 인물은 육체를 버리고 정신만을 택한 금욕주의자들로서 수도승들의 이상을 반영

대표적인 작품

-프랑스 툴루즈의 생 세르냉(Staint Sernin) 성당 : 툴루즈는 사도 야고보가 묻힌 곳으로 추정되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 가는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어서 순례여행길(Pilgrimage Road)의 전형적 예로서 바실리카를 기본으로 지면에 누운 십자가 위에 성체를 상징하는 첨탑을 올려 놓았다. 로마네스크 건축은 순례자들의 예배와 지역주민들이 서로를 방해하지 않도록 고려한 것이 특징이다.

-피사의 성당과 종탑 : 1063년에 착공된 성당은 교차점(crossing) 위에 돔이 얹힌 십자가형의 바실리카


고딕미술

조각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피사로

*국제양식

슬뤼터

기베르티

회화

프랑스 : 스테인드 글라스, 채색사본

이탈리아

지옷토 : 비잔틴 양식(그리스 풍)과 고딕의 전통을 모두 수용

파도바 소재의 델 아레나 교회당 벽면의 <비통>//중세적 평면성이 사라지고, 인물사이의 공간이 형성되고, 사건을 하나의 드라마로 제시-아직 원근법이 완성되지 않은 단계이지만 축도법과 명암법의 사용에 능숙(스승 치마부)

둣치오

마르티니

로렌쳇티 형제

*국제양식

브뢰데를담

랭부르 형제

파브리아노

르네상스

1). 르네상스의 시기 설정의 문제 : 건축과 조각은 1400년 이후로 무난하나 회화의 경우 단절적으로 고딕과 르네상스를 구분하는데 문제가 있다. 회화의 영역만을 떼어놓고 본다면 Giotto부터라는 설정에 별 무리가 없어 보이나 이를 받아들이기에 문제가 있다. 우선 이는 1300년경으로 페트라르카보다 무려 한세기 앞선 것이 되며, 다른 영역과의 엄청난 시대적 차이를 보이게 되는것인데, 지옷토 또한 과거의 전통을 거부하지 않았으며, 지옷토 이전의 중세미술에서도 르네상스적 기운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둣치오와 시에나의 거장들의 업적을 무시하고 르네상스의 공적을 지옷토 개인의 공적으로 돌리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2). 르네상스의 사상 : 그대문화의 부활. 재생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에서 유래한 용어로 14세기말부터 이탈리아와 유럽에 걸쳐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화를 재건하고자 했던 혁신적인 문예부흥운동을 지칭한다.

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를 '인간과 세계의 발견'이라 정의했는데 이는 중세적 세계관의 해체를 예고함이다. 회화에서 고대의 부흥이란 "타협없는 사실주의"임을 시사하는 말이다.


3). 초기 르네상스 : 특징-> 합리주의 : 전 사회적으로 정신적, 물질적 영역 모두에서 합리주의적 변화가 나타나고//예술의 규범이 되는 통일성의 원리, 통일적 공간감정, 비례의 통일적 기준, 하나의 모티브를 향한 묘사의 제한, 구도의 통일적 결합은 합리주의 정신과 대응하는 것.

->미술가는 단지 재료를 손으로 다루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사상가로서 주지되고, 예술 작품도 점차 그의 창조적 정신의 시각적 기록으로 간주되게 된다. -> 이제야 비로서 그들은 학자들 시인들과 교제하면서 스스로 학식과 문화적교양을 갗춘사람이 되었다. -> 또하나 그 결과로 미술가들은 대조적인 두가지의 유형, 즉 세상과 타협할 줄 알고 자제력있는귀족사회의 일원//타협할 줄 모르고 유별나고 우울증이 발작하기 쉬운 고독한 천재같은 유형으로 이해 되게 된다.



4). 후기고딕과 르네상스

르네상스는 매우 단기간에 완성되었으며 그 원류는 단절적 시작을 정의하기에는 매우 많은 부분에서 중세에 뿌리를 두고 있다. 르네상스의 혁명적 변화만큼 중세에도 반화를 겪었으며, 이 변화가 르네상스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고대의 부흥--+-타협없는 사실주의

+-이교도적 주제들이 등장(우상, 초상...)

+-자연의 모방

고딕회화의 사실주의를 극복하는데는 제2의 혁명이 필요했다.->플랑드르의 혁명적 변화->초기르네상스.

국제적 양식을 거부하지 않고 여기서 시작//->치열한 사실주의

플레말레 화가의 <<메로데 제단화>>: 국제적 양식은 어떠한 경우에도 환상의 세계와 일상의 세계에 있어서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했다. 절대공존이 불가능한 많은 상징들을 병치함으로서 일상성과 현장성이 결여된 의미만 남아있는 사실적 양식이었다.//반면 플레말레 화가의 메로데 제단화는 엄격하게 "사실"에 입각한 그림이다. 거의 대상에 사로잡힌 결정론적 표현(이전의 것과 비교 했을때)이 나타나는데 이러한 양식으로서 나타나는 당시로서의 문제 즉 상황의 상징적인 내용<중세의 회화는 사실적 표현보다 내용이 중요했다>을 담아내기에 어려웠다. 그러나 일상적 도상, 백합<순결>, 십자가, 포도<고행>등을 이용. 보통 명백히 상밥되는 표현방식인 <사실주의>나 <상징주의>를 동시에 이루었다.

그리고 과도한 원근법의활용을 통해 하나의 새로운 공간을 열었다. 그리고 반 아이크에 비해 먼저 템페라에서 입체묘사에 능률적인 유체로의 전환을 이룬다.(억제된 색감->섬세함세부로 주의가가게함)

얀 반 아이크: 유체의 발명가로 알려진 반 아이크는 <메로데 제단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무한한 깊은 공간 표현, 사실적 의상(국제적 양식의 휘어진 곡선이 아닌 직선으로 끊어지는 옷 주름)이 나타난다.

+ 랭부르 형제에 의해 나타나기 시작한 대기원근법이 나타난다.

+ 미묘한 윤곽과 음영, 색채가 부드럽게 보이며 그로인해 전체가 본리되지 않은 하나로 보이는 뛰어난 연속성이 있다.

(최후의 심판이 두 개의 극단형으로 이분되는 것과는 다르다.)

<그리스도의 책형>-+- 형 후베르트 반 아이크가 그리다 만 것을 후에 완성한 것

<최후의 심판> ----+

<강의 제단화> ->기증자의 모습이 보이는 세폭 제단화 그 속의 아담과 하와는 원죄보다는 자신의 모습자체로 창조된 인간으로 보인다. 그 대신 위의 카인과 아벨상이 원죄를 대신한다. =>원죄와 육체의 분리표현 닫은 화면에는 깊이의 공간과 사실적의상이 나타나는데 패늘의 나무도 그림의 일부인양 그림속에 그림자를 넣어 깊이있는 공간을 표현했다.(cf-로렌체티의 <성모의 출산>) 아랫단의 두 명의 승려(?확인필요)는 석고상인 것 처럼 회색으로 그렸다.

<결혼식의 초상화> 플레말레의 그림과 같이 상징으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앞의 강아지는 순결을 남성이 신을 벗고 있는 것을 통해 성스러운 장소 혹은 의식을 상징하고 있으며, 뒷면의 거울을 통해 화가 자신이 보이면서 시점을 설명하고 있다. 거울 바로위에 법조문체로 거울속의 사람이 자신임을 보여준다.

<붉은 터번을 두른 사나이> 자화상으로 추측되는 그림. 엄격해 보이지만 개성을 억압하지 않는 침착한 기질의 인간상을 표현되어 있다. //부드러운 반음영의 사용


로지에 반 데르 바이덴

고전적 파토스를 회복시켜려 했다. 육체표현은 별로 발전한 것이 없고 볼것도 없다. 그러난 정신적 표현은 더 풍부해졌다. 얀은 "심적 중립성"을 추구했다면 로지에는 어떤 특징은 억압하고 어떤 특징은 강조하여 인간의 개성을 묘사했다.

<내려지는 그리스도>비통에 찬 몸부림과 표정

<프란체스코 테스테의 초상>개성적 얼굴의 표현



후고 반데르 구스

폭발적 개성, 인물의 감정표현,

<포르티나리 제단화> 양치기들의 표정에 나타난 감정 그림의 원근과 관계없이 중요한 인물을 크게 그리는 표현. 아기예수의 독특한 표현


히로니무스 보슈

<쾌락의 동산> 환상의 세계, 아담과 하와의 원죄를 끊임없이 되풀이 하는 지상의 인간생활

원죄에 의해 우리들 인간은 모두 자신의 정욕의 포로가 되어 있는 운명을 암시하고 있다.

-----------------------------------------이상의 플랑드르 화가들의 새로운 표현은 프랑스와 독일로 퍼져 스페인에서 발트해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총평: 대작의 부분이 아닌 독립된 회화로서, 작가의 자회상으로서 초상화의 유행이 특징적이다. 이는 고대나 르네상스보다 플랑드르적이다.


5). 피렌체에서

<난니 디방코>후기 고딕과 표현을 달리하고 고전에 더 가까워진 사실적 표현을 볼수 있다. (네 성자)와 (날으는 천사)에서 볼수 있듯이 로마조각의 리얼리즘, 비례가 나타나고, 기둥에서 완전히 분리된 조각이 보인다.

<도나텔로>후기 고딕과 완전한 결별을 보인다.

-성마르코 : 건물의 궁륭이 필요 없이 완전히 독립적인 조각으로 보이고, 콘트랍포스트가 회복되었고, 옷을 벗을 수도 있어보일 만큼 자연스런 리얼리즘의 표현이 돋보인다.

-성조르죠 : 소년적 얼굴에 정적인 자세이지만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 언제라도 적이 나타나면 뛰쳐 나갈듯한 절제되고 숨겨진 역동성이 보인다.(정중동)// 부드러우나 절제된 완력이 有

-성 조르죠상 아래의 부조 : 전면의 부조는 높고 후면은 점점 낮아지며, 뒤로 갈수록 휘날리는듯하는 풍경은 놀라운 깊이를 준다. 인해 배경의 시원감과 공기원근법적 표현이 나타난다.

-죽코네 : 호박머리라고도 불리는 이 조각은 돈마텔로의 그 어떤 인물상보다 인간적이며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전통적 예언자상의 수염, 동양적 옷과 두루말이는 사라지고, 토가와 개성적인 외모 등이 특징적 추하면서도 매혹적인 기품있는 두상

-막달라 마리아 : 완전히 개성적인 조상으로 갓타멜라타 기마상으로 가는 과도기적 작품

-갓타멜라타 기마상 : 개인의 명성을 기리기 위해 제작된 최초의 작품. 순전히 개인적인 치적을 기리기 위한 작품인 지라 극단적 개성주의가 나타난다. 두꺼운 가슴의 강인한 말과 인격으로 그 말을 제어하는 듯한 인물상

-'헤로데왕의 향연'부조 : 살로메가 목을 갖다 바치고 춤추는 뒤로 보이는 건물에 나타나는 원근법적 표현

<기베르티>

-'야곱과 이삭의 얘기'부조 : 선 원근법의 완성.도나텔로의 부조 보다 뛰어난 어蚅근의 처리가 돋보인다.

* 선원근법의 차용 : 건축에서 브뤼넬레스코에 의해 일반화 시작// 과학적 성격으로 인해 일괄적 적용이 요구되지만 미학적, 실천적 이유로 언제나 준수되지는 않았다. ex) 만테냐의 형장으로 끌려가는 성 야곱// 선원근법의 차용으로 부조의 깊이가 깊어짐


*야코포 델라 쿠에르치아 와 도나텔로

'다윗'과 '아담의 창조'를 비교해 볼 때 유의미한 비교가 된다.

야코포의 아담의 창조는 고전적 영웅미와 이상미를 그리스도적 주제속에서 표현하려한 최후의 시도이다. 몇몇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나체표현은 도덕적 의 미를 지닌다. 그래서 야코포의 경우처럼 육체미를 나타낸 나상은 보기 힘들다(왜? 중세정신에 있어서 '육체미=고대우상=>사악한 이교도적인것'의 등식이 성립하기 때문에)

15세기 들어서 보슈의 그림이나 반아이크의 강의 제단화속의 아담과 하와에서 육체의 미가 재발견 되었으나, 벌거벗은 것이 아닌 스스로 충족적인 나상은 그것도 독립적인 것은 도나텔로의 다윗이 처음이다.


<<건축>>

브루넬레스코 : 선원근법, 돔(Dome)시공의 간편화 대칭성과 규칙성의 강조, 냉철하고 정적인 질서, 유동적 공간운동

알베르티 : 고전적 건축구성 방식을 비고전적 건축구조의 외관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의 문제를 고민했다. -> 외관에 잇어서 벽면을 가장중요하게 보고 고전적 방식을 벽에 새겨진 선의 구성으로 바꿈.튀어나온 석주와 앤터블러춰. 가로지르는 박공


<루카 델라 롭비아> 같은 시기 도나텔로 이후 유일하게 중요한 조각가. 난니 디 방코 적인 고전주의적 로마식 부조

<폴라이우올로> 해부학적 표현.후에 뒤러에 의해 모사된 해신의 싸움 등에서 나타나는 표현. 가죽을 한겹 벗긴 듯한 표현

조각: 개인 소장가의 증가에 걸맞는 작은 청동제품과 팜화가 작업의 대부분//구도의 입체성을 획득. 조각자체만으로도 완전한 구도와 공간의 확장성을 가진다.

<베록키오>롯셀리노와 폴라이우올로의 영향을 다 받고, 다빈치를 키웠다. 청동기마상인 콜레오니 장군기마상 : 도나텔로의 성조르죠 상에서 보인 튀어 나올 듯한 긴장과 당당한 표정. 귀족스럽고 우아한말과 당당한 상대적으로 큰인물상. 당당한 자세와 위압적 표정은 칸그란데 기마상과 흡사하다.


<<회화>>

<맛사치오> 플랑드르와 피렌체의 성과를 종합

삼위일체 : 선 원근법의 표현으로 깊이 있는 공간감이 생김 후대에 이 그림의 궁륭부는 많은 작품에서 차용됨.

성전세 : 이야기의 연속묘사

왕좌의 성모 : 공기원근법과 부드러운 광선의 효과 有

맛사치오 이후 공백기가 有

<베네치아노>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카스티뇨>

<만테냐>맛사치오 이후 최고 중요한 화가/ 고대에 대한 확실한 묘사와 고대적 표현. 전체 분위기를 형성해내는 구도=>긴박성과 율동적인 힘

<벨리니>과학적 원근법, 베네치아 화파 밝음과 화사함의 색채//마사치오의 숭고성, 반 아이크의 북부적 성격 융합

<봇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 공간의 깊이는 없다. 배경과 주제의 조화 //해부학적으로는 비과학적이나 아름다움. 신플라톤주의적 관점이 반영된 대표적인 예

*신플라톤주의 : 이교도적 주제의 합리화(어떻게?) 이교도적 신화내용을 동떨어진 억지추측으로 끼워 맞추기 한계 有 대표적 사상가인 피치노를 인용해보면 "인간의 생명을 포함해서 우주의 생명은 플라톤주의건 성서건 간에 같다"즉 '아름다움과 사랑≒그리스도의 사랑'의 논법이 성립하고 따라서 비너스의 탄생은 성서적 내용이 되며 이교도적 주제라는 혐의를 벗게 된다.


*신플라톤주의와는 또다른 이교도 신화 해석 방법

<코지모>는 진화론과 유사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교신을 인간화시키고 야만에서 인간이 진보하여 신에까지 이름을 표현했으나 그림에서 이를 '전원시화', '희화화' 함으로써 비판받지 않고 넘어감.esp) 디오니소스

기타) <시뇨렐리>지옥으로의 추락, <기를란 다이오>노인과 손자 등이 有


이탈리아 전성기 르네상스

초기 르네상스는 예술이 어떤 법칙에 지배되고 있다고 믿는 시기로, 수학적 비율, 과학적 원근법, 신체의 해부학적 구조 등의 여러 원리가 그것이었다. 전성기 르네상스의 주도적 미술가들은 그들의 영감이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믿으면서도 한편 그 신적인 권위가 타당하다면 받아들이고 아니면 과감히 내버리는 자세를 취했다. 즉 예술가 스스로의 영감에 의존했던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반영하여 "회화는 최선의 과학이 아니라 화가의 혼을 신의 혼과 유사한 어떤 것으로 변형시키기 때문에 하나의 기술뿐만 아니라 신성이기도 하다"고 주장 즉,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의해 화가는 거의 신과 같은 존재이므로 단순한 인간인 과학자와는 상반된다는 새로운 견해가 제시// 레오나르도는 예술을 과학적 이해의 근원으로 보는데, 이유는 예술가는 가장 뛰어난 관찰자로서 사물의 본질을 규명하고, 그것에 따라 이해하고 습득한 것을 다른사람에襂 계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

사생아로 태어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많은 소묘와 비교해 볼 때 기껏 15점밖에 되지 않는 회화와 한 점의 프레스코를 남겼다.

원근법과 자연에의 과학적인 접근, 인간 신체의 해부학적 구조, 이에 따른 수학적 비율 등은 이 위대한 예술가의 손에 의해 완성

<동방박사의 경배>미완성. 기존의 윤곽선에 의한 묘사가 아닌 빛을 받고 있는 면과 받고 있지않은면의 음영으로 현재적 데생과 같은 방법으로 입체를 구축한 그의 데생을 엿봇 수있는 작품//최초로 시도한 유화템페라화//

<최후의 만찬>유화 템페라인지라 현재 많은 부분의 결실이 있으나 상당히 뛰어난 작품. 그리스도의 눈사이를 중심으로하는 원근법이 사용되었고, 뒤로 보이는 후광과 같은 상징적 건축은 구도에 있어서 완벽한 균형감과 안정감을 준다. 마태복음의 한 구절을 형상화한 이 작품에서 그는 치밀한 계산 아래 가장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 그림의 위 1/3을 가리고 그림을 보면 레오나르도가 부분의 배치에 얼마나 많은 신경을 썼는가 알 수있다.

<성안나와 성모자>마리아의 어머니인 안나와 성모 마리아 그리고 아기예수가 그려진 그림으로 마리아의 품을 떠나는 예수(고행을 상징). 아기 예수를 잡으려는 마리아. 마리아를 붙잡는듯한 안나의 모습을 통해 성서속의 안나의 의미와 함께 마리아의 슬픔이 함께 형상화된 작품

<동굴의 성모>성모를 어두운 동굴에 묘사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이러헌 배경의 그림을 두 개나 그렸는데, 마치 자연의 원주처럼 구성의 중심과 깊이를 강조하는 주된 바윗덩어리는 성모의 위치를 강화시키고, 바위 표면의 어두움은 성모의 찬란한 광채를 대조적으로 분명하게 한다. 광선으로 인해 모습이 두드러지는 왼쪽의 천사와 오른쪽의 성 요한은 피라미드 구조를 확장시키고 있다. 천국의 빛에 감싸여 축복의 동작으로 손과 옆 모습이 치켜올라간 아기 예수는 구성의 실질적인 중심점이다. 노출된 바위 모서리에 앉아있는 예수는 이 성스러운 장면의 중심이 성모로부터 자신에게로 이동하게 만들고 있다.

<모나리자>스푸마토를 이용하여 애매하게 표현된 얼굴과 배경의 의도된 착시를 통해 상당히 묘한 인상과 얼굴로의 시선집중을 얻어낸다. 파도와 같은 자연의 관찰을 통해 얻은 유려한 곡선의 흐름을 이 우아한 귀부인의 머리카락과 옷주름은 물론 배경의 굽이치는 길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



<미켈란젤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13살 때부터 도메니코 기를란다요로부터 3년동안 도제 수업을 받았다. 피렌체의 실질적 지배자였던 메디치가문에서 그들이 소장하고 있던 고대 그리이스 로마의 조각들을 연구, 아름다운 인체를 묘사하는 고대인들의 방법을 터득하였으며, 인체의 미세한 부분까지 연구하기 위해 인체 해부학을 탐구하였다. 메디치가의 신플라톤주의를 신봉하여 인간을 유일무이하게 신을 닮은 존재 신에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경쟁자로 인식했다.

회화는 조각의 입체성을 모방한 것이며, 건축은 인간의 신체의 유기적 성격을 갖추어야만 하는 것으로 그는 믿고 있었다. 그의 조각에 대한 생각은 '형상을 가두어 놓은 대리석으로부터 그 형상을 해방시킨다'는 그의 말로 웅변된다.

<다윗>
<모세>
<메디치가의 무덤>
<노예상>
<피에타>
<시스틴 성당의 벽화>

-아담의 창조 :
-최후의 심판 :


<라파엘로>

1504년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가 피렌체에서 서로 경쟁하고 있을 때 라파엘로 산티라는 한 젊은 화가가 움브리아 지방의 우르비노라는 작은 도시에서 피렌체로 왔다. 그는 소위 '움브리아 파'의 지도자인 피에트로 페루지노의 공장에서 도제수업을 받는 동안 이미 장래가 촉망되는 작품을 제작한 바 있었다. 그가 피렌체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는 자신보다 서른 한 살이나 위인 레오나르도와 여덟 살 위인 미켈란젤로가 그 이전에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미술의 기준을 세우고 있음을 확인했으나 이 거장들의 명성에 압도되어 주눅들지 않고 그들에게서 오히려 많은 것을 배우고자 결심했다.

레오나르도나 미켈란젤로의 까다로운 성격에 비해 부드럽고 사교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와 같은 광범위한 지식도 미켈란젤로의 정력도 소유하지 않았으나 뛰어난 대인술로 곧 영향력있는 후원자들의 눈에 띨 수가 있었다. 비록 삼십대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지만 전성기르네상스 거장들 중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았던 라파엘로는 교황 율리우스의 요청대로 로마로 오기 전 다빈치의 많은 작품들을 보았으며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또 다른 그의 스승인 페루지노로부터 전체의 균형을 깨뜨리지 않고 공간의 깊이를 표현한 정돈되고 우아한 그림을 그리는 방법도 터특하였다. 그 결과 그는 레오나르도의 서정성과 미켈란젤로의 극적이며 회화적인 풍요한 화풍을 결합한 견고한 미술을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라파엘로의 감미로운 그림들을 보노라면 우리는 그가 큰 어려움없이 단숨에 그림을 그려낸 것처럼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외견상 단순하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의 작품은 세심한 계획과 엄청난 예술적 지혜의 결과물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라파엘로가 추구했던 것은 르네상스 미술이 줄기차게 찾아왔던 이상적인 아름다움의 완성이었다. 당시 자연의 충실한 재현을 중요시 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도 역시 나름대로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고대 고전시대의 이상미를 구현하려고 했다. 그가 성공한 것은 바로 이런 과정에서 잃기 쉬운 생명감과 성실성을 확보하므로 자신의 그림을 이상화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으로는 성모상의 원형이자 르네상스 고전을 대표하는 <그란두카의 성모>와 고대 그리이스 때 플라톤이 세웠던 아카데미를 재현한 <아테네 학당>, <교황 레오 10세의 초상>, <요정 갈라테아> 등을 비롯하여 시스틴 성당에 그려놓은 일련의 벽화를 들 수 있다.

그 중 <아테나 학당>은 그가 존경해 마지 않았던 선배예술가인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에게 바친 그의 경의를 보여주고 있는데 화면의 중앙부에서 걸어나오고 있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보면 특히 플라톤의 모습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초상을 발견할 수 있다. 처음에는 미켈란젤로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위치에 그려넣으려 했으나 성격에 있어서 철학자이기보다 예술가인 미켈란젤로를 아리스토텔레스와 동일시할 수 없었으므로 그를 앞으로 끌어내려 턱을 괴고 고민하고 있는 철학자의 모습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한편 이 벽화의 오른쪽 가장자리에서 그리스의 천문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 배화교의 창시자인 조로아스터 등에 들러싸인 젊고 잘 생긴 청년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라파엘로 자신의 모습이다.

라파엘로의 승리는 전성기 르네상스의 형식주의로 귀결된다. 결점없는 형식적 완전함은 고통과 번뇌로 가득 찬 미켈란젤로의 작품과 대조적이며 무엇보다 교황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로마에 풍미한 궁정취향을 반영하고 있다. 이상적 형식을 구현한 라파엘로의 작품을 알고 있는 후배들로서는 르네상스가 추구해온 이상미가 그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더 이상 그것을 추구한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전성기 르네상스가 절정에 도달할 즈음 나타난 형태의 기이한 왜곡과 변형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형성된 것이며, 파르미지아니노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마니에리즘의 한 원인을 제공해 준 작가가 라파엘로일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지오르지네>피렌체에 필적하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던 번영의 도시 베네치아의 풍부한 색채로 이루어진 그림을 그린 작가들의 대표격// 지오반니 벨리니의 제자로서 색채와 빛의 화가로 부를 수 있을 만큼 신비로우면서 불가해한 그림을 남겼다.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폭풍우>에서 풍경은 단순한 배경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주제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사물과 사람을 미리 그려 놓고 나중에 공간 속에 배열한 것이 아니라, 자연, 땅, 나무, 빛, 공기, 구름 그리고 도시 풍경 및 나무들과 인간을 통틀어 하나로서 진정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느 의미에서 이는 거의 원근법의 발명에 맞먹는 새로운 신비로 향해 내딛는 첫걸음이라 할 만하다. 왼편의 목동과 거의 벗은 상태로 아기를 안고 있는 젊은 어머니, 불길한 하늘의 분위기와 멀리 보이는 도시, 그리고 폐허의 흔적은 이 작은 작품을 거의 초현실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내용이 아니라 바로 빛에 의해 투명해진 대기와 영롱한 색채인데 이로부터 회화는 소묘에 채색을 더한 것 이상이 되었다.


<티치아노> 베네치아 색채파 화가

<우르비노의 비너스> 후에 올랭피아에 영감을 줌

티치아노는 색채를 다루는 데 뛰어났으며 초상화 작가로 유명했다. 그에 의해 세계를 빛과 색채의 구성이라고 보는 회화양식이 수립될 수 있었으며, 그 전통은 루벤스를 이어 낭만주의와 인상주의에 의해 계승되었다.


매너리즘
기교적, 타성적 스타일 (메마른 형식주의)// 내적 통찰력을 높이 평가한 광법위한 운동의 특별한 형식으로서 인정되고 있다.


*매너리즘에 대한 재평가
'정신사로서의 미술사'를 주창했던 막스 드보르작(Max Dvorak)으로 하여금 예술사에서 정신주의적 경향들의 중요성을 평가하도록 하였고, 매너리즘은 그러한 경향들의 승리를 파악할 수 있게 했던 예술적 체험으로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결국 매너리즘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방, 변형, 왜곡은 '정신의 결여'가 아니라 전혀 상이한 새로운 매너리즘 정신에 기인한 것이었다. 즉, 현실을 의도적으로 변형시키는 매너리즘의 주지주의적 경향은 종교적 체험의 심화이자 내면화였으며, 인생을 파악하는 새로운 정신세계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매너리즘을 최초의 근대적 예술양식 즉, 문화적 문제와 직결된 것임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매너리즘의 주관적, 신경질적 긴장은 형식이 삶과의 투쟁에서 무력해지고 예술이 영혼없는 아름다움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의 표현이었다.


<롯소 피오렌티노>-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인물들은 심히 동요되고 있으나 얼음과 같은 갑작스럽게 분 찬바람에 응결된 듯 굳어 있다./내적 불안과 환상적 양식

<파르미지아니노>

-자회상-어떤 심리적 동요도 보이지 않는다. 스푸마토에 덮여있고 볼록면의 거울에 의해 왜곡되어 있다.

-긴목의 마돈나-과거의 그림에서는 볼 수 있는 조화와 안정을 의식적으로 기피하고 있음. 완벽한 조화에 대한 고전적 해결방식을 제시한 전통적인 수법만이 유일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자 했다는 점에서 그의 현대성을 찾을 수 있다.

<브론치오>-엘레오노라 디 톨레도와 아들 지오반니 데 메디치-아낌없이 치장한 의상뒤에 굳은 듯 움직이지 않는 인물은 정상적 육체보다 긴목의 마돈나와 더 닮았다.

<틴토렛토>베네치아 출신//매너리즘 정신의 선구자 격으로 묘사의 장면이 측량할 수 없는 무한한 우주의 공간으로 확대되고 있다//반 고전적인 면과 우아한면의 두가지성격을 그의 작품 속에 결합시켰다.

-최후의 만찬-

-빌라도 앞에선 예수-

<엘 그레코>베네치아화파의 영향을 받음.

-오르가스백작의 매장-은 변형과 불균형, 과장 등을 통해 매우 깊고 섬세하며, 신비로운 내면성을 지닌 지상과 천상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드라마를 보여줌//극단적 축도법으로 상부의 공간이 무한한것같은 환각을 얻기위해...

초상화-엘그레코의 친구이자 시인//약하고도 표현이 풍부한 손, 감성적인 입, 타는듯한 눈을가진 창백한 얼굴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강렬한 정신적 열정을 준다.

<코레지오>색과 빛을 사용하여 형태에 균형을 주고, 보는 사람의 시선을 일정한 방향으로 인도하는 새로운 명암법을 제시하였으며, 특히 프톨레마이오스적 천동설에 바탕을 둔 원근법의 과학적 안정성을 화면 속의 모든 물체가 중력의 법칙과 관계없이 허공 중에 붕붕 떠다니는 듯한 벽화를 그렸다.

-성모의 승천-프레스코화//환각적 원근법의 걸작

<사볼로>
<첼리니>
<볼로냐>


북유럽 르네상스
르네상스 운동이 이탈리아에서 성공하고 있을 15세기에도 북유럽 지역은 여전히 고딕 전통을 충실하게 고수하고 있었다. 즉 반 아이크 형제의 위대한 혁신에도 불구하고 미술은 여전히 과학의 문제라기보다 관습과 관례의 문제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승리를 구가하던 수학적 원근법의 이론, 과학적 해부학의 비밀, 로마 유적들에 대한 연구는 북유럽 거장들의 평온한 정신을 동요시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두 세계는 완전히 단절된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얀 반 아이크와 같은 플랑드르 화가들을 통해 확인한 바 있다. 또한 프랑스의 푸케(Jean Fouquet; 1420-1480?)는 젊은 시절 이탈리아를 방문하였고 1447년에는 로마로 가서 교항의 초상을 그리기도 했다. 로지에 반 더 바이덴 역시 로마를 방문한 적 있으며, 그들은 로마에서 새로운 미술에 대해 경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후기고딕' 성향을 포기하지 않았던 알프스 북쪽의 미술가들은 1500년대를 전후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어섬으로써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탈리아를 제외한 다른 유럽 지역에서 일어난 르네상스적 경향을 통상 북유럽 르네상스로 분류하는데, 이들 지역으로 파급된 르네상스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대체적인 경향은 다소 우울해 보이는 차분하고 냉정한 빛깔, 공간미를 배제한 꽉 찬 구성, 상징이나 알레고리로 가득찬 신비감, 판화의 대중적 보급과 발전등을 들 수 있다.


<그뤼네발트>세익스피어 만큼 신비스러운 존재인 그뤼네발트는 후기 고딕양식의 원근법을 구사하여 완강하고 단단한 인물상을 그려냈다. 또한 그는 중세 미술의 목적인 설교를 위한 그림을 지향

<이젠하임 제단화>는 중세적이면서 초인간적인 스타일로 표현된 <그리스도의 책형>과 그 패널 안쪽의 생명을 지닌 것처럼 느껴지는 율동감의 <수태고지>, <합주하는 천사>, <성모자>, <부활>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그리스도의 책형>을 보면 인물상의 크기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그뤼네발트가 르네상스 이래로 발전되어 온 근대 미술의 법칙을 거부하고 인물들의 중요성에 따라서 그 크기를 변화시켰던 중세와 원시 시대의 원칙들로 의도적으로 되돌아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을 이탈리아에서 그려진 그리스도의 책형과 비교해보면 뒤틀리고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고딕 조각작품을 보는 것처럼 야만적으로 비쳐질지 모르지만 육체의 고통 앞에 몸부림치면서도 구원의 단발마를 터뜨렸던 예수의 인간적 고뇌와 상처를 정직하게 그려내고자 했던 작가의 리얼리즘을 확인할 수 있다.


<뒤러>뒤러는 헝가리에서 이주하여 번창하던 도시 뉘른베르크에 정착하였던 금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여준 화가로서 뉘른베르크에 있던 볼게무트의 공방에서 수업하였고, 당시 독일에서 명성이 있던 숀가우어에게 배우기 위해 그의 공방으로 찾아갔으나 숀가우어는 이미 사망한 뒤였으므로 그의 형제들과 함께 지내다가 학문과 서적 교역의 중심지였던 스위스의 바젤로 가서 목판 삽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선진문화를 흠므하였던 그는 25세때 알프스산맥을 넘어 북부이탈리아를 방문하였는데, 그는 이탈리아의 회화양식 뿐 아니라 미술가의 개념, 지위까지도 북부에 전하고자 하였다. 베네치아에서 돌아온 다음 그의 그림은 소용돌이 치는 필세와 몸부림으로 가득 찬 환상적인 장면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판화 속 인물들은 만테냐의 판화에서 배운 것이고, 자화상 등의 얼굴도 완벽한 균형의 이론에 의해서 구성했다. 고전 미술이 부여했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인체의 표현에도 관심을 쏟은 뒤러는 무엇이 인체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인가를 알기 위해 인체의 비율에 대한 연구에 전념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인체의 올바른 균형과 조화를 찾기 위해 인체를 과도하게 길게, 또는 넓게 그려 인체를 왜곡하기도 하였다. 뒤러는 어떤 예술가보다 끈기있고 충실하게 자연을 묘사하였는데, 이는 성경의 이야기를 더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종교개혁운동의 진원지인 뉘른베르크 출신으로서 마틴 루터의 신봉자이기도 했던 뒤러는 새롭고 위대한 프로테스탄트 예술을 창조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종교계 지도자에게로부터는 우상숭배의 위험등의 이유로 환영받지 못했다. 뒤러의 <네사도>는 독일 르네상스 회화를 대표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모습을 그려온 뒤러는 20대의 젊은 모습에서 세계로 향한 탐구열에 불타는 인문학자풍으로 삼십대로 막 들어설 무렵인 1500년에 제작한 <자화상>에서는 정면을 향한 엄숙한 자세와 그리스도를 닮은 이상화된 용모를 통해 통상적인 자화상의 영역을 초월한 경지를 보여주었다.

판화가로서도 잘 알려진 뒤러는 독일의 목판화 기법에 이탈리아 동판기술을 도입하여 섬세하고 꼼꼼한 선묘가 돋보이는 명확한 표현을 하였다. 특히 인체에 있어서 이탈리아 거장들의 업적이었던 근육이나 동물들의 움직임에서 비롯되는 근육이완과 함께 배경에서도 섬세한 끝마무리를 통해 화면의 완결성을 추구했다. 그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과학적인 원근법과 아름다운 인체에 대한 완벽한 표현을 가능하게 했던 해부학들이었다. 또, <멜랑꼴리아>, <4인의 사도>, <네 기질>등에서 보이는 함축적인 상징성은 북방 르네상스의 기질을 보이며 신비감을 자아낸다.

<한스 홀바인>한스 홀바인은 영국에서 궁정화가로 활동했는데, 그는 북부 유럽의 세부표현과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위대성과 견실성을 교묘하게 조화시킨 초상화를 그렸다. <헨리8세>는 의상이나 보석이 정밀하게 그려져 있으며 인물의 성격까지도 잘 드러나 있다. 홀바인의 대표작인 <대사들>은 명예와 인생의 허무를 상징하는 소품들과 함께 두 명의 인물 앞에 형태를 알 수 없는 왜곡된(anamorphose) 물체를 그려놓았는데 비스듬한 위치에서 이 물체를 보면 해골의 모습이 나타난다고 한다.

<피터 브뤼겔>플랑드르 최대의 풍속화가. 이탈리아 매너리즘의 우주적 세계관이 브뤼겔에게 간접적으로 계승되었으나, 엘 그레코의 정신주의와는 관계없는 범신론적 자연주의의 세계를 보여주는 작품을 남겼다.

<알트도르프> 근대 풍경화의 개척자로 분류할 수 있는데 그는 숲과 산 속을 누비고 다니며 폴풍우에 시달린 나무와 바위의 형태를 연구하기도 했다. 그가 남긴 수채화와 동판화, 유화 몇 점에는 아무런 이야기도, 인물도 남아 있지 않고 오직 작가가 느끼는 풍경만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회화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지금까지 주제를 부각시키는 배경으로만 도입되었던 풍경이 독립된 장르로 확립될 수 있는 징후가 그의 작품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북유럽 특유의 고딕적 전통과 불안이 깃들여 있어 훗날 낭만주의 시대에 활동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의 을씨년스러우면서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신비로운 풍경화의 전조를 보여준다. 그가 남긴 작품 중에서 <이소스의 전투>는 알렉산더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 사이에 벌어진 역사적 전투장면을 그린 것으로서 치밀하며 집요한 표현에 있어서 플랑드르 화가 얀 반 아이크에 필적하는 작품임에 분명하다.

바로크
이탈리아, 플랑드르, 스페인의 바로크

<카라밧죠>본명은 미켈란젤로 아메리기(Michelangelo Amerighi)이며, 열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지고 있다. 그의 냉철한 관찰과 묘사에 바탕을 둔 대담하고 가식없는 자연주의가 그의 주문자였던 고위성직자들의 취향을 충족시켜주지는 못했다. 그들은 카라밧지오가 '위대성', '고귀함'을 결여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사례로 카라밧지오가 교회로부터 주문을 받아 납품했던 <복음서를 저술하고 있는 성 마태>가 거부되자 교회의 요구에 맞춰 같은 주제의 그림을 제작해야 했던 것을 들 수 있다.

카라밧지오의 이러한 사례는 중세 이후 자신의 예술적 특성으로 인해 실패했고 훗날 예술가로서의 명성을 안겨준 바로 그 특성 때문에 동시대인들로부터 반감을 샀던 최초의 예술가였음을 알려준다. 옆의 작품은 카라밧지오의 <그리스도의 매장>으로서 빛을 이용한 극적 효과의 연출과 함께 그의 자연주의적 제작방법을 보여준다.


<안니발레 카랏치>매너리즘의 난해하고 복잡한 상징주의를 간단하고 명백한 알레고리로 바꿔놓은 카라치 형제들의 업적으로 볼 때 일체의 '근대적' 교회예술의 역사가 이들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십자가 위의 후광, 백합, 두개골, 사랑, 희열, 고뇌 등이 그려진 근대의 성화는 바로 이들 형제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베르니니>조각가의 아들로 태어난 베르니니는 어린 시절부터 조각가로서의 수업을 받으며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바로크 조각의 특징인 무대장식과도 같은 현란한 미술은 주로 베르니니에 의해 창안된 것으로서 그것을 <성 테레사의 환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성 테레사는 16세기의 수녀로서 그녀가 본 신비스러운 환영을 글로 쓴 유명한 책을 남겼다. 그 책에서 그녀는 천상의 환희를 느낀 순간을 이야기하면서 주님의 한 천사가 황금으로 된 뜨거운 화살로 자기 심장을 꿰뚫자 아픔과 함께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희열로 충만됨을 느꼈다고 적고 있다. 베르니니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이 순간으로서 우리는 성녀가 구름을 타고 황금빛 햇살의 형태로 위로부터 쏟아지는 빛줄기를 향해서 하늘로 올라가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에로스의 형상으로 표현된 천사가 공손하게 그녀 곁으로 다가고 있으며, 성녀는 기절한 채 황홀감에 젖어 있는데 마치 그녀가 허공 중에 떠있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베르니니의 작품에서 특징적인 열렬한 환희와 신비로운 황홀경은 고전적인 방식으로 인정되어 온 품위있는 옷주름으로 흘러내리게 하지 않고 흥분과 움직임의 효과를 보다 강조하기 위해서 옷자락이 몸부림치듯 휘날리게 표현한 것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 밖에도 베르니니의 대표작으로는 로마의 보르게제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다윗>, <포르세포네를 강탈하는 하데스>, <아폴로와 다프네> 등을 비롯하여 교황 우르바누스8세의 후원을 받아 제작한 바티칸 성당의 교황무덤조각과 원형 열주 위의 조각들, 안젤로 다리 위의 조각 등을 들 수 있다.

<피터 파울 루벤스>루벤스는 고급관리의 아들이었고, 어린 나이에 이미 최상의 교육을 받았으며 궁정에 나가 사회인으로서 교육을 마무리 지은 사람이었다. 17세기 바로크의 가장 전형적 특색의 회화를 완성한 화가로 명성을 얻은 루벤스는 그의 예술적 재능 못지 않게 조직가로서 그의 재능이 큰 역할을 했다.

루벤스는 푸생과 클로드 로랭보다는 한 세대 위였고, 화려한 궁정적 바로크를 추구한 귀도 레니와는 비슷한 연배였다. 그는 이십대 초반에 로마, 제노바, 만토바 등에서 고전주의의 명작들을 연구했지만 기질적으로 플랑드르 사람이었다. 즉, 다채로운 사물의 표면에 대한 관심은 그로 하여금 화가의 임무는 자기 주위의 세계를 그리는 것이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그림으로써 보는 사람들에게 사물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작품에 특징적인 밝고 풍만한 육체, 풍부한 색채와 장대한 구성의 조화, 생동감있은 표정, 현실감과 고대의 정취는 그를 당대 최대작가로 부상시켜 놓은 근거이기도 했다. 그는 인물화뿐만 아니라 종교화, 신화화, 초상, 역사, 풍속, 풍경의 표현에 능하였으며, 프랑스 왕정과 결혼한 메디치 집안의 카테리나를 위해 제작한 연작은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옆의 작품은 헤라(유노), 아테나(미네르바), 아프로디테(베누스)가 트로이의 왕자인 파리스에게 미의 여신으로 선택받는 장면을 그려놓은 것으로서 루벤스의 관능적이면서 감각적인 화풍이 화려한 색채 아래 구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방패는 아테나, 에로스(큐피도)는 아프로디테, 공작은 헤라를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황금사과를 든 파리스 뒤에는 전령의 신 헤르메스(메르쿠르)가 제우스가 미의 여신의 선택권을 파리스에게 위임했음을 알리고 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루벤스가 스페인을 여행하던 도중 만난 스페인의 젊은 화가였던 벨라스케스는 마드리드의 필립4세의 궁전화가였는데 로마를 가 본 적은 없었으나 모방자들의 작품을 통해 카라밧지오의 자연주의를 이해하고 있었다. 루벤스의 충고로 거장들의 그림을 연구하기 위해 휴가를 얻어 로마여행을 다녀온 벨라스케스는 그후 줄곧 스페인의 궁정화가로서 활동했다. 벨라스케스는 대범한 터치로 시각적인 인상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사실적인 기법을 동원해 왕족의 초상화를 제작하는 한편 왕실에 소속된 곡예사는 물론 평범한 사람들의 집단 초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의 대표작으로 <시녀들>이 있다. 그의 작품은 15세기의 플랑드르 화가 얀 반 아이크가 그린 <아르놀피니의 약혼>처럼 사진과도 같은 현실의 재현이란 특징을 보여준다. 특히 부모를 만나기 위해 시종들을 데리고 벨라스케스의 작업실로 찾아온 귀여운 마가리타 공주를 주인공으로 그린 이 작품은 작업실에서 모델이 된 국왕부처의 모습이 거울 속에 반영되고 있어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과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켰으며, 미셀 푸코의『말과 사물』의 한 장을 이 작품의 해석으로 할애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반 다이크>

<프란스 할스>젊은 시절 성공하여 부와 명예를 누린 렘브란트가 잇달은 가족의 죽음과 사업의 실패로 쓸쓸한 노년을 보낸 것처럼 네덜란드의 자본주의 체제 아래 성공하였으나 노년엔 가난으로 고통받다 결국 양로원에서 비참하게 최후를 마친 화가였다. 그의 독창적 화풍은 즉흥적이면서 활달한 붓질에서 발견할 수 있는 호방에서 잘 드러나고 있는데 이러한 경향은 붓질을 노출하지 않고 표면 위에 차곡차곡 쌓아올린 네덜란드 회화의 전통을 벗어난 것이었다.


<렘브란트>네덜란드의 라이덴에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렘브란트는 부친의 뜻에 따라 라이덴대학으로 진학하였으나 화가가 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암스텔담의 피터 라스트만의 제자가 되었다. 초상화가로 명성을 얻은 그는 정물화를 제외한 모든 소재의 표현에 탁월하였으며, 특히 빛을 표현한 강한 명암 대비로 극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독자적 구성과 독특한 명암, 깊은 정신미를 통해 독자적 예술 세계를 형성하였다. 종교화, 신화화, 초상화, 풍속화, 풍경화에 능하였는데 물감을 두껍게 발라 그 자체가 빛나는 화면을 만들어 내는 유화 기법의 새로운 면을 보였으며. 에칭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 렘브란트의 경향은 카라밧지오의 영향을 반영하는 전기와 인간심리의 심층을 비추는 깊이있는 초상을 추구한 후기로 나눠진다. 특히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여 내면에 잠재된 심리상태의 미묘한 변화과정을 추적한 많은 자화상을 남겼다. 옆의 작품은 렘브란트가 그린 <십자가를 들어올림>과 <십자가에서 내림>인데 루벤스가 그린 <십자가에서 내림>과 비교해 보면 이 두 작가의 표현의 차이를 알 수 있다.

그의 대표작의 하나인 <야간순찰>은 <툴프박사의 해부학 강의에서 보여준 렘브란트의 예술적 성과를 바로크로 발전시키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으로써 빛의 대조에 의한 원근의 표현이 돋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이 너무도 개성적이고 파격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이후 초상화 주문이 감소했을 뿐만 아니라, 시청에 걸기 위해 잘려지는 불운을 당했으며, 1970년대에는 한 정신병자에 의해 파손되기도 했다. 렘브란트는 화가로서 뿐만 아니라 에칭에서도 명암대비의 극적 효과를 통해 자신의 예술성을 발휘하였으나, 50대로 접어들자마자 파산선고를 받아야 했던 그는 비극적인 말년을 보내었던 대표적인 작가이기도 하다

<야곱 반 로이스달>
<헤다>
<얀 스테엔>

<베르메르>17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네덜란드 화가로서 주로 가정의 조용한 실내에 있는 인물을 그렸다. 당시 풍속을 파악할 수 있는 그의 작품은 일상적 행동의 주인공을 안정된 빛 속에서 마치 정물처럼 표현한 것으로써 그는 빛의 반사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하얀점을 하일라이트로 찍는 독자적인 기법을 창안하였으나 할스처럼 격심한 생활고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진다

베르사유 시대
<니콜라 푸생>프랑스 출신인 니콜라 푸생은 르네상스 고전주의를 흠모하여 평생을 이탈리아에서 지내다시피 했다. 그는 로마를 제2의 고향으로 삼고 거기에서 살며 작품을 제작했는데 순수하고 장엄했던 고대 도시들의 정경을 묘사하기 위해 정열적으로 고전시대의 조각상들을 연구했으며, <아르카디아에 나도 있었다>란 작품은 이러하 노력의 결과로 탄생한 작품이었다.

<루이 르 냉>

로코코 미술
<앙트완 와토>
<시메옹 샤르댕>
<윌리엄 호가스>
<토마스 게인즈보로>

신고전주의 태동
르네상스 시기에 이미 고전은 motive가 되었었지만 바로크의 눈속임(tropme l'oeil)과 로코코의 파상성으로의 타락은 고전적 요소들을 사라지게 했고 루이15세에 이르러 "로코코에 대한 실증" 을 느끼게 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헤르콜라네움(Herculaneum)'과 '폼페이'의 발굴은 고전적 취미를 부추겼으며, 새로이 비약하는 시민계급의 '진보적 이성주의'와 '도덕주의' 그리고 나폴레옹시대의 '영웅주의'의 시대분위기와 맞아떨어지며 고전주의는 부활하게된다.

신고전주의, 혹은 유사고전주의라는 조롱조의 표칭에도 불구하고 고전주의는 조각에서는 '카노바', '우동'에 의해, 회화(역사화와 초상화)에서는 다비드와 앵그르에 의해 구현되고, 빙켈만이 "미술의 본질은 '고귀한 단순성과 조용한 위대함'"이라고 역설한 <그리스 작품들의 모방에 관해서>에 의해 힘을 받앗다.

결과 로코코적 양식은 사라졌으며 곡선은 직선으로, 감가적으로 조직된 표면은 매끈한 조각적 형태로, 파스텔풍은 명확한 윤곽선이 있는 강한 색으로 대체되었고 이라한 고전적 양식은 "true style" "correct style", "Risorgimeuto(재생)"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었다.

(前 다비드의 고전주의 화가와 작품)

∙R.멩스[파르낫소스]-빌라 알바니의 천정 프레스코 :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발굴의 드로잉에 영감을 얻음. 바로크적 눈속임과 깊은 환각적 공간을 거부했다. 푸생을 연상시키는 조각된 부조처럼 인물들을 회화평면에 평평하게 그렸다.

∙벤자민 웨스트[게르마니쿠스의 유해와 함께 브룬디시움에 상륙하는 아그립피아] : 빙켈만개열의 개념을 따랐음이 잘 나타나다. 다비드후기작처럼 box-like의 깊이를 단축시킨 배경, 카라박지오적 광선이 나타난다.//이후에 벤자민의 [울프장군의 죽음]은 고전주의의 완성기. [창백한 말위의 죽음의 신]은 낭만주의의 효시가 된다.

[퀘벡주에서의 울프장군의 죽음]1770 : 울프장군이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처럼 묘사된 영웅주의. 인물의 움직임은 고귀하고 진지하며 표정은 용감스럽다. 앞에 있는 인디언은 미대륙이라는 현장을 보여주고 있고, 주변사람들은 지옷토의 그리스도의 애도와 유사한 모습으로 서있다.

∙존 싱글턴 코플리 [왓슨과 상어]1778 : 상어는 악, 우상기의 창을 든 남자는 선을 상징하는듯하고, 습격당하는 젊은이는 나신(고전적)이다. 마찬가지로 뒤의 흑인은 미국을 상징한다.

∙자크 루이 다비드[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 호라티우스 형제는 로마의 개국자이다. 프랑스 혁명 5년전에 그려진 이그림은 다가올 혁명의 정신을 예고한 작품이라 평가받고 있으며 혁명전야의 정신적 풍토를 반영한 작품으로 발표당시 열광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소크라테스의 죽음]1784 : 위와 마찬가지로 혁명전야의 정신을 반영한 작품. 독배를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소크라테스의 자기 희생정신이 새시대를 맞이하려는 당시의 프랑스의 정신적 풍조를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스승의 죽음을 슬퍼하는 제자는 12명이 그려져 예수의 제자 12인을 유의적으로 표현 죽음을 숭고화시키고 있고, 한쪽으로 비춰지는 극적인 조명이 극적 효과를 준다. 소크라테스의 침상 앞에 앉은 플라톤은 엔디미온(18,19세기 유행하던 무덤앞 조각으로 죽음을 상징)과 같은 형상으로 앉아있다. //이성신앙의 창시자=소크라테스≒예수. 죽음을 앞두고 슬퍼하는 제자들≒12제자//

[마라의 죽음]혁명동지의 죽음이라는 역사적 현실을 직시하는 다비드의 새로운 면모가 보이는 작품. 불필요한 소재를 극도로 생략한 화면은 간결하면서 극적이며 진실감과 긴장감이 흐른다. 영웅인물화의 수작

[뤽상부르 정원의 풍경]1794년 로베스삐에르의 실각으로 투옥된후에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고그린 풍경화억제된 색조이기는 하나, 자연의 미묘한 변화와 그 변화에 따른 광선의 효과 포착은 뤽상부르의 한적함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작가의 심정을 여과없이 표출한다. 풍경화의 모태가 되는 자연주의적 성향의 범례다.

[사비나의 여인들]사비나의 여인 약탈이라는 로마의 건국전설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동족상잔의 혁명의 비극을 염두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비드의 그림의 커다란 변화가 보이는 작품인데, 그리의 원천으로 되돌아 가려한다는 그의 말에 일목요연하게 이 변화는 나타난다.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미완성인 작품이었는데 오히려 필촉을 제거하지않음이 주는 생동감이 작품을 더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게 하고 있다.

[나폴레옹의 대관식]세밀한 연구의 바탕에서 이루어진 대작이다. 집단초상화와도 같은 인물 묘출의 정확함과 호화로운 질감의 생생함, 그리고 장엄한 실내의 분위기가 완벽하게 일치를 이루어 역사적 기록화의 거대한 기념비적인 작품이 됨.

∙ 쟝 오귀스트 도미니끄 앵그르 : 다비드가 브뤼셀로 망명한 후 실질적으로 신고전주의를 영도한 화가. 다비드의 신고전주의가 '혁명적, 남성적'양식이라면, 앵그르의 그것은 '부르주아적, 여성적'양식이라고 할 수있다. 유연한 선의 율동을 바탕으로한 이상적인 형태미의 형상화에 있으며, 그것을 그는 특히 여체의 순수한 아름다움에서 찾으려 했다.

※앵그르 활동 시기중에 사진기가 발명된다. 사진기의 발명은 회화에 있어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던 역사화와 인물화의 영역, 즉 기록화의 영역을 사진이 뺏아가게 하는데 그러한 이유 뿐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초상화가는 앵그르가 마지막이 되게 된다. 아래의 배르탱의 초상화가 대표적인 예가 되겠지만 초상화가 단순히 닮게 그리는 것이 아닌 성격과 품성을 담는 다는 의미에서 그의 초상화를 위한 많은 데생들이 많은 것을 시사하지만 후에 그의 제자들은 카메라와의 기술경쟁이라는 쓸모없는 소모전에 보다 많은 노력을 들이게 된다.

[배르탱의 초상]배르탱은 당시 '논쟁신문'을 발행하던 혁명기의 영향력있는 거물이었다.철저히 사실주의에 입각한 초상이면서 동시에 모델의 신분과 그 사회적 배경을 강하게 표출시켜 하나의 전형적인 남성상을 그려내고 있다. 포우즈에 고심하였던 흔적이 스케치들로 전해진다.

※기타, 리비엘양의 초상, 르블랑 부인의 초상, 도송빌 백작 부인의 초상, 등이 유명

[호메로스 예찬]

[발팽송의 욕녀]우아하고 후루눈 듯한 선의 아름다움, 이상화한 여성미와 그 관능성을 추구한 '여성적' 신고전주의. 작품의 전체구도는 매우 강렬하면서도 정연하고 나부는 등을 동리고 앉은 포즈로 다루어지는데 포즈가 엮어내는 선과 형태는 철저히 계산된 것이다.

[오달리스크]해부학적 진실을 양식적 아름다움과 곡선을 위해 포기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정상인 보다 척추뼈가 2개 더 있는 여체는 등에서 엉덩이로 이어지는 유연한 선을 만들어 율동적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제목에서 보여주듯 이국적 주제의 사용과 파충류를 연상시키는 여체로 인해 논란을 불러 일으킨 작품

[샘]여체의 전형화된 앵그르적 신고전주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 이 젊은 여성상은 고대의 여신상을 방불케한다. 그리스의 고전기의 정형화된 이상미의 여성?

[터어키 욕탕]앵그르가 여태껏 다뤄온 갖가지 포우즈가 다 동원된작품. 에로티시즘이 세계가 아니라, 일종의 추상화된 여성의 관능성. 서로 복잡한 상호관계를 설정하면서, 선과 형태의 일대 아라베스크를 펼쳐보인다.


∙ 앙트완 장 그로 : 다비드를 능가하는 기상넘치는 영웅적 초상화를 그렸다. 다비드는 그로가 자신의 대를 잇기를 원했고, 그로또한 다비드를 존경했지만 바로크로 전향했고, 엄격하게 통제된 신고전주의의 감정억제를 벗어나고자 했다. [아르콜전장의 나풀래옹]드라마틱한 박력이 넘치는 그림

낭만주의의 태동
이성중심, 엄격성의 고전주의는 프랑스 혁명의 자유, 개성의 해방을 포용할 수 없는 양식이며, 따라서 새로운 양식상의 변화를 요구하게 된다. 보다 '자연스럽게'를 외치면서 강력한 열기로 고전주의에 도전한 낭만주의는 자연으로 대변되는 모든것을 추종했고, 이는 실제로는 정서, 감성 그 자체를 숭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예술가를 둘러싼 경제적 환경의 변화와도 그 궤적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는데 고정돤 후원자와 수익보다 시장에 의한 작품의 수급은 경제적으로 예술가를 불안정하게 하긴 했지만 보다 많은 자유를 그들에게 보장해 주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그들은 루카치식으로 표현하자면 이성의 지배로부터 예술의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신고전주의예술이 이성과 동일시 혹은 이성중심을 변호하는 도구로서의 예술이었다면, 낭만주의 예술은 감정과 동일시된다.이 낭만주의적 사조는 그것이 담지하고 있는 주관주의적 성격과 개인의 자율성에 대한 인식 때문에 18,19세기 예술가들의 생에 대한 태도 및 예술표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낭만주의의 시효
∙벤자민 웨스트 [창백한 말 위의 죽음의 신] : E. Burke 의 '숭고와 미의 개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고찰'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 끔찍한 숭고미, 오히려 아름다움에 반대되는듯한 것을 표현했다. 우르르 몰려오는 의인화된 죽음의 신에 다항하여 투쟁하는 한가족이 주제인 이 그림은 시기상으로 낭만주의 흐름에 40여년 앞서지만 후에 'Burke'의 개념을 따른 낭만주의 초기화가들과 같은 위치에서 파악해야 할 것이다.

∙W.블레이크 [천지창조주] / 스텁스 [말을 덮치는 사자] / 퓨슬리 [악몽] / 카즌즈 [잉크얼룩에 이한 풍경화]

∙ 테오도르 제리코 : 프랑스 낭만주의 회화의 선구자. 낭만주의에 가장 어울리는 소재로 여겨진 말과 기병, 이국적 풍경을 많이 그렸으며, 메뒤즈호의 뗏목은 프랑스에서의 낭만주의회화의 분화구로 간주된다. 한편으로는 사실주의를 앞질러 구현하기도 한다. 낙마로 33세에 요절.

[근위 기병 사관]낭만주의에 있어서 안성맞춤의 테마. 전쟁의 박진감넘치는 기병의 동작과 군마의 약동감이 생동감을 자아낸다.

[메뒤즈호의 뗏목]대표작. 미켈란젤로의 영향이 눈에 보이는 인체처리와 화면의 구성은 피라미드형의 고전적 도형이다. 당시의 시사적 논란거리를 소재로 해서 비판적으로 담아내어 사실주의의 요소또한 담고있다.

[살인광과 광녀]/Fou Assassin/La Folle/ 인간의 본성에 대한 관심과 이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을 볼 수 있는 작품. 제리코는 인간성 그 자체에 대해 신랄한 고발을 하고 있는 듯하며, 그와 같은 인간 고발이 역설적으로 이 화가의 삶에 대한 정열적인 애착을 반증해주고 있다. 낭만파이자 사실파로서의 면모가 보이는 작품

[에프손 경마] 그가 즐기는 말을 소재로한 작품이며 날렵한 생명감과 투명한 채색법 등이 낭만파적 요소를 옅보게 한다. 후대에 이 그림의 말이 달리는 모습이 잘못됐음이 지적되기도 했다.

∙ 외젠 들라크르와 : 낭만파회화를 완성시킨 거장.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상] 이른바 영광의 3일이라고 불리는 7월 27, 28, 29일의 프랑스 혁명을 담은 그림이다. 3색기를 높이처들고 왼손에는 총을 들고 가슴을 드러내고 지상에 굳건히 서잇는 여인은 그림속 장면에 실재하는지 환상인지 알 수 없도록 배치되어 있다. 부상자의 눈은 그녀를 향하고 있으나 진두 지휘하는 듯한 그녀의 몸동작과는 달리 군중들의 시선은 그녀에 모여있지 않다. 다분히 우의적 존재인것이다.

[키오스 섬의 학살] 들라크르와의 대표작. 프랑스 낭만주의의 도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작품. 앤그르의 [루이13세의 맹세]와 같은 해에 살롱에 걸려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당연 비난은 맹렬했다. 1822년 그리스 독립선언이라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그리스인에 대한 학살을 담은 그림이다. 격렬한 동세와 착잡하게 얽히는 곡선, 일찌기 볼 수 없었던 색채가 나타난다.

[이교도 파샤의 싸움] 낭만주의에 나타나는 이국적 정취가 잘 나타나는 작품.

∙프란시스 고야
[카를로스 4세의 가족]
[옷을입은/벗은 마호]
[거인]
[1808년 5월 3일]


∙오노레 도미에
∙카미유 코로
∙존 컨스터블
∙터너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조각
<장 앙트완 우동>
<안토니오 카노바>
<뤼드>
<카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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